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려 온 고백

     사나다 겐이치로 드림 (For. 빈조님)




 무라사키가 그 날도 응원을 와줄까. 사실 책상 앞에 앉아서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은 내 성격에 맞지 않는다. 이렇게 시시하게 사색에 빠져 있을 바에야 도장에 나가서 검을 휘두르는 게 훨씬 낫다. 정신 통일하기도 좋고 잡생각을 다 물리쳐주니 말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하염없이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도장에 가도 무라사키에 대한 생각은 떨쳐지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검을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더 강해지는데 도무지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 그러니까, 방법을 찾을 때까지는 이렇게 있어야만 한다.

 이런 의미 없는 걱정과 고민을 한 지 벌써 두 시간이 넘어 간다. 시간은 금이라고 하였거늘, 해이하다, 사나다 겐이치로! 스스로에게 호통을 열 번도 넘게 쳤는데 왜 아직 이러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방문을 나섰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여덟 번째 반복하고 돌아온 지금의 나로서는 그 어떤 것도 감을 잡을 수가 없다. 몇 년은 더 본 사이인데 왜 새삼스럽게 무라사키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일까.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지만 그렇게 오래 된 것 같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갑작스럽지도 않았다. 무라사키는 자연스럽게 나와 늘 함께 했다. 그러니까, 내 생각 속에서도 무라사키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건 좀 무언가 잘못된 게 분명하다. 이렇게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깊게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다. 처음이다. 그래서 당황스럽다.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할 지 잘 모르겠다. 형님에게 의논해 볼까 생각도 해 보았으나 이런 일로 형님을 귀찮게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차라리 유키무라, 아니, 아니다, 렌지에게 물어보는 게 나을 것 같군. 내일은 부활동이 끝나고 난 뒤에 꼭 렌지에게 물어봐야지.




 부활동이 끝나고 난 뒤 렌지에게 이 증상에 대해 묻기로 하다니 이건 확연히 내 잘못이었다. 잘못이라기보다는 엄청난 실수였다. 니오의 반응이라던가, 마루이의 반응 정도야 물론 예상했다. 아카야가 어떤 표정을 지으면서 나를 쳐다볼지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라사키가 그 자리에 올 것이라고까지는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 아니, 그거야말로 정말 당연한 일이었는데 말이다. 부활동이 끝날 시간이면 무라사키는 항상 테니스장 근처에 와 있었다. 하교하는 나를 기다리기 위해서. 테니스부에 들어오고 나서 거의 이 년동안 반복되어온 일상을 왜 어젯밤에는 떠올리지 못했을까. 아무리 머리를 쥐어뜯어봤자 결국 지난 일이었다.

 집까지 돌아오는 길이 더없이 힘들었다. 무라사키가 동그란 눈을 크게 뜨며 내게 “무슨 말 했어?”라고 물어오는 바람에 더 그랬다. 난 거짓말을 하기 싫었고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십오년의 짧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했던 대답 중 가장 어중간한 대답을 하고 말았다. “그냥.”이라니. 나 스스로도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에 너무 놀라서 잠시 얼이 빠졌다. 무라사키 역시 황당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뒤로, 무라사키의 집 앞에서 내일 보자는 인사를 할 때까지 우리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난 머리를 싸매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일까. 해이하다 못해 이건 멍청하기 짝이 없다.

 내일 무라사키를 만나면 사과를 해야겠다. 어제는 이상한 소리를 해서 미안했다. 아니, 이상한 소리를 하지는 않았으니 다른 말로 하는 게 낫겠군. 어제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 해 미안했다. 사과를 한다면 무라사키는 가볍게 어깨를 들썩이며 괜찮다고 말해줄 것이다. 몇 년 동안 무라사키와 함께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예상할 수 있는 행동이다. 음, 하지만 무라사키가 다시 물어올지도 모른다. 그럼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지?

 음.

 으음.

 으으음.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지만 무라사키에 대한 이 마음을 무라사키에게 상담 받을 수는 없다. 역시 렌지에게 다시 상담을 받아야겠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고민하기엔 에너지 소모가 너무 많다. 마음을 다스리고 오늘은 어제 못한 정신수련을 해야겠다. 도장에 가서 검을 좀 휘두르면 좋겠지. 그러면 무라사키 생각이 나지 않을 테다. 아니, 이건 무라사키 생각이라고 해야 하나? 이젠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군.

 일단은 목검을 챙긴다. 지금부터는 아무 생각도 하지 말아야한다. 그러고 보니 무라사키가 전에는 도장에도 자주 놀러오고는 했었지. 음, 잠깐, 지금 도장에 가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다. 무라사키와 관련이 없는 곳으로 가야겠다. 집에서 좀 멀리 있는 공원에서 가볍게 러닝을 하는 게 좋겠다. 그래, 그래야지. 사나다 겐이치로, 해이해지지 마라.





 “겐이치로. 그건 매우 간단한 답이지 않은가.”

 “음?”

 “너는 무라사키를 좋아하는 것이다.”


 렌지는 마치 ‘아카야, 테니스의 스펠링에는 엔이 두 번 들어간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니.’라고 말하는 투였다. 렌지의 말은 언제나 차분한데다가 당연한 사실을 일깨워주는 일이 많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딱히 그 말이 놀랍다거나 하지는 않…….


 “지금 뭐라고 했나, 렌지?”

 “후후, 사나다, 역시 이런 표정 지을 줄 알았어.”


 유키무라가 어깨를 가볍게 들썩이는 와중에 렌지가 한숨을 내쉰다. 대조되는 두 사람의 반응이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다. 방금 들었던 말을 혼자 곱씹는다. 딱히 듣지 못해서 되물어본 게 아니다. 좋아한다? 낯간지러운 말이군. 그보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할 학생의 신분에 좋아한다는 감정이라니! 매우 해이해진 게 틀림없다. 언제부터 마음에 틈이 벌어진 것일까. 항상 수련을 열심히 해왔고, 마음을 다스리는 것에도 빈틈이 없었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런 일이 생긴 걸까.


 “좋아한다는 감정이 학생 신분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확률 구십사점 이퍼센트.”


 도대체 무슨 근거로 렌지가 이런 확률을 읊어주는 건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그는 나에 대해서 꿰뚫을 수준으로 잘 알고 있다. 나는 말을 하지 않는다. 렌지는 그렇다고 해서 나를 닦달하거나 할 사람이 아니다. 물론 내가 상담을 요청한 건 렌지이지만 제멋대로 함께 따라온 유키무라도 그럴 사람이 아니다. 왠지 머릿속이 ‘좋아한다’라는 글자로만 가득 차서 묘하게 깔끔해진 데 반해 가슴은 더 먹먹해졌다.


 “사나다, 우리 부활 끝날 때쯤에 무라사키가 안 보이면 걱정 되지?”

 “그건 당연한…….”

 “다른 친구랑 같이 간다고 안 오면 서운하고.”

 “그건…….”

 “메일 오면 기쁘고, 응원한다 그러면 힘나고. 그렇지?”


 내 말을 전부 끊고 할 말을 다 한 유키무라의 표정을 읽기가 어렵다. 여러 가지로 읽을 수 있는 그의 표정만큼이나 내 마음도 복잡하다. 몇 년을 함께 자라 온 사이인데 늘 보던 시간에 안 보이면 걱정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다른 친구랑 같이 간다고 하면, 그것도 역시 매일 하교하던 동료가 사라지니 서운할 수도 있지. 메일이 오면 기쁜 것도 당연한 거고 응원해줬는데 힘을 내지 않으면 응원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유키무라.”

 “지금 메일 오면 기쁜 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지?”

 “너도 렌지를 닮아 가는가.”

 “넌 아카야가 메일 보내도 그만큼 기쁘니?”


 아카야가 메일을 보내면?

 가만히 생각해보니 유키무라의 말이 맞다. 아카야가 메일을 보냈다고 해서 딱히 기쁜 적은 없었다. 오히려, 메일 알림음에 무라사키를 떠올렸다가 다른 사람이어서 아쉬웠던 적이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렌지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 맞다.


 “음.”

 “납득했군.”

 “이런 데는 엄청 둔하다니까.”


 유키무라와 렌지가 뭐라고 더 말하는 소리가 들리긴 하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무라사키가 한 번 떠오르니까 머리, 가슴 어느 쪽에서도 떠나질 않는다. 내가, 무라사키를 좋아한다는 건가. 가슴께가 따뜻해져간다.





 옆에서 아무리 니오와 마루이, 아카야가 떠들어도 들리지 않았다. 평소처럼 화를 내거나 해이하다고 소리를 치지 않아서인지, 부활동 막바지 무렵에는 아카야가 걱정스럽게 “부부장, 괜찮아요?”하고 물어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아카야는 참 귀여운 후배이지만 지금은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 대화 이후로 머릿속에 온통 무라사키뿐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요즘은 거의 무라사키 생각뿐이긴 하지만 아무튼 그렇다. 좋아한다. 어딘가 낯간지러워서 입 밖으로 내기는 어려운 단어다. 그 단어 외에는 이 상태를 설명할 그 어떤 단어도 존재하지 않는 게 사실이다. 좋아한다. 좋아한다. 무라사키 아야카를 좋아한다.

 부활동이 어떻게 끝났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부리나케 옷을 갈아입고 라켓을 챙겨들었다. 언제나처럼 교문 앞 벤치에 앉아있는 무라사키를 보는 순간 모든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났다. 오로지, 하나만이 남았다. 고백하자.



*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몰라도 최근의 사나다는 이상하다. 이상한 정도가 좀 심하다. 늘 솔직함을 지나쳐서 우직한 그인데 왤까. 그 날만 해도 그렇다. 평소처럼 그냥 “뭐했어?”라고 가볍게 물어봤을 뿐인데 “그냥.”이라니. 다른 사람이 그렇게 대답을 했다면 아무렇지 않게 지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대답을 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사나다 겐이치로다. 이러니 내가 걱정을 안 할 수가 있나.

 근데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사나다 걱정을 하기 시작했더라?

 최근의 일은 아니다. 스스로 이건 예전과 다르다고 깨달을 정도의 시간은 지났다. 사실은 그 이상도 깨달았다. 그래, 물론 사나다는 소꿉친구이다. 소학교 때부터 붙어 다녔으니까 벌써 몇 년은 함께 지내온 사이이다. 등교도 하교도 같이 하고 그 밖에도 많은 것들을 함께 했다. 같이 하지 않은 걸 찾는 게 더 빠를 게 분명하다. 뭐, 그랬으니 이런 상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하지만 그 예전엔 사나다를 이만큼 생각한 적이 없었다. 이렇게 쉴 새 없이 사나다를 떠올린다거나 그냥 지나치듯 내뱉은 한 마디에 온종일 걱정을 하는 일은 없었단 말이다. 언제나 습관처럼 사나다가 부활을 마치고 오기를 기다렸지만 그 시간이 설레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난, 사나다 겐이치로를 좋아하는 거야.

 미쳤다, 미쳤어. 무라사키 아야카, 너 제정신이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나다 겐이치로를 좋아하다니! 사나다가 어떻게 반응할지는 보지 않아도 펼쳐진다. 해이하다, 학생의 신분에 어찌 남녀사이에 정분을 쌓을 수 있단 말인가! 아니,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이런 틀에 박힌 고리타분한 생각을 할 수 있나 싶지만 그게 사나다 겐이치로인 걸 어떡해! 더 큰 문제는 그런 사나다를 이 시대의 여중생인 내가 좋아한다는 것이다.


 “아으으, 복잡해!”


 침대에 털썩 드러눕는다. 더듬더듬 손을 뻗어서 핸드폰을 손에 쥔다. 메일이나 보내볼까. 안 그래도 복잡한데 여기서 사나다한테 메일을 해봤자 도움이 될 리가 없다. 그래봐야 단답형인 짧은 메일만 올 텐데 뭐. 긴 답변을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적어도 지금은 하고 싶지 않다. 다시 핸드폰을 던지려는 순간,

 딩동.

 어라, 메일이네. 히요리려나? 화면에는 깜빡깜빡 메일 알림이 들어온다. 버튼을 몇 번 눌러 메일함을 연다. 어. 음. 어? 사나다잖아. 벌떡 몸을 일으킨다. 세상에. 사나다가 나한테 메일을 보낸 거야, 지금? 나한테 답장으로 보낸 게 아니고 먼저 보낸 거라고? 이 놀라운 상황에 얼어붙어서 잠시 동안 화면만 쳐다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린다. 빠르게 버튼을 조작해 메일을 연다.





 “있지, 사나다.”

 “음?”

 “어젯밤에 보냈던 메일 말인데. 그거 왜 보낸 거야?”


 내 질문이 예상 외였던지 늘 무표정이던 사나다의 얼굴에 당혹감이 나타난다. 음, 하는 소리부터 내뱉는 걸 보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는 눈치다. 그렇다고 묵묵부답 할 사나다는 아니니 그냥 그가 걷는 대로 따라 걷는다. 공연히 긴장이 되어서 가방끈을 꼭 붙잡는다. 모자가 만들어낸 그림자 밑으로 오물대는 그의 입술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열릴 듯 말 듯. 그렇게 어려운 질문인가?


 “시합 날에 네가 와서 응원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래서 확인 차…….”

 “내가 언제 응원 안 간 적 있나, 뭐.”


 내 말에 동의하는지 그도 고개를 끄덕인다. 사나다가 테니스를 시작한 이후로 난 단 한 번도 그의 시합을 놓친 적이 없다. 그건 친구로서의 예의니까. 거기에는 그가 이기는 게 내가 이기는 거라는 묘한 동격화도 한 몫 했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응원하러 올 거냐니? 피식, 괜히 웃음이 난다. 뭐야, 내가 와 줬으면 좋겠다는 거네? 지금 사나다는 자기가 어떤 뜻의 말을 한 건지는 알고 있을까. 아마 모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기분이 좋다. 어휴, 이 둔한 놈. 너 지금 나한테 ‘좋아한다’고 말한 거나 다름없다구.


 “그리고 한 가지 더 있다.”

 “응?”


 어라, 그거 말고 이유가 또 있나? 아까보다 좀 더 기대되는 말에 심장이 콩닥콩닥거린다. 슬쩍 고개를 숙여 밑에서부터 그를 올려다보려 하자 그가 모자의 챙을 잡아당겼다. 부끄러워하는 걸까. 귀엽다. 어, 나 지금 사나다를 귀엽다고 생각한 거야? 세상에. 콩깍지가 씌어도 단단히 씌었구나, 나.


 “시합이 끝나면 너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심장에서 방금 덜커덩 소리가 난 것 같은데 착각인가. 무슨 자동차 엔진에서나 날 법한 소리가 사람 몸에서 나는 거지. 지금 무려 이 사나다 겐이치로가 나한테 선전포고 한 거란 말이지? 지금 나 고백할 거요, 하고 다 불고 있는 건데 사나다는 전혀 의식하지 못 하는 모양이다. 너 바보니, 그냥 둔한 거니. 아니, 애초에 선전포고라는 데서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건가.


 “무슨 얘기?”

 “그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겠는가.”


 아까와는 달리 곧장 대답을 뱉어낸다. 결심이 단단히 섰는지 모자 밑으로 언뜻 비치는 그의 얼굴에서 긴장감이 느껴진다. 우뚝 그가 멈춰서는 바람에 따라서 멈춰 선다. 그가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친다. 언제나 아무렇지 않게 마주쳐왔던 눈이, 설렌다. 뭐라고 말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기다려달라고 했나. 원래 사람의 심장은 계속 뛰어야 하는 것이지만 이렇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세게 계속 뛰고 있으니 혼이 빠져나갈 것만 같다. 


 “꼭 그 때여야 해?”


 간신히 만들어낸 말에 대답 대신 그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다. 분명히 가볍지만 묵직하게 느껴지는 그의 고갯짓에 나도 따라 고개를 움직인다. 왜 시합이 끝난 뒤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는 이길 테니까. 씨익 웃어주고 홱 몸을 돌린다. 뚜벅뚜벅, 내 발소리에 맞춰 사나다의 발소리가 겹쳐진다. 아주 사소하지만, 기분 좋게 만드는 소리.





 집 앞에서 그와 어떻게 인사를 했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혼자 들뜬 게 티가 나지 않도록 최대한 애를 썼지만 어쩌면 그가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심장이 콩닥콩닥해서 귓가를 간질이는 게 어찌나 참을 수 없던지 자꾸만 웃음이 새어나왔다. 지금도 이렇게 간질간질, 말랑말랑한데. ‘시합이 끝나면 너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사나다의 그 말이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방으로 튀어 들어갔다. 이렇게 달콤한 기분을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지 않아. 구름 위에 굴러다니면서 구름을 떼어먹는 기분. 아니, 그걸 해봤다는 건 아니고 상상을 하면 그런 기분이 드니까. 구름 대신 침대로 뛰어든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두 발을 연신 굴렀다가 홱 뒤돌아 누웠다. 천장에 붙여놓은 아이돌 포스터도 오늘만큼은 전날처럼 설레지 않는다. 안녕, 오빠들? 오늘은 엄청 기분이 좋아요. 왜냐면 드디어 그 애가, 사나다가! 나에게 고백할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죠! 꺄악! 어딘지 부끄러워서 두 손으로 얼굴을 마구 비빈다. 으악, 이러면 안 되지! 다시 벌떡 일어나 책상 앞에 앉는다. 거울을 적당한 위치에 올려놓고 들여다본다. 이 정도면 오늘의 피부 상태는 양호한 걸. 부디 그 날까지도 이 상태로만 있게 해주세요. 다크써클 안 생기게 해주시고 뾰루지 안 나게 해주세요! 어디에다 비는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빌어보기로 한다. 여태까지는 사나다를 만날 때 이렇게 빌어본 적이 없었다. 그야 어릴 때부터 온갖 모습 다 보고 살아온 사이니까. 그러고 보니 사나다는 나한테 장난으로라도 못 생겼다고 말한 적은 없다. 물론 그런 장난을 치는 애도 아니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이젠 ‘못 생기지 않았다’로는 만족할 수가 없는 걸. 예쁘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게 여자 마음이랄까. 뭐, 좋아한다는 말을 들을 정도라면 당연히 예쁘게 보이는 거겠지만.

 이렇게 사나다의 시합 날을 기다려 본 적이 있었나. 하루하루가 지나갈수록 괜히 같이 설레고 긴장한 적은 있다. 하지만 이건 뭐랄까, 참을 수가 없어서 시계라도 마구 돌려보고 싶은 거랄까. 주체할 수 없는 설렘을 담아서, 전속력으로 달려 나가 다른 사람들보다 며칠을 더 빨리 지나갈 수 있다면 기꺼이 그러고 싶은 마음이다.

 으으, 참을 수가 없어!

 절대로 내가 눈치가 빠른 게 아니다. 이 정도는 정말 누구나 눈치를 챈단 말이다. 사나다가 너무 둔한 것뿐이지 절대로 내가 예민한 게 아니다. 그러면 다른 모든 사람들도 고백을 하기 전의 이런 상황을 겪고 나서야 커플이 되는 걸까? 아니, 가만히 생각해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어느 정도 무르익은 분위기 속에서 어느 한 쪽이 ‘우리 사귈까요?’하고 묻는 게 더 일반적이려나. 상대방 쪽에서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채는 게 정상인가?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고 저떻고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내가 좋아하는 사나다 겐이치로가 저렇게 둔한데! 가볍게 스치는 봄바람을 맞고 살랑거리는 내 마음. 으아앙, 어떡해.





 발작적으로 벌떡 일어나 돌아다니고, 혼자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고, 그러다가 주위 사람들의 말을 놓치고, 사나다와 집에 돌아오고, 아침에 등교하고, 돌아오고, 학교 가고……. 며칠이 지나갔다. 정말로 길고 긴 며칠이 지나간 후에야 드디어 사나다의 시합 날이 다음 날이 되었다.

 온종일 쏟아지는 비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오다가 내일도 비가 오면 시합이 연기되어 버리는 건 아닐까? 다행스럽게도 밤이 되자 비가 멎었다. 가슴을 졸이며 찾아본 기상예보에도 내일은 맑을 거라고 했다. 좋아, 이상 무. 사나다도 최고의 컨디션을 만들어 놨을 텐데 그게 틀어지면 안 되잖아. 물론 그가 하려는 말을 늦게 듣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도 문제지만.

 여전히 사나다의 말이 온 정신을 휘저어 놓는다. 내일 시합은 최고로 예쁜 모습으로 응원을 하러 가야지. 무슨 옷을 입을까, 옷장을 열어 몇 벌이나 꺼내본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침대 위에 옷으로 산을 만들고 난 뒤에야 결정을 한다. 결국에는 묻지 않아도 뻔한 사나다의 취향을 적극 반영해 수수한 원피스가 당첨되었다. 딱히 기상예보를 믿지 못해서 그러는 건 아니지만 내일은 제발 날씨도 맑게 해주시고, 물론 정말 너무너무도 당연한 일이라 제가 굳이 빌지 않아도 되겠지만 사나다가 시합에서 이기게 해주세요!



*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검은 모자가 그의 얼굴에 검은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언제나 드리워져 있었지만, 그녀는 오늘만큼은 그 그림자를 마음껏 원망하기로 했다. 키가 큰 그를 올려다보는 데도 표정이 어떤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그게 싫었다. 뭐라고 한 마디 하려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가 다시 꾹 입을 다물었다. 얇은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고 있었다. 연신 들썩이는 입술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래, 말해. 뭔지는 몰라도.

 그보다 더 전에 머리에 툭 얹어지는 게 있었다. 갑자기 시야가 어두워졌다. 모자의 캡이 그녀의 얼굴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고개를 들 생각도 않은 채 그녀가 천천히 양 손을 들었다. 그가 줄곧 쓰고 다니던 모자가 손끝에 닿았다.


 “기다려라. 아야카.”


 왠지 엄청 부끄러워져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아야카는 고개만 끄덕였다. 이래서 모자를 쓰는 건가. 모자를 푹 눌러썼다. 눈썹을 덮어버리도록 꾹 눌러쓰고 나서야 그녀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그가 걸어갔다. 그가 뱉어낸 세 글자를 입 안에 굴리며 쳐다본 뒷모습은 정말 눈물이 나도록, 멋있었다.





 그 날의 코트는 반짝거렸다. 전날 내렸던 비가 바닥 전체를 코팅한 듯 했고 아지랑이가 아른거릴 정도로 햇볕이 뜨거웠다. 그저 서 있을 뿐인데도 땀이 주륵주륵 흐르는데 라켓을 들고 뛰는 그들은 어땠을까. 그래도 얼굴만큼은 화끈거리지 않았다. 까만 모자를 가만히 손으로 쓸던 아야카의 동작이 멈췄다.

 시합이 끝났다.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햇볕만큼 뜨거운 목소리였다. 남학생들 여럿이 크게 릿카이를 불러대었고, 그 소리가 커질 때마다 아야카의 가슴도 같이 뛰었다. 라켓 대신 상대방의 손을 잡고 악수를 하는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아니, 이미 한참 전부터 그녀는 눈을 떼지 못 하고 있었다. 곧게 뻗어 올라간 팔의 라인이라던가, 그 때의 허리 라인, 다리의 움직임, 그리고 표정까지도. 하나하나 눈에 새기면서 설레는 것은 그녀만의 특권이었다. 이렇게 가장 좋은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것은 물론 릿카이 레귤러진의 배려도 한 몫 했지만.

 릿카이 외침을 북돋을 듯 귓가를 먹먹하게 만들던 심장박동이 차츰 잦아들었다. 주변의 커다란 울림도 이젠 점점 박수소리로 바뀌어갔다. 코트에서 빠져나오며 사나다가 여기저기 꾸벅꾸벅 인사를 해대었다. 그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유키무라가 웃는 것이 보였다. 사나다는 미소 한 번 짓지 않고 그저 고개를 한 번 더 끄덕일 뿐이었다. 이럴 때는 좀 웃어도 될 텐데. 그러다가 아야카는 문득, 그가 크게 ‘하하하’하고 박력 넘치게, 아니 좀 더 웅장함이 넘치게 웃었던 것을 떠올리고 혼자 키득거렸다.


 “왜 그렇게 웃고 있나.”

 “응? 아냐, 아냐. 고생했어, 사나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서 난감해 하는 게 눈에 보였다. 덩치는 산만해 가지고는 이런 건 왜 이렇게 어려워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아야카의 눈을 보니 사나다는 더 이상 시간을 늦출 수가 없었다.

 큼, 혼자 목을 다듬고 그는 심호흡을 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머리를 맑게 한 뒤에 말을 하면 되는 것이다. 이건 아주 간단한 일이지. 머리로는 그렇게 몇 번이나 시뮬레이션을 했지만 막상 실제로 다가오니 그게 영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분명히 간단한 일인데,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말하는 것뿐인데도 이렇게 긴장이 될 수가. 나쁜 짓이라도 한 것처럼 심장이 쿵쿵거렸다. 하지만 그에게는 절대로 이것이 나쁜 짓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다.


 “널 좋아한다, 아야카.”


 말했다. 말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가슴 어딘가를 꽉 막아두었던 바윗돌이 빠진대도 이보다 시원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사나다가 아주 살짝, 미소 짓는 것도 아야카는 볼 수 있었다. 간신히 잦아들었던 심장박동 소리가 다시 그녀의 귀를 가득 메웠다. 잠깐 어찔해서 눈앞이 까매질 정도로 심장이 너무 쿵쾅쿵쾅 뛰어대었다. 숨이 점점 빨라졌다. 주먹을 꼭 쥐고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애쓰며 아야카는 눈앞의 커다란 사람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아까 전의 고백이 사나다에게 여태까지 중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면, 아야카에게는 바로 이 집중하는 일이 그랬다. 도저히 눈을 맞출 수가 없어서 아야카는 모자 캡을 꼭 잡았다.


 “왠지, 지금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서 여태까지 참아왔다. 좋아한다, 아야카.”


 아까 전에는 그렇게 하기 어렵던 말이 어쩌면 이렇게 술술 나오는 걸까. 사나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보통 그녀가 자신을 쳐다보면 이런 기분일까. 사나다는 모자 캡이 그렇게 답답해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모자에 가려진 아야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녀는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었지만 꾹꾹 눌러 참았다. 그러면 당황하겠지, 그러면 미안하다고 하겠지. 이렇게 기쁜 말 듣고 미안하단 말 듣고 싶지 않아. 하게 만들기도 싫어! 뚝뚝 떨어질 것처럼 매달려 있는 눈물이 시야를 흐리게 했다.


 “저기.”


 생각보다 더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에 아야카는 다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사나다는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아무리 둔하다고 해도 그녀가 울먹이는 것 정도는 알아차렸을 것이었다. 아야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눈물을 다 삭일 때까지는 모자를 벗지 않기로 결심했다.


 “모자 안 벗을 거니까, 지금 안 벗을 거야.”

 “괜찮다.”

 “그, 그래서, 그게 끝이야?”


 울먹이더라도 할 말은 다 해야지, 아무렴. 무려 사나다 겐이치로가 고백하는 순간인데 기왕이면 들을 수 있는 말은 다 들어야하지 않겠는가. 이미 멋대로 이름까지 부르고 멋있게 코트로 들어간 사나다에게 해 줄 대답은 ‘예스’로 정해져있다고 해도.

 숨을 고르는 것일까, 타이밍을 재는 것일까. 어정쩡하게 차렷 자세로 서 있는 사나다가 입을 오물거렸다.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게 느껴졌다. 모자 위로 따뜻한 시선이 내려앉았다. 그녀의 심장도, 그의 심장도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뛰었다.


 “나, 나의 여자친구가 되어주겠는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몇 걸음 안 되는 거리를 달리듯 해서 아야카는 그대로 사나다의 품으로 들어갔다.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귀를 가져다대었다. 쿵쿵거리는 울림이 그대로 전달되어왔다. 나도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입을 떼기가 어려웠다. 그가 내 준 용기만큼 돌려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몇 번이고 혀끝에 매달렸던 말을 입 밖으로 내보내야만 했다.


 “나도 좋아해, 겐이치로.”


 멋대로 불러버린 이름에 대해서는 마찬가지로 멋대로 부르는 것으로 화답했다. 그의 손이 자신의 등 뒤에서 어디로 가야할지를 몰라 헤매는 것을 아야카는 알고 있었다. 보지 않아도 그건 뻔하디 뻔한 일이니까. 부드럽게 자신의 어깨를 끌어안는 사나다의 손이 좋았다. 아니, 겐이치로의 손이 좋았다.

몇 년을 기대하던 고백은, 이렇게 끝이 났다.




(2014.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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