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ding March

     사나다 겐이치로 드림 (For. 스키아님)




 잔뜩 긴장한 그녀가 숨을 들이마셨다. 이런 날 긴장을 안 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만 그녀는 긴장하고 싶지 않았다. 새삼스럽게 그의 옆에 서는 데에서 긴장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우스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심장 뛰는 소리는 귓가를 멍멍하게 했고 입 안은 바싹바싹 말라왔다. 립스틱이 지워질까봐 물 한 컵조차 제대로 못 마신 탓도 있었다.


 “나쁜 놈. 이건 다 사나다 때문이야.”


 말로 뱉어놓고 나서 그녀는 당황했다. 사나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자신도 사나다가 될 터였다.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에 맞춰서 입장을 한다. 잠시 그의 손을 잡고 정신을 놓고 있다 보면 그들의 앞날을 밝혀주는 고귀하면서도 지루한 말들이 끝난다. 그리고 다시 그의 손을 잡고 퇴장한다. 그러고 나면 자신은 더 이상 소라가와 유리에가 아닌 사나다 유리에가 된다. 물론 실질적으로 사나다 유리에가 되는 것은 혼인 신고서를 제출한 뒤겠지만, 어찌됐든 모두의 눈에 자신은 그 순간부터 사나다 유리에가 되는 것이었다.

 부모님들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호칭을 좀 바꿔야겠다고 그녀 스스로도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물론 초등학생 때야 겐이치로―그녀는 그 때의 자신이  아무렇지 않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이 놀라웠다―라고 불렀었다. 조금 더 크고 나서는 다시 사나다로 돌아갔지만. 하지만 그래도 그는 꾸준히 유리에라고 불러주었다. 그게 익숙해져서 뭐라고 하지 않은 것뿐이었다.


 “신부 대기하시죠.”

 “아, 네.”


 신부라는 단어에 무언가 마력이 있는 게 분명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으려는 기분을 느끼면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란 치맛자락 사이에서 다리를 사뿐사뿐 옮기면서 숨을 골랐다. 예쁘게 보여야 할 텐데. 아니, 딱히 사나다, 아니 겐이치로한테 예뻐 보이고 싶은 게 아니라 여자에게 있어선 평생 한 번 있을 중요한 날이니까 최고로 예뻐야 한다고!




 지금 돌아보면 어이가 없는 시작이었다. 내가 널 책임지겠다, 라니. 그런 말을 함부로 뱉은 사나다가 잘못이었다. 사과를 하는 정도만 됐어도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는데 매사에 진지하다 못해 심각한 그가 그런 말을 내뱉어 버린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정말로 그 뒤로 책임을 지겠다는 듯이 행동을 했다. 그 첫 번째가 그녀의 부모님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올린 일이었다.


 「제가 유리에를 책임지겠습니다.」


 당황한 부모님은 그녀에게 무슨 일인지를 물었고, 그 앞에서 다시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던 그는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가며 그를 방에서 내쫓았다. 자초지종이랄 것도 없이 사건은 매우 단순했다. 





 소꿉친구인 두 사람은 하교하다가 보면 마주치는 일이 잦았다. 집이 같은 방향에 있기 때문이었다. 사나다네 집을 두 블록쯤 더 지나쳐 가면 그녀의 집이 있었다. 그 날도 평범하게 하교를 하다 우연히 사나다를 만났다. 두 사람은 늘 하던 시답잖은 대화를 하면서 길을 걸었다. 검은 구름을 눈치 채고 발걸음을 빨리 했을 때는 이미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 뒤였다. 소나기일 게 뻔했지만 꽤 굵은 빗방울이었다. 비를 피해서 달린 두 사람은 사나다네 집 현관에 물을 뚝뚝 흘리며 들어섰다.

 사나다네 어머니가 먼저 나와 그들을 반겼다. 커다란 수건을 유리에에게 덮어주며 그녀는 유리에를 화장실로 떠밀었다. 그대로 가면 감기 걸리니까 씻고 옷 갈아입고 가라면서 친절하게도 사나다의 옷 중 가장 무난하고 작은 옷을 꺼내주었던 것이다.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화장실로 들어간 유리에는 축축하게 몸을 감아오는 교복을 벗기 위해 애쓰기 시작했다. 물을 먹은 교복은 쉽사리 떼어지지 않았다. 간신히 조끼를 벗는데 성공한 그녀는 서둘러 셔츠의 단추도 풀어내었다. 그리고 거의 껍질을 뜯어내듯이 팔에서 셔츠를 막 벗겨낸 순간 벌컥 문이 열렸다.


 「꺄악!」

 「미, 미안하다, 유리에!」

 「이 바보야, 이쪽으로 들어올 게 아니라 나가야지!」

 「아, 그, 그렇지.」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 유리에가 옷을 갈아입고 나간 거실에는 사나다가 무릎을 꿇은 자세로 가만히 앉아있었다. 심지어 그는 아직 젖은 옷을 입은 그 상태 그대로였다. 그는 유리에에게 재차 사과했다. 어머니가 그녀에게 수건을 둘러주고 안쪽으로 데려가는 모습만 본 사나다는 그녀가 화장실에 있을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채 자연스럽게 문을 열었고, 반쯤 벗은 상태의 유리에를 보고 너무 놀란 나머지 나가면서 문을 닫는다는 것이 그냥 문을 닫아버린 것이었다. 여전히 머리카락과 옷소매에서 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그를 향해 그녀는 괜찮다고 웃어주었다. 그리고 그가 이어서 한 말에 받은 충격으로 손에 들고 있던 무거운 교복을 철퍽 소리가 나게 떨어뜨렸다.


 「내가 너를 책임지겠다.」


 그녀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손사래를 쳤지만 천하의 사나다 겐이치로에게는 장난이란 없었다. 그는 매우 진지했고, 그것은 사나다 본인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소꿉친구인 유리에는 잘 알고 있었다. 여자 벗은 거 한 번 봤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뭐! 라고 소리쳤다가 그녀는 되레 사나다에게 한 소리를 들었다. 본인의 신체를 소중히 여겨야 하며 여자는 여성으로서의 어쩌고저쩌고…….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가 화를 내고 있었으므로 유리에는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하지만 또 슬그머니 화가 치밀었던 것도 같다. 아니, 잘못한 건 자기면서 왜 나한테 화를 내? 그래도 그녀는 화를 낼 수 없었다. 사나다는 이미 너무 확실하게 그녀에게 사과했고 그녀는 그걸 받아주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사실이 될 거라고 그 누가 생각했을까.

 그녀의 부모님도, 사나다의 부모님도 그가 그러다가 제 풀에 지치면 안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유리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그가 책임을 지겠다고 말한다 한들 그녀가 오케이 하지 않으면 그만이지 않은가? 그녀는 결국 자신이 이렇게 식장에 들어서고 있는 것도 사나다 탓이라고 생각했다. 이게 다 사나다가, 아니 겐이치로가 너무 잘나서 그런 거야. 난 분명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사나다, 아니, 아, 짜증나, 겐이치로 주제에 그런 말을 하니까……!

 식장의 커다랗고 하얀 문이 양쪽으로 젖혀졌다. 가운데로 놓인 빨간 카펫과 양쪽으로 파도를 치고 있는 수많은 머리가 보였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 카펫의 끝에 그가 서 있었다. 사나다 겐이치로. 오늘 부로 자신의 남편이 될 사람. 갑자기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끼면서 그녀는 이런 상태로 똑바로 걸을 수 있을까하는 걱정을 했다. 이대로라면 걸어가다가 휙 넘어질 것 같아. 두근두근 떨리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보이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이렇게까지 긴장해 본 경험이 있던가. 피아노 선율로 만들어진 결혼 행진곡도, 사람들의 카메라가 터뜨리는 플래시 소리도, 사회자의 말도 그녀에겐 들리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 아버지가 옆에 있다는 것이 그렇게 안심될 수가 없었다.

 긴장 해소를 위해 살짝 숨을 뱉은 그녀는 아버지와 보폭을 맞추어 행진을 시작했다. 딴, 딴따단. 딴, 딴따단. 친구들의 결혼식에서 듣던 이 음악이 자신을 위해 연주되는 거라는 사실 자체도 굉장히 낯설었고, 눈앞에 서 있는 정장 차림의 그 자체도 어색했다. 그 역시도 긴장했는지 표정이 굳어 있었다. 짧은 행진이 끝나고, 아버지가 사나다를 끌어안았다. 사나다의 어깨를 두드리는 아버지의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이 보여 그녀는 웃음이 날 것 같으면서도 울음이 날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손과 그녀의 손이 만났다. 그가 부드럽고도 세게 그녀의 손을 붙잡고 그녀를 인도했다. 두 사람이 똑바로 서자 정식으로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사실 결혼식이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엄청나게 정신이 없었던 것만은 확실했다. 선서를 할 때에 사나다가 회장이 울리도록 큰 소리로 “네!”라고 대답한 것에 감동을 받았던 건지 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그 때부터 이미 눈물이 터진 상태였다. 그래서 그녀가 선서를 할 때에는 예쁜 목소리가 아닌 울먹거리는 떨리는 소리로 “네.”라고 대답해야만 했다. 벌써부터 우냐고 놀려대는 친구들 목소리가 벌써 귀에 선했다.

 야규의 사회는 매우 깔끔하고 진정되어 있었다. 굳이 새신랑에게 과도한 체력점검을 요구했을 때가 되어서야 사나다와 유리에, 그리고 그의 동창들은 사회자가 어느새 니오로 바뀌어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기회다 싶었는지 동창들은 그를 더 부추겼고, 덕분에 결혼식장은 한동안 사나다 겐이치로의 넘치는 체력을 자랑하는 장으로 바뀌었다. 바보처럼 묵묵히 시키는 대로 다 하고 있는 그에게 한 소리 하고 싶은 마음과 함께 든든한 마음이 같이 든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 사나다, 아니, 아, 진짜, 겐이치로가 체력은 끝내주지. 이렇게나 바보처럼 굳건하고 외곬인 사람은 더 찾을래야 찾을 수도 없을 게 뻔했다. 하지만 그런 점이 그의 매력이었다. 모르는 사이에 그녀는 그런 점 때문에 그에게 조금씩 의지하고 있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주변의 모두에게 손을 흔들어주거나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등의 다양한 제스쳐로 인사를 하면서 식장을 빠져나갔다. 그것만으로 인생의 가장 커다랗고 중요한 행사 중의 하나가 다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두 사람에게는 잠깐의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대기실로 돌아가자마자 의자를 향해 내닫는 유리에를 사나다가 제지했다. 그는 조심조심 그녀를 안아 올렸고 다시 조심스럽게 의자 위에 앉혀 주었다. 뭐하는 짓이냐고 발버둥 칠 뻔 했지만 그렇게 행동하기 직전에 가까스로 유리에는 그가 거추장스러운 웨딩드레스를 입고 급하게 걸어가려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랬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나……, 아니, 겐…… 이치로.”

 “음?”

 “우리 결혼 한 건가?”

 “……그럼 여태 뭘 한 거라 생각하는 건가.”

 “아, 아니. 실감이 안 나서…….”

 “그런 기분이라면야 나도 느끼고 있긴 하다. 조금 꿈같다고 해야 할 지도 모르겠군.”


 유리에는 입을 딱 벌리고 그를 쳐다보았다. 지금 사나다 겐이치로가 꿈같다고 말한 거야? 정말로? 남들이 꿈같다고 하는 테니스 대회 전국우승을 했을 때조차도 정진한 결과일 뿐이다 라면서 아주 살짝 미소를 지었을 뿐이었던 그를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과의 결혼식을 꿈같다고 표현하다니. 유리에의 표정을 보고 그는 자신이 무슨 황당한 짓을 했는지 알지 못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런가.”

 “아, 아니. 겐……이치로가 그렇게 말한 거 처음 들은 것 같아서.”

 “음?”


 사나다는 여전히 자신이 무엇을 처음 말했는지 알지 못 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람보다는 듣는 사람이 말하는 쪽의 버릇을 먼저 눈치 채기 마련이었다.


 “꿈같다고 하는 거.”

 “사실대로 말한 것뿐이다. 유리에, 네가 눈앞에 있는데도 방금 일이 잘 믿기지 않는군.”


 유리에는 한동안 더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어야 했는데 사나다가 수줍다는 듯 살짝 미소 지었기 때문이었다. 이 남자, 내가 20년 넘게 알고 지낸 그 사나다 겐이치로 맞나? 자기와의 결혼식 때문에 그가 살짝 미친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가 유리에는 “사랑을 하는 사람은 모두 바보고, 모두 미쳐있다.”는 마치 수학공식과도 같은 말을 떠올리고는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런데 내가 사, 겐이치로한테 사랑한다고 말했던가?

 겐이치로는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했던가?

 왜 그런 생각이 갑자기 들었는지는 그녀도 명확하게 알 수 없었다. 수면 아래에서 물고기가 튀어 오르듯 떠오른 생각은 그 물고기처럼 수면 밑으로 도로 들어가지 않고 그녀의 머릿속에 박혔다. 잔상이 남는 정도가 아니라 새하얗게 글자들이 눈앞에 떠올랐을 정도였다. 자신이 제대로 말한 적도 없는 것 같았다. 사랑한다고 언제 한 번 진지하게 말한 적이 있었나? 부끄럽단 생각에 괜한 소름이 돋아나는 것을 느끼며 유리에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간혹 몇 번은 말했던 것을 간신히 떠올렸고 그녀는 안심했다. 그러면 그한테서 들은 적은? 그녀는 그 비가 쏟아지던 여름날부터 훗날의 데이트까지를 초단편영화를 보듯 머릿속에서 재생시켜 보았다. 분명히 들었던 걸로 기억하지만 한 번 불안해진 마음은 불길처럼 뻗어나갔다. 이 바보, 아직도 그 때의 약속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거면 어떡해? 사나다 겐이치로라면 그런 일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더더욱 기분이 우울해졌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불안감을 끌어안고 있고 싶지 않았다.


 “저기, 있잖아.”

 “음?”

 “너. 나 사랑해?”


 너무 갑작스럽고도 직설적인 질문에 당황했는지 사나다가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에 비해 그녀는 “밥 먹었어?”라고 물은 것처럼 평소와 같은 표정이었고 그 때문에 사나다는 더 이상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기가 어려웠다. 그는 괜히 목청도 한 번 가다듬고 볼 것도 없는 대기실을 한 바퀴 휭 둘러본 뒤에 다시 유리에의 눈을 마주했다.


 “물론이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결혼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너 그 때 내 몸 봤다고 책임진다고 그랬던 거잖아.”

 “그건 과거의 일이지 않은가.”

 “어쨌든 그걸로 시작한 거잖아.”

 “너는 내가 그 때의 말 때문에 지금까지 온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유리에는 눈만 깜빡였다. 사나다라면 그럴 수 있다. 자신이 아는 사나다 겐이치로는 그런 사람이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는 침묵 속에서 유리에의 대답을 들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인생에서 최고로 행복해야 될 날이라고 말할 이 날에 사나다 겐이치로와 소라가와 유리에는 이런 말도 안 되는 대화를 하고 있었다. 사랑을 전제로 정했을 날임이 분명한 날에 와서야 그녀는 그 사랑을 확인했어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늦었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사나다에게 반한 것이 맞았다. 그럼 사나다는? 겨우 그 때, 고등학교 2학년의 그들은 그런 약속을 하기엔 어린 나이였다. 물론 조상님들을 생각하면 그것이 절대 어린 나이는 아니었겠지만 그 때의 유리에와 사나다는 모두 어렸다. 생각도 어렸고, 그만큼 자기 멋대로 곧은 사람들이었다.


 “큼. 그 때의 마음은 거짓이 아니었다.”

 “응?”


 사나다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몰라서 난감해 하는 것처럼 보였다. 가뜩이나 무서운 인상을 더 찡그리며 그는 잠시 침묵했다. 저 얼굴의 어디에 반해서 나는 멋있다고 난리를 치는 걸까. 스스로도 어이없게 느껴지는 생각이 스르르 가라앉고 나자 사나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


 “그 때의 내가 책임지겠다고 한 소리는 진심이었다. 그 때의 나는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조금 다르다.”


 유리에는 사나다의 눈을 피하지도 않고 똑바로 쳐다보았다. 사나다도 그녀의 눈을 마주보았다. 새삼스러웠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서로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은 근 20년을 아는 사이인 그들에게는 정말 새삼스럽고도 이상하면서, 야릇한 일이었다. 유리에는 눈짓으로 사나다에게 가까이 오라고 신호했다. 그가 그 눈짓을 알아들은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그는 그녀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손을 뻗은 유리에는 그의 목을 천천히 잡아당겼다.


 “유리에, 화장이…….”

 “다시 하면 돼.”


 그녀는 부드럽고 조금 진하게 키스했다. 비싼 돈 잔뜩 들여가면서 한 신부화장에 무슨 짓인가 싶기도 했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화장 정도는 다시 해도 그만이었다. 너무 늦게야 그의 마음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고, 불안감이 그녀를 엄습했다. 그리고 그것은 결혼식을 막 마친 여자가 감당하기에는 결코 좋은 감정은 아니었다. 키스로 모든 것을 무마해보고 싶었다. 그래도 사랑한다고 말해줬으면 해. 잠시 후 떨어지고 나서 유리에의 표정을 본 사나다의 얼굴이 굳어졌다. 유리에의 얼굴에는 온갖 복잡한 감정들이 뒤엉켜 떠올라 있었다.


 “유리에.”

 “응?”

 “나는 그 일 때문에 너에게 청혼을 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가 한 쪽 무릎을 꿇었다. 그녀가 앉은 의자 앞에 자세를 잡은 그는 그녀의 손을 꼭 붙들었다. 비싼 양복인데. 이런 진지한 상황에서조차 머리는 참 이상하고 황당한 생각을 너무 쉽게 떠올렸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유리에.”

 “진짜?”

 “처음에 너를 책임지겠다고 한 것은 의무에서 나온 말이 맞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너를 책임지겠다고 하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내 

희망에서 나온 말이다. 그것은 네 옆에서 너의 인생을 함께 하고 싶다는 뜻이다, 유리에.”


 왠지 눈물이 솟았다. 립스틱이야 다시 바르면 그만이지만 울면 큰일이다. 이미 결혼식장에서도 울어서 망가진 화장을 더 망가뜨리는 것은 그녀가 용납할 수 없었다. 게다가 세상 최고로 예뻐 보여야 하는 날에, 가장 예뻐 보이고 싶은 사람에게 이런 모습이라니. 그녀는 슬쩍 사나다에게서 시선을 돌려 눈물을 삭였다. 쓸데없는 불안감이었다. 결혼식 때문에 너무 감정적으로 고조되어 있던 탓인 게 분명했다. 정말 사람이란 건 불편하다니까.


 “헤헤, 들으니까 좋다.”


 유리에가 환하게 미소 짓자 그제야 사나다의 얼굴에도 미소가 돌았다. 그가 참 대책 없이 잘생겨 보이고 멋있어 보이는 것에 스스로를 중증 콩깍지라고 명명하면서 그녀는 사나다의 손을 꼭 잡았다. 이 남자. 이제 평생 내 남편이 될 이 남자.


 “고마워, 겐이치로.”

 “나야말로 함께해줘서 고맙다, 유리에.”


 이렇게 부끄러운 말을 왜 이제 와서야 다시 하고 있는 것일까. 유리에는 이 말을 얼마 전에도 들었던 것 같다고 생각하다가 깨달았다. 그가 청혼을 했을 때에도 그녀는 “네 옆에서 너의 인생을 함께 하고 싶다.”는 사나다의 진지함 가득 배어난 말에 눈물을 뚝뚝 흘렸던 것이다.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게 열로 느껴질 정도로 유리에는 당황했다. 뭐야, 나 무슨 바보 짓 한 거야? 그렇게 신나게 다 확인해놓고, 펑펑 울어놓고 이제 와서, 그것도 결혼식 날에 남편 될 사람에게 나 사랑하냐고 엄청 심각한 표정으로 물어본 거야? 그녀는 목에서 끼기긱 소리를 내는 녹슨 로봇처럼 굉장히 뻣뻣하고 불편한 각도로 목을 틀어 사나다의 시선을 피했다.


 “왜 그러나, 유리에.”

 “아, 아니. 아, 아무 것도.”

 “음?”

 “아니야. 아니라구! 아니란 말이야!”


 평소의 높은 목소리로 연신 부정을 해대는 유리에를 보고 안심했는지 사나다는 음, 하는 소리만 한 번 내뱉었다. 한 손으로는 여전히 유리에의 손을 쥔 채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난 그는 유리에를 쳐다보았다.


 “유리에.”

 “왜! 뭐! 아니라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어?”

 “슬슬 다시 나갈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예식이 끝났다고 다 끝난 것은 아니다.”

 “아. 그, 그렇지. 나 너랑 결혼식 하는 중이지.”


 아까 전과는 비교될 정도로 부드럽게 고개를 돌린 유리에는 사나다를 올려다보았다. 새삼스럽게 그가 매우 커 보였다. 그의 손을 붙잡고 일어선 후, 그녀가 고개를 홱 돌려 다시 한 번 그에게 키스했다. 가볍고도 짧은, 하지만 깊은 뜻을 담은 키스.


 “나 오늘부터 사나다 유리에니까 책임져!”

 “물론이다.”





(2012. 0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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