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표용 조각리퀘 - 입술, 눈웃음, 횡설수설

     토쿠가와 카즈야 드림 (For. 라님님)




 그는 말이 별로 없다. 자신과 함께 있을 때에도 그는 겨우 대답만 하는 정도일 뿐이다. 그래, 라던가 음, 혹은 알겠다. 도대체 이런 짧은 단어들로 어떻게 대화가 전부 진행되는 것일까. 처음엔 답답했지만 지금은 나름대로 익숙해졌다. 물론 긴 대화를 하고 싶을 때도 있다. 그래, 예를 들자면 지금.


 “그래서 말임다…….”


 재잘재잘. 그와는 비교 되게 말이 많은 이 녀석. 그래도 대화를 하다보면 재미있다. 문득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 돌아보았다. 그가 서 있었다. 라켓을 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어라, 지금 화난 건가. 움츠러들려다가 원인을 깨달았다. 웃음이 날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저벅저벅, 그가 다가왔다. 검은 머리카락이 그의 움직임에 맞춰 들썩거렸다. 다가오는 그가 압도적인 모양인지, 테이블의 반대쪽을 차지하고 있던 녀석이 쏜살같이 달아났다. 달그락. 어느새 눈앞에 서 있는 그가 라켓을 내려놓았다.


 “토쿠가와상, 혹시 질투해요?”

 “무슨…….”


 얼굴이 붉어졌다. 솔직한 사람이다. 나도 모르게 킥킥 웃음이 났다. 결국 참지 못하고 고개를 한쪽으로 돌렸다.


 “질투를 한다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다만 네가 다른 남자와 대화를 하고 있어서 신경 쓰였을 뿐이다. 아니, 그게 신경에 거슬렸다는 소리는 아니지만.”


 이렇게 길게 말하는 그는 처음 봤다. 물론 횡설수설하고 있지만. 놀라서 쳐다보고 있자니 본인도 당황했는지 자꾸 말을 더 늘어놓았다. 어쩌고저쩌고. 결국 질투를 하는 건 아니라는 이야기가 하고 싶은 모양이지만 꺼내놓는 뒷말은 자신의 논리를 자꾸 깨부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자꾸만 웃음이 났다.


 “있잖아요, 토쿠가와상 이렇게 말 많이 하는 거 처음 봤어요.”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입을 딱 다물고 있는 게 스스로도 놀란 모양이었다. 마냥 웃고 있었더니 그의 미간이 더 좁혀졌다.


 “그것도.”

 “네?”

 “다른 남자에게, 그렇게 눈웃음치지 말았으면 하는데.”


 질투하는 그가 너무 좋아서, 귀여워서 굴러다니면서 웃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까지 하면 분명 삐치겠지. 굴러다니는 건 집에 간 뒤로 미뤄두고 그의 쪽으로 바싹 붙어 앉았다.


 “아까는 이렇게까지 안 웃었어요.”


 쳐다보는 눈이 강렬했다. 피하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으니까. 계속 마주보고 있었더니 그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얼굴이 가까워졌다.

 어라, 싶은 찰나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어안이 벙벙했다. 눈만 깜빡거리면서 그를 쳐다보았다. 방금, 내 입술에 키스한 거야? 뒤늦게 상황파악이 되어서인지 얼굴이 훅 달아올랐다. 더워.


 “그렇다면 다행이고.”


 다시 라켓을 들고 그가 일어났다. 긴 다리로 휘적휘적 코트를 향해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심장뛰는 소리로 귀가 먹먹했다.





(2014. 07. 08.)







히요시 와카시에게 하극상이란

     히요시 와카시 드림 (For. 수면님)


 “왜 아직도 이러고 계시는 겁니까, 하야시상.”


 취재를 하고 온 건 분명히 나일 텐데. 무언가에 엄청 열중하고 있는 모습이 귀여워 보여서 그냥 뒤에 서 있은 지 오 분쯤 지난 후였다. 내가 뒤에 서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던지 하야시상의 어깨가 번쩍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휙 돌아오는 얼굴에는 놀란 표정이 선했다.


 “언제 왔어, 히요시군?”

 “찬바람 부는데 문을 열어놓으니까 사람이 들어오는 것도 모르는 겁니다.”

 “안 추운데!”


 들고 있던 카메라를 책상 위에 내려놓자,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하야시상이 카메라를 손에 쥐었다. 다른 선배들이었다면 인상을 찌푸리게 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야시상이라면 그다지 상관없었다. 그녀는 나를 못미더워 하거나 선배 특유의 오지랖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니까. 그녀는 정말 순수하게, 항상 누군가의 일을 도와주고 있다. 가끔 보면 바보 같을 정도이기도 한데, 그렇다고 무작정으로 상대방을 돕는 것은 또 아니다. 자신 나름의 기준이 있는 것 같으니까.


 “와! 사진 잘 나왔다. 히요시군 역시 사진 잘 찍는구나.”

 “감사합니다. 그러는 하야시상은 기사를 더 잘 쓰시잖아요.”

 “엥, 아닌데. 나보다는 코우노쨩이 더 잘 쓰지 않나?”

 “하야시상도 잘 씁니다.”

 “음~”


 노트북에 케이블을 꽂다 말고 또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가만히 쳐다보다가 그녀가 시선을 느낄 것 같아져서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아직까지는 그녀에게 들키고 싶지 않다. 귀엽고 발랄한 그녀는 내가 생각하는 청초한 사람과는 조금 달랐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하야시상을 마주하고 있으면 가슴 속이 마구 요동치는 게 꼭 테니스 시합 전만 같았다. 그런 설렘을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아하는 이유가 된다.


 “히요시군도 기사 잘 쓰잖아? 히요시군이 얼마 전에 쓴 기사도……”

 “그건 하야시상이 취재해 놓은 걸 정리했을 뿐인데요.”

 “으음~”


 이럴 때면 나도 모르게 입버릇이 나가고 만다.


 “하극상…….”


 하야시상이 멋쩍게 머리를 긁적인다. 말없이 그녀가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다. 아마 카메라에서 사진을 옮기는 중이겠지. 날이 좋아서 인터뷰를 하던 중간중간 사진을 몇 번 찍었는데 모두 잘 나왔다. 덕분에 기분이 좋았다. 아무도 없는 보도위원실에 하야시상이 혼자 날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더욱 기분 좋지만. 본격적으로 기사를 쓰기 위해 또 다른 노트북 앞에 앉았다. 인터뷰했던 내용을 떠올리면서 공책을 펼쳤다.




 여름 방학을 앞두고 있는 어느 방과 후에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보도위원실에 있었다. 하야시상도 함께였다. 단 둘이 보도위원실에 있게 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보통 어색함의 극치를 달려야 할 그 순간에 나는 그녀에게 신경을 끈 채로 내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카메라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다. 주변을 살피지 않은 내 실수지만.


 「우와, 히요시군 사진 진짜 잘 찍었어! 굉장해!」


 갑작스러운 외침에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사실상 하야시상을 제대로 본 게 처음이어서 그랬는지 상당히 긴장이 되었다. 하야시상의 눈은 매우 반짝거렸다. 반짝거리다 못해 별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평정심을 되찾기 위해 창문 너머를 노려보고 있어야 할 정도였다.


 「그, 그정도는 기본입니다.」

 「굉장하다! 나 사진은 잘 못 찍거든.」


 굉장하다.

 귀에서 몇 번이고 그 말이 울렸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계속 그녀의 목소리가 울렸다. 굉장하다고 했던가? 처음 듣는 말도 아니었지만 설렜다. 가슴이 쿵쿵거렸다. 심장이 쿵쿵거리지 않는다면 물론 문제가 되겠지만, 귓가를 가득 채울 정도로 쿵쿵거렸다.


 「히요시군은 테니스도 잘 한다고 하지 않았어? 다재다능하구나~」

 「하극상을 보여줘야 할 사람이 있으니까요.」

 「하극상?」


 그래. 언젠가는 아토베상을 꺾고 내가 단식 1번 자리를 차지해야 하니까. 뒷말은 삼키고 인사 대신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돌아서는 뒤로 그녀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뭔진 잘 모르지만 응원할게! 히요시군이라면 잘 할 거야!」


 뭔지도 모르고 응원을 하는 게 어딨습니까, 하야시상. 그렇게 말하려고 했는데 그냥 웃고 말았다. 이유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하야시상의 뒤로 내리쬐는 햇볕이 따뜻해보여서일 수도 있고, 그 햇볕을 받고 서 있는 하야시상이 여신처럼 빛나보여서일 수도 있고.





 “하극상이 아닌걸.”

 “네?”


 뜬금없는 하야시상의 한 마디가 잔잔히 떠오르던 추억에서 날 꺼내왔다. 그 날처럼, 나는 또 화들짝 놀란 것이다. 시선을 돌리자 바로 하야시상의 얼굴과 마주했다.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하는데 이렇게 똑바로 쳐다보고 있으려니 진정이 되질 않는다. 안 그래도 설레는데 그녀의 말은 내 마음에 너무 큰 파장을 일으킨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죠, 하야시상?”

 “하극상이 아니라는 거야.”

 “제가 하극상을 할 수 없다는 뜻입니까?”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항상 밝게 웃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진지해진다. 원래도 표정을 많이 드러내지 않긴 하지만, 덩달아 나도 표정이 굳었다. 내심 불안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다. 상대방의 동작을 읽고 다음 동작을 유추해 낼 수 있는 고무술과는 너무 다르다. 사람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야시상이 어떤 말을 할지 몰라서 전전긍긍하는 이 순간이 너무 간질거려서 참기가 어렵다.


 “왜냐면 히요시군은 내 아래에 있는 게 아니니까.”


 그녀가 눈을 깜빡거린다. 나는 벙어리 같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그녀보다 어린 내가, 여전히 후배 취급을 당할 뿐인 내가, 언제나 그녀에게서 귀엽다는 듯한 시선을 받는 내가 뭐라고? 나도 눈만 깜빡거린다. 대답을 않은 채로 그녀를 쳐다보고만 있었더니 그녀가 평소처럼 다시 웃었다.


 “히요시군은 굉장한 사람이야. 난 항상 나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데!”


 다시 할 말을 잃었다. 내가 하야시상보다 낫다는 말입니까? 이 놀라운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물론 나도, 그녀도 이제 겨우 중학생일 뿐이지만 어쨌든 그녀가 나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들었다. 당연히 배운 것도 많겠지. 그런데도 나를 더 낫다고 생각한다니. 어떻게 해야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걸까? 그녀를 바로 이해할 수가 없어서 잠시 생각을 멈췄다.


 역시 굉장한 건 하야시상이야. 하극상을 일으키고 싶다고 여길 만한 사람이다.


 당신은 왜 그렇게 생각하지? 나는 왜 이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지? 나는 왜 아직도 이렇게 어린애일 뿐이지?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하야시상이 부럽다. 겨우 이런 내가 못나보여서, 그녀가 나를 내칠까봐 스멀스멀 두려움이 밀려온다. 이런 내 자신이 화가 난다.


 “당신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서 화가 납니다. 저는 왜 이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나 싶어서요. 그래서 하극상이 하고 싶어지는 거예요, 하야시상. 다른 어떤 걸 다 떠나서도 제가 하야시상보다 어리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잖아요. 평생 저는 이렇게―”

 “왜 평생이야?”


 굉장히 아무렇지 않게 한마디를 한 당신이 웃었다.


 “나이가 중요한 건 아니잖아. 평생 가도 히요시군이 나보다 한 살 어리긴 하겠지만 그게 꼭 히요시군의 모든 것이 나보다 아래라는 뜻은 아닌걸.”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한 말이지만 괜히 가슴이 쑤신다. 그 점도 마음에 안 듭니다, 하야시상. 제가 아무리 어른이 되고 싶어도 하야시상보다 어리다는 거.


 “아까도 말했지만 난 나보다 히요시군이 낫다고 생각해 누군가를 뛰어넘고 싶다는 것도 어찌 보면 그 사람의 굉장함을 히요시군은 인정하고 있다는 거잖아? 그것만으로도 이미 히요시군은 굉장하잖아!”


 여름의 보도위원실이 다시 생각난다. 굉장하다고 말하던 그녀와 당황했던 나. 그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든다. 피식 웃었더니 하야시상이 눈을 빛낸다. 그리고 덥썩 내 손을 잡았다. 놀라서 어깨가 위로 솟을 뻔 했지만 간신히 눌러 참았다.


 “그러니까 하극상이 아니라, 서로에게서 더 좋은 부분을 배워나가는 거야.”


 동의를 구하는 듯한 그녀의 눈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히요시 와카시, 이게 무슨 짓이야. 어딘지 부끄러워져서 볼이 붉어질 것만 같다. 시선을 슬쩍 피했더니 하야시상은 베시시 웃어보인 뒤 손을 놔주었다. 만족하고 돌아서는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도 역시 당신은 나보다 위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인 점이 바로 내 하극상의 이유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당신을 나는 좋아한다.


 “얼른 하고 가자. 금방 해 질 것 같아.”

 “네, 그러죠.”


 천연덕스럽게 웃는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 정말이지 그건 예쁘다는 말, 아니 아름답다는 말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고무술의 동작이 깔끔한 곡선을 그었을 때보다 , 손끝이 날렵하게 허공을 갈랐을 때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래서 당신이 좋다. 손을 대면 잔잔한 물결파동이 일 것 같은 수면과도 같은 당신이 좋다. 하지만 고백은 조금만 더 후에. 그건 하극상이 아니라고 말하는 당신의 앞에서 조금 더 당당해질 수 있을 때에.





(2013. 10. 29.)









민트향

     시시도 료 드림




 민트향이었다.

 비가 온 뒤라서 그런지 키가 작은 풀숲에서는 민트향이 났다. 그냥 평범하게 물에 젖은 풀 냄새일 뿐이었지만 왠지 민트향처럼 느껴졌다. 민트를 좋아해서 그런 걸까? 아니, 딱히 그런 게 이유는 아니더라도 지금 맡은 풀냄새는 정말 민트에 가까웠다. 무언가 향긋하면서도 코를 맑게 하는 그런 냄새였다.

 공원을 뛰는 동안 풀숲이 가까워졌다 멀어졌다를 반복했고, 그만큼 민트향도 가까워졌다 멀어졌다를 따라했다. 누군가가 생각나려고 했다. 짧은 머리긴 했지만 홱 고개를 돌릴 때 살짝 흩날리면서 보이는 볼에 왠지 시선이 늘 닿았다. 씨익, 즐겁게 웃는 그녀는 왠지 모르게 민트향을 닮아 있었다.


 "야호, 료."

 "정말 왔어?"

 "그럼 가짜로 오냐?"


 세트로 된 가벼운 민트색 트레이닝복 차림이 꽤나 잘 어울려서 시시도는 잠시 감탄했다. 가뜩이나 마른 몸매가 트레이닝복 때문에 더 말라보이는 것 같았다. 조금 더 잘 먹어도 될텐데, 라고 생각하자마자 그녀가 이미 충분히 잘 먹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시시도는 말 없이 발을 떼었다. 그리고 그녀도 함께 발을 떼었다.


 "따라올 수 있겠냐?"

 "물론이지. 그 정도도 못 할 것 같아?"


 씩씩하게 웃어보이는 모습에 시시도는 피식 웃었다. 타박타박 소리만 공원을 울렸다. 강한 민트향이 코를 찔렀다. 아, 역시. 시시도는 곁눈질로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다시 미소지었다.

 뭐, 민트는 좋아하니까 말이야.




(2012. 11. 09.)









가지 마

     후지 슈스케 드림


 무겁게 들어올려진 손이 간신히 그의 옷깃을 붙들었다. 작고 작은 손의 묵직함이 그에게도 전해졌다. 간신히 자켓을 붙잡기까지 그 복잡하게 꼬인 뇌에서, 쿵쾅대는 심장에서, 제멋대로인 신경계통에서 얼마나 많은 혼란이 만들어졌을까. 그리고 그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그는 그 묵직하지만 아주 힘없는 부름에 응해주었다. 그저 그 자리에 멈춰선 것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녀에게는 충분했다.


 “가지마…….”


 입 안에서 다시 씹어삼킬 생각인지 말들은 제대로 그녀의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냥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의 의중을 어느정도 알아차릴 수 있는 사고의 소유자인 후지 슈스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우물쭈물하느라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있는 그녀는 감정이 얼굴뿐 아니라 온 몸에 드러나는 성격이었다.


 “응? 뭐라고 했어? 잘 안 들렸거든.”


 웃는 낯인 그가 돌아보았다. 반면에 그녀는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세상 모두가 알아듣지 못했다 해도 그만큼은 알아들었을 거라는 걸 그녀는 확신했다. 하지만 굳이 다시 묻는 그의 성격도 알고 있기에 그녀는 다시금 입에서 말들을 짜 맞추기 시작했다. 용기가 없어서는 딱히 아니었다. 똑같은 말이라도 그냥 칭얼거리듯 뱉어낸 적은 훨씬 많고 그녀는 보통 칭얼거리는 편이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오래 함께 있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이 아니던가.


 “우……”


 아무 말 없이 그는 웃고 있었고, 그녀는 울먹거렸다. 부끄러워서 말이 도통 나오지를 않았다. 집에 혼자 있으니 자고 가라는 소리가 뭐가 이렇게 어렵단 말인가. 전에도 곧잘 혼자 있으면 무섭다면서 그를 부르지 않았던가. 그 때와 별로 다를 것 없이 똑같이 그를 부르는 것이다. 상황도 똑같았다. 변한 게 있다면 그와 그녀의 사이랄까.


 “집에 혼자 있으니까 자고 가…….”


 조금 더듬거리긴 했지만 그녀는 문장을 완성할 수 있었다. 중간에 흘리듯 목소리가 작아진 것도 같지만 일단은 다 말했다는 것에 의미를 두기로 했다. 제멋대로인 그녀를 컨트롤할 수 있는 그는 역시 굉장하다고 그녀 스스로도 생각했다.

 아까 전보다 조금 더 환하게 그가 웃었다. 응, 하고 짧게 대답하면서 그는 툭 그녀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손길이 싫지 않아 그녀는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


 “역시 직접 듣는 게 좋잖아. 그렇지?”

 “우, 그치만 부끄러운 걸…….”

 “음, 뭘 생각했길래 부끄러운 걸까나?”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장난스럽게 그는 쿡, 하고 웃었다. 물론 뒤에 농담이라고 덧붙여주는 것도 그는 잊지 않았다. 그리고 후지는 가볍게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밤바람은 차니까. 들어가자.”

 “응. 헤헤.”




(2012. 11. 22.)







141128 :: 키쿠마루 에이지 생일 축하해!

 

* 연예인 패러렐 주의 (테니뮤 패러렐에 가깝습니다...)
* 테니뮤 세컨드 시즌이 절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무대는 참으로 조용했다. 모든 것이 끝나고 난 뒤의 무대는 이렇게 적막했던가 하는 생각이 키쿠마루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평소에 공연하던 곳보다 더 커서 그런 게 아닐까. 무대에 털썩 주저앉아서 천천히 사방을 멀리 둘러보았다. 이 무대에서부터 저 끝에, 제일 꼭대기에 있는 자리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누군가 보면 참 쓸데없는 걸 고민한다고 여길 지도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 키쿠마루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저 자리에 앉았던 사람은 무대 위에 선 우리가 어떤 크기 정도로 보였을까? 공연을 하는 동안에는 그렇게 멀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손을 쭉 뻗으면 닿을 것처럼, 파랗게 관객석을 수놓은 팬라이트의 불빛이 무척이나 가깝게 느껴졌다. 사실상은 한참을 뛰어올라가야 하는 거리가 공연 중간에는 전혀 멀지 않았다. 신나게 웃었고 즐거웠고 더없이 행복했다. 그리고 조금 쓸쓸했다. 이젠 이 무대에 설 일은 없겠구나. 쓸쓸했고, 그보다 조금 더 이상했다.

 

 「잘 부탁해!」

 

  에이지라고 부르면 돼, 하고 웃었을 때 자신을 향해 똑같이 웃어 보이며 손을 내밀어 준 건 오오이시였다. 얘가 앞으로 내 파트너구나. 누구나 처음엔 다 긴장하는 법이라고 하지만 그런 건 키쿠마루 에이지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긴장보다는 새로운 만남과 새로운 무대에 더 들떴다. 다만 테즈카 앞에서는 잠깐 긴장했다. 그보다 나이가 많은 선배라고 생각했던 탓이었다. 그 말을 들은 모모시로가 어찌나 자지러지면서 웃어댔는지 잊을 수가 없었다. 키쿠마루는 무대를 위한 훈련 기간 동안 유난히 모모시로가 힘들어했던 이유에 분명 테즈카의 복수가 있을 거라 굳게 믿었다.
 그게 어느새 몇 년 전 이야기가 되었다니 스스로도 믿을 수 없었다. 사실 몇 년을 똑같은 무대에 섰다는 사실 자체도 신기했다. 그다지 긴 시간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나니 이렇게 긴 시간이 흘러 마지막을 맞이했다. 아직도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무대 하나가 끝났으니 며칠 휴일을 가진 다음에, 다시 연습장에 모여 스트레칭을 하고, 가볍게 뛰고, 새 안무를 배워야 할 것 같았다. 며칠 뒤에는 분명히 소스라치게 놀라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날 게 뻔했다. 으악, 지각이야! 하고. 하지만 곧 연습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멍하니 앉은 채겠지. 며칠 뒤를 떠올리니 더더욱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키쿠마루는 홱홱 고개를 저었다.

 

 “에이지, 여기서 뭐 해?”
 “그냥 보는 중.”

 

 키쿠마루는 자신의 옆 자리를 팡팡 쳤다. 평소와 같은 미소를 지으며 오오이시가 다가와 앉았다. 커다랗고 빈 무대 위에 두 사람이 있었다.

 

 “별로 끝난다는 실감이 안 난다냥.”
 “나도 그래.”
 “이 멤버가 다 같이 모여서 또 연습하기는 아마 어렵겠지?”

 

 대답하는 대신 오오이시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당연하게 해 왔던 모든 게 바뀌게 될 것이다. 키쿠마루는 그게 어딘지 자꾸 자신의 마음을 간질여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항상 인사는 “내일 봐!”거나 “다음 연습 때 봐!”였는데. 물론 다른 무대에서 다시 보게 될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 모두가 다 같이 다른 무대에서 만날 가능성은 희박했다. 가족이나 다름없던 사람들이었다. 매일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서로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도 제일 잘 알고 나서주던 사람들. 다시 코끝이 찡했다. 웃으면서 끝내자고 말한 건 무대 위에 있던 자신들이었다. 최대한 웃었다. 물론 정말 다른 말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했기 때문에 웃음이 났다. 하지만 모든 무대가 끝나고 난 지금 느끼는 기분은 뭐라고 설명할 수 없었다. 엄청나게 행복한데 섭섭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면서 슬프기도 하고. 복잡하고도 미묘해 보이는 그 표정을 오오이시는 놓치지 않았다.

 

 “복잡한 기분이지?”
 “오오이시도 그러냥?”
 “응. 무척.”

 

 키쿠마루는 앉은 자세에서 앞으로 손을 쭉 뻗었다. 아직 빼놓지 않은 파란색 손목 밴드가 눈에 들어왔다.

 

 “에이지. 정말 고마워.”
 “응?”
 “넌 정말 최고의 파트너였어.”
 “뭐, 뭐다냥, 갑자기!”

 

 왠지 부끄러워져서 손사래를 쳤지만 키쿠마루도 내심 기뻤다. 다행이다. 비죽비죽 웃음이 새어나왔다. 키쿠마루의 표정을 보더니 오오이시는 또 피식 웃었다. 오오이시의 시선도 관객석을 향했다. 아까와는 다른 조용하고 차분한, 공기만이 내려앉은 관객석을 보는 눈이 어딘지 반짝거려 보였다.

 

 “마지막까지 최고를 보여줬으니까 우린. 아쉬움 같은 거 남기지 않게끔 최선을 다했으니까 그걸로 괜찮을 거야.”
 “우와, 오오이시 지금 엄청 오글거려.”
 “아, 그런가.”

 

 머쓱하게 오오이시가 머리를 긁적였다. 키득키득 웃었지만 키쿠마루도 그 말에 동의했다. 진짜 이게 정말 최후, 마지막의 마지막이니까 남은 걸 전부 다 쏟아 부을 작정이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온 힘을 다했다. 좀 더 잘 할 걸, 그런 종류의 감정은 남지 않았다. 행복하게 웃으면서 끝났다.

 

 “그래도 진짜 열심히 했어.”
 “절대로 못 잊을 거야, 관객석.”
 “그치? 엄청 파래서, 막 여기서부터 저어기까지 다 파래서 진짜 신기했어.”
 “엄청 예뻤지.”
 “응응! 감동이었다냥. 쪼금 울 뻔 했어.”
 “노래 부르다가도 울 뻔 했으면서.”
 “아냐!”

 

 키쿠마루는 잔뜩 볼을 부풀렸다. 무대에 올라가기 직전에도 절대 울지 말아야지, 웃는 얼굴로 끝내야지, 그렇게 스스로 다짐했다. 하지만 “이걸로 진짜 마지막이야!”하고 말할 때에 울컥 솟아오르던 감정을 억누르기는 힘들었다. 그건 그냥 평범한 대사가 아니었다. 정말로 오오이시와 부르는 마지막 듀엣곡이었으니까. 펑펑 울어버리는 사태는 면했지만 그 순간엔 아찔했다. 어라, 울면 안 되는데. 화들짝 놀라서 정신을 차렸더랬다.

 

 “뭔가 우리 연습장 몇 시까지 맞지? 이런 얘기 안 하겠구나 싶어서 이상하다냥.”

 

 오오이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키쿠마루가 그 뒤에 숨긴 이야기가 무엇인지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이젠 이렇게 만날 볼 수는 없겠지. 정말 가족과도 같은 사람들. 하지만 오오이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감정은 아니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시간이 흐르면 익숙해지고 받아들이게 되겠지만 지금 당장은 감당하기 어려운 일. 오오이시는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이제 가자.”
 “응?”
 “주인공이 빠지면 안 되니까.”

 

 키쿠마루는 고개를 잠시 갸웃했다. 주인공? 무슨 주인공을 말하는 거야? 주인공은 내가 아닌데. 멍하니 오오이시를 쳐다보던 키쿠마루의 표정이 점점 환해졌다. 아, 내 생일 얘기하는 거구나. 내 생일 파티 하자는 거구나. 그렇지, 참. 이 무대가 끝난다고 해서 영영 못 만날 사람들이 되는 게 아니잖아. 바보 같은 고민을 했단 생각에 웃음이 났다.

 

 “당연하지!”
 “무대는 끝났지만 우린 계속 만날 거니까.”
 “당연한 소릴!”

 

 키쿠마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크게 기지개를 피고 허리도 한 번 쭉 폈다. 그리고는 오오이시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오이시가 손을 맞잡고 일어났다. 두 사람이 무대 위에 섰다.

 

 “생일 축하해, 에이지.”
 “고맙다냥!”
 “그럼 이제 내려갈까.”
 “배고프다,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냥!”

 

 

(2014. 11. 28.)

 

 

 






루키즈의 어느 날

 

 “하아아아."

 

 길게 한숨을 내뱉으면서 그는 모자의 캡을 살짝 잡아당겼다. 햇빛이 강했다. 이런 땡볕에 서있게 하다니. 오기만 해 봐, 진짜 가만 안 놔둘 거야. 반팔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있었지만 찌는 듯한 더위는 가시질 않았다. 더군다나 여기는 오사카가 아닌가. 정말 끔찍할 정도의 더위였다.
 그 녀석을 못 알아볼 리가 없을텐데. 그는 고개를 좌우로 몇 번 흔들어가면서 주변을 살폈다. 여전히 빨간 머리는 눈에 띄지도 않았다. 흐응, 타임 오버. 그는 음료수라도 뽑을 생각으로 앉아 있던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 멍청이, 길 잃은 거 아냐? 여태까지의 전적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기에, 방금까지 심통이 나 있던 그는 금세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덜커덩, 캔 음료가 부딪치는 소리에 그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익숙한 포도맛 폰타. 고리를 젖혀 캔을 따고 나면 탄산이 올라오는 그 소리가 듣기 좋았다. 한 모금으로 일단 목을 축이고서 그는 다시 자판기를 바라보았다. 다른 생각을 하느라고 동전을 더 집어넣은 모양이었다. 그는 주머니를 뒤적여 동전 몇 개를 더 꺼내었다. 잠시 후, 폰타 하나를 더 손에 쥐고 그는 벤치로 돌아갔다. 다 마실 때까지 안 오면 정말 가야지.

 

 “코시마에!”

 

 아, 왔다.
 막 한 모금을 더 들이킨 찰나였다. 그는 벤치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 그 사고뭉치의 모습은 점처럼 보일 뿐이었지만, 목소리는 얼마나 큰지 발음 하나도 빠지지 않고 명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아, 그는 한숨을 쉬었다. 시끄러워. 게다가 부끄러워, 저 녀석.
 여전한 호피 사랑은 말릴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는 토우야마 킨타로를 보면서 에치젠 료마는 저 바보, 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속도도 줄이지 않은 채 그대로 달려오는 모습에 그는 자신에게 달려들 것까지 예상하고 몸에 힘을 잔뜩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킨타로는 그 속도 그대로 점프까지 해서 료마의 목에 매달렸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얼굴 한가득 터질 것 같은 미소를 머금은 킨타로는 료마를 세게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코시마에~ 오랜만이데이!”
 “너 늦은 거 알고는 있는 거야?”
 “아, 미안하데이. 내 뛰쳐오다가 쪼끔 헤맸다!”

 

 역시나. 매달려서 떨어질 줄 모르는 킨타로를 밀어내면서 료마는 뒤로 잔뜩 젖히고 있던 허리를 바로 세웠다. 킨타로도 그제야 그의 목을 놓아주고는 똑바로 섰다. 머리를 긁적이면서 환하게 미소를 짓던 킨타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킨타로는 고개를 쭉 빼고 료마를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한 번 찬찬히 훑었다가 다시 아래서부터 위로 올라왔다.

 

 “어레?”
 “왜 그래?”

 

 퉁명스럽게 내뱉으며 킨타로와 눈을 마주친 료마는 순간 움찔했다. 어라? 킨타로가 알아차린 사실을 료마도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킨타로가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가 그 위치 그대로 앞으로 내뻗었다. 료마는 그 손이 닿기 전에 휙 고개를 뒤로 빼내었다.

 

 “코시마에, 니 은제 이래 작아졌나?”
 “윽, 바보야, 작아졌을 리가 없잖아. 니가 큰 거지.”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는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엄연한 키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분명 료마가 미국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키가 비슷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눈에 띌 정도로 킨타로가 컸다. 윽, 소리를 내뱉으며 료마가 살짝 뒷걸음질쳤다. 거짓말. 정말 저 녀석이 더 크단 말이야? 말로는 꺼낼 수 없는 그 묘한 분함이 료마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는 고개를 팩 돌리고 마시던 폰타를 쭉 들이켰다. 탄산이 목을 톡톡 쏘아댔지만 꾹꾹 참고 넘겼다. 그 모습에 목이 말랐는지 킨타로가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료마의 한 손에 들린 폰타에 머물렀다.

 

 “아, 코시마에, 그거 내 줄끼가?”
 “아니.”

 

 매몰차게 대답한 료마는 다 마신 캔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는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캔도 마저 땄다. 왠지 열받아. 왜 저녀석만 더 컸지? 미국에 가 있는 동안 그가 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도 1cm는 더 커서 돌아온 셈이니까. 하지만 킨타로는 적어도 5cm는 더 큰 것 같았다. 먹기도 잘 먹는데 왜 나는 안 크지?

 

 “뭐꼬, 두 개 들고 있었음서. 욕심쟁이래이.”
 “흐응, 늦은 녀석한테는 줄 거 없거든.”
 “우우~ 알았데이! 내 늦었으니까는 타코야끼 사주께!”

 

 료마의 등을 떠밀며 킨타로가 발을 떼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따라 발을 떼면서 료마는 홀짝홀짝 폰타를 들이켰다. 그가 슬쩍 곁눈질로 킨타로를 훑어보았다.

 

 “근데 너, 얼마나 큰 거야?”
 “내도 잘 모른데이. 쩌언에 신체검사 했을 때는 백칠십……칠? 이라 카던데?”
 “하?”

 

 그가 미국에 가기 전의 키는 170cm에 조금 못 미쳤다. 그럼 이 녀석은 도대체 얼마나 큰 것이란 말인가? 또 한 번 열받아, 라고 생각하면서 료마는 또 벌컥벌컥 폰타를 들이켰다.

 

 “뭘 먹고 그렇게 크는 거야.”
 “내는 뭐든지 잘 먹는다! 편식은 안 좋대이!”
 “누가 그걸 모르냐.”

 

 료마는 여전히 툴툴거리고 있었지만, 킨타로는 뭐가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간만에 만나는 친구가 그리도 반가운 모양이었다. 따로 말도 하지 않았건만 마치 약속한 것처럼 테니스백을 메고 온 료마를 보며 역시 통한다고, 킨타로는 느끼고 있었다. 사선으로 오게 맨 가방 끈을 양손으로 꼭 쥐면서 킨타로가 료마를 쳐다보았다.

 

 “이따 테니스 치러 갈 끼제?”
 “내가 이기겠지만.”
 “그건 해봐야 아는기래이!”

 

 

(2012. 06. 04.)

 

 

 

루스님이 주신 키워드

<후지, 사진, 노란색 꽃다발, 겨울에서 봄>

 

 

 

 “이제 곧 봄이구나.”

 

 창가에 기대어 있던 그가 무심결에 뱉어내었다. 방 한 쪽에 앉아 만화책을 보고 있던 유타가 슥 그를 돌아보았다.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형의 모습은 유타에게 익숙했다. 뭐, 봄이 올 때가 되긴 했지. 유타는 머리를 긁적이며 만화책을 덮었다. 슥 그의 시선이 형에게서 벗어나 벽에 걸린 달력으로 향했다. 봄이 가까워져 간다는 것은 형의 생일이 가까워져 온다는 뜻이기도 했다.

 

 “형, 그 전에 형 생일이 먼저 아냐?”

 “난 유타가 모르는 줄 알았지.”

 

 생글 웃으면서 돌아보는 후지를 보며 유타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럴 리가 없잖아, 하고 유타가 투덜거리자 후지는 다시 쿡쿡거렸다. 언제나 귀엽다니까, 유타는. 사실 후지는 그를 괴롭히거나 놀릴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그렇게 표현되는 것은 그저 그의 성격 탓이었다. 그렇게 웃는 형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유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가지고 싶은 거 있어?”

 “글쎄. 카메라 렌즈?”

 “형…….”

 “농담이야.”

 

 또 한 번 쿡, 하고 가볍게 후지가 웃었다. 카메라라면 이미 쓰던 게 손에 익은 상태였다. 렌즈라도 새로 살까 싶었지만 가격이 가격이니만큼 동생에게 요구할 것은 아니었다. 누나라면 사주지 않을까, 하고 잠시 고민하는 그였지만 그 생각은 접어두기로 했다. 새로 책이 나온 기념으로 누나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다.

 

 “그보다 유타, 나갔다 오지 않을래?”

 “응? 갑자기 왜?”

 “나가자.”

 

 더 말없이 그는 창가에서 벗어나 카메라부터 집어 들었다. 슬슬 해가 저물어 가는데 아직 괜찮으려나. 뒤에서 유타가 투덜거리는 게 들렸지만 후지는 피식 웃으면서 걸음을 옮겼다.

 

 

 

 “형, 뭐하려고?”

 “유미코 누나한테 뭔가 선물이 될 만한 걸 주고 싶어서.”

 “아, 맞다, 꽃다발은 줘야 할 텐데.”

 

 유타가 주머니를 뒤적이는 동안 후지는 어느새 공원 안쪽까지 들어가 있었다. 카메라를 손에 쥔 그는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저물어가는 해 때문에 공원은 붉은 빛이었다. 지갑을 들고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유타는 한숨을 내쉬었다. 붉은 빛 사이로 후지가 서 있는 모습이 유타의 눈에 들어왔다. 왠지 그림에 나올 것 같은 장면이었다. 붉게 채색된 배경에다가 살짝 은빛이 도는 공원, 그리고 그 가운데 카메라를 들고 서 있는 남자. 풍경화의 배경이 되기에 딱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유타, 이리 와봐.”

 

 한참 카메라를 들여 보고 있는 것 같던 후지가 손짓으로 유타를 불렀다. 유타가 쫓아갈 때까지도 후지는 한 곳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후지가 보고 있던 것은 카메라가 아니라 그의 발 바로 앞쪽의 화단이었다. 때를 착각해서 조금 일찍 나온 것일까, 화단에는 노란 야생화가 피어 있었다.

 

 “예쁘지?”

 “헤, 이거 용케 발견했네. 이거 찍으려고?”

 “잘 찍으면 예쁘게 나올 것 같아. 노을도 졌고.”

 

 카메라에 집중하는 후지를 보며 유타는 머리를 긁적였다. 가끔 보면 이런 걸 열심히 하고 있는 형도 대단하다니까.

 

 “그보다 형, 꽃다발은 어떻게 하지?”

 “나 지갑 있어.”

 “언제 챙겼어?”


 피식, 하고 웃으면서 후지가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몇 번을 반복하던 그가 한참만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손을 머리 뒤로 하고 서 있던 유타가 후지를 슥 돌아보았다.

 

 “맘에 들게 나왔어?”

 “응. 꽃다발도 그럼 맞춰서 노란색으로 사가지고 갈까?”

 “뭐 괜찮지 않아?”

 “그럼 가자.”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가 후지의 얼굴에 올랐다. 유타도 대답 대신 미소를 지어주었다. 공원을 나서는 두 사람의 뒤로 해가 아예 넘어가고 있었다.

 

 

(2012. 01. 07.)

 

 

 

로유님이 주신 키워드

<니오 일루젼과 싱크로한 오오이시한테 징징대는 에이지>

 

 

 

 

 그렇게 늦은 시간은 아닐 텐데. 이층 침대는 이미 불룩하게 솟아 있었다. 베게 위로 살짝 삐져나온 붉은 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에이지, 벌써 자?”

 

 자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붉은 색 머리카락이 쏙 이불 밑으로 들어갔다. 난감한 듯 오오이시가 머리를 긁적였다. 큰일이군. 혁명군단이 1군과 시합을 한 이야기는 이미 U-17 합숙소 내에 쫙 퍼져 있었다. 오오이시도 그 혁명군단 안에 속해 있었다. 키쿠마루가 이러고 있는 이유는 불 보듯 뻔했다.

 

 “에이지.”

 “잘 거야.”

 “낮에 시합 말인데…….”

 

 이불을 팩 베개까지 덮어버리는 신경질적인 움직임을 보며 오오이시는 살짝 한숨 쉬었다. 싱크로를 가능하게 할 만큼 니오의 일루젼은 굉장했다. 그만큼의 실력이 받쳐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무언가 부족하다는 것은 오오이시도 알고 있었다. 어쨌든 니오는 키쿠마루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하지만 가만히 쳐다봐도 키쿠마루는 움직일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럼 다음에 얘기하자.”

 

 키쿠마루의 침대에서 시선을 떼고 오오이시가 고개를 숙였다. 무릎을 반쯤 굽혔을 때, 위에서 부스럭 소리가 들렸다. 다시 그가 고개를 들자 키쿠마루가 이층 침대에서 살짝 허리를 굽힌 채로 일어나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다시 무릎을 펴 품에 베개를 끌어안고 볼을 잔뜩 부풀린 키쿠마루의 얼굴을 마주했다. 잔뜩 뚱한 표정이 한 마디도 하지 않을 기세였다.

 

 “니오의 일루젼은 굉장했어.”

 “안다냥.”

 “나도 싱크로를 할 수 있었던 것에선 정말 놀랐으니까.”

 

 키쿠마루가 부풀리고 있던 볼을 풀고 입을 삐죽 내밀었다. 역시나 이것 때문이었구나.

 

 “에이지.”

 “나도 안다냥. 일루젼해도 내가 더 오오이시랑 호흡 잘 맞는 것도 알고, 아크로바틱도 내가 더 잘 하는 거 알아.”

 

 하하, 난감하게 오오이시는 그저 웃었다. 그는 키쿠마루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알아도 서운한 건 서운한 거고, 그걸 겉으로 다 드러내고 마는 자기가 바보 같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그래도 역시 내 파트너는 에이지니까.”

 

 키쿠마루가 품에 안은 베개를 좀 더 세게 끌어안았다. 그의 시선이 베개와 오오이시를 계속 오고갔다. 조금 갈등하는 듯 묘한 표정을 하고 있던 그가 마침내 오오이시를 똑바로 쳐다봤다.

 

 “다음번에는 진짜 세이가쿠 골든페어의 힘을 보여주자냥.”

 “물론이지.”

 

 오오이시가 주먹을 쥔 손을 내밀었다. 키쿠마루도 베개를 안고 있던 팔을 풀어 주먹을 맞대었다. 씨익, 평소의 미소를 지으면서 웃어주는 키쿠마루에게 오오이시도 웃어주었다.

 

 

 

 

(2012. 01.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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