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해결책

                            오시타리 유시 드림

 

 

 

  그때는 그게 별로 중요한 것 같지 않았다. 머리를 좀 자르러 미용실에 가는 일은 일상의 범주에 속하는 일이며, 그 김에 염색을 하든 파마를 하든 그때의 기분에 따르는 법이었다. 하지만 지금 코우노 나츠키에게는 인생의 중대사가 결정되는 것만큼의 중요도를 가지는 일이었다. 어떻게 해야 잔뜩 상해 지저분해진 긴 머리에서는 벗어나면서 일명 거지 존이라 불리는 어중간한 짧은 머리는 피할 수 있는지가 문제라면 문제였다. 어중간한 길이를 고수하느니 파마를 하는 게 나을 수도 있겠으나 며칠도 못 가 풀려버릴 걸 생각하면 그도 답이 아니었다. 꼭 체한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고장이 났는지 온도가 제멋대로 계절을 넘나들던 헤어 아이론이 결국은 사달을 내서 머리 중간을 태워 먹은 일만이 꼭 이유는 아니었다. 밤새 시끄러운 옆집 사람들 때문에 잠을 설쳤기 때문만도 아니었고, 방 청소를 하던 중에 손톱 끄트머리가 갈라진 것을 발견했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한창 이력서를 넣느라 정신이 없을 때였지만 꼭 그래서만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나츠키를 짓눌렀다. 한 가지만 있어도 신경을 거스를 법한 사안들이 동시에 벌어지면서 짜증은 배로 치솟았다.

  이 짜증이 터져 나오지 않은 것은 온전히 데이트 약속 덕이었다. 남자친구의 스케줄에 맞추어 늦은 저녁으로 약속을 잡았기에, 몇 달 치 스트레스를 한껏 몰아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시간상으로는 여유로웠다. 추스르지 못한 감정 대신 머리부터 수습하고자 미용실에 올 정도의 심적 여유도 존재하기는 했다. 하지만 예약 없이 찾아온 손님에게 주어진 기나긴 대기시간은 새끼손톱만 하던 여유조차도 앗아갔다. 머리에는 아직 손도 대지 않았건만 약속 시각이 성큼 코앞으로 다가온 탓이었다.

  차라리 오늘은 만나지 말고 내일 보자고 할까?

  이쯤 되니 절로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남자친구가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여기서 데이트 약속을 취소했다가는 남은 시간마저 우울함의 바다에서 헤엄칠 게 뻔했다. 그러다 또 이런 꼴로 만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불쑥 자리를 차지했다. 머리가 이런 꼴이든 말든 남자친구는 보고 싶었지만, 바로 그 사람이 남자친구이기 때문에 이런 꼴을 보여주고 싶지 않기도 했다.

  결국 답을 내리지 못한 채 십여 분의 시간이 더 흘렀다. 괜히 껐다 켰다를 반복하던 메시지 앱에서 새 메시지가 떠올랐다. 예정대로 퇴근한다는 메시지가 반가운 것인지 우울한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동시에 미용사가 나츠키를 불렀다. 나츠키는 빠르게 답장을 보냈다.

 

  「미용실이라 좀 늦을 것 같아. 미안.

 

 

오전 중에, 그리고 이른 오후에 있었던 일을 이미 전해 들었으니 미용실에 남자친구가 올 것은 이미 예상한 바였다. 하지만 그 외의 어떤 것도 예상과 달랐다. 결국 의도했던 머리 길이보다 더 많이 머리를 잘라야 했던 점도 그랬고, 그 모습이 생각보다 더 많이 낯설어서 서러워진 점도 그랬다. 이런 머리 모양과 이런 기분으로 남자친구를 봐야 한다는 점은 더더욱 그랬다. 머리카락과 함께 마음도 좀 가다듬고 새로운 기분으로 데이트를 하고 싶었는데 현실은 정반대였다.

 

  “유시.”

 

  결국은 눈물이 터졌다. 미용실 앞 벤치에서 기다리고 있던 오시타리 유시는 미용실의 입구를 나서자마자 울음을 터뜨리는 자신을 보고도 딱히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던 그가 자연스레 품으로 나츠키를 끌어당겼다.

 

  “오늘 힘들었제?”

  “짜증 나, 다 서러워.”

  “괘안타.”

 

  어쨌든 미용실에서는 정성스레 드라이까지 해주었고, 이를 알아차린 것인지 오시타리는 평소 하던 대로 머리를 토닥이는 대신 어깨를 토닥였다. 나츠키는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훌쩍였다. 평소와 같은 온기가 안심이 되었고, 어쩐지 눈물이 더 쏟아졌다. 아무 말 없이 큰 손으로 도닥이는 속도가 심장 박동이랑 비슷한 것 같았다. 반복적이고 단조로운 리듬은 안정감을 되찾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안 괜찮아, 머리가 이게 뭐야.”

  “, 맘에 안 드나?”

  “몰라. 그것도 모르겠어.”

 

  오시타리의 손에는 언제 꺼냈을지 모르는 손수건이 들려 있었다. 눈물을 닦아내는 손길이 하나하나 섬세해, 새삼스레 이런 사람이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날도 있는 기제. 남친 뒀다 뭐 하노. 이럴 때 안아 달라 카고, 하소연 들어 달라 카고, 맛난 거 먹자 카고 그러는 기래이.”

 

  나츠키가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오시타리는 한 번 더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마주 끌어안자, 가슴에 걸려 있던 답답한 것이 함께 사라지는 것 같았다. 단숨에 녹아내릴 짜증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하소연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길은 뚫린 셈이었다.

 

  “온종일 하소연 들어줄 거야?”

  “, 말만 하래이.”

 

  피식 웃는 오시타리를 보고 같이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이미 한 번 터진 감정이라 눈물이 계속 뚝뚝 떨어졌지만 상관없었다. 오시타리의 말대로, 맛있는 걸 먹고 하소연을 하고 난 뒤에는 꼭 안아 달라고 할 것이다. 그게 이 순간의 가장 올바른 해결책이었다.

 

  “일단, 이 머리가 예쁘다고 해줘.”

  “물어 뭐 하노. 내 눈에는 맨날 예쁘다 안 카나.”

  “그치만 취향이 아니면 어떡해.”

  “내는 늘 낫쨩이 취향이었데이.”

 

  만족할 만한 대답이었다. 오시타리의 손수건으로 눈물을 마저 훔쳐낸 나츠키의 얼굴이 미소로 밝았다.

 

 

 

어쩌면 오늘

                            야규 히로시 드림

                            (쿠칭님 생축 글)

 

 

  “그렇게 매번 제가 취하는 것에 집착하시는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나만 취하면 뭔가 치사하잖아!”

 

  ‘치사하다는 단어의 선택이 참 그다워서 야규는 풋 웃고 말았다. 동시에 그 말이 어느 정도는 맞는 것 같아 또 웃음이 났다. 제 여자 친구인 토와는 취하면 평소의 배로 귀여웠고, 마음을 표현하는 데도 솔직해지니 야규로서는 나쁠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토와의 표현을 빌려 술을 궤짝으로 들이켜도취하지 않는 야규는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이른바 풀어진 모습을 원하는 토와에게 보답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술을 잘 마셨대요? 위장에 술 대신 마시는 괴물 같은 거 있는 거 아냐?”

  “그럴 리가요. 그리고 지금은 전보다는 주량이 좀 줄었는데요.”

  “거짓말! 야규상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쳐다보던 토와가 금세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디서 거짓말을이란 말이 담긴 눈빛에 야규는 다시 웃으며 한 모금을 머금었다. 실제로 주량은 약간이지만 줄었다. 아마 한동안 업무가 바빠진 탓에 술을 입에도 대지 않은 기간이 길어진 게 원인일 것이다. 남들에게는 티도 나지 않을 만큼이지만 당사자는 알았다. 술고래들만 모여 있는(키리하라를 제외해야겠지만) 릿카이 테니스부의 회식에 가면 자연스레 알 수 있었다.

 

  “요컨대 취한 게 아니라 취해서 풀어진 모습이 보고 싶으신 것 아닙니까?”

  “같은 말 아니에요?”

  “취하지 않더라도 풀어진 모습은 보여드릴 수 있는데요.”

 

  연신 웃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잔뜩 찡그린 토와의 미간이 돌아올 줄을 몰랐다. 야규는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검지로 가볍게 토와의 미간을 눌렀다.

 

  “인상 펴시지요.”

  “야규상이 자꾸 이상한 소리 하잖아.”

  “별로 이상한 소리는 아닙니다만. 전 지금도 충분히 풀어져 있습니다.”

 

  중학생 시절의 야규라든가, 혹은 갓 대학생이 된 야규라든가, 아무튼 이전의 제가 보면 놀라서 말을 잃어버릴 만한 변화라고 생각했다. 편안한 옷을 입고 연인의 옆에 앉아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으면서 홀짝홀짝 술을 들이켜는 시간. 아무것도 고민하지 않고, 어떤 목적도 없이 그저 순간에 충실한 시간을 보내며 웃는 자신을 향해 과거의 자신은 뭐라고 할지 궁금했다. 과연 그 과거의 자신도 다람쥐같이 작고 귀여운 이 사람을 보고 같은 생각을 할지 궁금했다. 그리고 문득,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은 온전히 제 것이군요.”

 

  뜬금없는 소리에 의문을 던지는 눈빛도, 술기운에 발그레 달아오른 볼도, 막 술을 마신 탓에 촉촉하게 빛나는 입술도, 잔을 놓지 않아 더 차가워졌을 손도 전부 나의 것.

 

  “뭐래요?”

  “과거의 저에게도 토와를 양보하고 싶지 않다는 걸 깨달아서요.”

  “야규상, 취했어?”

  “글쎄요.”

  “왜 갑자기 그런 소릴 해요?”

 

  토와의 입가로 다가오는 잔을 손바닥으로 막고, 야규는 그 잔을 빼앗아 들었다. 마지막 남은 한 모금을 머금자 불만을 토로하는 소리가 올라왔다. 하지만 그 이상의 반응은 없었다. 토와의 취기가 딱 적당히 오른 것을 알기에, 야규는 망설임 없이 입을 맞추었다.

  입을 떼며 토와의 턱을 타고 흐르는 술을 손가락으로 닦아냈다. 그때까지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야규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고 있던 토와의 얼굴이 급격하게 달아올랐다. 술독이 오른 것과는 분명 다른 붉은 색이었다.

 

  “, , , 뭐예요?”

  “토와,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아니, 그건, , 그건…… , 나도, , 사랑해요.”

 

  쿡쿡 낮게 웃던 야규가 그대로 토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웃느라 어깨가 들썩이는 통에 어정쩡하게 그를 끌어안은 토와의 얼굴도 덩달아 흔들렸다.

 

  “왜 웃어요?”

  “귀여워서요.”

  “지금은 야규상이 더 귀여운데.”

  “그렇습니까? 그럼 어쩌면 오늘은 치사하지 않은 걸 수도 있겠군요.”

 

  웃음이 잦아들자 토와가 야규의 어깨를 밀어냈다. 순순히 몸을 일으키면서 바라본 토와는 황당하면서도 웃긴다는 표정이라 피식 또 웃음이 났다. 시계가 이제 막 열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야규는 토와의 왼손에 깍지를 꼈다. 손끝이 차가웠고, 손바닥이 물기 때문에 약간 축축했다. 손가락 위로 가볍게 입을 맞추자 토와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야, 지금 나한테 귀여움 어필하는 거예요?”

  “당신의 생일을 맞이하는 소소한 선물이라고 해 두지요. 유혹이라고 해도 좋고요.”

  “미쳤나 봐.”

 

  그런 소리를 하면서 토와도 키득키득 웃었다. 자잘하게 몇 번 더 토와의 이마에, 콧잔등에, 입술에 입을 맞추며 자연스레 야규는 테이블을 밀어냈다. 축하해야 할 생일이 이제 막 시작된 참이었다.

 

 

 

패션도 이론인가요?

                            야나기 렌지 드림

 

 

  “렌지는 옷 어디서 사 입어?”

 

  뜬금없이 튀어나온 말 같았지만 주의를 환기하기에는 충분했다. 가볍게 차를 홀짝이던 야나기가 고개를 들어 세라를 보았다. 세라 역시 그를 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입고 있는 셔츠를.

  직장인의 교복이라고도 할 수 있는 셔츠였다. 새하얗고 말끔한 데다 옷깃도 똑바르게 서 있는 점이 그다웠다. 특별한 무늬도 없고, 단추조차도 그저 하얗기만 했다. 새로 산 옷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빛나는지라, 무심코 그런 질문이 입 밖으로 나가버린 것이었다.

 

  “백화점에 갈 때도 있고, 의류매장에 갈 때도 있다.”

  “흐음…… 그 옷도 새로 샀어?”

  “아니, 이건 원래 입던 옷이다만.”

 

  대체 어떻게 빨아야 밤새 소복이 쌓인 눈 같아지는 걸까?

  연이어 떠오르는 질문은 마음 한구석에 제쳐두었다. 셔츠 대신 얼굴을 마주하자 평온하던 야나기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이상하다면 개의치 말고 지적해줘도 좋아. 패션에는 자신이 없거든.”

  “아니, 잘 어울려. 근데 항상 비슷한 옷만 입으니까……

  “그럼 같이 옷이라도 보러 가는 건 어떤가?”

 

  야나기의 입에서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말인지라, 세라는 잠시 입을 벌린 채로 멈춰 있었다. 보기 드물게 당황한 표정이 신기했는데, 뜻밖의 제안을 하는 순간에는 평소와 같이 진지했다. 차갑고 예리하지만 차분하고 예쁜 얼굴에 새삼스레 감탄했다. 문득, 상대방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그제야 슬쩍 시선을 피한 세라는 벙한 표정을 가다듬었다.

 

  “의외라고 생각했을 확률 구십팔 점 삼 퍼센트.”

  “그야, 딱히 관심 없는 줄 알았단 말이야.”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똑같은 법이니까. 이 기회에 세라의 취향도 알게 되면 일석이조겠지.”

 

  그 담백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단어들을 읊조리면 꼭 어딘가의 전공 서적에 나오는 논리적인 말처럼 느껴져서, 세라는 조금 늦게 볼이 달아올랐다. 세라가 매번 데이트를 앞두고 옷장을 몇 번씩 열면서 고민하듯, 야나기도 그런다는 게 기뻤다. 그리고 그 감정이 어쩐지 수줍어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그럼 내가 골라주는 옷 다 입을 거야?”

  “원한다면.”

 

  자기도 모르게 함박웃음이 피어올랐다. 지체할 것이 없었다. 세라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연하게도, 야나기는 놀라는 기색 없이 따라 일어났다. 무엇이든 금방 예측하는 남자친구가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이건 답례로 받아줘.”

 

  옷을 보러 가자고 했을 때부터 이 남자는 이럴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지금 깨달은 탓에 세라는 좀 분했다. 야나기에게 옷 선물을 할 생각이었는데 도리어 제 손에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야나기는 말을 꺼낸 사람답게, 세라가 추천하는 옷은 전부 입어보았다. 얇은 니트와 목폴라 티부터 후드 티셔츠에 청재킷, 카디건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세라는 그중에 제일 잘 어울리는 두 가지를 속으로 점찍어 놨었다. 매장을 나서기 전에 야나기 몰래 사서 선물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데이터를 파악하는 게 인생이자 취미인 남자친구에게 몰래는 통하지 않았다. 분명 티도 내지 않았건만, 이미 야나기는 그 옷 두 벌을 결제한 뒤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선물하려고 했다며 부루퉁하니 입술을 내미는 세라를 달래서 자연스레 여성복 매장으로 데리고 갔다. 야나기의 말대로, 애인의 취향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세라도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선물을 받을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아무튼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저한 사람이었다.

 

  “내가 선물할 생각이었는데 치사해. 자기만 선물하고.”

  “오늘만큼은 내가 선물하고 싶어서 수를 썼으니 부디 용서해.”

 

  성실하게 사과하는 모습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평소에 보이던 예리한 눈빛은 어디로 가고, 누구보다도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것에도 약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에게 그런 표정을 보여준다는 사실이 좋았다. 세라는 뾰로통했던 마음을 살짝 누그러뜨리고 제 앞에 서 있는 야나기를 보았다.

 

  “근데 왜 오늘이야?”

 

  음. 짧은 소리만 내뱉고 야나기는 금방 대답하지 않았다. 어떻게 대답할지 고민하는 것 같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부끄러워 보이기도 했다. 덩달아 부끄러워지기 시작한 세라가 막 손사래를 치려던 순간이었다.

 

  “세라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식한 날이다.”

 

  정말이지, 용서하지 않을 수가 없는 대답이었다.

 

 

 

비 오는 날의 창가

                            유키무라 세이이치 드림

 

 

  빗줄기가 후드득 창문을 때렸다. 정말이지 시원하게 쏟아지는 비였다. 속으로 기상청을 몇 번이고 욕하며, 히요리는 창가에 서 있었다. 어깨 위로 걸친 큰 카디건과 손에 쥔 머그잔 덕에 한기는 가셨지만 짜증은 났다. 창 틈새로 스멀스멀 들어오는 찬 공기와 비 냄새가 싫었다. 딱히 비 오는 날이 싫어서는 아니었다.

  피크닉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꽃놀이는 사정이 달랐다. 흐드러지게 핀 꽃을 보면서 나란히 앉아 따뜻한 햇볕을 즐기는 데이트는 좋아했다. 그래서 일부러 옷도 편안하게(하지만 예쁘게) 입었다. 기대하던 날이라 머리를 세팅하는 데에도 힘을 많이 들였다. 그런데 약속 장소에서 만난 지 5분도 채 되지 않아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산을 펼쳐 들고 기다려 봐도 비는 영 그칠 것 같지 않았다. 결국 꽃놀이는 다음에 하는 게 낫겠다며 유키무라가 먼저 히요리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지금. 히요리는 유키무라의 집에 있었고, 유키무라의 카디건을 걸친 상태로 유키무라가 타준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집에서 느긋한 하루를 보내는 것도 물론 좋은 데이트였다. 다만, 몇 주 전부터 계획해 놓은 일정이 통째로 어그러지면 도저히 좋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절로 한숨이 푹 새어 나왔다. 손가락으로 애꿎은 머리카락 끄트머리를 붙잡고 빙빙 돌렸다. 우산 하나로 폭우를 뚫고 오는 동안 착 가라앉은 머리가 거슬렸다.

 

  “히요리.”

 

  유키무라는 한쪽 어깨가 다 젖어버린 셔츠 대신 얇은 니트를 입고 있었다. 수건으로 물기만 대충 닦아냈는지 남색 머리카락이 더 짙어 보였다. 그 역시 한 손에 히요리가 든 것과 똑같은 머그잔을 쥐고 있었다. 은은하게 퍼지는 향이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방 안의 공기가 한층 더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추운데 왜 창가에 서 있어.”

 

  히요리가 다가오는 유키무라를 향해 손을 내밀자 자연스레 그 손을 맞잡아왔다. 히요리의 손이 찬 공기에 서늘해진 탓인지 유키무라의 손은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냥.”

  “해가 쨍쨍해서 따뜻한 날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히요리의 볼이 부풀어 올랐다. 유키무라는 항상 남의 속을 알면서도 아닌 척 말을 건넸다. 손바닥 위에 놓인 듯한 기분이 들어 짜증 나고 재수도 없었지만(진심이다) 히요리는 그런 유키무라를 좋아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차를 홀짝이던 유키무라가 히요리의 시선을 느꼈는지 시선을 마주쳐왔다. 히요리는 홱 고개를 돌려 창밖을 쳐다보았다.

 

  “짜증 나.”

  “그러네. 꽃놀이하고 싶었는데.”

 

  너한테 한 소리기도 하거든?

  알면서도 무시한 게 분명했지만 굳이 그 부분을 다시 짚지는 않았다. 여전히 세차게 쏟아지는 비 때문에 짜증이 나기 시작한 게 맞기 때문이었다.

 

  “이게 뭐야. 머리도 엄청 예쁘게 했는데.”
  “응. 엄청 예뻤는데 아깝다.”
  “뭐야, 지금은 안 예쁘다고?”

 

  평소였으면 알면 됐다며 풋 웃어버릴 말이었지만 짜증으로 일렁이는 가슴을 잠재우기엔 모자랐다. 뾰로통한 표정에도 유키무라는 그저 웃기만 했다. 울컥 올라오는 감정에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유키무라가 먼저 입을 뗐다.

 

  “넌 늘 예뻐. 하지만 정성 들여서 세팅한 머리는 더 예뻤지. 겨우 오 분만 보기는 아까울 만큼.”
  “너 진짜 독심술 할 수 있지?”
  “설마.”

 

  여자의 심리를 잘 아는 건지, 그냥 사람 심리는 다 잘 아는 건지, 아니면 나를 잘 아는 건지.

  있는 힘껏 유키무라를 쏘아 보던 히요리가 결국 한층 풀어진 마음으로 몸을 기대었다. 자연스레 풀어낸 손으로 허리를 감싸는 손길이 싫지 않았다. 밖이 어두워진 탓에 창문에 아른아른 비치는 유키무라의 표정이 더없이 즐거워 보이는 것도 싫지 않았다.

 

  “아쉽지만 꽃놀이 일정은 새로 짜자. 오늘은 이대로 집에서 놀고.”

 

  그래, 꽃이 하루 만에 다 져 버릴 것도 아니고.

 

  “뭐 해줄 건데?”

  “글쎄, 뭘 해주면 좋아하려나?”

 

  웃음기가 섞인 질문에 왠지 심통이 났다. 머그잔을 탁 소리 나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히요리는 유키무라의 품을 파고들었다. 등 뒤로 똑같이 탁 소리가 울렸다.

 

  “맛있는 거 먹여주고, 디저트도 먹여주고, 안아주고 예쁘다 예쁘다 해줘.”

  “욕심쟁이네.”

  “이렇게 예쁜 내가 사귀어주는데 당연히 해줘야지.”

  “후후, 이렇게 예쁘니 어쩔 수 없지.”

 

 

 

후지 생일 합작

 

함께 해주신 분들의 합작은 이쪽에

https://fujihappybirthday.wixsite.com/loveyou/

 

 

 

 

  “슈스케, 내일 저녁 먹고 온댔나?”

  “, 그럴 거야.”

  “다 컸다~ 이제 생일날 친구들이랑 밥 먹네.”

 

  풋 웃는 누나에게 후지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누나의 말대로 크진 않았을지라도, 어느 정도 크긴 했을 것이다. 중학교에 입학한 지 3. 마지막 기말시험까지 마친 3학년들에게 남은 행사는 졸업식뿐이었다.

  올해는 좀 더 특별했다. 기말시험이 끝난 다음 날, 그러니까 내일은 4년에 한 번 돌아오는 229일이자 후지의 생일이었다. 이런 경사스러운 기념일을 친구들이 지나갈 리 없었다. 시험 일정이 안 겹친다면서 제일 기뻐한 키쿠마루를 시작으로, 모두가 한 마디씩 거들면서 생일 파티 계획이 생겼다. 여기에 기합이 잔뜩 들어간 모모시로와 카이도까지 합류하면서 언제나의 그 멤버들이 모이게 되었다. 무뚝뚝한 몇 마디를 추가해줄 후배 한 명이 모자란 건 아쉬웠지만, 후지로서는 매우 기뻤다.

 

  “밤에는 아버지랑 유타도 온댔으니까 너무 늦지 말고.”

  “알았어.”

 

  잘 자라는 인사를 덧붙이고, 후지는 방으로 돌아왔다. 어쩐지 가슴이 술렁였다. 해마다 맞는 생일이었지만(비록 28일에 치르긴 했지만, 어쨌든 생일은 해마다 축하받았다) 졸업을 앞둬서 그런지 싱숭생숭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3년 동안 테니스부에서는 많은 추억을 쌓았다. 그리고 마지막인 올해는 전국 우승이라는 커다란 성과도 이룰 수 있었다. 많은 것들이 변했다. 즐기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언젠가부터 후지는 팀메이트와 마찬가지로 승리를 바라게 되었다. 함께 이기고 싶었고, 바통을 뒷사람에게 넘겨주고 싶었다. 더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결심도 이 팀과 함께였기에 가능했다.

  제게 일어난 이 사소하고도 큰 변화를 알기에, 후지는 졸업이 아쉬웠다. 연락을 주고받고 만나는 정도야 앞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겠지만, 함께 팀이 되어 같은 골인 지점을 향해 걷는 일은 없을 것이다.

  후지는 한숨을 크게 뱉어냈다. 무엇이든 한정된 시간이기에 더욱 소중한 법이었다.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면 현재 주어진 시간을 알차게 보내는 수밖에 없다. 후지 슈스케는 후회를 하는 타입이 아니었고, 그런 걸 남기는 것도 원치 않았다. 졸업식까지는 약 보름이 남아 있었다. 내일 있을 생일 파티도 그사이에 만들게 될 소중한 추억이었다. 머리가 상쾌해진 후지는 그대로 침대에 올랐다.

 

*

 

  이러려고 부 활동 쉰다고 했구나.

  3학년의 활동은 여름의 전국대회를 기점으로 사실상 끝났다. 아직 테즈카가 부장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긴 했지만, 현재의 세이가쿠 테니스부를 이끄는 사람은 카이도였다. 늘 하던 연습을 쉰다기에 아예 놀러 나가기라도 하려나 보다 생각했던 후지는, 테니스장 입구에서 펄럭이는 현수막을 보고 멈춰서고 말았다. ‘세이슌 학원 후지 슈스케의 생일을 축하합니다.’라는 아주 정직한 현수막은 아무래도 직접 글씨를 쓴 모양인지 글자마다 크기가 제각각이었다. 삐뚤빼뚤한 글씨는 아마도 키쿠마루, 그 옆에 정자체로 글자마저 올바른 게 오오이시, 투박하고 커다란 글씨는 카와무라…… 시원시원하게 큼지막한 글자는 모모시로일 테고, 급하게 쓰지 않으려고 꾹꾹 눌러쓴 흔적이 보이는 글자는 이누이 같았다. 글씨 교본 책에 나올 것처럼 아주 정갈한 카이도의 글씨에 이어, 마지막 글자는 선생님의 칠판 글씨 같아 보이니 테즈카의 글씨가 분명했다. 글씨체도 참 성격을 따라가는 모양이었다.

 

  “생일 축하해, 후지!”

 

  제 옆에서 함께 걷던 키쿠마루가 큰소리로 외치는 것과 동시에 테니스장 안쪽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씩 나타났다.

 

  “여길 파티장으로 쓰려고 쉰 거야?”

  “, ……. 선배들이 생일 축하 파티는 기왕이면 여기서 하고 싶다고 하셔서.”

 

  묻지 않고도 후지는 그 의견을 제일 처음 낸 사람이 키쿠마루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씨익 웃으며 후지를 재촉하는 표정에 이미 답이 있었다. 테니스장으로 들어서자 코트 한가운데 서 있는 오오이시가 보였다. 케이크를 든 그의 표정이 환하게 빛났다.

 

  “생일 축하해, 후지.”

  “고마워. 준비를 많이 했나 보네.”

  “하하, 졸업 전에 챙길 수 있는 마지막 생일이잖아. 다들 엄청 아이디어를 많이 냈어.”

 

  테니스장 여기저기를 장식한 풍선은 카와무라의 작품인 듯했다. 후지가 온 것도 눈치채지 못했는지, 카와무라는 후지에게 등을 보인 채 무언가에 열중한 상태였다.

 

  “후지, 오늘은 널 위해 신작 이누이즙을 준비했는데.”

  “그거 기대되는걸.”

 

  주변인들의 표정이 모두 굳었지만 후지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실제로 그는 청초처럼 신 계열이 아니라면 이누이즙에는 강했다. 이누이가 신작을 만들 때마다 무슨 맛이 날지 기대도 되었다. 순수하게, 후지는 이누이즙이라는 선물이 기뻤다.

 

  “후지의 평소 습관이나 음식 취향을 고려했을 때, 더 필요한 영양소는……

  “, 생일날까지 그런 어려운 얘기 하지 말자고요! 맛있는 것도 잔뜩 준비해놨는데!”

 

  모모시로의 제지에도 이누이는 계속 말을 이을 기세였지만, 키쿠마루가 번쩍 손을 들어 이누이의 입을 막았다. 떼어내려는 이누이와 절대 손을 떼지 않는 키쿠마루, 그리고 마찬가지로 딱 붙어서 키쿠마루를 돕고 있는 모모시로에 손에 든 케이크 때문에 어쩌질 못하고 말로 두 사람을 말리는 오오이시까지, 익숙한 풍경에 후지는 풋 웃음이 터졌다.

 

  “됐다! , 후지!”

  “타카상, 뭘 하느라 그렇게 집중했어?”

  “, 이거! 거의 다 했는데 마지막에 터뜨리는 바람에 다시 만드느라……

 

  카와무라가 내민 것은 풍선이었다. 정확히는 척 봐도 미니 선인장 화분처럼 생긴 풍선아트였다. 풍선아트라니,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선물을 받아들고 후지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정말 고마워. 이건 예상 밖이네.”

  “풍선을 사러 갔더니 마침 옆에 선인장 만들어놓은 게 전시되어 있었거든.”

 

  만드는 법을 배우고 있을 카와무라의 모습이 머릿속에 자연스레 그려졌다. 투박한 손이지만 초밥을 쥐는 손인 만큼 섬세하게 풍선을 다루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부실로 슬슬 들어가죠. 부장이…… 테즈카 선배가 기다립니다.”

 

  입에 붙지 않은 호칭 때문인지 카이도의 표정이 미묘했다. 그제야 겨우 실랑이를 멈춘 세 사람도 그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후지는 약 보름 뒤에 이별하게 될 부실의 앞에 섰다. 늘 아무렇지 않게 열었던 문이 새삼 특별했다. 문고리에 손을 얹고 천천히 돌렸다.

  부실은 깨끗했다. 풍선 몇 개가 창문을 장식했고, 그 밑에 밖에 걸린 것과 마찬가지로 손을 직접 쓴 작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음료수와 과자, 파이 등 다양한 간식거리가 가득했다. 부실을 비추는 오후 햇살 속에 테즈카가 서 있었다.

 

  “생일 축하한다, 후지.”

  “고마워, 테즈카. 그건 뭐야?”

 

  둘둘 말아서 리본까지 묶어놓은 종이가 후지의 시선을 끌었다. 테즈카는 그 종이를 후지에게 내밀었다. 왠지, 그는 웃고 있었던 것 같았다.

 

  “부원들이 롤링 페이퍼를 작성했다. 류자키 선생님께도 한 마디를 부탁드렸고.”

  “그건 어마어마한 선물인데.”

  “에이, 진짜 선물은 따로 준비했죠! 저는 먹을 거!”

 

  싱글벙글 웃는 모모시로를 시작으로 선물 증정 타임이 시작되었다. 모모시로는 동네에서 가장 맛있기로 소문난 빵집의 파이를 들고 왔고, 테즈카는 고심해서 고른 게 눈에 선한 선인장용 분갈이 흙을 선물했다. 카이도는 어떻게 알았는지(아마 이누이가 정보의 출처겠지만) 앤티크 식기를 내밀었고, 카와무라는 취향일지 모르겠다면서 재즈 음반을 주었다. 이누이는 얼마 전 새로 나왔다는 선인장 관련 책과 함께 이누이즙(“선배, 그건 선물이 아니잖아요!”)을 선물했다. 오오이시와 키쿠마루에게는 카메라를 받았다. 가격 때문에 고민하던 두 사람이 서로에게 상담하다가 같은 선물을 준비하려던 걸 알고 함께 돈을 모아 준비했다는 이야기는 덤이었다.

 

  “너무 많이 받은 것 같은데.”

  “생일이잖아! 하루 정도는 그래도 된다냥!”

  “그래, 후지. 생일이잖아.”

  “케이크에 불 켜는 것도 잊으면 안 되지.”

 

  오오이시가 색색의 초를 케이크에 꽂았다. 후지는 그 초를 보면서, 16살의 첫날을 이곳에서 이 사람들과 함께 보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후지 슈스케는 지금 더없이 즐거웠고, 행복했다.

  성냥으로 불을 붙이자 분위기가 완벽해졌다. 누군가가 자연스럽게 부실의 불을 껐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 때문에 부실은 여전히 밝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신호라도 준 것처럼 동시에 해피 버스데이 노래가 시작되었고, 그 마무리에 맞추어 후지도 촛불을 불었다. 이미 들었던 축하 인사를 또 들으면서 후지는 웃었다.

 

  “그럼 여기서 서프라이즈 선물을 공개해야겠군.”

  “서프라이즈?”

 

  이누이의 말에야 겨우 부실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노트북이 눈에 들어왔다. 몇 번 달칵거리는 소리가 난 뒤, 이누이가 옆으로 비켜섰다.

 

  「이거 어색한데. , , 후지 선배, 생일 축하해요. 선배들이 이런 걸 찍으라고 해서…… , 웃지 말라고요. 다음에 가면 나랑 꼭 승부 내기에요. 그땐 무슨 일이 있어도 중간에 그만 안 둘 테니까. ……아무튼 생일 축하해요.

 

  누군가에게 촬영을 부탁한 모양인지 에치젠의 말 뒤로 웃는 소리가 함께 녹화되어 있었다. 여전히 테니스 생각밖에 없는 건방진 후배의 모습에 후지는 또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오자마자 에치젠이랑 시합하려면 나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는걸.”

  “! 그럼 이거 먹고 테니스 칠까냥?”

  “하하, 다들 테니스 생각밖에 없구나.”

  “그러지 말고 타카상도 같이 하면 어때? 후지랑 간만에 더블스 상대를 해주면 좋겠는데.”

  “오오, 찬성입니다, 찬성이에요! 그럼 카이도, 넌 나랑 붙자!”

  “.”

  “그럼 내 대전 상대는 테즈카가 되는군.”

  “아직 한다고는 말하지 않았다만.”

 

  평소와 똑같은 흐름이었다. 그래도 싫지 않았다. 간밤에 느낀 아쉬움이나 술렁거림은 아무 데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몇 년이 흐르든, 몇 십 년이 흐르든 이 사람들과는 늘 이런 대화를 나눌 것 같았다.

 

  “후후, 좋아. 일단 케이크부터 먹고.”

  “좋아, 그럼 먹을 준비부터 해볼까?”

 

  오오이시의 한 마디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두의 표정이 즐거워 보였다. 세이슌 중학교에서 보내는 2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4년에 한 번뿐인 생일을 축하하며.

 

내게 테니프리의 시작이었던 사람이자

내 꼬맹이의 영원한 연인.

 

후지 슈스케, 생일 축하해 :)

 

 

 

손만 잡고 잘게

                            후지 슈스케 드림

 

 

 

  눈이 내리는 겨울밤의 데이트는 커플을 로맨틱한 분위기로 이끌어가기에 좋았다. 공기는 차가워도 내리는 눈송이는 낭만적이고, 한껏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느라 반짝거리는 조명은 좀 더 황홀함을 선사하는 법이다. 그러니 늦은 밤이 되도록 거리에 돌아다니는 커플이 많은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후지 역시 여자친구와 함께 그 인파에 섞여 있었다. 조잘조잘 이야기를 늘어놓던 작은 입이 더 같이 있고 싶다고 작은 투정을 부리는 것도 후지에겐 예상한 바였다. 자연스레 두 사람의 발걸음은 후지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창문 너머로 눈 내리는 풍경을 즐기면서 둘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현관문을 넘어설 때에 그녀의 볼은 이미 붉게 물든 상태였다. 니트 모자에 귀마개, 목도리까지 칭칭 동여매고 손모아장갑까지 끼고 있었지만 드러난 부분은 차다 못해 얼음장 같았다. 상대적으로 따뜻한 후지의 손이 볼을 감싸자 그녀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추워.”

  “금방 따뜻해질 거야.”

 

  후지는 가볍게 입을 맞추고 돌아섰다. 거실에는 아직 냉랭한 공기가 감돌았지만 온풍기도, 고타츠도 제 역할을 해줄 것이었다. 다시 후지가 손을 내밀었을 때, 그녀는 훨씬 더 붉은 얼굴로 제 볼을 문지르고 있었다.

 

  “이건 반칙이야.”

  “후후, 그렇지.”

 

  그래도 마냥 좋은지 배시시 웃는 얼굴이 귀여웠다. 모자부터 코트까지 하나씩 벗은 것들이 옷걸이를 채워나갔다. 언젠가 후지가 선물로 주면서 맞춘 커플 목도리가 나란히 자리했다.

 

*

 

  잔뜩 긴장해 있던 몸이 노곤하게 풀리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꼬물꼬물 움직이며 쿠키를 먹던 손은 어느새 멈춘 채였다. 후지는 진즉부터 끔뻑끔뻑 느리게 깜빡이는 그녀의 눈을 알고 있었다. 결국 스르륵 내려가는 고개를 부드러운 손길로 붙잡고 후지가 속삭였다.

 

  “침대로 갈까?”

  “으응…… 졸려…….”

 

  무슨 뜻인지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대답하는 게 분명해 웃음이 났다. 문득 장난기가 발동했다.

 

  “걱정 마, 손만 잡고 잘게.”

 

  졸음으로 무거운 눈이 힘겹게 열렸다.

 

  “손만 잡아?”

 

  갸우뚱, 기울어지는 고개가 온통 의문을 표출하는 듯 보였다. 정말이지, 이런 점이 후지를 즐겁게 했다. 이 순진한 공주님은 지금 자신이 한 말이 후지의 한도 끝도 없이 짙은 소유욕을 얼마나 자극하는지 알까?

 

  “그럼 뭘 원해?”

  “안고 자고 싶은데.”

 

  자연스럽게 팔을 벌려오는 게 귀여워서 후지도 자연스레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대로 번쩍 안아 올려 침대까지 가는 것도 후지의 몫이었다. 정말 다른 뜻 없이 순수하게 안고 자고 싶다는 제 여자친구는 귀여운 정도가 지나쳤다.

 

  “일찍 일어나서 졸리지?”

  “, 얼마 못 잤어. 슈쨩이랑 잘래.”

 

  그녀를 먼저 침대에 눕혀주고 후지도 그 옆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익숙하게 품을 파고드는 등을 토닥였다. 금세 새근새근 잠든 그녀의 숨이 간지러웠다. 몇 시간이고 더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이었다. 후지는 그러는 대신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눈을 감았다.

 

  “잘 자.”

191115 드림 전력 <깜짝상자>

「이미 늦어버린」

테니스의 왕자 유키무라 세이이치 드림

 

 


  달그락 소리가 가득하던 실내에 딸랑
, 경쾌한 종소리가 울렸다. 가게의 문은 그 외의 다른 소리도 없이 깔끔하고 부드럽게 열렸다. 하지만 들어서려던 사람은 그 자리에 잠깐 멈칫했다. 여자는 가게 안을 둘러보는가 싶더니 천장을 쳐다보며 깊게 심호흡을 했다. 또각또각, 바닥에 부딪치는 구두 굽 소리가 어쩐지 시원시원했다.

 

  유키무라 세이이치는 그 모든 움직임을 하나하나 눈에 담고 있었다. 문이 열리던 순간보다 훨씬 더 먼저, 창 너머로 보이는 저쪽 길에서 걸어 내려오는 모습부터 말이다. 블라우스에 검은 민소매 원피스. 어쩐지 참 그 애답다는 생각이 드는 모습이었다.

 

  “기다렸어?”

  “후후, 솔직히 말할까?”

  “아니, 됐어.”

 

  그녀가 손사래를 쳤다. 뻔한 대답을 할 걸 알았다. 유키무라가 그녀를 아는 만큼, 그녀도 유키무라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차는 내가 알아서 시켰는데 괜찮지?”

 

  정말 퍼펙트한 타이밍이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점원이 찻주전자와 함께 차를 내려놓기 시작했다. 향긋하게 퍼지는 향이 긴장했던 마음도 누그러뜨려주었다. 유키무라라면 물론 그 효과까지 알아두고 차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래서 대답을 들어도 될까?”

  “본론부터야?”

  “. 난 오래 기다렸거든.”

 

  유키무라가 생긋 웃었다. 그녀가 어떻게 받아들이든 간에 유키무라에게는 사실이었다. 처음 눈에 들어 왔던 그 날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었는지는 혼자만 알 수 있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르지만 그 시간이 어떤 속도로 흐르는지는 개개인의 감각에 편차가 있는 법이다.

 

  “내 대답은 예스야.”

  “그 대답을 기다렸어.”

 

  찻잔 위로 뻗어온 유키무라의 손이 자연스레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꼭 깍지 낀 손이 따뜻했다. 찻잔으로 데워진 온기인지, 원래 그의 체온인지는 아직 모를 일이었다.

 

  “그럼 이게 정식으로 첫 데이트가 되겠네.”

 

  단단히 각오를 하고 나왔는데도 그녀의 심장은 멋대로 질주했다. 볼이 발그레해진 그녀가 꼬물꼬물 제 손을 빼내었다. 이렇게 미친 듯이 뛰는 심장박동을 전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바꾼 그녀가 도도하게 말했다.

 

  “차 마시고 뭐 할 건데?”

  “, 첫 데이트인 만큼 근사한 저녁부터?”

  “내 맘에 안 들면 도망갈 거야.”

 

  유키무라가 풋 웃었다. 장난스러워 보이면서도 조금……

 

  “이미 늦었어.”

  “뭐가?”

  “돌아가기엔 늦었다고.”

 

  그래, 욕심이 넘치는 웃음이었다. 독점욕과 집착이 뒤섞인 얼굴.

 

  “네가 그 문을 연 바로 그 순간부터 난 절대로 너를 놓지 않기로 다짐했거든.”

 

  유키무라의 말 그대로였다. 그녀는 그 표정을 보고 확신했다. 이미 발을 빼기도, 돌아가기에도 늦었다. 그렇다면 전적으로 유키무라를 향해 달리는 수밖에. 지지 않을 정도의 사랑으로 유키무라를 옭아매는 수밖에.

 

  “그래주면 나야 좋지.”

  “후후, 고마워.”

 

  금세 욕망을 지워내고 부드럽게 웃는 유키무라가 조금 얄미웠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그녀는 스스로의 의지로 이 카페에 들어섰다.

 

  “올 거라고 믿었잖아.”

  “믿는 거랑 현실은 다르지.”

  “말은 잘해요.”

 




170926 <DOLCE>

「신호」

키리하라 아카야 드림





 “그것 좀 그만해.”

 “왜?”

 “왜냐니…….”


 솔직하게 지금 당장이라도 널 침대 위로 넘어뜨리고 싶어서 그렇다고 하면 엉큼하다며 퍽 한 대 맞을지도 모를 일이다. 자주 그러니 입을 뗄 수가 없다. 하지만 아래서 올려다보는 눈빛이며, 아까부터 살금살금 내 손등을 간질이는 손끝을 도저히 참기가 힘들다. 눈이 금방이라도 충혈 될 것 같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테니스 할 때처럼 데빌화가 된다거나 그렇지는 않지만, 선배들이 말하는 ‘이성’ 같은 건 분명 없어지고 말 것이다.


 “일부러 그러냐?”

 “모르고 그러는 것 같아, 아님 알고 그러는 것 같아?”

 “되묻지 말고, 진짜.”


 약간, 아주 약간 미소 짓는 것처럼 보였는데 입술을 쭈욱 내민다. 불룩하게 부풀어 오르는 볼을 찌를까 하다가 그만둔다. 뭔가 기분 나쁠만한 일을 했나 싶어 초조하다. 갑자기 마음이 더 달아오른다.


 “아카야는 진짜 바보구나.”

 “뭐?”


 눈치를 살피려다 인상을 확 구긴다. 난데없이 바보 소리를 들으면 누구나 기분이 나쁘다. 그게 설령 나라도 기분은 나쁘다. 밥 먹듯이 선배들한테 놀림당한다고 익숙해질리 없다. 한숨을 푹 내쉰 그녀가 다시 내 손등 위로 손끝을 세운다. 간지럽다. 이유를 설명할 순 없지만 손등이 불타는 것 같다. 닿고 싶다. 그대로 키스하고 싶다. 어딘지 모르게 야하다.


 “자기가 좋을 땐 온갖 수단으로 덤벼들면서, 왜 이런 신호는 캐치를 못하나 싶어서.”


 손목을 타고 올라오는 손길에 온몸이 전율한다. 침을 삼키고 나니 혀가 제멋대로 입술을 핥는다. 이성이 약해진다는 걸 느낀다. 그래서 그냥 입을 맞추었다.

 코트에 서서 약한 바람을 맞고 있을 때가 딱 이런 느낌이다. 간지럽기는 한데 실체는 없고, 없었으면 하기 보다는 조금 더 이어졌으면 좋겠는, 그런 미묘한 기분 좋음.

 정신없이 혀를 섞는데 온몸에 전기가 통하는 듯 찌릿하다. 팔을 타고 올라간 손끝이 목뒤를 문지른다.


 “못 참겠어.”

 “참지 말라고 그러는 거야.”

 “손등에다 그런 짓 하면 앞으론 다 이 신호라고 생각할 거야.”

 “그래도 돼.”


 만족한 듯 웃는 얼굴이, 못 견디게 예뻐서 이젠 아무 생각도 나질 않는다. 그녀만 있으면 된다. 신호를 못 알아차린 나를 바보라고 부르든 말든 아무래도 좋다. 눈앞의 이 사람이 너무 좋아서 견딜 수가 없다.


 “헤헷, 그럼 사양 않고.”










170711 <DOLCE>

「선을 그어 주던가」

오오토리 쵸타로 드림



 차라리 당신이 선을 그어 주었더라면.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어요. 그럼 차라리 나도 마음을 접었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던 적이 있어요. 요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오늘 힘들었어? 다독여줄까?”


 지금도 그 생각이 드네요. 팔을 활짝 열고 품으로 들어오라는 듯 웃는 당신에게 나는 웃을 수밖에 없어요. 기뻐서 웃음이 나는 건지, 그냥 쓴웃음이 나는 건지 이젠 정말 모르겠어요. 그래도 나는 당신을 좋아하니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당신의 품에 안겨요. 겉보기엔 내가 당신을 안은 것처럼 보이겠지만 엄연히 당신이 나를 안고 있는 거예요.


 “안 좋은 일 있었어?”

 “아뇨. 그냥 기운이 좀 없어서요.”


 손이 내 등을 토닥일 때마다 빨라진 내 심장박동을 당신이 알아차리면 어떡하나 걱정이 돼요. 내 걱정을 모르는 당신은 내 머리 위로 손을 올려 머리를 쓰다듬기도 해요. 나는 얼굴을 작은 당신의 어깨에 얼굴을 묻어버려요.


 “쵸타로, 무릎 베게 해 줄까? 좀 잘래?”


 더는 안 될 것 같아 살짝 힘을 주어 당신을 밀어내요. 표정으로 되물어 오는데 어떻게 대답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선을 그어 주지 않는 당신이 고마운 동시에 원망스러워요. 당신이 나를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좋은, 혹은 편한 동생이라고만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어요. 나는 이 경계에 걸쳐져 있는 게 사실은 너무 힘들어요.


 “저한테 너무 경계심 없는 거 아니에요, 렌?”

 “그야 경계할 생각이 없으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이런 대답이요. 나를 대하는 당신에게서 난 ‘사랑’의 감정을 읽지 못해서 이렇게 망설이는데, 당신은 내가 ‘사랑’이라고 착각할 만큼의 거리를 내어줘요. 당신이 감정을 숨기는 데 능한 걸까요, 아니면 아무 생각 없는 당신에게서 내가 희망을 찾아내고 있는 걸까요?


 “가끔 엄청 너무하다고 생각해요.”

 “뭐가?”


 천연덕스럽게 되묻는 당신을 보면 말이 나오질 않아요. 결국 웃어버리고 고개를 내젓고 말아요.

 맞아요. 사실은 내가 아직 용기가 없는 것뿐이에요. 이 어중간한 관계를 확실히 타파할 만큼 확신을 갖지 못해서 어영부영 시간만 보내고 있어요.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아요.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괴롭긴 해도, 적어도 지금은 그 끝에서 당신이 웃으며 손을 내밀고 있거든요. 그래서 나는 차라리 떨어질 생각조차 하지 못해요.


 “그럼 무릎 빌려도 될까요?”

 “좋아, 오늘은 대 서비스.”


 당신이 탁탁 무릎을 치고 웃어요. 그 미소가 너무도 사랑스러워서 가슴이 아파요.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당신의 무릎에 머리를 뉘어요. 긴 손가락이 내 머리카락 사이를 쓸어내리고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요. 눈을 감고 당신의 손에 집중해요.

 시간이 이대로 멈춰 버리면 좋을 텐데. 선을 긋지 않는 당신에게 기대고 마는 나 자신이 한심해요. 그리고 선을 긋지 않는 당신에게 고마워요. 나는 그래서 오늘도 희망을 품을 수 있으니까.








170219 <당신의 수호천사>

「방해꾼」

유키무라 세이이치 드림




 “잠깐, 전해야 할 말이 있군. 지난 주 안건이다만…….”


 눈이 마주쳤을 때 역시 무시했어야 했다. 답지 않게 늦은 후회가 유키무라를 휘감았다. 그녀의 시선이 야나기에게로 돌아가는 게 여간 맘에 들지 않는 게 사실이었다. 아니, 맘에 들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짜증이 났다. 옆에 있는 게 야나기 렌지가 아닌 그 누구라도 싫을 것 같았다. 하지만 유키무라는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자제력을 발휘했다. 물론 그녀의 손은 놓지 않은 채였다.


 “그래서 내일 회의에서도 이 내용을 다뤄야 할 것 같은데.”

 “응, 그래야겠네. 지난 주 자료 좀 다시 정리해 줄래?”

 “물론. 그리고 내일…….”

 “렌지?” 


 거기까지가 최대였다. 학생회가 아닌 유키무라가 듣기에도 일단 지금 안건은 급해 보였으니 전달하는 건 이해했다. 하지만 그 이상을 봐 줄 만큼 제 성격은 좋지 않았다. 유키무라는 제 시야에 들어 와 있는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리는 걸 가만히 봐 줄 수 없었다. 그 시선을 받고 있는 게 비록 제 소중한 친구이자 동료일지라도 매한가지였다.

야나기의 시선이 유키무라에게로 돌아왔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실례했군.”

 “급한 거 아니면 나중에 할래? 나한텐 지금 되게 방해꾼이라서.”

 “세이이치.”

 

 눈이 휘둥그레진 그녀가 유키무라를 홱 쳐다보았다. 입술을 꾹 깨물고 화내는 듯한 표정이 유키무라의 눈에는 마냥 귀엽기만 했다. 유키무라는 대답하는 대신 꼭 잡은 손을 끌어당겼다. 두 사람 사이의 공간이 확 줄어들면서 더운 공기가 훅 유키무라의 목덜미를 덮쳐왔다. 그녀의 향수 냄새가 가볍게 섞인 그 공기마저도 못내 사랑스러웠다.


 “괜찮아, 틀린 말이 아니니. 이만 가지.”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야나기는 피식 웃었다. 이런 단어 선정이라도 야나기는 이해해 줄 거라는 유키무라의 예상이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야나기는 미련 없이 홱 뒤돌아 걸어갔다. 발걸음 소리가 조금씩 멀어져 갔다. 유키무라는 잡은 손을 풀어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냐? 친구한테.”

 “렌지라면 이해할 테니까.”


 유키무라의 말에 할 말이 없는지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앙 다문 입에 키스하고 싶다는 욕망이 솟아오르는 건 조금 눌러놓았다. 지금은 잠깐 빼앗겼던 그녀의 시선을 온전히 만끽하고 싶었다.


 “난 네 시선을 뺏기는 게 참 싫거든.”

 “손도 잡고 있었으면서 뭐가 그렇게 욕심이 많아.”


 투덜거리면서도 싫지는 않은지, 삐죽 튀어나온 입술의 끄트머리가 조금 올라갔다. 유키무라는 비어있는 손으로 그녀의 손에 깍지를 꼈다. 손등 위로 가느다란 손가락이 얽혔다. 손가락 끝이 가볍게 눌러오는 감각이 좋았다.


 “내 시야에 있는 동안은 확실하게 나한테만 관심을 쏟길 바라거든.”

 “진짜 독점욕 강하다니까.”

 “응, 넌 예쁘고.”


 쿡 부드럽게 웃고 있자니 그녀의 볼이 붉어졌다.


 “칭찬한 거 아니야.”

 “난 칭찬한 거 맞아.”


 아무래도 그녀를 괴롭히는 건 평생 그만둘 수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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