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즈의 어느 날

 

 “하아아아."

 

 길게 한숨을 내뱉으면서 그는 모자의 캡을 살짝 잡아당겼다. 햇빛이 강했다. 이런 땡볕에 서있게 하다니. 오기만 해 봐, 진짜 가만 안 놔둘 거야. 반팔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있었지만 찌는 듯한 더위는 가시질 않았다. 더군다나 여기는 오사카가 아닌가. 정말 끔찍할 정도의 더위였다.
 그 녀석을 못 알아볼 리가 없을텐데. 그는 고개를 좌우로 몇 번 흔들어가면서 주변을 살폈다. 여전히 빨간 머리는 눈에 띄지도 않았다. 흐응, 타임 오버. 그는 음료수라도 뽑을 생각으로 앉아 있던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 멍청이, 길 잃은 거 아냐? 여태까지의 전적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기에, 방금까지 심통이 나 있던 그는 금세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덜커덩, 캔 음료가 부딪치는 소리에 그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익숙한 포도맛 폰타. 고리를 젖혀 캔을 따고 나면 탄산이 올라오는 그 소리가 듣기 좋았다. 한 모금으로 일단 목을 축이고서 그는 다시 자판기를 바라보았다. 다른 생각을 하느라고 동전을 더 집어넣은 모양이었다. 그는 주머니를 뒤적여 동전 몇 개를 더 꺼내었다. 잠시 후, 폰타 하나를 더 손에 쥐고 그는 벤치로 돌아갔다. 다 마실 때까지 안 오면 정말 가야지.

 

 “코시마에!”

 

 아, 왔다.
 막 한 모금을 더 들이킨 찰나였다. 그는 벤치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 그 사고뭉치의 모습은 점처럼 보일 뿐이었지만, 목소리는 얼마나 큰지 발음 하나도 빠지지 않고 명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아, 그는 한숨을 쉬었다. 시끄러워. 게다가 부끄러워, 저 녀석.
 여전한 호피 사랑은 말릴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는 토우야마 킨타로를 보면서 에치젠 료마는 저 바보, 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속도도 줄이지 않은 채 그대로 달려오는 모습에 그는 자신에게 달려들 것까지 예상하고 몸에 힘을 잔뜩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킨타로는 그 속도 그대로 점프까지 해서 료마의 목에 매달렸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얼굴 한가득 터질 것 같은 미소를 머금은 킨타로는 료마를 세게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코시마에~ 오랜만이데이!”
 “너 늦은 거 알고는 있는 거야?”
 “아, 미안하데이. 내 뛰쳐오다가 쪼끔 헤맸다!”

 

 역시나. 매달려서 떨어질 줄 모르는 킨타로를 밀어내면서 료마는 뒤로 잔뜩 젖히고 있던 허리를 바로 세웠다. 킨타로도 그제야 그의 목을 놓아주고는 똑바로 섰다. 머리를 긁적이면서 환하게 미소를 짓던 킨타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킨타로는 고개를 쭉 빼고 료마를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한 번 찬찬히 훑었다가 다시 아래서부터 위로 올라왔다.

 

 “어레?”
 “왜 그래?”

 

 퉁명스럽게 내뱉으며 킨타로와 눈을 마주친 료마는 순간 움찔했다. 어라? 킨타로가 알아차린 사실을 료마도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킨타로가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가 그 위치 그대로 앞으로 내뻗었다. 료마는 그 손이 닿기 전에 휙 고개를 뒤로 빼내었다.

 

 “코시마에, 니 은제 이래 작아졌나?”
 “윽, 바보야, 작아졌을 리가 없잖아. 니가 큰 거지.”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는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엄연한 키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분명 료마가 미국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키가 비슷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눈에 띌 정도로 킨타로가 컸다. 윽, 소리를 내뱉으며 료마가 살짝 뒷걸음질쳤다. 거짓말. 정말 저 녀석이 더 크단 말이야? 말로는 꺼낼 수 없는 그 묘한 분함이 료마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는 고개를 팩 돌리고 마시던 폰타를 쭉 들이켰다. 탄산이 목을 톡톡 쏘아댔지만 꾹꾹 참고 넘겼다. 그 모습에 목이 말랐는지 킨타로가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료마의 한 손에 들린 폰타에 머물렀다.

 

 “아, 코시마에, 그거 내 줄끼가?”
 “아니.”

 

 매몰차게 대답한 료마는 다 마신 캔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는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캔도 마저 땄다. 왠지 열받아. 왜 저녀석만 더 컸지? 미국에 가 있는 동안 그가 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도 1cm는 더 커서 돌아온 셈이니까. 하지만 킨타로는 적어도 5cm는 더 큰 것 같았다. 먹기도 잘 먹는데 왜 나는 안 크지?

 

 “뭐꼬, 두 개 들고 있었음서. 욕심쟁이래이.”
 “흐응, 늦은 녀석한테는 줄 거 없거든.”
 “우우~ 알았데이! 내 늦었으니까는 타코야끼 사주께!”

 

 료마의 등을 떠밀며 킨타로가 발을 떼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따라 발을 떼면서 료마는 홀짝홀짝 폰타를 들이켰다. 그가 슬쩍 곁눈질로 킨타로를 훑어보았다.

 

 “근데 너, 얼마나 큰 거야?”
 “내도 잘 모른데이. 쩌언에 신체검사 했을 때는 백칠십……칠? 이라 카던데?”
 “하?”

 

 그가 미국에 가기 전의 키는 170cm에 조금 못 미쳤다. 그럼 이 녀석은 도대체 얼마나 큰 것이란 말인가? 또 한 번 열받아, 라고 생각하면서 료마는 또 벌컥벌컥 폰타를 들이켰다.

 

 “뭘 먹고 그렇게 크는 거야.”
 “내는 뭐든지 잘 먹는다! 편식은 안 좋대이!”
 “누가 그걸 모르냐.”

 

 료마는 여전히 툴툴거리고 있었지만, 킨타로는 뭐가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간만에 만나는 친구가 그리도 반가운 모양이었다. 따로 말도 하지 않았건만 마치 약속한 것처럼 테니스백을 메고 온 료마를 보며 역시 통한다고, 킨타로는 느끼고 있었다. 사선으로 오게 맨 가방 끈을 양손으로 꼭 쥐면서 킨타로가 료마를 쳐다보았다.

 

 “이따 테니스 치러 갈 끼제?”
 “내가 이기겠지만.”
 “그건 해봐야 아는기래이!”

 

 

(2012. 06.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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