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치토세 센리 드림 (For. 메이님)




 “어디 가?”

 “산책.”


 산책이라니. 여행 동아리에 들어와서 다 같이 여행을 와놓고 혼자 산책이라니!

 하지만 메이는 넓은 아량으로 치토세를 이해해주기로 했다. 어디 이런 일이 한두 번이던가. 번번이 속으로 ‘혼자서 산책이라니!’하고 외치곤 했지만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잽싸게 메이는 운동화 속에 발을 밀어 넣었다. 다들 각자 가고 싶은 곳을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른 동아리처럼 빡빡하게 스케줄을 정해놓고 멤버 전원이 함께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에 감사했다. 몇몇 후보지에 따라 팀을 나누는 멤버들의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살금살금 현관문을 나섰다. 아무도 그런 메이를 눈치 채지 못했다. 애초에 메이보다 배는 덩치가 큰 치토세가 나서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두 사람이 사귀는 건 모두 알고 있으니 딱히 숨겨서 나갈 필요는 없었다. 조 편성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을 뿐, 워낙에 훌쩍 사라지는 치토세와 같은 타입은 아니었다.


 “어디로 가는데?”

 “발 닿는 대로 간데이.”


 치토세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따라나선 게 좋은 선택이었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여태까지의 여행과 달리 이번 목적지는 시골이었다. 유명하다 하는 관광지들을 웬만큼 돌고 나자 좀 더 작은 곳들을 찾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휘황찬란한 조명이 반기는 도시에서 은은한 풀 내음이 반기는 시골로 오게 되었다. 주변에 작은 온천이 있었고, 대나무 숲도 있었다. 메이가 걱정하는 것은 ‘발 닿는 대로’ 걷는 치토세가 어느 곳으로 갈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걸을 때는 좋지만 슬슬 돌아가자며 정신을 차릴 쯤에는 전혀 모르는 곳에 도달해 숙소로 돌아가기 위한 두 번째의 모험을 한 적이 태반이었다. 지금까지는 온갖 표시가 되어줄 건물과 간판과 표지판이 있었지만 여기에는 그런 게 딱히 없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크기도 모양도 비슷비슷한 여관 몇 채, 원 형태로 여관을 둘러싼 허름한 집 몇 채, 그리고 논. 물론 메이가 이 모든 것들을 표식 삼아 길을 찾을 일은 없겠지만―길은 치토세가 늘 어떻게든 찾으니까― 괜히 불안해지는 감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메이쨩, 무섭나.”

 “길 잃으면 어떡해?”

 “내 믿으래이.”


 치토세가 씩 웃었다. 잠시 멍청히 쳐다보는 바람에 발이 멈췄다. 짧은 말 한마디에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고, 연처럼 두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커다란 손이, 메이가 아무리 손을 쫙 펼쳐도 겨우 가운데 마디까지밖에 닿지 않는 커다란 손이 다가왔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심장이 뛰었다. 연줄을 놓칠 것 같았다. 그대로 연이 날아가 버리지 않도록 메이는 얼른 치토세의 옷깃을 붙잡았다. 꼭 길 잃은 꼬마가 된 기분이었다. 당겨지는 힘에 고개를 숙인 치토세가 다시 웃었다. 자연스럽게 옷깃에서 손을 떼어내고 부드럽게, 그리고 아주 포근하게 감쌌다.


 “이라믄 되제.”


 의도하던 바와 달리 연줄은 멀리 멀리 날아가는 듯 했다. 하지만 손이 따뜻했다. 아무래도 좋아져서, 메이는 배시시 웃으며 치토세를 따라 걸었다. 이제 슬슬 해가 뜨거워지기 시작하는 초여름이었다.



*



 치토세는 어릴 적부터 방랑 기질을 타고 나서 계속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고 얘기했었다. 그래서 이 여행 동아리에 들어오게 됐다며, 어쩌면 길게 늘어놓을 수도 있는 말들을 간단하게 압축했다. 그리고는 더 할 말이 없는지 시원하게 인사를 했다. 그리 넓지 않은 동아리방에 빙 둘러앉은 선배들이 일제히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잠깐의 박수갈채가 끝나고, 또 다른 신입생인 메이의 자기소개 시간이었다.


 「어, 저는 어디 돌아다니는 건 좋아하는데 혼자 갈 엄두는 안 나서 왔습니다!」


 메이 역시 그 이상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까와는 조금 다른 의미의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모든 선배들은 신입생을 귀엽다는 듯 쳐다보았고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자기소개를 할 사람이 덩그러니 둘뿐이었기에, 선배들은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하고자 저마다 자기의 이름과 학번을 외쳐대었다. 시장통 마냥 금방 들끓어 오른 분위기를 정리한 건 회장이었다. 박수 두 번으로 시선을 모으고선, 치토세와 메이를 위해 간단한 동아리 수칙을 이야기했다. 이어 동아리의 주요 활동이자 한 달에 한 번씩 가는 일박이일 여행 일정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리고 ‘다른 동아리와는 다르게, 우리는 편안함을 추구하기 때문에 특별한 일정은 짜지 않는다’며 회장이 어깨를 으쓱했다.


 「역사가 유구하고, 배울 게 많고, 어쩌고저쩌고. 그런 거 다 필요 없어. 그냥 가보고 싶어서 가는 거야. 경치가 예쁘대서, 엄청 맛있는 라멘집이 있대서, 거기 온천이 효과가 좋대서, 거기 신사 내의 연못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대서, 어떤 이유든 괜찮아. 이유가 없어도 돼. 안 가봤으니까 그냥 가보고 싶어져서요, 뭐 그런 이유도 좋아. 그냥 가고 싶은 곳을 때마다 다수결로 정해서 가는 거야.」


 메이는 의자 끄트머리에 앉아 엉덩이를 달싹였다. 당장이라도 여행을 떠날 것처럼.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다른 동아리와 달리 이름마저도 소박한 ‘H.T.’―Healing Travel―는 만들어진지 이제 겨우 4년째였다. 그래서인지 신입생은 메이와 치토세 둘 뿐이었다. 동아리 홍보를 막 했을 때는 관심을 가진 사람이 더 있던 모양이지만, 어쨌든 최종적으로 명단에 이름을 올린 건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신입생은 메이 혼자나 다름없었다. 치토세가 동아리방에 코빼기도 내비치질 않아 수소문 해보니 학교에 나오질 않는다고 했다. 설명회를 가졌던 날, ‘그래도 동기니까’하는 마음으로 어렵사리 말을 건네 얻어낸 메일 주소도 소용이 없었다. 치토세가 핸드폰을 단순한 장신구가 아닌 연락수단이라는 것을 까먹은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여행지 선정 회의 한다는데 안 와?]하고 보내면 그 다음날 점심 즘에야 [아, 까먹었다]라고 답이 오는 수준이었으니까.

 그럴 거면 학교를 왜 다니는 거지?

 그런 메이의 의문을 풀어주기라도 할 것처럼, 치토세는 신기하게도 첫 여행 날이 가까워 올 즘부터 학교를 나오기 시작했다. 막상 한 번 나오니 마음이 바뀌었는지 그 이후론 학교도 꽤 열심히 나왔고 강의도 빼먹지 않고 착실히 듣더라고, 치토세의 과 동기로부터 전해 들었다. 강의실을 오가다보면 가끔 마주치기도 했다. 가볍게 목례로 인사하는 치토세는, 언제나 시끌벅적한 동기들 사이에 뒤섞여 있는 메이와 달리 항상 혼자였다. 웬만한 신입생들은 메이와 그 동기들처럼 항상 활기차고 즐겁고 시끄러운 편이었지만 치토세는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메이는 휘적휘적 복도를 나아가는 커다란 뒷모습이 자꾸만 가슴을 콕콕 찔러 대 몇 번이고 돌아보기를 반복했다.



*



 “길 잃은 거야?”

 “길은 아는데 못 간다 안 카나.”

 “왜?”

 “버스 끊겼데이.”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메이는 입을 딱 벌렸다. 해진 지 그렇게 오래 되지 않은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메이의 착각인 모양이었다. 발 닿는 대로 치토세를 따라 걷다가 작은 연못을 발견했고, 그 연못가에 앉아서 떠들다가 잠깐 잠이 들고, 눈을 떴더니 해가 저 멀리 넘어가면서 어둠이 찾아오고 달님이 인사를 하고……. 해가 지는 걸 봤으니 버스정류장까지도 금방 왔다고 생각했다. 주저하며 핸드폰 화면에 불을 켰다. 커다란 숫자가 네 개 뜨는 것만 보고 메이는 얼른 다시 핸드폰을 주머니 속에 밀어 넣었다. 급할 것 없단 생각에 천천히 걸은 것도 한몫 했겠지만, 해가 길어지는 계절이 다가왔다는 사실 자체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지? 거짓말. 센리랑 잠깐 놀았을 뿐인데.

 여태까지 연락이 없는 선배들이 더 굉장했다. 정말 동아리의 모토대로 너무 프리해서 탈이라면 탈이랄까. 메이가 한숨짓는 동안 치토세는 정류장의 표지판을 들여다보았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차분하게 훑고서 다시 시선을 위로 옮겼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아래까지 천천히 내려왔다. 그리고 메이를 향해 돌아서선 어깨만 으쓱해보였다.


 “진짜로 없어?”

 “쫌 걷재이.”


 이런 상황이 되어서도 치토세는 달리 걱정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을 얼굴에 덕지덕지 매달고 있는 메이가 안심할 수 있도록 그런 것은 아니고, 원래 성격이었다. 유유자적하는 타입이라 교통수단에 크게 구애받지를 않았다. 그나마 치토세가 대중교통을 챙기는 건 메이와 함께 있기 때문이었다. 치토세만큼의 덩치도, 체력도 없는 메이와 무작정 함께 걸어 다니는 건 분명히 무리였다. 때문에 치토세는 여기저기 다니다가도 꼭 숙소로는 돌아갔다. 걸어서 갈 수 있지 않을까 묻고 싶었지만 메이는 꾹 입을 다물었다. 진짜로 걸어서 돌아갈 수 있다하더라도 제 힘으로 거기까지 가는 게 무리였다. 분명 얼마 못 가 치토세 등에 업히게 될 테니 처음부터 시도하지 않는 게 나았다.

 그러면 어쩌지?

 치토세가 손을 내밀었다. 메이는 꿀꺽 침을 삼키고 손을 맞잡았다. 커다란 손만큼 따뜻한 온기가 마음을 가라앉혔다. 치토세는 성큼성큼 걷지 않았다. 제대로 메이의 발걸음에 맞추어 걷느라 느릿느릿했다.


 “어디로 가?”

 “메이쨩 노숙 시킬 순 없은께 어디든 가야제.”

 “이 방향으로 가면 뭐 나와?”

 “아까 갔던 시내.”


 메이는 낮에 지나쳐왔던 번화가를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방향 감각과 거리 감각이 엉망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계속 일직선으로 걸어온 줄 알았는데 그런 것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낮에 번화가를 빠져나온 뒤로 한참을 걸어서야 연못을 발견했는데 막상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았는지, 금세 빛나는 네온사인이 눈에 들어왔다. 은은한 달빛과 별빛에만 의지해 걷다가 밝은 빛을 마주하려니 눈이 아파왔다. 메이는 주춤주춤 치토세에게 달라붙었다. 잡고 있던 손을 풀어 팔짱을 끼고―일방적으로 팔을 안은 꼴이지만― 눈을 감았다. 여전히 눈앞이 부셨지만 이 정도는 참을만했다. 낮게 치토세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메이쨩, 업으까?”

 “아냐, 눈 뜰 거야!”

 “업혀도 된다.”


 메이는 열심히 도리질을 쳤다. 눈을 다시 뜨고 올려다보자 치토세는 피식 웃었다.


 “배 안 고프나.”

 “배고파!”

 “파미레스 가재이.”


 방금 전까지 별빛이 쏟아지는 조용한 시골길을 걸어왔다는 걸 까먹을 정도로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시끌벅적 떠드는 소리에 여러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대중가요가 뒤섞여 알 수 없는 문장으로 바뀌었다. 탁탁 보도블록에 부딪히는 신발, 빠앙 길게 울리는 클랙슨에 어서옵쇼 호객하는 남자들까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동아리의 근간이 되는 ‘힐링’이란 두 글자가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여기 엄청 정신없다. 낮이랑은 다르네.”

 “마, 온천 놀러왔다 여 와서 술 마시는 거 아이겠나.”

 “온천엘 와 놓고 왜 이런 데서 술을 마시지.”


 고개를 한 쪽으로 기울인 메이가 진짜로 의문스러워 하는 표정이라 치토세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얼굴을 돌리긴 했지만 연신 어깨가 들썩거리는 통에 메이는 볼을 부풀렸다.


 “왜 웃어?”

 “귀여워가.”

 “뭐가?”

 “메이쨩 표정.”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도 메이의 볼은 충분히 붉게 보였다. 부풀었던 볼에서 스르륵 바람이 빠져나갔다. 대신 메이는 치토세의 팔을 좀 더 품으로 끌어당겼다. 씩 웃은 치토세는 부끄러워하는 것조차 귀여운 여자친구를 위해 잠시 발을 멈췄다.

 앞으로 나가려던 메이의 몸이 반동으로 뒤로 홱 밀려났다. 치토세의 팔이 가볍게 그녀의 등을 받쳤다. 그러더니 한껏 허리를 굽히고, 무릎도 가볍게 굽혔다. 도장 찍듯 꾹 이마에 입술을 찍은 치토세가 슬쩍 손가락으로 메이의 턱을 밀어 올렸다. 메이는 코로 한껏 숨을 들이켰다. 입술이 맞닿는 강렬한 찰나가 지나고 잠시 혀를 섞었다. 짧은 입맞춤 뒤에 따라오는 아쉬운 숨결이 코끝을 간질였다. 아마도 길고 긴 입맞춤을 하고 싶었겠지만, 아직 길거리에 있다는 사실 때문인지 크게 자제심을 발휘한 듯 했다.


 “센리, 반칙이야.”

 “글나.”

 “그래.”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피하면서도 메이는 더 단단히 치토세의 팔을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바닥을 향해 고개를 푹 숙였다. 온통 회색빛인 아스팔트 위에 가끔 사람들의 신발이 끼어들어 색을 더했고, 가로등 불빛은 중간 중간 채도를 바꿨다. 치토세는 바닥만 들여다 보며 걷는 메이가 번잡한 거리에 치이지 않도록 천천히 걸었다. 길을 헤치고 가기보다는 상대방이 피해가도록 만드는, 부드럽고 느린 걸음이었다.



*



 “여기 이십사시간이래!”


 슬슬 메이의 발이 한계를 외칠 때가 되려던 참이었다. 이 복잡한 번화가의 끄트머리에 도달해서야 패밀리레스토랑을 마주했다. 메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간판에 ‘24h’라는 글씨가 뚜렷하게 빛났다. 술기운에 한껏 시끄러운 거리에 어울리지 않게, 패밀리레스토랑 안은 너무나도 평화로워 보였다. 


 “밤 여서 보내도 괘안켔나.”

 “일단 밥 먹고 생각하지 뭐.”


 메이의 작은 몸이 자동문 앞으로 나아갔다. 밥 이야기를 하니 그제야 허기가 느껴졌다. 치토세가 패밀리레스토랑에 성큼성큼 입장한 메이를 따라 걸어 들어가는 동안 어딘가에 숨어있던 직원이 후다닥 튀어나왔다. 어서 오세요, 두 분 손님이신가요? 익숙한 고정멘트와 친절한 미소가 두 사람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붐빌 저녁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레스토랑 안은 한산한 편이었다. 직원은 커다란 창 옆의 테이블 위에 메뉴판을 내려놓았다. 마주보는 대신 치토세의 옆으로 붙어 앉은 메이가 그 메뉴판을 끌어당겼다.


 “이것도 맛있어 보이고, 이거랑 이거도……. 음…….”


 바쁘게 움직이는 작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치토세는 열심히 시선으로 따라갔다. 돈가스에서 함박 스테이크로, 파스타에서 그라탱으로, 샐러드에서 스프로 연신 오가는 손가락은 좀처럼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마침내 메이의 작은 눈이 치토세를 향해 돌아왔다.


 “빈 속이니께 스프부터 먹재이. 메이쨩, 뭐가 좋나.”

 “다 좋은데. 센리는?”

 “내는 아무래도 고기가 좋제.”

 “그럼 돈가스?”

 “이것도 시키재이.”


 이번엔 치토세의 손가락이 아까 전부터 메이의 손가락이 여러 번이나 지나쳤던 파스타를 가리켰다. 놀란 듯 두 눈이 동그래진 메이가 치토세를 올려다보았다.

 오늘 메이쨩 윽수로 귀엽구마.

 평소에도 귀엽다고 생각했지만, 오늘은 더했다. 방울 달린 끈으로 질끈 동여맨 포니테일, 치토세가 선물한 목걸이, 활동성 좋게 나온 면 원피스, 작은 발에 꼭 맞는 운동화. 여행에 최적화된 패션이고, 동아리 여행을 갈 때면 보통 보게 되는 모습이기도 했다. 평소와 다른 것은 무엇일까? 화장이 특별히 다른 것 같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머리끈이나 가방이 바뀐 것도 아니었다. 굳이 바뀐 걸 찾자면, 메이를 좋아하는 마음이 더 깊어진 것이라고나 할까.


 “나 이거 고민했는데. 어떻게 알았어?”

 “메이쨩 보고 있으믄 알제.”


 결국 치토세는 메이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왠지 단 맛이 도는 것 같았다. 얼굴을 붉히는 메이를 품으로 끌어당기고 치토세는 손을 번쩍 들어 직원을 불렀다. 메뉴판을 몇 번 짚는 것으로 주문은 금방 끝났다. 품속에서 살짝 고개만 들어 테이블 주위를 확인한 메이는 그대로 다시 고개를 묻었다.


 “있잖아, 센리.”


 웅얼댈 생각은 아니었지만 옷에 고개를 묻고 있으니 절로 소리가 그렇게 났다. 그나마도 나온 소리는 옷 사이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꽤 오랫동안 메이를 괴롭히던 소리와 시선들이 우수수 떠올랐다.

 연락은 여전히 잘 안 되는 편이지만, 그래도 애정표현은 많이 하는 편 같은데. 함께 있으면 날 신경 써주는 게 느껴지고, 사랑받는다는 기분도 들고, 귀엽단 소리도 많이 하고.

 아무리 긍정적인 메이라도, 치토세에 대해 주변 사람들의 똑같은 평가가 반복되는 건 조금 신경이 쓰였다. 아니, 많이 마음에 걸렸다. 그 사람들보다는 자신이 더 치토세 센리를 잘 안다고 자부했지만, 말은 원래 반복될수록 힘을 가지는 법이었다. 그 말들로부터 파생된 불안감은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와?”


 뭉개진 소리는 끽해야 치토세의 가슴팍에서 사라졌을 줄 알았는데, 용케 귓가에 닿은 모양이었다. 파묻었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체온으로 조금 데워진 공기에 코가 간지러웠다. 거리가 가까운 만큼 치토세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떨어지는 건 아쉬웠지만 제대로 된 대화를 하려면 얼굴을 보는 편이 좋았다. 메이가 옆으로 조금 떨어져 앉자 시선이 금방 따라왔다. 메이는 한껏 고개를 들고, 치토세는 한껏 시선을 낮춰 눈을 마주쳤다.

 잔잔한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꾹 깨물고, 크게 숨을 들이켜도 제 입으로 뱉어내기 힘든 건 매한가지였다. 치토세는 재촉하지 않았다. 메이의 시선이 돌아가면 돌아가는 대로, 다시 마주쳐오면 마주치는 대로 가만히 메이를 보고만 있었다. 꽤나 오래, 애꿎은 소파만 노려보던 메이가 마침내 주먹을 꽉 쥐었다.


 “나 같이 다니는 거 귀찮아?”


 순간 눈이 커지는 걸 목격한 메이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가렸다.

 역시 말하지 말 걸 그랬어.


 “와? 그래 보이나?”

 “아니. 근데 막 다른 애들이…….”


 보니까 너만 좋아서 매달리는 것 같더라. 걘 별 생각 없어 보이던데. 연락도 그렇게 잘 안 된다면서. 원래 방랑벽 심하다며? 그런 애랑 계속 사귀면 너만 손해야, 얼른 헤어져. 가지고 노는 거 아니니? 어쩌면 귀찮아하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런 성격이면 나중에 결혼해서도 힘들다. 미리 맘 정리해 둬.

 그 모든 말들을 밖으로 꺼낼 순 없었다.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점점 기분은 바닥을 향해 하향곡선을 그렸다. 차라리 말하지 말 걸 하는 후회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어떤 대답이 나올지 무서웠다. 묻기 전까지는 그냥마냥 즐겁기만 했는데, 함께 있는 게 좋기만 했는데 지금은 어디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메이쨩, 내 고백 잊었나.”

 “그럴 리가!”


 놀라서 번쩍 고개를 들었다.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항상 바람처럼 나타났다 바람처럼 사라지는 이상한 애는 메이 안에 조금씩, 조금씩 자리를 잡았고, 그렇게 두 달이 지나간 어느 평범한 월요일에 ‘이상한 애’라는 인상에 걸맞지 않게 평범한 고백을 했다. ‘내는 메이쨩이 좋다.’는 담백한 고백에 왜 그렇게 심장이 쿵 내려앉았는지 알 리 만무했다. 다만, 이어지는 솔직한 말이 메이를 완전히 흔들었던 것만큼은 확실했다.


 ‘내는 항상 발 닿는 대로 가는데, 자꾸 메이쨩 앞인 기라.’


 그 말에 얼굴이 터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열이 올라서는 대답을 더듬거렸던 기억까지 선명했다.

 치토세는 웃고 있었다. 고백했던 그 날처럼, 쑥스러운 듯 보이면서도 아주 부드러운 미소로 메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랑벽 심한 기는 내도 안다. 그캐도 메이쨩 좋다카는 것도 진짜래이. 아니믄 이래 같이 안 있는다.”


 치토세는 씨익 웃었고, 메이는 그에 눈물이 솟았다. 불안감의 폭풍 속에서 갑자기 구출된 것 같았다. 온몸으로 밀려드는 안도감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잔뜩 긴장했던 어깨가 아팠다. 이렇게 치토세의 말 몇 마디로도 충분히 안심되고 행복한데 뭘 그렇게 불안해했는지, 불과 몇 분 전의 자신이 웃겼다.

메이가 코를 훌쩍이자 치토세의 손이 다가왔다. 가볍게 메이의 볼을 감싼 뒤, 엄지로 살짝 눈물을 훔쳤다. 메이는 그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손으로 전해지는 온기가 참을 수 없이 기뻤다.


 “내는 말이제, 막 나가 돌아댕기고 싶다. 근데 메이쨩하고도 같이 있고 싶다 안카나. 그래가 이래 같이 다니는 기다.”

 “응. 미안해, 이상한 소리해서.”

 “아이다. 내는 메이쨩이 좋으니께, 더 노력할 끼다.”


 메이는 손을 놓지 않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움직일 때마다 치토세의 팔이 같이 움직이는 게 좋았다. 배시시 웃으면 따라 웃어주는 게 좋았다. 한 쪽만으로도 메이의 얼굴이 다 가려질 만큼 큰 손이 좋았고, 뒤에 서면 메이가 완전히 사라진 듯 보일 정도로 큰 덩치도 좋았다. 무언가 발견하면 소곤대며 ‘메이쨩’하고 부르는 게 좋았고, 가끔 장난치며 보이는 천진난만한 표정도 좋았고, 입술을 가볍게 눌렀다가 떨어지는 감질 나는 키스도 좋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이렇게 좋은 것투성이인데 새삼 아무 것도 아닌 걸로 불안해했단 생각이 들었다.


 “센리, 너무 좋아!”


 점원의 헛기침이 없었다면 메이는 그대로 치토세의 품으로 뛰어들고도 남았을 터였다. 과한 스킨십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니라 그다지 부끄럽지는 않았다. 다만,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스프를 보자 사랑으로 충만한 줄 알았던 몸 어딘가에서 울리는 배고프단 신호를 무시하기 힘들었을 뿐이었다. 


 “일단 먹재이.”

 “응! 센리도 많이 먹어!”


 스프는 따뜻했고, 뒤이어 나온 돈가스는 바삭거렸으며 마지막으로 나온 크림 파스타는 조금 느끼했다. 주스와 탄산을 곁들인 식사는 생각보다 만족스러웠다. 늦은 시간이니만큼 패밀리 레스토랑 안의 손님은 두 사람뿐이라 조용했다. 그릇과 수저가 부딪히는 달그락 소리가 치토세와 메이의 대화 사이에 조미료처럼 추가되었다.




 느릿느릿 이어지던 식사가 끝나자 피로가 급격히 몰려 왔다. 물론 하루 종일 돌아다녔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여전히 메이가 치토세의 산책 아닌 산책을 따라다니기엔 체력이 부족했다. 결국 메이는 ‘에라, 모르겠다.’하는 심정으로 소파 위에 드러누웠다. 고개가 치토세의 다리와 소파에 어중간하게 걸쳐지자, 꾸물꾸물 어깨를 움직여 좀 더 몸을 치토세 쪽으로 끌어당겼다. 툭 내려놓은 고개는 그대로 치토세의 무릎 위에 놓였다.

 역시 베개로선 좀 높은가.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치토세의 체온이 느껴지는 그 자체로 충분히 좋았다.


 “메이쨩, 묵고 바로 누움 안 된다.”

 “하루쯤은 괜찮아~”

 형광등 불빛이 강하다고 생각하는 찰나, 치토세의 고개가 불쑥 눈앞으로 다가왔다. 베싯 웃은 메이는 양손을 번쩍 들어 치토세의 목을 끌어당겼다. 치토세는 알아서 고개를 숙여줄 테니 메이는 손에 잔뜩 힘을 주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입술을 맞대었다. 꾸욱 누르는가 싶더니 떨어지는 입술을 얼른 쫓아갔다. 꾸우욱, 만족했다고 하긴 조금 아쉬운 정도로 다시 입을 맞췄다가 힘을 툭 풀었다. 치토세가 얼른 한 손으로 메이의 머리를 받쳤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제 무릎 위에 다시 내려놓았다.


 “딴 가스나들 얘기 듣지 말래이.”


 갑자기 튀어나온 말에 메이는 잠깐 눈을 깜빡였다. 몇 초가 지나고서야 식사가 나오기 전에 했던 대화의 연장이라는 걸 깨달았다. 볼이 뜨거웠다. 그런 말을 뱉은 몇 십분 전의 자신이 바보 같았다. 메이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어버렸다. 머리끝까지 붉어졌을 얼굴을 보이기가 미안했다.


 “응.”


 덮은 손 사이로 웅얼거렸다. 아까 전의 부름도 들은 치토세니, 지금의 대답도 들을 거라 믿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정말로 대답이 돌아왔다.


 “잘 끼가.”

 “엄청 부끄럽고 미안한데 엄청 좋으니까 이대로 있을래.”


 치토세는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쿡하고 작게 웃었을지, 아니면 늘 그렇듯 씨익 웃었을지, 그것도 아니라면 키스하기 직전의 약간 풀어진 눈으로 보고 있을지 궁금했다. 손가락 사이로 살짝 볼까 싶었다가 참기로 했다. 메이는 눈을 감은 채로 얌전히 손을 배 위에 얹었다. 피곤했던 탓인지 금세 졸음이 밀려왔다. 치토세가 카디건을 덮어주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솔솔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



 어느 순간, 메이는 갑자기 눈을 떴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들리고 사람들 말소리도 들렸다. 완전히 정신을 차리질 못해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여기가 패밀리레스토랑이란 사실이 떠올랐다. 어느새 아침이 된 모양이었다. 메이는 부스스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쭉 켰다.


 “잘 잤나, 메이쨩.”

 “응. 나 엄청 잤네.”


 어찌나 제대로 잤는지 목소리가 반쯤 잠겨 있었다. 물을 마실 요량으로 테이블 쪽으로 몸을 돌린 메이가 무심코 센리를 돌아보았다.


 “센리, 안 잤어?”


 치토세의 눈이 빨갰다. 평소에도 가끔 밤을 새고 돌아다니다가 등교한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놀라지 않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지난밤엔 어딘가를 걷는 게 아니라 패밀리레스토랑에서 얌전히 앉아있기만 했다. 치토세는 그저 픽 웃을 뿐이었다.


 “윽수로 설레가 몬 잤다.”

 “에, 왜?”

 “자는 얼굴 윽수로 예뻐서 키스하고 싶었다 안카나.”


 갑자기 얼굴에 열이 올랐다. 밤새 여자친구의 자는 얼굴만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이 남자를 어쩌면 좋을지, 부끄러워진 메이는 물만 한 컵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들과 가까운 테이블은 아직 비어있었고, 입구 쪽의 몇 테이블에만 사람들이 있었다. 메이는 잽싸게 고개를 돌려 치토세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아침엔 이 정도만.”

 “애태워 죽일 끼가.”

 “몰라, 바보.”





 결국 두 사람이 H.T.의 원래 숙소로 돌아온 건 오전 11시를 넘어간 뒤였다. 선배들은 이제 막 아침을 먹은 모양인지 설거지며, 나갈 준비며 부산스러웠다. 아직 비몽사몽 꿈나라를 헤매는 중인 듯한 2학년 선배가 잔뜩 잠긴 목소리로 어서 오란 인사를 건넸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고 있던 3학년 선배는 “이번엔 엄청 늦었네?” 했을 뿐이었다. 누구 한 명 두 사람의 늦은 귀환을 나무라는 사람이 없었다. 익숙하면서도 항상 묘한 이 느낌에 메이는 풋 웃고 말았다.

 구석에서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던 회장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회장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너네 뭐하다 이제 와?”


 호기심 반, 걱정 반이 섞인 목소리에 메이는 잠시 죄책감을 가졌다. 간밤에 치토세와 함께 있는 데에 몰두하느라 연락하는 걸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다. 치토세야 원래 핸드폰이 존재 의의가 없으니 그렇다 쳐도, 늘 핸드폰과 과한 친분을 쌓고 있는 자신이 연락을 잊을 줄이야.


 “버스 놓쳐서 파미레스 가서 밤 샜어요.”

 “넌 멀쩡해 보이는데?”


 회장의 시선이 치토세에게 향하는 걸 보고 메이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눈 뜨자마자 보았던 빨간 눈은 여전했다. 다시 한 번 죄책감을 가지며 메이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전 잤어요.”

 “치토세는 안 자고?”


 놀란 듯 두 눈이 커진 회장은 치토세와 메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크게 하품을 하던 치토세는 대화를 조금 늦게 이해한 모양이었다. 잠깐 눈물이 어린 눈으로 회장을 보다가 예의 그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어보였다.


 “우예 잡니꺼. 이래 귀여운 아 언놈이 채어갈 줄 알고.”


 가볍게 톡 얹은 손이 메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평상시에도 곧잘 듣는 소리였지만 그걸 듣는 관중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기분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기쁘기도 하지만 부끄러움도 동시에 솟구쳤다.


 “콩깍지 좀.”


 회장의 깊은 한숨과 주변의 휘파람 소리가 뒤섞였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와중에도, 더욱 짙어지는 치토세의 미소는 좋았다. 참 답이 없는 팔불출이란 생각을 하며, 메이도 따라 웃었다.

 , 좋은 게 좋은 거지.






(2016. 08. 10.)










너에게 주는 약속

     시시도 료 드림 (For. 셀레스틴님)



 무작정 달린 지도 한 시간이 넘은 것 같았다. 시계를 들고 나오지 않은 탓에 잠시 속도를 줄였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어 핸드폰을 꺼냈다. 시시도 료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나와서 뛰기 시작한 지 두 시간이 넘었다. 그렇게 오래 달렸나? 자꾸 도피하려다 보니 시간이 흐르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게 이 정도로 고민할 일이었던가? 물론 자꾸만 다른 쪽으로 생각이 튀는 탓에 실질적으로 제대로 고민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결국 시시도는 아예 발을 멈추고 가까이 보이는 벤치로 향했다. 한 번 속도를 줄였더니 급속도로 피로가 몰려왔다. 앉고 나니 다리가 한결 편했다. 그렇다고 복잡한 머릿속이 단번에 정리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까보다는 좀 더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정도로 고민할 일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충분히 그럴 만한 일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시시도를 이렇게까지 곤경에 빠뜨릴 수 있는 사람, 마키 카온에 관련된 일이기 때문이었다. 


 “아으으으으.”


 단어보다는 낱개의 자음에 가까운 신음을 흘리며 시시도는 머리를 쥐어 쌌다. 답답해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어떻게 하지? 이 마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몰랐고, 그 사이 잔뜩 화가 난 카온은 삼일 째 연락 두절이었다. 오늘도 메시지 옆의 1이 사라지고도 한 시간 넘게 아무런 알림이 없는 메신저 대화창을 쳐다보다가, 시쳇말로 ‘멘붕’을 일으키며 집에서 뛰쳐나온 참이었다. 두 시간 동안 머릿속엔 뭐라고 하지, 어떻게 사과를 해야 화가 풀리지, 그냥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게 나은가, 그랬다가 내가 곤란해지면 등등 온갖 의문문이 떠올랐으나 그에 따른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절망적이었다.



*



 “료, 딴 여자 생겼어?”


 시시도는 마시던 에너지 드링크를 그대로 뿜었다. 가벼운 ‘콜록’ 수준이 아니라 연출된 상황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푸우웁’ 소리를 내며 꽤 멀리까지 음료수를 뿜어버렸다. 켁켁 대느라 목이 쓰렸고, 코로도 조금 흘러들어갔는지 코가 매웠다. 결국 눈물까지 조금 뺀 뒤에야 간신히 카온을 돌아볼 수 있었다. 평소였다면 얼른 달려와 등을 탁탁 쳐줄 법도 한 카온은 팔짱을 낀 채 꼼짝 않고 시시도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잔뜩 굳은 카온의 얼굴에 침이 꿀꺽 넘어갔다.


 “갑자기 뭔 소리야.”

 “그게 아니면 요즘은 왜 스킨십이 없어?”


 아뿔싸. 올 게 왔구나 싶었다. 시시도는 슬쩍 자신의 운동화로 시선을 옮겼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길게 풀어져 흙바닥에서 나뒹구는 신발 끈이 보였다. 천천히 몸을 낮추어 신발 끈의 양 끝을 붙잡았다. 곁눈질을 하니 삐딱하게 선 카온의 다리가 보였다. 아, 도대체 뭐라고 말해야 돼. 아무렇지 않은 척, 느릿느릿 신발 끈을 묶었지만 심장은 백미터 달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뛰었다.


 “그……. 딴 여자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 너만 좋아한 게 십 년도 넘는데.”


 신발 끈을 최대한 꽉 동여맸다. 좀 삐뚤긴 했지만 나름대로 리본의 모양은 갖추어서 괜찮아 보였다. 고개를 들기가 무서웠다. 지금 카온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다시 한 번 곁눈질을 했지만 여전히 삐딱한 다리만 보일 뿐이었다. 심기일전하듯 한숨을 훅 뱉고 상체를 들었다.


 “아아, 난 또~ 손도 안 잡길래 잡은 물고기한테는 밥도 안 주나 했지~”


 목소리는 한껏 비꼬는 하이 톤에, 얼굴에선 찬바람이 나오는 듯 했다. 온몸을 바늘로 찔리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방금 한 말마따나 시시도는 십여 년 동안 카온만 좋아해 온 외곬이었다. 왜 그렇게 됐냐고 물어봐도, 본인 역시 이유는 몰랐다. 어릴 적부터 거의 매일을 함께 보냈다. 학교도 같이 다녔다. 좋아한다고 고백도 하기 전에 손잡는 건 이미 당연한 일이었고, 끌어안는 것 정도야 아무렇지 않았다. 볼에 뽀뽀하는 것 역시 진즉에 이루어졌다. 그렇게 당연하고 익숙한 사이에서 새로운 설렘이 된 건 당연히 ‘사귀자’는 말 때문이었다.

 그 이후로 좀 더 발전해왔다. 입술을 맞대었고, 혀를 섞었다. 놀라운 일이지만 그렇게 된 지는 이제 겨우 몇 달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시시도는 카온에게 어떤 스킨십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할 수 없었다.


 “그럴 리가 있냐…….”

 “그럼 손은 왜 안 잡아?”


 칼날 같은 눈빛이 가슴에 꽂혔다. 무슨 말로 대답을 해야 할 지 고민이 되었다. 여전히 뚱한 얼굴로 카온은 시시도와 같이 걸었다. 그렇게 공원 한 바퀴의 짧은 산책이 끝날 때까지 시시도는 카온의 손도 잡지 못 했고, 대답도 하지 못 했다. 슬쩍 다가오는 카온의 손을 못 본 척 자연스럽게 비켜갔다. 공원 입구에서 카온이 우뚝 멈춰 선 순간, 시시도는 자기도 모르게 “망했다.” 소리를 중얼거렸다.


 “이 바보 멍청아, 너 안 볼 거야!”


 빽 소리를 질러놓고 카온이 잽싸게 뛰어가기 시작했다.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는 속도였지만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막상 붙잡아도 어떤 말을 해야 카온의 마음을 풀어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안아주면 해결 되나? 아니, 무작정 그러기도 좀 그랬다. 그건 카온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였다.

 좋아 죽겠어서, 달아올라서 미칠 것 같아서 손을 못 대겠어. 손을 잡을 때마다, 끌어안아 품으로 당길 때마다, 입술을 맞댈 때마다 끓어오르는 욕구를 참을 수가 없었다. 닿는 손이 너무 뜨거워서 타 들어갈 것만 같았다. 전부 틀에 박힌 미사여구로만 여겼던 표현을 자기가 사용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원래 다 이런 건가. 누구한테 털어놓기도 어려웠다. 불이라도 붙을 것처럼 뜨거운 자신의 손과 심장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 했다. 미치도록 닿고 싶은 욕구가 일면서 동시에 너무도 뜨거워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닿으면 닿을수록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되었다.

 혈기왕성한 고등학생 시절도 어찌어찌 지나왔는데 사귀기 시작하니 사춘기 소년이 된 것 마냥 모든 혈기가 끓어올랐다. 당연한 거지만, 그게 조금 무섭기도 했다. 너무 빠른 진도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무엇보다 그러기 위해 고백한 것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닿고 싶고 만지고 싶다는 건 좋아한다는 감정에 부수적으로 딸려오는 것이지, 그걸 위해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귀는 것은 아니니까.

 물론 사귀기 이전에도 카온과 손을 잡는 건 매번 두근거렸다. 끌어안는 것도 그랬다. 하지만 이 정도로 불이 붙을 것만 같다든지 더 많은 것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하긴, 만날 손잡고 끌어안던 사이가 키스하는 사이가 됐는데 그 이상을 하고 싶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거긴 하지.

 젠장. 얼굴에 또 열이 올랐다. 시시도는 손을 들어 얼굴을 쓸었다. 손바닥도 뜨거워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원래도 좀 열이 많은 체질이긴 했지만 최근엔 더 심하게 느껴졌다. 특히 카온이랑 있을 때는 걷잡을 수 없었다. 시시도는 결국 모자를 벗었다. 손을 연신 흔들어 도움이 될 리 만무한 바람을 일으켰다.

 보통 여자애들보다 조금 큰 편이라는 카온의 손은 시시도의 손에 비하면 항상 작았다. 잡았을 때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적지근한 체온이 좋았다. 남자하고는 달리 어딘지 말랑말랑하고 보드라운 촉감도 좋았다. 깍지를 끼면 왠지 카온을 제 것이라 표시하는 것 같아 더 설레기도 했다. 손가락을 통해 느껴지는 작은 고동도, 그에 미묘하게 박자를 맞추는 것처럼 느껴지는 제 심장박동도 신기했다.

 꼬마 때부터 비슷했던 체격이 어느새 저보다 작아져 품 안에 들어올 정도가 되었을 땐 정말로 기뻤다. 운동을 열심히 한 보람이 있다고도 생각했다. 완전히 품속에 폭 끌어안을 만큼의 차이는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도 만족스러웠다. 어느 날 문득 카온의 정수리가 보인다는 것을 깨닫고 멍하니 있다가, 올려다보는 카온의 시선에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친 적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첫 키스……. 늘어놔서 뭐 하겠는가. 그냥 남들이 말하는 모든 감정을 시시도는 단번에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마냥 좋은 느낌만은 아니지만 분명히 설레고 기분 좋은 것. 그 이후로도 여러 번의 키스가 있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이상으로 욕구가 번져 나갔다. 하지만 사귄 지 얼마나 됐다고. 그 생각이 계속 시시도를 가로막았다. 그렇게 계속 눌러놓다 보니 슬슬 손이 닿는 것만으로도 불에 덴 것처럼 달아오르는 자신의 몸이 버거워졌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냐고. 내가 그러니까 말이야. 어, 너랑……. 아, 젠장. 시시도는 머리를 세게 긁적였다. 십 년을 넘게 좋아해도 하나하나가 어려운 건 매한가지였다.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할 지 방법을 몰랐다. 말하는 게 조금 부끄럽기도 했지만, 아직 준비도 되지 않았을지 모르는 카온에게 무작정 들이미는 형식이 되어버리는 것은 원치 않았다. 자신이 조금만 더 예민하거나, 조금만 더 여자에 대해 잘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카온은 지금 어떤 마음일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시시도는 다시 얼굴을 쓸어 내렸다. 젠장, 답답해. 답이 나오기 전까지는 카온에게 다시 연락하기도 애매했다. 일단 오늘은 그냥 돌아가야 할까. 이렇게 그냥 연락을 하지 않는 것도, 그렇다고 무작정 아무 답 없이 연락하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을 터였다.


 “하아.”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결국, 시시도 스스로가 빨리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



 벤치에 가만히 앉아 고민해봐야 사실대로 이야기한다는 선택지 외엔 없었다. 머리를 잔뜩 싸매고 있던 양손을 천천히 무릎 옆에 내려놓았다. 자기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흘렀다. 솔직하게 말하면 어떻게든 해결되겠지. 마음이 정리되고 나니 왜 고민했을지 모르겠는 정도로 간단하고 당연한 문제였다. 시시도는 삼 일 동안이나 고민한 자신이 한심해지기 시작했다. 카온이 돌아서서 뛰어갔을 때 바로 쫓아가서 말했으면 됐을 걸.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

 진짜 꼴불견이다. 시시도는 양 손으로 뺨을 때렸다. 역시 당장 만나러 가야겠어. 하지만 카온은 이미 오늘 보낸 메시지를 무시한 상태였다. 그냥 무작정 카온네 찾아갔다가 카온이 없으면 그것도 곤란했다. 가족들끼리도 친구처럼 지내는 탓에 두 사람에게는 늘 부모님의 과도한 관심이 함께 했다. 괜히 걱정 끼쳐드리는 것보다는 확인하고 가는 게 낫겠지. 시시도는 메신저의 친구 목록을 밑으로 쭉 끌어내렸다. 카온의 동생 이름을 찾아낸 뒤, 톡톡 핸드폰을 두드렸다.


 [카온 집에 있냐?]


 숫자가 사라질 때까지 마냥 핸드폰만 쳐다보자니 그것도 민망했다. 시시도는 천천히 집을 향해 걷기로 했다. 카온네로 가려면 어차피 집을 지나쳐야 했다. 해가 질 즈음이라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몸에 잔뜩 오른 열이 조금씩 식는 게 느껴졌다. 덕분에 머릿속도 같이 차분해졌다.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ㅇㅇ 근데 왜 나한테 물어? 싸웠음?]


 싸웠다고 해야 하나. 시시도는 그냥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 속으로 밀어 넣었다. 집에 있으면 됐어. 숨을 가다듬고 조금 걸음을 빨리 했다.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자 집이 보였다. 지나쳐서 한 블록을 더 들어가야 했다. 괜한 긴장감에 주먹을 꼭 쥐었다. 터벅터벅. 그리고 마침내 카온네 집 현관문이 보였다.

 딩동.

 자기네 집 초인종 소리만큼이나 익숙한 소리가 시시도의 귀를 울렸다. 네에, 안쪽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철컥, 문이 열릴 때 시시도는 침을 꿀꺽 삼켰다.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카온의 어머니였다.


 “어머, 료. 오랜만이네.”

 “안녕하세요. 카온 좀 불러주실 수 있으세요?”

 “잠깐만 기다리렴.”


 빙글, 뒤돌아선 카온의 어머니가 한껏 목청을 높여 카온의 이름을 불렀다. 거실에 있었는지 동생도 빼꼼 고개를 내밀고 시시도에게 인사를 했다. 어색한 미소로 화답해 준 시시도의 시선이 자연스레 계단으로 옮겨 갔다. 카온이 내려오고 있었다. 시시도와 눈이 딱 마주친 카온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는 게 보였다.


 “왜 왔어?”

 “일단 나가서 얘기하면 안 될까.”


 찬바람이 쌩쌩 부는 목소리에 옆에 서 계신 어머니의 눈이 커다래졌다. 카온은 그대로 서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제 누나의 표정을 본 동생이 납득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싸웠네.”

 “어머, 웬일로?”


 금방이라도 ‘무슨 일인지 말해보렴’이라고 말할 것 같은 어머니의 표정엔 어떻게 대처해야할 지 몰랐다. 시시도는 차라리 얼음장 같은 카온을 보는 쪽을 택했다. 안 나오고 버틸 기세던 카온의 표정도 미묘하게 찡그려졌다. 한숨을 푹 뱉은 카온이 현관으로 나왔다. 대충 편한 신발을 구겨 신는 카온을 보며, 시시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갔다 올게요, 카온의 뒤로 시시도도 이어 꾸벅 인사를 했다. 잘 다녀오라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왠지 아쉬움이 묻어나는 듯 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걸었다. 방향은 자연스럽게 동네의 작은 놀이터로 향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그 놀이터였다. 모래밭은 사라지고 폭신폭신한 재질의 바닥으로 변했지만 추억이 서린 장소라는 점은 변함이 없었다. 놀이터에 들어선 카온의 발이 멈추었다. 시시도는 조금 더 뒤 쪽에 멈춰 섰다. 좋아, 결심한 대로 말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솔직하게.


 “그…… 미안하다고.”

 “뭐가?

 “최근에 스킨십 없었던 거.”


 시시도는 자신이 머리가 나쁜 게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그렇게 삼일동안 고생해서 내린 결론의 끝에 뱉어낸 말이 겨우 ‘미안해’ 뿐이라니. 어딘가 연애 교과서에 쓰여 있기라도 한 것 같은 판에 박힌 대사였다. 솔직하게 이야기하겠다는 결심은 다 어디로 갔는지, 머리가 나쁜 게 아니라 간이 작은 거라고 해야 할 판국이었다. 


 “이유도 얘기할 참인 거야?”


 돌아보지 않는 카온의 표정이 어떨지 걱정 됐다. 시시도는 심호흡을 했다. 그냥 솔직하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말하자, 시시도 료. 그리고 입을 막 떼려는 순간, 카온의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말도 안 할 거면서 왜 나오라고 한 거야? 그냥 미안하다고 하면 해결되는 거 아니잖아.”

 “아, 그게…….”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마냥 유치원생도 아니고, 손잡고 뽀뽀하고 키스 좀 하고 싶은 게 어디가 어때서? 여태 다 해놓고 왜 이제 와서 안 하는데? 나 엄청 서운하거든?”


 속사포처럼 터져 나오는 말에 시시도는 어안이 벙벙했다. 눈만 깜빡거리며 카온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삼 일 동안 아무런 연락도 주고받지 않았으니 시시도만큼이나 카온도 답답했을 터였다.


 “그러니까…….”

 “그래, 미안한 건 알겠어. 그래서 이유가 뭔데? 진짜 사실은 딴 사람 좋아하게 된 거 아냐?”

 “카온.”


 시시도는 그대로 카온의 허리를 껴안았다. 멍청아. 안고 싶지 않을 리가 없잖아. 이렇게 좋아하는데……. 선선한 바람에 차분하게 가라앉았던 감정이 순식간에 불이 붙어 솟아올랐다. 심장박동이 급속도로 빨라졌다. 손끝으로 피가 쏠리는 것만 같았다. 뜨거웠다.


 “말 좀 하자.”


 카온이 힘을 주어 제 허리를 감은 팔을 붙들었지만 시시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내가 둔해서 이런 거 잘 모른다고 해도, 적어도 지금 진짜로 놓으면 진짜 맞을 수도 있다는 건 알겠어. 카온의 손이 닿은 데가 전기라도 통하듯 화끈거렸다.


 “스킨십을 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벌써 몇 번째 멈추는 건지 모르겠다. 말을 하는 게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이 말을 카온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이었다. 아, 진짜 결국 너도 똑같은 남자구나. 만약 카온이 그렇게 말한다면 어떨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뭔데?”

 “못 참겠다고.”


 그 어느 때보다 침묵이 불편했다. 어색한 기류 속에 여전히 손은 뜨거웠고 온몸으로 퍼지는 고동은 시끄러웠다. 가까이 붙어있는 탓에 카온의 숨소리가 가깝게 들렸다. 아까보다 조금 빠른 숨소리. 아, 지금 무슨 표정일지 가늠이 안 돼. 괜히 시시도는 목을 가다듬는 척 헛기침을 했다.


 “지금은 건드리기만 해도…… 그대로 못 참을 것 같단 말이야.”


 해도 진 푸르른 밤하늘 밑에 얼굴이 뜨거웠다. 당연하게 들이마시고 뱉어야 할 숨조차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하니 여간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게 아니었다. 카온의 머리 위에서 숨이 흩어졌다. 더운 공기가 두 사람을 둘러쌌다. 두근, 두근. 긴장감만 최고조로 올라 점점 숨 쉬기가 어려웠다.


 “바보야?”


 카온의 고개가 반쯤 돌아왔다. 끌어안고 있는 탓에 얼굴을 마주하기가 어려웠다. 카온도 그 생각을 했는지 탁탁 시시도의 팔을 쳤다. 아, 이건 풀라는 표시인가. 주춤주춤 시시도가 팔에 힘을 빼자 카온이 홱 몸을 돌려 시시도를 마주보았다. 이젠 안 뜨겁겠지 싶은 건 찰나였다. 카온의 양손이 다시 시시도의 팔을 붙들었다. 아.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놓고 흠칫 놀라 입을 다물었다. 왠지 잘못해서 혼나는 강아지가 된 기분으로 시시도는 카온의 시선을 받아들였다.


 “뭘 참는 건데? 우리 사귀는 거 아니야? 스킨십 문제도 서로 대화해서 맞춰 가면 되는 거잖아. 우리가 무슨 예전 같은 유치원생도 아니고, 사귄 지는 얼마 안 됐다 쳐도 서로 좋아한 지 십 년도 넘었는데 그 정도 못 맞출까봐?”


 구구절절 맞는 소리였다. 시시도의 어깨가 점점 더 처졌다. 왜 고민했던 거야, 나. 처음부터 솔직했으면 싸움 아닌 싸움을 하는 일도 없었을 텐데. 미친 듯이 치솟는 감정에 자기마저 휩쓸렸던 게 분명했다. 꼴불견이구만.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꾹 참고 카온의 눈을 맞추었다. 말도 안 되는 걸로 고민한 대가니까 ‘이 바보야’하는 눈길 정도는 제대로 받아야지.


 처음부터 솔직히 말했으면 좋았잖아.”

 “그러게. 바보 같았어, 미안.”

 “그래서…….”


 아까 전까지 속사포로 말을 쏟아내던 입이 앙 다물어졌다. 카온의 뺨이 붉었다. 결국 카온이 먼저 시선을 피했다. 카온이 또 무심결에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 손끝이 살살 시시도의 팔을 간질였다. 젠장. 닿고 싶어 미치겠어.


 “뽀뽀는?”


 그러고서 기껏 뱉어낸 단어가 ‘뽀뽀’라니. 붉은 카온의 얼굴에 풋 웃음이 나려는 걸 꾹 참고 시시도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한동안은 키가 비슷해 까치발을 들어 이마에 뽀뽀를 했던 기억이 선명한데 이젠 고개를 조금만 숙이면 된다는 사실에 매번 감사했다. 이마에 쪽. 삼 일 동안 쌓인 감정을 풀어내기엔 부족할 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었다.

 카온은 어느새 손을 놓고 제 이마를 손가락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불타오르는 느낌은 카온도 마찬가지인 걸까. 사실은 붉은 뺨에도, 앙 다문 입술에도 키스하고 싶다는 걸 말해야만 전달되는 것은 아닐 터였다. 얼굴이 여전히 뜨거웠다. 내 얼굴도 저렇게 붉을까.


 “왜 이마야?”

 “약속이니까.”


 언젠가 우연히 접한 거였지만 잊을 순 없었다. 이마에 하는 키스는 약속, 맹세의 의미랬던가. 당분간 못 보게 될 텐데 이런 상황을 만들어 버린 데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그래도 카온을 계속 좋아할 거라는 약속의 의미를 담고 싶었다.


 “너만 좋아한다는 약속. 그러니까 그, 당분간 못 만나도 불안해하지 말라고.”


 카온이 이사 온 날 이후로는 거의 매일을 붙어 있었다. 학교도 같이 다녔으니 더더욱 그랬다. 얼굴을 보지 못하더라도 이삼일을 넘긴 적은 없었다. 이번엔 한 달을 떨어져 있어야 하니까. 방학 내리 만나지 못할 거란 사실을 처음 말했을 때 본 카온의 표정에 불효자가 될까 고민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부모님께서 큰 맘 먹고 20여 년 만에 추진한 가족 여행계획이었으니 혼자만 빠지겠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나도 안 불안하거든?”

 “정말로?”

 “그, 그냥 조금 많이 엄청 서운했던 것뿐이니까…….”


 빵빵하게 튀어나온 볼을 찌를까 하다가 그대로 손을 내렸다. 대신 카온의 손을 꼭 잡았다. 그래, 뭐 실제로 불이 붙기라도 하겠어. 그냥 이 뜨거움을 좀 즐기자. 카온의 손이 평소보다 뜨거웠다. 시시도가 먼저 발을 떼자 카온이 자연스럽게 따라 걸었다. 늘 그랬듯, 익숙한 거리를 두 사람이 손을 잡고 함께 걸었다.



*



 “저기.”

 “응?”


 뒤쫓아 오던 발소리가 사라졌다. 잡은 손을 살짝 잡아당기는 탓에 시시도는 카온을 돌아보았다. 왠지 카온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 붉었다. 점점 더워지는 여름 공기가 두 사람의 손 안에서 맴돌았다.


 “그래서 하고 싶다는 거지?”


 자기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카온의 손을 꽉 잡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 얼른 힘을 풀었다. 응.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기어들어가듯 작은 소리였지만, 평소보다 유난히 조용한 골목 안의 두 사람에게 닿기엔 충분했다.


 “하자.”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약간의 시간을 들여야 했다. 심장에서 쿵 소리가 난 것 같았는데.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처럼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뭐?”

 “여행 가면 한동안 못 볼 거 아냐. 난 이마키스로는 만족 못 하거든? 버틸 거 필요하단 말이야.”


 얼굴이 사과처럼 빨갛게 물들었으면서도 표정만큼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듯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모습에 결국 시시도는 웃어버렸다. 그리고 카온이 뭐라고 하기 전에 잽싸게 카온을 품으로 끌어당겼다. 젠장. 네가 너무 좋아. 그런 얼굴로 날 보는 너도 좋고, 손 안 잡아줘서 서운하다는 너도 좋고, 못 만난단 얘기에 먹을 거 뺏긴 강아지 마냥 촉촉한 눈으로 아련하게 올려다보는 너도 좋아. 귀여워 죽겠어. 쑥스러워서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모든 이야기들을 속으로 녹였다. 네가 좋아서 미치겠어.


 “한 달 버틸 거 필요한 건 나도 마찬가지야.”


 품 안에서 카온이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시시도는 안았던 팔을 풀고 다시 손을 잡았다. 그리고 척척 걸어갔다. 결심했으면 실행에 옮겨야지. 이렇게 오기까지 고민한 게 바보 같아서라도 그래야겠어.


 “어, 어디 가?”

 “하자며.”

 “지금?”

 “그럼 언제?”


 저 어벙한 얼굴을 어떻게 하면 좋지. 왜 매일 봐도 안 질리는 걸까. 시시도는 분명 붉어졌을 볼을 손가락으로 긁었다. 여태까지 손도 안 잡고 버티던 놈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카온이 먼저 말을 꺼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더 이상은 못 참겠으니까, 봐 줘.”


 맞잡은 손 안에서 맴도는 여름 공기가 간지러웠다.





(2015. 11. 26.)









숲 속 괴물과 결혼한 아가씨

     치토세 센리 드림 (ver. 동화) (For. 메이님)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숲이 많기로 유명한 어느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나라의 대부분은 나무로 뒤덮인 채였고 영지의 정 중앙을 가로질러 커다란 강이 흘렀습니다. 숲 속에는 산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낮은, 그렇다고 언덕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높은 동산들이 많았습니다. 때문에 강줄기에서 벗어나 졸졸 흐르는 시냇물도 많았지요.

 메이네 집은 나라에서 제일 큰 숲인 사천숲 속에 살았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메이 세 명이 사는 이 안락하고 작은 집은 사천숲의 입구라고도 할 수 있는 보물시내의 왼편에 있었습니다. 햇살에 반사되는 물 표면이 보물 같다고 해서 보물시내라고 불렸습니다. 사천숲은 보물시내를 따라 올라갈수록 깊어지는데,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탓에 하늘이 보이는 곳이 네 군데 밖에 없다고 해서 사천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해가 높이 뜨면 아버지는 언제나 나무를 하러 깊은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나물을 캐러 조금 멀리 있는 양지로 나갔습니다. 집에 혼자 남은 메이는 냇가로 나와 빨래를 하거나 키 작은 나무의 열매를 따고는 했습니다. 메이는 냇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징검다리 사이를 솨아아 하고 흐르는 물소리나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메이에게는 즐겁게 느껴졌습니다. 메이는 시내 반대편에 사는 유라네 집에 종종 놀러갔습니다. 시내라고는 해도 꽤나 폭이 넓었기 때문에 징검다리를 건너야만 했습니다. 물론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최근 이 보물시내 마을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고민거리가 한 가지 있었습니다. 바로 사천숲에 나타난다는 괴물 때문이었습니다. 얼마 전, 사천숲 깊이 나무를 하러 들어간 마키 아저씨가 혼비백산해서 뛰어나왔습니다. 마키 아저씨를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은 메이네 아버지였습니다. 메이네 아버지는 당황한 마키 아저씨에게 따뜻한 차를 내주었습니다. 마키 아저씨는 찻잔 밖으로 방울방울 차가 튀어나올 정도로 손을 떨었습니다. 차 몇 모금을 마신 후에야 마키 아저씨는 겨우 진정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눈동자는 불안하게 흔들렸습니다.


 “이봐, 다나카. 나는 봤네.”

 “무엇을 말인가?”

 “괴물 말일세!”


 메이는 깜짝 놀라서 하마터면 손에 들었던 그릇을 떨어뜨릴 뻔 했습니다. 메이네 아버지는 장난치지 말라며 손을 내저었지만 마키 아저씨는 여전히 겁에 질린 표정이었습니다.


 “덩치는 곰처럼 엄청 컸다네. 하지만 생긴 건 사람이랑 엄청 비슷하게 생겼었지. 거적때기를 둘러쓴 것처럼 보였어. 머리에 엄청 털도 많았다네! 그건 꼭 괴물이었어.”


 메이네 아버지는 매우 진지한 마키 아저씨의 말도 믿지 않았습니다. 메이네 집에서 나설 때까지도 마키 아저씨는 괴물 이야기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메이네 아버지는 그저 피곤해서 잘못 본 것일 거라고 마키 아저씨를 달랬습니다.

 그 후 며칠이나 지났을까, 이번엔 아랫마을에서 올라온 봇짐장수가 숲 속에서 괴물을 봤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봇짐장수 역시도 마키 아저씨가 본 것과 비슷한 괴물을 봤다고 했습니다. 이 괴물에 대한 이야기는 일파만파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소문이라는 게 그렇듯 덧붙이고 덧붙여져서 마치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사람처럼 생겼다던 괴물은 나중엔 곰처럼 털이 잔뜩 난 야수 혹은 늑대인간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일파만파 커져가는 괴물 이야기에 무서워진 사람들은 사천숲에서 먼 곳으로 하나둘씩 이사를 갔습니다. 마지막까지 메이네와 함께 있어주던 유라네 역시도 어린 동생의 성화에 결국 이사를 가고 말았습니다. 이제 보물시내에는 메이네만이 남은 상태였습니다.

 메이네 아버지는 소문을 믿지 않았습니다. 직접 본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그렇게 이상하게 생긴 괴물이라는 게 실제로 존재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공포심 때문에 자신이 본 것을 왜곡하기 쉽단다.”


 메이가 무서워하자 아버지가 해주었던 말입니다. 메이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밤중에 냇가에 나오면 바람 소리가 엄청 무섭게 들릴 때가 있잖아요? 그것과 비슷한 거라고 생각하자 메이는 괴물이 하나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보나마나 제멋대로 자라난 나무를 보고 착각한 게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메이네 가족은 그대로 사천숲 입구 보물시내 옆에서 살았습니다.





 그로부터 시간이 좀 더 흐른 어느 날, 평소와 똑같이 아버지는 나무를 하러 숲으로 들어갔고 어머니는 나물을 캐러 양지로 나갔습니다. 메이도 냇가에 나와 옷가지 몇 벌을 빨았습니다. 집 뒤의 작은 나무에 옷을 널어놓고 메이는 다시 냇가로 나왔습니다. 징검다리를 건너가 바로 보이는 집 문을 두드려 보아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할 일이 없어 메이는 다시 징검다리를 건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신발을 벗어두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첨벙, 시내에 발을 담그니 온몸이 차가워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워낙 물이 깨끗해서 물속에서 꼼지락거리는 자신의 발을 훤히 다 볼 수 있었습니다. 메이는 허리를 잔뜩 숙여서 동그랗고 예쁜 조약돌을 찾아보았습니다. 자그락자그락, 발밑에서 돌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렇게 조약돌을 하나둘 주워가며 보물시내를 따라 오르다보니 메이는 어느새 사천숲 안에 들어왔습니다. 메이가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작고 아담한 메이네 집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이 들어온 후였습니다. 졸졸졸 물이 흐르는 소리가 났고 짹짹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바람이 부는지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문득 무서워진 메이는 크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대답이라도 해주는 것처럼 새가 함께 짹짹거려 주었습니다. 메이는 뒤로 돌았습니다. 자신이 오던 방향과 정 반대로 다시 걸어가면 집이 나올 것이었습니다. 자그락자그락, 다시 돌들이 부딪혔습니다.


 바스락!


 메이의 왼쪽에 있던 덤불에서 큰 소리가 들렸습니다. 메이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소리가 나는지 듣기 위해서 가만히 귀를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졸졸 물 흐르는 소리만 날 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메이는 큰 바람이 불었나보다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얼마나 갔을까요.


 바스락!


 다시 메이의 왼편에서 커다란 소리가 났습니다. 이번에는 덤불이 흔들리는 것도 함께 보았습니다. 메이는 침을 꿀꺽 삼켰습니다. 덤불에 다가가는 대신 메이는 조그맣게 물었습니다.


 “누구세요?”


 대답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메이는 분명히 덤불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이 아니라면 사천숲에 사는 동물일까요? 문득 메이는 소문의 괴물을 떠올렸습니다. 혹시나 그런 괴물이 정말로 있으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자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메이는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어 물어보았습니다.


 “거기 누구 있어요?”


 덤불이 부스럭댔습니다. 뒤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모양이었습니다. 메이는 잔뜩 긴장해서 주먹을 꼭 쥐었습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좀 더 나더니 덤불 뒤에서 커다란 형체가 움직였습니다. 그 커다란 형체는 아직 몸을 다 일으킨 상태가 아니었는지 점점 커졌습니다. 아뿔싸, 걱정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아마도 저 형체는 마키 아저씨가 말했던 괴물인가 봅니다. 메이는 지금부터 달려서 도망을 가야 할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무섭기 때문에 왜곡해서 볼 수 있다는 말 말입니다. 그래서 메이는 무섭더라도 한 번 괴물을 직접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차분하게 몸을 일으키는 형체를 지켜보았습니다.


 “안녕.”


 놀랍게도 괴물이 말을 걸어왔습니다. 메이는 무심결에 손을 펴서 입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메이가 쥐었던 조약돌이 시냇물로 떨어져 퐁당 퐁당 소리를 내었습니다. 덤불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온 괴물은, 아니 이제는 괴물이라고 부르면 안 되겠지요. 그 형체는 사람이었습니다. 키가 매우 크고 덩치도 매우 큰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머리카락이 엄청 부스스하게 많이 나서 하늘 위로 솟은 상태였습니다. 이걸 보고 마키 아저씨는 털이 많이 났다고 생각한 모양이었습니다. 물론 옷이라고 부르기 힘들 정도로 꾀죄죄하고 낡은 옷도 괴물처럼 보이게 했지만 말입니다. 메이는 침을 꿀꺽 삼키고 조심스럽게 대답했습니다.


 “안녕.”


 괴물, 아니 키가 매우 큰 사람은 대답을 들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는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더니 다시 바스락 소리를 내면서 바닥에 앉았습니다. 높이 치올렸던 고개를 내리며 메이는 목 주변을 주물렀습니다.


 “넌 누구니?”

 “내는 치토세 센리다.”


 키가 큰 사람은 치토세 센리라는 이름도 있었습니다. 메이는 모두가 괴물이라 오해했던 이 커다란 사람에게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내 안 무섭나.”


 조금 다른 말투를 썼기 때문에 메이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괴물인 줄 알았던 거대한 형체가 그냥 평범한(많이 크지만)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하나도 무섭지 않았던 것입니다.


 “니는 누고?”

 “난 다나카 메이야. 저기 아래 보물시내 옆에 살아.”


 치토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난 이제 집에 갈 건데 데려다 줄래?”

 “좋제.”


 치토세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치토세의 몸집이 워낙 커다랬기 때문에 움직일 때마다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났습니다. 높은 나무 위에서 새가 푸드덕 거리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치토세의 어깨에서 나뭇잎이 몇 장 떨어졌습니다. 메이는 왠지 든든해진 기분이었습니다. 진짜로 괴물이 나타나거나 무서운 호랑이가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무섭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두 사람은 시내를 따라 내려왔습니다. 메이는 여전히 시내 안에서 참방참방 거리며 물을 튀겼고, 치토세는 진흙 색으로 물든 신발을 신었기 때문에 그 옆에서 걸었습니다. 메이는 심심해서 치토세에게 계속 말을 걸었습니다. 치토세가 왜 사천숲을 돌아다니는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내는 여 산대이.”


 치토세의 말에 메이는 깜짝 놀랐습니다. 키도 덩치도 매우 크긴 했지만 치토세가 혼자서 숲에 살아도 되는 어른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죠. 메이가 놀라서 두 눈을 깜빡거리며 올려다보자 치토세가 하하 웃었습니다. 치토세는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치토세가 살던 마을에는 키가 큰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치토세의 키가 쑥쑥 자라 어느새 어른의 키도 뛰어넘고 웬만한 나무와 키가 비슷해질 정도로 커지자 마을 사람들이 공포심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오로지 키가 크다는 이유만으로요. 메이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치토세는 그 이해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놀림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돌팔매질도 당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의 것과 다르게 생긴 것을 싫어하거나 무서워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결국 치토세는 마을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여동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족들 모두가 치토세를 따라 떠날 수는 없었지요. 치토세의 부모님은 치토세가 혼자서도 살 수 있는 사천숲에 그를 데려다주었습니다. 그리고 숲 깊은 곳에 그가 살 수 있는 집을 지어주었습니다. 그 뒤로 치토세는 사천숲에서 혼자 열매를 따먹고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살았습니다. 기나긴 이야기를 듣고 난 메이는 코를 훌쩍였습니다.


 “힘들었겠다.”

 “사천숲은 좋대이. 사람도 안 오니께.”


 두 사람은 어느새 사천숲 입구에 다다랐습니다. 언제나 메이가 뛰놀던 보물시내가 보였습니다. 뉘엿뉘엿 지는 해가 저 쪽 언덕 너머에 걸렸습니다. 하늘이 홍시 색으로 물들어서 무척이나 아름다웠습니다.


 “여기가 우리 집이야.”

 “내는 인자 간데이.”

 “내일 또 놀러 갈게!”


 손을 흔드는 치토세에게 메이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치토세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터벅터벅, 느린 발걸음으로 치토세가 다시 시내를 따라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뒷모습을 한참 쳐다보다가 메이는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이후로 메이는 거의 매일 사천숲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치토세와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혼자 사는 치토세가 얼마나 심심할지, 누구와 대화는 할지, 열매 말고 다른 것도 챙겨먹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치토세가 입은 거적때기 같은 옷도 너무나 신경 쓰였습니다. 온갖 때를 탄 데다 나뭇가지에 걸려 여기저기 구멍이 나서는 전혀 그를 따뜻하게 만들어 주지 못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진흙 범벅인 신발도 탐탁지 않았죠. 하지만 치토세의 몸에 맞을 만큼 커다란 옷이 메이네 집에는 없었습니다. 커다란 발에 맞는 신발도 없었습니다. 메이는 집에서 챙겨온 빵과 구운 고기 조각을 치토세에게 선물하는 걸로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입니다. 언제나처럼 메이는 사천숲에 들어가 치토세와 놀다가 함께 시내를 따라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 사이로 쿵! 쿵! 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디서 나는 소리일까 가만히 귀를 기울이던 메이는 그것이 나무를 찍는 소리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메이는 아버지일 거라는 생각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통통 튀어가듯 그 소리를 쫓아갔습니다. 치토세도 이제는 당연하게 메이의 뒤를 따랐습니다. 물론 메이가 세 걸음을 걸어갈 때 치토세는 단 한 걸음을 걸었지만 말입니다.

 어느 정도 걸어갔을까요. 점점 소리가 가까워졌습니다. 메이는 아버지를 만난다는 생각에 빠르게 뛰어갔습니다. 메이의 앞에 나무를 하는 나무꾼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보다 키도 작고 덩치도 작은 나무꾼은 아무래도 저 아래 언덕 너머로 이사 간 혼다 아저씨 같았습니다. 메이는 놀라서 홱 뒤돌았습니다. 오지 말라는 뜻으로 연신 치토세에게 손을 흔들어보였습니다만 치토세는 이미 메이에게 충분히 가까웠습니다. 치토세의 커다란 키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면서 솨아아 소리를 냈습니다. 혼다 아저씨가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렸습니다.


 “괴, 괴물이다!”


 놀란 혼다 아저씨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저씨는 나무로 향했던 도끼를 앞으로 가져왔습니다. 아저씨가 도끼를 휘두를까봐 메이는 질겁하며 뒤로 물러났습니다. 이러다가는 또 치토세가 괴물로 몰려서 쫓겨날지도 모릅니다.


 “이, 이리 오너라, 메이! 위험해!”

 “아니에요, 치토세는 위험하지 않아요!”

 “괴물이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치토세는 괴물이 아니에요!”

 “괴물에게 홀렸어! 홀렸다고! 저리가!”


 아저씨가 앞쪽으로 크게 도끼를 휘둘렀습니다. 메이와 치토세가 선 곳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상태이긴 했지만 메이는 놀라서 뒤로 물러났습니다. 치토세와 통 부딪치자 치토세가 메이를 끌어안았습니다.


 “다 그런데이. 가재이.”

 “도망가면 안 돼, 치토세!”


 치토세는 메이를 끌어안은 채로 뒷걸음질 쳤습니다. 메이가 팔다리를 버둥거렸습니다. 이대로 또 도망가 버리면 치토세는 영영 괴물취급을 당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메이는 그런 슬픈 상황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치토세는 자신과 똑같이 평범한 사람이니까요. 메이가 자꾸 버둥거리자 결국 치토세는 메이를 내려놓았습니다.


 “치토세에 대해 몰라서 그런 거잖아. 설명하면 알아줄 거야.”

 “괴물이 메이를 홀렸다!”


 혼다 아저씨의 목소리가 사천숲을 쩌렁쩌렁 울렸습니다. 파사삭 소리가 여러 번 나더니 점점 멀어졌습니다. 아저씨가 마을로 돌아가려는 모양입니다. 메이는 겁이 났습니다. 사람들이 몰려올까요? 치토세를 해칠까요? 해치지 않고 쫓아낸다면 그나마 다행일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쫓겨난다면 치토세는 어디로 가게 될까요?


 “메이, 집에 가그래이.”

 “싫어, 치토세 혼자 두고는 안 갈 거야.”

 “내 괜찮타. 메이 빨리 가그래이. 다치믄 안 된데이.”

 “싫어, 안 가!”


 메이는 치토세의 손을 잡아끌었습니다. 움직이지도 않는 치토세를 연신 잡아당기는 메이에 치토세는 할 수 없이 발을 떼었습니다. 그리고 메이가 앞서 인도하는 대로 따라 걸었습니다. 숲 속 깊은 곳에 있는 치토세의 집으로 가야 했습니다. 도망칠 수는 없었지만 당장 마을 사람들과 만나는 것은 무서웠습니다.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요. 치토세가 사는 집은 어쩌면 사람들이 찾지 못 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기댈 것이라고는 운 밖에 없었습니다. 메이는 속으로 사천숲에 산다는 신령님을 몇 번이나 불렀습니다. 제발 치토세를 도와주세요. 치토세는 나쁜 괴물이 아니에요.

 그 큰 덩치에도 불구하고 치토세는 얌전히 메이에게 끌려 왔습니다. 이미 여러 번이나 왔던 치토세의 집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메이는 벌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메이와 치토세는 바닥에 주저앉았습니다. 혹시 창문에 치토세가 비칠지도 모르니까요.


 “치토세는 아무 잘못 없어. 내가 지켜줄게.”

 “메이는 작다 안카나.”


 메이는 양 볼을 뚱하니 부풀렸습니다. 이 와중에 농담이라니 치토세는 참 속도 편한 모양입니다. 씩 웃고 난 치토세는 톡 손가락으로 메이의 볼을 찔렀습니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메이의 머리를 쓰다듬었습니다.


 “고맙데이.”


 메이는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코를 훌쩍였습니다. 이렇게 상냥하고 따뜻한 괴물이 어디 있을까요. 사람들이 치토세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괴물이라고 부르는 게 못내 속상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본다면 사람들도 분명 치토세를 좋아해 줄 텐데 말이죠.

 사천숲 너머 저 멀리로 해가 넘어갔습니다. 창밖으로 비치던 세상이 주황색에서 까맣게 변해갔습니다. 어두워지자 치토세가 초를 찾아 불을 켰습니다. 좁은 집이 촛불로 은은하게 빛났습니다. 메이는 초를 꺼야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됐습니다. 이 불빛을 보고 사람들이 찾아올지도 모르니까요. 그 와중에 아버지와 어머니도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늦게까지 집에 돌아가지 않은 적은 없었으니까요. 정말로 메이가 괴물에게 잡혀가 홀려버렸다고 생각해서 치토세를 해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도 들었습니다. 온갖 걱정 때문에 메이는 마음 편하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배고프단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그 때 시끄러운 나뭇잎 소리가 들렸습니다. 메이는 잔뜩 긴장해서 어깨를 움츠렸습니다. 치토세는 메이의 손을 끌어당겼습니다. 메이의 작은 몸이 치토세의 커다란 품속으로 들어갔습니다. 품에 안겼더니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어딘지 든든하게 느껴졌지요. 점점 시끄러운 소리가 가까워졌습니다. 발소리와 웅성거리는 소리,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모두 섞여서 무서운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동시에 밖이 밝아져 갔습니다. 사람들이 결국 이 집을 찾아낸 모양입니다. 점점 커지던 소리는 어느 순간 동시에 멈췄습니다. 밖은 이미 대낮처럼 환했습니다.


 “괴물은 메이를 내놓거라!”


 혼다 아저씨의 목소리였습니다. 메이는 치토세의 품 안에서 살짝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창밖으로 불꽃이 일렁였습니다. 마치 불이 난 것처럼 보여서 메이는 다시 겁이 났습니다.


 “메이, 안에 있니? 메이!”

 “엄마다.”


 메이는 왈칵 눈물이 났습니다. 또르르 또르르 구슬 같은 눈물방울이 메이의 볼을 타고 흘렀습니다. 치토세는 상 위에서 손수건을 집어 메이에게 건넸습니다. 메이는 손수건을 양손에 쥐고 눈물을 닦았습니다. 문 밖으로 나가도 되는 것일까요? 하지만 치토세만 혼자 놔두고 나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메이, 나가래이.”

 “같이 나가자.”

 “안 된다.”

 “아니야, 같이 가야 돼. 괜찮을 거야.”


 치토세는 연신 고개를 내저었지만 메이는 완강했습니다. 치토세가 함께 나가지 않는다면 메이는 언제까지고 이대로 버틸 작정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치토세는 하는 수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메이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습니다. 조심스럽게 메이를 일으켜준 뒤 치토세도 따라 일어섰습니다. 쑥 올라온 치토세의 상체가 창문으로 보였는지 밖이 소란스러웠습니다.


 “괴, 괴물이 움직인다!”

 “조용히 해보게, 혼다! 저건 사람처럼 생기지 않았는가?”


 아버지의 목소리였습니다. 메이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두 사람은 문 앞에 서서 서로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비록 작은 메이의 손이 치토세의 커다란 손을 절반 밖에 잡지 못했지만요. 메이는 침을 한 번 꿀꺽 삼켰습니다.


 “아빠, 저 나가요.”


 웅성거리던 바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습니다. 어깨에 잔뜩 힘을 준 메이 대신 치토세가 손을 뻗었습니다. 가볍게 힘을 주자 삐그덕 소리가 나면서 문이 열렸습니다. 눈앞이 환했습니다. 갑자기 시야가 밝아지자 두 사람 모두 눈을 찡그렸습니다. 하지만 잡은 손만큼은 절대로 놓지 않았습니다.


 “메이, 메이! 괜찮니?”


 어머니가 앞으로 뛰어나오려고 했지만 옆에 선 사람이 어머니를 붙잡았습니다. 사람들은 위협적으로 횃불을 앞으로 휘둘렀습니다. 오로지 아버지만이 횃불을 똑바로 쥔 채였습니다. 아버지는 거칠게 숨을 쉬느라 어깨가 높이 오르락내리락했습니다.


 “난 괜찮아요, 엄마. 치토세는 괴물이 아니에요!”

 “메이, 당장 이리 와! 그 괴물이 널 해치면 어쩌려고 그래!”


 혼다 아주머니가 호들갑스럽게 말했습니다. 메이는 여전히 치토세의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조심스럽게 사람들의 앞으로 나왔습니다. 잔뜩 경계하는 눈초리긴 했지만 아버지는 매우 침착했습니다.


 “자네는 누군가? 우리 메이를 해칠 건가?”

 “아입니더. 지는 치토세 센리라 캅니더.”

 “치토세는 착한 애예요! 누굴 다치게 하지 않는다구요!”


 메이가 자꾸 치토세의 편을 들자 다시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여전히 메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습니다. 메이가 걱정됐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메이와 치토세를 번갈아 쳐다보았습니다. 메이는 치토세를 끌고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습니다. 사람들이 동시에 우르르 뒤로 물러났습니다. 바닥에서 먼지 구름이 일었습니다. 오로지 아버지만이 그 자리에 우뚝 선 채였습니다.


 “메이는 괜찮니?”

 “네, 괜찮아요. 저랑 같이 놀았어요, 보물시내까지 데려다 주기도 했고! 치토세는 그냥 커다란 사람이에요, 아빠.”

 “그래, 아빠 눈에도 보이는구나.”


 아버지가 조심스럽게 다가왔습니다. 여전히 경계하는 눈빛이었지만 아버지는 치토세를 그다지 겁내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치토세는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허리까지 꾸벅 숙여가며 인사를 했습니다. 아버지는 그 모습을 보더니 놀란 얼굴을 했습니다. 메이가 자랑스러운 얼굴로 사람들을 둘러보았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겁에 질린 상태였습니다.


 “이보게, 다나카! 그대로 둘 건가?”

 “이 사람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네. 우리 메이도 멀쩡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그냥 둘 순 없다네!”

 “아무도 해치지 않은 자를 괴물이라고 내쫓을 수는 없지 않은가.”

 “저, 저렇게 커다란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무섭다구요! 돌연변이 아니에요?”


 똑바로 선 치토세의 어깨가 축 늘어졌습니다. 역시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을까요. 메이가 올려다본 치토세의 얼굴이 여태까지 본 얼굴 중에 제일 슬퍼 보였습니다. 메이는 그 때까지 잡은 채였던 손을 놓았습니다. 치토세가 시선을 돌려 메이를 보았습니다. 메이는 그대로 치토세를 끌어안았습니다. 완전히 치토세의 품에 폭 들어가 버린 메이는 치토세의 등 뒤에서 손깍지를 끼었습니다. 치토세의 손이 부드럽게 메이의 등을 토닥였습니다. 이 말없이 조용한 위로에 사람들은 전부 입을 다물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치토세는 그저 너무 클 뿐,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모두들 돌아가게. 이 자는 아무도 해치지 않을 걸세.”


 못마땅한 듯 불평하는 소리가 몇몇 터져 나왔지만 사람들은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잔뜩 내밀었던 횃불도 다시 하늘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말대로 모두가 천천히 왔던 길 그대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치토세의 집 앞에는 이제 치토세와 메이, 아버지, 어머니만 남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조금 겁이 나는지 아버지의 등 뒤에 반쯤 몸을 숨긴 채로 치토세를 쳐다보았습니다. 아버지가 든 횃불이 어두운 사천숲을 밝혔습니다.


 “늦었으니 우리도 돌아갑시다.”


 아버지의 말에 어머니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메이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메이는 치토세를 올려다보았다가 다시 아버지에게 시선을 돌렸습니다.


 “아빠, 치토세도 함께 가면 안 돼요? 낮부터 아무 것도 못 먹었어요!”

 “우리 집에는 그가 잘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침대가 없는데.”

 “지는 괜찮슴더.”

 “저녁 같이 먹어요.”


 아버지의 등 뒤에서 어머니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머니는 반만 고개를 내밀고 치토세를 바라보았습니다. 치토세는 두 눈을 깜빡거리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메이는 환하게 웃었습니다.


 “그래, 가세나. 잘 곳은 어떻게든 만들 수 있을 거야.”

 “저, 감사합니더.”


 치토세가 다시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습니다. 아버지는 이제 완전히 경계심을 풀었는지 허허 웃었습니다. 치토세와 메이, 두 사람이 걷던 시내를 따라 이제는 네 사람이 걸었습니다.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도, 바람에 지저귀는 나뭇잎 소리도 전혀 무섭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아버지의 횃불에 일렁이는 그림자조차도 메이를 무섭게 하지 못했습니다. 메이는 세상 누구보다도 든든한 사람들과 함께 있었으니까요. 절로 노래가 흘러나왔지만 메이는 꾹 참았습니다. 밤중의 사천숲에서는 메이의 노랫소리도 누군가를 무섭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참 시내를 따라 걸은 뒤에야 모두 사천숲을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반가운 보물시내와 따뜻한 불빛이 빛나는 메이네 집이 그들을 맞이하였습니다. 메이네 가족 세 명과 치토세까지 집 안에 들어오자 마치 집이 가득 찬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어머니는 부산스럽게 저녁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집 안에는 따뜻한 수프 냄새가 퍼졌습니다. 네 사람은 테이블 앞에 둘러앉았습니다.


 “자, 수프를 들어요. 구운 감자도 있으니 마음껏 먹도록 해요.”

 “감사함더.”


 그 저녁식사는 매우 따뜻하고 행복했습니다. 치토세가 자신의 손에 비해 너무도 작은 숟가락을 휘게 만들어버린 걸 빼고는 말이죠. 이야기꽃이 집안에서 만개했습니다. 메이는 치토세가 함께 있다는 사실이 무척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메이와 어머니는 힘을 합쳐 치토세가 입을 만한 커다란 옷을 만들었습니다.


 “입어봐, 치토세!”

 “고맙데이.”


 치토세가 드디어 그 거적때기를 벗어버리는 순간이었습니다. 메이는 조금 부끄러워져서 뒤돌아섰습니다. 잠시 후, 어머니가 탄성을 내었습니다. 메이가 돌아보자 치토세는 환하게 웃었습니다. 온갖 색이 뒤섞여서 조금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도 했지만 그 옷은 치토세에게 딱 맞았습니다. 적어도 이제 치토세가 괴물처럼 보이는 일은 없을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치토세는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인사했습니다. 그리고 메이에게도 연신 고맙다며 인사를 했습니다.


 “메이 없었으믄 내 안즉 거 있었을 지도 모른데이. 메이, 윽수로 고맙데이.”

 “그야 치토세는 괴물도 아니고 나쁜 사람도 아니니까!”


 치토세가 메이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메이도 환하게 웃었습니다. 그리고는 손을 놓고 치토세를 꼭 끌어안아 주었습니다.

 보물 시내는 이제 메이네 가족 네 명이 든든하게 지키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함께 살았던 것처럼 치토세는 메이네 가족과 어울렸습니다. 함께 일하고 식사하고 대화를 나누며 잠들었습니다. 메이네 아버지를 도와 열심히 일하는 치토세를 본 사람들은 하나둘 두려움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치토세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치토세를 무서워하지 않게 되자 마을 사람들은 그리운 집을 향해 돌아왔습니다. 보물시내는 예전처럼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가 재잘재잘 울려 퍼지는 마을이 되었습니다. 처음 괴물을 봤다고 말한 마키아저씨네를 마지막으로 보물시내의 모두가 되돌아 왔습니다.

 치토세와 메이는 어떻게 되었냐구요? 물론 두 사람은 알콩달콩 보물시내와 사천숲을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나눴고 그렇게 많은 날이 지난 어느 날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이제는 치토세를 든든하게 여기는 마을 사람들 모두가 축하하는 가운데 이루어진 성대한 결혼식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 뒤로도 알콩달콩 예쁘게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2015. 02. 19.)








너와 나의 굴레가 끊어진다면

     시시도 료 드림 (For. 셀레스틴님)





 변함없이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한여름 날이었다. 항상 그래왔듯 시시도는 이 맘 때가 제일 정신없이 바빴다. 고등학교에서 가서도 테니스부는 그만두지 못했다. 테니스를 하는 것 자체가 매우 즐거웠으니까. 슬슬 진로를 걱정해야 할 시기였지만 그렇다고 테니스를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테니스를 계속 하면서 수의사 공부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막연하게 걱정이 앞섰지만 그는 그런 걱정에 휩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일단 부딪쳐서, 문제가 생기면 그걸 뛰어넘는 게 바로 시시도 료니까. 그가 그 무엇도 쉽게 포기하지 않게 된 데에는 카온의 역할도 컸다. 옆에서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나도 모르게 기운이 나게 되지 않던가. 십년도 넘게, 그러니까 그가 기억하는 대부분의 시간에 함께 존재하고 있는 사람. 그녀가 없는 기억을 되짚어내는 것이 더 어려울 정도로 시시도와 카온은 붙어 다녔다. 남들은 ‘소꿉친구’라 부르고, 지금의 시시도라면 죽어도 그것을 부정하고 싶은, 카온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는, 그런 관계였다.



*



 “료.”


 톡톡, 손가락으로 가볍게 어깨를 두드릴 때까지도 시시도는 카온이 왔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이제 막 운동을 마친 참이라 물 한 병을 그대로 꼴깍꼴깍 들이키느라 정신이 없었던 탓이었다. 움찔, 어깨를 움츠렸다가 카온의 얼굴을 확인하고서야 그 어깨가 평소대로 돌아갔다. 카온이 미소 지었다.


 “오늘도 계속 달린 거야? 밥은 먹었고?”

 “운동 끝나고 먹으려고 했는데.”

 “벌써 세시 넘었거든?”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카온의 표정에 시시도는 머쓱하니 머리만 긁적였다. 시시도의 운동 코스는 항상 똑같았다. 특별히 바꿔야 할 필요성도 느낀 적 없었고, 이 코스로 다녀야 카온이 언제 어디서든 나타나기 편하니까. 대강 이 시간이면 이쯤에 있겠구나, 하고 카온도 감으로 때려 맞췄다. 시시도는 하나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핸드폰이고 뭐고 신경도 쓰지 않기 때문에 이미 익숙했다. 카온은 그게 나쁘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연락이 안 되는 게 조금 답답하기도 했지만 찾으러 나오면 만날 수 있으니까.

 멀뚱하니 서있는 시시도의 팔을 카온이 낚아챘다. 그리고는 척척 걸어가서 가까운 벤치에 그를 밀어 앉혔다.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닌지라 시시도는 얌전히 그 자리에 앉았다. 카온이 들고 있던 쇼핑백에서 주섬주섬 하나씩 꺼내 늘어놓기 시작했다. 벤치 위에 자리 잡은 도시락 뚜껑에 손을 가져가다가 시시도는 방향을 틀어 카온에게로 향했다. 쇼핑백에서 딸려 나온 물티슈가 그의 손에 쥐어졌다. 그가 물티슈로 슥슥 손을 닦는 동안 카온이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오늘의 늦은 점심 메뉴는 주먹밥. 밖에서 먹기에는 주먹밥이 간편할 테니까.


 “잘 먹겠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카온이 만들어주는 도시락은 항상 최고였다. 그리고 늘 ‘맛있어’라고 돌직구로 뱉어내었다. 그게 사실이니까. 허겁지겁도 아니고, 그렇다고 느릿느릿도 아닌 적당한 속도로 그는 주먹밥을 꼭꼭 씹어 먹었다. 카온 요리 실력이 점점 느는 것 같은데. 나 때문인가? 에이, 설마, 그건 아니겠지. 그래도 계속 이렇게 카온이랑 붙어 지내면 굶는 일은 없을 것 같다. 할아버지가 그랬었나, 음식 잘하는 아내를 만나면 복이 많은 거라고. 나 원래 복이 많은 놈이던가?


 “료?”

 “엉?”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벙 쪄 있어.”


 아차. 카온이 부르자 시시도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주먹밥을 쥔 채로 손을 허공에 두고는 멍하니 그걸 쳐다보던 중이었다. 시시도는 다시 손을 움직여 입 안으로 주먹밥을 밀어 넣었다. 아, 딴 생각이 너무 많이 나. 집중이 안 된다니까.


 “그냥 피곤해서.”

 “요즘 무리하는 거 아냐? 공부하기도 바쁠 텐데.”

 “꼴사납게 빌빌거릴 수는 없잖아. 운동 안 하면 몸이 뻐근해진다니까.”


 조금 남은 주먹밥 조각을 마저 입에 물고 그는 기지개를 쭉 폈다. 무리하고 있는 걸지도.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소학교 때부터 꾸준히 운동을 해왔고, 그걸로 체력 관리를 해왔다. 테니스를 계속 하기 위해서도 물론 필요했다. 카온이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섞인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으니까.


 “바래다줄게.”

 “들어가려고?”

 “그래야지. 땡볕에 뛰었더니 힘들어.”

 “그러게 무리하는 거라니깐.”

 “그러는 너야말로 도시락 싸느라 무리하는 건 아니고?”

 “료가 안 챙겨먹으니까 그런 거잖아. 나라도 챙겨야지, 누가 챙겨줘.”


 씨익 웃어 보이는 모습에 시시도도 따라 웃어버리고 말았다. 하긴. 이런 관계 때문에 다른 친구들에게서 이미 “둘이 사귄대요~”하는 놀림 정도는 수도 없이 들었다. 그 때에는 둘 다 성을 내면서 친구를 쫓아다니느라 여념이 없었는데. 시시도는 스스로가 이렇게 변해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어때, 소꿉친구만 한 게 없지?”


 카온이 일어나면서 쇼핑백에서 절그럭 소리가 났다. 빈 도시락 통이 부딪치는 모양이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면 어색해서 미칠 것 같다. 예전과 똑같은, 카온이 거의 습관적으로 하는 말일 뿐인데. 대답을 안 해도 괜찮나? 대답 대신 그냥 뚱하게 있으면 왜 또 뚱해졌냐고 자연스럽게 카온이 풀어가려나. 아니, 근데 이건 너무 카온한테만 의지하는 거잖아. 시시도 료, 너 이런 놈이었냐. 하지만 뭐라고 말해야 좋을 지 도통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반박하자니 이상해질 게 뻔하고, 그냥 인정하고 말하자니 지금 이 타이밍은 아니고. 자신과의 싸움을 하는 동안 이미 카온은 앞서 걸어 나갔다.


 “바래다준다며. 안 가?”

 “어, 가.”


 이 싸움은 일단 다음에 끝내자. 



*



 카온이 들어가서 현관문이 닫히는 것까지 보고난 뒤에야 시시도는 뒤돌아섰다. 카온네 집과 시시도네 집은 뛰면 오 분도 될까 말까 한 가까운 거리였다. 바래다주고 말고 할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늘 카온을 데려다 주었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잠시라도 더 함께 있고 싶었다. 이런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카온에게 시시도는 그냥 역시 소꿉친구인 것뿐일까?

 시시도에게도 카온이 그냥 소꿉친구였던 시절이 있었다. 유치부 때부터 같은 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늘 붙어 다녔다. 그 때쯤엔 그냥 아무 생각도 없었던 것 같지만. 좀 크고 나서는 동네를 누비면서 온갖 놀이에 다 참여했었다. 그 자리에는 항상 카온도 함께 있었다. 잘 생각해보면 분명 그 때에도 카온은 소꿉친구였다. 그럼 언제? 그로서도 정확히 언제라고 짚기 어려웠다. 그냥 정신 차리고 나니 카온이 소꿉친구가 아니게 되었다. 모르는 사이에 심장은 두근거리기 시작했고, 눈을 떠보니 눈앞에 서 있는 카온이 더 없이 예뻐 보였다. 기분 탓이려니 하고 넘어가는 것도 한두 번. 스스로가 이런 쪽으로 둔하다는 사실을 이미 알다시피 그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깨닫고 인정하는 데에 몇 년을 소모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기도 한 시간이었다.

 집 앞에 도착했지만 쉽게 들어갈 생각이 나지 않았다. 조금 더 뛸까. 이제 막 땀 식었는데. 아, 그냥 다시 뛰고 올까. 머릿속이 여전히 뒤죽박죽이었다. 계속 이 상태로 지내야 하나? 그러기엔 이 감정을 깨닫고도 긴 시간이 지나버렸다. 자신이 이러고 있는 한 소꿉친구 상태를 계속 유지하기는 당연히 어렵다. 그렇다면 남은 답은 하나다. 고백해야지.



*



 그렇다면 고백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마음을 정리하고 고백하기로 결정한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그는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고백을 해야 하는 지 아무런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누구한테 물어봐야 되지? 근데 이런 걸 물어본다고 제대로 대답해 줄 놈은 있나.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겨난 탓에 시시도는 침대 위에 벌러덩 누워 머리를 싸맸다.

 조언을 구해볼 만한 사람을 떠올려 봤지만 딱히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쵸타로 녀석에게 물어봐? 아니, 그건 아니다. 물어본 적도 없지만, 그게 뭐가 되었든 간에 자신은 절대로 쵸타로가 하는 방식으로는 고백할 수 없을게 뻔했다. 그냥 여태 해왔던 대로 돌직구를 날리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까? 대화가 그렇듯이 고백도 상호 커뮤니케이션이다. 듣는 상대방을 생각해야만 했다. 그렇게 곧장 말해도 괜찮을까? 받아들이는 사람이 너무 놀라거나 오히려 오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지니 온갖 상상이 쏟아져 나왔다. 시시도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럼 언제? 어떤 상황에서? 무작정 카온을 만나자 마자 “좋아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럼 다른 모두가 그러는 것처럼 분위기 좋은 카페를 간다거나 뭐 그래야 할까. 그것도 뭔가 그림이 이상하다. 차라리 노을 지는 하천 옆 잔디밭이 훨씬 더 낫겠다. 그렇다고 해서 굳이 그런 상황을 연출해내기도 영 내키지 않았다. 어딘가 낯간지러웠다. 남들 일일 때에는 크게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 막상 자기에게 닥쳐오자 시시도는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이거 쉬운 일이 아니구나. 마음을 전달하는 일이 쉬울 리 없다는 것 정도는 알았지만 이론과 실제는 다른 법이었다.

 시시도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더 고민해봤자 애초에 정답이 있는 게 아니니까. 부딪쳐보면, 어떻게든 답이 나오겠지.



*



 변함없는 운동시간과 코스, 그리고 약속이나 한 듯 마주치는 장소. 그 장소가 가까워지자 시시도의 발이 빨라졌다. 왠지 오늘은 일찍 만날 것 같은데. 그의 예상과는 달리 가까운 곳에 카온은 없었다. 온몸에서 뻗어나가려는 아쉬움을 꽁꽁 묶어둔 채, 시시도는 속도를 좀 더 높였다.


 “료, 어디 가!”


 그리고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급하게 발을 멈추었다. 달려가던 속도 때문에 단숨에 멈출 수 없었다. 발바닥이 순간 훅 달아올랐다. 그래도 금방 

다시 균형을 되찾은 시시도는 홱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나무를 뒤에 두고 카온이 서 있었다. 아무래도 나무에 가려서 카온을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한 바퀴를 더 돌아야 하나 고민했는데 다행이다.


 “못 봤어.”

 “나무 뒤에 있었…… 는데 너 얼굴이 왜 그래?”

 “얼굴?”


 카온의 시선이 닿은 쪽으로 자기도 모르게 손이 올라갔다. 그리고 그 시선의 끝인 왼쪽 이마에 손가락이 닿자 시시도는 어깨를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따끔하네. 그러고 보니 아까 달리던 길에 뭔가 타잔이 타고 다닐 것 같은 줄 있던데. 탁 부딪치는 느낌은 있었지만 그냥 휙 손으로 치워버리고 말았다.


 “세상에, 상처 난 것도 모르고 그냥 달렸어?”

 “몰랐…….”

 “왜 이렇게 둔해, 얼굴에 상처가 났는데! 이거 봐, 피 흘렀는데 몰랐지?”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말에 시시도는 입을 다물었다. 잘못했을 땐 그냥 들어야지. 시시도는 카온의 손에 이끌려 평소의 그 벤치에 앉았다. 아무리 운동 중이어도 그렇지 어떻게 피가 흐르는 걸 모르냐, 도대체 얼마나 둔한 거냐, 그러게 조심하라고 몇 번이나 말을 해도 왜 안 듣냐, 이러쿵저러쿵. 시시도는 어, 어, 조심할게, 알았어, 등으로 가볍게 대답을 해주었다. 그 사이 카온은 가방을 열고 무언가를 열심히 찾았다. 그녀의 손에 파우치가 들려나왔다. 그리고 그 파우치를 열어서 연고와 반창고를 꺼냈다. 새삼스럽게 그녀의 준비성이 놀라웠다.


 “가만히 있어.”


 카온이 이미 한 손에 쥐고 있던 물티슈로 조심조심 시시도의 얼굴을 닦아내었다. 피부에 닿는 알코올 느낌이 싫지 않았다. 상처에 가깝게 닿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따가워.


 “거봐, 조심 좀 하지. 약 발라줄게.”


 카온이 연고를 꾹 짜서 손가락에 묻히고는, 그 손가락을 시시도의 이마로 가져다대었다. 조금 따갑기는 했지만 그냥 그런대로 괜찮았다. 이마를 문지르는 손가락이 부들부들하고 조심스러웠다. 그녀는 그 조심스러운 손길로 반창고까지 쓱 붙여주었다. 그가 손으로 더듬더듬 이마를 짚었다. 상처가 보이지도 않게 제대로 정리를 해 준 모양이었다.


 “고마워.”

 “소꿉친구 좋다는 게 뭐야.”


 카온이 씩 웃어보였다. 하지만 시시도는 웃지 않았다. 왠지 오늘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 이마를 문지르던 손가락이, 그렇게 부들부들하던 손가락이 자신의 심장을 그렇게 부들부들 문지른 것만 같아서 그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뱉어내지 않으면 이렇게 계속 목을 간지럽게 만들 거야.


 “소꿉친구 그만하자.”



*



 시시도는 살면서 그만큼 당황해 본 적이 없었다. 얼마나 당황했냐면, 눈앞에서 카온이 달아나는 것을 봤는데도 벌떡 따라 일어나지 못했을 정도였다. 말을 해 놓고 나서 스스로도 이건 너무 앞뒤를 잘라먹은 직구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문제는 그 뒷말을 이어서 하기 전에 카온이 자리를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는 데에 있었다. 얼이 빠진 듯, 두 눈은 휘둥그레져 있고 입은 반쯤 벌린 상태로 자신을 쳐다보던 카온이 어느새 저쪽 골목을 지나 사라져버렸다. 뒤늦게야 사태를 파악하고 시시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식간에 몇 걸음을 달려 나갔다가 그는 부리나케 제자리로 돌아왔다. 벤치 위에 널브러져 있는 카온의 짐을 제대로 확인조차 하지 못하고 그냥 다 가방 속으로 밀어 넣었다. 지퍼까지 제대로 채운 뒤, 가방을 품에 끌어안고 그도 전력질주를 시작했다. 방향만 안다면 카온을 쫓아가는 건 무리가 아니다. 카온이 사라졌던 골목을 향해 달렸다. 고민은 그 다음 골목과 마주했을 때부터 생겼다. 여기서 꺾어서 갔을까, 아니면 그대로 하천 방향을 따라 달렸을까. 끙, 머리를 싸맸다가 시시도는 무작정 앞을 향해 뛰었다. 자기만큼이나 카온도 지금은 머리가 복잡할 텐데 옆으로 꺾고 어디로 숨고 그런 게 가능할 것 같진 않으니까. 그냥 직감이 맞길 바라면서 죽어라고 달렸다.


 “아, 어디까지 갔냐고!”


 꽤나 한참 달렸는데도 카온의 뒷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휙휙 고개를 내저어 봐도 카온으로 착각할 만한 여자애조차도 눈에 띄지 않았다. 아까처럼 어디에 가려 있는 거 아냐? 아무리 자신과 함께 뛰어놀며 자란 카온이라 해도 지금까지 운동을 꾸준히 한 자신보다 빨리 갔을 리는 없다. 지나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시시도는 마음이 급해졌다. 아까 전에 달려온 길을 역방향으로 달렸다. 아까보다는 훨씬 느린 속도로, 주변의 큰 나무나 벤치 쪽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서.

 얼마 거슬러 가지 않아서 시시도는 카온을 발견했다. 그가 상상했던 노을 지는 하천 옆 잔디밭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기는 했지만, 아무튼 그녀는 노을 지는 하천 옆 잔디밭 공터에 우두커니 선 커다란 나무 뒤편에 주저앉은 채였다. 조심조심 발을 내딛던 시시도는 오히려 이 편이 더 놀라게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에 우뚝 멈춰 섰다. 발밑에서 잔디가 솨아아 소리를 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카온이 돌아보았고, 눈이 마주쳤다.


 “기다려!”


 또다시 자리를 뜨려는 카온을 붙잡아야 했다. 소리를 너무 크게 친 탓일까 멈춰선 카온의 어깨가 확 움츠러드는 게 보였다. 카온은 시시도를 돌아보지 않았다. 시시도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사각, 사각. 연필 깎을 때나 날 것 같은 소리가 발밑에서 계속 났다. 그리고 마침내, 세 걸음 정도를 사이에 두었다.


 “카온. 그러니까 어, 미안해, 일단. 뭐라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나쁜 뜻으로 얘기한 게 아니야.”


 대답이 없었다. 목이 타들어갔다. 꿀꺽, 침을 삼켰다. 그 때까지도 품 안에 안았던 카온의 가방은 조심스럽게 나무 아래쪽에 내려놓았다. 큼, 목도 한 번 가다듬고 땀으로 범벅이 된 운동복의 매무새도 다졌다. 젠장, 멋있는 고백이고 뭐고 이래서는 폼도 안 나겠다. 그래도 좀 멋있게 하고 싶었는데.


 “그러니까, 내 말은…….”

 “그만하자는 게 무슨 뜻이야?”


 카온의 목소리가 너무 떨려서 이해하는 데에 시간을 조금 소모해야만 했다. 시시도는 크게 숨을 뱉어내었다.


 “너랑 나랑 소꿉친구인 거 맞는데, 넌 어떨지 몰라도 난 앞으로도 계속 소꿉친구 상태로만 있고 싶지는 않거든. 좋아하니까.”


 어딘지 낯간지러운 말. 볼이 뜨거워져서 시시도는 손등으로 볼을 슥슥 문질렀다. 자꾸만 땅으로 내려가는 시선을 끌어올려서 카온을 쳐다보았다. 카온이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그가 이 마음을 깨닫는 데에 소모했던 그 시간만큼이나 길고 긴 걸음이었다. 키도 분명 비슷했었는데. 어느새 자신보다 좀 더 아래에 내려가 있는 어깨를, 양손으로 붙들고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녀의 어깨가 가슴팍에 닿았다. 시시도는 양손을 천천히 내려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널 좋아해, 카온. 그러니까 난, 소꿉친구 말고 남자친구 하고 싶다는 뜻이야. 그거 말고 다른 뜻은 없어. 너무 앞 뒤 없이 말해서 미안해.”


 두근, 두근. 카온의 심장이 뛰는 게 느껴졌다. 자신의 심장박동도 따라서 빨라졌다. 산들바람이 솔솔 불었다. 어딘지 목덜미가 자꾸만 간지러웠다. 조금 전까지 달리느라 계속 흘렀던 땀이 다 식어갔다. 아.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 땀 냄새 날 텐데 어떡하지. 이제 와서 팔을 풀고 뒤로 물러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젠장. 고백을 하려고 상상해봤던 그 모든 상황 중에 이런 전개는 없었다. 카온이 뭐라고 할지, 지금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 지 시시도는 아무것도 예상하지 못했다. 품 안에서 카온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대로 계속 대답을 안 하면 어떡하지. 그러면 팔 풀고 뒤로 물러나야 되나?


 “미, 미안해.”


 시시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 대답은 무슨 의미일까? 어떤 점에 대고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 걸까? 잔뜩 긴장이 되어서 입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팔을 역시 푸는 게 나을까. 조심스럽게 손을 풀어내려는데 탁, 양손이 와서 그를 붙잡았다. 움찔, 시시도는 그대로 멈추었다. 어, 어.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그렇게 달렸는데도 카온의 손이 차가웠다. 어릴 때도 긴장을 하면 곧잘 손발이 차가워지고는 했었다.


 “내가 멋대로, 훌쩍, 오해해서 그런 거니까.”

 “우, 울어?”


 화들짝 놀랐지만 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양팔은 여전히 카온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였고, 심지어 그 팔은 카온이 붙든 상태였다. 몇 년이나 봐 온 건 사실이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카온이 울면 시시도도 따라서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랐다. 게다가 지금은 명실상부 자신이 울린 게 아닌가. 무슨 말을 건네야 할 지, 어떤 말로 달래줘야 할 지 머릿속이 실타래처럼 엉켜있었다. 말 대신 뻐끔뻐끔 입만 움직였다.


 “그, 그러니까 지금 그거, 고, 고백한 거지?”


 카온의 말에 시시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런 식으로 고백할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인 걸 어쩌겠어.


 “응.”

 “나 대답해야 되는 거지?”

 “어, 어.”


 잠시 카온은 또 대답이 없었다. 천천히 카온의 손이 온기를 되찾아갔다. 팔에서 팔로 조금씩 온기가 옮겨가는 것만 같았다. 지금 시간은 어떤 속도로 흐르고 있을까. 언제나 같은 속도로 가는 게 당연하겠지만, 지금은 왠지 시계바늘이 느릿느릿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오면서 달아오른 얼굴을 식혀주었다.

 그리고 카온이 움직였다. 자신의 허리를 감고 있던 시시도의 팔을 조심조심 풀어내었다. 시시도는 팔을 어정쩡하니 둔 채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카온의 손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눈물을 닦아내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카온이 뒤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나, 나도 좋아해.”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렇게 바라던 말이었는데 막상 듣고 나니 여간 쑥스러운 게 아니었다. 얼굴이 과연 얼마나 붉어졌을까. 이 상태로 카온의 얼굴을 계속 마주보고 있어도 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시선을 돌리면 이상하지 않을까. 이제는 몇 년 동안 그렇게나 시시도를 간질이고 괴롭히던 그 감정에 종지부를 찍을 때였다. 


 “그, 그럼 이제 우리, 그러니까.”

 “응.”


 소꿉친구 말고 연인 관계. 연인이라는 단어가 어딘지 굉장히 “꼴불견이야.”하고 외치고 싶게 만들었지만, 마음에는 들었다. 두 사람은 너무 오래 소꿉친구라는 굴레 안에 갇힌 채로 지내왔으니까. 그래봤자 앞으로도 계속 붙어 다닐 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겠지만.


 “사귀는 거다.”


 시시도가 볼을 긁적였다. 대답을 들은 카온의 표정이 훨씬 밝아졌다. 환하게, 정말로 화사하게 웃는 카온을 보고 시시도도 따라 피식 웃었다. 진작 이렇게 고백했으면 될 텐데. 꼴불견이다, 시시도 료. 다른 커플들이 그렇게 하듯 멋들어지고 반짝반짝한 고백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결과는 원하던 대로 이루어졌으니까.


 “가자.”


 시시도가 손을 내밀었다. 여태까지 몇 번이고 잡고, 또 잡았던 손이 새삼스러웠다. 카온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멈칫거리던 손이 슬며시 앞으로 나왔다. 두 사람의 손이 포개졌다. 따뜻했다. 꼭 붙잡은 손이 어딘지 모르게 든든해서, 카온은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방금 전까지 울었던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산들바람이 잔디를 스쳤다. 시원한 여름의 소리가 두 사람을 축복했다.



*



 어느새 바람이 차가운 계절이었다.

 계절이 바뀌는 동안 소소한 변화가 몇 가지 생겼다. 예전에는 하지 않던 스킨십이 늘었고 다른 친구들에게 종종 설명을 해야 했다. 소꿉친구가 아니라 지금은 연인이라고. 그 설명을 하는 데에는 항상 시시도가 필요했다. 평소답지 않게 카온이 얼굴을 붉히며 횡설수설하는 탓이었다. 결국 보다 못 한 시시도가 툭 던지듯 “사귀는데.”라고 말하곤 했다. 친구들은 새삼스럽다는 반응이었다. 여태도 사귀는 것처럼 해 놓고 뭘 이제 와서.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정말 그런 것도 같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데이트였다. 여태까지도 정해놓지 않고 종종 만나고는 했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건 데이트와는 달랐다. 이제는 언제, 어디서 만날 지를 정했고 뭐가 하고 싶은지도 물어보았다. 동네에서 마주쳐서 대화를 한다거나 소소하게 산책을 한다거나 뭐 그런 것들과는 조금 다른 느낌. 둘이서 영화를 보고, 맛있다고 소문난 음식점을 찾아가고, 가끔은 아이쇼핑도 하는 평범한 데이트. 보통 커플들이 할 만한 것들을 두 사람은 하나씩 밟아나갔다.




 “료.”


 오 분 쯤 기다렸던가. 카온은 약속시간에 늦는 법이 없었다. 게다가 보통은 카온이 먼저 와 있는 편. 연인이 된 이후로 시시도는 조금씩 먼저 나오는 데에 습관을 들였다.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외투에 목도리, 벙어리장갑까지 하고 나온 카온이 귀여웠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카온이 팔짱을 꼈다. 피식, 웃음이 났다. 팔짱을 낀 채로 두 사람은 걷기 시작했다.


 “눈 올 것 같은데.”

 “아, 눈사람 만들고 싶다.”

 “애들도 아니고.”

 “뭐, 어때. 옛날엔 료가 제일 열심히 만들었으면서.”

 “지금 공원에서 그러고 있으면 꼴불견이거든?”

 “눈사람 만드는 게 뭐.”


 삐죽, 카온이 입술을 내밀었다. 시시도가 킥킥대고 웃었다. 놀리고 싶단 말이지, 이런 표정을 보면. 이럴 때면 대화는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이따 저녁에 눈 오면 가볼까.”

 “사실은 료도 만들고 싶은 거지?”

 “너 혼자 눈사람을 어떻게 만드냐.”

 “조그맣게 만들면 되지!”

 “큰 게 멋있잖아.”

 “누가 남자애 아니랄까봐.”

 “애는 무슨.”


 금방이라도 눈송이가 떨어져 내릴 것만 같은 하늘이었다.





(2014. 10. 03.)









기다려 온 고백

     사나다 겐이치로 드림 (For. 빈조님)




 무라사키가 그 날도 응원을 와줄까. 사실 책상 앞에 앉아서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은 내 성격에 맞지 않는다. 이렇게 시시하게 사색에 빠져 있을 바에야 도장에 나가서 검을 휘두르는 게 훨씬 낫다. 정신 통일하기도 좋고 잡생각을 다 물리쳐주니 말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하염없이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도장에 가도 무라사키에 대한 생각은 떨쳐지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검을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더 강해지는데 도무지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 그러니까, 방법을 찾을 때까지는 이렇게 있어야만 한다.

 이런 의미 없는 걱정과 고민을 한 지 벌써 두 시간이 넘어 간다. 시간은 금이라고 하였거늘, 해이하다, 사나다 겐이치로! 스스로에게 호통을 열 번도 넘게 쳤는데 왜 아직 이러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방문을 나섰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여덟 번째 반복하고 돌아온 지금의 나로서는 그 어떤 것도 감을 잡을 수가 없다. 몇 년은 더 본 사이인데 왜 새삼스럽게 무라사키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일까.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지만 그렇게 오래 된 것 같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갑작스럽지도 않았다. 무라사키는 자연스럽게 나와 늘 함께 했다. 그러니까, 내 생각 속에서도 무라사키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건 좀 무언가 잘못된 게 분명하다. 이렇게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깊게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다. 처음이다. 그래서 당황스럽다.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할 지 잘 모르겠다. 형님에게 의논해 볼까 생각도 해 보았으나 이런 일로 형님을 귀찮게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차라리 유키무라, 아니, 아니다, 렌지에게 물어보는 게 나을 것 같군. 내일은 부활동이 끝나고 난 뒤에 꼭 렌지에게 물어봐야지.




 부활동이 끝나고 난 뒤 렌지에게 이 증상에 대해 묻기로 하다니 이건 확연히 내 잘못이었다. 잘못이라기보다는 엄청난 실수였다. 니오의 반응이라던가, 마루이의 반응 정도야 물론 예상했다. 아카야가 어떤 표정을 지으면서 나를 쳐다볼지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라사키가 그 자리에 올 것이라고까지는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 아니, 그거야말로 정말 당연한 일이었는데 말이다. 부활동이 끝날 시간이면 무라사키는 항상 테니스장 근처에 와 있었다. 하교하는 나를 기다리기 위해서. 테니스부에 들어오고 나서 거의 이 년동안 반복되어온 일상을 왜 어젯밤에는 떠올리지 못했을까. 아무리 머리를 쥐어뜯어봤자 결국 지난 일이었다.

 집까지 돌아오는 길이 더없이 힘들었다. 무라사키가 동그란 눈을 크게 뜨며 내게 “무슨 말 했어?”라고 물어오는 바람에 더 그랬다. 난 거짓말을 하기 싫었고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십오년의 짧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했던 대답 중 가장 어중간한 대답을 하고 말았다. “그냥.”이라니. 나 스스로도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에 너무 놀라서 잠시 얼이 빠졌다. 무라사키 역시 황당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뒤로, 무라사키의 집 앞에서 내일 보자는 인사를 할 때까지 우리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난 머리를 싸매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일까. 해이하다 못해 이건 멍청하기 짝이 없다.

 내일 무라사키를 만나면 사과를 해야겠다. 어제는 이상한 소리를 해서 미안했다. 아니, 이상한 소리를 하지는 않았으니 다른 말로 하는 게 낫겠군. 어제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 해 미안했다. 사과를 한다면 무라사키는 가볍게 어깨를 들썩이며 괜찮다고 말해줄 것이다. 몇 년 동안 무라사키와 함께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예상할 수 있는 행동이다. 음, 하지만 무라사키가 다시 물어올지도 모른다. 그럼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지?

 음.

 으음.

 으으음.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지만 무라사키에 대한 이 마음을 무라사키에게 상담 받을 수는 없다. 역시 렌지에게 다시 상담을 받아야겠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고민하기엔 에너지 소모가 너무 많다. 마음을 다스리고 오늘은 어제 못한 정신수련을 해야겠다. 도장에 가서 검을 좀 휘두르면 좋겠지. 그러면 무라사키 생각이 나지 않을 테다. 아니, 이건 무라사키 생각이라고 해야 하나? 이젠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군.

 일단은 목검을 챙긴다. 지금부터는 아무 생각도 하지 말아야한다. 그러고 보니 무라사키가 전에는 도장에도 자주 놀러오고는 했었지. 음, 잠깐, 지금 도장에 가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다. 무라사키와 관련이 없는 곳으로 가야겠다. 집에서 좀 멀리 있는 공원에서 가볍게 러닝을 하는 게 좋겠다. 그래, 그래야지. 사나다 겐이치로, 해이해지지 마라.





 “겐이치로. 그건 매우 간단한 답이지 않은가.”

 “음?”

 “너는 무라사키를 좋아하는 것이다.”


 렌지는 마치 ‘아카야, 테니스의 스펠링에는 엔이 두 번 들어간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니.’라고 말하는 투였다. 렌지의 말은 언제나 차분한데다가 당연한 사실을 일깨워주는 일이 많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딱히 그 말이 놀랍다거나 하지는 않…….


 “지금 뭐라고 했나, 렌지?”

 “후후, 사나다, 역시 이런 표정 지을 줄 알았어.”


 유키무라가 어깨를 가볍게 들썩이는 와중에 렌지가 한숨을 내쉰다. 대조되는 두 사람의 반응이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다. 방금 들었던 말을 혼자 곱씹는다. 딱히 듣지 못해서 되물어본 게 아니다. 좋아한다? 낯간지러운 말이군. 그보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할 학생의 신분에 좋아한다는 감정이라니! 매우 해이해진 게 틀림없다. 언제부터 마음에 틈이 벌어진 것일까. 항상 수련을 열심히 해왔고, 마음을 다스리는 것에도 빈틈이 없었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런 일이 생긴 걸까.


 “좋아한다는 감정이 학생 신분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확률 구십사점 이퍼센트.”


 도대체 무슨 근거로 렌지가 이런 확률을 읊어주는 건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그는 나에 대해서 꿰뚫을 수준으로 잘 알고 있다. 나는 말을 하지 않는다. 렌지는 그렇다고 해서 나를 닦달하거나 할 사람이 아니다. 물론 내가 상담을 요청한 건 렌지이지만 제멋대로 함께 따라온 유키무라도 그럴 사람이 아니다. 왠지 머릿속이 ‘좋아한다’라는 글자로만 가득 차서 묘하게 깔끔해진 데 반해 가슴은 더 먹먹해졌다.


 “사나다, 우리 부활 끝날 때쯤에 무라사키가 안 보이면 걱정 되지?”

 “그건 당연한…….”

 “다른 친구랑 같이 간다고 안 오면 서운하고.”

 “그건…….”

 “메일 오면 기쁘고, 응원한다 그러면 힘나고. 그렇지?”


 내 말을 전부 끊고 할 말을 다 한 유키무라의 표정을 읽기가 어렵다. 여러 가지로 읽을 수 있는 그의 표정만큼이나 내 마음도 복잡하다. 몇 년을 함께 자라 온 사이인데 늘 보던 시간에 안 보이면 걱정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다른 친구랑 같이 간다고 하면, 그것도 역시 매일 하교하던 동료가 사라지니 서운할 수도 있지. 메일이 오면 기쁜 것도 당연한 거고 응원해줬는데 힘을 내지 않으면 응원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유키무라.”

 “지금 메일 오면 기쁜 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지?”

 “너도 렌지를 닮아 가는가.”

 “넌 아카야가 메일 보내도 그만큼 기쁘니?”


 아카야가 메일을 보내면?

 가만히 생각해보니 유키무라의 말이 맞다. 아카야가 메일을 보냈다고 해서 딱히 기쁜 적은 없었다. 오히려, 메일 알림음에 무라사키를 떠올렸다가 다른 사람이어서 아쉬웠던 적이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렌지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 맞다.


 “음.”

 “납득했군.”

 “이런 데는 엄청 둔하다니까.”


 유키무라와 렌지가 뭐라고 더 말하는 소리가 들리긴 하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무라사키가 한 번 떠오르니까 머리, 가슴 어느 쪽에서도 떠나질 않는다. 내가, 무라사키를 좋아한다는 건가. 가슴께가 따뜻해져간다.





 옆에서 아무리 니오와 마루이, 아카야가 떠들어도 들리지 않았다. 평소처럼 화를 내거나 해이하다고 소리를 치지 않아서인지, 부활동 막바지 무렵에는 아카야가 걱정스럽게 “부부장, 괜찮아요?”하고 물어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아카야는 참 귀여운 후배이지만 지금은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 대화 이후로 머릿속에 온통 무라사키뿐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요즘은 거의 무라사키 생각뿐이긴 하지만 아무튼 그렇다. 좋아한다. 어딘가 낯간지러워서 입 밖으로 내기는 어려운 단어다. 그 단어 외에는 이 상태를 설명할 그 어떤 단어도 존재하지 않는 게 사실이다. 좋아한다. 좋아한다. 무라사키 아야카를 좋아한다.

 부활동이 어떻게 끝났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부리나케 옷을 갈아입고 라켓을 챙겨들었다. 언제나처럼 교문 앞 벤치에 앉아있는 무라사키를 보는 순간 모든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났다. 오로지, 하나만이 남았다. 고백하자.



*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몰라도 최근의 사나다는 이상하다. 이상한 정도가 좀 심하다. 늘 솔직함을 지나쳐서 우직한 그인데 왤까. 그 날만 해도 그렇다. 평소처럼 그냥 “뭐했어?”라고 가볍게 물어봤을 뿐인데 “그냥.”이라니. 다른 사람이 그렇게 대답을 했다면 아무렇지 않게 지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대답을 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사나다 겐이치로다. 이러니 내가 걱정을 안 할 수가 있나.

 근데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사나다 걱정을 하기 시작했더라?

 최근의 일은 아니다. 스스로 이건 예전과 다르다고 깨달을 정도의 시간은 지났다. 사실은 그 이상도 깨달았다. 그래, 물론 사나다는 소꿉친구이다. 소학교 때부터 붙어 다녔으니까 벌써 몇 년은 함께 지내온 사이이다. 등교도 하교도 같이 하고 그 밖에도 많은 것들을 함께 했다. 같이 하지 않은 걸 찾는 게 더 빠를 게 분명하다. 뭐, 그랬으니 이런 상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하지만 그 예전엔 사나다를 이만큼 생각한 적이 없었다. 이렇게 쉴 새 없이 사나다를 떠올린다거나 그냥 지나치듯 내뱉은 한 마디에 온종일 걱정을 하는 일은 없었단 말이다. 언제나 습관처럼 사나다가 부활을 마치고 오기를 기다렸지만 그 시간이 설레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난, 사나다 겐이치로를 좋아하는 거야.

 미쳤다, 미쳤어. 무라사키 아야카, 너 제정신이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나다 겐이치로를 좋아하다니! 사나다가 어떻게 반응할지는 보지 않아도 펼쳐진다. 해이하다, 학생의 신분에 어찌 남녀사이에 정분을 쌓을 수 있단 말인가! 아니,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이런 틀에 박힌 고리타분한 생각을 할 수 있나 싶지만 그게 사나다 겐이치로인 걸 어떡해! 더 큰 문제는 그런 사나다를 이 시대의 여중생인 내가 좋아한다는 것이다.


 “아으으, 복잡해!”


 침대에 털썩 드러눕는다. 더듬더듬 손을 뻗어서 핸드폰을 손에 쥔다. 메일이나 보내볼까. 안 그래도 복잡한데 여기서 사나다한테 메일을 해봤자 도움이 될 리가 없다. 그래봐야 단답형인 짧은 메일만 올 텐데 뭐. 긴 답변을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적어도 지금은 하고 싶지 않다. 다시 핸드폰을 던지려는 순간,

 딩동.

 어라, 메일이네. 히요리려나? 화면에는 깜빡깜빡 메일 알림이 들어온다. 버튼을 몇 번 눌러 메일함을 연다. 어. 음. 어? 사나다잖아. 벌떡 몸을 일으킨다. 세상에. 사나다가 나한테 메일을 보낸 거야, 지금? 나한테 답장으로 보낸 게 아니고 먼저 보낸 거라고? 이 놀라운 상황에 얼어붙어서 잠시 동안 화면만 쳐다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린다. 빠르게 버튼을 조작해 메일을 연다.





 “있지, 사나다.”

 “음?”

 “어젯밤에 보냈던 메일 말인데. 그거 왜 보낸 거야?”


 내 질문이 예상 외였던지 늘 무표정이던 사나다의 얼굴에 당혹감이 나타난다. 음, 하는 소리부터 내뱉는 걸 보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는 눈치다. 그렇다고 묵묵부답 할 사나다는 아니니 그냥 그가 걷는 대로 따라 걷는다. 공연히 긴장이 되어서 가방끈을 꼭 붙잡는다. 모자가 만들어낸 그림자 밑으로 오물대는 그의 입술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열릴 듯 말 듯. 그렇게 어려운 질문인가?


 “시합 날에 네가 와서 응원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래서 확인 차…….”

 “내가 언제 응원 안 간 적 있나, 뭐.”


 내 말에 동의하는지 그도 고개를 끄덕인다. 사나다가 테니스를 시작한 이후로 난 단 한 번도 그의 시합을 놓친 적이 없다. 그건 친구로서의 예의니까. 거기에는 그가 이기는 게 내가 이기는 거라는 묘한 동격화도 한 몫 했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응원하러 올 거냐니? 피식, 괜히 웃음이 난다. 뭐야, 내가 와 줬으면 좋겠다는 거네? 지금 사나다는 자기가 어떤 뜻의 말을 한 건지는 알고 있을까. 아마 모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기분이 좋다. 어휴, 이 둔한 놈. 너 지금 나한테 ‘좋아한다’고 말한 거나 다름없다구.


 “그리고 한 가지 더 있다.”

 “응?”


 어라, 그거 말고 이유가 또 있나? 아까보다 좀 더 기대되는 말에 심장이 콩닥콩닥거린다. 슬쩍 고개를 숙여 밑에서부터 그를 올려다보려 하자 그가 모자의 챙을 잡아당겼다. 부끄러워하는 걸까. 귀엽다. 어, 나 지금 사나다를 귀엽다고 생각한 거야? 세상에. 콩깍지가 씌어도 단단히 씌었구나, 나.


 “시합이 끝나면 너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심장에서 방금 덜커덩 소리가 난 것 같은데 착각인가. 무슨 자동차 엔진에서나 날 법한 소리가 사람 몸에서 나는 거지. 지금 무려 이 사나다 겐이치로가 나한테 선전포고 한 거란 말이지? 지금 나 고백할 거요, 하고 다 불고 있는 건데 사나다는 전혀 의식하지 못 하는 모양이다. 너 바보니, 그냥 둔한 거니. 아니, 애초에 선전포고라는 데서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건가.


 “무슨 얘기?”

 “그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겠는가.”


 아까와는 달리 곧장 대답을 뱉어낸다. 결심이 단단히 섰는지 모자 밑으로 언뜻 비치는 그의 얼굴에서 긴장감이 느껴진다. 우뚝 그가 멈춰서는 바람에 따라서 멈춰 선다. 그가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친다. 언제나 아무렇지 않게 마주쳐왔던 눈이, 설렌다. 뭐라고 말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기다려달라고 했나. 원래 사람의 심장은 계속 뛰어야 하는 것이지만 이렇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세게 계속 뛰고 있으니 혼이 빠져나갈 것만 같다. 


 “꼭 그 때여야 해?”


 간신히 만들어낸 말에 대답 대신 그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다. 분명히 가볍지만 묵직하게 느껴지는 그의 고갯짓에 나도 따라 고개를 움직인다. 왜 시합이 끝난 뒤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는 이길 테니까. 씨익 웃어주고 홱 몸을 돌린다. 뚜벅뚜벅, 내 발소리에 맞춰 사나다의 발소리가 겹쳐진다. 아주 사소하지만, 기분 좋게 만드는 소리.





 집 앞에서 그와 어떻게 인사를 했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혼자 들뜬 게 티가 나지 않도록 최대한 애를 썼지만 어쩌면 그가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심장이 콩닥콩닥해서 귓가를 간질이는 게 어찌나 참을 수 없던지 자꾸만 웃음이 새어나왔다. 지금도 이렇게 간질간질, 말랑말랑한데. ‘시합이 끝나면 너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사나다의 그 말이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방으로 튀어 들어갔다. 이렇게 달콤한 기분을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지 않아. 구름 위에 굴러다니면서 구름을 떼어먹는 기분. 아니, 그걸 해봤다는 건 아니고 상상을 하면 그런 기분이 드니까. 구름 대신 침대로 뛰어든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두 발을 연신 굴렀다가 홱 뒤돌아 누웠다. 천장에 붙여놓은 아이돌 포스터도 오늘만큼은 전날처럼 설레지 않는다. 안녕, 오빠들? 오늘은 엄청 기분이 좋아요. 왜냐면 드디어 그 애가, 사나다가! 나에게 고백할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죠! 꺄악! 어딘지 부끄러워서 두 손으로 얼굴을 마구 비빈다. 으악, 이러면 안 되지! 다시 벌떡 일어나 책상 앞에 앉는다. 거울을 적당한 위치에 올려놓고 들여다본다. 이 정도면 오늘의 피부 상태는 양호한 걸. 부디 그 날까지도 이 상태로만 있게 해주세요. 다크써클 안 생기게 해주시고 뾰루지 안 나게 해주세요! 어디에다 비는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빌어보기로 한다. 여태까지는 사나다를 만날 때 이렇게 빌어본 적이 없었다. 그야 어릴 때부터 온갖 모습 다 보고 살아온 사이니까. 그러고 보니 사나다는 나한테 장난으로라도 못 생겼다고 말한 적은 없다. 물론 그런 장난을 치는 애도 아니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이젠 ‘못 생기지 않았다’로는 만족할 수가 없는 걸. 예쁘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게 여자 마음이랄까. 뭐, 좋아한다는 말을 들을 정도라면 당연히 예쁘게 보이는 거겠지만.

 이렇게 사나다의 시합 날을 기다려 본 적이 있었나. 하루하루가 지나갈수록 괜히 같이 설레고 긴장한 적은 있다. 하지만 이건 뭐랄까, 참을 수가 없어서 시계라도 마구 돌려보고 싶은 거랄까. 주체할 수 없는 설렘을 담아서, 전속력으로 달려 나가 다른 사람들보다 며칠을 더 빨리 지나갈 수 있다면 기꺼이 그러고 싶은 마음이다.

 으으, 참을 수가 없어!

 절대로 내가 눈치가 빠른 게 아니다. 이 정도는 정말 누구나 눈치를 챈단 말이다. 사나다가 너무 둔한 것뿐이지 절대로 내가 예민한 게 아니다. 그러면 다른 모든 사람들도 고백을 하기 전의 이런 상황을 겪고 나서야 커플이 되는 걸까? 아니, 가만히 생각해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어느 정도 무르익은 분위기 속에서 어느 한 쪽이 ‘우리 사귈까요?’하고 묻는 게 더 일반적이려나. 상대방 쪽에서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채는 게 정상인가?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고 저떻고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내가 좋아하는 사나다 겐이치로가 저렇게 둔한데! 가볍게 스치는 봄바람을 맞고 살랑거리는 내 마음. 으아앙, 어떡해.





 발작적으로 벌떡 일어나 돌아다니고, 혼자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고, 그러다가 주위 사람들의 말을 놓치고, 사나다와 집에 돌아오고, 아침에 등교하고, 돌아오고, 학교 가고……. 며칠이 지나갔다. 정말로 길고 긴 며칠이 지나간 후에야 드디어 사나다의 시합 날이 다음 날이 되었다.

 온종일 쏟아지는 비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오다가 내일도 비가 오면 시합이 연기되어 버리는 건 아닐까? 다행스럽게도 밤이 되자 비가 멎었다. 가슴을 졸이며 찾아본 기상예보에도 내일은 맑을 거라고 했다. 좋아, 이상 무. 사나다도 최고의 컨디션을 만들어 놨을 텐데 그게 틀어지면 안 되잖아. 물론 그가 하려는 말을 늦게 듣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도 문제지만.

 여전히 사나다의 말이 온 정신을 휘저어 놓는다. 내일 시합은 최고로 예쁜 모습으로 응원을 하러 가야지. 무슨 옷을 입을까, 옷장을 열어 몇 벌이나 꺼내본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침대 위에 옷으로 산을 만들고 난 뒤에야 결정을 한다. 결국에는 묻지 않아도 뻔한 사나다의 취향을 적극 반영해 수수한 원피스가 당첨되었다. 딱히 기상예보를 믿지 못해서 그러는 건 아니지만 내일은 제발 날씨도 맑게 해주시고, 물론 정말 너무너무도 당연한 일이라 제가 굳이 빌지 않아도 되겠지만 사나다가 시합에서 이기게 해주세요!



*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검은 모자가 그의 얼굴에 검은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언제나 드리워져 있었지만, 그녀는 오늘만큼은 그 그림자를 마음껏 원망하기로 했다. 키가 큰 그를 올려다보는 데도 표정이 어떤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그게 싫었다. 뭐라고 한 마디 하려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가 다시 꾹 입을 다물었다. 얇은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고 있었다. 연신 들썩이는 입술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래, 말해. 뭔지는 몰라도.

 그보다 더 전에 머리에 툭 얹어지는 게 있었다. 갑자기 시야가 어두워졌다. 모자의 캡이 그녀의 얼굴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고개를 들 생각도 않은 채 그녀가 천천히 양 손을 들었다. 그가 줄곧 쓰고 다니던 모자가 손끝에 닿았다.


 “기다려라. 아야카.”


 왠지 엄청 부끄러워져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아야카는 고개만 끄덕였다. 이래서 모자를 쓰는 건가. 모자를 푹 눌러썼다. 눈썹을 덮어버리도록 꾹 눌러쓰고 나서야 그녀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그가 걸어갔다. 그가 뱉어낸 세 글자를 입 안에 굴리며 쳐다본 뒷모습은 정말 눈물이 나도록, 멋있었다.





 그 날의 코트는 반짝거렸다. 전날 내렸던 비가 바닥 전체를 코팅한 듯 했고 아지랑이가 아른거릴 정도로 햇볕이 뜨거웠다. 그저 서 있을 뿐인데도 땀이 주륵주륵 흐르는데 라켓을 들고 뛰는 그들은 어땠을까. 그래도 얼굴만큼은 화끈거리지 않았다. 까만 모자를 가만히 손으로 쓸던 아야카의 동작이 멈췄다.

 시합이 끝났다.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햇볕만큼 뜨거운 목소리였다. 남학생들 여럿이 크게 릿카이를 불러대었고, 그 소리가 커질 때마다 아야카의 가슴도 같이 뛰었다. 라켓 대신 상대방의 손을 잡고 악수를 하는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아니, 이미 한참 전부터 그녀는 눈을 떼지 못 하고 있었다. 곧게 뻗어 올라간 팔의 라인이라던가, 그 때의 허리 라인, 다리의 움직임, 그리고 표정까지도. 하나하나 눈에 새기면서 설레는 것은 그녀만의 특권이었다. 이렇게 가장 좋은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것은 물론 릿카이 레귤러진의 배려도 한 몫 했지만.

 릿카이 외침을 북돋을 듯 귓가를 먹먹하게 만들던 심장박동이 차츰 잦아들었다. 주변의 커다란 울림도 이젠 점점 박수소리로 바뀌어갔다. 코트에서 빠져나오며 사나다가 여기저기 꾸벅꾸벅 인사를 해대었다. 그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유키무라가 웃는 것이 보였다. 사나다는 미소 한 번 짓지 않고 그저 고개를 한 번 더 끄덕일 뿐이었다. 이럴 때는 좀 웃어도 될 텐데. 그러다가 아야카는 문득, 그가 크게 ‘하하하’하고 박력 넘치게, 아니 좀 더 웅장함이 넘치게 웃었던 것을 떠올리고 혼자 키득거렸다.


 “왜 그렇게 웃고 있나.”

 “응? 아냐, 아냐. 고생했어, 사나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서 난감해 하는 게 눈에 보였다. 덩치는 산만해 가지고는 이런 건 왜 이렇게 어려워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아야카의 눈을 보니 사나다는 더 이상 시간을 늦출 수가 없었다.

 큼, 혼자 목을 다듬고 그는 심호흡을 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머리를 맑게 한 뒤에 말을 하면 되는 것이다. 이건 아주 간단한 일이지. 머리로는 그렇게 몇 번이나 시뮬레이션을 했지만 막상 실제로 다가오니 그게 영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분명히 간단한 일인데,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말하는 것뿐인데도 이렇게 긴장이 될 수가. 나쁜 짓이라도 한 것처럼 심장이 쿵쿵거렸다. 하지만 그에게는 절대로 이것이 나쁜 짓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다.


 “널 좋아한다, 아야카.”


 말했다. 말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가슴 어딘가를 꽉 막아두었던 바윗돌이 빠진대도 이보다 시원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사나다가 아주 살짝, 미소 짓는 것도 아야카는 볼 수 있었다. 간신히 잦아들었던 심장박동 소리가 다시 그녀의 귀를 가득 메웠다. 잠깐 어찔해서 눈앞이 까매질 정도로 심장이 너무 쿵쾅쿵쾅 뛰어대었다. 숨이 점점 빨라졌다. 주먹을 꼭 쥐고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애쓰며 아야카는 눈앞의 커다란 사람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아까 전의 고백이 사나다에게 여태까지 중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면, 아야카에게는 바로 이 집중하는 일이 그랬다. 도저히 눈을 맞출 수가 없어서 아야카는 모자 캡을 꼭 잡았다.


 “왠지, 지금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서 여태까지 참아왔다. 좋아한다, 아야카.”


 아까 전에는 그렇게 하기 어렵던 말이 어쩌면 이렇게 술술 나오는 걸까. 사나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보통 그녀가 자신을 쳐다보면 이런 기분일까. 사나다는 모자 캡이 그렇게 답답해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모자에 가려진 아야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녀는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었지만 꾹꾹 눌러 참았다. 그러면 당황하겠지, 그러면 미안하다고 하겠지. 이렇게 기쁜 말 듣고 미안하단 말 듣고 싶지 않아. 하게 만들기도 싫어! 뚝뚝 떨어질 것처럼 매달려 있는 눈물이 시야를 흐리게 했다.


 “저기.”


 생각보다 더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에 아야카는 다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사나다는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아무리 둔하다고 해도 그녀가 울먹이는 것 정도는 알아차렸을 것이었다. 아야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눈물을 다 삭일 때까지는 모자를 벗지 않기로 결심했다.


 “모자 안 벗을 거니까, 지금 안 벗을 거야.”

 “괜찮다.”

 “그, 그래서, 그게 끝이야?”


 울먹이더라도 할 말은 다 해야지, 아무렴. 무려 사나다 겐이치로가 고백하는 순간인데 기왕이면 들을 수 있는 말은 다 들어야하지 않겠는가. 이미 멋대로 이름까지 부르고 멋있게 코트로 들어간 사나다에게 해 줄 대답은 ‘예스’로 정해져있다고 해도.

 숨을 고르는 것일까, 타이밍을 재는 것일까. 어정쩡하게 차렷 자세로 서 있는 사나다가 입을 오물거렸다.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게 느껴졌다. 모자 위로 따뜻한 시선이 내려앉았다. 그녀의 심장도, 그의 심장도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뛰었다.


 “나, 나의 여자친구가 되어주겠는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몇 걸음 안 되는 거리를 달리듯 해서 아야카는 그대로 사나다의 품으로 들어갔다.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귀를 가져다대었다. 쿵쿵거리는 울림이 그대로 전달되어왔다. 나도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입을 떼기가 어려웠다. 그가 내 준 용기만큼 돌려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몇 번이고 혀끝에 매달렸던 말을 입 밖으로 내보내야만 했다.


 “나도 좋아해, 겐이치로.”


 멋대로 불러버린 이름에 대해서는 마찬가지로 멋대로 부르는 것으로 화답했다. 그의 손이 자신의 등 뒤에서 어디로 가야할지를 몰라 헤매는 것을 아야카는 알고 있었다. 보지 않아도 그건 뻔하디 뻔한 일이니까. 부드럽게 자신의 어깨를 끌어안는 사나다의 손이 좋았다. 아니, 겐이치로의 손이 좋았다.

몇 년을 기대하던 고백은, 이렇게 끝이 났다.




(2014. 12. 30.)






나팔 연습 중

     오시타리 켄야 드림


BGM. 와타나베 마유 - 나팔 연습 중




 딩동, 학교에서 일괄적으로 하는 모든 활동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담임선생님의 종례가 있기 전부터 학생들은 가방을 챙기기에 바빴다. 이미 가방을 등에 메고서 의자에서 달싹거리는 학생도 있었다. 그 달싹거리는 학생에 오시타리 켄야도 포함되어 있었다. 벌써부터 마음이 들떠 있었다. 빨리 담임선생님이 들어와서 종례를 해주었으면, 그리고 얼른 내가 이 교실에서 나갈 수 있게 해주었으면 하고 계속 바랐다. 켄야의 마음은 이미 저 멀리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 있었다.

 종이 친 지 벌써 삼 분이 지났다. 왜 선생님은 오시지 않는 걸까? 초조해진 켄야가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 쪽 창문을 기웃거렸다. 발소리도 들리지 않고, 누가 오는 기색도 안 보였다.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았다가 그는 참지 못하고 또 일어섰다. 아, 와 안 오시나. 창문을 뚫고 나갈 기세로 목을 쭉 빼고 있던 그는 드디어 기다리던 얼굴을 마주하고 재빨리 착석했다. 뚜벅뚜벅 발소리가 몇 번 울리고 난 뒤 교실 문이 열렸다.


 “조용, 조용!”


 선생님이 학생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때부터 켄야는 이미 엉덩이를 반 정도만 의자에 걸친 상태였다. 선생님의 입에서 ‘그럼 오늘은 이만’이라는 말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래서 켄야는 선생님의 입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런 켄야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선생님은 오늘도 전달사항을 잔뜩 읊었다. 다음 주에는 체력장이 있으니 그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 첫 번째, 내일은 비가 올 예정이라 아침 전체조회를 취소한다는 것이 두 번째, 오늘 주변 선생님들께 2반이 제일 시끄럽다고 주의를 받았다는 것이 네 번째. 또 있나? 켄야는 침을 꿀꺽 삼켰다. 다행히 전달사항은 거기서 끝이었다. 선생님이 들고 들어왔던 출석부를 한 쪽에 끼고 반장에게 인사를 시켰다. 모두 함께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선생님이 ‘내일 보자’고 말했다. 선생님이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가기 무섭게 켄야가 자리에서 튀어나갔다.

 잽싸게 계단을 뛰어 내려가 건물 현관을 지났고, 넓게 펼쳐진 운동장을 빠르게 지나가 교문에까지 다다랐다. 멈춰서 한 번쯤 쉴 법도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 직선거리를 지나, 커다란 사거리에 와서야 켄야의 다리가 멈췄다. 크고 넓은 횡단보도는 한참이 지나야 초록불이 들어올 모양이었다. 켄야는 마음이 급했다. 그가 지금 가고 싶은 곳은 사거리에서 조금 더 안쪽의 골목길에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이었다. 학생인 그의 신분으로 자주 가기에는 어려운 곳이었지만 거의 매일 들락날락하고 말았다. 덕분에 그의 한 달 용돈은 이미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켄야는 그 돈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그만큼 얻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횡단보도에 초록불이 들어오자마자 켄야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레스토랑이 보일 것이었다. 정말로 한 달음에 레스토랑이 있는 건물에 도착한 그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2층 창문 위로 커다랗게 붙은 패밀리 레스토랑의 간판. 숨이 거칠어지지도 않은 그가 간판에서 시선을 떼고 건물에 들어섰다.

 계단에는 단마다 패밀리 레스토랑의 이름이 예쁘게 적힌 홍보용 가로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켄야에게는 매우 친숙한 그 이름. 이곳은 아기자기한 소품이 많기로 소문이 나 있어서 켄야가 다니는 학교뿐 아니라 멀리 있는 학교의 여학생들까지도 자주 찾았다. 그런 곳에 남학생인 켄야가 매일 들락날락거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계단에 오르기 전, 켄야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벌써부터 심장이 빨리 뛰어서 어쩔 줄을 모르게 되었다. 급하게 온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애쓰면서 꾹꾹 계단을 밟았다. 꽃장식이 걸려 있는 유리문이 보였다. 천천히 그 문을 열었다. 딸랑, 문 위에 달린 작은 금종이 울렸다. 카운터 쪽을 향해 서 있던 웨이트리스가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어서 오세요.”


 켄야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소리가 너무 크게 울려서 스스로 깜짝 놀랐다. 작은 머리를 감싸는 단발머리가 매력적인 그녀를 앞에 두고, 켄야는 십 년과도 같은 십 초 동안 다양한 표정변화를 일으켰다. 백 년 같은 오 초가 더 지난 뒤에야 켄야는 간신히 진정했다. 그녀의  미소가 왠지 ‘또 오셨네요.’하고 말하는 것 같아서 어딘지 모르게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녀는 그 말 대신 “자리 안내해 드릴게요.”라는 말로 그를 이끌었다.

 그녀가 그에게 혼자 오셨냐는 질문을 하지 않게 된 건 지지난주부터였다. 켄야가 혼자 이 레스토랑을 온 지 여섯 번째만의 일이었다. 비어있는 구석 쪽의 자리로 그를 자연스럽게 안내하고는 그 날의 음료를 추천했다. 오늘은 맛있는 키위가 들어왔는데, 키위 생과일주스는 어떠세요? 오늘은 체리콕이 굉장히 맛있더라구요. 차는 어떠신가요? 켄야는 언제나 그녀가 추천하는 메뉴를 주문했고, 그녀는 언제나처럼 미소 지으며 메뉴판을 들고 사라졌다. 그리고 예쁜 글라스에 음료를 내오거나 따뜻한 차를 내왔다. 켄야는 그런 그녀를 보는 것이 기뻤다. 아직 음료를 주문하거나 계산을 요청하는 말 이외에 다른 어떤 한 마디도 건네 보지 못했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은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렇게 가다가는 다음 용돈을 받기 전까지 못해도 이 주는 그 레스토랑에 가지 못 할 것이라는 시라이시의 걱정 어린 충고에도 그는 이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그녀의 생각 밖에 없었다.


 “오늘은 어떤 걸로 하시겠어요?”

 “네! 네? 네!”


 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눈을 뗄 줄 모르던 켄야에게 그녀의 질문은 매우 갑작스럽게 느껴졌다. 덕분에 그는 황당하리만치 큰 소리로 놀란 대답을 뱉어내었고, 그녀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그가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가 아, 하는 탄식을 뱉어내면서 메뉴판을 손에 쥐었다. 나지막하니 그녀가 풋 웃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머리끝까지 새빨개졌을 거야. 그는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 메뉴판을 높이 들었다. 글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와 오늘은 추천 안 하나? 쫌 시간 끌까. 톡 쏘는 맛이 좋은 체리콕을 그냥 시키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그녀의 추천을 기다리는 것이 나을까. 두 가지 선택을 놓고 고민하는 동안 메뉴판 뒤에서 그녀가 헛기침을 했다.


 “손님, 체리콕은 어떠세요? 왠지 오늘은 더 맛있더라구요.”


 살짝 미소 짓는 얼굴이 참 빛났다.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리려던 것을 간신히 멈추고 그개 대답했다.


 “그, 그걸로 하겠심더.”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또 한 번, 그의 가슴에 사랑의 총알을 날리듯 미소를 한 번 지어주고 그녀가 뒤돌아섰다. 조금만, 조금만 더 나와 눈을 마주쳐주었으면 좋겠는데. 아쉬움이 테이블 위를 덮듯이 켄야가 철퍼덕 엎어졌다. 심장이 쿵쿵거렸다.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다. 이름도 모르는, 메이드복에 달린 명찰로 성이 ‘사토리’라는 것만 알 수 있는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얼마나 지나야 말할 수 있게 될까. 아니, 웨이트리스와 손님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화 말고 다른 말을 하고 싶었다. 아르바이트 끝나면 뭐하심꺼? 길지도 않지만 짧지도 않은 그 말을 만들지 못해서 언제나 켄야는 레스토랑을 나서기를 주저했다. 그러다 보면 시간은 훌쩍 한 시간, 두 시간이 되어가기 마련이었다. 오늘은 말할 수 있을 거래이. 카운터 앞에서 다른 웨이트리스와 무언가 대화를 나누는 듯한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켄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할 기래이.





 “주문하신 체리콕 나왔습니다.”

 “가, 감사함더.”


 켄야가 고개를 꾸벅 숙여가며 인사를 했다.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여 그녀가 인사를 해  주었다. 그것을 보자 켄야는 자기도 모르게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저기요!”

 “네?”

 “그, 그, 사, 사, 사, 사토리상은 예, 예, 예…….”

 “손님?”

 “예쁘심더.”


 주변에서 그릇이나 잔이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켄야와 그녀 사이에는 그 어떤 소리도 울리지 않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가 켄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고, 켄야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으로 그녀의 눈빛을 받아내었다. 몇 번이고 그 상태 그대로 그녀가 눈만 깜빡였다. 켄야는 정말 졸도할 것만 같았다. 이렇게 오랫동안 눈을 마주치고 있는 것만으로도 설레어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와 동시에 이런 말부터 내뱉어버린 자신이 부끄러워서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그녀는 왜 오늘따라 눈을 이렇게 오래 마주치는지, 왜 웃거나 정색하지도 않는지, 정말이지 켄야는 죽을 맛이었다. 십 년과 백 년을 넘어 천 년에 가까운 순간이 흘러갔다. 마침내 그녀가 움직였다.


 “감사합니다.”


 평상시보다 더 환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가 인사를 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얼떨결에 켄야도 같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허리를 곧게 펴고 그녀가 눈인사를 한 뒤 돌아섰다. 또각또각, 구두가 바닥에 부딪히면서 경쾌한 울림을 만들어냈다. 멍청한 표정으로 켄야는 그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지금 감사하다캤나?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한참이나 그 말을 곱씹어보던 켄야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황급하게 잔을 들어 한 모금을 삼키다가 켁켁거렸다. 톡톡 쏘는 탄산이 목을 괴롭혔다. 방금 이 체리콕이 자신의 생명을 위협할 뻔 했다는 사실에는 전혀 개의치 않고 행복에 잠겼다. 감사합니다. 말도 참 곱게 한데이. 지금 그의 눈에 그녀의 어느 부분이 안 예뻐 보이겠냐마는, 표정만을 보더라도 그는 정말 푹 빠져 있었다. 사토리. 이름은 무엇일까? 도도한 것이 왠지 매력인 그녀의 외모와 어울리는 세련된 이름일까 아니면 사랑스러운 이름일까. 생각이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그는 빨대로 천천히 음료를 빨아올리다가 말고 그녀를 쳐다보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얼음에 부딪혀 찰랑거리는 음료수의 표면은 줄어들지 않고 계속 그 위치였다.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기를 기다려서 다른 패밀리레스토랑에 들어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었다. 웨이트리스가 아닌 그냥 손님으로 그녀가 앉아있었으면 했다. 자신과 마주보고 앉아 조잘조잘 다른 이야기를 해주었으면 싶었다. 아직까지 한 번도 그녀가 무언가를 먹거나 마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켄야는 새삼스럽게 놀랐다. 웨이트리스인 그녀가 손님인 켄야 앞에서 먹거나 마시는 행동을 할 리는 당연히 없었다. 그녀는 어떤 모습으로 밥을 먹을까. 왼손잡이일까, 오른손잡이일까. 보통 왼손을 이용해서 잔을 내려주는 걸 보면 왼손잡이일지도 몰랐다. 왼손으로 숟가락을 쥐고 있을까. 차를 마실 때는 양손으로 잔을 붙잡고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멋대로 켄야는 머릿속에서 그녀의 모습을 그렸다. 밥을 먹는 모습, 물을 마시는 모습, 차를 마시는 모습, 그에게 다과를 건네는 모습, 조잘조잘 소소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모습, 그리고 언제나처럼 환한 미소를 짓는 모습까지.

 거기까지 생각하고 켄야는 현실로 돌아왔다. 상상만으로도 설레어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데이트. 그가 상상하는 데이트가 현실로 이루어지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괜스레 목이 탔다. 단숨에 삼분의 일 정도 되는 양을 꿀꺽꿀꺽 넘기고 목에서 느껴지는 탄산에 몸부림을 잠깐 쳤다. 얼음까지 하나 입에 물고 와드득와드득 깨물었다. 잔뜩 열이 오른 그 스스로를 식혀줄 필요가 있었다. 부서진 얼음조각들이 혀에 닿아 녹아내렸다. 목 뒤로 퍼지는 차가운 기운에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양 손으로 팔을 세게 문질렀다. 마찰열이 손을 따뜻하게 했다. 고개를 쭉 빼서 앞쪽을 쳐다보았다. 웨이트리스 사토리는 새로운 손님을 맞으러 문 앞에 나가 있었다.

 다행히도 새로 온 손님은 교복을 입은 여학생 둘이었다. 저들끼리 까르르 떠드느라 사토리의 말을 듣지 못해서 사토리가 세 번이나 같은 말을 다시 했다. 아, 쫌. 두 여학생의 웃는 소리는 패밀리레스토랑 전체를 울릴 정도였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각각의 손님들이 모두 한 번씩 고개를 돌렸다. 그 와중에 켄야의 눈이 가장 번뜩였는데, 사토리가 여전히 여학생들을 안내하느라 애먹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사토리가 말 대신 손짓으로 자리를 안내했다. 여학생들은 여전히 떠들면서 자리에 앉았다. 여학생 하나가 사토리가 내미는 메뉴판을 낚아챘다. 기분이 나쁠만한 상황이었다. 켄야는 조심스레 사토리의 표정을 살폈다. 놀랍게도 사토리는 여전히 생긋 웃고 있었다. 아, 이런 데서 일하믄 당연한긴가. 하지만 미묘하게 흔들리는 입 꼬리를 보니 기분이 나쁘긴 한 모양이었다. 괜히 저까지 기분이 다운되어 켄야는 다시 얼음을 입에 물었다. 와드득와드득. 노려봐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켄야는 여학생 두 명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한참만에야 두 여학생은 주문을 했고, 사토리는 방긋 웃으면서 그 주문을 받았다. 메뉴판을 받아들고 사토리가 돌아섰다. 카운터를 향해 가는 사토리의 어깨가 살짝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왔다.

 사토리가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게 되고 나서야 켄야도 다시 눈앞의 체리콕에 집중할 수 있었다. 얼음이 녹아서 그런지 아까처럼 맛있지 않았다. 얼음 때문이 아니라 기분이 다운된 탓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문제는 자신이 아니라 사토리였다. 아까 전의 여학생들 때문에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을까. 지금쯤 기운을 잃어서 축 쳐져있는 것은 아닐까. 속상해 하면 어떡하지. 마치 벌써부터 그의 남자친구가 된 듯 그녀가 걱정되었다. 아무리 이것이 아르바이트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이런 대우를 받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무언가 그녀의 기분을 좋게 해 줄 만한 것은 없을까. 그녀가 기운을 낼 수 있는 무언가를 해주고 싶었다.






 한참 골몰히 생각에 빠져있느라 체리콕 잔에 꽂힌 빨대만 휘휘 젓고 있던 켄야는 문득 정신이 들었다. 지금 몇 시지? 여섯시가 가까워져 가는 시간. 저녁을 먹으러 올 손님들이 많아질 시간이었다. 복잡해지기 전에는 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음료를 시킨 지 벌써 한 시간은 더 되었다. 이런 손님이 오래도록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가게 입장에선 곱게 보이지 않을 터였다. 주섬주섬 핸드폰과 가방을 챙겨서 자리에서 일어난 켄야는 슥 카운터를 돌아보았다. 사토리가 있을까. 운명처럼 사토리는 계산대 앞에 서 있었다. 그는 가방을 고쳐 메고 발을 떼었다. 나가기 전에 한 번 더 사토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계산해드릴까요?”

 “아, 예, 부탁드림더.”

 “거스름돈 드릴게요, 잠시만요.”

 “저, 사, 사토리상.”

 “네?”


 침을 꿀꺽 삼켰다. 목소리를 떨리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토리가 고개를 살짝 갸우뚱했다. 켄야는 심호흡을 했다. 좋아, 힘내는 기라, 오시타리 켄야.


 “아, 아르바이트 언제 끝나심꺼?”

 “저요?”

 “그, 저, 아르바이트 끝나믄 저, 저랑 데이트 안 하실래예?”


 깜짝 놀란 듯 사토리의 눈이 커졌다. 깜빡. 깜빡. 깜빡. 눈을 여러 번 깜빡이는 동안이 어쩌면 그렇게 긴 시간처럼 느껴지는지, 켄야는 오늘 하루만 해도 천 년을 지나 수만 년을 겪은 것처럼 느껴졌다. 계산대를 붙들고 있던 사토리의 손이 어중간하게 공중에 떴다. 허공을 조금 돌던 손이 그녀의 입가로 가까워져 갔다.


 “저한테 데이트 신청하신 거예요?”

 “그, 그, 그렇심더!”


 다시 또 눈만 깜박이는 시간이 흘렀다. 켄야는 어쩔 줄을 몰랐다. 거스름돈도 그냥 남겨두고 도망치고 싶었고, 그렇다고 해서 정말 도망칠 수도 없었다. 눈이 마주치고 있다. 숨을 제대로 쉴 수조차 없었다.


 “열 시에 끝나는데, 그래도 괜찮으세요?”

 “기다리겠심더!”


 과장된 행동임을 누구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켄야는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토리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항상 지어주던 그 미소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달랐다. 진심으로 우러나서 환하게 웃어주는 느낌이 들어 켄야는 기뻤다. 그녀를 웃게 했다. 방금 전까지 도망치고 싶던 기분은 전부 사라지고 날아갈 듯 가벼운 기분이 들었다.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후후 웃던 사토리가 다시 시선을 맞춰왔다.


 “그럼 끝나고 정리해서 내려갈게요. 데리러 오시는 거죠?”

 “그러겠심더! 감사합니데이!”


 사토리가 손을 내밀었다. 켄야는 자기도 모르게 두 손을 붙여 그릇 모양으로 만들었다. 사토리가 다시 웃었다. 그녀의 손에서 동전 몇 개가 떨어졌다. 켄야는 그대로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꾸벅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인사했다. 어딘가를 달려야 했다. 이 날아갈 듯한 기분을 마음껏 표현하고 싶었다. 그는 패밀리레스토랑의 문을 박차고 나왔다.





 다시 학교까지 돌아가서 빠른 속도로 운동장을 열세바퀴나 뛰고 나서야 켄야는 쓰러지듯 멈췄다. 그리고 흙투성이가 된 교복을 보고 화들짝 놀랐고, 급하게 또 달리기 시작해 집으로 향했다. 팽개치듯 교복을 벗어 던지고 최대한 깔끔하고 멋있어 보이는 옷을 고르기 위해 애썼다. 옆에서 동생 쇼타가 ‘너 지금 뭐하냐’ 하는 눈으로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입으로 밀어 넣었고 양치도 빠르게 했다. 몇 번이나 입 안에 손을 모아 ‘하~’하고 바람을 불어서 양치가 잘 되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최대한 달리지 않기 위해 꾹꾹 자신을 누르면서 발을 옮겼다. 혹여 급하게 달리다가 땀이라도 나서 첫 데이트에 땀 냄새를 풍기는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스피드스타’라는 별명은 어디 가지 않았다. 결국 켄야는 뛰는 것과 걷는 것의 애매한 경계에 걸친 속도로 움직였다. 시간은 아홉시 반. 사토리의 일이 끝나려면 삼십분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삼십분 동안은 뭘 하면 좋을까? 시간이 가지 않았다. 시계를 자꾸만 들여다보아도 시침은커녕 분침도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왠지 초침은 평소보다 수십 배는 더 느리게 움직여서 켄야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한여름의 더위가 공격하는 것도 아닌데 켄야는 숨이 턱턱 막혔다. 이제야 아홉시 사십분. 이십분이 더 남아 있었다. 이십분은 어떻게 또 지나가는 걸까. 그동안은 뭘 해야 할까.

 초조하게 건물 앞을 수십 번 왔다갔다하고 난 뒤,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서 블록을 한 바퀴 돌았다. 블록을 다섯 번째쯤 돌았을 때 시침이 드디어 열 시를 가리켰다. 사토리는 과연 바로 일을 마치고 나올까? 열시에 일이 끝난다고 했으니 정리를 해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려면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그럼 몇 분이나 걸릴까? 삼 분? 아니 길게 잡아 오 분?

 켄야는 열시 십 분이 되어서야 자신이 무엇을 잘못 생각했는지 깨달았다. 남자인, 그리고 성격이 급한 그에게 뒷정리라던가 옷 갈아입는 등의 행동은 삼 분이면 충분했다. 하지만  여자이고 차분한―그렇게 보이는― 사토리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이었다. 여자들은 화장을 하는 데에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했던가. 그렇게 예쁜 옷을 입고 있다가 다른 옷으로 또 갈아입으려면 분명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 켄야는 점점 초조해졌다. 그녀를 만날 시간이 가까워지자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이 점점 심해져서 머릿속이 울렸다.

 또각.

 계단에서 소리가 났다. 또각또각. 구두를 신은 누군가가 내려오는 모양이었다. 켄야의 시선이 계단을 향해 고정되었다. 검은색 구두 위로 매끈하게 뻗은 다리가 먼저 나타났다. 그리고 무릎 위부터는 연두색 치마가 시작되었고, 그 위로 하얀 블라우스가 나타났다. 어깨 위로 그녀의 단발머리가 보였다. 사토리였다.


 “많이 기다리셨나요?”

 “아, 아님더! 방금 왔심더!”

 “거짓말. 위에서 계속 봤어요.”


 그녀가 기다란 손가락을 뻗어서 위를 가리켰다. 켄야의 시선이 절로 그녀의 손가락을 가리켰다. 아차. 2층의 패밀리 레스토랑은 아직도 불이 켜진 상태였고 커다란 창문으로는 당연하게도 그를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켄야의 얼굴이 붉어졌다.


 “저, 그, 잘 부탁드립니데이! 오시타리 켄야라 캅니더.”

 “사토리 치에예요. 잘 부탁드려요.”


 꾸벅 인사를 하는 그에 맞추어 사토리도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켄야는 지금 이 순간 가장 행복한 것은 자신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어딘가에서 나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두 사람의 첫 데이트를 축복하는 것처럼.





(2013. 07. 24.)







Wedding March

     사나다 겐이치로 드림 (For. 스키아님)




 잔뜩 긴장한 그녀가 숨을 들이마셨다. 이런 날 긴장을 안 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만 그녀는 긴장하고 싶지 않았다. 새삼스럽게 그의 옆에 서는 데에서 긴장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우스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심장 뛰는 소리는 귓가를 멍멍하게 했고 입 안은 바싹바싹 말라왔다. 립스틱이 지워질까봐 물 한 컵조차 제대로 못 마신 탓도 있었다.


 “나쁜 놈. 이건 다 사나다 때문이야.”


 말로 뱉어놓고 나서 그녀는 당황했다. 사나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자신도 사나다가 될 터였다.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에 맞춰서 입장을 한다. 잠시 그의 손을 잡고 정신을 놓고 있다 보면 그들의 앞날을 밝혀주는 고귀하면서도 지루한 말들이 끝난다. 그리고 다시 그의 손을 잡고 퇴장한다. 그러고 나면 자신은 더 이상 소라가와 유리에가 아닌 사나다 유리에가 된다. 물론 실질적으로 사나다 유리에가 되는 것은 혼인 신고서를 제출한 뒤겠지만, 어찌됐든 모두의 눈에 자신은 그 순간부터 사나다 유리에가 되는 것이었다.

 부모님들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호칭을 좀 바꿔야겠다고 그녀 스스로도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물론 초등학생 때야 겐이치로―그녀는 그 때의 자신이  아무렇지 않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이 놀라웠다―라고 불렀었다. 조금 더 크고 나서는 다시 사나다로 돌아갔지만. 하지만 그래도 그는 꾸준히 유리에라고 불러주었다. 그게 익숙해져서 뭐라고 하지 않은 것뿐이었다.


 “신부 대기하시죠.”

 “아, 네.”


 신부라는 단어에 무언가 마력이 있는 게 분명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으려는 기분을 느끼면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란 치맛자락 사이에서 다리를 사뿐사뿐 옮기면서 숨을 골랐다. 예쁘게 보여야 할 텐데. 아니, 딱히 사나다, 아니 겐이치로한테 예뻐 보이고 싶은 게 아니라 여자에게 있어선 평생 한 번 있을 중요한 날이니까 최고로 예뻐야 한다고!




 지금 돌아보면 어이가 없는 시작이었다. 내가 널 책임지겠다, 라니. 그런 말을 함부로 뱉은 사나다가 잘못이었다. 사과를 하는 정도만 됐어도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는데 매사에 진지하다 못해 심각한 그가 그런 말을 내뱉어 버린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정말로 그 뒤로 책임을 지겠다는 듯이 행동을 했다. 그 첫 번째가 그녀의 부모님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올린 일이었다.


 「제가 유리에를 책임지겠습니다.」


 당황한 부모님은 그녀에게 무슨 일인지를 물었고, 그 앞에서 다시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던 그는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가며 그를 방에서 내쫓았다. 자초지종이랄 것도 없이 사건은 매우 단순했다. 





 소꿉친구인 두 사람은 하교하다가 보면 마주치는 일이 잦았다. 집이 같은 방향에 있기 때문이었다. 사나다네 집을 두 블록쯤 더 지나쳐 가면 그녀의 집이 있었다. 그 날도 평범하게 하교를 하다 우연히 사나다를 만났다. 두 사람은 늘 하던 시답잖은 대화를 하면서 길을 걸었다. 검은 구름을 눈치 채고 발걸음을 빨리 했을 때는 이미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 뒤였다. 소나기일 게 뻔했지만 꽤 굵은 빗방울이었다. 비를 피해서 달린 두 사람은 사나다네 집 현관에 물을 뚝뚝 흘리며 들어섰다.

 사나다네 어머니가 먼저 나와 그들을 반겼다. 커다란 수건을 유리에에게 덮어주며 그녀는 유리에를 화장실로 떠밀었다. 그대로 가면 감기 걸리니까 씻고 옷 갈아입고 가라면서 친절하게도 사나다의 옷 중 가장 무난하고 작은 옷을 꺼내주었던 것이다.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화장실로 들어간 유리에는 축축하게 몸을 감아오는 교복을 벗기 위해 애쓰기 시작했다. 물을 먹은 교복은 쉽사리 떼어지지 않았다. 간신히 조끼를 벗는데 성공한 그녀는 서둘러 셔츠의 단추도 풀어내었다. 그리고 거의 껍질을 뜯어내듯이 팔에서 셔츠를 막 벗겨낸 순간 벌컥 문이 열렸다.


 「꺄악!」

 「미, 미안하다, 유리에!」

 「이 바보야, 이쪽으로 들어올 게 아니라 나가야지!」

 「아, 그, 그렇지.」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 유리에가 옷을 갈아입고 나간 거실에는 사나다가 무릎을 꿇은 자세로 가만히 앉아있었다. 심지어 그는 아직 젖은 옷을 입은 그 상태 그대로였다. 그는 유리에에게 재차 사과했다. 어머니가 그녀에게 수건을 둘러주고 안쪽으로 데려가는 모습만 본 사나다는 그녀가 화장실에 있을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채 자연스럽게 문을 열었고, 반쯤 벗은 상태의 유리에를 보고 너무 놀란 나머지 나가면서 문을 닫는다는 것이 그냥 문을 닫아버린 것이었다. 여전히 머리카락과 옷소매에서 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그를 향해 그녀는 괜찮다고 웃어주었다. 그리고 그가 이어서 한 말에 받은 충격으로 손에 들고 있던 무거운 교복을 철퍽 소리가 나게 떨어뜨렸다.


 「내가 너를 책임지겠다.」


 그녀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손사래를 쳤지만 천하의 사나다 겐이치로에게는 장난이란 없었다. 그는 매우 진지했고, 그것은 사나다 본인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소꿉친구인 유리에는 잘 알고 있었다. 여자 벗은 거 한 번 봤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뭐! 라고 소리쳤다가 그녀는 되레 사나다에게 한 소리를 들었다. 본인의 신체를 소중히 여겨야 하며 여자는 여성으로서의 어쩌고저쩌고…….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가 화를 내고 있었으므로 유리에는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하지만 또 슬그머니 화가 치밀었던 것도 같다. 아니, 잘못한 건 자기면서 왜 나한테 화를 내? 그래도 그녀는 화를 낼 수 없었다. 사나다는 이미 너무 확실하게 그녀에게 사과했고 그녀는 그걸 받아주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사실이 될 거라고 그 누가 생각했을까.

 그녀의 부모님도, 사나다의 부모님도 그가 그러다가 제 풀에 지치면 안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유리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그가 책임을 지겠다고 말한다 한들 그녀가 오케이 하지 않으면 그만이지 않은가? 그녀는 결국 자신이 이렇게 식장에 들어서고 있는 것도 사나다 탓이라고 생각했다. 이게 다 사나다가, 아니 겐이치로가 너무 잘나서 그런 거야. 난 분명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사나다, 아니, 아, 짜증나, 겐이치로 주제에 그런 말을 하니까……!

 식장의 커다랗고 하얀 문이 양쪽으로 젖혀졌다. 가운데로 놓인 빨간 카펫과 양쪽으로 파도를 치고 있는 수많은 머리가 보였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 카펫의 끝에 그가 서 있었다. 사나다 겐이치로. 오늘 부로 자신의 남편이 될 사람. 갑자기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끼면서 그녀는 이런 상태로 똑바로 걸을 수 있을까하는 걱정을 했다. 이대로라면 걸어가다가 휙 넘어질 것 같아. 두근두근 떨리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보이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이렇게까지 긴장해 본 경험이 있던가. 피아노 선율로 만들어진 결혼 행진곡도, 사람들의 카메라가 터뜨리는 플래시 소리도, 사회자의 말도 그녀에겐 들리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 아버지가 옆에 있다는 것이 그렇게 안심될 수가 없었다.

 긴장 해소를 위해 살짝 숨을 뱉은 그녀는 아버지와 보폭을 맞추어 행진을 시작했다. 딴, 딴따단. 딴, 딴따단. 친구들의 결혼식에서 듣던 이 음악이 자신을 위해 연주되는 거라는 사실 자체도 굉장히 낯설었고, 눈앞에 서 있는 정장 차림의 그 자체도 어색했다. 그 역시도 긴장했는지 표정이 굳어 있었다. 짧은 행진이 끝나고, 아버지가 사나다를 끌어안았다. 사나다의 어깨를 두드리는 아버지의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이 보여 그녀는 웃음이 날 것 같으면서도 울음이 날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손과 그녀의 손이 만났다. 그가 부드럽고도 세게 그녀의 손을 붙잡고 그녀를 인도했다. 두 사람이 똑바로 서자 정식으로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사실 결혼식이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엄청나게 정신이 없었던 것만은 확실했다. 선서를 할 때에 사나다가 회장이 울리도록 큰 소리로 “네!”라고 대답한 것에 감동을 받았던 건지 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그 때부터 이미 눈물이 터진 상태였다. 그래서 그녀가 선서를 할 때에는 예쁜 목소리가 아닌 울먹거리는 떨리는 소리로 “네.”라고 대답해야만 했다. 벌써부터 우냐고 놀려대는 친구들 목소리가 벌써 귀에 선했다.

 야규의 사회는 매우 깔끔하고 진정되어 있었다. 굳이 새신랑에게 과도한 체력점검을 요구했을 때가 되어서야 사나다와 유리에, 그리고 그의 동창들은 사회자가 어느새 니오로 바뀌어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기회다 싶었는지 동창들은 그를 더 부추겼고, 덕분에 결혼식장은 한동안 사나다 겐이치로의 넘치는 체력을 자랑하는 장으로 바뀌었다. 바보처럼 묵묵히 시키는 대로 다 하고 있는 그에게 한 소리 하고 싶은 마음과 함께 든든한 마음이 같이 든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 사나다, 아니, 아, 진짜, 겐이치로가 체력은 끝내주지. 이렇게나 바보처럼 굳건하고 외곬인 사람은 더 찾을래야 찾을 수도 없을 게 뻔했다. 하지만 그런 점이 그의 매력이었다. 모르는 사이에 그녀는 그런 점 때문에 그에게 조금씩 의지하고 있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주변의 모두에게 손을 흔들어주거나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등의 다양한 제스쳐로 인사를 하면서 식장을 빠져나갔다. 그것만으로 인생의 가장 커다랗고 중요한 행사 중의 하나가 다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두 사람에게는 잠깐의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대기실로 돌아가자마자 의자를 향해 내닫는 유리에를 사나다가 제지했다. 그는 조심조심 그녀를 안아 올렸고 다시 조심스럽게 의자 위에 앉혀 주었다. 뭐하는 짓이냐고 발버둥 칠 뻔 했지만 그렇게 행동하기 직전에 가까스로 유리에는 그가 거추장스러운 웨딩드레스를 입고 급하게 걸어가려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랬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나……, 아니, 겐…… 이치로.”

 “음?”

 “우리 결혼 한 건가?”

 “……그럼 여태 뭘 한 거라 생각하는 건가.”

 “아, 아니. 실감이 안 나서…….”

 “그런 기분이라면야 나도 느끼고 있긴 하다. 조금 꿈같다고 해야 할 지도 모르겠군.”


 유리에는 입을 딱 벌리고 그를 쳐다보았다. 지금 사나다 겐이치로가 꿈같다고 말한 거야? 정말로? 남들이 꿈같다고 하는 테니스 대회 전국우승을 했을 때조차도 정진한 결과일 뿐이다 라면서 아주 살짝 미소를 지었을 뿐이었던 그를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과의 결혼식을 꿈같다고 표현하다니. 유리에의 표정을 보고 그는 자신이 무슨 황당한 짓을 했는지 알지 못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런가.”

 “아, 아니. 겐……이치로가 그렇게 말한 거 처음 들은 것 같아서.”

 “음?”


 사나다는 여전히 자신이 무엇을 처음 말했는지 알지 못 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람보다는 듣는 사람이 말하는 쪽의 버릇을 먼저 눈치 채기 마련이었다.


 “꿈같다고 하는 거.”

 “사실대로 말한 것뿐이다. 유리에, 네가 눈앞에 있는데도 방금 일이 잘 믿기지 않는군.”


 유리에는 한동안 더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어야 했는데 사나다가 수줍다는 듯 살짝 미소 지었기 때문이었다. 이 남자, 내가 20년 넘게 알고 지낸 그 사나다 겐이치로 맞나? 자기와의 결혼식 때문에 그가 살짝 미친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가 유리에는 “사랑을 하는 사람은 모두 바보고, 모두 미쳐있다.”는 마치 수학공식과도 같은 말을 떠올리고는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런데 내가 사, 겐이치로한테 사랑한다고 말했던가?

 겐이치로는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했던가?

 왜 그런 생각이 갑자기 들었는지는 그녀도 명확하게 알 수 없었다. 수면 아래에서 물고기가 튀어 오르듯 떠오른 생각은 그 물고기처럼 수면 밑으로 도로 들어가지 않고 그녀의 머릿속에 박혔다. 잔상이 남는 정도가 아니라 새하얗게 글자들이 눈앞에 떠올랐을 정도였다. 자신이 제대로 말한 적도 없는 것 같았다. 사랑한다고 언제 한 번 진지하게 말한 적이 있었나? 부끄럽단 생각에 괜한 소름이 돋아나는 것을 느끼며 유리에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간혹 몇 번은 말했던 것을 간신히 떠올렸고 그녀는 안심했다. 그러면 그한테서 들은 적은? 그녀는 그 비가 쏟아지던 여름날부터 훗날의 데이트까지를 초단편영화를 보듯 머릿속에서 재생시켜 보았다. 분명히 들었던 걸로 기억하지만 한 번 불안해진 마음은 불길처럼 뻗어나갔다. 이 바보, 아직도 그 때의 약속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거면 어떡해? 사나다 겐이치로라면 그런 일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더더욱 기분이 우울해졌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불안감을 끌어안고 있고 싶지 않았다.


 “저기, 있잖아.”

 “음?”

 “너. 나 사랑해?”


 너무 갑작스럽고도 직설적인 질문에 당황했는지 사나다가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에 비해 그녀는 “밥 먹었어?”라고 물은 것처럼 평소와 같은 표정이었고 그 때문에 사나다는 더 이상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기가 어려웠다. 그는 괜히 목청도 한 번 가다듬고 볼 것도 없는 대기실을 한 바퀴 휭 둘러본 뒤에 다시 유리에의 눈을 마주했다.


 “물론이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결혼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너 그 때 내 몸 봤다고 책임진다고 그랬던 거잖아.”

 “그건 과거의 일이지 않은가.”

 “어쨌든 그걸로 시작한 거잖아.”

 “너는 내가 그 때의 말 때문에 지금까지 온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유리에는 눈만 깜빡였다. 사나다라면 그럴 수 있다. 자신이 아는 사나다 겐이치로는 그런 사람이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는 침묵 속에서 유리에의 대답을 들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인생에서 최고로 행복해야 될 날이라고 말할 이 날에 사나다 겐이치로와 소라가와 유리에는 이런 말도 안 되는 대화를 하고 있었다. 사랑을 전제로 정했을 날임이 분명한 날에 와서야 그녀는 그 사랑을 확인했어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늦었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사나다에게 반한 것이 맞았다. 그럼 사나다는? 겨우 그 때, 고등학교 2학년의 그들은 그런 약속을 하기엔 어린 나이였다. 물론 조상님들을 생각하면 그것이 절대 어린 나이는 아니었겠지만 그 때의 유리에와 사나다는 모두 어렸다. 생각도 어렸고, 그만큼 자기 멋대로 곧은 사람들이었다.


 “큼. 그 때의 마음은 거짓이 아니었다.”

 “응?”


 사나다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몰라서 난감해 하는 것처럼 보였다. 가뜩이나 무서운 인상을 더 찡그리며 그는 잠시 침묵했다. 저 얼굴의 어디에 반해서 나는 멋있다고 난리를 치는 걸까. 스스로도 어이없게 느껴지는 생각이 스르르 가라앉고 나자 사나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


 “그 때의 내가 책임지겠다고 한 소리는 진심이었다. 그 때의 나는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조금 다르다.”


 유리에는 사나다의 눈을 피하지도 않고 똑바로 쳐다보았다. 사나다도 그녀의 눈을 마주보았다. 새삼스러웠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서로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은 근 20년을 아는 사이인 그들에게는 정말 새삼스럽고도 이상하면서, 야릇한 일이었다. 유리에는 눈짓으로 사나다에게 가까이 오라고 신호했다. 그가 그 눈짓을 알아들은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그는 그녀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손을 뻗은 유리에는 그의 목을 천천히 잡아당겼다.


 “유리에, 화장이…….”

 “다시 하면 돼.”


 그녀는 부드럽고 조금 진하게 키스했다. 비싼 돈 잔뜩 들여가면서 한 신부화장에 무슨 짓인가 싶기도 했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화장 정도는 다시 해도 그만이었다. 너무 늦게야 그의 마음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고, 불안감이 그녀를 엄습했다. 그리고 그것은 결혼식을 막 마친 여자가 감당하기에는 결코 좋은 감정은 아니었다. 키스로 모든 것을 무마해보고 싶었다. 그래도 사랑한다고 말해줬으면 해. 잠시 후 떨어지고 나서 유리에의 표정을 본 사나다의 얼굴이 굳어졌다. 유리에의 얼굴에는 온갖 복잡한 감정들이 뒤엉켜 떠올라 있었다.


 “유리에.”

 “응?”

 “나는 그 일 때문에 너에게 청혼을 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가 한 쪽 무릎을 꿇었다. 그녀가 앉은 의자 앞에 자세를 잡은 그는 그녀의 손을 꼭 붙들었다. 비싼 양복인데. 이런 진지한 상황에서조차 머리는 참 이상하고 황당한 생각을 너무 쉽게 떠올렸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유리에.”

 “진짜?”

 “처음에 너를 책임지겠다고 한 것은 의무에서 나온 말이 맞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너를 책임지겠다고 하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내 

희망에서 나온 말이다. 그것은 네 옆에서 너의 인생을 함께 하고 싶다는 뜻이다, 유리에.”


 왠지 눈물이 솟았다. 립스틱이야 다시 바르면 그만이지만 울면 큰일이다. 이미 결혼식장에서도 울어서 망가진 화장을 더 망가뜨리는 것은 그녀가 용납할 수 없었다. 게다가 세상 최고로 예뻐 보여야 하는 날에, 가장 예뻐 보이고 싶은 사람에게 이런 모습이라니. 그녀는 슬쩍 사나다에게서 시선을 돌려 눈물을 삭였다. 쓸데없는 불안감이었다. 결혼식 때문에 너무 감정적으로 고조되어 있던 탓인 게 분명했다. 정말 사람이란 건 불편하다니까.


 “헤헤, 들으니까 좋다.”


 유리에가 환하게 미소 짓자 그제야 사나다의 얼굴에도 미소가 돌았다. 그가 참 대책 없이 잘생겨 보이고 멋있어 보이는 것에 스스로를 중증 콩깍지라고 명명하면서 그녀는 사나다의 손을 꼭 잡았다. 이 남자. 이제 평생 내 남편이 될 이 남자.


 “고마워, 겐이치로.”

 “나야말로 함께해줘서 고맙다, 유리에.”


 이렇게 부끄러운 말을 왜 이제 와서야 다시 하고 있는 것일까. 유리에는 이 말을 얼마 전에도 들었던 것 같다고 생각하다가 깨달았다. 그가 청혼을 했을 때에도 그녀는 “네 옆에서 너의 인생을 함께 하고 싶다.”는 사나다의 진지함 가득 배어난 말에 눈물을 뚝뚝 흘렸던 것이다.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게 열로 느껴질 정도로 유리에는 당황했다. 뭐야, 나 무슨 바보 짓 한 거야? 그렇게 신나게 다 확인해놓고, 펑펑 울어놓고 이제 와서, 그것도 결혼식 날에 남편 될 사람에게 나 사랑하냐고 엄청 심각한 표정으로 물어본 거야? 그녀는 목에서 끼기긱 소리를 내는 녹슨 로봇처럼 굉장히 뻣뻣하고 불편한 각도로 목을 틀어 사나다의 시선을 피했다.


 “왜 그러나, 유리에.”

 “아, 아니. 아, 아무 것도.”

 “음?”

 “아니야. 아니라구! 아니란 말이야!”


 평소의 높은 목소리로 연신 부정을 해대는 유리에를 보고 안심했는지 사나다는 음, 하는 소리만 한 번 내뱉었다. 한 손으로는 여전히 유리에의 손을 쥔 채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난 그는 유리에를 쳐다보았다.


 “유리에.”

 “왜! 뭐! 아니라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어?”

 “슬슬 다시 나갈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예식이 끝났다고 다 끝난 것은 아니다.”

 “아. 그, 그렇지. 나 너랑 결혼식 하는 중이지.”


 아까 전과는 비교될 정도로 부드럽게 고개를 돌린 유리에는 사나다를 올려다보았다. 새삼스럽게 그가 매우 커 보였다. 그의 손을 붙잡고 일어선 후, 그녀가 고개를 홱 돌려 다시 한 번 그에게 키스했다. 가볍고도 짧은, 하지만 깊은 뜻을 담은 키스.


 “나 오늘부터 사나다 유리에니까 책임져!”

 “물론이다.”





(2012. 0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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