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주는 약속
시시도 료 드림 (For. 셀레스틴님)
무작정 달린 지도 한 시간이 넘은 것 같았다. 시계를 들고 나오지 않은 탓에 잠시 속도를 줄였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어 핸드폰을 꺼냈다. 시시도 료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나와서 뛰기 시작한 지 두 시간이 넘었다. 그렇게 오래 달렸나? 자꾸 도피하려다 보니 시간이 흐르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게 이 정도로 고민할 일이었던가? 물론 자꾸만 다른 쪽으로 생각이 튀는 탓에 실질적으로 제대로 고민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결국 시시도는 아예 발을 멈추고 가까이 보이는 벤치로 향했다. 한 번 속도를 줄였더니 급속도로 피로가 몰려왔다. 앉고 나니 다리가 한결 편했다. 그렇다고 복잡한 머릿속이 단번에 정리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까보다는 좀 더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정도로 고민할 일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충분히 그럴 만한 일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시시도를 이렇게까지 곤경에 빠뜨릴 수 있는 사람, 마키 카온에 관련된 일이기 때문이었다.
“아으으으으.”
단어보다는 낱개의 자음에 가까운 신음을 흘리며 시시도는 머리를 쥐어 쌌다. 답답해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어떻게 하지? 이 마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몰랐고, 그 사이 잔뜩 화가 난 카온은 삼일 째 연락 두절이었다. 오늘도 메시지 옆의 1이 사라지고도 한 시간 넘게 아무런 알림이 없는 메신저 대화창을 쳐다보다가, 시쳇말로 ‘멘붕’을 일으키며 집에서 뛰쳐나온 참이었다. 두 시간 동안 머릿속엔 뭐라고 하지, 어떻게 사과를 해야 화가 풀리지, 그냥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게 나은가, 그랬다가 내가 곤란해지면 등등 온갖 의문문이 떠올랐으나 그에 따른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절망적이었다.
*
“료, 딴 여자 생겼어?”
시시도는 마시던 에너지 드링크를 그대로 뿜었다. 가벼운 ‘콜록’ 수준이 아니라 연출된 상황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푸우웁’ 소리를 내며 꽤 멀리까지 음료수를 뿜어버렸다. 켁켁 대느라 목이 쓰렸고, 코로도 조금 흘러들어갔는지 코가 매웠다. 결국 눈물까지 조금 뺀 뒤에야 간신히 카온을 돌아볼 수 있었다. 평소였다면 얼른 달려와 등을 탁탁 쳐줄 법도 한 카온은 팔짱을 낀 채 꼼짝 않고 시시도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잔뜩 굳은 카온의 얼굴에 침이 꿀꺽 넘어갔다.
“갑자기 뭔 소리야.”
“그게 아니면 요즘은 왜 스킨십이 없어?”
아뿔싸. 올 게 왔구나 싶었다. 시시도는 슬쩍 자신의 운동화로 시선을 옮겼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길게 풀어져 흙바닥에서 나뒹구는 신발 끈이 보였다. 천천히 몸을 낮추어 신발 끈의 양 끝을 붙잡았다. 곁눈질을 하니 삐딱하게 선 카온의 다리가 보였다. 아, 도대체 뭐라고 말해야 돼. 아무렇지 않은 척, 느릿느릿 신발 끈을 묶었지만 심장은 백미터 달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뛰었다.
“그……. 딴 여자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 너만 좋아한 게 십 년도 넘는데.”
신발 끈을 최대한 꽉 동여맸다. 좀 삐뚤긴 했지만 나름대로 리본의 모양은 갖추어서 괜찮아 보였다. 고개를 들기가 무서웠다. 지금 카온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다시 한 번 곁눈질을 했지만 여전히 삐딱한 다리만 보일 뿐이었다. 심기일전하듯 한숨을 훅 뱉고 상체를 들었다.
“아아, 난 또~ 손도 안 잡길래 잡은 물고기한테는 밥도 안 주나 했지~”
목소리는 한껏 비꼬는 하이 톤에, 얼굴에선 찬바람이 나오는 듯 했다. 온몸을 바늘로 찔리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방금 한 말마따나 시시도는 십여 년 동안 카온만 좋아해 온 외곬이었다. 왜 그렇게 됐냐고 물어봐도, 본인 역시 이유는 몰랐다. 어릴 적부터 거의 매일을 함께 보냈다. 학교도 같이 다녔다. 좋아한다고 고백도 하기 전에 손잡는 건 이미 당연한 일이었고, 끌어안는 것 정도야 아무렇지 않았다. 볼에 뽀뽀하는 것 역시 진즉에 이루어졌다. 그렇게 당연하고 익숙한 사이에서 새로운 설렘이 된 건 당연히 ‘사귀자’는 말 때문이었다.
그 이후로 좀 더 발전해왔다. 입술을 맞대었고, 혀를 섞었다. 놀라운 일이지만 그렇게 된 지는 이제 겨우 몇 달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시시도는 카온에게 어떤 스킨십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할 수 없었다.
“그럴 리가 있냐…….”
“그럼 손은 왜 안 잡아?”
칼날 같은 눈빛이 가슴에 꽂혔다. 무슨 말로 대답을 해야 할 지 고민이 되었다. 여전히 뚱한 얼굴로 카온은 시시도와 같이 걸었다. 그렇게 공원 한 바퀴의 짧은 산책이 끝날 때까지 시시도는 카온의 손도 잡지 못 했고, 대답도 하지 못 했다. 슬쩍 다가오는 카온의 손을 못 본 척 자연스럽게 비켜갔다. 공원 입구에서 카온이 우뚝 멈춰 선 순간, 시시도는 자기도 모르게 “망했다.” 소리를 중얼거렸다.
“이 바보 멍청아, 너 안 볼 거야!”
빽 소리를 질러놓고 카온이 잽싸게 뛰어가기 시작했다.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는 속도였지만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막상 붙잡아도 어떤 말을 해야 카온의 마음을 풀어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안아주면 해결 되나? 아니, 무작정 그러기도 좀 그랬다. 그건 카온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였다.
좋아 죽겠어서, 달아올라서 미칠 것 같아서 손을 못 대겠어. 손을 잡을 때마다, 끌어안아 품으로 당길 때마다, 입술을 맞댈 때마다 끓어오르는 욕구를 참을 수가 없었다. 닿는 손이 너무 뜨거워서 타 들어갈 것만 같았다. 전부 틀에 박힌 미사여구로만 여겼던 표현을 자기가 사용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원래 다 이런 건가. 누구한테 털어놓기도 어려웠다. 불이라도 붙을 것처럼 뜨거운 자신의 손과 심장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 했다. 미치도록 닿고 싶은 욕구가 일면서 동시에 너무도 뜨거워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닿으면 닿을수록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되었다.
혈기왕성한 고등학생 시절도 어찌어찌 지나왔는데 사귀기 시작하니 사춘기 소년이 된 것 마냥 모든 혈기가 끓어올랐다. 당연한 거지만, 그게 조금 무섭기도 했다. 너무 빠른 진도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무엇보다 그러기 위해 고백한 것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닿고 싶고 만지고 싶다는 건 좋아한다는 감정에 부수적으로 딸려오는 것이지, 그걸 위해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귀는 것은 아니니까.
물론 사귀기 이전에도 카온과 손을 잡는 건 매번 두근거렸다. 끌어안는 것도 그랬다. 하지만 이 정도로 불이 붙을 것만 같다든지 더 많은 것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하긴, 만날 손잡고 끌어안던 사이가 키스하는 사이가 됐는데 그 이상을 하고 싶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거긴 하지.
젠장. 얼굴에 또 열이 올랐다. 시시도는 손을 들어 얼굴을 쓸었다. 손바닥도 뜨거워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원래도 좀 열이 많은 체질이긴 했지만 최근엔 더 심하게 느껴졌다. 특히 카온이랑 있을 때는 걷잡을 수 없었다. 시시도는 결국 모자를 벗었다. 손을 연신 흔들어 도움이 될 리 만무한 바람을 일으켰다.
보통 여자애들보다 조금 큰 편이라는 카온의 손은 시시도의 손에 비하면 항상 작았다. 잡았을 때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적지근한 체온이 좋았다. 남자하고는 달리 어딘지 말랑말랑하고 보드라운 촉감도 좋았다. 깍지를 끼면 왠지 카온을 제 것이라 표시하는 것 같아 더 설레기도 했다. 손가락을 통해 느껴지는 작은 고동도, 그에 미묘하게 박자를 맞추는 것처럼 느껴지는 제 심장박동도 신기했다.
꼬마 때부터 비슷했던 체격이 어느새 저보다 작아져 품 안에 들어올 정도가 되었을 땐 정말로 기뻤다. 운동을 열심히 한 보람이 있다고도 생각했다. 완전히 품속에 폭 끌어안을 만큼의 차이는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도 만족스러웠다. 어느 날 문득 카온의 정수리가 보인다는 것을 깨닫고 멍하니 있다가, 올려다보는 카온의 시선에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친 적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첫 키스……. 늘어놔서 뭐 하겠는가. 그냥 남들이 말하는 모든 감정을 시시도는 단번에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마냥 좋은 느낌만은 아니지만 분명히 설레고 기분 좋은 것. 그 이후로도 여러 번의 키스가 있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이상으로 욕구가 번져 나갔다. 하지만 사귄 지 얼마나 됐다고. 그 생각이 계속 시시도를 가로막았다. 그렇게 계속 눌러놓다 보니 슬슬 손이 닿는 것만으로도 불에 덴 것처럼 달아오르는 자신의 몸이 버거워졌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냐고. 내가 그러니까 말이야. 어, 너랑……. 아, 젠장. 시시도는 머리를 세게 긁적였다. 십 년을 넘게 좋아해도 하나하나가 어려운 건 매한가지였다.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할 지 방법을 몰랐다. 말하는 게 조금 부끄럽기도 했지만, 아직 준비도 되지 않았을지 모르는 카온에게 무작정 들이미는 형식이 되어버리는 것은 원치 않았다. 자신이 조금만 더 예민하거나, 조금만 더 여자에 대해 잘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카온은 지금 어떤 마음일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시시도는 다시 얼굴을 쓸어 내렸다. 젠장, 답답해. 답이 나오기 전까지는 카온에게 다시 연락하기도 애매했다. 일단 오늘은 그냥 돌아가야 할까. 이렇게 그냥 연락을 하지 않는 것도, 그렇다고 무작정 아무 답 없이 연락하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을 터였다.
“하아.”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결국, 시시도 스스로가 빨리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
벤치에 가만히 앉아 고민해봐야 사실대로 이야기한다는 선택지 외엔 없었다. 머리를 잔뜩 싸매고 있던 양손을 천천히 무릎 옆에 내려놓았다. 자기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흘렀다. 솔직하게 말하면 어떻게든 해결되겠지. 마음이 정리되고 나니 왜 고민했을지 모르겠는 정도로 간단하고 당연한 문제였다. 시시도는 삼 일 동안이나 고민한 자신이 한심해지기 시작했다. 카온이 돌아서서 뛰어갔을 때 바로 쫓아가서 말했으면 됐을 걸.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
진짜 꼴불견이다. 시시도는 양 손으로 뺨을 때렸다. 역시 당장 만나러 가야겠어. 하지만 카온은 이미 오늘 보낸 메시지를 무시한 상태였다. 그냥 무작정 카온네 찾아갔다가 카온이 없으면 그것도 곤란했다. 가족들끼리도 친구처럼 지내는 탓에 두 사람에게는 늘 부모님의 과도한 관심이 함께 했다. 괜히 걱정 끼쳐드리는 것보다는 확인하고 가는 게 낫겠지. 시시도는 메신저의 친구 목록을 밑으로 쭉 끌어내렸다. 카온의 동생 이름을 찾아낸 뒤, 톡톡 핸드폰을 두드렸다.
[카온 집에 있냐?]
숫자가 사라질 때까지 마냥 핸드폰만 쳐다보자니 그것도 민망했다. 시시도는 천천히 집을 향해 걷기로 했다. 카온네로 가려면 어차피 집을 지나쳐야 했다. 해가 질 즈음이라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몸에 잔뜩 오른 열이 조금씩 식는 게 느껴졌다. 덕분에 머릿속도 같이 차분해졌다.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ㅇㅇ 근데 왜 나한테 물어? 싸웠음?]
싸웠다고 해야 하나. 시시도는 그냥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 속으로 밀어 넣었다. 집에 있으면 됐어. 숨을 가다듬고 조금 걸음을 빨리 했다.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자 집이 보였다. 지나쳐서 한 블록을 더 들어가야 했다. 괜한 긴장감에 주먹을 꼭 쥐었다. 터벅터벅. 그리고 마침내 카온네 집 현관문이 보였다.
딩동.
자기네 집 초인종 소리만큼이나 익숙한 소리가 시시도의 귀를 울렸다. 네에, 안쪽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철컥, 문이 열릴 때 시시도는 침을 꿀꺽 삼켰다.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카온의 어머니였다.
“어머, 료. 오랜만이네.”
“안녕하세요. 카온 좀 불러주실 수 있으세요?”
“잠깐만 기다리렴.”
빙글, 뒤돌아선 카온의 어머니가 한껏 목청을 높여 카온의 이름을 불렀다. 거실에 있었는지 동생도 빼꼼 고개를 내밀고 시시도에게 인사를 했다. 어색한 미소로 화답해 준 시시도의 시선이 자연스레 계단으로 옮겨 갔다. 카온이 내려오고 있었다. 시시도와 눈이 딱 마주친 카온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는 게 보였다.
“왜 왔어?”
“일단 나가서 얘기하면 안 될까.”
찬바람이 쌩쌩 부는 목소리에 옆에 서 계신 어머니의 눈이 커다래졌다. 카온은 그대로 서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제 누나의 표정을 본 동생이 납득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싸웠네.”
“어머, 웬일로?”
금방이라도 ‘무슨 일인지 말해보렴’이라고 말할 것 같은 어머니의 표정엔 어떻게 대처해야할 지 몰랐다. 시시도는 차라리 얼음장 같은 카온을 보는 쪽을 택했다. 안 나오고 버틸 기세던 카온의 표정도 미묘하게 찡그려졌다. 한숨을 푹 뱉은 카온이 현관으로 나왔다. 대충 편한 신발을 구겨 신는 카온을 보며, 시시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갔다 올게요, 카온의 뒤로 시시도도 이어 꾸벅 인사를 했다. 잘 다녀오라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왠지 아쉬움이 묻어나는 듯 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걸었다. 방향은 자연스럽게 동네의 작은 놀이터로 향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그 놀이터였다. 모래밭은 사라지고 폭신폭신한 재질의 바닥으로 변했지만 추억이 서린 장소라는 점은 변함이 없었다. 놀이터에 들어선 카온의 발이 멈추었다. 시시도는 조금 더 뒤 쪽에 멈춰 섰다. 좋아, 결심한 대로 말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솔직하게.
“그…… 미안하다고.”
“뭐가?
“최근에 스킨십 없었던 거.”
시시도는 자신이 머리가 나쁜 게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그렇게 삼일동안 고생해서 내린 결론의 끝에 뱉어낸 말이 겨우 ‘미안해’ 뿐이라니. 어딘가 연애 교과서에 쓰여 있기라도 한 것 같은 판에 박힌 대사였다. 솔직하게 이야기하겠다는 결심은 다 어디로 갔는지, 머리가 나쁜 게 아니라 간이 작은 거라고 해야 할 판국이었다.
“이유도 얘기할 참인 거야?”
돌아보지 않는 카온의 표정이 어떨지 걱정 됐다. 시시도는 심호흡을 했다. 그냥 솔직하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말하자, 시시도 료. 그리고 입을 막 떼려는 순간, 카온의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말도 안 할 거면서 왜 나오라고 한 거야? 그냥 미안하다고 하면 해결되는 거 아니잖아.”
“아, 그게…….”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마냥 유치원생도 아니고, 손잡고 뽀뽀하고 키스 좀 하고 싶은 게 어디가 어때서? 여태 다 해놓고 왜 이제 와서 안 하는데? 나 엄청 서운하거든?”
속사포처럼 터져 나오는 말에 시시도는 어안이 벙벙했다. 눈만 깜빡거리며 카온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삼 일 동안 아무런 연락도 주고받지 않았으니 시시도만큼이나 카온도 답답했을 터였다.
“그러니까…….”
“그래, 미안한 건 알겠어. 그래서 이유가 뭔데? 진짜 사실은 딴 사람 좋아하게 된 거 아냐?”
“카온.”
시시도는 그대로 카온의 허리를 껴안았다. 멍청아. 안고 싶지 않을 리가 없잖아. 이렇게 좋아하는데……. 선선한 바람에 차분하게 가라앉았던 감정이 순식간에 불이 붙어 솟아올랐다. 심장박동이 급속도로 빨라졌다. 손끝으로 피가 쏠리는 것만 같았다. 뜨거웠다.
“말 좀 하자.”
카온이 힘을 주어 제 허리를 감은 팔을 붙들었지만 시시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내가 둔해서 이런 거 잘 모른다고 해도, 적어도 지금 진짜로 놓으면 진짜 맞을 수도 있다는 건 알겠어. 카온의 손이 닿은 데가 전기라도 통하듯 화끈거렸다.
“스킨십을 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벌써 몇 번째 멈추는 건지 모르겠다. 말을 하는 게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이 말을 카온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이었다. 아, 진짜 결국 너도 똑같은 남자구나. 만약 카온이 그렇게 말한다면 어떨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뭔데?”
“못 참겠다고.”
그 어느 때보다 침묵이 불편했다. 어색한 기류 속에 여전히 손은 뜨거웠고 온몸으로 퍼지는 고동은 시끄러웠다. 가까이 붙어있는 탓에 카온의 숨소리가 가깝게 들렸다. 아까보다 조금 빠른 숨소리. 아, 지금 무슨 표정일지 가늠이 안 돼. 괜히 시시도는 목을 가다듬는 척 헛기침을 했다.
“지금은 건드리기만 해도…… 그대로 못 참을 것 같단 말이야.”
해도 진 푸르른 밤하늘 밑에 얼굴이 뜨거웠다. 당연하게 들이마시고 뱉어야 할 숨조차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하니 여간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게 아니었다. 카온의 머리 위에서 숨이 흩어졌다. 더운 공기가 두 사람을 둘러쌌다. 두근, 두근. 긴장감만 최고조로 올라 점점 숨 쉬기가 어려웠다.
“바보야?”
카온의 고개가 반쯤 돌아왔다. 끌어안고 있는 탓에 얼굴을 마주하기가 어려웠다. 카온도 그 생각을 했는지 탁탁 시시도의 팔을 쳤다. 아, 이건 풀라는 표시인가. 주춤주춤 시시도가 팔에 힘을 빼자 카온이 홱 몸을 돌려 시시도를 마주보았다. 이젠 안 뜨겁겠지 싶은 건 찰나였다. 카온의 양손이 다시 시시도의 팔을 붙들었다. 아.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놓고 흠칫 놀라 입을 다물었다. 왠지 잘못해서 혼나는 강아지가 된 기분으로 시시도는 카온의 시선을 받아들였다.
“뭘 참는 건데? 우리 사귀는 거 아니야? 스킨십 문제도 서로 대화해서 맞춰 가면 되는 거잖아. 우리가 무슨 예전 같은 유치원생도 아니고, 사귄 지는 얼마 안 됐다 쳐도 서로 좋아한 지 십 년도 넘었는데 그 정도 못 맞출까봐?”
구구절절 맞는 소리였다. 시시도의 어깨가 점점 더 처졌다. 왜 고민했던 거야, 나. 처음부터 솔직했으면 싸움 아닌 싸움을 하는 일도 없었을 텐데. 미친 듯이 치솟는 감정에 자기마저 휩쓸렸던 게 분명했다. 꼴불견이구만.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꾹 참고 카온의 눈을 맞추었다. 말도 안 되는 걸로 고민한 대가니까 ‘이 바보야’하는 눈길 정도는 제대로 받아야지.
“처음부터 솔직히 말했으면 좋았잖아.”
“그러게. 바보 같았어, 미안.”
“그래서…….”
아까 전까지 속사포로 말을 쏟아내던 입이 앙 다물어졌다. 카온의 뺨이 붉었다. 결국 카온이 먼저 시선을 피했다. 카온이 또 무심결에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 손끝이 살살 시시도의 팔을 간질였다. 젠장. 닿고 싶어 미치겠어.
“뽀뽀는?”
그러고서 기껏 뱉어낸 단어가 ‘뽀뽀’라니. 붉은 카온의 얼굴에 풋 웃음이 나려는 걸 꾹 참고 시시도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한동안은 키가 비슷해 까치발을 들어 이마에 뽀뽀를 했던 기억이 선명한데 이젠 고개를 조금만 숙이면 된다는 사실에 매번 감사했다. 이마에 쪽. 삼 일 동안 쌓인 감정을 풀어내기엔 부족할 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었다.
카온은 어느새 손을 놓고 제 이마를 손가락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불타오르는 느낌은 카온도 마찬가지인 걸까. 사실은 붉은 뺨에도, 앙 다문 입술에도 키스하고 싶다는 걸 말해야만 전달되는 것은 아닐 터였다. 얼굴이 여전히 뜨거웠다. 내 얼굴도 저렇게 붉을까.
“왜 이마야?”
“약속이니까.”
언젠가 우연히 접한 거였지만 잊을 순 없었다. 이마에 하는 키스는 약속, 맹세의 의미랬던가. 당분간 못 보게 될 텐데 이런 상황을 만들어 버린 데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그래도 카온을 계속 좋아할 거라는 약속의 의미를 담고 싶었다.
“너만 좋아한다는 약속. 그러니까 그, 당분간 못 만나도 불안해하지 말라고.”
카온이 이사 온 날 이후로는 거의 매일을 붙어 있었다. 학교도 같이 다녔으니 더더욱 그랬다. 얼굴을 보지 못하더라도 이삼일을 넘긴 적은 없었다. 이번엔 한 달을 떨어져 있어야 하니까. 방학 내리 만나지 못할 거란 사실을 처음 말했을 때 본 카온의 표정에 불효자가 될까 고민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부모님께서 큰 맘 먹고 20여 년 만에 추진한 가족 여행계획이었으니 혼자만 빠지겠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나도 안 불안하거든?”
“정말로?”
“그, 그냥 조금 많이 엄청 서운했던 것뿐이니까…….”
빵빵하게 튀어나온 볼을 찌를까 하다가 그대로 손을 내렸다. 대신 카온의 손을 꼭 잡았다. 그래, 뭐 실제로 불이 붙기라도 하겠어. 그냥 이 뜨거움을 좀 즐기자. 카온의 손이 평소보다 뜨거웠다. 시시도가 먼저 발을 떼자 카온이 자연스럽게 따라 걸었다. 늘 그랬듯, 익숙한 거리를 두 사람이 손을 잡고 함께 걸었다.
*
“저기.”
“응?”
뒤쫓아 오던 발소리가 사라졌다. 잡은 손을 살짝 잡아당기는 탓에 시시도는 카온을 돌아보았다. 왠지 카온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 붉었다. 점점 더워지는 여름 공기가 두 사람의 손 안에서 맴돌았다.
“그래서 하고 싶다는 거지?”
자기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카온의 손을 꽉 잡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 얼른 힘을 풀었다. 응.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기어들어가듯 작은 소리였지만, 평소보다 유난히 조용한 골목 안의 두 사람에게 닿기엔 충분했다.
“하자.”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약간의 시간을 들여야 했다. 심장에서 쿵 소리가 난 것 같았는데.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처럼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뭐?”
“여행 가면 한동안 못 볼 거 아냐. 난 이마키스로는 만족 못 하거든? 버틸 거 필요하단 말이야.”
얼굴이 사과처럼 빨갛게 물들었으면서도 표정만큼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듯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모습에 결국 시시도는 웃어버렸다. 그리고 카온이 뭐라고 하기 전에 잽싸게 카온을 품으로 끌어당겼다. 젠장. 네가 너무 좋아. 그런 얼굴로 날 보는 너도 좋고, 손 안 잡아줘서 서운하다는 너도 좋고, 못 만난단 얘기에 먹을 거 뺏긴 강아지 마냥 촉촉한 눈으로 아련하게 올려다보는 너도 좋아. 귀여워 죽겠어. 쑥스러워서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모든 이야기들을 속으로 녹였다. 네가 좋아서 미치겠어.
“한 달 버틸 거 필요한 건 나도 마찬가지야.”
품 안에서 카온이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시시도는 안았던 팔을 풀고 다시 손을 잡았다. 그리고 척척 걸어갔다. 결심했으면 실행에 옮겨야지. 이렇게 오기까지 고민한 게 바보 같아서라도 그래야겠어.
“어, 어디 가?”
“하자며.”
“지금?”
“그럼 언제?”
저 어벙한 얼굴을 어떻게 하면 좋지. 왜 매일 봐도 안 질리는 걸까. 시시도는 분명 붉어졌을 볼을 손가락으로 긁었다. 여태까지 손도 안 잡고 버티던 놈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카온이 먼저 말을 꺼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더 이상은 못 참겠으니까, 봐 줘.”
맞잡은 손 안에서 맴도는 여름 공기가 간지러웠다.
(2015.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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