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오늘
야규 히로시 드림
(쿠칭님 생축 글)
“그렇게 매번 제가 취하는 것에 집착하시는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나만 취하면 뭔가 치사하잖아!”
‘치사하다’는 단어의 선택이 참 그다워서 야규는 풋 웃고 말았다. 동시에 그 말이 어느 정도는 맞는 것 같아 또 웃음이 났다. 제 여자 친구인 토와는 취하면 평소의 배로 귀여웠고, 마음을 표현하는 데도 솔직해지니 야규로서는 나쁠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토와의 표현을 빌려 ‘술을 궤짝으로 들이켜도’ 취하지 않는 야규는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이른바 ‘풀어진 모습’을 원하는 토와에게 보답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술을 잘 마셨대요? 위장에 술 대신 마시는 괴물 같은 거 있는 거 아냐?”
“그럴 리가요. 그리고 지금은 전보다는 주량이 좀 줄었는데요.”
“거짓말! 야규상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쳐다보던 토와가 금세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디서 거짓말을’이란 말이 담긴 눈빛에 야규는 다시 웃으며 한 모금을 머금었다. 실제로 주량은 약간이지만 줄었다. 아마 한동안 업무가 바빠진 탓에 술을 입에도 대지 않은 기간이 길어진 게 원인일 것이다. 남들에게는 티도 나지 않을 만큼이지만 당사자는 알았다. 술고래들만 모여 있는(키리하라를 제외해야겠지만) 릿카이 테니스부의 회식에 가면 자연스레 알 수 있었다.
“요컨대 취한 게 아니라 취해서 풀어진 모습이 보고 싶으신 것 아닙니까?”
“같은 말 아니에요?”
“취하지 않더라도 풀어진 모습은 보여드릴 수 있는데요.”
연신 웃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잔뜩 찡그린 토와의 미간이 돌아올 줄을 몰랐다. 야규는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검지로 가볍게 토와의 미간을 눌렀다.
“인상 펴시지요.”
“야규상이 자꾸 이상한 소리 하잖아.”
“별로 이상한 소리는 아닙니다만. 전 지금도 충분히 풀어져 있습니다.”
중학생 시절의 야규라든가, 혹은 갓 대학생이 된 야규라든가, 아무튼 이전의 제가 보면 놀라서 말을 잃어버릴 만한 변화라고 생각했다. 편안한 옷을 입고 연인의 옆에 앉아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으면서 홀짝홀짝 술을 들이켜는 시간. 아무것도 고민하지 않고, 어떤 목적도 없이 그저 순간에 충실한 시간을 보내며 웃는 자신을 향해 과거의 자신은 뭐라고 할지 궁금했다. 과연 그 과거의 자신도 다람쥐같이 작고 귀여운 이 사람을 보고 같은 생각을 할지 궁금했다. 그리고 문득,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은 온전히 제 것이군요.”
뜬금없는 소리에 의문을 던지는 눈빛도, 술기운에 발그레 달아오른 볼도, 막 술을 마신 탓에 촉촉하게 빛나는 입술도, 잔을 놓지 않아 더 차가워졌을 손도 전부 나의 것.
“뭐래요?”
“과거의 저에게도 토와를 양보하고 싶지 않다는 걸 깨달아서요.”
“야규상, 취했어?”
“글쎄요.”
“왜 갑자기 그런 소릴 해요?”
토와의 입가로 다가오는 잔을 손바닥으로 막고, 야규는 그 잔을 빼앗아 들었다. 마지막 남은 한 모금을 머금자 불만을 토로하는 소리가 올라왔다. 하지만 그 이상의 반응은 없었다. 토와의 취기가 딱 적당히 오른 것을 알기에, 야규는 망설임 없이 입을 맞추었다.
입을 떼며 토와의 턱을 타고 흐르는 술을 손가락으로 닦아냈다. 그때까지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야규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고 있던 토와의 얼굴이 급격하게 달아올랐다. 술독이 오른 것과는 분명 다른 붉은 색이었다.
“뭐, 뭐, 뭐, 뭐예요?”
“토와,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아니, 그건, 어, 그건…… 나, 나도, 뭐, 사랑해요.”
쿡쿡 낮게 웃던 야규가 그대로 토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웃느라 어깨가 들썩이는 통에 어정쩡하게 그를 끌어안은 토와의 얼굴도 덩달아 흔들렸다.
“왜 웃어요?”
“귀여워서요.”
“지금은 야규상이 더 귀여운데.”
“그렇습니까? 그럼 어쩌면 오늘은 치사하지 않은 걸 수도 있겠군요.”
웃음이 잦아들자 토와가 야규의 어깨를 밀어냈다. 순순히 몸을 일으키면서 바라본 토와는 황당하면서도 웃긴다는 표정이라 피식 또 웃음이 났다. 시계가 이제 막 열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야규는 토와의 왼손에 깍지를 꼈다. 손끝이 차가웠고, 손바닥이 물기 때문에 약간 축축했다. 손가락 위로 가볍게 입을 맞추자 토와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야, 지금 나한테 귀여움 어필하는 거예요?”
“당신의 생일을 맞이하는 소소한 선물이라고 해 두지요. 유혹이라고 해도 좋고요.”
“미쳤나 봐.”
그런 소리를 하면서 토와도 키득키득 웃었다. 자잘하게 몇 번 더 토와의 이마에, 콧잔등에, 입술에 입을 맞추며 자연스레 야규는 테이블을 밀어냈다. 축하해야 할 생일이 이제 막 시작된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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