패션도 이론인가요?

                            야나기 렌지 드림

 

 

  “렌지는 옷 어디서 사 입어?”

 

  뜬금없이 튀어나온 말 같았지만 주의를 환기하기에는 충분했다. 가볍게 차를 홀짝이던 야나기가 고개를 들어 세라를 보았다. 세라 역시 그를 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입고 있는 셔츠를.

  직장인의 교복이라고도 할 수 있는 셔츠였다. 새하얗고 말끔한 데다 옷깃도 똑바르게 서 있는 점이 그다웠다. 특별한 무늬도 없고, 단추조차도 그저 하얗기만 했다. 새로 산 옷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빛나는지라, 무심코 그런 질문이 입 밖으로 나가버린 것이었다.

 

  “백화점에 갈 때도 있고, 의류매장에 갈 때도 있다.”

  “흐음…… 그 옷도 새로 샀어?”

  “아니, 이건 원래 입던 옷이다만.”

 

  대체 어떻게 빨아야 밤새 소복이 쌓인 눈 같아지는 걸까?

  연이어 떠오르는 질문은 마음 한구석에 제쳐두었다. 셔츠 대신 얼굴을 마주하자 평온하던 야나기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이상하다면 개의치 말고 지적해줘도 좋아. 패션에는 자신이 없거든.”

  “아니, 잘 어울려. 근데 항상 비슷한 옷만 입으니까……

  “그럼 같이 옷이라도 보러 가는 건 어떤가?”

 

  야나기의 입에서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말인지라, 세라는 잠시 입을 벌린 채로 멈춰 있었다. 보기 드물게 당황한 표정이 신기했는데, 뜻밖의 제안을 하는 순간에는 평소와 같이 진지했다. 차갑고 예리하지만 차분하고 예쁜 얼굴에 새삼스레 감탄했다. 문득, 상대방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그제야 슬쩍 시선을 피한 세라는 벙한 표정을 가다듬었다.

 

  “의외라고 생각했을 확률 구십팔 점 삼 퍼센트.”

  “그야, 딱히 관심 없는 줄 알았단 말이야.”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똑같은 법이니까. 이 기회에 세라의 취향도 알게 되면 일석이조겠지.”

 

  그 담백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단어들을 읊조리면 꼭 어딘가의 전공 서적에 나오는 논리적인 말처럼 느껴져서, 세라는 조금 늦게 볼이 달아올랐다. 세라가 매번 데이트를 앞두고 옷장을 몇 번씩 열면서 고민하듯, 야나기도 그런다는 게 기뻤다. 그리고 그 감정이 어쩐지 수줍어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그럼 내가 골라주는 옷 다 입을 거야?”

  “원한다면.”

 

  자기도 모르게 함박웃음이 피어올랐다. 지체할 것이 없었다. 세라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연하게도, 야나기는 놀라는 기색 없이 따라 일어났다. 무엇이든 금방 예측하는 남자친구가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이건 답례로 받아줘.”

 

  옷을 보러 가자고 했을 때부터 이 남자는 이럴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지금 깨달은 탓에 세라는 좀 분했다. 야나기에게 옷 선물을 할 생각이었는데 도리어 제 손에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야나기는 말을 꺼낸 사람답게, 세라가 추천하는 옷은 전부 입어보았다. 얇은 니트와 목폴라 티부터 후드 티셔츠에 청재킷, 카디건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세라는 그중에 제일 잘 어울리는 두 가지를 속으로 점찍어 놨었다. 매장을 나서기 전에 야나기 몰래 사서 선물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데이터를 파악하는 게 인생이자 취미인 남자친구에게 몰래는 통하지 않았다. 분명 티도 내지 않았건만, 이미 야나기는 그 옷 두 벌을 결제한 뒤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선물하려고 했다며 부루퉁하니 입술을 내미는 세라를 달래서 자연스레 여성복 매장으로 데리고 갔다. 야나기의 말대로, 애인의 취향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세라도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선물을 받을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아무튼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저한 사람이었다.

 

  “내가 선물할 생각이었는데 치사해. 자기만 선물하고.”

  “오늘만큼은 내가 선물하고 싶어서 수를 썼으니 부디 용서해.”

 

  성실하게 사과하는 모습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평소에 보이던 예리한 눈빛은 어디로 가고, 누구보다도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것에도 약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에게 그런 표정을 보여준다는 사실이 좋았다. 세라는 뾰로통했던 마음을 살짝 누그러뜨리고 제 앞에 서 있는 야나기를 보았다.

 

  “근데 왜 오늘이야?”

 

  음. 짧은 소리만 내뱉고 야나기는 금방 대답하지 않았다. 어떻게 대답할지 고민하는 것 같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부끄러워 보이기도 했다. 덩달아 부끄러워지기 시작한 세라가 막 손사래를 치려던 순간이었다.

 

  “세라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식한 날이다.”

 

  정말이지, 용서하지 않을 수가 없는 대답이었다.

 

 

 

비 오는 날의 창가

                            유키무라 세이이치 드림

 

 

  빗줄기가 후드득 창문을 때렸다. 정말이지 시원하게 쏟아지는 비였다. 속으로 기상청을 몇 번이고 욕하며, 히요리는 창가에 서 있었다. 어깨 위로 걸친 큰 카디건과 손에 쥔 머그잔 덕에 한기는 가셨지만 짜증은 났다. 창 틈새로 스멀스멀 들어오는 찬 공기와 비 냄새가 싫었다. 딱히 비 오는 날이 싫어서는 아니었다.

  피크닉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꽃놀이는 사정이 달랐다. 흐드러지게 핀 꽃을 보면서 나란히 앉아 따뜻한 햇볕을 즐기는 데이트는 좋아했다. 그래서 일부러 옷도 편안하게(하지만 예쁘게) 입었다. 기대하던 날이라 머리를 세팅하는 데에도 힘을 많이 들였다. 그런데 약속 장소에서 만난 지 5분도 채 되지 않아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산을 펼쳐 들고 기다려 봐도 비는 영 그칠 것 같지 않았다. 결국 꽃놀이는 다음에 하는 게 낫겠다며 유키무라가 먼저 히요리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지금. 히요리는 유키무라의 집에 있었고, 유키무라의 카디건을 걸친 상태로 유키무라가 타준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집에서 느긋한 하루를 보내는 것도 물론 좋은 데이트였다. 다만, 몇 주 전부터 계획해 놓은 일정이 통째로 어그러지면 도저히 좋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절로 한숨이 푹 새어 나왔다. 손가락으로 애꿎은 머리카락 끄트머리를 붙잡고 빙빙 돌렸다. 우산 하나로 폭우를 뚫고 오는 동안 착 가라앉은 머리가 거슬렸다.

 

  “히요리.”

 

  유키무라는 한쪽 어깨가 다 젖어버린 셔츠 대신 얇은 니트를 입고 있었다. 수건으로 물기만 대충 닦아냈는지 남색 머리카락이 더 짙어 보였다. 그 역시 한 손에 히요리가 든 것과 똑같은 머그잔을 쥐고 있었다. 은은하게 퍼지는 향이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방 안의 공기가 한층 더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추운데 왜 창가에 서 있어.”

 

  히요리가 다가오는 유키무라를 향해 손을 내밀자 자연스레 그 손을 맞잡아왔다. 히요리의 손이 찬 공기에 서늘해진 탓인지 유키무라의 손은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냥.”

  “해가 쨍쨍해서 따뜻한 날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히요리의 볼이 부풀어 올랐다. 유키무라는 항상 남의 속을 알면서도 아닌 척 말을 건넸다. 손바닥 위에 놓인 듯한 기분이 들어 짜증 나고 재수도 없었지만(진심이다) 히요리는 그런 유키무라를 좋아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차를 홀짝이던 유키무라가 히요리의 시선을 느꼈는지 시선을 마주쳐왔다. 히요리는 홱 고개를 돌려 창밖을 쳐다보았다.

 

  “짜증 나.”

  “그러네. 꽃놀이하고 싶었는데.”

 

  너한테 한 소리기도 하거든?

  알면서도 무시한 게 분명했지만 굳이 그 부분을 다시 짚지는 않았다. 여전히 세차게 쏟아지는 비 때문에 짜증이 나기 시작한 게 맞기 때문이었다.

 

  “이게 뭐야. 머리도 엄청 예쁘게 했는데.”
  “응. 엄청 예뻤는데 아깝다.”
  “뭐야, 지금은 안 예쁘다고?”

 

  평소였으면 알면 됐다며 풋 웃어버릴 말이었지만 짜증으로 일렁이는 가슴을 잠재우기엔 모자랐다. 뾰로통한 표정에도 유키무라는 그저 웃기만 했다. 울컥 올라오는 감정에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유키무라가 먼저 입을 뗐다.

 

  “넌 늘 예뻐. 하지만 정성 들여서 세팅한 머리는 더 예뻤지. 겨우 오 분만 보기는 아까울 만큼.”
  “너 진짜 독심술 할 수 있지?”
  “설마.”

 

  여자의 심리를 잘 아는 건지, 그냥 사람 심리는 다 잘 아는 건지, 아니면 나를 잘 아는 건지.

  있는 힘껏 유키무라를 쏘아 보던 히요리가 결국 한층 풀어진 마음으로 몸을 기대었다. 자연스레 풀어낸 손으로 허리를 감싸는 손길이 싫지 않았다. 밖이 어두워진 탓에 창문에 아른아른 비치는 유키무라의 표정이 더없이 즐거워 보이는 것도 싫지 않았다.

 

  “아쉽지만 꽃놀이 일정은 새로 짜자. 오늘은 이대로 집에서 놀고.”

 

  그래, 꽃이 하루 만에 다 져 버릴 것도 아니고.

 

  “뭐 해줄 건데?”

  “글쎄, 뭘 해주면 좋아하려나?”

 

  웃음기가 섞인 질문에 왠지 심통이 났다. 머그잔을 탁 소리 나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히요리는 유키무라의 품을 파고들었다. 등 뒤로 똑같이 탁 소리가 울렸다.

 

  “맛있는 거 먹여주고, 디저트도 먹여주고, 안아주고 예쁘다 예쁘다 해줘.”

  “욕심쟁이네.”

  “이렇게 예쁜 내가 사귀어주는데 당연히 해줘야지.”

  “후후, 이렇게 예쁘니 어쩔 수 없지.”

 

 

 

후지 생일 합작

 

함께 해주신 분들의 합작은 이쪽에

https://fujihappybirthday.wixsite.com/loveyou/

 

 

 

 

  “슈스케, 내일 저녁 먹고 온댔나?”

  “, 그럴 거야.”

  “다 컸다~ 이제 생일날 친구들이랑 밥 먹네.”

 

  풋 웃는 누나에게 후지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누나의 말대로 크진 않았을지라도, 어느 정도 크긴 했을 것이다. 중학교에 입학한 지 3. 마지막 기말시험까지 마친 3학년들에게 남은 행사는 졸업식뿐이었다.

  올해는 좀 더 특별했다. 기말시험이 끝난 다음 날, 그러니까 내일은 4년에 한 번 돌아오는 229일이자 후지의 생일이었다. 이런 경사스러운 기념일을 친구들이 지나갈 리 없었다. 시험 일정이 안 겹친다면서 제일 기뻐한 키쿠마루를 시작으로, 모두가 한 마디씩 거들면서 생일 파티 계획이 생겼다. 여기에 기합이 잔뜩 들어간 모모시로와 카이도까지 합류하면서 언제나의 그 멤버들이 모이게 되었다. 무뚝뚝한 몇 마디를 추가해줄 후배 한 명이 모자란 건 아쉬웠지만, 후지로서는 매우 기뻤다.

 

  “밤에는 아버지랑 유타도 온댔으니까 너무 늦지 말고.”

  “알았어.”

 

  잘 자라는 인사를 덧붙이고, 후지는 방으로 돌아왔다. 어쩐지 가슴이 술렁였다. 해마다 맞는 생일이었지만(비록 28일에 치르긴 했지만, 어쨌든 생일은 해마다 축하받았다) 졸업을 앞둬서 그런지 싱숭생숭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3년 동안 테니스부에서는 많은 추억을 쌓았다. 그리고 마지막인 올해는 전국 우승이라는 커다란 성과도 이룰 수 있었다. 많은 것들이 변했다. 즐기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언젠가부터 후지는 팀메이트와 마찬가지로 승리를 바라게 되었다. 함께 이기고 싶었고, 바통을 뒷사람에게 넘겨주고 싶었다. 더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결심도 이 팀과 함께였기에 가능했다.

  제게 일어난 이 사소하고도 큰 변화를 알기에, 후지는 졸업이 아쉬웠다. 연락을 주고받고 만나는 정도야 앞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겠지만, 함께 팀이 되어 같은 골인 지점을 향해 걷는 일은 없을 것이다.

  후지는 한숨을 크게 뱉어냈다. 무엇이든 한정된 시간이기에 더욱 소중한 법이었다.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면 현재 주어진 시간을 알차게 보내는 수밖에 없다. 후지 슈스케는 후회를 하는 타입이 아니었고, 그런 걸 남기는 것도 원치 않았다. 졸업식까지는 약 보름이 남아 있었다. 내일 있을 생일 파티도 그사이에 만들게 될 소중한 추억이었다. 머리가 상쾌해진 후지는 그대로 침대에 올랐다.

 

*

 

  이러려고 부 활동 쉰다고 했구나.

  3학년의 활동은 여름의 전국대회를 기점으로 사실상 끝났다. 아직 테즈카가 부장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긴 했지만, 현재의 세이가쿠 테니스부를 이끄는 사람은 카이도였다. 늘 하던 연습을 쉰다기에 아예 놀러 나가기라도 하려나 보다 생각했던 후지는, 테니스장 입구에서 펄럭이는 현수막을 보고 멈춰서고 말았다. ‘세이슌 학원 후지 슈스케의 생일을 축하합니다.’라는 아주 정직한 현수막은 아무래도 직접 글씨를 쓴 모양인지 글자마다 크기가 제각각이었다. 삐뚤빼뚤한 글씨는 아마도 키쿠마루, 그 옆에 정자체로 글자마저 올바른 게 오오이시, 투박하고 커다란 글씨는 카와무라…… 시원시원하게 큼지막한 글자는 모모시로일 테고, 급하게 쓰지 않으려고 꾹꾹 눌러쓴 흔적이 보이는 글자는 이누이 같았다. 글씨 교본 책에 나올 것처럼 아주 정갈한 카이도의 글씨에 이어, 마지막 글자는 선생님의 칠판 글씨 같아 보이니 테즈카의 글씨가 분명했다. 글씨체도 참 성격을 따라가는 모양이었다.

 

  “생일 축하해, 후지!”

 

  제 옆에서 함께 걷던 키쿠마루가 큰소리로 외치는 것과 동시에 테니스장 안쪽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씩 나타났다.

 

  “여길 파티장으로 쓰려고 쉰 거야?”

  “, ……. 선배들이 생일 축하 파티는 기왕이면 여기서 하고 싶다고 하셔서.”

 

  묻지 않고도 후지는 그 의견을 제일 처음 낸 사람이 키쿠마루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씨익 웃으며 후지를 재촉하는 표정에 이미 답이 있었다. 테니스장으로 들어서자 코트 한가운데 서 있는 오오이시가 보였다. 케이크를 든 그의 표정이 환하게 빛났다.

 

  “생일 축하해, 후지.”

  “고마워. 준비를 많이 했나 보네.”

  “하하, 졸업 전에 챙길 수 있는 마지막 생일이잖아. 다들 엄청 아이디어를 많이 냈어.”

 

  테니스장 여기저기를 장식한 풍선은 카와무라의 작품인 듯했다. 후지가 온 것도 눈치채지 못했는지, 카와무라는 후지에게 등을 보인 채 무언가에 열중한 상태였다.

 

  “후지, 오늘은 널 위해 신작 이누이즙을 준비했는데.”

  “그거 기대되는걸.”

 

  주변인들의 표정이 모두 굳었지만 후지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실제로 그는 청초처럼 신 계열이 아니라면 이누이즙에는 강했다. 이누이가 신작을 만들 때마다 무슨 맛이 날지 기대도 되었다. 순수하게, 후지는 이누이즙이라는 선물이 기뻤다.

 

  “후지의 평소 습관이나 음식 취향을 고려했을 때, 더 필요한 영양소는……

  “, 생일날까지 그런 어려운 얘기 하지 말자고요! 맛있는 것도 잔뜩 준비해놨는데!”

 

  모모시로의 제지에도 이누이는 계속 말을 이을 기세였지만, 키쿠마루가 번쩍 손을 들어 이누이의 입을 막았다. 떼어내려는 이누이와 절대 손을 떼지 않는 키쿠마루, 그리고 마찬가지로 딱 붙어서 키쿠마루를 돕고 있는 모모시로에 손에 든 케이크 때문에 어쩌질 못하고 말로 두 사람을 말리는 오오이시까지, 익숙한 풍경에 후지는 풋 웃음이 터졌다.

 

  “됐다! , 후지!”

  “타카상, 뭘 하느라 그렇게 집중했어?”

  “, 이거! 거의 다 했는데 마지막에 터뜨리는 바람에 다시 만드느라……

 

  카와무라가 내민 것은 풍선이었다. 정확히는 척 봐도 미니 선인장 화분처럼 생긴 풍선아트였다. 풍선아트라니,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선물을 받아들고 후지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정말 고마워. 이건 예상 밖이네.”

  “풍선을 사러 갔더니 마침 옆에 선인장 만들어놓은 게 전시되어 있었거든.”

 

  만드는 법을 배우고 있을 카와무라의 모습이 머릿속에 자연스레 그려졌다. 투박한 손이지만 초밥을 쥐는 손인 만큼 섬세하게 풍선을 다루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부실로 슬슬 들어가죠. 부장이…… 테즈카 선배가 기다립니다.”

 

  입에 붙지 않은 호칭 때문인지 카이도의 표정이 미묘했다. 그제야 겨우 실랑이를 멈춘 세 사람도 그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후지는 약 보름 뒤에 이별하게 될 부실의 앞에 섰다. 늘 아무렇지 않게 열었던 문이 새삼 특별했다. 문고리에 손을 얹고 천천히 돌렸다.

  부실은 깨끗했다. 풍선 몇 개가 창문을 장식했고, 그 밑에 밖에 걸린 것과 마찬가지로 손을 직접 쓴 작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음료수와 과자, 파이 등 다양한 간식거리가 가득했다. 부실을 비추는 오후 햇살 속에 테즈카가 서 있었다.

 

  “생일 축하한다, 후지.”

  “고마워, 테즈카. 그건 뭐야?”

 

  둘둘 말아서 리본까지 묶어놓은 종이가 후지의 시선을 끌었다. 테즈카는 그 종이를 후지에게 내밀었다. 왠지, 그는 웃고 있었던 것 같았다.

 

  “부원들이 롤링 페이퍼를 작성했다. 류자키 선생님께도 한 마디를 부탁드렸고.”

  “그건 어마어마한 선물인데.”

  “에이, 진짜 선물은 따로 준비했죠! 저는 먹을 거!”

 

  싱글벙글 웃는 모모시로를 시작으로 선물 증정 타임이 시작되었다. 모모시로는 동네에서 가장 맛있기로 소문난 빵집의 파이를 들고 왔고, 테즈카는 고심해서 고른 게 눈에 선한 선인장용 분갈이 흙을 선물했다. 카이도는 어떻게 알았는지(아마 이누이가 정보의 출처겠지만) 앤티크 식기를 내밀었고, 카와무라는 취향일지 모르겠다면서 재즈 음반을 주었다. 이누이는 얼마 전 새로 나왔다는 선인장 관련 책과 함께 이누이즙(“선배, 그건 선물이 아니잖아요!”)을 선물했다. 오오이시와 키쿠마루에게는 카메라를 받았다. 가격 때문에 고민하던 두 사람이 서로에게 상담하다가 같은 선물을 준비하려던 걸 알고 함께 돈을 모아 준비했다는 이야기는 덤이었다.

 

  “너무 많이 받은 것 같은데.”

  “생일이잖아! 하루 정도는 그래도 된다냥!”

  “그래, 후지. 생일이잖아.”

  “케이크에 불 켜는 것도 잊으면 안 되지.”

 

  오오이시가 색색의 초를 케이크에 꽂았다. 후지는 그 초를 보면서, 16살의 첫날을 이곳에서 이 사람들과 함께 보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후지 슈스케는 지금 더없이 즐거웠고, 행복했다.

  성냥으로 불을 붙이자 분위기가 완벽해졌다. 누군가가 자연스럽게 부실의 불을 껐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 때문에 부실은 여전히 밝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신호라도 준 것처럼 동시에 해피 버스데이 노래가 시작되었고, 그 마무리에 맞추어 후지도 촛불을 불었다. 이미 들었던 축하 인사를 또 들으면서 후지는 웃었다.

 

  “그럼 여기서 서프라이즈 선물을 공개해야겠군.”

  “서프라이즈?”

 

  이누이의 말에야 겨우 부실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노트북이 눈에 들어왔다. 몇 번 달칵거리는 소리가 난 뒤, 이누이가 옆으로 비켜섰다.

 

  「이거 어색한데. , , 후지 선배, 생일 축하해요. 선배들이 이런 걸 찍으라고 해서…… , 웃지 말라고요. 다음에 가면 나랑 꼭 승부 내기에요. 그땐 무슨 일이 있어도 중간에 그만 안 둘 테니까. ……아무튼 생일 축하해요.

 

  누군가에게 촬영을 부탁한 모양인지 에치젠의 말 뒤로 웃는 소리가 함께 녹화되어 있었다. 여전히 테니스 생각밖에 없는 건방진 후배의 모습에 후지는 또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오자마자 에치젠이랑 시합하려면 나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는걸.”

  “! 그럼 이거 먹고 테니스 칠까냥?”

  “하하, 다들 테니스 생각밖에 없구나.”

  “그러지 말고 타카상도 같이 하면 어때? 후지랑 간만에 더블스 상대를 해주면 좋겠는데.”

  “오오, 찬성입니다, 찬성이에요! 그럼 카이도, 넌 나랑 붙자!”

  “.”

  “그럼 내 대전 상대는 테즈카가 되는군.”

  “아직 한다고는 말하지 않았다만.”

 

  평소와 똑같은 흐름이었다. 그래도 싫지 않았다. 간밤에 느낀 아쉬움이나 술렁거림은 아무 데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몇 년이 흐르든, 몇 십 년이 흐르든 이 사람들과는 늘 이런 대화를 나눌 것 같았다.

 

  “후후, 좋아. 일단 케이크부터 먹고.”

  “좋아, 그럼 먹을 준비부터 해볼까?”

 

  오오이시의 한 마디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두의 표정이 즐거워 보였다. 세이슌 중학교에서 보내는 2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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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에 한 번뿐인 생일을 축하하며.

 

내게 테니프리의 시작이었던 사람이자

내 꼬맹이의 영원한 연인.

 

후지 슈스케, 생일 축하해 :)

 

 

 

 

푸른 달과 함께 걷는 길

 

- 창월의 장 기준 EP.13 재회의 여명 ~ EP.18 왕의 개선

- 실뱅이 선생님과 속얘기 하는 내용밖에 없습니다

- 소꿉친구 중심 이야기

 

 

  “이게 얼마 만이냐.”

 

  대수도원 건물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저곳이 무너져 내리긴 했지만, 여전히 웅장한 자태였다. 실뱅은 고개를 불쑥 들었다. 파란 하늘에 페가수스 한 마리가 둥둥 떠 있었다. 혼자만 감상에 젖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뒤, 그는 또 다른 동행자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이야, 펠릭스, 그때 생각나? 내가 항상 안 나가겠다는 널 끌고……

  “시시한 옛날얘기나 떠들러 온 게 아닐 텐데.”

  “동창회잖아, 동창회. 이런 날은 옛날얘기로 꽃을 피워야 제맛이지. 안 그래, 잉그리트?”

  “왠지 전하와 선생님도 계실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진짜 시시한 말을 하고 앉았군.”

 

  쯧, 혀를 찬 펠릭스가 휙 앞서나갔다. 하하 웃긴 했지만 실뱅은 잉그리트의 말이 시시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헛될 뿐이었다. 포기가 빠른 편은 아니었지만, 이 문제에는 그러한 답 외에는 찾을 수 없었다. 어릴 적부터 보아온 소꿉친구도, 신기하게 사람의 마음을 여는 재주가 있던 선생님도 이제는 없었다. 5년 전, 제국이 전쟁을 일으킨 이후로 세상엔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실뱅의 세상 또한 변했다.

  천천히 말을 몰면서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빙빙 돌고 있던 잉그리트가 페가수스를 몰고 훅 날아갔다. 동창을 발견한 모양이라고 멋대로 단정한 실뱅은 고삐를 고쳐 쥐었다.

 

  “혼자 막 가버리네. 따라가자, 펠릭스.”

  “.”

 

  코웃음을 치면서도 펠릭스는 착실하게 속도를 올렸다. 아까보다 훨씬 작게 보이는 페가수스를 눈으로 좇으며 실뱅도 그 뒤를 따라갔다. 대수도원의 정문 방향과 약간 틀어진 탓에 신경이 쓰였다.

  그쪽에 뭐가 있더라?

  펠릭스가 기억하고 있을까 입을 떼려는 찰나였다. 순식간에 몸집을 키운 페가수스가 어느새 그들의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잉그리트의 얼굴은 경악에 물들어 있었다.

 

  “저기에…… 저기, 저쪽에……

  “뭐야, 귀신이라도 봤어?”

  “, 선생님이랑전하가누군가랑 싸우고 있어.”

 

  실뱅은 미간을 찌푸렸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것 같았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뭐라고 말을 하고 싶은데 입을 열면 숨이 턱 막힐 것만 같았다.

 

  “어이가 없군. 착각을 해도 어떻게……

  “아니야, 그 머리색을 어떻게 착각해? 선생님이 아닐 리가 없어. 그건 분명 선생님이야. 그리고 그 몸집에 창을 쓰는 솜씨 하며, 분명히 전하라고.”

  “진짜 뭘 잘못 먹기라도 했나 보군.”

 

  펠릭스의 말에 겨우 정신이 들었다. 실뱅은 씨익 웃었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장난스럽게, 밝게 웃었다.

 

  “가서 확인해보자고. 진짜면 감사한 일이고, 아니어도 어쩔 수 없지. 그리고 누구랑 싸우고 있다며? 도와줘야 할지도 몰라.”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잊은 듯한 잉그리트가 급하게 다시 날아올랐다. 실뱅도, 펠릭스도 급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날아가는 속도에 맞추느라 한껏 말을 재촉했다.

 

*

 

  “선생님…… 역시 살아 계셨군요……!”

 

  잉그리트가 굳이 말하지 않았더라도 실뱅은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머리색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 몇 안 되고, 그중 하나는 선생님이었다. 손에 쥔 검 또한 그들이 익숙하게 보아온 천제의 검이었다. 심지어 옆에 선 사람은 정말로 디미트리 전하였다. 아무렇게나 자라서 엉망이 된 머리도, 눈 한쪽을 가리고 있는 검은 안대도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잉그리트의 말이 맞았다. 그런 덩치에 그렇게 창을 쓰는 사람은, 그것도 성인 남성으로 보이는 상대방을 짐짝처럼 휙 들어다 집어던지는 괴력의 소유자는 세상에 디미트리 알렉산드르 블레다드 한 명뿐이었다.

 

  “어쨌든 지금은 도적을 물리칩시다!”

 

  이어진 한 마디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실뱅은 창을 고쳐 쥐었다.

 

  “너희……

 

  디미트리와 눈이 마주쳤다. 실뱅은 이를 악물었다.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도적의 검을 피해내고 창을 휘둘렀다.

제발, 지금은 전투에 집중하자고요, 전하. 안 그러면 지금 당장 울어버릴 것 같으니까.

 

*

 

  별은 반짝였고 바람은 차가웠다. 고티에령에 비하면 시원한 수준이지만 겉옷 하나 걸치지 않고 나올 만한 시간은 아니었다. 몇 군데 피워놓은 횃불은 겨우 방향이나 알려주는 정도였지만, 실뱅은 신경 쓰지 않았다. 터벅터벅 걷다 보니 어느새 5년 전의 교실 앞에 서 있었다. 멍하니 교실 입구를 쳐다보고 있자니 새록새록 그때가 떠올랐다.

  실뱅은 교실 입구를 마주 보고 있는 기다란 의자에 털썩 앉았다. 등받이에 툭 등을 기대니 어슴푸레 교실 안이 보이는 듯도 했다. 깊은 한숨이 적막한 대수도원을 울렸다. 동시에 옅은 김도 피어올랐다가 흩어졌다.

  영영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사람들이 살아 있었다. 심지어 자신의 눈앞에 있었고, 지금도 벽 너머 어딘가의 방에 있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쉽게 얘기해서 기뻐야 했다. 하지만 실뱅은 혼란스러웠다. 너무 기쁜 나머지 머리가 제구실을 못 한다고 보기에는 무언가 달랐다.

  실뱅 조제 고티에는 어릴 적부터 사람을 믿지 않았다. 그런 그가 마음을 열었던 상대는 고작해야 한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마저도 한 사람은 더스커의 비극 때 많은 이와 함께 세상을 떠났다. 디미트리, 펠릭스, 잉그리트. 실뱅에겐 그 셋만이 친구였다. 가볍게 말을 섞는 동료도, 가볍게 입을 맞추는 연인도 많았지만 어디까지나 그 수준에 그쳤다. 사관학교에 와서도 누군가에게 이해를 받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마음을 열 생각도 없었다. 실뱅은 사람을 믿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무표정한 데다 감정 표현도 드물고, 희귀한 문장을 가졌으면서도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는 용병 출신의 선생님은 예외였다. 사관학교에서 보낸 시간이 1년이 거의 다 되어갈 무렵, 실뱅은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 손으로 꼽아야 하는 친구에 이제 선생님도 포함이 되었다.

  그러기가 무섭게 선생님이 사라졌다. 전투 중 행방불명이란 건 결국 죽었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실뱅은 고티에령으로 돌아가면서 속으로 여신을 저주했다.

  이렇게 금방 데려가실 거면 마음 열 만한 상대는 왜 주신 건데요.

  그렇게 여신을 저주한 탓인지, 전황은 왕국에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러더니 왕도에서 섭정 루퍼스를 살해한 죄라며 디미트리가 붙잡혔다. 처형까지는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고 했다. 실뱅은 다시 저주했다.

  그 녀석이 뭘 그렇게 잘못해서 데려갑니까. 나한테 얼마 있지도 않은 사람들을 왜 자꾸 데려가시냐고요.

  세간에는 디미트리가 살아 있다고 믿는 사람이 많았다. 코넬리아가 시신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실뱅은 그런 가느다란 희망에 매달릴 만큼 튼튼하지 않았다. 그래서 포기했다. 깨끗이 단념했다. 그렇지 않아도 폐쇄적으로 닫아걸고 있던 마음속 빗장을 다시는 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여기서 뭐 해?”

 

  예상치 못한 말소리에 실뱅은 거의 퉁겨져 나오듯이 벌떡 일어나 싸울 자세를 취했다. 이 본능적인 움직임에 상대방이 뒤로 슬쩍 물러났다. 저 멀리서 일렁이는 횃불 덕에 다행히 상대를 알아볼 수는 있었다.

 

  “선생님.”

 

  침을 꿀떡 삼키고 실뱅은 몸에 힘을 풀었다.

 

  “밤도 늦었는데 들어가서 쉬지 그러세요?”

  “실뱅이야말로.”

 

  실뱅이 다시 의자에 몸을 기대자, 선생님도 그 옆자리를 차지했다. 나란히 앉아서, 두 사람은 함께 수업을 하던 교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 년 동안, 어떻게 지냈습니까?”

  “자고 있었어.”

  “.”

 

  무심코 터져 나온 그 소리가 선생님에게는 어떻게 들렸을지 알 수가 없었다. 어이가 없었고, 황당한 나머지 말문이 막혔다. 옛날부터 비밀이 많은 사람인 건 알았지만 속이 꼬였다. 실뱅은 5년 전 자신의 뒤통수라도 때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진짜 살아 있긴 한 겁니까? 제국의 첩자는 아니고?”

  “날 깨운 사람이 오늘이 천년제 날이라고 하더라.”

  “농담은 정도껏……

  “진짜야.”

 

  마주친 시선이 옛날과 똑같이 올곧았다. 가끔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투명하고, 맑은 눈이었다. 실뱅은 그래서 얼굴을 마주보기가 힘들었다. 어쩐지 거울 같은 그 눈에, 제 엉킨 속이 비치는 것 같았다.

 

  “난 진짜 선생님을 모르겠습니다.”

 

  대답은 없을 것이라고 멋대로 예상하며 실뱅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두운 가운데도 이상하리만치 빛나는 눈이 저를 쫓는 게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고 싶기도 했고, 그러고 싶지 않기도 했다.

 

  “실뱅은 잘 지냈어?”

 

  그 질문이 실뱅의 발을 붙잡았다.

  무슨 대답이 듣고 싶어요, 선생님?

  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실뱅은 휙 뒤로 돌았다. 그리고 씨익 웃으며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뭐 그럭저럭 지냈죠. 왕국 얘기는 아까 들었으니 아실 테고, 그래서 저도 영지 지키느라 전투에 계속 끌려다니는 처지입니다.”

  “힘들었겠다.”

  “하하, 예나 지금이나 한 마디로 속을 후벼 파신다니까.”

 

  그러니까, 왜 갑자기 나타나서 겨우 잠재워놓은 속을 뒤집어놓느냐고요, 선생님.

 

  “먼저 들어갑니다. 밤바람 차니까 들어가세요.”

 

  얼른 뒤돌아 발을 재촉했다. 꽉 깨문 입술에서 비릿한 맛이 났다. 자꾸 그를 술렁이게 만들던 혼란스러움의 이유를 깨달은 탓인지, 속이 더 울렁거렸다. 정말 어린애 같은 어리광이었다.

  견딜 수 없어 포기했더니 이제야 제 곁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미웠다.

 

*

 

  실뱅은 한 가지 정정해야 했다. 제 곁으로 돌아온 사람은 한 명이었다. 선생님은 돌아왔지만, 디미트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눈앞의 디미트리는 제가 알던 디미트리가 아니었다.

  옛날부터 펠릭스는 그런 말을 했었다. 디미트리는 잔혹한 본성을 숨기고 있다, 언젠가는 다들 저 멧돼지의 짐승 같은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실뱅은 가볍게 흘려들었다. 디미트리는 본성이 착한 사람이었다. 사람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씨 고운 아이였고,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모두를 똑같이 대하던 훌륭한 아이였다. 그래서 그 말을 그렇게 가볍게 넘겼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디미트리는 펠릭스의 말 그대로였다. 살인귀라도 쓰였는지 입만 열면 목을 따야 한다는 둥, 모조리 찢어 죽여야 한다는 둥, 아무튼 죽이는 이야기밖에 하지 않았다. 죽은 이들을 가엽게 여기다 못해 아예 작정하고 죽은 이들의 편에 서서 산 자들을 도륙하는 느낌이었다.

  5년 전의 그 전투 때에도 디미트리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눈이 뒤집혔다는 말은 그럴 때 쓰는 말이란 걸 체감했다. 디미트리는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허공을 보며 중얼거리기 일쑤였다. 제국의 황제가 가르그 마크에 당도했을 때에는 어찌나 빠르게 적군 사이를 뚫고 가는지, 두두를 비롯한 몇몇이 부리나케 그 뒤를 쫓아야 했다.

  그 이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처형 이야기를 들었다. 따지자면 그때부터 홀로 5년이나 떠돌아다닌 셈이니 극단적으로 치달을 만하다고 생각은 했다. 그렇다고 받아들이기 쉬워지지는 않았다. 실뱅은 섣불리 디미트리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속속들이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처음 보는 사람처럼 바뀌어버리면 누구나 그럴 것이라 자신을 위안했다. 회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

 

  “저기, 실뱅.”

 

  갑옷을 입고 페가수스 위에 오른 모습까지는 예상 범위였지만 짧게 자른 머리카락도, 투구를 쓴 모습도 실뱅에게는 낯설었다. 이유를 물어볼 것까지는 없었다. 영지 사정상 프랄다리우스령이나 고티에령처럼 대놓고 제국에 반기를 들 수 없는 갈라테아령에서 빠져나와 여기까지 오려면 모습을 감출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 전하가 살아 계시고, 선생님이 살아 계셨으면 지금 우리 상황이 좀 달랐을까 하고.”

  “글쎄다. , 그 녀석이 있으면 구심점이 있으니까 지금보단 나았겠지.”

  “영지에서 어영부영하느니 전하를 찾으러 나가는 게 나을 것 같단 생각도 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충분히 잉그리트가 할 법한 말이었지만 실뱅에겐 그 어느 것보다 듣고 싶지 않은 말이기도 했다.

 

  “그건 너무 위험하지.”

 

  말을 뱉으면서도 자기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불안했다. 그냥 평범하게 걱정하는 표정이면 좋을 텐데, 귀가 먹먹하도록 뛰는 심장 때문에 불안감이 상승했다. 무심코 입술을 깨물려던 실뱅은 잉그리트의 시선이 돌아오는 걸 느끼자마자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여기로 왔어.”

  “그래서라니…… 여기서 싸우려고?”

  “. 그렇게라도 왕국을 위해 봉사할 수 있다면 그래야지.”

 

  그 역시 실뱅에겐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잉그리트는 말린다고 들을 사람이 아니었다. 기사의 측면에서 따지자면 자신보다 훨씬 더 기사다운 사람이었다.

 

  “너 그러다 들키면 위험한 거 알지?”

  “실뱅, 나도 그 정도 생각은 해.”

 

  실뱅은 볼멘소리를 내는 잉그리트에게 다시 미소를 지어 주었다. 하다못해, 같은 전장에 있으면 위험해지기 전에 구하러 갈 수 있을 것이다. 기껏해야 자기 위안밖에 되지 않는 희망으로 불안한 가슴을 가라앉혔다.

 

  “네가 있으면 든든하지, 잉그리트.”

  “오래는 못 있겠지만……

  “그래, 알아. 영지로도 돌아가서 모습을 비추지 않으면 가족들이 위험해질 테니까.”

  “. 그래도 얼굴 보니까 좋다.”

 

  그제야 잉그리트가 미소를 지었다. 마음 한구석이 따스하게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실뱅은 진심으로 웃었다. 완벽한 동의가 담긴 웃음이었다.

 

*

 

  “. 그러고도 네가 고티에의 수장이냐.”

  “어라, 고티에의 수장은 내가 아니라 아버지라고, 펠릭스. 프랄다리우스의 수장이 너희 아버지인 것처럼.”

  “무슨 소린지 알아들었을 텐데.”

  “~ ~ 알다마다요. 아무튼 나도 나가서 싸우는 몸인데 이래서 되겠냐 이거지?”

 

  결국 펠릭스가 다시 혀를 차고 돌아섰다. 키득키득 웃으면서 실뱅은 대충 머리를 흔들어 흙먼지를 털어냈다.

  프랄다리우스령에서 급한 전갈이 왔다고 했을 때, 실뱅은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기 위해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해야 했다. 편지를 읽는 변경백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보고서는 목이 타들어 갔다. 서둘러 지원을 바란다는 말에는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 나갔다. 실뱅은 사색이 된 얼굴로 죽을힘을 다해 말을 몰아 프랄다리우스령으로 달렸다. 그렇게 도착한 전장에서 처음 마주한 것은 적군에 포위되어 고군분투 중인 제 친구였다. 물론 그의 주위에는 왕국군이 꽤 여럿 있었지만, 실뱅의 눈에는 펠릭스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적을 베어 넘겼다. 고티에 변경백이 부리나케 파견한 기사단이 합류하고 나서야 전황이 뒤집혔다.

  그제야 욱신욱신 옆구리가 아팠다. 상대방이 휘두르는 해머를 잘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펠릭스의 표정을 보니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갑옷 덕에 피도 보지 않았고, 멀쩡히 움직일 수 있으니 큰 부상은 아닐 것 같았다.

 

  “고생했다, 펠릭스.”

 

  기껏해야 시커먼 멍이나 들고 말겠지 하며 실뱅은 안도감에 미소 지었다. 동시에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

 

  “실뱅!”

 

  땅이 불쑥 다가오는가 싶더니 펠릭스의 얼굴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펠릭스는 무사했다. 갑자기 무너져 내린 몸을 붙잡은 것도 펠릭스였다. 어쩐지 나른한 손을 뻗어 펠릭스의 어깨를 잡았다. 살아 있었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헛소리 지껄이지 말고 꽉 잡아. 의료반에 데려다주지.”

 

  그러고 보니 그 전갈을 받은 뒤로 쉬지도 않고 달려왔던가.

  허기와 피로, 통증, 졸음까지 한꺼번에 쏟아졌다. 하지만 그보다 든든한 온기가 제 몸을 받치고 있었다. 축 늘어지려는 몸을 어떻게든 추스르며, 실뱅은 펠릭스와 발을 맞춰 걸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안정감에 자꾸만 미소가 나왔다.

 

*

 

  그런 5년이었다. 매일 언제 넘나들게 될지 모르는 사선에서 줄타기를 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두 사람과는 몇 달에 한 번 겨우 얼굴을 볼까 말까 했다. 각자의 영지에서 각자의 목숨을 부지하기에도 바빴다. 가끔 얼굴을 마주했다 헤어질 때면 아무렇지 않게 또 보자며 가볍게 인사했지만, 그때마다 실뱅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가다 못해 썩어 문드러졌다. 또 제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제가 모르는 사이에 잃게 될 것 같아 두려웠다. 정말, 말 그대로 두려웠다. 상대의 복부에 창을 밀어 넣을 때, 날아온 쇼트 액스가 머리카락을 스쳤을 때보다도 프랄다리우스령과 갈라테아령에서 전갈이 왔을 때가 더 두려웠다. 수많은 밤 동안 자신을 다독이고 수많은 낮 동안 미소 지으며 농담을 던졌다. 그런 지옥 같은 5년이었다.

  분명히 깨끗이 단념했을 텐데.

 

  “선생님이 있기를 바란 순간이 참 많았죠.”

 

  그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선생님이 여기 있었다면, 당신이 죽지 않고 우리의 옆에 있었다면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돌아올 리 없는 이를 떠올리며 한탄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고 쓸모없는 일인지는 옛날부터 알고 있었다. 오래전 더스커에서 잃은 친구가 함께 있기를 바란 순간도 차마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알면서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실뱅은 자꾸 그런 식으로 바랐다. 문득 바라고, 비탄에 잠기고, 포기하는 일을 수천, 수만 번 반복했다. 그때마다 불로 지진 듯 가슴이 아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지?”

 

  파드득, 어깨가 튀었다. 어느새 눈앞에 선생님이 서 있었다.

 

  “, 선생님.”

  “표정이 안 좋아.”

  “하하, 그건 또 언제 보셨대.”

 

  웃으려고 했는데 생각처럼 잘 되질 않았다. 입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어쩐지 선생님은 이런 순간을 기가 막히게도 잘 맞췄다. 실뱅이 바닥을 알 수 없는 어둠 속에 깊이, 깊이 가라앉고 있을 때면 현실로 끌어당기는 것이었다.

 

  “어디 가십니까?”

  “디미트리한테.”

 

  어린 시절의 작은 디미트리가 떠올랐다가 안대를 한 지금의 디미트리로 순식간에 모습이 바뀌었다. 기분을 환기하려고 던진 질문이었는데 이젠 돌이킬 수가 없었다.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금방 돌아설 것처럼 대성당 쪽으로 향해 있던 몸을 완전히 틀고, 선생님은 실뱅을 바라보았다.

 

  “차 한잔하자.”

  “뜬금없이 무슨 소리예요?”

  “실뱅이 할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아서.”

 

  얼빠진 얼굴로 선생님을 쳐다본 것도 잠시, 어느새 실뱅은 선생님과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찻잔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왔다. 베르가모트 향이 코를 간질였다. 5년이 지났는데도 선생님은 잊지 않은 모양이었다.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 좋은 거 아냐고, 그래서 나도 어릴 때 많이 마셨다고 지나가듯 이야기했던 적이 있었다.

 

  “마셔.”

  “감사합니다.”

 

  홀짝 차를 들이켜는 선생님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실뱅도 잔을 들었다. 은은하게 퍼지는 향이 좋았다. 한 모금을 마시고 잔을 내려놓으니 시선이 따가웠다. 밝은 청록색 눈동자가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밤의 대화 이후로 줄곧 실뱅이 피해왔던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가 듣고 싶으십니까?”

  “실뱅이 하고 싶은 이야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누군가에게 솔직하게 속을 내비치기는 실뱅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선생님 앞에서만큼은 자꾸 모든 걸 내려놓고 솔직해지고 싶어지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 사실이 분하고 화가 난다는 점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럼 다시 묻겠는데요, 왜 지금입니까?”

 

  그 말부터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멋대로 말이 튀어 나갔다. 탁자 밑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무려 오 년입니다. 선생님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고 전하도 처형당했습니다. 아니지, 처형당한 줄 알았죠. 나는 희망을 품고 기다릴 수 있는 인간은 못 돼서요. 애써 묻었습니다. 애도했어요. 내가 마음을 연 사람들이 하나둘 옆에서 사라져서 화가 치밀어 오르고, 괴롭고, 슬프고, 아픈데 그걸 더 가지고 갈 힘이 없었다고요. 그래서 포기했습니다. 그렇게 오 년을 보냈어요. 그런데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눈앞에 둘이 떡하니……

 

  목이 메었다. 울컥 솟아오르는 무언가를 누르기 위해서 숨을 골랐다. 꽉 쥐었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몇 번 더 심호흡을 하고 실뱅은 찻잔을 들었다. 이럴 걸 알아서 베르가모트 티를 준비해준 것일지도 몰랐다. 선생님은 그런 사람이었다.

 

  “미안.”

  “사과할 게 아니잖습니까. 물론 두 사람이 살아 있는 건 기뻐요. 기쁜데, 젠장……

  “그렇다고 실뱅이 힘들었던 게 사라지는 건 아니지.”

 

  선생님의 말이 맞았다. 이제 와 두 사람이 나타났다고 해서 망가졌던 5년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갈가리 찢어지는 듯했던 실뱅의 가슴이 깨끗하게 단번에 낫지도 않을 것이다. 또 잃을지도 모르는 공포와는 앞으로도 싸워야 한다. 실뱅도 알고 있었다.

 

  “도대체 왜 당신은 그렇게…… 모든 걸 다 아는 건데요.”

 

  미소로 포장하고 농담으로 치장까지 해놨던 어두운 감정을 아무렇지 않게 꺼내다가 툭툭 먼지를 털어주고 밖으로 끄집어낸 느낌이었다. 이십 년이 넘는 동안 실뱅이 단 한 번도 제대로 하지 못했을 만큼 어려웠던 일을, 선생님은 차 한 잔을 들이켜듯 가볍게 해냈다.

  이 사람이라면 디미트리를 잡아줄 수 있을까.

 

  “아무 말도 안 하는 제자 속도 꿰뚫어 보시는 분이니까 그 녀석이 무슨 생각하는지는 더 훤하시겠네요.”

  “디미트리가 걱정되나?”

  “그럼 걱정이 안 되겠습니까?”

 

  아까부터 실뱅은 말도 안 되는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다. 이런 말을 하려고 선생님을 마주 보고 있는 게 아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는 그 눈에는 늘 졌으니 이번에도 적당히 속을 털어놓고 아무렇지 않은 척 웃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댐이 무너지기라도 한 듯, 가슴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말들이 멋대로 흘러나왔다.

 

  “나도 그래.”

  “선생님.”

  “디미트리는 심지가 착한 아이니까 분명 말하면 들어줄 거야. 얼마나 걸릴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왜 묻지 않습니까?

  갑작스레 말문이 막혔다. 묻고 싶었지만 묻고 싶지 않았다. 실뱅은 그걸 감추고자 찻잔에 손을 뻗었다. 달그락 소리가 말소리를 대신했다. 여전히 깊이를 알 수 없는 청록색 눈동자가 저를 보고 있었다.

마침내 시선이 떨어졌다. 차를 한 모금 들이킨 선생님이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미안한데 먼저 일어날게. 역시 디미트리한테도 가봐야 해.”

  “, .”

 

  아직 차가 남아 있으니 더 마시고 가라는 말을 덧붙이고, 선생님은 성큼성큼 멀어졌다. 실뱅은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디미트리한테도라니, 처음부터 나랑도 대화할 생각이었구나.

  하지만 선생님은 실뱅이 가장 걱정하던 질문은 던지지 않았다. 왜 너는 디미트리에게 가보지 않느냐는 질문 대신 걱정되느냐고 물었고, 자신도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뒤엔 디미트리한테도 가봐야한다면서 자리를 떴다. ‘말하면 들어줄것이라는 말은 남기면서도, 끝내 그에게 왜 가지 않느냐고 묻지는 않았다.

  탁자 위로 눈물이 방울방울 번졌다. 마지막으로 눈물을 흘리며 울었던 것은 디미트리가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날이었다. 헛웃음이 났다. 눈앞에 친구를 두고도 말 한마디 붙이지 못하는 자신을,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한심하고 경멸스럽기만 한 자신을 그 어떤 말로도 몰아붙이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 사실이 못내 고마웠다.

 

  “하하…… 진짜 이상한 사람이라니까.”

 

  실뱅은 선생님이 사라진 방향을 다시 바라보았다. 아마 대성당에 우두커니 서 있는 디미트리의 옆에 있을 것이었다.

 

  “부탁합니다, 선생님……

 

*

 

  시간은 언제나와 똑같이 흘러갔다. 기다려줬으면 하는 바람도, 제발 얼른 끝났으면 하는 기도도, 시간은 상관하지 않고 똑같이 흘렀다. 차가운 바람 속에서 재회를 맞이했던 사람들은 이제 파랗게 물든 나무들 가운데 서 있었다.

  몇 번의 큰 전투를 치렀다. 미르딘 대교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는 어느새 후방에 두두가 합류해 있어서 기겁하기도 했다. 실뱅에게는 여러 의미로 기쁜 일이었다. 학창 시절의 친구가 살아 돌아왔다는 순수한 기쁨이 하나의 이유였고, 두두를 바라보던 디미트리의 얼굴이 실뱅이 거의 평생에 걸쳐 알고 있던 표정과 거의 똑같았다는 것이 또 다른 이유였다. 여전히 디미트리는 제국의 황제에게 집착했고, 목을 베겠다는 말만 반복했지만, 그 표정 하나로 실뱅은 크게 안도했다. 선생님의 말대로 디미트리는 심지가 착한 아이그대로였다.

  직전에는 그론다즈 평원에서 대규모의 병력이 부딪쳤다. 다행히도 전투는 왕국군의 승리로 끝났다. 다만, 다른 사건이 있었다. 한 소녀가 디미트리를 찌르려 했고, 그것을 로드릭이 막았다. 로드릭은 펠릭스의 아버지이기도 했지만, 실뱅에게도 삼촌 같은 존재였다. 어릴 적부터 훈련도 가끔 도와주고, 애정 어린 잔소리를 하던 사람이었다. 친구와는 다른 범주였다. 로드릭은 실뱅에게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었다.

  그로 인한 충격을 상쇄한 것은 디미트리였다. 로드릭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디미트리의 무언가를 자극한 듯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선생님이 있었다. 선생님은 디미트리에게 손을 내밀었을 것이다. 5년 전과 똑같이, 실뱅의 닫힌 문을 열었듯이, 그렇게.

 

*

 

  대성당 밖에 나와 있는 디미트리를 보는 것은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디미트리는 꽤 오래 수도원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사람에게 사과를 했다. 친구들은 물론이고 세이로스 기사단 사람들도 빠뜨리지 않았다. 실뱅도 사과를 받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물론 실뱅은 손사래를 쳤다. 그에게는 사과받을 이유가 단 한 개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웃으며 말했다. 전하가 나아가기로 정했다면, 함께 가겠다고.

  그러던 실뱅이 정신을 차린 것은 선생님이 말을 걸었을 때였다.

 

  “정신이 다른 데 있는 것 같아.”

  “깜짝이야. 언제부터 거기 계셨어요?”

  “디미트리랑 얘기하고 방금 나오는 길인데.”

 

  아, 기사실에서 디미트리랑 얘기하던 사람이 선생님이었구나.

  반쯤 넋을 놓고 있었던 실뱅은 하하 웃음을 흘렸다. 온종일 무의식적으로 디미트리를 쫓았던 모양이었다.

 

  “디미트리가 걱정되나?”

 

  언젠가의 겨울날이 떠올랐다. 실뱅은 깔끔하게 고개를 저었다. 언제나 모든 전투 때마다 하는 모두의 생사에 대한 걱정을 제외하면, 당장은 디미트리를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사실, 그 녀석이 한 짓을 싹 다, 말끔히 잊으려는 생각은 없어요. 근데 전하가 자신의 죄니 과거니 뭐니를 마주하며 앞으로 나아가겠다면…… , 거기에 함께하지 않을 이유는 없지 않을까~ 싶어서요.”

 

  풋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만, 선생님은 그저 실뱅을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아니, , 이래 봬도 꼬맹이 때부터 친구였으니까요.”

 

  너무 뜬금없는 소리를 했나 싶어 한 마디를 덧붙였지만 아무래도 선생님은 그런 설명을 기대한 게 아닌 듯했다. 어깨를 으쓱한 선생님이 또다시 다과회를 청해왔다. 거절할까 하는 고민은 아주 짧았다. 고개를 끄덕이니 선생님이 앞장섰다. 실뱅은 그 뒤를 말없이 쫓아 걸었다.

  이번에도 차는 베르가모트 티였다. 메르세데스가 나눠준 게 있다며 내놓은 과자도 먹음직스러웠다. 하지만 어쩐지 찻잔에 손이 가지 않았다.

 

  “이번에는 뭡니까?”

  “디미트리는 괜찮을 거야.”

  “, , 그건 다행인데요……

  “실뱅은 괜찮아?”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 움츠린 실뱅은 그때까지 억지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찻잔에서 눈을 뗐다. 보석이라도 박아놓은 듯 광채가 어린 눈으로, 선생님은 곧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목이 탔다.

 

  “안 괜찮다고 하면요?”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거야.”

 

  정말 이상한 사람.

  선생님의 말에는 겹겹이 둘러놓은 벽을 단숨에 무너뜨리는 힘이 있었다. 절대로 이야기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마저 무심코 쏟아버리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새삼스럽게, 그래서 이 사람에게 마음을 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내가 증오스럽습니다.”

 

  고개를 푹 숙였다. 찻잔에 자신의 얼굴이 비쳐 보였다. 찡그린 미간, 텅 빈 듯한 눈동자, 꾹 깨문 입술이 늘 보던 그것이었다.

 

  “꼬맹이 때부터 친구였는데……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말을 걸지도 못했고, 하다못해 옆에 있어 주지도 못했습니다. 그래놓고 선생님한테 떠넘기듯이……

  “실뱅이 말하지 않았더라도 난 디미트리에게 갔을 거야.”

  “, 압니다. 당신은 그런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날 용서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 녀석은 내가 더 오래 봤으니 장담할 수 있어요, 원래 그런 애가 아니라는 건요. 그런데 난…… 나는……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생각하는 것과 말로 뱉어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실뱅은 겨우 찻잔을 손에 쥐었다. 어릴 적과 똑같은 향을 맡고, 똑같은 맛을 느꼈다. 사소하지만 눈물 나도록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무서웠습니다. 내가 아는 전하가 아니라서, 그때의 전하를 마주 보는 게 두려웠습니다. 오 년 만에 돌아왔는데, 내 옆에 디미트리가 돌아왔는데도 그 녀석을 영영 잃어버릴 것만 같아서요.”

 

  무서웠다. 실뱅은 진심으로 그렇게 느꼈다. 영영 잃어버린 사람을 그리워하는 건 아픈 일이었다. 하지만 옆에 있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건 수백, 수천 배로 괴롭고 아픈 일이었다.

 

  “그게 변명이 될 수 없는 것도 압니다. 여러 사람이 디미트리에게 손 내밀어준 것도 알아요. 그런데 나는, 그 녀석의 제일 오래된 친구라는 나는, 그래도 형이었던 나는……

 

  목이 메었다. 찻잔 위로 어린 시절의 디미트리가 겹쳐 보였다. 해맑게 웃으면서 손을 내밀던 모습, 펠릭스랑 싸웠는데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울먹거리던 모습, 검을 부러뜨리고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달려왔던 모습, 그런 것들이 뒤섞였다.

  믿고 의지해줬는데, 네게 정말로 도움이 필요할 때 난 뭘 해줬지?

 

  “여기 있잖아.”

 

  고개를 들었다. 베르가모트 향만큼이나 은은한 미소가 보였다.

 

  “실뱅은 계속 디미트리의 옆에 있어. 아까도 그랬고.”

  “하지만……

  “지금까지 못 해줬다고 생각하면 앞으로 해. 디미트리에겐 앞으로도 친구가 필요할 거야. 오래된 친구라면 더 믿고 의지할 수 있겠지.”

 

  눈물이 툭 흘렀다. 코를 찡그리며 손가락으로 대충 볼을 훑었다. 선생님이 말하면 어쩐지 모든 게 다 쉬워 보였다. 지금까지 실뱅을 괴롭히던 모든 올가미가 순식간에 풀어진 듯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마음도 읽을 줄 아십니까?”

  “그런 능력까지는 없는데.”

 

  차를 한 모금 들이키고 심호흡을 했다. 한결 가벼운 기분이었다. 단숨에 바뀔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기엔 용기 내지 못하고 살아온 시간이 너무나도 길었다. 하지만 그에겐 함께 있어 줄 사람이 있었다. 디미트리의 옆에 자신이 있듯이, 그의 옆에도.

 

  “나는 변할 수 있을까요?”

  “그게 실뱅이 바라는 미래라면.”

 

  문득 실뱅은 이 사람이 자신의 선생님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앞에서 이끌어주고, 필요할 땐 이야기를 들어주고 조언해주었다. 청사자반의 선생님은 지금도 변함없이 선생님이었다. 5년의 공백이 있어도, 지금은 전장에 나서는 기사여도, 편견 없이 함께해주는 선생님이었다.

 

  “고맙습니다.”

 

  실뱅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까지 숙이며 인사를 했다. 몸을 일으켜보니 선생님은 약간 얼이 빠진 듯한 표정이었다.

 

  “우리 대장 돌려줘서요. , 여러 사람의 힘이라는 건 아는데, 선생님이 꾸준히 손 내밀어줬잖아요. 디미트리한테도나한테도.”

  “너희는 내 제자니까.”

  “, 당신은 우리 선생님이죠.”

 

  아니, 사실은 당신이 신이 아닐까.

  실뱅은 웃었다. 간만에 정말 행복해서 나오는 미소였다.

 

  “차 잘 마셨습니다. 바쁘신 분 붙잡으면 안 되니까요. 그리고 선생님 말대로, 앞으로도 디미트리 옆에 있으려면 훈련 좀 더 열심히 해야 할 것 같거든요.”

  “그럼 새 훈련 과정 검토를……

  “잠깐, 사람 잡을 생각이에요?”

 

  선생님의 얼굴에도 미소가 가득했다. 해가 따스하게 내리쬐는 5월이었다.

 

 

 

* * * * * * * * * * * * * * * * * * * *

청사자 루트 타면서 소꿉친구들 사이에

A 지원회화를 보다 보니까

다른 소꿉친구들끼리는 모두가 A까지 있는데

 

어라? 실뱅은 디미트리랑 A 대화가 없네?

 

이게 너무 신경 쓰여서

도대체 왜 실뱅은 디미트리랑은

A를 찍지 않는가 생각하다 보니까

이런 글이 나왔습니다

 

실뱅은 회피형 인간이라고 생각해요

사실은 실뱅도 속이 곪아 있어서

디미트리의 곪은 속을 마주 볼 수 없었던 거라고

그럴 자신이 없었던 거라고

 

그러니까 디미트리가 그 시간을 극복하고

지원 A는 그 이후에 열리니까

그 시간을 함께 마주해주지 못한 실뱅은

A가 없는 게 아닐까 하고....

 

그래도 실뱅은 나아질 거라고 생각해요

왜냐면 후일담이 그렇잖아

발전하는 실뱅이잖아

물론 누구랑 보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아무튼 실뱅도 앞으로 나아갈 거 아니에요

 

선생님 말대로 실뱅은 앞으로

디미트리의 곁에서 늘

믿고 의지해도 되는 친구로, 형으로, 기사로

함께 할 테니까....

 

아 이제 청사자를 마무리 지었으니

금사슴을 하러 가야지.....

 

 

위로가 필요한 새벽

 

- 창월의 장 EP.16 장밋빛 대하 시점

- 흑수리반 학생들 중 베르나데타만 청사자반에 왔습니다

- 전장에서 적군으로 페르디난트를 마주한 다음날 새벽의 이야기입니다

- 사망 소재 주의

 

 

 

  똑, , . 세 번의 노크 뒤로 거의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가 누구냐고 외쳤다. 늘 그렇듯 선생님은 짧게 대답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말이 없었다. 그 대신 우당탕 소리가 요란했다. 당황한 나머지 뭔가 쓰러뜨린 모양이었다.

 

  “선생님…….”

 

  한참 만에야 문이 열렸다. 선생님은 그저 끈기 있게 기다렸을 뿐이었다. 조그맣게 열린 문틈 사이로 베르나데타의 정수리가 보였다.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 탓이었다.

 

  “오실 줄 알았어요. 알아요, 잘못했다는 걸요. 하지만, 하지만 베르는……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그렇지만 그래도……

  “베르나데타. 혼내러 온 게 아니야.”

  “네에?”

 

  번쩍 들어 올린 얼굴이 엉망진창이었다. 이미 한참 전부터 오래도록 울고 있었는지 코가 새빨갰다.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눈물이 턱을 타고 계속 뚝뚝 떨어졌다. 벌겋게 튼 볼을 보니 소매 끝이 짙게 물들어 있으리란 것은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 하지만 베르는 잘못했잖아요. , , 전장에 나가서 석상처럼 굳어버리다니 말도 안 되는데 어쩔 수가 없었어요, 선생님. 그게요, 제가 디미트리 씨 말대로 얼굴을 안 보면 된다고 계속 생각을 했거든요? 근데요, 그게 제 맘대로 안 되는 거예요. 왜냐면…… 왜냐면…….”

 

  결국 끝까지 말을 뱉어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무너져 내리는 베르나데타를 붙잡았다. 선생님은 베르나데타의 등을 도닥이며 침대에 걸터앉게 도와주었다. 엉엉 소리 내서 우느라 사라져버린 뒷말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페르디난트 폰 에기르는 기개 높은 귀족이다. 아니, 귀족이었다. 자신이 귀족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에 걸맞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학생이었다. 그리고 아마, 분명 그만큼 훌륭한 귀족이 되었을 터였다. 학생 시절부터 훈련 시간에 제 이름을 크게 외치며 공적을 세우기를 희망하던 이였다.

  그래서 선생님은 그 자신감에 찬 목소리를 듣자마자 지시를 내렸다. 전진 중이던 애쉬의 부대를 세우고 뒤따르던 베르나데타의 부대와 합류하도록 했다. 지시는 빠르고 정확했지만,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는 훨씬 더 빠르게 베르나데타에게 닿았다. 얼어붙어 꼼짝도 못 하고 있는 베르나데타를 대신해 부대를 지휘한 것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애쉬였다.

 

  “제가 죄송해요. 감히 제가 여기에 와서, 제가…… 제국 출신인 베르가 분수도 모르고 선생님을 따라오는 바람에 전장을 엉망으로 만들 뻔……

  “네가 제국에서 태어났다는 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아. 마찬가지로 제국인 친구를 가진 것도 아무 잘못이 아니야.”

  “하지만…… 하지만 우리는…….”

 

  하지만 우리는 적이 되어 서로를 죽이고 있잖아요.

  선생님은 다시 말이 없었다. 굳이 이것이 전쟁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었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에는 큰 간극이 있는 법이었다. 몇 번을 되새기고 스스로 납득시켜도 현실로 다가오는 순간, 그런 노력은 모두 수포로 되기 일쑤다. 제랄트에게 익히 들어온 말이었다.

  무심코 올라오는 손에 손수건을 쥐여주며, 선생님은 계속 베르나데타의 등을 토닥였다.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낸 베르나데타가 깊은 한숨을 뱉어냈다. 겨우 울음이 잦아들었는지, 연신 들썩이던 어깨가 조용했다.

 

  “선생님. 저요, 집을 나오면서 이미 각오했거든요. 에델가르트 씨와 싸우게 될 거라는 거 말이에요. 어차피 아버지도 칩거 생활 중이시고, 전 청사자반으로 옮기면서 에델가르트 씨와 자연스럽게 멀어졌으니까…… 집을 안 나왔어도 그랬을지 모르고요. 그래서 괜찮을 줄 알았어요.”

 

  덤덤하게 꺼내놓는 속마음에 선생님은 고개만 끄덕였다. 손수건을 꼭 쥔 채 무릎 위에 놓여 있는 베르나데타의 손처럼, 선생님의 손도 깍지를 낀 채 가지런히 무릎 위에 놓여 있었다. 꼭 무언가를 바라듯, 기도하는 손 같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데요, 저는…… 저는 진짜 각오가 된 게 아니었나 봐요. 막상 거기서 페르디난트 씨를 보니까…… 신기한 게요, 생각보다 되게 멀리 있었는데도,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도 페르디난트 씨인 걸 알겠더라고요. 그 상황에서 저도 모르게 반가움을 느꼈어요. 그때 얼어붙었어요. 페르디난트 씨가 적이라는 것도 거의 동시에 깨달았거든요. 혼란스러웠어요.”

  “당연한 일이야.”

  “하지만 그러면 안 되잖아요.”

 

  방에 찾아온 뒤로 두 번째로 눈을 마주치는 순간이었다. 베르나데타는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선생님은 잠시 말을 고르듯 심호흡을 했다.

 

  “꼭 한 가지로 정의할 필요는 없지. 페르디난트는 적이기도 했지만, 베르나데타의 친구였잖아. 그러니까 반갑게 느껴지는 게 당연해.”

 

  뻐끔뻐끔, 몇 번을 열렸다 닫혔다 하던 작은 입에서 새된 신음이 흘러나왔다. 표정이 다시 일그러지면서 겨우 잦아든 눈물이 다시 또르르 흘러내렸다. 도피처를 찾듯 마구 배회하던 시선이 결국 선생님에게로 돌아왔다. 언제나 보아오던 선생님의 눈동자가 새삼 낯설었다. 어쩐지 슬퍼 보이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친구였지만 다른 가치관을 가지면서 반대편에 섰을 뿐이야. 만약 우리가 설득할 수 있다면, 우리 편이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페르디난트 씨는…….”

  “, 페르디난트는 이미 떠났지만, 앞으로 우리는 친구였던 적을 더 많이 만나게 될지도 몰라. 그러니까 각오를 다져야지. 적이 되기 싫으면 설득을 하고, 그래도 상대방이 그 가치관을 고수한다면……

 

  이번에는 선생님도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새벽 달빛만이 비추고 있는 방은 더없이 조용했다.

 

  “살기 위해 상대방과 싸워야지.”

 

  고요함은 예고 없이 깨졌다. 마치 화살이라도 맞은 듯, 희미한 신음과 함께 베르나데타가 숨을 삼켰다. 마디마디가 하얘질 만큼 꽉 쥐고 있던 손이 어느 순간 탁 풀렸다. 손수건으로 얼굴을 꾹꾹 눌러 닦은 베르나데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알고 있었어요.”

  “, 알아.”

  “다 알지만…… 그냥, 속상해서, 아파서요, 그러니까……

  “위로가 필요했던 거지.”

 

  오늘 처음으로 보인 미소였다. 바람이 빠지듯 푸흐, 소리가 났다. 베르나데타의 눈은 여전히 젖어 있었지만 그래도 한결 나아 보였다.

 

  “선생님은 참 이상해요. 베르한테 뭐가 필요한지 어떻게 매번 아시는 거예요?”

  “, 사실 이번엔 나한테도 필요했어. 위로 말이야.”

 

  베르나데타를 마주 보며 선생님도 미소 지었다. 그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던 베르나데타는 기습적으로 선생님을 끌어안았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센 힘으로, 정말 꽉 끌어안았다. 선생님은 미소 지으며 베르나데타의 등을 다시 도닥였다.

 

  “베르 같은 게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필요하면 언제든지 불러주시기예요!”

  “, 고마워. 날 믿고 여기까지 와 줘서.”

 

  유독 길고 긴 새벽이었다.

 

 

 

* * * * * * * * * * * * * * * * * * * *

 

모든 친구들의 모든 지원회화를 열기는 힘드니까

한 루트 진행에 한 명씩 골라서 모든 지원회화를 열자! 가 목표였고

이번엔 디미트리가 목표여서 지원회화에 필요한

동맹 친구들을 포섭하느라 애를 먹었고

그래서 최애인 베르나데타만 간신히 데려왔더니....

 

1회차를 제국 루트로 갔기 때문에

미르딘 대교 전투에 로렌츠가 나오는 건 알았지만

그땐 페르가 우리 반이어서

그 전투에 페르도 나오는 줄은 몰랐어

 

로렌츠까지는 예상 범위였지만

페르가 나오는 순간 진짜로 헉 소리를 냈고

그때까지 앞으로 전진시키고 있던 베르나데타를 세워두고

애쉬를 전진시켰다....

왜 이 전투의 조건은 모든 적장을 잡는 걸까 ㅠ_ㅠ

 

다른 학생들이 나오는 것도 괴롭지만

내가 플레이했던 애가 적으로 나오는 건 더 괴로워

이렇게 괴로울 줄 몰랐어 ㅠㅠㅠㅠ

선생님이 미안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2회차 현재의 우리 반에는

흑수리반 출신이 베르나데타밖에 없기 때문에

베르나데타와 고통을... 나누고자.... 쓰긴 했는데.....

그렇다고 안 아픈 건 아니다... ㅇ<-<

 

3회차에는 어떻게든 애들 다 포섭해오든가 해야지 엉엉엉엉

그땐 흑수리도 청사자도 있는 힘껏 다 데리고 와야하는데

과연 할 수 있을까....

 

일단 2회차부터 끝내고 생각하자 으흐흑

선생님에겐 너희가 모두 행복한 시간선이 필요해... ㅇ<-<

 

손만 잡고 잘게

                            후지 슈스케 드림

 

 

 

  눈이 내리는 겨울밤의 데이트는 커플을 로맨틱한 분위기로 이끌어가기에 좋았다. 공기는 차가워도 내리는 눈송이는 낭만적이고, 한껏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느라 반짝거리는 조명은 좀 더 황홀함을 선사하는 법이다. 그러니 늦은 밤이 되도록 거리에 돌아다니는 커플이 많은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후지 역시 여자친구와 함께 그 인파에 섞여 있었다. 조잘조잘 이야기를 늘어놓던 작은 입이 더 같이 있고 싶다고 작은 투정을 부리는 것도 후지에겐 예상한 바였다. 자연스레 두 사람의 발걸음은 후지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창문 너머로 눈 내리는 풍경을 즐기면서 둘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현관문을 넘어설 때에 그녀의 볼은 이미 붉게 물든 상태였다. 니트 모자에 귀마개, 목도리까지 칭칭 동여매고 손모아장갑까지 끼고 있었지만 드러난 부분은 차다 못해 얼음장 같았다. 상대적으로 따뜻한 후지의 손이 볼을 감싸자 그녀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추워.”

  “금방 따뜻해질 거야.”

 

  후지는 가볍게 입을 맞추고 돌아섰다. 거실에는 아직 냉랭한 공기가 감돌았지만 온풍기도, 고타츠도 제 역할을 해줄 것이었다. 다시 후지가 손을 내밀었을 때, 그녀는 훨씬 더 붉은 얼굴로 제 볼을 문지르고 있었다.

 

  “이건 반칙이야.”

  “후후, 그렇지.”

 

  그래도 마냥 좋은지 배시시 웃는 얼굴이 귀여웠다. 모자부터 코트까지 하나씩 벗은 것들이 옷걸이를 채워나갔다. 언젠가 후지가 선물로 주면서 맞춘 커플 목도리가 나란히 자리했다.

 

*

 

  잔뜩 긴장해 있던 몸이 노곤하게 풀리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꼬물꼬물 움직이며 쿠키를 먹던 손은 어느새 멈춘 채였다. 후지는 진즉부터 끔뻑끔뻑 느리게 깜빡이는 그녀의 눈을 알고 있었다. 결국 스르륵 내려가는 고개를 부드러운 손길로 붙잡고 후지가 속삭였다.

 

  “침대로 갈까?”

  “으응…… 졸려…….”

 

  무슨 뜻인지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대답하는 게 분명해 웃음이 났다. 문득 장난기가 발동했다.

 

  “걱정 마, 손만 잡고 잘게.”

 

  졸음으로 무거운 눈이 힘겹게 열렸다.

 

  “손만 잡아?”

 

  갸우뚱, 기울어지는 고개가 온통 의문을 표출하는 듯 보였다. 정말이지, 이런 점이 후지를 즐겁게 했다. 이 순진한 공주님은 지금 자신이 한 말이 후지의 한도 끝도 없이 짙은 소유욕을 얼마나 자극하는지 알까?

 

  “그럼 뭘 원해?”

  “안고 자고 싶은데.”

 

  자연스럽게 팔을 벌려오는 게 귀여워서 후지도 자연스레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대로 번쩍 안아 올려 침대까지 가는 것도 후지의 몫이었다. 정말 다른 뜻 없이 순수하게 안고 자고 싶다는 제 여자친구는 귀여운 정도가 지나쳤다.

 

  “일찍 일어나서 졸리지?”

  “, 얼마 못 잤어. 슈쨩이랑 잘래.”

 

  그녀를 먼저 침대에 눕혀주고 후지도 그 옆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익숙하게 품을 파고드는 등을 토닥였다. 금세 새근새근 잠든 그녀의 숨이 간지러웠다. 몇 시간이고 더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이었다. 후지는 그러는 대신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눈을 감았다.

 

  “잘 자.”

 

 

*베르나데타와 도로테아가 사관학교에서 처음 만나는 이야기

 

 

 

  꿈 한 번 꾸지 않고 이토록 깊게 잠든 것은 오랜만이었다. 늘 크고 작은 불안과 피해망상에 시달렸으니 악몽도 언제나 따라왔다. 한밤중에 비명을 지르며 일어나기 일쑤라 저택 내에 있던 가족이며 시종이며 가릴 것 없이 함께 고통을 받았다. 물론 아버지는 최대한 멀리 떨어진 방으로 침소를 옮겨버렸다. 그 사실을 안 것은 거의 한 달이나 뒤였다.

  아무튼 베르나데타 폰 발리는 기분이 좋았다.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다. 정말 더없이 평화로운 밤이었다. 말로만 듣던 잠이 잘 오는 약을 먹기라도 한 듯…….

  불안이 엄습했다. 어제 뭘 하다 잠들었는지 떠올려보려 했으나 뿌옇기만 했다. 보통은 자수를 놓다가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하면 침대로 향했다. 하지만 자수를 놨던 것 같지는 않고, 책을 읽은 것 같지도 않았다. 저녁 식사를 하긴 했다. 시종이 가져다준 스튜를 대충 다 비웠던 기억이 났다. 그 뒤로 어머니가 차를 가져다주셔서…….

 

  차?

 

  그러고 보니 이 차가 불면증에 좋다느니,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효과가 있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하셨던 것 같았다. 유독 초조해 보이는 어머니를 보며 제가 간밤에 또 비명을 어지간히 질러댄 모양이라고 추측했다.

 

  어라? 나 그 뒤에 일어나지 않았나?

 

  어렴풋하지만 일어나서 뭔가를 먹은 기억이 있었다. 너무도 흐릿한 탓에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 뭘 한 건지, 누구와 있었는지, 어디였는지, 그런 구체적인 부분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답답하기보단 두려웠다.

  여전히 베르나데타는 눈을 뜨지 못했다. 처음엔 평화로웠던 밤을 좀 더 연장하고자 그랬고, 지금은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하기가 무서워서 그랬다. 어쩐지 술렁거리는 가슴이 좋지 않은 예감을 부채질했다. 베르나데타는 대충 손을 휘저어 덮고 있던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몸을 동그랗게 말아서 얼굴을 침대에 묻어버리고 숨을 크게 뱉었다.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베르. 눈 뜨면 매일 보던 그 방에 있을 거야. 당연하지.”

 

  주문이라도 외는 듯이 같은 말을 몇 번이나 중얼거린 뒤에야 베르나데타는 일어날 용기를 쥐어짰다. 제가 놓는 자수의 땀만큼이나 작고 작은 용기였기에, 엎어진 자세에서 팔로 침대를 밀어내며 상체를 일으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눈은 여전히 꾹 감은 채였다.

 

  “셋 하면 눈 뜨자. 하나, 두우우울…… !”

 

  분명히 셋보다는 몇 초가 더 지났겠지만 베르나데타는 눈을 뜨는 데는 성공했다. 너무 놀라서 다시 눈을 감기는 했지만, 어쨌든 떴다가 감은 것이니 성공은 한 셈이었다.

  귓속이 쿵쾅거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아예 머릿속 자체가 울리는 것 같았다. 토할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 머리를 기대고 있던 베개가 말끔했다. 분명 자수를 놓은 탓에 여기저기 꽃도, 나비도, 나무도 있어야 할 텐데 베개에는 아무런 무늬도 없었다. 베르나데타는 양손으로 입을 꾹 틀어막았다.

 

  베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지? 납치? 납치인가요오오오? 아니지, 아니야, 납치라니?! 날 잡아서 뭐에 쓰려고? 문장? 역시 문장 때문에에에? 죽는 거야? 죽는 거구나! 아아, 적어도 내 방에서 죽길 바랐는데!

 

  마구 생각이 튀었다. 그리고 그렇게 튀던 생각은 한참 만에야, 그래도 혹시 어쩌면 아직 자기 방에 있는 걸 수도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찾아냈다. 오히려 거칠 것이 없어진 베르나데타는 덮고 있던 이불을 홱 걷어버리고 눈을 떴다.

  밝았다. 등 뒤에서 햇빛이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끼야아아아아아악!”

 

  그리고 그 사실에 기함했다. 이곳은 베르나데타의 평화로운 안식처가 아니었다.

 

*

 

  도로테아 아르놀트는 뿌듯하게 방을 둘러보았다. 앞으로 제게 소중한 안식처가 되어줄 곳이었다. 사관학교에 입학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되짚을 필요까지도 없었다. 기지개를 한 번 쭉 편 도로테아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젠 한결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제국의 가극단 출신이니 당연히 흑수리반으로 배정됐지만, 가볍게 넘길 만큼 충분히 기분이 좋았다. 같이 수업을 들을 사람들이 귀족이라 해도 무서울 게 없었다. 여태까지 도로테아는 그런 삶을 살아왔다.

 

  “끼야아아아아아악!”

 

  얼마 되지 않는 짐을 정리하던 도로테아가 화들짝 놀라 들고 있던 옷가지를 떨어뜨렸다. 살면서 들어본 것 중에 가장 사실적인 비명이었다. 금방 뒷목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문을 닫아걸고 있어야 할까 고민이 드는데 다시금 비명이 들렸다.

 

  “무슨 일이람?”

 

  도로테아는 그런 소리를 무시할 만큼 냉혈한이 아니었다. 게다가 꽤 가까운 데서 들렸으니 어쩌면 옆방을 쓰는 학생이 낸 소리일 수도 있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도로테아가 씩씩하게 문을 열고 나왔다.

  아무래도 예상한 대로 비명의 주인공은 옆방 학생이 맞는 모양이었다. 이미 여러 사람이 근처로 모여들어 수군거리고 있었다. 여기서 난 소리 맞냐는 둥, 안에서 무슨 일 있는 거냐는 둥 추측하는 말만 가득했다.

 

  “아아아아아아!”

 

  도로테아는 더 참을 수 없었다. 처음 들은 비명이 놀란 소리였다면 지금 것은 아니었다. 좀 더 공포에 사로잡힌 듯, 절규하는 듯한 소리였다. 도로테아는 옆방의 문 앞에 방호벽을 세우듯 둘러선 사람들을 밀어냈다. 그리고 척척 걸어 나가 문을 홱 밀고 들어갔다.

  여자아이 혼자 벽에 박은 머리를 양손으로 감싼 채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 괜찮니?”

 

  도로테아가 말을 걸자 비명이 뚝 그쳤다. 하지만 그게 좋은 신호라고는 할 수 없었다. 부들부들 가늘게 떨던 여자가 정말 눈에 보일 정도로 덜덜 떨기 시작한 탓이었다. 도로테아는 갑자기 말을 걸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먼저 상대방이 먼저 입을 열었다.

 

  “, , , 누구, 누구세요?”

  “난 도로테아 아르놀트라고 해.”

  “, , , 제발 죽이지만 말아주세요오오오오오오!”

  “잠깐, 어째서 얘기가 그렇게 돼?”

 

  하지만 도로테아가 불만을 토로할 시간은 별로 없었다. 그대로 주저앉은 소녀가 연신 도로테아가 있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살려주세요, 저는 별 도움도 안 될 거예요, 저 따위는 쓸 데도 없어요, 저 같은 건 없는 게 나은데, 히익, 죽는군요, 죽는 거군요.

 

  그런 소리를 중얼거리느라 주변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못하는 모양이었다. 도로테아는 섣불리 발을 디뎌서는 안 될 영역에 들어섰다는 걸 감으로 알았다. 무언가가 이 애를 착란 상태에 밀어 넣은 것이었다. 도로테아는 상대와 똑같이 마찬가지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최대한 시선을 맞추려는 시도였지만 여전히 제게 사과를 하는 머리는 바닥에 닿을 듯 한참 낮았다.

 

  “, 너 이름이 뭐야?”

  “제발,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게요오오오!”

  “아니, 이름을…….”

  “베르나데타 폰 발리.”

 

  그 차분한 대답은 문밖에서 나왔다. 시선을 돌린 도로테아와 눈이 마주친 것은 하얗고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여자였다. 구경이라도 난 것처럼 서 있던 사람들은 언제 사라졌는지, 여자의 곁에는 키 큰 남자 한 명만이 서 있었다.

 

  “발리 가문에서 딸을 여기로 보냈단 소식을 들었어. 어머니께서 보내셨다고 했으니 아마 발리 교무경은 몰랐던 거겠지. 지금 상황을 보니 당사자도 몰랐던 모양이네.”

  “세상에.”

 

  정말 입이 떡 벌어지는 설명이었다. 도로테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몰라도, 당사자도 모르게 낯선 곳에 데려다 놓으면 누구라도 정신적으로 착란을 일으킬 법했다.

 

  “베르나데타.”

  “, , ,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저는 아무 도움도…….”

  “괜찮아. 몰라도 돼. 도움을 안 줘도 돼.”

 

  이제 겨우 도로테아의 목소리가 닿는 모양이었다. 바닥을 향해 있던 베르나데타의 고개가 슬그머니 위로 올라왔다. 얼굴이 눈물범벅이었다. 도로테아는 섣불리 손을 뻗는 대신 눈을 맞추었다. 다행히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베르나데타. 여긴 학교야.”

  “, , , 학교? 학교라고요? 베르가 왜요?”

  “그건 나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여기서 베르나데타를 해칠 사람은 아무도 없어.”

  “, 정말인가요?”

 

  방울진 눈물이 투둑투둑 떨어져 바닥에 번졌다. 아까보다는 숨소리가 훨씬 차분했다. 도로테아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여전히 베르나데타의 양손이 머리를 꽉 감싸고 있었다. 가볍게 손목을 잡는 시늉만 하듯 가져다 댔다. 그러자 마법이라도 쓴 것처럼 두 손이 스르륵 내려왔다. 도로테아는 꼭 아이를 칭찬하듯이 그 손을 짧게 도닥였다.

 

  “. 아무도.”

  “, 여긴 베르의 방이, 아닌데요. 제 방이 아니면, , 아니면 싫어요…….”

  “지금부터 여기를 베르나데타의 방으로 만들면 되지.”

  “, , 여기를요? 하지만 아, 아버지가…… …….”

  “당신을 여태까지 괴롭히던 그 누구도 여기선 못 괴롭힐걸. 여신님이 지켜보고 계시는 대수도원이잖아.”

 

  딱히 믿지도 않는 여신을 들먹거린 건 순간적인 기지였다. ‘아버지를 이야기하면서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본 탓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 그럼……

  “. 괜찮아. 무서워할 필요 없어. 무서우면 언제든지 나 불러, 옆방에 있거든.”

  “…… 으아아아아아앙!”

 

  눈물이 터진 베르나데타가 덥석 도로테아를 끌어안았다. 그래도 도로테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겁에 질린 비명보다는 공포에서 벗어나 해방감에 젖은 통곡 소리를 듣는 게 나았다. 도로테아는 작은 등을 토닥였다.

  가르그 마크 사관학교의 다사다난한 첫날이었다.

 

 

 

 

 

 

* * * * * * * * * * * * * * * * * * * *


첫날 자기 방이 아니어서 정줄 놓은 베르를 달래는 건

역시나 도로테아일 것 같고

학교에서 베르를 처음 방 밖으로 데리고 나온 사람도

도로테아일 것 같아  :Q

 

처음엔 에델일까 생각하긴 했는데...

왜냐면 에델도 고통 받던 시기가 있었잖아

근데 역시 도로테아일 것 같아

 

물론 그렇다고 에델은

베르가 구경거리가 되게 놔두진 않았을 것 같아서

구경꾼을 물리친 건 에델이었을 것 같음

 

흑흑 베르나데타 좋아해 ㅠ_ㅠ

사실 선생님은 모든 애들이 다 좋아

191115 드림 전력 <깜짝상자>

「이미 늦어버린」

테니스의 왕자 유키무라 세이이치 드림

 

 


  달그락 소리가 가득하던 실내에 딸랑
, 경쾌한 종소리가 울렸다. 가게의 문은 그 외의 다른 소리도 없이 깔끔하고 부드럽게 열렸다. 하지만 들어서려던 사람은 그 자리에 잠깐 멈칫했다. 여자는 가게 안을 둘러보는가 싶더니 천장을 쳐다보며 깊게 심호흡을 했다. 또각또각, 바닥에 부딪치는 구두 굽 소리가 어쩐지 시원시원했다.

 

  유키무라 세이이치는 그 모든 움직임을 하나하나 눈에 담고 있었다. 문이 열리던 순간보다 훨씬 더 먼저, 창 너머로 보이는 저쪽 길에서 걸어 내려오는 모습부터 말이다. 블라우스에 검은 민소매 원피스. 어쩐지 참 그 애답다는 생각이 드는 모습이었다.

 

  “기다렸어?”

  “후후, 솔직히 말할까?”

  “아니, 됐어.”

 

  그녀가 손사래를 쳤다. 뻔한 대답을 할 걸 알았다. 유키무라가 그녀를 아는 만큼, 그녀도 유키무라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차는 내가 알아서 시켰는데 괜찮지?”

 

  정말 퍼펙트한 타이밍이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점원이 찻주전자와 함께 차를 내려놓기 시작했다. 향긋하게 퍼지는 향이 긴장했던 마음도 누그러뜨려주었다. 유키무라라면 물론 그 효과까지 알아두고 차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래서 대답을 들어도 될까?”

  “본론부터야?”

  “. 난 오래 기다렸거든.”

 

  유키무라가 생긋 웃었다. 그녀가 어떻게 받아들이든 간에 유키무라에게는 사실이었다. 처음 눈에 들어 왔던 그 날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었는지는 혼자만 알 수 있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르지만 그 시간이 어떤 속도로 흐르는지는 개개인의 감각에 편차가 있는 법이다.

 

  “내 대답은 예스야.”

  “그 대답을 기다렸어.”

 

  찻잔 위로 뻗어온 유키무라의 손이 자연스레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꼭 깍지 낀 손이 따뜻했다. 찻잔으로 데워진 온기인지, 원래 그의 체온인지는 아직 모를 일이었다.

 

  “그럼 이게 정식으로 첫 데이트가 되겠네.”

 

  단단히 각오를 하고 나왔는데도 그녀의 심장은 멋대로 질주했다. 볼이 발그레해진 그녀가 꼬물꼬물 제 손을 빼내었다. 이렇게 미친 듯이 뛰는 심장박동을 전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바꾼 그녀가 도도하게 말했다.

 

  “차 마시고 뭐 할 건데?”

  “, 첫 데이트인 만큼 근사한 저녁부터?”

  “내 맘에 안 들면 도망갈 거야.”

 

  유키무라가 풋 웃었다. 장난스러워 보이면서도 조금……

 

  “이미 늦었어.”

  “뭐가?”

  “돌아가기엔 늦었다고.”

 

  그래, 욕심이 넘치는 웃음이었다. 독점욕과 집착이 뒤섞인 얼굴.

 

  “네가 그 문을 연 바로 그 순간부터 난 절대로 너를 놓지 않기로 다짐했거든.”

 

  유키무라의 말 그대로였다. 그녀는 그 표정을 보고 확신했다. 이미 발을 빼기도, 돌아가기에도 늦었다. 그렇다면 전적으로 유키무라를 향해 달리는 수밖에. 지지 않을 정도의 사랑으로 유키무라를 옭아매는 수밖에.

 

  “그래주면 나야 좋지.”

  “후후, 고마워.”

 

  금세 욕망을 지워내고 부드럽게 웃는 유키무라가 조금 얄미웠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그녀는 스스로의 의지로 이 카페에 들어섰다.

 

  “올 거라고 믿었잖아.”

  “믿는 거랑 현실은 다르지.”

  “말은 잘해요.”

 

 

 

 

 

*내스급 163화 기준의 내용

*170화 언저리까지밖에 아직 안 읽어서... 이후의 내용과 충돌할 수도 있습니다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몸을 일으켰다. 답지 않게 식은땀도 흘린 모양이었다. 더위도 추위도 잘 타지 않는 체질이 되어도 식은땀은 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손바닥으로 대충 얼굴을 쓸어내리며 시계를 보았다. 320. 아직 어둠 속에 은은한 달빛만이 빛날 시간이었다. 밖으로 나가볼까 하다가 그만뒀다. 조금만 신경을 곤두세워도 형이 아무 문제 없이 저 방에서 자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가 있으니까. 다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제야 제대로 숨을 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조금 무서웠는지도 모르겠다. 꿈이었는데. 그저 꿈. 꿈을 꾸는 것 자체가 오랜만이었다. 악몽이라면 더욱. 형이 나온 건 더더욱. 갑자기 마지막 장면이 선명하게 떠올라 섬뜩해졌다. 다시 방 밖으로 신경을 세웠다.

 

  어쩐지 다시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

 

  타고나길 이렇게 태어난 탓에 절망감을 느낀 적은 거의 없었다. 부모님이 나를 밀어냈을 때도 형은 날 사랑했다. 너무 어려서 그랬는지, 아니면 나랑 달리 F급으로 태어난 탓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형은 내게서 어떠한 이상함도 느끼지 못한 모양이었다. 다른 가족과 다르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걸 생각하면 형도 너무 어렸던 게 아닐까 싶지만.

 

  물론 나도 형을 사랑했다. 그래서 멀리했다. 나 때문에 형이 위험해지는 게 싫었다. 하지만 그게 절망할 일은 아니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지. 형을 만나지 못하는 게, 멀리 두어야 하는 게 가슴이 찢어지도록 고통스러웠지만 절망스럽지는 않았다. 어차피 내 손바닥 안이었다. 형이 뭘 하든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내 손으로 놓은 게 아니었다. 애초부터 그럴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

 

  이건 달랐다. 나는 빼앗겼다. 내 손에 있던 형을 빼앗겼다. 놓친 셈이었다. 그 순간엔 절망감밖에 들지 않았다. 타고나길 이렇게 태어났으면서도 형을 지키지 못하고 무력하게 쳐다보고만 있어야 하는 심정. 어쩐지 꼭 겪어본 것만 같아서 더 구역질이 났다. 내가, 내가 지키겠답시고 오만방자하게 손에서 놓은 척을 하는 바람에 놓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답지 않게 눈물이 터졌다. , 사랑하는 내 형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던전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번에는 나를 바쳐서도 형을 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빼앗긴 탓에 그 순간에는 기억하지 못했던 어느 날의 꿈처럼.

 

  많은 걸 바란 게 아니었다. 난 형이 살기를 바랐다. 나 때문에 위험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밀어냈는데, 억지로 만나지 않았는데, 날 미워하도록 내버려뒀는데. 꿋꿋이 버텨왔던 3년이 산산이 조각나 온몸에 박히고 동시에 타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럴 순 없어. 내가 있는 세상에서 형이 사라지다니 절대로 안 돼. 내 옆에 없어도, 날 미워해도 상관없으니까 절대로, 절대로 사라지는 것만은 안 돼.

 

*

 

  어떻게 던전까지 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무엇을 바쳐서라도 형을 구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형을 덮치고 있는 게 무엇인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불태웠다. 번쩍 고개를 들고 날 보는 표정이, 그 미소가 더없이 안심됐다.

 

  결국은 형 앞에선 울지 않겠다는 어린 날의 다짐조차도 깨뜨리고 말았다. 나는 형을 안고 울었다. 형이 살아 있어서, 나를 안아줘서, 여전히 그때와 같은 온기로 내 등을 두드려줘서. 나를 이 세상에 두고 가지 않아서.

 

*

 

  침대에 걸터앉아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았다. 그 꿈을 꾼 게 얼마 전이더라? 형을 세성에 맡겨놓기 전이었을 텐데, 왠지 몇 달도 전의 일만 같았다.

 

  어릴 적에 악몽을 꾸면 형이 꿈은 반대라고 곧잘 말하곤 했다. , 정말 반대였으면 내가 갈가리 찢겨 나갔어야 했겠지만. 다행이다. 꿈이 사실이 되지 않아서. 진심으로.

 

  “유현아, 기다렸어? 먼저 자도 되는데.”

  “팔베개하고 자장가 불러준다며.”

 

  진짜 해줘? 하고 형이 푸시시 웃었다. 어릴 때와 똑같이 형의 팔을 베고 누웠다. 형도 피곤한지 자장가 소리가 웅얼웅얼 뭉개졌다. 그래도 좋았다. , , 규칙적으로 들리는 심장 소리까지 더해져서 한없이 편안했다. 어쩐지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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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턴 잡소리.

170화 대충 그 언저리...까지 다 읽으셨다는 전제 하에 안 가리고 얘기하니

혹시라도 안 보신 분이 계시다면 넘어가주세요.

 

 

 

성현제가 예민한 탓에 회귀 전의 자신과 합쳐지지 못했다던데.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유현이도 어쩌면,

어떠한 형태로 회귀 전의 기억이 남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유현이가 유진이를 구하러 온, 회귀 전의 사건이,

그러니까 이 소설의 시작 부분에 있던 사건이

어떠한 형태로 유현이에게 남았을 것 같아서.

 

물론 회귀 전 세계의 유현이는 죽었고

그래서 합쳐지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하얀 새가 시체를 가져간 이상

어떠한 형태로 남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어.

 

그래서 그게 기억은 아니고 꿈으로 남았다면,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리고 유현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 mm)

유진이도 유진이지만

스무살짜리가, 아니지 3년 전이면 열일곱살짜리가

뭘 그렇게 대단하게 잘 안다고

형 위험해질까 봐 떨어뜨려 놓았을까 싶은 거야.

 

애기 때부터 부모가 저를 멀리하는 걸 알고 있었다면

유현이에게 세상은 곧 한유진이었을 텐데

(아기들의 세상이 부모로 한정되는 걸 생각하면...)

얼마나 피눈물 흘리면서 멀리했겠어.

 

회귀 전 유현이가 그렇게 부리나케 던전으로 달려와서

유진이를 살려놓은 건 역시

형이 내 곁에 없는 것도, 날 미워하는 것도 다 괜찮지만

형이 내 세상에서 사라지는 건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 아닐까...

 

유현이에겐 형이 있다는 자체가 세상이 존재하는 것과 같았을 테니까.

자신이 사랑받는 존재라는 걸 알려준 사람이잖아.

다른 모든 이유를 떠나서 그냥 존재 자체로 자신을 사랑해준 사람이니까.

 

그래서 성현제 말대로 유현이는 영원히 유진이에게 동생일 수밖에 없겠지만

뭐, 어쩌겠어.

아이템과 스킬이라는 효율을 추구하는 관계보다는

맹목적이긴 해도 한유진도 한유현도 절대 끊을 수 없는

혈연관계가 더 낫지 않겠니, 유현아?

 

 

아무튼 예림이까지 셋이서 알콩달콩 예쁘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

유진이도 유현이도 예림이도 각자 결혼해서 가족이 더 늘어도 좋고

그냥 셋이서 피스랑 블루랑 삐약이랑 (이하생략) 데리고 계속 평생 살아도 좋고.

아무튼 행복하기만 해....

 

 

 

HAPPY SUMMER VALENTINE DAY

 

올캐러 드림 트윈지

 

후지 슈스케 / 에치젠 료마 / 카미오 아키라 / 미즈키 하지메

아쿠츠 진 / 아쿠타가와 지로 / 사에키 코지로 / 유키무라 세이이치

니오 마사하루 / 마루이 분타 / 히라코바 린 / 아라가키 코이치

치토세 센리 / 토야마 킨타로 총 14명

 

A5 62p 소설 / 6,000원



 

Dear Prince 

7인 드림 앤솔로지 

자이젠 히카루 / 니오 마사하루 / 오오토리 쵸타로 
에치젠 료마 / 쟈칼 쿠와하라 / 아토베 케이고 / 토야마 킨타로 

A5 136p 소설 / 8,000원

 

 

 

 

My Only Lady 

히요시 와카시, 키테 에이시로 드림 

A5 32p 소설 / 3,000원


 

통판은 전부 우체국 등기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구입하실 책 종류와 권수,

구매자분 성함, 입금자분 성함, 받으실 도로명주소, 신우편번호(5자리), 연락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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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기비는 권수 상관없이 동일하게 2,500원을 받습니다.

계좌번호는 대댓글로 알려드립니다 :)

 

감사합니다 X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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