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901 <샹그릴라>

「첫사랑」

니오 마사하루 드림




 “와, 너 엄청 많이 컸구나.”

 “푸릿.”

 “그 알 수 없는 말버릇도 여전하고.”


 쿡쿡, 살짝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당신은 나보다 작다. 어릴 적엔 엄청 크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인가. 그냥 내가 너무 커버린 건가. 카드뭉치를 쥐고 흔들던 작고 흰 손은 여전히 그대로다. 풍성하게 길게 내려온 머리, 립스틱을 발랐는지 핑크빛인 입술, 원피스를 따라 생긴 몸의 굴곡, 길게 뻗은 다리. 하나하나 찬찬히 뜯어보는 내 시선이 불편하지도 않은지 당신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염색한 거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다.


 “어렸을 땐 말도 많더니, 이젠 대답도 않네. 나 안 보고 싶었어, 마사하루?”

 “그렇게 묻는 사람이야말로 날 보고 싶었던 건 아닐까나?”

 “어휴, 언제 커서 이렇게 능글맞아진 거야.”


 코끝을 찡긋하는 버릇도 그대로. 피식 웃어버렸더니 당신도 따라 웃는다. 그 때도 예뻤지만 지금의 당신은 빛이 난다. 이렇게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것도 오랜만이다.


 “물론 보고 싶었지.”

 “나도 보고 싶었어.”


 만족스런 대답을 듣고 나서야 당신에게 대답한다. 다시 꼬마가 된 것 같다. 누나와 당신의 손을 붙들고 길을 걷던 아주 어릴 때. 내 눈 앞에서 펼쳐지던 마술에 반한 건 그걸 행했던 사람이 바로 당신이었기 때문이다.


 “얘, 안 나오고 뭐해.”

 “응, 나갈게.”


 현관문 앞에 선 누나의 부름에 당신이 돌아선다. 부리나케 구두를 신는 발이 작고 귀엽다. 문을 열다말고 당신이 다시 고개를 돌린다. 눈이 마주친다.


 “이제 누구 좋아하는 사람도 생겼겠다. 다음에 또 올게!”


 생긋 웃고 당신이 문 밖으로 나선다. 쿵. 문이 닫힌 현관 앞에서 나는 자꾸만 새어나오는 웃음을 막느라 얼굴을 쓸어내린다. 주머니 속에 있는 카드뭉치를 만지작거린다. 이사 가기 전 당신이 내게 주었던 선물. 

 아, 젠장.

 그런 당신이 첫사랑이라고는 절대로 말 못 해.




(2015. 09. 01.)









150510 <당신의 수호천사> 

「기도」


 오오토리 쵸타로 드림




 “난 나쁜 애야.”


 뜬금없이 뱉어내는 말에도 오오토리는 웃는 얼굴로 돌아보았다. 볼을 잔뜩 부풀린 그녀는 입술도 삐죽 내밀었다. 그 얼굴을 본 오오토리의 입매가 슬그머니 더 위로 올라갔다. 오오토리가 대답은 하지 않고 계속 쳐다보기만 하자 그녀의 시선이 돌아왔다.


 “안 물어봐?”

 “왜 나쁜데요?”

 “네가 다른 여자애한테도 잘 해주는 게 싫어.”

 “질투는 나쁘다고 하기 어려운 걸요.”


 여전히 웃는 낯인 오오토리에게 그녀는 눈을 흘겼다. 맞는 말이었지만 왠지 즐거워하는 것 같아 괜히 심술이 났다. 툭툭 손가락으로 오오토리의 뺨을 두들기자 간지러운 듯 오오토리가 살짝 고개를 틀었다.


 “네가 나만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게 나쁘다는 거지.”

 “그래요?”


 여전히 자신의 턱을 간질이는 손가락을 오오토리가 탁 붙잡았다. 그리고는 그 손가락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윽, 뭐야, 이거. 아무렇지도 않게 해대는 오오토리의 이런 애정표현은 항상 그녀를 설레게 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래, 뭐, 너 이런 녀석인 건 원래부터 알았으니까.


 “그렇게 말하면 제가 더 나쁜데요.”

 “네가 왜?”


 손끝이 간지러워서 그녀는 슬쩍 손가락을 빼내었다. 하지만 오오토리는 멀어지는 손가락을 다시 붙잡았다. 오오토리는 이번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손등 위에 가볍게 키스했다. 가깝다. 오오토리가 풍기는 향수 냄새가 그녀의 코를 자극했다. 하얀 머리카락, 살짝 비친 목선, 그리고 천천히 다시 올라오는 오오토리의 얼굴.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당신이 그렇게 되기를 기도했거든요, 저.”

 “어?”


 오오토리의 웃는 얼굴이 다시 그녀와 마주쳤다. 미묘하게 다른 그 웃음 때문에 그녀는 더욱 얼굴이 붉어졌다. 맞아, 얘 원래 이런 애였지. 이렇게 순진한 얼굴을 하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두운 면을 속속 내비치는 게 오오토리였다. 이런 애한테 반한 내가 잘못이지.


 “더 질투하고 더 집착해도 돼요.”

 “싫거든.”

 “그럼 앞으로 더 기도해야겠네요.”


 무언가 더 말을 하려는 듯 그녀의 입이 열렸지만 오오토리는 그렇게 두지 않았다. 입을 맞추고, 혀를 섞고, 그리고 떨어졌을 때, 그녀는 결국 할 말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얼이 빠진 듯 멍한 그녀와 달리 오오토리는 언제나 그렇듯 환하게 웃었다.


 “저한테 더 빠져주세요.”


 해사하게 웃는 오오토리에게 그녀는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붉어진 얼굴을 돌리는 대신, 그녀는 오오토리의 품을 파고들었다. 책임져, 바보야. 조용히 중얼거리자 오오토리가 하하 웃었다. 그녀는 그것을 대답으로 삼기로 했다.




(2015. 05. 10.)












150425 <당신의 수호천사> 

「악몽」

히요시 와카시 드림




 너의 뒷모습을 계속해서 쳐다본다. 그 뒷모습이 너무나도 차가워서 나는 차마 너에게 손조차 뻗지 못했다. 이렇게 길고 긴 길이 있는지도 처음 알았다. 아무리 멀어져도 너의 모습은 내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고 작아지기만 한다. 작아지고 작아진 네가 이제는 겨우 손톱만한 점으로 보인다.




 “저기, 와카시.”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손가락을 마주잡고 우물거리는 네가 참 귀엽다는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네 목소리에 번뜩 정신이 들어 똑바로 쳐다보았다.


 “무슨 일 있어?”


 걱정이 잔뜩 묻어나는 네 눈 때문에 나는 순간 당황했다.


 “아니, 아무 일도.”

 “그치만 지금 엄청 무서운 얼굴로…….”


 네가 양 손을 들어 눈매를 끌어올린다. 내가 그런 표정을 지었다는 뜻인가 보다. 어젯밤 꿈 때문에 나도 모르게 그런 표정을 지은 모양이었다.


 “무슨 일 있었지? 그치?”

 “아무…….”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네가 얼굴을 확 들이민다. 놀라서 고개를 살짝 뒤로 뺐지만 네 얼굴이 참 가깝다. 어제 꿈 이야기를 해야 할까? 겨우 꿈 때문에 이런 우울한 표정을 했다는 사실이 조금 바보같이 느껴져서 어딘지 조금 부끄럽다.


 “응? 와카시.”

 “꿈을 꿔서.”

 “무슨 꿈?”


 여전히 너는 내 코앞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반짝거리는 동그란 눈, 앙 다문 입술, 하얀 피부, 가깝게 느껴지는 네 숨결. 진다. 내가 졌다.


 “네가 떠나는 꿈.”


 눈을 깜빡깜빡 거리던 네가 풋 웃더니 제자리에 앉는다. 조금 아쉽기도 하지만 귓속을 잔뜩 울리는 심장소리를 진정시킬 수 있게 됐으니 뭐 다행인가. 사실대로 말했지만 부끄럽지는 않다. 그냥 네가 웃는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행복하다.


 “와카시는 바보야.”


 다시 네 얼굴이 가까워져 온다. 그리고 멈출 새도 없이 내 입술에 마주쳐온다. 굉장히 달콤한 입맞춤. 겨우 꿈 때문에 걱정했던 내가 정말로 바보처럼 느껴진다. 이렇게나 네가 좋은데. 이렇게나 너는 행복하게 웃으면서 내 앞에 있는데.


 “꿈은 반대랬어.”


 초승달처럼 휘어지는 네 눈이 참, 나를 못 견디게 행복하게 만든다.




(2015. 04. 25.)









​150221 <너의 빨강구두> 

「축하해」

오오토리 쵸타로 드림


* 짝사랑 주의




 축하해.

 웃으면서 말했지만 속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아. 너를 많이 좋아했는데, 그렇게나 많이 좋아했는데. 하지만 너에게 나는 말을 하지 못했다. 내가 속으로 몇 번이나 되풀이하고 가슴에 새겼던 그 소중한 말을 입 밖으로 밀어내는 게 너무 어려웠다.


 “쵸타로.”


 그 누구보다 새하얗게 웃는 너를 보고 나는 너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밝게 웃는다. 우리는 참 오랜 시간을 알았다. 어릴 적부터 함께 웃으며 자란 우리는 많은 것들을 공유했다. 흙장난을 하고, 동네를 뛰어다니고, 자전거를 타고. 테니스를 하는 나, 응원하는 너. 그렇게 많은 것을 함께 하는 게 우리한테는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나도 너도 그랬다. 조금 달랐던 건, 내가 너를 생각했던 마음과 네가 나를 생각했던 마음.


 “어때? 나 예쁘지?”

 “세상에서 제일 예뻐.”

 “헤헤, 쵸타로가 그렇게 말해준다면 믿을 만하지.”


 너는 언제나 예뻤다. 다만 오늘, 오늘의 너는 정말로 새하얗게, 행복하게 빛나서 누구보다도 아름답다. 눈이 부셔서 눈물이 날 정도야. 웨딩드레스 차림의 너를 보고 싶었던 건 맞지만 이렇게는 아니었다. 나는 너를 내 신부로 맞이하고 싶었는데, 너는 다른 누군가의 신부가 되어 나를 쳐다본다. 단 한 번도 너에게 말하지 못한 게 안타깝다. 이런 너를 보자니 더욱 그런 마음이 생긴다.


 “축하해, 정말.”

 “고마워. 쵸타로도 좋은 여자 만나서 결혼해야지?”

 “그랬으면 좋겠네.”


 너의 그 말이 내 심장을 찌른다. 눈물이 날 것만 같지만 애써 참는다. 네가 가장 행복해야 하는 날에 내 눈물로 너의 기분을 망칠 생각은 없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너의 옆에 서 있어야 하니까.


 “있잖아, 쵸타로.”

 “응?”


 새하얀 장갑을 낀 네 손이 내 손을 붙잡는다. 심장이 두근거리는데 티낼 수도 없다. 네 얼굴을 쳐다보기가 힘들다. 몇 번 내 손을 도닥이던 네가 조심스럽게 말한다.


 “나는 지금 행복하니까.”


 고개를 들어 너를 쳐다본다. 나를 바라보는 네 눈빛은 언제나처럼 상냥하고 부드러워서 나는 할 말을 잃어버린다. 따뜻하게 말하는 너. 너를 보는 게 너무나도 행복해서 이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


 “쵸타로도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나 무슨 말하는지 알지?”


 그래, 알아. 대답하고 싶지 않다. 너는 평생 몰랐으면 좋겠다. 내 마음은 이대로 모른 채 지나가줬으면 좋겠는데 너는 이미 아는 것 같아. 조금 속상하다. 나는 숨길만큼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가 봐.


 “응, 그럴게.”

 “고마워, 쵸타로.”

 “축하해. 진심이야.”


 정말로 내 마음을 다해 너의 축복을 빌어. 많이 좋아했어. 너를.





(2015. 02. 21.)









141102 <너의 빨강구두>

「시선」

후지 유타 드림


* 짝사랑 주의




 많이 좋아해요.

 그렇게 말했을 때, 그녀는 작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곧 미안하다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는 황망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나는 사실을 안다. 그녀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정말 잘 안다. 그래도 자꾸만 끓어오르는 이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 그녀를 쳐다보는 내 눈도 돌릴 수가 없다.


 「있지, 좋아하는 마음은 내 마음대로 조절이 안 되더라.」

 「알아요.」

 「미안해.」


 알면서도 고백을 했다. 그렇게라도 해야 마음 정리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녀가 너무도 좋아진 탓에, 조절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하게 되어버린 탓에 미즈키상을 대하는 것조차 마음이 편치 못했다. 하지만 미안하다고 말하는 그녀의 모습조차도 햇살처럼 아름다워서 슬펐다.


 “유타군.”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나도 모르게 그 날을 떠올렸다가 현실로 돌아왔다. 항상 듣던 미즈키상의 목소리가 오늘 따라 신경에 거슬렸다. 그녀의 시선 때문이다. 미즈키상을 보는 그녀의 시선은 정말 평소와는 너무도 달라서 나는 여지없이 처참한 기분이 된다. 간신히 그녀에게서 눈을 떼고 미즈키상을 보았다. 크게 변하지 않는 일상. 늘 그렇듯 미즈키상은 나에게 맞는 연습 스케줄을 짜 주었고, 나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유타군, 요즘 신경 쓰는 일 있죠?”

 “네? 없는데요.”

 “거짓말에 소질 없다네.”


 야나기사와 선배가 내 어깨에 척 손을 올려놓았다. 아, 왜요. 그런 대답을 할 기운도 나지 않았다.


 “그런 거 없어요. 연습하러 갈게요.”


 손을 슥 밀어내고 라켓을 챙겨들었다. 미즈키상이 뒤에서 걱정스럽게 몇 마디를 덧붙였다. 기력이 없는 것 같은데 비타민이 많이 든……. 밖으로 나서기 전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그녀는 한쪽 구석의 테이블에 앉아 미즈키상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왜 저렇게 행복해 보일까. 저런 시선을 받으면서도 미즈키상은 왜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 걸까. 미즈키상이 모를 것 같지는 않은데. 어쩌면, 어쩌면 그녀도 미즈키상에게 고백을 했을지도 모르잖아. 미즈키상은 그걸 거절했을지도 모르고. 고개를 홱홱 내저었다. 거절당했다면 그녀의 마음이 아플 텐데, 기회인 거 아닌가 생각하는 내가 한심했다. 연습이나 하자. 언젠가 조금 더 뒤에, 그녀를 아직 좋아한다면 다시 고백해야지. 그 때엔 혹시 받아줄지도 모르니까.





(2014. 11. 02.)








141026 <너의 빨강구두>

「너와의 거리」

오오토리 쵸타로 드림





 벤치 끄트머리에 앉아서 오오토리는 침을 삼켰다. 설렌다. 이제 곧 그녀가 오겠지. 심장이 쿵쿵 뛰어서 귀가 먹먹했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게 이렇게 설레는 일이구나. 오오토리는 자꾸만 새어나오는 미소를 막으려고 애썼다. 너무 헤헤 웃는 상태면 이상해보일 것 같았다. 후, 숨을 뱉어내고 가슴에 손을 얹었다. 조심스럽게 쓸어내리면서 다시 심호흡을 했다. 이제 곧 그녀가 올 테니까.

 저 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가까워진다. 이 학교 사람이라면 모두가 입고 다니는 교복인데 왠지 그녀가 입으면 더 아름다워 보였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오오토리를 발견했는지 그녀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오오토리도 번쩍 손을 들어서 인사했다.


 “오오토리군.”


 그녀가 벤치 반대편 끄트머리에 앉았다. 한사람이 더 앉을 수 있는 공간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오오토리는 그녀를 쳐다보는 대신 단풍이 들어가는 나무에 집중했다. 그녀도 긴장했는지 오오토리 쪽으로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하지만 서로가 어떤 표정일지는 머릿속에 그려졌다.


 “많이 기다렸어?”

 “아니, 방금 전에 왔어.”


 짧고, 어색한 대화. 이럴 때엔 무슨 말을 해야 좋을까. 다가가도 좋을까. 손을 내밀어도 좋을까. 오오토리는 다시 가볍게 숨을 뱉어냈다. 살짝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그녀가 긴 머리를 한 손으로 쓸어내렸다. 아, 예쁘다. 해가 화창한 가을날, 그 따뜻한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웃는 그녀가 세상 누구보다 빛났다.

 오오토리는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기척을 느낀 그녀가 오오토리를 돌아보았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남자 손은 원래 이렇게 크구나. 그녀가 손을 들어 오오토리의 손에 포개놓았다. 그러자 오오토리가 손을 꼭 잡았다.


 “좋다.”


 오오토리가 탄식하듯 뱉어냈다. 해사하게 웃는 오오토리에게,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손을 잡은 것만으로도 세상은 충분히 아름답고 따뜻했다. 오오토리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눈짓으로 그녀를 재촉했다.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에.


 “산책할까?”


 그녀도 따라 일어섰다. 오오토리는 이 점심시간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조금 더 가까워진 이 거리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2014. 10. 26.)










141012 <너의 빨강구두>

「다녀왔어」

유키무라 세이이치 드림






 기다리는 것은 나일까, 너일까.

 종종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네가 떠나갔고 내가 남았다. 우리는 헤어지지 않았다. 그를 배웅하러 공항에 갔을 때에도 그런 말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그가 내일이라도 돌아올 것처럼 “다녀와.”하고 말했다. 대답으로 “다녀올게.”를 들었다. 우는 대신 손을 흔들어주면서 웃었다. 게이트 너머로 그가 사라질 때까지 그렇게 쳐다보았다.

 유키무라 세이이치. 그리고 나. 두 사람이 서로 좋아했다. 그러다가 그가 떠났다. 남들이 말하는 유학, 뭐 그런 거. 그때쯤 우리 사이는 굉장히 이상했다. 헤어진 것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사귀는 중이라고는 말하기 힘든, 그런 어중간한 느낌이었다. 확연하게 틀어질 만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하나둘 맞지 않는 성격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나는 목소리를 높여서 신경질을 부렸고 그는 성격 특유대로 말을 비꼬았다. 그렇게 조금씩,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설렘은 남지 않고 의무감만 남았다.

 그의 이름 네 글자를 쓸어내렸다. 그리운 이름. 그가 어디에 있는지, 무얼 하는지, 잘 사는지 그런 건 잘 모른다. 나는 그냥 그가 떠난다는 이야기만 들었고, 떠나는 뒷모습만 보았다. 종종 그에게서 메일이 왔다. 이런 공부를 했어. 너는 어때? 그러면 이랬어. 이렇게 지내. 그런 짧은 답장을 했다. 마치 명절 때나 되어서야 가끔 연락하는 어중간한 친구 사이 같은 느낌. 난 그가 돌아오길 바라는 걸까, 아니면 이 관계가 끝나길 바라는 걸까. 스스로도 잘 몰라 헤매는 게 싫었다. 

 일 년이 넘는 시간. 떠난 게 그라고 해서 꼭 기다리는 게 내가 되는 건 아니다. 어쩌면 이 이상한 관계를 만든 나 때문에 그가 떠난 건지도 모른다. 아니, 나를 떠나보낸 건지도 모른다. 돌아가야 하는 건 그가 아니라 나인게 아닐까.


 「유키무라가 돌아왔다. 어디에 있는지는 알 거라고 생각한다. -야나기군」


 그동안 띄엄띄엄 연락하면서 돌아오는 날 한 번 묻지 않았다. 같은 땅 위에 있다 이거지? 그에게 무엇도 묻지 않았으면서, 보고 싶다는 말 따위 한 번도 한 적 없으면서 왜 눈물이 쏟아질까. 무작정 달렸다. 그와 막 사귀기 시작했을 때처럼 설렘이 가슴 속에서 요동쳤다. 뭘 입었는지, 뭘 신고 있는지, 내가 지금 무슨 머리 꼴을 하고 있는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무작정 달리고 달렸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는 그대로였다. 나도 그대로였다. 그냥 그 그대로가 조금씩 드러나고 드러나서 차이를 만들었을 뿐인데. 그걸 모르고 내가 도망갔던 것 뿐이었는데.


 “세이이치!”


 꽤 긴 시간, 입에 담은 적 없던 이름이었다. 뱉어내고 나니 감당이 되질 않았다. 간만에 보는 그의 작업실이, 그 건물이, 전부 세이이치를 담은 것만 같아서 숨이 차올랐다. 세이이치. 세이이치. 작업실 문은 열린 채였다. 벌컥, 그 문을 열고 들어갔다.

세이이치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캔버스 앞에 그가 서 있었다. 잠깐 놀란 눈을 하는가 싶더니 그가 웃었다.


 “어서와.”

 “세이이치.”


 역시. 기다리던 건 내가 아니었어. 천천히 발을 떼었다. 조심조심 한걸음씩 내딛었다. 세이이치가 손을 내밀었다. 방금 전에도 붓을 만졌는지 손에 물감이 묻은 채였다. 나도 손을 내밀었다.


 “세이, 세이이치.”

 “응.”

 “다녀왔어.”

 “늦었네.”


 손을 마주잡았다. 와락 품으로 안겨 들어갔다. 토닥토닥. 내 등을 도닥여주는 그의 손이 따뜻했다.


 “나도 다녀왔어.”




(2014. 10. 12.)









달성표용 조각리퀘 - 리본, 백색소음, 배시시

     오시타리 유시 드림 (For. 사쿠라님)




 똑딱똑딱. 눈치 채지도 못 하고 있어야 할 시계 소리가 귓가에 거슬린다. 언제나 돌아가던 냉장고 모터 소리, 밖에서 부는 바람에 창문이 가볍게 흔들리는 소리도 들린다. 백색소음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귀를 괴롭히는 소리들에 짜증이 났다.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눈을 감았다.


 딩동.


 평소 같았으면 이 밤중에 어떤 놈이야 하면서 파르르 몸을 떨었겠지만 지금은 이 소리조차 반가웠다. 한순간에 모든 소리를 백색소음으로 돌려놓았다. 초인종에 무한히 감사하면서 문가로 다가갔다. 인터폰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벌컥 문을 열었다.


 “유시!”

 “낫쨩, 그래 갑자기 열면 우야노.”


 놀란 듯 동그랗게 뜬 두 눈을 보고 이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배시시 웃으면서 손을 끌어당겼다. 안 그래도 갑작스러운 적막감에 텐션이 낮아지던 참이었다. 텔레파시라도 통한 걸까. 어쩜 이렇게 사람 맘을 읽은 듯이 나타나 주는 걸까.


 “나 보고 싶어서 왔어?”

 “낫쨩이 그른기 아이고?”


 볼을 잔뜩 부풀렸더니 피식 웃었다.


 “보고싶어가.”


 능글탱이 같으니라고. 뭐라고 한 소리 하기 전에 막을 생각이었는지, 미처 눈을 감기도 전에 입술이 맞닿았다. 금세 떨어져버린 탓에 아쉬움이 남았다. 

입술에 머물렀던 시선을 아래로 천천히 내렸다. 안 그래도 더운 날인데 굳이 겉옷을 껴입고 온 이유가 뭘까. 게다가 목까지 또 잔뜩 올리고 있는 지퍼를 보니 답답했다. 결국 자연스럽게 손이 먼저 나갔다. 익숙해져서일까 놀라지도 않았다. 그리고 지퍼를 내리다 말고 그대로 손이 멈췄다.


 “유시?”


 왜 목에 리본 같은 걸 감고 있는 거야. 그것도 참 예쁘게도 매놨네.


 “내를 낫쨩한테 선물할라꼬.”


 부드럽게 올라가는 입매가 정말이지, 때려주고 싶을 만큼 에로틱해서 참을 수가 없다. 결국 품을 파고든다. 이제는 익숙한 향수 냄새가 기분 좋다. 뭐랄까, 이 향수는…… 그래. 꼭 내 남자친구의 머리색을 닮았다.





(2014. 07. 10.)










달성표용 조각리퀘 - 반지, 화관, 뭉게구름

     시시도 료 드림 (For. 셀레스틴님)



 테니스를 하는 너는 세상에서 제일 반짝거린다. 내 안의 필터링이겠지만 후광이 비친다고 해야 할까. 눈에서 별을 쏟아낼 것처럼 반짝거려서 나도 모르게 자꾸 웃게 되고 마는, 뭐 그런 거. 너무너무 반짝거려서 언젠가 날 두고 하늘로 올라가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가까이에서 손잡을 수 있는 네가 때때로 뭉게구름처럼 잡힐 듯 잡히지 않게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바로 그런 순간.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퉁, 손가락을 튕기는 바람에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눈앞에 와 있는 너 때문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아까 코트 안에 있지 않았어? 멍하니 되물었더니 더위 먹었냐, 고 퉁명한 한 소리.


 “아니, 진짜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단 말이야. 물론 테니스 치는 료가 멋있긴 한데 엄청엄청 멀게 느껴져서 뭉게구름처럼 사라지면 어떡하나 하고.”

 “미쳤냐, 사라지게.”


 피식 웃더니 너는 주머니를 뒤적거린다. 그리고 예의 그 작은 상자를 꺼내들었다. 이거 왠지 이 뒤가 예상되는데. 네 볼이 붉다.


 “그, 뭐냐, 이제, 거, 우리 소꿉친구 사이 아니고 그, 사귀는 사이니까.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얼떨떨하니 쳐다보고만 있자 손에 꼭 쥐어준다. 반사적인 행동으로 상자를 연다. 네가 고른 것답게 심플하고 예쁜 반지다. 조심조심 꺼내들고 끼우려고 했더니 네 손이 급하게 끼어든다.


 “이런 건 끼워줘야 되는 거 아냐?”

 “아, 응…….”


 투박한 네 손이 내 손가락에 반지를 밀어 넣는다.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서 반짝거리는 반지. 왠지 나야말로 하늘로 날아가 버릴 것만 같다. 빠져나가려는 네 손을 다시 붙잡는다. 손깍지를 꼭 끼고 쳐다본다.


 “고마워.”


 쑥스러운 듯 다시 또 네가 미소 짓는다. 천천히 발을 옮기는 너에 맞춰 나도 따라 걸음을 옮긴다. 햇살이 따뜻하다.


 “너 그거 기억해? 놀이터에서 우리 소꿉놀이 하던 거.”

 “응, 그게 왜?”


 놀이터에 앉아서 흙장난을 하고 나는 엄마, 너는 아빠 하던 때의 기억. 멀기만 한 기억을 끄집어내는 너에게 놀라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다. 왜인지 너의 볼은 아까 전보다도 훨씬 붉다.


 “내가 왜 꽃 따다가 화관 만들어 줬잖아.”


 아, 맞아, 그랬었지. 그 때가 떠오르자 내 얼굴도 덩달아 달아오른다.


 “그 때부터 넌 항상 내 신부였어. 그러니까, 사라질 리가 없다고.”


 언제나 뒤로 향해있던 네 모자가 앞을 향해 돌아왔다. 얼굴을 다 가리기라도 할 것처럼 모자 끝을 푹 잡아당기는 너. 잡은 손으로 알 수 있는 내 심장박동과 네 심장박동. 그렇구나. 역시 괜한 걱정이었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웃어 보인다. 나에게는 네가 내 세상이니까.





(2014. 07. 10.)










달성표용 조각리퀘 - 플라네타륨, 물고기, 마주하다

     치토세 센리 드림 (For. 메이님)




 오늘도 나는 여기서 그를 기다린다.

 한적한 공원의 벤치. 커다란 나무 밑이라 그림자가 짙고 풀내음도 강한 한 자리. 이 자리에서 난 그를 처음 만났다. 길고양이와 장난을 치고 있던 그. 그는 매우 컸고 고양이는 매우 작았다. 그게 내 첫인상이었다.

 벤치에 혼자 앉았다.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혀 파란 나뭇잎을 쳐다본다. 그의 얼굴이 금방 그려진다. 손을 뻗어도 닿질 않는다. 그와 나는 플라네타륨에 있는 것 같다. 내가 물고기고 그는 관람객. 나는 하염없이 여기에 머물러있고 그는 항상 스쳐지나간다. 나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면서 그 사실을 까먹어버리는 머리 나쁜 물고기가 된 기분이다. 그가 스쳐 지나가는 것도 잊고 다시 그를 마주하면 행복하다.


 “뭐하노, 메이쨩.”


 진짜가 되어 나타난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마주본다. 말없이 마주보고만 있자 그가 미소 지었다. 커다란 손이 다가와 내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팔을 다시 내뻗었다. 이번엔 닿는다. 그가 내 손을 잡았다. 내가 그 날의 그 고양이가 된 것만 같다.


 “미안하데이, 기다리게 해가.”

 “센리.”


 너는 알까, 내가 어떤 기분인지.


 “스쳐지나가는 거야?”

 “아이다.”


 바라봐주는 눈이 너무도 따뜻해서, 그의 눈에서 애정을 읽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가 좋다.


 “여기로 돌아오는 기다.”


 붙잡고 있던 손을 놓고 그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몸을 돌려서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 말이 그 말 같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돌아오는 거, 라니. 바보 같아.


 “내 좋은 남자친구는 몬 되는구마.”


 훌쩍이다가 손가락을 들어 세게 그의 옆구리를 꼬집는다. 아프데이, 뒤로 이어지는 웃음소리에 괜히 심술이 난다. 꼬물꼬물거리다가 품을 빠져나와서 다시 그를 마주보았다. 얼굴 미워 보이겠다.


 “내는 항상 돌아올 기다.”


 입술이 닿는다. 그래, 센리는 거짓말을 한 적은 없으니까. 그를 좋아하기 시작한 내가 나쁘다. 





(2014. 0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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