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eat
(Request of 셀레스틴님)
토도독.
잉크가 번지듯이 빗방울이 조금씩 바닥을 적셨다. 그리고 금세 파문을 그릴 정도로 쏟아져 내렸다. 가을비였다. 튀어 오르는 물방울이 가볍게 바짓단을 적셨다. 히요시는 가을비가 싫었다. 어딘지 모르게 우울한 감정을 잔뜩 끌어올리는데다가 빨갛고 노랗게 물드는 나무를 헐벗게 만드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낙엽이 지는 걸 보면 어딘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기자재를 옮기다 말고 히요시는 현관에 멈춰 섰다. 그리고 슬쩍 운동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에 닿을까. 히요시가 선 곳에서는 테니스장이 보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어두컴컴해져서는 회색빛으로 바뀐 풍경이 마음을 어지럽혔다.
그렇지 않아도 히요시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오늘 하루의 컨디션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요즘’ 그랬다. 마치 가시를 잔뜩 세운 고슴도치마냥 날을 세우는 자신이 느껴져서 스스로에게 짜증이 날 정도였다. 딱히 가을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작년이나 재작년엔 이런 기분을 느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이 모든 건 졸업식 때문인 게 분명했다. 아직 내년의 일이긴 했지만 히요시는 그게 제일 신경 쓰였다. 정확히는 효테이 테니스 부가 신경 쓰였다.
사실 히요시는 신경 쓸 일이 굉장히 많았다. 보도위원인 탓에 축제 시즌만 되면 언제나 일이 두 배였다. 오죽하면 이 시기에 테니스 부의 공식 시합이 없는 게 다행스러울 정도였다. 이제 조금만 더 지나면 졸업식 준비니 뭐니 또 소란스러워질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지금의 히요시에게는 귀찮았다. 히요시는 오로지 테니스 부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싶었다.
무거운 기자재를 끌어안은 채로 히요시를 멈춰 서게 만든, 그 차분한 회색빛 세상을 누군가가 소란스럽게 만들어주었다. 부리나케 한 상자씩 들고 현관을 향해 뛰어오는 모습이 누가 봐도 학생회 임원이었다. 그제야 히요시는 자신도 축제 준비 중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발을 떼었다. 당장 급하게 처리할 건 없었지만 오늘 준비해야 할 것들은 확실하게 끝내고 가야만 했다. 자신이 할 일을 남에게 떠맡기는 못난 모양새가 될 수는 없었다. 히요시는 어깨를 내리누르는 짙고 습한 공기를 털어내기라도 하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한 뒤에 계단을 올랐다.
뚜벅, 뚜벅.
그러다가 문득 어딘가에서 소리가 겹쳤다. 계단을 내려오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무심결에 히요시는 슥 고개를 위로 들었다. 기지개를 펴는지 상대방은 계단에 멈춰선 상태였다. 다시 고개를 내리고 계단을 올랐다. 다시 뚜벅뚜벅 소리가 겹쳤다. 그리고 삼층에 도착했을 때, 히요시는 상대방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여, 히요시. 아직 안 갔네?”
시시도였다. 위원회를 하지 않는 시시도가 굳이 학교에 남을 이유는 없었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만남이었다. 뻗친 머리를 봐서는 교실에서 잠이라도 잔 것 같았다. 꼴불견이라는 말을 달고 살면서 자기야말로 꼴불견이지 않나. 그걸 그대로 시시도에게 말해줄 생각은 없었으므로 히요시는 고개만 다시 한 번 꾸벅여 보였다. 시시도의 시선이 히요시가 든 기자재로 향했다.
“축제 준비해?”
“네, 그렇죠. 시시도상은 왜 여기 있으신 거예요?”
“그냥 어영부영 하다 보니 이렇게 됐네. 잠깐 자기도 했고.”
“머리 떴는데요.”
“그래?”
시시도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대충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더니 가방 한 쪽에 매어 놨던 모자를 꺼내 썼다. 이럴 때 쓰려고 가지고 다니는 건가. 시시도를 만나고 나니 가뜩이나 복잡했던 머릿속이 배로 혼란스러워졌다. 히요시는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금방 원래의 표정으로 돌려놓았지만 시시도가 눈치 챘는지 가만히 히요시를 쳐다보았다. 마주한 시선이 민망해서 시선을 돌리려던 참이었다.
“걱정 있냐? 들어줘?”
“네?”
“걱정 있다는 표정이잖아. 들어줄게.”
이렇게 말하면 시시도는 서운해 할지도 모르겠지만, 히요시는 적잖이 놀랐다. 때문에 그 자리에 우뚝 선 채로 눈만 대록대록 굴렸다. 시시도는 아까와 똑같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은 채 가만히 선 두 사람 사이에 짙은 공기가 다시 내려앉은 것만 같아 히요시는 다시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은데요.”
“진짜 괜찮아서 그런 거야, 어색해서 그런 거야.”
“어색해서요.”
“솔직한 놈.”
피식, 시시도가 웃더니 먼저 발을 떼었다. 하지만 계단을 내려가는 대신 복도를 향해 움직였다. 가볍게 한숨을 뱉고 히요시도 시시도를 따라 복도로 들어섰다. 여긴 자신이 속한 반이 있는 층이었다. 히요시가 예상한 대로 시시도는 F반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물론 히요시는 여전히 기자재를 든 채이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남은 보도위원도 어차피 자기뿐이었다. 히요시가 교실로 들어서자 시시도는 대충 가까운 책상 위에 가방을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의자를 빼서 앉았다. 히요시도 기자재를 내려놓고 그 옆에 앉았다.
히요시는 한 번도 시시도와 가깝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냥 테니스 부 선배였고, 레귤러로 함께 고생한 선배여서 다른 부원들보다 조금 더 친한 정도. 그러니까 굳이 분리해서 말하자면 그냥 같은 테니스부 부원이 아닌 같은 레귤러라고 설명하는 정도? 물론 가깝다, 아니다 그런 문제와는 별개로 시시도는 존경스러웠다. 포기하지 않는 모습이나 꾸준히 노력하는 모습은 충분히 본받을 만 했다. 그런 열정이 어디서부터 나오는지 항상 궁금했다.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해서 결국은 레귤러 자리에 돌아온 시시도는 히요시에게 경외심마저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속 이야기를 터놓을 정도의 사이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히요시는 누군가에게 속마음을 터놓은 적 자체가 많이 없었다. 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한두 번 정도 오오토리와 카바지한테 흘리듯 말한 적은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성격 탓에 집중해서 잘 들어주고 도움이 될 만한 조언도 해 주었었지만 일반적으로 ‘속 이야기’라고 할 만한 진지하고 깊은 이야기는 한 적이 없었다.
“자, 말해봐.”
“무작정 말하란다고 말이 나오면 쉽게요.”
“일단 아무 얘기나 해 봐, 그럼.”
“아무 얘기라고 할 만 한 건 지금도 하는 중이잖아요.”
삐딱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쑥스러워서 툴툴거린다고 해야 할지, 아무튼 시시도의 눈에는 한 학년 어린 후배가 못내 귀여웠다. 늘 하극상을 외치는 만큼 누군가에게 지기 싫어하는 히요시가 쉽게 자기 마음을 내비칠 리 없다는 것쯤은 시시도도 이미 알았다. 그래서 이렇게 식상하고도, 히요시의 말을 빌려 어색한 상황을 만들었다. 최대한 사람이 적은 편이 히요시에게도 편할 테니까.
최근에 히요시군 보셨어요? 아뇨, 아뇨, 지나치다 보는 것처럼 짧게 말구요.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는 게 무슨 큰 걱정이 있는 것 같아요. 물론 물어봤죠. 근데 괜찮다고 한사코 말을 안 해주는 거예요. 카바지군한테도 물어봤는데 카바지군 보기에도 이상하대요. 진짜 무슨 일 있는 거면 어떡하죠?
호들갑이라고 할 정도로 수선을 떠는 오오토리를 안심시키느라 “네가 걱정이 너무 많은 거야. 금방 풀리겠지, 뭐.”하고 말해주긴 했지만, 시시도 역시 꽤나 신경이 쓰였다. 그 히요시 성격에 얼굴에 티가 날 정도로 뭔가를 고민한다니, 시시도로서는 쉽게 상상이 가질 않았다. 시기가 시기니만큼 히요시도 생각이 많을 거라고는 예상할 수 있었지만 그 중 어떤 것이 히요시를 괴롭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히요시랑 한 번 이야기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으로 든 생각은 ‘어떻게 히요시를 말하게 하면 좋을까’였다. 무작정 가서 ‘고민 있냐’고 물어보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았다. 그냥 가서 묻는다고 대답해 줄 히요시가 아니었다. 구슬려? 아니, 이건 시시도에게 무리였다. 돌려 말하기 보다는 솔직하게 직접적으로 말하는 게 익숙했다. 시시도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기왕이면 부장이었던 아토베가 히요시와 대화를 해주면 더 좋을 것도 같았지만 금방 그 생각을 접었다. 옆에서 보기에도 아토베는 그 화려한 미사여구와 몇 가지 동작, 뭐 아무튼 몇 가지만 제외하면 좋은 선배이고 부장이었지만, 자존심 강한 히요시가 아토베에게 그런 이야기를 털어놓을 리 만무했다.
무엇보다도 그냥 자신이 너무 신경이 쓰였다. 후배 사랑이냐고 묻는다면 왠지 간질거리는 단어에 ‘꼴불견’이라고 말해 버릴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후배인 히요시가 걱정이 되었다. 역시 그냥 자신이 말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시시도는 아까의 고민으로 돌아갔다. 뭐라고 말을 꺼내야 되지? 그리고 시시도는 더 이상 고민해봐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냥 묻자. 그렇게 해서도 대답해 주지 않는다면, 그건 히요시 본인의 선택이니까 본인이 짊어지겠지.
“테니스부 관한 거야?”
히요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시시도에게 향했던 시선을 훅 바닥으로 내렸다. 살짝 입술을 깨물고 오물거리다가, 여전히 조용한 시시도에게 화를 내기라도 할 것처럼 눈을 부릅떴다.
“저희는 졌어요.”
잔뜩 날이 선 목소리에 시시도는 침을 꿀꺽 삼켰다. 대뜸 이 말부터 나올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덕분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딱히 알 수 없었다. 히요시가 말하는 게 지난 전국대회라는 건 당연해 보이고, 몇 개월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 다시 분통을 터뜨리는 것이 시시도에게는 어지간히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기는 건 효테이라고 언제나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그렇긴 한데 그건 캐치프레이즈 같은 거잖아? 시시도는 그 말을 굳이 뱉진 않았다. 어떻게 봐도 상황을 더 어색하게 만들게 확실한 말을 하기 위해서 이 교실에 와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사실은 시시도 자신도 “이기는 건 효테이”라는 말을 단순한 캐치프레이즈라고 여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건 효테이 테니스부원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자신감이며 긍지였다.
물론 히요시도 몇 개월이나 지난 지금에 화를 내고 속상해 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계속 고민하다 보니 이런 복잡한 실타래가 만들어진 것뿐이었다. 히요시는 불안했다. 앞으로 효테이를 어떻게 이끌고 가야 할지 걱정이 가득했다. 아토베가 만들어 놓은 작은 왕국과도 같은 이 효테이학원 테니스 부를 자신이 잘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인지, ‘이기는 건 효테이’라고 그 때에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을 것인지 등등. 자신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와는 별개였다.
“그런데 우리는 졌잖아요. 내년엔 아토베상도 없을 거구요.”
“그거야 그렇지.”
“시시도상이 가고 나면 오오토리가 페어를 잃게 되잖아요.”
“뭐, 다른 파트너를 구해야겠지.”
“앞으로 효테이가 이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히요시는 자신이 한 말에 너무나도 놀라서 인상을 세게 찡그리고 말았다. 시시도 역시도 놀라긴 매한가지였다. 덕분에 말을 한 사람은 인상을 찡그린 채로, 그 말을 들은 사람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서로를 쳐다보는 묘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뭐야, 자신이 없는 거야?”
“그런 게 아니라는 건 아실 텐데요.”
히요시의 말 그대로였다. 히요시는 몇 번 졌다고 해서 자신이 없어지는 그런 종류의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하극상’에 더 불타서 훈련하고 혹시나도 깎여 나갔을지도 모르는 자신감을 더 보강해 도전하는 사람이었다. 애초에 하극상을 하고 싶어 한다는 자체가 그만큼 자기 실력에 자신감이 있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방금 전 말은? 이길 자신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시시도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제 걱정을 하자는 게 아닙니다. 앞으로 효테이 테니스 부를 함께 짊어질 만한 사람들이 더 있는지가 걱정인 겁니다.”
여전히 인상을 찡그린 채인 히요시를 보니 시시도는 왠지 웃음이 나려고 했다. 싫어할 게 분명해 웃는 건 혼자 있을 때로 미뤄두기로 했다. 믿고 따르고 또 의지하던 선배들의 졸업에 히요시 역시 불안한 것이었다. 누구보다도 믿었고, 누구보다도 강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앞으로 나아간다. 그 자리를 메우는 것은 오롯이 후배들의 몫. 부장을 이어받을 히요시에게는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전 아직 아토베상을 꺾지 못 했어요.”
금세 히요시는 걱정스런 얼굴에서 분한 얼굴로 바뀌었다. U-17에 가고 나서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히요시는 아토베에게 이기지 못했다. 얼마든지 더 상대해주지, 하고 아토베가 늘 그랬듯 의기양양하게 외쳤고 히요시는 그 때마다 하극상을 곱씹었다. 그건 히요시를 더 성장하게 만들어주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아토베는 좋은 테니스 플레이어고, 좋은 부장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인정하기 싫은 게 있다면 자신이 아토베만큼 좋은 부장이 될 수 있을지 두렵다는 점이었다. 히요시는 두려워하고 싶지 않았다. 부딪치면 다 어떻게든 해결되는 일인데 왜 이건 부딪치기 전부터 이렇게 두려운 걸까.
“그런데…… 그런 채로 부장이 되어도 괜찮은 건지 잘……”
히요시가 말끝을 흐렸다.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시시도는 히요시가 우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에 얼른 시선을 돌렸다. 초록색 칠판이 유난히 짙어보였다. 훌쩍이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쓸데없는 걱정을 했네. 왠지 머쓱해져서 머리를 긁적이던 시시도가 조심스레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히요시와 똑바로 마주 앉았다.
“히요시. 넌 좋은 녀석이야.”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입니까. 딱 그런 말을 할 것 같은 눈빛으로 히요시가 쳐다보았다.
“네가 아토베를 이기지 못한 게 무슨 상관이야? 테니스 부에서 지금 널 이길 수 있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히요시가 눈을 번뜩였다. 그 즉각적인 반응에 시시도는 결국 픽 웃어버렸다. 솔직한 놈이라니까. 시시도의 웃음에 본인도 그걸 느꼈는지 히요시가 큼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동시에 히요시의 시선도 빙글 교실 바닥을 한 바퀴 돌았다.
“우리 테니스 부가 실력 중심인 게 맘에 든다고 했었지?”
“그랬었죠.”
“그래, 그거야. 넌 지금 명실상부하게 효테이 테니스 부에서 실력이 제일 좋은 녀석이라고. 그러니까 아토베가 부장 자리를 넘겨준 거 아냐.”
히요시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실력주의인 효테이 테니스 부의 부장은 학년과 관계없이 가장 실력이 좋은 사람이 맡는다. 히요시는 시시도가 중간에 생략한 말까지 다 들을 수 있었다. 선배들이 모두 졸업하니까, 그러니까 자신이 이기지 못한 아토베도 졸업하는 거니까 이 테니스 부에서 제일 실력이 좋은 건 자신이다. 그건 충분히 부장의 자격이 될 수 있다. 이런 단순한 걸 어째서 지금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것일까. 생각하지 못한 게 아니라 떠올리지 못한 것이다. 이미 자신도 아는 사실이니까. 사람이 불안감 때문에 얼마나 멍청해질 수 있는지를 새삼 깨닫는 기분이었다. 히요시는 시시도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낸 자신이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시시도를 쳐다보기가 민망해서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하나 고민이 됐다.
“그리고 그런 걱정을 한다는 건 네가 효테이 테니스 부를 엄청나게 신경 쓴다는 거잖아? 그것만으로도 넌 이미 좋은 부장이야.”
“달래는 겁니까.”
“그래, 달래는 거다, 인마. 달래줬으면 해서 따라 온 거 아니었어?”
시시도가 피식 웃었다. 이 녀석, 이제 괜찮은가 보네. 딱히 달랜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히요시가 말한 대로 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 불안하니까 격려 좀 해 줘’라는 무언의 표시를 오오토리가 제대로 캐치해준 걸지도 몰랐다. 졸업 전에 이렇게 터놓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 시시도로서는 다행이었고 또한 기뻤다. 이런 녀석이 있으니까 앞으로의 효테이를 더 기대할 수 있어. 오오토리도 분명 좋은 페어를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어쩌면.
“너희는 이길 수 있을 거야.”
그냥 평상시 대화를 하는 것처럼, 굉장히 무심코 뱉어진 것처럼 평온한 목소리였다. 그래서 히요시는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완전히 이해하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다. 아, 너희. 그러니까 선배들을 제외하고 남은 우리. 새로운 1학년들과 함께하게 될 또 다른 ‘우리.’ 이길 수 있을 거라는 격려의 말보다 ‘너희’라는 말이 먼저 히요시에게 닿아서 마음을 흔들었다.
“우리가,”
히요시가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니까 저희가 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있어.”
조금 가라앉은 히요시의 목소리를 눈치 채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시시도는 그대로 말을 이어가기로 했다. 어쨌든 겪어야만 하는 일이었다. 자신이 앞선 선배들을 보낼 때 겪었던 것처럼 히요시도, 오오토리와 카바지도 겪어야만 하고, 또 그 다음 해에는 그 밑의 후배들이 겪어야만 하는 일이다. 이건 달래준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니까. 바뀌어가는 ‘우리’에 익숙해지는 게 남는 사람의 몫이었다.
“효테이 테니스 부에는 이백 명이나 되는 좋은 부원들이 있어. 선배인 내가 믿는 만큼, 너도 믿으면 돼.”
히요시는 이번엔 고개조차 끄덕이지 못 했다. 다른 무엇보다 지금 이 순간, ‘선배인 내가 믿는 만큼’이라는 그 말이 굉장히 힘이 되었다. 역시 그냥 불안한 것뿐이었어. 히요시는 숨을 뱉어내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건방졌던 자기 자신을 반성했다. 멋대로 부원들 전체를 선배들보다 못한 선수로 평가해 버리다니 아토베상이었다면 그렇게는 안 했을 텐데. 그러다가 히요시는 머리를 살짝 흔들었다. 이런 식의 비교는 좋지 않아. 어쨌든 그것은 자기 잘못이었다. 부원들 한 명, 한 명이 제대로 성장해서 선배들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효테이 테니스 부를 채워줄 것이다. 히요시는 그들을 믿고 이끌어주기만 하면 된다. 그게 부장이 할 일이니까.
문득 정신을 차린 순간 시시도와 눈이 마주쳤다. 한 번도 친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던 선배였는데 지금만큼은 누구보다도 친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앞으로 너를 따를 부원들을 믿어 줘.”
“네, 그럴게요.”
퉁명스러운 대답이 아니라 긍정적인 대답이 나온 탓에 시시도는 잠시 움찔했다. 이렇게 대답하는 걸 봐서는 다행히도 자신의 조언이 도움이 된 모양이었다. 중등부 생활이 다 끝나가는 마당에 히요시와 가까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좀 더 일찍 더 많은 이야기를 했으면 좋았을 텐데. 이제라도 이런 이야기를 터놓고 할 수 있다는 게 시시도로서는 뿌듯했다. 그러면서도 어딘지 쑥스러워져서 시시도는 고개를 돌렸다. 귀를 간질이던 솨아아 소리가 잦아든 걸 보니 비는 그친 모양이었다. 여전히 회색빛이긴 했지만 한결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시시도상.”
히요시의 목소리가 바닥에 내려앉았다.
“감사합니다.”
흘끗 시선을 돌렸더니 히요시가 꾸벅 고개를 숙인 채였다. 시시도는 자기도 모르게 잽싸게 손사래를 쳤고, 물론 그걸 히요시가 봤을 거라고는 생각하진 않았지만 다행히도 히요시가 몸을 일으켰다. 어정쩡한 자세에서 히요시와 눈을 마주보았다.
“사실 그냥 떠들 생각으로 왔는데 도움이 되긴 하네요.”
“어쨌든 말을 하면 스스로 정리할 수도 있다잖아.”
“꽤 든든하네요, 시시도상.”
“어쭈?”
피식, 히요시가 웃는 걸 보니 제대로 마음이 편해졌다 싶어 시시도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귀여운 후배라니까. 한 번의 눈빛 교환도 없이 두 사람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방을 둘러메는 시시도도, 기자재를 다시 품에 안는 히요시도 가벼워 보이기는 매한가지였다. 시시도가 먼저 발을 떼었다. 뚜벅. 조용한 교실에 발소리가 퍼졌다. 그리고 연달아 뚜벅, 뚜벅. 두 사람의 발소리가 겹쳤다. 히요시는 부드럽게 교실 문을 닫았다.
“전 이제 올라가보겠습니다.”
“어, 수고해. 먼저 간다.”
가볍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뒤 히요시가 먼저 뒤돌아섰다. 시시도는 가만히 선 채로 그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계단 쪽으로 올라간 히요시가 시시도의 시야에서 사라지기 직전, 시시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잘 부탁한다, 효테이.”
시야에서 벗어난 히요시가 멈춰 섰는지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아예 계단을 다 올라가버려서 들리지 않는 것인지도 몰랐다. 아무려면 어떤가. 시시도는 그냥 그 말이 너무나도 하고 싶었다. 앞으로 모두를 이끌고 나갈 자신의 후배이자 새로운 부장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이기는 건 효테이잖아.”
여전히 계단 위가 조용했다. 딱히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기 때문에 시시도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발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슬슬 집에 갈까. 아까 내린 비 때문인지 붉은 노을빛조차 보이지 않은 채 그대로 어두웠다. 한밤중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시시도는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빨리 들어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