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치토세 센리 드림 (For. 메이님)




 “어디 가?”

 “산책.”


 산책이라니. 여행 동아리에 들어와서 다 같이 여행을 와놓고 혼자 산책이라니!

 하지만 메이는 넓은 아량으로 치토세를 이해해주기로 했다. 어디 이런 일이 한두 번이던가. 번번이 속으로 ‘혼자서 산책이라니!’하고 외치곤 했지만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잽싸게 메이는 운동화 속에 발을 밀어 넣었다. 다들 각자 가고 싶은 곳을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른 동아리처럼 빡빡하게 스케줄을 정해놓고 멤버 전원이 함께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에 감사했다. 몇몇 후보지에 따라 팀을 나누는 멤버들의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살금살금 현관문을 나섰다. 아무도 그런 메이를 눈치 채지 못했다. 애초에 메이보다 배는 덩치가 큰 치토세가 나서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두 사람이 사귀는 건 모두 알고 있으니 딱히 숨겨서 나갈 필요는 없었다. 조 편성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을 뿐, 워낙에 훌쩍 사라지는 치토세와 같은 타입은 아니었다.


 “어디로 가는데?”

 “발 닿는 대로 간데이.”


 치토세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따라나선 게 좋은 선택이었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여태까지의 여행과 달리 이번 목적지는 시골이었다. 유명하다 하는 관광지들을 웬만큼 돌고 나자 좀 더 작은 곳들을 찾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휘황찬란한 조명이 반기는 도시에서 은은한 풀 내음이 반기는 시골로 오게 되었다. 주변에 작은 온천이 있었고, 대나무 숲도 있었다. 메이가 걱정하는 것은 ‘발 닿는 대로’ 걷는 치토세가 어느 곳으로 갈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걸을 때는 좋지만 슬슬 돌아가자며 정신을 차릴 쯤에는 전혀 모르는 곳에 도달해 숙소로 돌아가기 위한 두 번째의 모험을 한 적이 태반이었다. 지금까지는 온갖 표시가 되어줄 건물과 간판과 표지판이 있었지만 여기에는 그런 게 딱히 없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크기도 모양도 비슷비슷한 여관 몇 채, 원 형태로 여관을 둘러싼 허름한 집 몇 채, 그리고 논. 물론 메이가 이 모든 것들을 표식 삼아 길을 찾을 일은 없겠지만―길은 치토세가 늘 어떻게든 찾으니까― 괜히 불안해지는 감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메이쨩, 무섭나.”

 “길 잃으면 어떡해?”

 “내 믿으래이.”


 치토세가 씩 웃었다. 잠시 멍청히 쳐다보는 바람에 발이 멈췄다. 짧은 말 한마디에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고, 연처럼 두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커다란 손이, 메이가 아무리 손을 쫙 펼쳐도 겨우 가운데 마디까지밖에 닿지 않는 커다란 손이 다가왔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심장이 뛰었다. 연줄을 놓칠 것 같았다. 그대로 연이 날아가 버리지 않도록 메이는 얼른 치토세의 옷깃을 붙잡았다. 꼭 길 잃은 꼬마가 된 기분이었다. 당겨지는 힘에 고개를 숙인 치토세가 다시 웃었다. 자연스럽게 옷깃에서 손을 떼어내고 부드럽게, 그리고 아주 포근하게 감쌌다.


 “이라믄 되제.”


 의도하던 바와 달리 연줄은 멀리 멀리 날아가는 듯 했다. 하지만 손이 따뜻했다. 아무래도 좋아져서, 메이는 배시시 웃으며 치토세를 따라 걸었다. 이제 슬슬 해가 뜨거워지기 시작하는 초여름이었다.



*



 치토세는 어릴 적부터 방랑 기질을 타고 나서 계속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고 얘기했었다. 그래서 이 여행 동아리에 들어오게 됐다며, 어쩌면 길게 늘어놓을 수도 있는 말들을 간단하게 압축했다. 그리고는 더 할 말이 없는지 시원하게 인사를 했다. 그리 넓지 않은 동아리방에 빙 둘러앉은 선배들이 일제히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잠깐의 박수갈채가 끝나고, 또 다른 신입생인 메이의 자기소개 시간이었다.


 「어, 저는 어디 돌아다니는 건 좋아하는데 혼자 갈 엄두는 안 나서 왔습니다!」


 메이 역시 그 이상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까와는 조금 다른 의미의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모든 선배들은 신입생을 귀엽다는 듯 쳐다보았고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자기소개를 할 사람이 덩그러니 둘뿐이었기에, 선배들은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하고자 저마다 자기의 이름과 학번을 외쳐대었다. 시장통 마냥 금방 들끓어 오른 분위기를 정리한 건 회장이었다. 박수 두 번으로 시선을 모으고선, 치토세와 메이를 위해 간단한 동아리 수칙을 이야기했다. 이어 동아리의 주요 활동이자 한 달에 한 번씩 가는 일박이일 여행 일정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리고 ‘다른 동아리와는 다르게, 우리는 편안함을 추구하기 때문에 특별한 일정은 짜지 않는다’며 회장이 어깨를 으쓱했다.


 「역사가 유구하고, 배울 게 많고, 어쩌고저쩌고. 그런 거 다 필요 없어. 그냥 가보고 싶어서 가는 거야. 경치가 예쁘대서, 엄청 맛있는 라멘집이 있대서, 거기 온천이 효과가 좋대서, 거기 신사 내의 연못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대서, 어떤 이유든 괜찮아. 이유가 없어도 돼. 안 가봤으니까 그냥 가보고 싶어져서요, 뭐 그런 이유도 좋아. 그냥 가고 싶은 곳을 때마다 다수결로 정해서 가는 거야.」


 메이는 의자 끄트머리에 앉아 엉덩이를 달싹였다. 당장이라도 여행을 떠날 것처럼.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다른 동아리와 달리 이름마저도 소박한 ‘H.T.’―Healing Travel―는 만들어진지 이제 겨우 4년째였다. 그래서인지 신입생은 메이와 치토세 둘 뿐이었다. 동아리 홍보를 막 했을 때는 관심을 가진 사람이 더 있던 모양이지만, 어쨌든 최종적으로 명단에 이름을 올린 건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신입생은 메이 혼자나 다름없었다. 치토세가 동아리방에 코빼기도 내비치질 않아 수소문 해보니 학교에 나오질 않는다고 했다. 설명회를 가졌던 날, ‘그래도 동기니까’하는 마음으로 어렵사리 말을 건네 얻어낸 메일 주소도 소용이 없었다. 치토세가 핸드폰을 단순한 장신구가 아닌 연락수단이라는 것을 까먹은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여행지 선정 회의 한다는데 안 와?]하고 보내면 그 다음날 점심 즘에야 [아, 까먹었다]라고 답이 오는 수준이었으니까.

 그럴 거면 학교를 왜 다니는 거지?

 그런 메이의 의문을 풀어주기라도 할 것처럼, 치토세는 신기하게도 첫 여행 날이 가까워 올 즘부터 학교를 나오기 시작했다. 막상 한 번 나오니 마음이 바뀌었는지 그 이후론 학교도 꽤 열심히 나왔고 강의도 빼먹지 않고 착실히 듣더라고, 치토세의 과 동기로부터 전해 들었다. 강의실을 오가다보면 가끔 마주치기도 했다. 가볍게 목례로 인사하는 치토세는, 언제나 시끌벅적한 동기들 사이에 뒤섞여 있는 메이와 달리 항상 혼자였다. 웬만한 신입생들은 메이와 그 동기들처럼 항상 활기차고 즐겁고 시끄러운 편이었지만 치토세는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메이는 휘적휘적 복도를 나아가는 커다란 뒷모습이 자꾸만 가슴을 콕콕 찔러 대 몇 번이고 돌아보기를 반복했다.



*



 “길 잃은 거야?”

 “길은 아는데 못 간다 안 카나.”

 “왜?”

 “버스 끊겼데이.”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메이는 입을 딱 벌렸다. 해진 지 그렇게 오래 되지 않은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메이의 착각인 모양이었다. 발 닿는 대로 치토세를 따라 걷다가 작은 연못을 발견했고, 그 연못가에 앉아서 떠들다가 잠깐 잠이 들고, 눈을 떴더니 해가 저 멀리 넘어가면서 어둠이 찾아오고 달님이 인사를 하고……. 해가 지는 걸 봤으니 버스정류장까지도 금방 왔다고 생각했다. 주저하며 핸드폰 화면에 불을 켰다. 커다란 숫자가 네 개 뜨는 것만 보고 메이는 얼른 다시 핸드폰을 주머니 속에 밀어 넣었다. 급할 것 없단 생각에 천천히 걸은 것도 한몫 했겠지만, 해가 길어지는 계절이 다가왔다는 사실 자체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지? 거짓말. 센리랑 잠깐 놀았을 뿐인데.

 여태까지 연락이 없는 선배들이 더 굉장했다. 정말 동아리의 모토대로 너무 프리해서 탈이라면 탈이랄까. 메이가 한숨짓는 동안 치토세는 정류장의 표지판을 들여다보았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차분하게 훑고서 다시 시선을 위로 옮겼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아래까지 천천히 내려왔다. 그리고 메이를 향해 돌아서선 어깨만 으쓱해보였다.


 “진짜로 없어?”

 “쫌 걷재이.”


 이런 상황이 되어서도 치토세는 달리 걱정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을 얼굴에 덕지덕지 매달고 있는 메이가 안심할 수 있도록 그런 것은 아니고, 원래 성격이었다. 유유자적하는 타입이라 교통수단에 크게 구애받지를 않았다. 그나마 치토세가 대중교통을 챙기는 건 메이와 함께 있기 때문이었다. 치토세만큼의 덩치도, 체력도 없는 메이와 무작정 함께 걸어 다니는 건 분명히 무리였다. 때문에 치토세는 여기저기 다니다가도 꼭 숙소로는 돌아갔다. 걸어서 갈 수 있지 않을까 묻고 싶었지만 메이는 꾹 입을 다물었다. 진짜로 걸어서 돌아갈 수 있다하더라도 제 힘으로 거기까지 가는 게 무리였다. 분명 얼마 못 가 치토세 등에 업히게 될 테니 처음부터 시도하지 않는 게 나았다.

 그러면 어쩌지?

 치토세가 손을 내밀었다. 메이는 꿀꺽 침을 삼키고 손을 맞잡았다. 커다란 손만큼 따뜻한 온기가 마음을 가라앉혔다. 치토세는 성큼성큼 걷지 않았다. 제대로 메이의 발걸음에 맞추어 걷느라 느릿느릿했다.


 “어디로 가?”

 “메이쨩 노숙 시킬 순 없은께 어디든 가야제.”

 “이 방향으로 가면 뭐 나와?”

 “아까 갔던 시내.”


 메이는 낮에 지나쳐왔던 번화가를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방향 감각과 거리 감각이 엉망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계속 일직선으로 걸어온 줄 알았는데 그런 것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낮에 번화가를 빠져나온 뒤로 한참을 걸어서야 연못을 발견했는데 막상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았는지, 금세 빛나는 네온사인이 눈에 들어왔다. 은은한 달빛과 별빛에만 의지해 걷다가 밝은 빛을 마주하려니 눈이 아파왔다. 메이는 주춤주춤 치토세에게 달라붙었다. 잡고 있던 손을 풀어 팔짱을 끼고―일방적으로 팔을 안은 꼴이지만― 눈을 감았다. 여전히 눈앞이 부셨지만 이 정도는 참을만했다. 낮게 치토세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메이쨩, 업으까?”

 “아냐, 눈 뜰 거야!”

 “업혀도 된다.”


 메이는 열심히 도리질을 쳤다. 눈을 다시 뜨고 올려다보자 치토세는 피식 웃었다.


 “배 안 고프나.”

 “배고파!”

 “파미레스 가재이.”


 방금 전까지 별빛이 쏟아지는 조용한 시골길을 걸어왔다는 걸 까먹을 정도로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시끌벅적 떠드는 소리에 여러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대중가요가 뒤섞여 알 수 없는 문장으로 바뀌었다. 탁탁 보도블록에 부딪히는 신발, 빠앙 길게 울리는 클랙슨에 어서옵쇼 호객하는 남자들까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동아리의 근간이 되는 ‘힐링’이란 두 글자가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여기 엄청 정신없다. 낮이랑은 다르네.”

 “마, 온천 놀러왔다 여 와서 술 마시는 거 아이겠나.”

 “온천엘 와 놓고 왜 이런 데서 술을 마시지.”


 고개를 한 쪽으로 기울인 메이가 진짜로 의문스러워 하는 표정이라 치토세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얼굴을 돌리긴 했지만 연신 어깨가 들썩거리는 통에 메이는 볼을 부풀렸다.


 “왜 웃어?”

 “귀여워가.”

 “뭐가?”

 “메이쨩 표정.”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도 메이의 볼은 충분히 붉게 보였다. 부풀었던 볼에서 스르륵 바람이 빠져나갔다. 대신 메이는 치토세의 팔을 좀 더 품으로 끌어당겼다. 씩 웃은 치토세는 부끄러워하는 것조차 귀여운 여자친구를 위해 잠시 발을 멈췄다.

 앞으로 나가려던 메이의 몸이 반동으로 뒤로 홱 밀려났다. 치토세의 팔이 가볍게 그녀의 등을 받쳤다. 그러더니 한껏 허리를 굽히고, 무릎도 가볍게 굽혔다. 도장 찍듯 꾹 이마에 입술을 찍은 치토세가 슬쩍 손가락으로 메이의 턱을 밀어 올렸다. 메이는 코로 한껏 숨을 들이켰다. 입술이 맞닿는 강렬한 찰나가 지나고 잠시 혀를 섞었다. 짧은 입맞춤 뒤에 따라오는 아쉬운 숨결이 코끝을 간질였다. 아마도 길고 긴 입맞춤을 하고 싶었겠지만, 아직 길거리에 있다는 사실 때문인지 크게 자제심을 발휘한 듯 했다.


 “센리, 반칙이야.”

 “글나.”

 “그래.”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피하면서도 메이는 더 단단히 치토세의 팔을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바닥을 향해 고개를 푹 숙였다. 온통 회색빛인 아스팔트 위에 가끔 사람들의 신발이 끼어들어 색을 더했고, 가로등 불빛은 중간 중간 채도를 바꿨다. 치토세는 바닥만 들여다 보며 걷는 메이가 번잡한 거리에 치이지 않도록 천천히 걸었다. 길을 헤치고 가기보다는 상대방이 피해가도록 만드는, 부드럽고 느린 걸음이었다.



*



 “여기 이십사시간이래!”


 슬슬 메이의 발이 한계를 외칠 때가 되려던 참이었다. 이 복잡한 번화가의 끄트머리에 도달해서야 패밀리레스토랑을 마주했다. 메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간판에 ‘24h’라는 글씨가 뚜렷하게 빛났다. 술기운에 한껏 시끄러운 거리에 어울리지 않게, 패밀리레스토랑 안은 너무나도 평화로워 보였다. 


 “밤 여서 보내도 괘안켔나.”

 “일단 밥 먹고 생각하지 뭐.”


 메이의 작은 몸이 자동문 앞으로 나아갔다. 밥 이야기를 하니 그제야 허기가 느껴졌다. 치토세가 패밀리레스토랑에 성큼성큼 입장한 메이를 따라 걸어 들어가는 동안 어딘가에 숨어있던 직원이 후다닥 튀어나왔다. 어서 오세요, 두 분 손님이신가요? 익숙한 고정멘트와 친절한 미소가 두 사람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붐빌 저녁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레스토랑 안은 한산한 편이었다. 직원은 커다란 창 옆의 테이블 위에 메뉴판을 내려놓았다. 마주보는 대신 치토세의 옆으로 붙어 앉은 메이가 그 메뉴판을 끌어당겼다.


 “이것도 맛있어 보이고, 이거랑 이거도……. 음…….”


 바쁘게 움직이는 작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치토세는 열심히 시선으로 따라갔다. 돈가스에서 함박 스테이크로, 파스타에서 그라탱으로, 샐러드에서 스프로 연신 오가는 손가락은 좀처럼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마침내 메이의 작은 눈이 치토세를 향해 돌아왔다.


 “빈 속이니께 스프부터 먹재이. 메이쨩, 뭐가 좋나.”

 “다 좋은데. 센리는?”

 “내는 아무래도 고기가 좋제.”

 “그럼 돈가스?”

 “이것도 시키재이.”


 이번엔 치토세의 손가락이 아까 전부터 메이의 손가락이 여러 번이나 지나쳤던 파스타를 가리켰다. 놀란 듯 두 눈이 동그래진 메이가 치토세를 올려다보았다.

 오늘 메이쨩 윽수로 귀엽구마.

 평소에도 귀엽다고 생각했지만, 오늘은 더했다. 방울 달린 끈으로 질끈 동여맨 포니테일, 치토세가 선물한 목걸이, 활동성 좋게 나온 면 원피스, 작은 발에 꼭 맞는 운동화. 여행에 최적화된 패션이고, 동아리 여행을 갈 때면 보통 보게 되는 모습이기도 했다. 평소와 다른 것은 무엇일까? 화장이 특별히 다른 것 같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머리끈이나 가방이 바뀐 것도 아니었다. 굳이 바뀐 걸 찾자면, 메이를 좋아하는 마음이 더 깊어진 것이라고나 할까.


 “나 이거 고민했는데. 어떻게 알았어?”

 “메이쨩 보고 있으믄 알제.”


 결국 치토세는 메이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왠지 단 맛이 도는 것 같았다. 얼굴을 붉히는 메이를 품으로 끌어당기고 치토세는 손을 번쩍 들어 직원을 불렀다. 메뉴판을 몇 번 짚는 것으로 주문은 금방 끝났다. 품속에서 살짝 고개만 들어 테이블 주위를 확인한 메이는 그대로 다시 고개를 묻었다.


 “있잖아, 센리.”


 웅얼댈 생각은 아니었지만 옷에 고개를 묻고 있으니 절로 소리가 그렇게 났다. 그나마도 나온 소리는 옷 사이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꽤 오랫동안 메이를 괴롭히던 소리와 시선들이 우수수 떠올랐다.

 연락은 여전히 잘 안 되는 편이지만, 그래도 애정표현은 많이 하는 편 같은데. 함께 있으면 날 신경 써주는 게 느껴지고, 사랑받는다는 기분도 들고, 귀엽단 소리도 많이 하고.

 아무리 긍정적인 메이라도, 치토세에 대해 주변 사람들의 똑같은 평가가 반복되는 건 조금 신경이 쓰였다. 아니, 많이 마음에 걸렸다. 그 사람들보다는 자신이 더 치토세 센리를 잘 안다고 자부했지만, 말은 원래 반복될수록 힘을 가지는 법이었다. 그 말들로부터 파생된 불안감은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와?”


 뭉개진 소리는 끽해야 치토세의 가슴팍에서 사라졌을 줄 알았는데, 용케 귓가에 닿은 모양이었다. 파묻었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체온으로 조금 데워진 공기에 코가 간지러웠다. 거리가 가까운 만큼 치토세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떨어지는 건 아쉬웠지만 제대로 된 대화를 하려면 얼굴을 보는 편이 좋았다. 메이가 옆으로 조금 떨어져 앉자 시선이 금방 따라왔다. 메이는 한껏 고개를 들고, 치토세는 한껏 시선을 낮춰 눈을 마주쳤다.

 잔잔한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꾹 깨물고, 크게 숨을 들이켜도 제 입으로 뱉어내기 힘든 건 매한가지였다. 치토세는 재촉하지 않았다. 메이의 시선이 돌아가면 돌아가는 대로, 다시 마주쳐오면 마주치는 대로 가만히 메이를 보고만 있었다. 꽤나 오래, 애꿎은 소파만 노려보던 메이가 마침내 주먹을 꽉 쥐었다.


 “나 같이 다니는 거 귀찮아?”


 순간 눈이 커지는 걸 목격한 메이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가렸다.

 역시 말하지 말 걸 그랬어.


 “와? 그래 보이나?”

 “아니. 근데 막 다른 애들이…….”


 보니까 너만 좋아서 매달리는 것 같더라. 걘 별 생각 없어 보이던데. 연락도 그렇게 잘 안 된다면서. 원래 방랑벽 심하다며? 그런 애랑 계속 사귀면 너만 손해야, 얼른 헤어져. 가지고 노는 거 아니니? 어쩌면 귀찮아하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런 성격이면 나중에 결혼해서도 힘들다. 미리 맘 정리해 둬.

 그 모든 말들을 밖으로 꺼낼 순 없었다.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점점 기분은 바닥을 향해 하향곡선을 그렸다. 차라리 말하지 말 걸 하는 후회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어떤 대답이 나올지 무서웠다. 묻기 전까지는 그냥마냥 즐겁기만 했는데, 함께 있는 게 좋기만 했는데 지금은 어디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메이쨩, 내 고백 잊었나.”

 “그럴 리가!”


 놀라서 번쩍 고개를 들었다.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항상 바람처럼 나타났다 바람처럼 사라지는 이상한 애는 메이 안에 조금씩, 조금씩 자리를 잡았고, 그렇게 두 달이 지나간 어느 평범한 월요일에 ‘이상한 애’라는 인상에 걸맞지 않게 평범한 고백을 했다. ‘내는 메이쨩이 좋다.’는 담백한 고백에 왜 그렇게 심장이 쿵 내려앉았는지 알 리 만무했다. 다만, 이어지는 솔직한 말이 메이를 완전히 흔들었던 것만큼은 확실했다.


 ‘내는 항상 발 닿는 대로 가는데, 자꾸 메이쨩 앞인 기라.’


 그 말에 얼굴이 터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열이 올라서는 대답을 더듬거렸던 기억까지 선명했다.

 치토세는 웃고 있었다. 고백했던 그 날처럼, 쑥스러운 듯 보이면서도 아주 부드러운 미소로 메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랑벽 심한 기는 내도 안다. 그캐도 메이쨩 좋다카는 것도 진짜래이. 아니믄 이래 같이 안 있는다.”


 치토세는 씨익 웃었고, 메이는 그에 눈물이 솟았다. 불안감의 폭풍 속에서 갑자기 구출된 것 같았다. 온몸으로 밀려드는 안도감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잔뜩 긴장했던 어깨가 아팠다. 이렇게 치토세의 말 몇 마디로도 충분히 안심되고 행복한데 뭘 그렇게 불안해했는지, 불과 몇 분 전의 자신이 웃겼다.

메이가 코를 훌쩍이자 치토세의 손이 다가왔다. 가볍게 메이의 볼을 감싼 뒤, 엄지로 살짝 눈물을 훔쳤다. 메이는 그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손으로 전해지는 온기가 참을 수 없이 기뻤다.


 “내는 말이제, 막 나가 돌아댕기고 싶다. 근데 메이쨩하고도 같이 있고 싶다 안카나. 그래가 이래 같이 다니는 기다.”

 “응. 미안해, 이상한 소리해서.”

 “아이다. 내는 메이쨩이 좋으니께, 더 노력할 끼다.”


 메이는 손을 놓지 않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움직일 때마다 치토세의 팔이 같이 움직이는 게 좋았다. 배시시 웃으면 따라 웃어주는 게 좋았다. 한 쪽만으로도 메이의 얼굴이 다 가려질 만큼 큰 손이 좋았고, 뒤에 서면 메이가 완전히 사라진 듯 보일 정도로 큰 덩치도 좋았다. 무언가 발견하면 소곤대며 ‘메이쨩’하고 부르는 게 좋았고, 가끔 장난치며 보이는 천진난만한 표정도 좋았고, 입술을 가볍게 눌렀다가 떨어지는 감질 나는 키스도 좋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이렇게 좋은 것투성이인데 새삼 아무 것도 아닌 걸로 불안해했단 생각이 들었다.


 “센리, 너무 좋아!”


 점원의 헛기침이 없었다면 메이는 그대로 치토세의 품으로 뛰어들고도 남았을 터였다. 과한 스킨십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니라 그다지 부끄럽지는 않았다. 다만,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스프를 보자 사랑으로 충만한 줄 알았던 몸 어딘가에서 울리는 배고프단 신호를 무시하기 힘들었을 뿐이었다. 


 “일단 먹재이.”

 “응! 센리도 많이 먹어!”


 스프는 따뜻했고, 뒤이어 나온 돈가스는 바삭거렸으며 마지막으로 나온 크림 파스타는 조금 느끼했다. 주스와 탄산을 곁들인 식사는 생각보다 만족스러웠다. 늦은 시간이니만큼 패밀리 레스토랑 안의 손님은 두 사람뿐이라 조용했다. 그릇과 수저가 부딪히는 달그락 소리가 치토세와 메이의 대화 사이에 조미료처럼 추가되었다.




 느릿느릿 이어지던 식사가 끝나자 피로가 급격히 몰려 왔다. 물론 하루 종일 돌아다녔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여전히 메이가 치토세의 산책 아닌 산책을 따라다니기엔 체력이 부족했다. 결국 메이는 ‘에라, 모르겠다.’하는 심정으로 소파 위에 드러누웠다. 고개가 치토세의 다리와 소파에 어중간하게 걸쳐지자, 꾸물꾸물 어깨를 움직여 좀 더 몸을 치토세 쪽으로 끌어당겼다. 툭 내려놓은 고개는 그대로 치토세의 무릎 위에 놓였다.

 역시 베개로선 좀 높은가.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치토세의 체온이 느껴지는 그 자체로 충분히 좋았다.


 “메이쨩, 묵고 바로 누움 안 된다.”

 “하루쯤은 괜찮아~”

 형광등 불빛이 강하다고 생각하는 찰나, 치토세의 고개가 불쑥 눈앞으로 다가왔다. 베싯 웃은 메이는 양손을 번쩍 들어 치토세의 목을 끌어당겼다. 치토세는 알아서 고개를 숙여줄 테니 메이는 손에 잔뜩 힘을 주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입술을 맞대었다. 꾸욱 누르는가 싶더니 떨어지는 입술을 얼른 쫓아갔다. 꾸우욱, 만족했다고 하긴 조금 아쉬운 정도로 다시 입을 맞췄다가 힘을 툭 풀었다. 치토세가 얼른 한 손으로 메이의 머리를 받쳤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제 무릎 위에 다시 내려놓았다.


 “딴 가스나들 얘기 듣지 말래이.”


 갑자기 튀어나온 말에 메이는 잠깐 눈을 깜빡였다. 몇 초가 지나고서야 식사가 나오기 전에 했던 대화의 연장이라는 걸 깨달았다. 볼이 뜨거웠다. 그런 말을 뱉은 몇 십분 전의 자신이 바보 같았다. 메이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어버렸다. 머리끝까지 붉어졌을 얼굴을 보이기가 미안했다.


 “응.”


 덮은 손 사이로 웅얼거렸다. 아까 전의 부름도 들은 치토세니, 지금의 대답도 들을 거라 믿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정말로 대답이 돌아왔다.


 “잘 끼가.”

 “엄청 부끄럽고 미안한데 엄청 좋으니까 이대로 있을래.”


 치토세는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쿡하고 작게 웃었을지, 아니면 늘 그렇듯 씨익 웃었을지, 그것도 아니라면 키스하기 직전의 약간 풀어진 눈으로 보고 있을지 궁금했다. 손가락 사이로 살짝 볼까 싶었다가 참기로 했다. 메이는 눈을 감은 채로 얌전히 손을 배 위에 얹었다. 피곤했던 탓인지 금세 졸음이 밀려왔다. 치토세가 카디건을 덮어주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솔솔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



 어느 순간, 메이는 갑자기 눈을 떴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들리고 사람들 말소리도 들렸다. 완전히 정신을 차리질 못해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여기가 패밀리레스토랑이란 사실이 떠올랐다. 어느새 아침이 된 모양이었다. 메이는 부스스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쭉 켰다.


 “잘 잤나, 메이쨩.”

 “응. 나 엄청 잤네.”


 어찌나 제대로 잤는지 목소리가 반쯤 잠겨 있었다. 물을 마실 요량으로 테이블 쪽으로 몸을 돌린 메이가 무심코 센리를 돌아보았다.


 “센리, 안 잤어?”


 치토세의 눈이 빨갰다. 평소에도 가끔 밤을 새고 돌아다니다가 등교한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놀라지 않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지난밤엔 어딘가를 걷는 게 아니라 패밀리레스토랑에서 얌전히 앉아있기만 했다. 치토세는 그저 픽 웃을 뿐이었다.


 “윽수로 설레가 몬 잤다.”

 “에, 왜?”

 “자는 얼굴 윽수로 예뻐서 키스하고 싶었다 안카나.”


 갑자기 얼굴에 열이 올랐다. 밤새 여자친구의 자는 얼굴만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이 남자를 어쩌면 좋을지, 부끄러워진 메이는 물만 한 컵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들과 가까운 테이블은 아직 비어있었고, 입구 쪽의 몇 테이블에만 사람들이 있었다. 메이는 잽싸게 고개를 돌려 치토세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아침엔 이 정도만.”

 “애태워 죽일 끼가.”

 “몰라, 바보.”





 결국 두 사람이 H.T.의 원래 숙소로 돌아온 건 오전 11시를 넘어간 뒤였다. 선배들은 이제 막 아침을 먹은 모양인지 설거지며, 나갈 준비며 부산스러웠다. 아직 비몽사몽 꿈나라를 헤매는 중인 듯한 2학년 선배가 잔뜩 잠긴 목소리로 어서 오란 인사를 건넸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고 있던 3학년 선배는 “이번엔 엄청 늦었네?” 했을 뿐이었다. 누구 한 명 두 사람의 늦은 귀환을 나무라는 사람이 없었다. 익숙하면서도 항상 묘한 이 느낌에 메이는 풋 웃고 말았다.

 구석에서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던 회장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회장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너네 뭐하다 이제 와?”


 호기심 반, 걱정 반이 섞인 목소리에 메이는 잠시 죄책감을 가졌다. 간밤에 치토세와 함께 있는 데에 몰두하느라 연락하는 걸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다. 치토세야 원래 핸드폰이 존재 의의가 없으니 그렇다 쳐도, 늘 핸드폰과 과한 친분을 쌓고 있는 자신이 연락을 잊을 줄이야.


 “버스 놓쳐서 파미레스 가서 밤 샜어요.”

 “넌 멀쩡해 보이는데?”


 회장의 시선이 치토세에게 향하는 걸 보고 메이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눈 뜨자마자 보았던 빨간 눈은 여전했다. 다시 한 번 죄책감을 가지며 메이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전 잤어요.”

 “치토세는 안 자고?”


 놀란 듯 두 눈이 커진 회장은 치토세와 메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크게 하품을 하던 치토세는 대화를 조금 늦게 이해한 모양이었다. 잠깐 눈물이 어린 눈으로 회장을 보다가 예의 그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어보였다.


 “우예 잡니꺼. 이래 귀여운 아 언놈이 채어갈 줄 알고.”


 가볍게 톡 얹은 손이 메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평상시에도 곧잘 듣는 소리였지만 그걸 듣는 관중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기분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기쁘기도 하지만 부끄러움도 동시에 솟구쳤다.


 “콩깍지 좀.”


 회장의 깊은 한숨과 주변의 휘파람 소리가 뒤섞였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와중에도, 더욱 짙어지는 치토세의 미소는 좋았다. 참 답이 없는 팔불출이란 생각을 하며, 메이도 따라 웃었다.

 , 좋은 게 좋은 거지.






(2016. 0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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