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터 콤플렉스
- 후지 남매와 미즈키 이야기
- 캐붕일지도
- 미즈키가 유미코를 좋아하고 슈스케는 그걸 싫어합니다
「그놈의 잔소리 좀 그만해.」
전화 너머로 투덜대는 목소리가 귀여워서 후지 슈스케는 미소를 지었다. 겨우 한 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 이 남동생은 늘 제게 투덜거렸다. 사춘기 중학생에겐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는지라 슈스케는 마음을 넓게 가졌다. 볼멘소리하긴 해도 꼬박꼬박 전화는 받아주고, 막상 얼굴을 맞대면 또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고, 가끔 귀여운 소리도 하는 게 제 동생, 후지 유타였다.
“하지만 걱정되는걸. 요즘은 괜찮지?”
「그래, 괜찮다고. 누나는? 뭐 해?」
“뭐 하긴, 데이트 있다고 나갔지.”
「전에 말한 그 사람이야?」
대답하는 목소리가 어쩐지 떨떠름했다. 이 귀여운 동생은 저뿐만 아니라 누나도 참 좋아했다. 막냇동생이 누나의 남자친구에게 드러내는 불편한 감정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새어 나왔다.
“응. 이번엔 누나도 엄청나게 좋아하는 것 같더라.”
「누나가 아까운데…」
유타에게 백 퍼센트 공감하는 바였지만 그걸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슈스케와 유타는 누나인 후지 유미코가 세상 누구나 인정하는 멋진 남자를 데려와도 누나가 아깝다고 할 사람들이었다.
“그래도 뭐, 좋은 사람이잖아. 누나한테도 잘해주고 착하고.”
「형은 너무 착한 사람 싫다며?」
“너무 남들한테 무른 사람이 싫다는 거지. 성품이 착한 게 싫다는 건 아니야.”
「하긴, 형이 진짜 싫어하는 건 미즈키 상 정도니까.」
“응? 안 그런데?”
「거짓말 마. 그걸 어떻게 모르냐? 그래도 적당히 해. 어쨌든 미즈키 상도 내 생각해서 그런 거라고. 내가 진짜로 다친 것도 아니고 사과도 받았잖아.」
유타는 아무튼 너무 착해서 탈이었다. 화를 낼 법도 했는데 유타는 통 크게 미즈키를 용서했다. 아니, 애초에 큰 문제로 여기지 않는 것 같아 걱정이었다. 그래서 슈스케는 통화할 때마다 유타에게 몸은 괜찮냐고 물었다. 유타가 스스로 신경을 안 쓰는 것 같으니 이렇게라도 꾸준히 상기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유타의 선배인 미즈키 하지메가 유타에게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는 사실은 슈스케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게 미즈키를 쉽사리 용서할 수 있는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소중한 동생이 스스로 선택해서 간 학교에서 친해진 선배였고, 믿고 따랐다. 그런데 그렇게 몸에 부담이 가는 기술을 가르쳐놓고 위험하단 사실조차 가르쳐 주지 않다니, 이건 용납하려야 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유타가 미즈키를 유독 더 잘 따르기에 발생한 질투도 한몫했다는 사실은 슈스케 본인만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내 동생을 힘들게 한 것에 대한 원한은 좀 깊거든.”
「나 참. 됐고, 나 이제 가봐야 해. 누나한테 안부 전해줘.」
“응, 또 전화할게.”
「적당히 해. 아, 미즈키 상도 누나한테 안부 전해달래. 진짜 끊는다.」
뭐라고 대답도 하기 전에 전화가 뚝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슈스케는 통화 종료 화면이 대기 화면으로 돌아올 때까지 멍하니 핸드폰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지막에 유타가 뭐랬지? 미즈키 상도 누나한테 안부를 전해달랬다고?
슈스케의 미간에 작은 주름이 생겼다. 즐겁게 시작했던 통화가 이런 말로 끝날 줄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도대체 미즈키의 입에서 자기 누나의 이름이 나올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슈스케는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확실히 유미코도 성루돌프에 간 적이 있을 것이다. 가끔 저를 학교까지 태워다 주곤 했으니, 아마 유타가 주말에 집에 왔다가 학교로 돌아갈 적에 태우고 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 미즈키가 누나를 만났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부를 전할 만큼의 사이냐고 물어보면…
“성루돌프에 한번 갔다 와야겠는걸.”
가끔 눈치가 빠른 게 싫어질 때가 있는데, 바로 지금이 그랬다. 이런 건 굳이 깨닫지 않아도 됐을 텐데, 혼자 중얼거리며 슈스케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
“웬일로 같이 가재?”
“응, 그냥. 같이 가면 유타가 더 좋아할 거 아냐?”
“정말 그 이유야? 네가 그렇게 웃으면 뭔가 다른 속셈이 있을 때가 많은데.”
누가 후지 가의 장녀가 아니랄까 봐, 유미코도 눈치가 참 빨랐다. 굳이 숨길 것도 없었지만, 슈스케는 웃으며 대답을 넘겼다. 확정되지 않은 사실을(물론 본인은 90%쯤 확신했지만) 입에 담기는 어쩐지 꺼려졌다. 슈스케의 예상대로, 유미코는 그저 쿡 웃고는 차 키를 들었다. 한 달 만에 유타가 집에 오는 토요일, 두 사람은 성루돌프에 유타를 데리러 나서는 참이었다.
“누나, 저번에도 누나가 유타 데리러 갔었어?”
“그랬지. 그때도 거의 두 달 만이었잖아. 조금이라도 일찍 보고 싶어서 갔지.”
“가끔 보면 누나는 남친보다 유타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
“이 누나는 유타만큼 슈스케 너도 좋아하니까 서운해하지 마.”
“음, 나야 서운할 일이 없지만 남친은 서운하지 않을까?”
“얘도 참~ 별걸 다 걱정해.”
유미코의 사랑 전선에 이상은 없어 보였다. 자주 못 보는 막냇동생에 대한 과한 애정이 오히려 이상이라면 이상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 애정이 자신에게도 못지않게 쏟아진다는 사실을 알기에, 슈스케는 유미코의 남자친구에게 잠깐(이누이의 워터폴보다 더 짧은 시간 동안) 미안함을 느꼈다.
“근데 얘, 요즘 애들은 성장 속도가 우리 때랑 다른가 봐. 너희 학교 애들도 그러더니 유타네 애들도 보기보다 키가 크더라?”
“그런가? 잘 모르겠는데.”
“내가 중학생 땐 남자애들도 다 나랑 키가 비슷했단 말이야.”
“음, 그건 누나가 그때부터 키가 컸으니까 그런 거 아닐까?”
슈스케는 이누이와 카와무라를 떠올렸다. 두 사람은 사실 처음 테니스부에서 만났을 때부터 키가 컸다. 테즈카는 2학년이 되면서 키가 갑자기 훅 컸다. 1학년 때는 키가 비슷했던 키쿠마루는 2학년 겨울 방학 때 갑자기 몇 센티미터가 자라면서 저를 앞질렀다. 그러고 보니 유타가 자기보다 키가 커진 것도 그때였다. 오랜만에 본 동생이 약간이지만 자기보다 키가 커진 걸 알게 된 순간, 참으로 복잡한 기분이었다.
누나도 그런 생각을 하는 걸까?
유미코는 유미코 또래의 여자 친구들보단 키가 큰 편이었고, 지금 슈스케보다 조금 작은 정도였다. 중학생이 된 뒤로 키가 비슷해진 자신을 보며 유미코가 눈물을 글썽였던 것이 문득 떠올랐다. ‘언제 이렇게 컸어’하는 소리가 엄마의 말이었는지, 유미코의 말이었는지 좀 헷갈리기도 했다.
“너랑 유타도 고등학생 되면 더 크겠지? 난 키 큰 사람이 좋더라.”
“어쩐지 압박처럼 들리는걸.”
“후후, 그러니까 밥 잘 먹고 다녀.”
“난 잘 먹고 있는걸. 기숙사에 있는 유타가 걱정이지.”
“그 유타가 너보다 크거든?”
“앗, 아픈 데를 찌르네.”
성루돌프까지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낯설면서도 한편으로는 익숙한 교문이 보였다. 차는 교문을 지나는 대신 그대로 학교 담장을 따라 돌았다. 성루돌프의 기숙사는 학교 후문과 더 가까운 곳에 있었다. 부드럽게 후문을 미끄러져 통과한 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기숙사 건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유타가 서 있었다.
“유타! 잘 지냈어?”
유미코가 창문을 열고 소리쳤다. 주차도 제대로 하기 전이라 슈스케는 얌전히 앞좌석에 앉아 있었다. 유타가 잽싸게 달려오는 게 보였다.
“누나, 목소리 좀 낮춰.”
“나도 왔어.”
“형은 또 왜 왔어?”
퉁명스러운 대답이 나왔지만, 피식 배어 나오는 미소는 지울 수 없는 모양이었다. 차를 제대로 주차하자마자 번개처럼 튀어 나간 유미코가 유타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복에 겨운 신음을 들으며 슈스케도 차에서 내렸다. 언제 봐도 누나의 인사는 격렬했다.
“보고 싶었어~ 집에 좀 자주 오면 안 되는 거야?”
“나도 연습이 있단 말이야.”
“어휴, 어쩌다 동생을 둘 다 테니스에 뺏겨 버려서는.”
볼멘소리로 투정을 부리지만, 유미코가 진심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았다. 시합 때마다 부모님보다 더 열성으로 응원하고, 몰래 결과도 점쳐 보는 사람이 바로 유미코였다.
소란스러운 인사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이거 반갑습니다.”
슈스케의 예상대로, 마치 짜인 각본처럼 미즈키가 나타났다. 타이밍을 정확히 재서 등장한 것 같았다. 다만, 그 복장은 슈스케도 예상 밖이었다. 주말이라 유타가 사복을 입고 있는 것처럼, 미즈키도 사복을 입고 있었다. 운동복 아니면 교복 차림밖에 보지 못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슈스케는 자신의 상상력이 부족한 탓이라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았다. 아무리 작가처럼 뛰어난 상상력이 있단 한들 그런 옷을 입으리란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후지 상.”
“어머, 안녕. 미즈키라고 했던가?”
“기억해주시니 영광입니다.”
정중하게 한 손을 가슴에 얹어 허리를 꾸벅 숙이는 것이 여간 공들인 자세가 아니었다. 지금 당장 한마디를 하려다가 슈스케는 꾹 눌러 참았다. 슈스케는 예의를 지킬 줄 아는 남자가 되어야 한다는 유미코의 가르침 하에 자란 사람이었다.
“미즈키 상, 여기 후지만 세 명인데요.”
“이거 실례했군요. 오랜만입니다, 후지 군.”
“후후, 응, 오랜만이야. 그나저나 그 셔츠는… 정말 화려하네.”
다만, 대화의 초점이 자기에게 맞춰진 이상은 참을 이유가 없었다. 꽃무늬가 그려진 연한 보랏빛 셔츠에서 눈을 떼려야 뗄 수가 없었다. 유미코가 오는 것을 알고 차려입은 옷이 저것이라면,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저와 잘 어울리는 색상과 무늬죠.”
“응, 뭐…… 그렇게 생각한다면 굳이 정정하진 않을게.”
“형, 괜히 시비 걸지 마.”
“내가 뭘. 미즈키가 그렇대서 그렇구나 해준 것뿐인걸.”
가늘어진 미즈키의 눈이 제게로 향했지만, 슈스케는 가볍게 무시했다. 유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미즈키 역시 더 말을 보태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시선을 돌려 유미코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후지 상, 모처럼 오셨는데 홍차라도 한잔 대접하고 싶은데요.”
“후후, 고마워. 근데 금방 가봐야 하거든. 다음에 시간 여유로울 때 부탁할게.”
“저야말로 후지 상의 사정은 미처 배려 못 하고 실례를 범했군요.”
“미즈키 상, 왜 그래요? 닭살 돋게.”
같은 남자인 테니스부 부원들을 대하는 태도와 달라서일까, 아니면 자기 누나를 극진히 대접하는 모습이 낯설어서일까, 유타가 어색해하는 게 느껴졌다. 정작 그런 제안을 받은 당사자는 후후 웃으며 귀엽다는 듯 유타와 미즈키가 대화하는 걸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다.
소란 때문인지, 아니면 차를 몰고 나타난 멋진 여성이 유타의 누나라는 데서 생긴 호기심 때문인지, 하나둘씩 사람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지난 시합 때 본 얼굴도 있었지만 낯선 얼굴도 있는 걸 봐서는 유타의 같은 반 학생들도 끼어 있는 듯했다. 아이들이 늘어난 탓에 자연스럽게 미즈키와 유미코의 대화도 더 이어지지 못했다. 한창 이성에 관심이 많을 중학생들은 유타의 곁에 몰려들어 미즈키를 밀어냈다. 슈스케는 한숨을 푹 내쉬며 유타의 손목을 잡았다.
“가자.”
“아, 응. 다들 미안, 나 이만 가야 해서. 엄마가 기다리셔.”
“그래, 엄마가 너 온다고 카레도 잔뜩 해놨어. 미안, 얘들아~”
유미코가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는 유타의 빈손을 잡아끌었다. 유타는 누나와 형에게 팔 하나씩을 붙잡혀 사실상 연행되다시피 차에 올라탔다. 부러움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가 차 뒤로 따라붙었다.
“다들 유타랑 친한가 봐.”
“별로 안 친한 애들도 있어. 그냥 누나가 차 끌고 오니까 신기해서 나온 거지.”
“아이참~ 역시 내가 시선을 너무 끄니?”
“누나는 자신감이 하늘을 찌른다니까.”
“슈스케~? 너 그렇게 누나한테 박한 평가 주기야?”
말은 그렇게 해도 슈스케는 유미코가 다른 사람들보다 빼어난 매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했다. 재색을 겸비한 미녀란 보통 자기 누나에게 붙는 수식어였으며, 똑똑하며 눈치도 빨랐다. 언변이 좋아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도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장점 때문에 슈스케는 지금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워낙 뛰어난 장점인 탓에, 아무나 다 누나한테 멋모르고 달려드는 게 싫었다. 그러니까, 굳이 콕 집어 말하자면 미즈키 하지메가 유미코를 좋아하는 티를 아주 뚝뚝 흘리는 게 싫었다는 얘기였다.
“맞다, 누나. 누나 가게 애들한테 알려줘도 돼?”
“상관없지. 왜?”
“우리 반 여자애들이 누나 얘기 듣고선 가게 가르쳐달라고 난리야.”
“후후, 애정운을 확인하려나? 아니면 학업운?”
그래도 그 안 좋은 기분은 오래 가지 않았다. 유타도 슈스케나 유미코만큼이나 들떴는지 입이 쉴 줄을 몰랐다. 오랜만에 만난 남동생의 기분을 망칠 수는 없기에, 슈스케는 불편한 감정을 툭 털어버렸다.
“유타랑 같은 반이면 애정운이 아닐까? 사실 유타를 좋아하는 애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 형은.”
“어머,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 기회에 내가 확 다리를 놔줄까?”
“왜 둘 다 그렇게 앞서 나가는 거야?”
“앞서 나간다니? 그럼 마음에 두는 애가 있긴 있구나?”
“형으로서 그 얘기는 꼭 좀 들어보고 싶은걸.”
“이 누나도 꼭 좀 들어보고 싶다.”
“아, 좀!”
*
사실은 예정된 순서였을 것이다. 무심코 흘려들었던 자기 잘못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유타가 친구들에게 유미코의 가게를 알려준다는 것은, 곧 미즈키도 그 사실을 알게 된다는 사실을 뜻했다. 그가 직접 유타에게 묻지 않더라도 그걸 알게 될 방법은 많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지략가에 속하는 타입이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누나의 점술 가게에 미즈키가 나타났다는 사실이 썩 놀라운 것만은 아니라는 얘기였다. 다만, 그 횟수가 예상보다 더 많았다는 점에는 솔직히 놀랐다. 아무래도 미즈키는 슈스케의 생각과는 달리 유미코에게 단단히 반한 것 같았다. 그게 아니고서야 혼자서 점술 가게에 일주일에 세 번씩이나 얼굴을 들이밀 리가 없었다.
“미즈키가 그렇게 점술에 관심이 많은지 몰랐네.”
“관심 많던데? 애가 기특하게 내 책도 사서 읽었다고 그러더라.”
점술이 아니라 누나에게 관심이 많은 거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어쩐지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미묘하게 표정이 무너지는 동생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미코는 싱글벙글이었다. 이미 남자친구도 있는 유미코가 미즈키에게 그런 종류의(차마 입에도 올릴 수 없는) 감정을 가질 리는 없지만, 유타의 선배라서 호감을 갖고 대하는 게 분명했다. 유미코는 동생들에게 약한 만큼, 동생들의 친구에게도 약했다.
“우리 가겐 여자애들이 많이 와서 혼자 오기 좀 그랬을 텐데, 대단하지?”
“어, 응. 그러네.”
그 외에 뭐라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슈스케의 생각으로도 너무 티 나게 딱딱한 대답을 한 것 같았지만, 유미코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해맑기만 한 누나의 얼굴이 저를 놀리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즐거운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유미코라면 둘 다 가능하다며 혼자 납득하고, 슈스케는 가방을 들었다.
“학교 갔다올게.”
“잘 다녀와~”
응, 짧게 대답해놓고 슈스케는 현관을 나섰다. 머릿속이 온통 유미코와 미즈키로 가득했다. 그 두 사람을 나란히 놓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지만, 그 생각을 쉽게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싶어 황당하기도 했다. 그렇게 쳐다보기도 싫던 미즈키 하지메를 계속해서 떠올리는 순간이 올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아무튼, 후지 슈스케는 기분 좋아야 할 아침 등굣길에 역대 최고로 심란한 상태였다. 교문 앞에서 마주친 키쿠마루 에이지의 인사를 의도치 않게 무시할 정도로 말이다.
“후지!”
“어, 어? 아, 에이지.”
“뭐냥! 사람이 부르는데 대답도 안 하고!”
“미안, 생각을 좀 하느라… 전혀 안 들렸어. 진짜 미안해.”
“그럼 이따 음료수 쏘기!”
“그래, 그래.”
감정에 솔직한 클래스메이트는 토라지는 것도, 풀리는 것도 빠른 편이었다. 지갑에 동전이 몇 개나 있던가 헤아리던 슈스케는 불쑥 제 앞을 가로막는 키쿠마루 때문에 그 자리에 멈춰섰다. 키쿠마루가 미간을 찌푸린 채 슈스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왜?”
“무슨 안 좋은 일 있어?”
귀신같이 눈치가 빠른 친구였다. 하지만 굳이 미즈키의 이름을 언급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슈스케는 약간 다른 방향으로 선회했다.
“에이지, 점술에 관심 있어?”
“점술? 그냥 별자리 운세 보는 정도?”
“음, 남자 중학생은 보통 다 그 정도일까?”
다행히 부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마 오오이시는 이미 코트에 있을 테고, 테즈카는 교무실에 먼저 들렀을 테니 뒤따라서 누가 들어오지 않는 한 이야기를 중단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로커를 벌컥 연 키쿠마루가 교복 단추에 집중하며 말을 이었다.
“뭐~ 사람마다 다르지 않을까? 점술은 갑자기 왜?”
“우리 누나가 점술가잖아. 누나 가게에 남자 중학생이 왔대.”
“여친이랑 간 거 아냐?”
“혼자 왔다던데.”
“대박.”
저지를 갈아입느라 잠시 대화가 끊어졌다. 입고 있던 교복은 잘 정리해 로커에 넣어두었다. 테니스 라켓을 손에 쥐니 묘한 감정이 다 날아가는 것 같았다. 슈스케는 자신이 의외로 테니스를 많이 좋아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근데 일주일에 세 번이나 왔대.”
“뭐? 그건 절대 딴마음이 있는 거다냥.”
“역시?”
“뭐~ 근데 후지네 누나는 이십 대잖아. 중학생은 애처럼 보일걸?”
“그야 그렇지.”
코트 안에서 오오이시가 손을 흔들었다. 야호, 크게 소리치며 키쿠마루가 제 파트너에게 인사했다. 후지도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이 정도면 딱 이야기를 끊기에 적당한 타이밍 같았다.
“근데 후지, 너 의외로 시스콤이다!”
키득키득 웃으면서 그런 폭탄선언을 한 키쿠마루가 폴짝 뛰어 오오이시에게 향했다. 자리에 우뚝 멈춘 슈스케는 그 뒷모습을 보면서, 방금 들은 말을 곱씹었다.
시스콤?
굳이 따지자면 유미코가 브라콤이지, 저는 그냥 평범한 편인 줄 알았다. 아니, 유타를 생각하는 마음을 떠올리면 딱히 평범하지는 않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그걸 시스콤이나 브라콤이라고 부를 정도인지를 따지자면, 평범한 축에 속할 것이었다. 슈스케로서는 드물게 확신이 없었다. 키쿠마루의 말대로 시스콤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
하루를 ‘시스터 콤플렉스’의 정의란 무엇인가 고민하는 데 쏟아부은 후지 슈스케는 테니스부의 오후 훈련을 마치고 터덜터덜 걸어가는 중이었다. 그 생각에서 벗어났던 순간은 솔직히 테니스를 하고 있었던 시간뿐이었다. 덕분에 그는 자신이 집이 아니라 유미코의 가게를 향해 걷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평소와는 다르게 지나는 사람도, 차량도 많아지고 심지어는 번쩍거리는 조명과 간판도 많아졌는데도 슈스케는 생각에 잠겨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리고 키쿠마루와 종종 들르던 오락실을 눈앞에 두고서야 슈스케는 정신이 들었다. 유미코의 가게까지 불과 몇 블록을 앞둔 지점이었다.
이대로 누나 가게에 가면 분명 누나의 오늘 데이트 약속은 무산되겠지.
여태까지의 경험으로, 슈스케는 쉽게 미래를 그릴 수 있었다. 아무리 그가 시스콤이라고 해도(온종일 고민한 결과, 그는 깔끔하게 자신이 시스콤이라 인정하기로 했다) 남자친구와의 데이트를 또다시 방해할 생각은 없었다. 이미 의도치 않게 그런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슈스케보다 훨씬 중증의 브라콤인 유미코는 슈스케나 유타가 나타나면 언제든 맛있는 걸 먹이려 들었고, 남자친구보다 두 사람이 우선시된 적이 많았다.
한숨을 푹 내쉬고 돌아서려던 순간이었다.
“미즈키?”
당황한 나머지, 소리가 먼저 튀어 나갔다. 이걸 보려고 여기까지 멋대로 발이 움직인 모양이었다. 미즈키가 한 블록 앞에 서 있었다. 아니, 걷고 있었다. 방향은 어떻게 보나 유미코네 가게가 있는 쪽이었다. 슈스케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리고 미즈키가 건물에 들어가기 직전, 간발의 차로 슈스케가 그를 지나쳤다.
“후지 군?”
“응? 미즈키구나. 웬일이야?”
당연히 미즈키가 먼저 말을 걸 거라 생각했다. 웬만한 철면피가 아니고서야 여기서 자길 보고서도 가게에 들어갈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미즈키의 표정이 아주 미묘했다. 당황스러움을 숨기려고 애써 미소를 짓긴 했지만,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왜……”
“나야 우리 누나를 보러 왔지. 누나가 이 건물에서 점술 가게를 하거든.”
“아, 그, 그러셨군요.”
아닌 척하네.
미즈키의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아마도 건물의 층별 안내도를 찾는 것이겠지만, 두 사람이 선 복도에는 별 다른 안내 표지가 없었다. 미즈키의 시선이 슈스케의 등 뒤에 있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미즈키 넌 무슨 일로 왔어?”
“저, 저도 다른 볼일이 있어서 지나가는 길이었는데요.”
“그래? 난 또 우리 누나 가게에 온 줄 알았지. 유타가 저번에 친구들한테 가르쳐줬다 그랬거든.”
별안간 미즈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슈스케의 말이 아무래도 정곡을 찌른 모양이었다. 무어라 말을 못 하고 입만 몇 번 뻐끔거리던 미즈키가 고개를 숙였다. 꽉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아무래도 건물을 잘못 들어온 것 같군요. 그럼 이만.”
슈스케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허공에다 인사를 한 미즈키가 홱 돌아섰다. 슈스케는 성큼성큼 건물 입구를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언뜻 보기엔 목덜미까지 붉은 것 같았다. 제게 들켰다는 수치심 때문에 저렇게까지 당황한 걸까 싶다가도, 겨우 그런 마음가짐으로 누나를 보러 왔나 싶기도 했다.
엘리베이터의 알림음이 들리고 나서야 슈스케는 발을 떼었다. 이대로 계속 서 있다가는 유미코를 데리러 온 남자친구와 마주칠 수도 있었다. 건물의 뒷문으로 나간 슈스케는 망설임 없이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온종일 답도 없는 고민을 한 탓인지 피곤했다. 오늘은 들어가자마자 씻고 바로 잠드리라 다짐하는 슈스케였다.
*
그날부터 후지 슈스케의 일정에는 ‘누나 가게에 들르기’가 추가되었다. 딱히 유미코를 보러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 근처의 다른 가게를 들르기 위해 가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하게, 슈스케는 미즈키가 누나를 보러 오는 것이 싫었다. 유미코가 (당연한 얘기지만) 아무 감정이 없다고 해도, 그냥 미즈키가 유미코에게 그런 감정을 갖는 게 싫었다. 물론, 남자친구가 아니고서야 다른 누가 유미코를 쫓아다니면서 좋아한다면 다 싫을 것 같긴 했지만, 아무튼 그랬다.
그래서 슈스케는 오후 연습을 마치면 집으로 가는 게 아니라 번화가로 향했다. 학교에서는 조금 멀긴 했지만 걸을 만했다. 그냥 시간을 죽이기도 왠지 아쉬운 느낌이 들어 이런저런 골목을 찾아 러닝을 하기도 했다. 점술 가게 근처에 있는 테니스용품 가게도 몇 번 들렀다. 다육식물을 파는 꽃집을 가끔 구경했고, 서점에 선인장과 관련된 새 책이 들어온 것을 확인해 눈도장을 찍어두기도 했다. 하지만 늘 목적지는 같았다. 유미코의 점술 가게가 있는 건물이었다.
사실 그 이후로 3일 뒤에 미즈키를 다시 만났다. 똑같은 복도에서 똑같이 마주쳤다. 미즈키는 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서는 제대로 말조차 하지 않고 가버렸다. 그로부터 2주가 지났지만 만난 적은 없었다. 어쩌면 슈스케가 온 시간보다 빨리 미즈키가 도착했을 수도 있고, 슈스케가 떠난 뒤에 왔을 수도 있었다. 변수가 너무나도 많았기에, 이러는 게 하등 소용이 없다는 사실은 슈스케도 잘 알았다. 그래도 중학교 3학년에게는, 그런 쓸모없는 짓을 어떻게 하지 못하는 ‘감정’이란 이유가 있었다.
“요즘 맨날 어딜 그렇게 가냥?”
2주 가까이 이 여정을 반복했으니, 테니스부 부원들이 눈치 못 채는 게 더 이상했다. 가끔 하굣길에 같이 오락실에 가거나 군것질을 하러 가던 키쿠마루라면 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는 슈스케의 표정만 보고도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알아차릴 만큼 기민한 사람이기도 했다.
“어, 그게 누나네 가게에.”
“왜, 누나한테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아~ 알았다. 저번에 말한 그거?”
역시 슈스케의 예상 그대로였다.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건만 키쿠마루는 요점을 빨리 파악했다. 누나의 가게에 꼬박꼬박 들르고 있는 그 사람이 과거 대전 상대인 성루돌프의 미즈키 하지메라는 사실을 알려줘야 할지 고민이 되는 순간이었다.
“간다고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는 건 아는데, 나도 모르게 가게 되네.”
“내가 그랬지, 후지는 시스콤이라고~ 근데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네.”
“에이지도 그래?”
“음~ 후지만큼은 아니지만! 누가 계속 누나 쫓아다닌다고 하면 걱정은 될 테니까~ 근데 그 사람 중학생이라고 안 그랬냥? 우리 큰누나도 중학생들은 다 애 같아 보인다고 그러던데, 후지네 누나도 비슷하지 않을까? 너무 과하다 싶으면 누나가 먼저 잘 정리하겠지!”
논리적으로는 키쿠마루가 하는 말이 맞다는 걸 알았다. 한두 살 차이 나는 누나, 아니 여동생도 아니고 이미 20대에 들어선 누나가 중학생보다는 훨씬 더 세상을 잘 알 것이다. 중학생의 어설픈 구애 또한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그래도 슈스케는 이 상황이 싫었다. 슈스케는 다시 한번 자신에게 말했다.
그래, 나는 미즈키에게 화가 났었다고 여태 심술을 부리고 있는 거야.
“응, 아는데 역시 잘 안 되네. 진짜 이젠 좀 그만해야겠어.”
“좋아, 그럼 오늘은 나랑 타코야끼를……”
“미안, 오늘은 진짜로 누나랑 약속이 있어서 가야 해.”
“뭐야아~ 후지, 내일은 꼭 나랑 놀기다!”
거짓말은 아니었으니 양심의 가책을 느끼진 않았다. 유미코한테 갑자기 ‘저녁에 맛있는 거 먹을까? 가게로 올래?’하고 문자가 왔더랬다. 슈스케는 유미코가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예상이 갔다. 자신이 그렇게 꼬박꼬박 가게 근처에 왔다 간 것을 알고 있는 것이었다.
키쿠마루와 헤어지고 나서는 느긋한 걸음걸이로 유미코의 가게를 향해 갔다. 저녁을 먹을 시간까지는 그래도 좀 여유가 있었으니, 중간에 서점에 들를 생각이었다. 눈도장을 찍어둔 책을 사고, 다 떨어져 가는 라켓용 그립 테이프를 사서 가면 맞을 것 같았다. 막상 돌이켜 생각해 보면 왜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을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벌써 2주나 만나지 못했으니 아마 오늘도 미즈키를 만날 일은 없을 터였다.
다만, 늘 사건은 예상치 않았을 때 생기는 법이었다.
“안녕, 미즈키.”
“후지 군.”
그 이상의 말은 없었다. 두 사람 다 어색하게 길 위에 서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바쁘게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자동차 소리와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섞여서 소란스러웠지만, 두 사람 사이는 적막과도 같았다.
“저를 방해하러 온 겁니까?”
“음… 오늘은 진짜 약속이 있는 거지만, 부정하진 않을게.”
“후지 군, 당신은 도대체……”
“미안.”
그 뜬금없는 사과에 미즈키는 얼이 빠진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딱히 생각하고 했던 사과는 아닌지라, 슈스케도 좀 당황스럽기는 했다. 그저, 심술을 부렸던 것은 사실이었고, 어른스럽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막상 사과를 하니 오히려 속이 시원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유타 일 때문에 네가 싫었어. 네가 우리 누나를 좋아하는 것도, 만나러 가는 것도 그냥 싫었어. 그래서 그랬어.”
“뭐죠, 갑자기?”
평소와 똑같이, 후지는 부드럽게 웃었다. 미즈키를 앞에 두고 이렇게 웃을 수 있다니, 아마 유타가 보면 턱이 빠질 것이었다. 미즈키도 비슷한 생각인지, 안 그래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 금세 일그러졌다.
“이러는 게 바보 같아져서.
“네?”
“내가 이런다고 네가 우리 누나를 안 좋아하게 될 것도 아니고, 애초에 우리 누나도 별로 관심 없을 테잖아. 남친도 있으니까.”
“뭐라고요?”
“어? 몰랐어?”
이젠 미즈키의 얼굴이 홍당무 같았다. 아니, 토마토 같았다. 비틀거리던 그가 가로수에 탁 손을 짚었다. 당연히 미즈키가 알 거라는 전제하에 말을 꺼낸 슈스케는 자신이 폭탄을 투하했음을 깨달았다. 벌써 2주나 흘렀으니, 미즈키가 뻔질나게 드나들었다면 유미코의 남자친구와 한 번쯤은 얼굴을 마주했을 법도 했는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물론 미즈키로선 아무리 유타가 그런 방면에 둔하더라도 유타한테 직접 유미코에게 연인이 있는지를 물어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미안, 아는 줄 알았어. 남친이 누나 끝날 때 맞춰서 데리러 가는 경우가 많다고 그래서 이미 만났을 줄 알았는데.”
“아뇨, 한 번도…….”
이제는 낯빛이 거의 창백해진 미즈키를 보며 슈스케는 동시에 다양한 감정을 느꼈다. 알 수 없는 통쾌함과 영문모를 미안함이 뒤섞여서 영 마음이 복잡했다. 경계선을 항상 명확하게 긋는 편이던 슈스케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내키지는 않지만 그를 부축하는 게 나을까 잠시 고민했는데, 그런 고민은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더 시급한 문제가 슈스케의 시야에 들어왔다.
“누나.”
“안 오고 거기서 뭐 해? 어머, 미즈키?”
아마 미즈키가 저보다 훨씬, 아마 수십 배쯤은 놀란 게 분명했다. 가뜩이나 창백했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리더니, 누가 불이라도 붙인 것처럼 순식간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목덜미까지 새빨개진 미즈키가 가로수에서 손을 떼고 똑바로 자리에 섰다. 표정을 가다듬으려 애쓰는 게 보였지만 쉽지 않아 보였다.
“어, 가다가 미즈키를 여기서 마주쳤거든. 그래서 잠깐 대화 좀 했어.”
“잘됐다. 얘, 미즈키도 같이 가서 밥 먹자. 둘 다 괜찮지? 내가 이 동네 맛집은 다 꿰고 있거든~”
눈에 보일 정도로 크게 침을 삼키며(그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고개를 들썩인 미즈키가 간신히 유미코를 향해 돌아섰다. 슈스케에게는 뒷모습만 보였지만 그의 목덜미가 여전히 붉은 걸 봐서는 표정이 어떨지 눈에 선했다.
“물론이죠, 유미코 상.”
“그럼 가자! 거기 조금만 늦어도 줄 서거든.”
유미코는 자연스럽게 슈스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반대쪽 손으로 미즈키의 손도 덥석 붙잡았다.
앙숙이라고 불릴 수도 있는 두 사람은, 그렇게 유미코의 재잘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묵묵히 길을 걸었다. 유타가 봤더라면 식은땀을 한 바가지는 흘릴 수 있는 장면일 것이었다. 세 사람은 그렇게 유미코의 가게를 지나쳐 안쪽 골목으로 들어갔다. 몇 번 더 빙글빙글 코너를 돌아 도착한 가게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오늘은 내가 사는 거야. 미즈키도 그동안 우리 가게 자주 와줬으니까 서비스라고 생각해. 우리 유타 잘 봐달라는 뇌물로 생각해도 되고?”
“당치도 않으신 말씀입니다.”
손을 홱홱 내젓는 미즈키만큼이나 슈스케도 이 상황이 난처했다. 유미코라면 아마 자기와 미즈키 사이에 흐르는 미묘하고 불편한 분위기까지 다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런 자리를 만들었다는 것은 인제 그만 털어버리라는 메시지일지도 몰랐다. 이 메시지를 받아들일지는 전적으로 슈스케와 미즈키에게 달려 있었다. 유미코의 미소를 보니, 화해하지 않는 한 가게에서 나갈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적당히 내가 시켜도 돼? 못 먹는 거 있니?”
“아뇨, 다 잘 먹습니다.”
“난 누나 추천 메뉴면 다 좋아.”
그런 말을 뱉어놓고 슈스케는 다시 키쿠마루의 말을 떠올렸다. 시스터 콤플렉스랬던가. 아니, 이건 그런 종류는 아닐 것 같았다. 그냥 유미코의 입맛이 저와 잘 맞을 뿐이었다. 유미코가 가게의 추천 메뉴며, 자신이 좋아하는 메뉴에 대해 뭐라고 계속 말을 늘어놓았지만, 자꾸 딴생각이 들었다. 보통 유미코랑 있을 땐 생각할 틈도 없이 온갖 얘기를 하곤 했는데 미즈키가 함께 있단 사실 하나만으로 어색하고 정신이 산만했다. 정확히 짚자면, 불편했다. 미즈키 없이 유미코와 앉아서 평소처럼 저녁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물론, 제 맞은편에 앉은 미즈키 또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는 점에는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너희 나 오기 전부터 대화하고 있었던 거 아냐? 왜 이렇게 어색해?”
“애초에 대화를 길게 할 만큼 친하지 않은걸.”
“네, 유타 군의 형으로만 만났으니까요.”
“그래도 둘 다 테니스 하잖아. 공통점도 있지 않아?”
그것 외에 공통점이 없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앗, 아니다. 우리 셋한테도 공통점이 있잖아. 우린 모두 유타를 아낀다는 거.”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건 특기나 다름없었는데, 어쩐지 유미코 앞에서는 그것도 쉽지 않았다. 슈스케는 괜히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러고 보니 누나한테는 유타의 팔에 관해서 제대로 얘기하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사실 너희 사이가 안 좋은 거 알아. 그게 유타에 관한 문제라는 것도 알지.”
“어떻게 알았어?”
“유타가 말하던데? 슈스케, 넌 가끔 우리 유타가 이 누나의 막냇동생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더라?”
유미코의 지적은 타당했다. 유타가 고민이 생기면 저보다 누나에게 더 잘 털어놓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슈스케로서는 서운한 일이었지만, 유미코만큼 좋은 상담 상대도 없었다. 저 역시 고민은 보통 유미코에게 이야기하곤 했다.
“유미코 상, 죄송합니다.”
“나한테 사과 안 해도 돼. 유타한테 사과했다며? 두 사람의 문제잖아.”
“하지만 유타 군을……”
“그래, 걱정하지. 슈스케도 그래서 저렇게 화가 난 거고. 하지만 이 정도는, 그래, 중학생이라서 용납할 수 있는 수준이랄까? 아마 슈스케랑 유타가 어릴 적엔 훨씬 더 위험하게 놀았을걸? 계단에서 뛰어내린 것부터 시작해서 일일이 손에 꼽을 수도 없다니까.”
하긴, 초등학교에도 들어가기 전인 꼬꼬마 시절에는 유타와 곧잘 놀이터에서 뛰어놀고는 했다. 그리고 유미코의 말대로 결코 안전하게만 놀지는 않았다. 유타는 문턱, 계단, 낮은 담장 등 올라설 수만 있으면 어디든지 올라가서 뛰어내리고 싶어 했다. 슈스케가 그렇게 놀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유타가 슈스케보다 더 활동적이고 기운이 넘치는 꼬마라서 그렇기도 했다. 그리고 슈스케는 그걸 말릴 만큼 점잖은 형은 아니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해. 어리면 어릴수록 더 그렇겠지. 원래 그때는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 말고는 눈에 들어오는 게 없잖아. 현실적으로 균형을 맞추는 걸 배워나가는 과정이지. 하마터면 유타가 크게 다칠 뻔했지만, 안 다치고 일찍 깨닫고 조심하기로 했으니 다행이지 뭐. 너희에겐 실수를 만회할 기회가 아직 많아. 그러니까 이 관계도 툴툴 털어버려. 당사자인 유타가 괜찮다는데 둘이 질질 끌 필요 없잖아?”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슈스케를 마주보았다. 저절로 한숨이 푹 나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맞는 말만 하는 누나에게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그동안 미안했어.”
“저야말로 죄송했습니다.”
“유타에게 사과했다는 얘기는 예전에 들었는데 내가 영 뒤끝이 심한 사람이라.”
“알고 있으니 됐습니다. 저야말로 뒤끝 있는 성격이라 더 편하게 대하질 못했군요.”
“너희 화해하는 거 맞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셋 다 웃고만 있는데 찬 바람이 여간 쌩쌩 부는 게 아니었다. 때마침 등장한 직원 덕에 스산한 공기는 금세 가셨다.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따뜻한 음식은 누구에게나 특효약처럼 작용하는 법이었다.
“많이 먹어, 얘들아.”
그렇게 시작된 식사는 대강 한 시간 정도 만에 끝났다. 시계를 정확히 보지는 않았지만, 감각으로는 그랬다. 유미코가 추천한 가게인 만큼 맛은 아주 훌륭했다. 한창때의 남학생 둘이 붙어 있으니 음식 줄어드는 속도가 어마어마했지만, 유미코는 잘 먹어서 좋다면서 호쾌하게 메뉴를 더 주문했다.
식사 자리는 평화로웠다. 한번 사과를 하고 나니 마음을 푸는 건 쉬웠다. 유미코가 옆에 있다는 사실이 크게 작용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실제로 마음 어딘가에서 응어리졌던 것이 풀어진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앞으로 미즈키를 만날 때마다 살갑게 구는 일은 없을 테지만, 조금은 자제하자는 생각을 하게 된 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었다.
“너무 늦었지? 미즈키, 학교까지 태워다 줄까?”
“아뇨, 괜찮습니다. 식사도 대접해 주셨는데 그렇게까지 폐를 끼칠 수는 없죠.”
“얘도 참, 원래 이런 건 어른이 사는 거야.”
그래도 미즈키는 극구 유미코의 제안을 거절했다. 유미코가 의도치 않게 내뱉었을 ‘어른’이라는 단어가 그의 가슴을 찔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유미코는 직통버스가 있다는 말에야 겨우 물러났다.
“알았어,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 우리 유타 잘 부탁해~”
“물론입니다. 유미코 상도, 후지 군도 잘 들어가세요.”
“응, 잘 가, 미즈키.”
버스 정류장에 서서 미즈키는 몇 번이나 유미코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유미코는 걸어가면서도 연신 그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어쩐지 한숨이 나왔다. 지난 2주 동안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을 했던가. 가만히 놔두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을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든 것 같았다. 그래도 이걸 계기로 미즈키와도 해묵은 감정을 풀었으니 좋은 일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슈스케, 무슨 생각해?”
“그냥 좀 바보 같아서.”
“뭐가? 미즈키가 우리 가게 오는 게 싫어서 매일같이 근처를 서성인 거?”
예상한 대로였지만 직접 말로 들으니 더 바보같이 느껴졌다. 슈스케는 풋 웃고 말았다. 아무래도 제가 어른이 되더라도 누나에겐 못 당할 것 같았다.
“누나한텐 숨기려야 숨길 수가 없네.”
“그럼, 당연하지~ 그래도 우리 슈스케가 누나를 엄~청 좋아한다는 걸 알게 돼서 기쁜데?”
“누나는 브라콤이 심하다니까.”
“어머, 네가 시스콤이 심한 거 아니고?”
유미코가 차를 빼러 간 사이,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니 이미 어둑어둑했다. 참으로 긴 하루였다. 내일부터는 평소처럼 하굣길에 키쿠마루와 오락실에도 들르고, 유타에게 전화도 하면서 소소한 오후를 보내기로 다짐하는 슈스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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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달만에야 완성....
ㄹ님과 썰 푼 건 엄청 오래 전인데
글을 이제야 써봤습니다
개그로 쓰고 싶었는데
저는 워낙 개그에 약해서....
그래도 즐거우셨다면 좋겠습니다
저 후지 좋아해요
제 남자를 제외하면 최애가 아마 후지 아닐지
많이 좋아해요
그치만 이 글은 중딩인 점에 초점을 뒀고
후지 남매는 모두 브라콤&시스콤이라는 전제하에
쓴 것이기 때문에 캐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완성한 것에 의의를 두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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