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 연습 중
오시타리 켄야 드림
BGM. 와타나베 마유 - 나팔 연습 중
딩동, 학교에서 일괄적으로 하는 모든 활동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담임선생님의 종례가 있기 전부터 학생들은 가방을 챙기기에 바빴다. 이미 가방을 등에 메고서 의자에서 달싹거리는 학생도 있었다. 그 달싹거리는 학생에 오시타리 켄야도 포함되어 있었다. 벌써부터 마음이 들떠 있었다. 빨리 담임선생님이 들어와서 종례를 해주었으면, 그리고 얼른 내가 이 교실에서 나갈 수 있게 해주었으면 하고 계속 바랐다. 켄야의 마음은 이미 저 멀리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 있었다.
종이 친 지 벌써 삼 분이 지났다. 왜 선생님은 오시지 않는 걸까? 초조해진 켄야가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 쪽 창문을 기웃거렸다. 발소리도 들리지 않고, 누가 오는 기색도 안 보였다.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았다가 그는 참지 못하고 또 일어섰다. 아, 와 안 오시나. 창문을 뚫고 나갈 기세로 목을 쭉 빼고 있던 그는 드디어 기다리던 얼굴을 마주하고 재빨리 착석했다. 뚜벅뚜벅 발소리가 몇 번 울리고 난 뒤 교실 문이 열렸다.
“조용, 조용!”
선생님이 학생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때부터 켄야는 이미 엉덩이를 반 정도만 의자에 걸친 상태였다. 선생님의 입에서 ‘그럼 오늘은 이만’이라는 말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래서 켄야는 선생님의 입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런 켄야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선생님은 오늘도 전달사항을 잔뜩 읊었다. 다음 주에는 체력장이 있으니 그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 첫 번째, 내일은 비가 올 예정이라 아침 전체조회를 취소한다는 것이 두 번째, 오늘 주변 선생님들께 2반이 제일 시끄럽다고 주의를 받았다는 것이 네 번째. 또 있나? 켄야는 침을 꿀꺽 삼켰다. 다행히 전달사항은 거기서 끝이었다. 선생님이 들고 들어왔던 출석부를 한 쪽에 끼고 반장에게 인사를 시켰다. 모두 함께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선생님이 ‘내일 보자’고 말했다. 선생님이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가기 무섭게 켄야가 자리에서 튀어나갔다.
잽싸게 계단을 뛰어 내려가 건물 현관을 지났고, 넓게 펼쳐진 운동장을 빠르게 지나가 교문에까지 다다랐다. 멈춰서 한 번쯤 쉴 법도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 직선거리를 지나, 커다란 사거리에 와서야 켄야의 다리가 멈췄다. 크고 넓은 횡단보도는 한참이 지나야 초록불이 들어올 모양이었다. 켄야는 마음이 급했다. 그가 지금 가고 싶은 곳은 사거리에서 조금 더 안쪽의 골목길에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이었다. 학생인 그의 신분으로 자주 가기에는 어려운 곳이었지만 거의 매일 들락날락하고 말았다. 덕분에 그의 한 달 용돈은 이미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켄야는 그 돈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그만큼 얻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횡단보도에 초록불이 들어오자마자 켄야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레스토랑이 보일 것이었다. 정말로 한 달음에 레스토랑이 있는 건물에 도착한 그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2층 창문 위로 커다랗게 붙은 패밀리 레스토랑의 간판. 숨이 거칠어지지도 않은 그가 간판에서 시선을 떼고 건물에 들어섰다.
계단에는 단마다 패밀리 레스토랑의 이름이 예쁘게 적힌 홍보용 가로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켄야에게는 매우 친숙한 그 이름. 이곳은 아기자기한 소품이 많기로 소문이 나 있어서 켄야가 다니는 학교뿐 아니라 멀리 있는 학교의 여학생들까지도 자주 찾았다. 그런 곳에 남학생인 켄야가 매일 들락날락거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계단에 오르기 전, 켄야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벌써부터 심장이 빨리 뛰어서 어쩔 줄을 모르게 되었다. 급하게 온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애쓰면서 꾹꾹 계단을 밟았다. 꽃장식이 걸려 있는 유리문이 보였다. 천천히 그 문을 열었다. 딸랑, 문 위에 달린 작은 금종이 울렸다. 카운터 쪽을 향해 서 있던 웨이트리스가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어서 오세요.”
켄야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소리가 너무 크게 울려서 스스로 깜짝 놀랐다. 작은 머리를 감싸는 단발머리가 매력적인 그녀를 앞에 두고, 켄야는 십 년과도 같은 십 초 동안 다양한 표정변화를 일으켰다. 백 년 같은 오 초가 더 지난 뒤에야 켄야는 간신히 진정했다. 그녀의 미소가 왠지 ‘또 오셨네요.’하고 말하는 것 같아서 어딘지 모르게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녀는 그 말 대신 “자리 안내해 드릴게요.”라는 말로 그를 이끌었다.
그녀가 그에게 혼자 오셨냐는 질문을 하지 않게 된 건 지지난주부터였다. 켄야가 혼자 이 레스토랑을 온 지 여섯 번째만의 일이었다. 비어있는 구석 쪽의 자리로 그를 자연스럽게 안내하고는 그 날의 음료를 추천했다. 오늘은 맛있는 키위가 들어왔는데, 키위 생과일주스는 어떠세요? 오늘은 체리콕이 굉장히 맛있더라구요. 차는 어떠신가요? 켄야는 언제나 그녀가 추천하는 메뉴를 주문했고, 그녀는 언제나처럼 미소 지으며 메뉴판을 들고 사라졌다. 그리고 예쁜 글라스에 음료를 내오거나 따뜻한 차를 내왔다. 켄야는 그런 그녀를 보는 것이 기뻤다. 아직 음료를 주문하거나 계산을 요청하는 말 이외에 다른 어떤 한 마디도 건네 보지 못했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은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렇게 가다가는 다음 용돈을 받기 전까지 못해도 이 주는 그 레스토랑에 가지 못 할 것이라는 시라이시의 걱정 어린 충고에도 그는 이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그녀의 생각 밖에 없었다.
“오늘은 어떤 걸로 하시겠어요?”
“네! 네? 네!”
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눈을 뗄 줄 모르던 켄야에게 그녀의 질문은 매우 갑작스럽게 느껴졌다. 덕분에 그는 황당하리만치 큰 소리로 놀란 대답을 뱉어내었고, 그녀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그가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가 아, 하는 탄식을 뱉어내면서 메뉴판을 손에 쥐었다. 나지막하니 그녀가 풋 웃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머리끝까지 새빨개졌을 거야. 그는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 메뉴판을 높이 들었다. 글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와 오늘은 추천 안 하나? 쫌 시간 끌까. 톡 쏘는 맛이 좋은 체리콕을 그냥 시키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그녀의 추천을 기다리는 것이 나을까. 두 가지 선택을 놓고 고민하는 동안 메뉴판 뒤에서 그녀가 헛기침을 했다.
“손님, 체리콕은 어떠세요? 왠지 오늘은 더 맛있더라구요.”
살짝 미소 짓는 얼굴이 참 빛났다.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리려던 것을 간신히 멈추고 그개 대답했다.
“그, 그걸로 하겠심더.”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또 한 번, 그의 가슴에 사랑의 총알을 날리듯 미소를 한 번 지어주고 그녀가 뒤돌아섰다. 조금만, 조금만 더 나와 눈을 마주쳐주었으면 좋겠는데. 아쉬움이 테이블 위를 덮듯이 켄야가 철퍼덕 엎어졌다. 심장이 쿵쿵거렸다.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다. 이름도 모르는, 메이드복에 달린 명찰로 성이 ‘사토리’라는 것만 알 수 있는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얼마나 지나야 말할 수 있게 될까. 아니, 웨이트리스와 손님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화 말고 다른 말을 하고 싶었다. 아르바이트 끝나면 뭐하심꺼? 길지도 않지만 짧지도 않은 그 말을 만들지 못해서 언제나 켄야는 레스토랑을 나서기를 주저했다. 그러다 보면 시간은 훌쩍 한 시간, 두 시간이 되어가기 마련이었다. 오늘은 말할 수 있을 거래이. 카운터 앞에서 다른 웨이트리스와 무언가 대화를 나누는 듯한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켄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할 기래이.
“주문하신 체리콕 나왔습니다.”
“가, 감사함더.”
켄야가 고개를 꾸벅 숙여가며 인사를 했다.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여 그녀가 인사를 해 주었다. 그것을 보자 켄야는 자기도 모르게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저기요!”
“네?”
“그, 그, 사, 사, 사, 사토리상은 예, 예, 예…….”
“손님?”
“예쁘심더.”
주변에서 그릇이나 잔이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켄야와 그녀 사이에는 그 어떤 소리도 울리지 않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가 켄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고, 켄야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으로 그녀의 눈빛을 받아내었다. 몇 번이고 그 상태 그대로 그녀가 눈만 깜빡였다. 켄야는 정말 졸도할 것만 같았다. 이렇게 오랫동안 눈을 마주치고 있는 것만으로도 설레어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와 동시에 이런 말부터 내뱉어버린 자신이 부끄러워서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그녀는 왜 오늘따라 눈을 이렇게 오래 마주치는지, 왜 웃거나 정색하지도 않는지, 정말이지 켄야는 죽을 맛이었다. 십 년과 백 년을 넘어 천 년에 가까운 순간이 흘러갔다. 마침내 그녀가 움직였다.
“감사합니다.”
평상시보다 더 환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가 인사를 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얼떨결에 켄야도 같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허리를 곧게 펴고 그녀가 눈인사를 한 뒤 돌아섰다. 또각또각, 구두가 바닥에 부딪히면서 경쾌한 울림을 만들어냈다. 멍청한 표정으로 켄야는 그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지금 감사하다캤나?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한참이나 그 말을 곱씹어보던 켄야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황급하게 잔을 들어 한 모금을 삼키다가 켁켁거렸다. 톡톡 쏘는 탄산이 목을 괴롭혔다. 방금 이 체리콕이 자신의 생명을 위협할 뻔 했다는 사실에는 전혀 개의치 않고 행복에 잠겼다. 감사합니다. 말도 참 곱게 한데이. 지금 그의 눈에 그녀의 어느 부분이 안 예뻐 보이겠냐마는, 표정만을 보더라도 그는 정말 푹 빠져 있었다. 사토리. 이름은 무엇일까? 도도한 것이 왠지 매력인 그녀의 외모와 어울리는 세련된 이름일까 아니면 사랑스러운 이름일까. 생각이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그는 빨대로 천천히 음료를 빨아올리다가 말고 그녀를 쳐다보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얼음에 부딪혀 찰랑거리는 음료수의 표면은 줄어들지 않고 계속 그 위치였다.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기를 기다려서 다른 패밀리레스토랑에 들어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었다. 웨이트리스가 아닌 그냥 손님으로 그녀가 앉아있었으면 했다. 자신과 마주보고 앉아 조잘조잘 다른 이야기를 해주었으면 싶었다. 아직까지 한 번도 그녀가 무언가를 먹거나 마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켄야는 새삼스럽게 놀랐다. 웨이트리스인 그녀가 손님인 켄야 앞에서 먹거나 마시는 행동을 할 리는 당연히 없었다. 그녀는 어떤 모습으로 밥을 먹을까. 왼손잡이일까, 오른손잡이일까. 보통 왼손을 이용해서 잔을 내려주는 걸 보면 왼손잡이일지도 몰랐다. 왼손으로 숟가락을 쥐고 있을까. 차를 마실 때는 양손으로 잔을 붙잡고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멋대로 켄야는 머릿속에서 그녀의 모습을 그렸다. 밥을 먹는 모습, 물을 마시는 모습, 차를 마시는 모습, 그에게 다과를 건네는 모습, 조잘조잘 소소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모습, 그리고 언제나처럼 환한 미소를 짓는 모습까지.
거기까지 생각하고 켄야는 현실로 돌아왔다. 상상만으로도 설레어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데이트. 그가 상상하는 데이트가 현실로 이루어지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괜스레 목이 탔다. 단숨에 삼분의 일 정도 되는 양을 꿀꺽꿀꺽 넘기고 목에서 느껴지는 탄산에 몸부림을 잠깐 쳤다. 얼음까지 하나 입에 물고 와드득와드득 깨물었다. 잔뜩 열이 오른 그 스스로를 식혀줄 필요가 있었다. 부서진 얼음조각들이 혀에 닿아 녹아내렸다. 목 뒤로 퍼지는 차가운 기운에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양 손으로 팔을 세게 문질렀다. 마찰열이 손을 따뜻하게 했다. 고개를 쭉 빼서 앞쪽을 쳐다보았다. 웨이트리스 사토리는 새로운 손님을 맞으러 문 앞에 나가 있었다.
다행히도 새로 온 손님은 교복을 입은 여학생 둘이었다. 저들끼리 까르르 떠드느라 사토리의 말을 듣지 못해서 사토리가 세 번이나 같은 말을 다시 했다. 아, 쫌. 두 여학생의 웃는 소리는 패밀리레스토랑 전체를 울릴 정도였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각각의 손님들이 모두 한 번씩 고개를 돌렸다. 그 와중에 켄야의 눈이 가장 번뜩였는데, 사토리가 여전히 여학생들을 안내하느라 애먹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사토리가 말 대신 손짓으로 자리를 안내했다. 여학생들은 여전히 떠들면서 자리에 앉았다. 여학생 하나가 사토리가 내미는 메뉴판을 낚아챘다. 기분이 나쁠만한 상황이었다. 켄야는 조심스레 사토리의 표정을 살폈다. 놀랍게도 사토리는 여전히 생긋 웃고 있었다. 아, 이런 데서 일하믄 당연한긴가. 하지만 미묘하게 흔들리는 입 꼬리를 보니 기분이 나쁘긴 한 모양이었다. 괜히 저까지 기분이 다운되어 켄야는 다시 얼음을 입에 물었다. 와드득와드득. 노려봐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켄야는 여학생 두 명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한참만에야 두 여학생은 주문을 했고, 사토리는 방긋 웃으면서 그 주문을 받았다. 메뉴판을 받아들고 사토리가 돌아섰다. 카운터를 향해 가는 사토리의 어깨가 살짝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왔다.
사토리가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게 되고 나서야 켄야도 다시 눈앞의 체리콕에 집중할 수 있었다. 얼음이 녹아서 그런지 아까처럼 맛있지 않았다. 얼음 때문이 아니라 기분이 다운된 탓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문제는 자신이 아니라 사토리였다. 아까 전의 여학생들 때문에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을까. 지금쯤 기운을 잃어서 축 쳐져있는 것은 아닐까. 속상해 하면 어떡하지. 마치 벌써부터 그의 남자친구가 된 듯 그녀가 걱정되었다. 아무리 이것이 아르바이트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이런 대우를 받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무언가 그녀의 기분을 좋게 해 줄 만한 것은 없을까. 그녀가 기운을 낼 수 있는 무언가를 해주고 싶었다.
한참 골몰히 생각에 빠져있느라 체리콕 잔에 꽂힌 빨대만 휘휘 젓고 있던 켄야는 문득 정신이 들었다. 지금 몇 시지? 여섯시가 가까워져 가는 시간. 저녁을 먹으러 올 손님들이 많아질 시간이었다. 복잡해지기 전에는 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음료를 시킨 지 벌써 한 시간은 더 되었다. 이런 손님이 오래도록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가게 입장에선 곱게 보이지 않을 터였다. 주섬주섬 핸드폰과 가방을 챙겨서 자리에서 일어난 켄야는 슥 카운터를 돌아보았다. 사토리가 있을까. 운명처럼 사토리는 계산대 앞에 서 있었다. 그는 가방을 고쳐 메고 발을 떼었다. 나가기 전에 한 번 더 사토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계산해드릴까요?”
“아, 예, 부탁드림더.”
“거스름돈 드릴게요, 잠시만요.”
“저, 사, 사토리상.”
“네?”
침을 꿀꺽 삼켰다. 목소리를 떨리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토리가 고개를 살짝 갸우뚱했다. 켄야는 심호흡을 했다. 좋아, 힘내는 기라, 오시타리 켄야.
“아, 아르바이트 언제 끝나심꺼?”
“저요?”
“그, 저, 아르바이트 끝나믄 저, 저랑 데이트 안 하실래예?”
깜짝 놀란 듯 사토리의 눈이 커졌다. 깜빡. 깜빡. 깜빡. 눈을 여러 번 깜빡이는 동안이 어쩌면 그렇게 긴 시간처럼 느껴지는지, 켄야는 오늘 하루만 해도 천 년을 지나 수만 년을 겪은 것처럼 느껴졌다. 계산대를 붙들고 있던 사토리의 손이 어중간하게 공중에 떴다. 허공을 조금 돌던 손이 그녀의 입가로 가까워져 갔다.
“저한테 데이트 신청하신 거예요?”
“그, 그, 그렇심더!”
다시 또 눈만 깜박이는 시간이 흘렀다. 켄야는 어쩔 줄을 몰랐다. 거스름돈도 그냥 남겨두고 도망치고 싶었고, 그렇다고 해서 정말 도망칠 수도 없었다. 눈이 마주치고 있다. 숨을 제대로 쉴 수조차 없었다.
“열 시에 끝나는데, 그래도 괜찮으세요?”
“기다리겠심더!”
과장된 행동임을 누구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켄야는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토리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항상 지어주던 그 미소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달랐다. 진심으로 우러나서 환하게 웃어주는 느낌이 들어 켄야는 기뻤다. 그녀를 웃게 했다. 방금 전까지 도망치고 싶던 기분은 전부 사라지고 날아갈 듯 가벼운 기분이 들었다.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후후 웃던 사토리가 다시 시선을 맞춰왔다.
“그럼 끝나고 정리해서 내려갈게요. 데리러 오시는 거죠?”
“그러겠심더! 감사합니데이!”
사토리가 손을 내밀었다. 켄야는 자기도 모르게 두 손을 붙여 그릇 모양으로 만들었다. 사토리가 다시 웃었다. 그녀의 손에서 동전 몇 개가 떨어졌다. 켄야는 그대로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꾸벅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인사했다. 어딘가를 달려야 했다. 이 날아갈 듯한 기분을 마음껏 표현하고 싶었다. 그는 패밀리레스토랑의 문을 박차고 나왔다.
다시 학교까지 돌아가서 빠른 속도로 운동장을 열세바퀴나 뛰고 나서야 켄야는 쓰러지듯 멈췄다. 그리고 흙투성이가 된 교복을 보고 화들짝 놀랐고, 급하게 또 달리기 시작해 집으로 향했다. 팽개치듯 교복을 벗어 던지고 최대한 깔끔하고 멋있어 보이는 옷을 고르기 위해 애썼다. 옆에서 동생 쇼타가 ‘너 지금 뭐하냐’ 하는 눈으로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입으로 밀어 넣었고 양치도 빠르게 했다. 몇 번이나 입 안에 손을 모아 ‘하~’하고 바람을 불어서 양치가 잘 되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최대한 달리지 않기 위해 꾹꾹 자신을 누르면서 발을 옮겼다. 혹여 급하게 달리다가 땀이라도 나서 첫 데이트에 땀 냄새를 풍기는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스피드스타’라는 별명은 어디 가지 않았다. 결국 켄야는 뛰는 것과 걷는 것의 애매한 경계에 걸친 속도로 움직였다. 시간은 아홉시 반. 사토리의 일이 끝나려면 삼십분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삼십분 동안은 뭘 하면 좋을까? 시간이 가지 않았다. 시계를 자꾸만 들여다보아도 시침은커녕 분침도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왠지 초침은 평소보다 수십 배는 더 느리게 움직여서 켄야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한여름의 더위가 공격하는 것도 아닌데 켄야는 숨이 턱턱 막혔다. 이제야 아홉시 사십분. 이십분이 더 남아 있었다. 이십분은 어떻게 또 지나가는 걸까. 그동안은 뭘 해야 할까.
초조하게 건물 앞을 수십 번 왔다갔다하고 난 뒤,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서 블록을 한 바퀴 돌았다. 블록을 다섯 번째쯤 돌았을 때 시침이 드디어 열 시를 가리켰다. 사토리는 과연 바로 일을 마치고 나올까? 열시에 일이 끝난다고 했으니 정리를 해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려면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그럼 몇 분이나 걸릴까? 삼 분? 아니 길게 잡아 오 분?
켄야는 열시 십 분이 되어서야 자신이 무엇을 잘못 생각했는지 깨달았다. 남자인, 그리고 성격이 급한 그에게 뒷정리라던가 옷 갈아입는 등의 행동은 삼 분이면 충분했다. 하지만 여자이고 차분한―그렇게 보이는― 사토리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이었다. 여자들은 화장을 하는 데에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했던가. 그렇게 예쁜 옷을 입고 있다가 다른 옷으로 또 갈아입으려면 분명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 켄야는 점점 초조해졌다. 그녀를 만날 시간이 가까워지자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이 점점 심해져서 머릿속이 울렸다.
또각.
계단에서 소리가 났다. 또각또각. 구두를 신은 누군가가 내려오는 모양이었다. 켄야의 시선이 계단을 향해 고정되었다. 검은색 구두 위로 매끈하게 뻗은 다리가 먼저 나타났다. 그리고 무릎 위부터는 연두색 치마가 시작되었고, 그 위로 하얀 블라우스가 나타났다. 어깨 위로 그녀의 단발머리가 보였다. 사토리였다.
“많이 기다리셨나요?”
“아, 아님더! 방금 왔심더!”
“거짓말. 위에서 계속 봤어요.”
그녀가 기다란 손가락을 뻗어서 위를 가리켰다. 켄야의 시선이 절로 그녀의 손가락을 가리켰다. 아차. 2층의 패밀리 레스토랑은 아직도 불이 켜진 상태였고 커다란 창문으로는 당연하게도 그를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켄야의 얼굴이 붉어졌다.
“저, 그, 잘 부탁드립니데이! 오시타리 켄야라 캅니더.”
“사토리 치에예요. 잘 부탁드려요.”
꾸벅 인사를 하는 그에 맞추어 사토리도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켄야는 지금 이 순간 가장 행복한 것은 자신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어딘가에서 나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두 사람의 첫 데이트를 축복하는 것처럼.
(2013. 07. 24.)
'단편 > 드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에게 주는 약속 - 시시도 료 (0) | 2017.01.01 |
---|---|
숲 속 괴물과 결혼한 아가씨 - 치토세 센리 (ver. 동화) (0) | 2017.01.01 |
너와 나의 굴레가 끊어진다면 - 시시도 료 (0) | 2017.01.01 |
기다려 온 고백 - 사나다 겐이치로 (0) | 2017.01.01 |
Wedding March - 사나다 겐이치로 (for. 스키아님) (0) | 2017.0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