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의 굴레가 끊어진다면

     시시도 료 드림 (For. 셀레스틴님)





 변함없이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한여름 날이었다. 항상 그래왔듯 시시도는 이 맘 때가 제일 정신없이 바빴다. 고등학교에서 가서도 테니스부는 그만두지 못했다. 테니스를 하는 것 자체가 매우 즐거웠으니까. 슬슬 진로를 걱정해야 할 시기였지만 그렇다고 테니스를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테니스를 계속 하면서 수의사 공부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막연하게 걱정이 앞섰지만 그는 그런 걱정에 휩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일단 부딪쳐서, 문제가 생기면 그걸 뛰어넘는 게 바로 시시도 료니까. 그가 그 무엇도 쉽게 포기하지 않게 된 데에는 카온의 역할도 컸다. 옆에서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나도 모르게 기운이 나게 되지 않던가. 십년도 넘게, 그러니까 그가 기억하는 대부분의 시간에 함께 존재하고 있는 사람. 그녀가 없는 기억을 되짚어내는 것이 더 어려울 정도로 시시도와 카온은 붙어 다녔다. 남들은 ‘소꿉친구’라 부르고, 지금의 시시도라면 죽어도 그것을 부정하고 싶은, 카온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는, 그런 관계였다.



*



 “료.”


 톡톡, 손가락으로 가볍게 어깨를 두드릴 때까지도 시시도는 카온이 왔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이제 막 운동을 마친 참이라 물 한 병을 그대로 꼴깍꼴깍 들이키느라 정신이 없었던 탓이었다. 움찔, 어깨를 움츠렸다가 카온의 얼굴을 확인하고서야 그 어깨가 평소대로 돌아갔다. 카온이 미소 지었다.


 “오늘도 계속 달린 거야? 밥은 먹었고?”

 “운동 끝나고 먹으려고 했는데.”

 “벌써 세시 넘었거든?”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카온의 표정에 시시도는 머쓱하니 머리만 긁적였다. 시시도의 운동 코스는 항상 똑같았다. 특별히 바꿔야 할 필요성도 느낀 적 없었고, 이 코스로 다녀야 카온이 언제 어디서든 나타나기 편하니까. 대강 이 시간이면 이쯤에 있겠구나, 하고 카온도 감으로 때려 맞췄다. 시시도는 하나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핸드폰이고 뭐고 신경도 쓰지 않기 때문에 이미 익숙했다. 카온은 그게 나쁘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연락이 안 되는 게 조금 답답하기도 했지만 찾으러 나오면 만날 수 있으니까.

 멀뚱하니 서있는 시시도의 팔을 카온이 낚아챘다. 그리고는 척척 걸어가서 가까운 벤치에 그를 밀어 앉혔다.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닌지라 시시도는 얌전히 그 자리에 앉았다. 카온이 들고 있던 쇼핑백에서 주섬주섬 하나씩 꺼내 늘어놓기 시작했다. 벤치 위에 자리 잡은 도시락 뚜껑에 손을 가져가다가 시시도는 방향을 틀어 카온에게로 향했다. 쇼핑백에서 딸려 나온 물티슈가 그의 손에 쥐어졌다. 그가 물티슈로 슥슥 손을 닦는 동안 카온이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오늘의 늦은 점심 메뉴는 주먹밥. 밖에서 먹기에는 주먹밥이 간편할 테니까.


 “잘 먹겠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카온이 만들어주는 도시락은 항상 최고였다. 그리고 늘 ‘맛있어’라고 돌직구로 뱉어내었다. 그게 사실이니까. 허겁지겁도 아니고, 그렇다고 느릿느릿도 아닌 적당한 속도로 그는 주먹밥을 꼭꼭 씹어 먹었다. 카온 요리 실력이 점점 느는 것 같은데. 나 때문인가? 에이, 설마, 그건 아니겠지. 그래도 계속 이렇게 카온이랑 붙어 지내면 굶는 일은 없을 것 같다. 할아버지가 그랬었나, 음식 잘하는 아내를 만나면 복이 많은 거라고. 나 원래 복이 많은 놈이던가?


 “료?”

 “엉?”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벙 쪄 있어.”


 아차. 카온이 부르자 시시도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주먹밥을 쥔 채로 손을 허공에 두고는 멍하니 그걸 쳐다보던 중이었다. 시시도는 다시 손을 움직여 입 안으로 주먹밥을 밀어 넣었다. 아, 딴 생각이 너무 많이 나. 집중이 안 된다니까.


 “그냥 피곤해서.”

 “요즘 무리하는 거 아냐? 공부하기도 바쁠 텐데.”

 “꼴사납게 빌빌거릴 수는 없잖아. 운동 안 하면 몸이 뻐근해진다니까.”


 조금 남은 주먹밥 조각을 마저 입에 물고 그는 기지개를 쭉 폈다. 무리하고 있는 걸지도.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소학교 때부터 꾸준히 운동을 해왔고, 그걸로 체력 관리를 해왔다. 테니스를 계속 하기 위해서도 물론 필요했다. 카온이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섞인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으니까.


 “바래다줄게.”

 “들어가려고?”

 “그래야지. 땡볕에 뛰었더니 힘들어.”

 “그러게 무리하는 거라니깐.”

 “그러는 너야말로 도시락 싸느라 무리하는 건 아니고?”

 “료가 안 챙겨먹으니까 그런 거잖아. 나라도 챙겨야지, 누가 챙겨줘.”


 씨익 웃어 보이는 모습에 시시도도 따라 웃어버리고 말았다. 하긴. 이런 관계 때문에 다른 친구들에게서 이미 “둘이 사귄대요~”하는 놀림 정도는 수도 없이 들었다. 그 때에는 둘 다 성을 내면서 친구를 쫓아다니느라 여념이 없었는데. 시시도는 스스로가 이렇게 변해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어때, 소꿉친구만 한 게 없지?”


 카온이 일어나면서 쇼핑백에서 절그럭 소리가 났다. 빈 도시락 통이 부딪치는 모양이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면 어색해서 미칠 것 같다. 예전과 똑같은, 카온이 거의 습관적으로 하는 말일 뿐인데. 대답을 안 해도 괜찮나? 대답 대신 그냥 뚱하게 있으면 왜 또 뚱해졌냐고 자연스럽게 카온이 풀어가려나. 아니, 근데 이건 너무 카온한테만 의지하는 거잖아. 시시도 료, 너 이런 놈이었냐. 하지만 뭐라고 말해야 좋을 지 도통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반박하자니 이상해질 게 뻔하고, 그냥 인정하고 말하자니 지금 이 타이밍은 아니고. 자신과의 싸움을 하는 동안 이미 카온은 앞서 걸어 나갔다.


 “바래다준다며. 안 가?”

 “어, 가.”


 이 싸움은 일단 다음에 끝내자. 



*



 카온이 들어가서 현관문이 닫히는 것까지 보고난 뒤에야 시시도는 뒤돌아섰다. 카온네 집과 시시도네 집은 뛰면 오 분도 될까 말까 한 가까운 거리였다. 바래다주고 말고 할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늘 카온을 데려다 주었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잠시라도 더 함께 있고 싶었다. 이런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카온에게 시시도는 그냥 역시 소꿉친구인 것뿐일까?

 시시도에게도 카온이 그냥 소꿉친구였던 시절이 있었다. 유치부 때부터 같은 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늘 붙어 다녔다. 그 때쯤엔 그냥 아무 생각도 없었던 것 같지만. 좀 크고 나서는 동네를 누비면서 온갖 놀이에 다 참여했었다. 그 자리에는 항상 카온도 함께 있었다. 잘 생각해보면 분명 그 때에도 카온은 소꿉친구였다. 그럼 언제? 그로서도 정확히 언제라고 짚기 어려웠다. 그냥 정신 차리고 나니 카온이 소꿉친구가 아니게 되었다. 모르는 사이에 심장은 두근거리기 시작했고, 눈을 떠보니 눈앞에 서 있는 카온이 더 없이 예뻐 보였다. 기분 탓이려니 하고 넘어가는 것도 한두 번. 스스로가 이런 쪽으로 둔하다는 사실을 이미 알다시피 그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깨닫고 인정하는 데에 몇 년을 소모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기도 한 시간이었다.

 집 앞에 도착했지만 쉽게 들어갈 생각이 나지 않았다. 조금 더 뛸까. 이제 막 땀 식었는데. 아, 그냥 다시 뛰고 올까. 머릿속이 여전히 뒤죽박죽이었다. 계속 이 상태로 지내야 하나? 그러기엔 이 감정을 깨닫고도 긴 시간이 지나버렸다. 자신이 이러고 있는 한 소꿉친구 상태를 계속 유지하기는 당연히 어렵다. 그렇다면 남은 답은 하나다. 고백해야지.



*



 그렇다면 고백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마음을 정리하고 고백하기로 결정한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그는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고백을 해야 하는 지 아무런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누구한테 물어봐야 되지? 근데 이런 걸 물어본다고 제대로 대답해 줄 놈은 있나.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겨난 탓에 시시도는 침대 위에 벌러덩 누워 머리를 싸맸다.

 조언을 구해볼 만한 사람을 떠올려 봤지만 딱히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쵸타로 녀석에게 물어봐? 아니, 그건 아니다. 물어본 적도 없지만, 그게 뭐가 되었든 간에 자신은 절대로 쵸타로가 하는 방식으로는 고백할 수 없을게 뻔했다. 그냥 여태 해왔던 대로 돌직구를 날리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까? 대화가 그렇듯이 고백도 상호 커뮤니케이션이다. 듣는 상대방을 생각해야만 했다. 그렇게 곧장 말해도 괜찮을까? 받아들이는 사람이 너무 놀라거나 오히려 오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지니 온갖 상상이 쏟아져 나왔다. 시시도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럼 언제? 어떤 상황에서? 무작정 카온을 만나자 마자 “좋아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럼 다른 모두가 그러는 것처럼 분위기 좋은 카페를 간다거나 뭐 그래야 할까. 그것도 뭔가 그림이 이상하다. 차라리 노을 지는 하천 옆 잔디밭이 훨씬 더 낫겠다. 그렇다고 해서 굳이 그런 상황을 연출해내기도 영 내키지 않았다. 어딘가 낯간지러웠다. 남들 일일 때에는 크게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 막상 자기에게 닥쳐오자 시시도는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이거 쉬운 일이 아니구나. 마음을 전달하는 일이 쉬울 리 없다는 것 정도는 알았지만 이론과 실제는 다른 법이었다.

 시시도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더 고민해봤자 애초에 정답이 있는 게 아니니까. 부딪쳐보면, 어떻게든 답이 나오겠지.



*



 변함없는 운동시간과 코스, 그리고 약속이나 한 듯 마주치는 장소. 그 장소가 가까워지자 시시도의 발이 빨라졌다. 왠지 오늘은 일찍 만날 것 같은데. 그의 예상과는 달리 가까운 곳에 카온은 없었다. 온몸에서 뻗어나가려는 아쉬움을 꽁꽁 묶어둔 채, 시시도는 속도를 좀 더 높였다.


 “료, 어디 가!”


 그리고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급하게 발을 멈추었다. 달려가던 속도 때문에 단숨에 멈출 수 없었다. 발바닥이 순간 훅 달아올랐다. 그래도 금방 

다시 균형을 되찾은 시시도는 홱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나무를 뒤에 두고 카온이 서 있었다. 아무래도 나무에 가려서 카온을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한 바퀴를 더 돌아야 하나 고민했는데 다행이다.


 “못 봤어.”

 “나무 뒤에 있었…… 는데 너 얼굴이 왜 그래?”

 “얼굴?”


 카온의 시선이 닿은 쪽으로 자기도 모르게 손이 올라갔다. 그리고 그 시선의 끝인 왼쪽 이마에 손가락이 닿자 시시도는 어깨를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따끔하네. 그러고 보니 아까 달리던 길에 뭔가 타잔이 타고 다닐 것 같은 줄 있던데. 탁 부딪치는 느낌은 있었지만 그냥 휙 손으로 치워버리고 말았다.


 “세상에, 상처 난 것도 모르고 그냥 달렸어?”

 “몰랐…….”

 “왜 이렇게 둔해, 얼굴에 상처가 났는데! 이거 봐, 피 흘렀는데 몰랐지?”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말에 시시도는 입을 다물었다. 잘못했을 땐 그냥 들어야지. 시시도는 카온의 손에 이끌려 평소의 그 벤치에 앉았다. 아무리 운동 중이어도 그렇지 어떻게 피가 흐르는 걸 모르냐, 도대체 얼마나 둔한 거냐, 그러게 조심하라고 몇 번이나 말을 해도 왜 안 듣냐, 이러쿵저러쿵. 시시도는 어, 어, 조심할게, 알았어, 등으로 가볍게 대답을 해주었다. 그 사이 카온은 가방을 열고 무언가를 열심히 찾았다. 그녀의 손에 파우치가 들려나왔다. 그리고 그 파우치를 열어서 연고와 반창고를 꺼냈다. 새삼스럽게 그녀의 준비성이 놀라웠다.


 “가만히 있어.”


 카온이 이미 한 손에 쥐고 있던 물티슈로 조심조심 시시도의 얼굴을 닦아내었다. 피부에 닿는 알코올 느낌이 싫지 않았다. 상처에 가깝게 닿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따가워.


 “거봐, 조심 좀 하지. 약 발라줄게.”


 카온이 연고를 꾹 짜서 손가락에 묻히고는, 그 손가락을 시시도의 이마로 가져다대었다. 조금 따갑기는 했지만 그냥 그런대로 괜찮았다. 이마를 문지르는 손가락이 부들부들하고 조심스러웠다. 그녀는 그 조심스러운 손길로 반창고까지 쓱 붙여주었다. 그가 손으로 더듬더듬 이마를 짚었다. 상처가 보이지도 않게 제대로 정리를 해 준 모양이었다.


 “고마워.”

 “소꿉친구 좋다는 게 뭐야.”


 카온이 씩 웃어보였다. 하지만 시시도는 웃지 않았다. 왠지 오늘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 이마를 문지르던 손가락이, 그렇게 부들부들하던 손가락이 자신의 심장을 그렇게 부들부들 문지른 것만 같아서 그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뱉어내지 않으면 이렇게 계속 목을 간지럽게 만들 거야.


 “소꿉친구 그만하자.”



*



 시시도는 살면서 그만큼 당황해 본 적이 없었다. 얼마나 당황했냐면, 눈앞에서 카온이 달아나는 것을 봤는데도 벌떡 따라 일어나지 못했을 정도였다. 말을 해 놓고 나서 스스로도 이건 너무 앞뒤를 잘라먹은 직구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문제는 그 뒷말을 이어서 하기 전에 카온이 자리를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는 데에 있었다. 얼이 빠진 듯, 두 눈은 휘둥그레져 있고 입은 반쯤 벌린 상태로 자신을 쳐다보던 카온이 어느새 저쪽 골목을 지나 사라져버렸다. 뒤늦게야 사태를 파악하고 시시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식간에 몇 걸음을 달려 나갔다가 그는 부리나케 제자리로 돌아왔다. 벤치 위에 널브러져 있는 카온의 짐을 제대로 확인조차 하지 못하고 그냥 다 가방 속으로 밀어 넣었다. 지퍼까지 제대로 채운 뒤, 가방을 품에 끌어안고 그도 전력질주를 시작했다. 방향만 안다면 카온을 쫓아가는 건 무리가 아니다. 카온이 사라졌던 골목을 향해 달렸다. 고민은 그 다음 골목과 마주했을 때부터 생겼다. 여기서 꺾어서 갔을까, 아니면 그대로 하천 방향을 따라 달렸을까. 끙, 머리를 싸맸다가 시시도는 무작정 앞을 향해 뛰었다. 자기만큼이나 카온도 지금은 머리가 복잡할 텐데 옆으로 꺾고 어디로 숨고 그런 게 가능할 것 같진 않으니까. 그냥 직감이 맞길 바라면서 죽어라고 달렸다.


 “아, 어디까지 갔냐고!”


 꽤나 한참 달렸는데도 카온의 뒷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휙휙 고개를 내저어 봐도 카온으로 착각할 만한 여자애조차도 눈에 띄지 않았다. 아까처럼 어디에 가려 있는 거 아냐? 아무리 자신과 함께 뛰어놀며 자란 카온이라 해도 지금까지 운동을 꾸준히 한 자신보다 빨리 갔을 리는 없다. 지나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시시도는 마음이 급해졌다. 아까 전에 달려온 길을 역방향으로 달렸다. 아까보다는 훨씬 느린 속도로, 주변의 큰 나무나 벤치 쪽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서.

 얼마 거슬러 가지 않아서 시시도는 카온을 발견했다. 그가 상상했던 노을 지는 하천 옆 잔디밭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기는 했지만, 아무튼 그녀는 노을 지는 하천 옆 잔디밭 공터에 우두커니 선 커다란 나무 뒤편에 주저앉은 채였다. 조심조심 발을 내딛던 시시도는 오히려 이 편이 더 놀라게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에 우뚝 멈춰 섰다. 발밑에서 잔디가 솨아아 소리를 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카온이 돌아보았고, 눈이 마주쳤다.


 “기다려!”


 또다시 자리를 뜨려는 카온을 붙잡아야 했다. 소리를 너무 크게 친 탓일까 멈춰선 카온의 어깨가 확 움츠러드는 게 보였다. 카온은 시시도를 돌아보지 않았다. 시시도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사각, 사각. 연필 깎을 때나 날 것 같은 소리가 발밑에서 계속 났다. 그리고 마침내, 세 걸음 정도를 사이에 두었다.


 “카온. 그러니까 어, 미안해, 일단. 뭐라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나쁜 뜻으로 얘기한 게 아니야.”


 대답이 없었다. 목이 타들어갔다. 꿀꺽, 침을 삼켰다. 그 때까지도 품 안에 안았던 카온의 가방은 조심스럽게 나무 아래쪽에 내려놓았다. 큼, 목도 한 번 가다듬고 땀으로 범벅이 된 운동복의 매무새도 다졌다. 젠장, 멋있는 고백이고 뭐고 이래서는 폼도 안 나겠다. 그래도 좀 멋있게 하고 싶었는데.


 “그러니까, 내 말은…….”

 “그만하자는 게 무슨 뜻이야?”


 카온의 목소리가 너무 떨려서 이해하는 데에 시간을 조금 소모해야만 했다. 시시도는 크게 숨을 뱉어내었다.


 “너랑 나랑 소꿉친구인 거 맞는데, 넌 어떨지 몰라도 난 앞으로도 계속 소꿉친구 상태로만 있고 싶지는 않거든. 좋아하니까.”


 어딘지 낯간지러운 말. 볼이 뜨거워져서 시시도는 손등으로 볼을 슥슥 문질렀다. 자꾸만 땅으로 내려가는 시선을 끌어올려서 카온을 쳐다보았다. 카온이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그가 이 마음을 깨닫는 데에 소모했던 그 시간만큼이나 길고 긴 걸음이었다. 키도 분명 비슷했었는데. 어느새 자신보다 좀 더 아래에 내려가 있는 어깨를, 양손으로 붙들고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녀의 어깨가 가슴팍에 닿았다. 시시도는 양손을 천천히 내려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널 좋아해, 카온. 그러니까 난, 소꿉친구 말고 남자친구 하고 싶다는 뜻이야. 그거 말고 다른 뜻은 없어. 너무 앞 뒤 없이 말해서 미안해.”


 두근, 두근. 카온의 심장이 뛰는 게 느껴졌다. 자신의 심장박동도 따라서 빨라졌다. 산들바람이 솔솔 불었다. 어딘지 목덜미가 자꾸만 간지러웠다. 조금 전까지 달리느라 계속 흘렀던 땀이 다 식어갔다. 아.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 땀 냄새 날 텐데 어떡하지. 이제 와서 팔을 풀고 뒤로 물러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젠장. 고백을 하려고 상상해봤던 그 모든 상황 중에 이런 전개는 없었다. 카온이 뭐라고 할지, 지금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 지 시시도는 아무것도 예상하지 못했다. 품 안에서 카온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대로 계속 대답을 안 하면 어떡하지. 그러면 팔 풀고 뒤로 물러나야 되나?


 “미, 미안해.”


 시시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 대답은 무슨 의미일까? 어떤 점에 대고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 걸까? 잔뜩 긴장이 되어서 입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팔을 역시 푸는 게 나을까. 조심스럽게 손을 풀어내려는데 탁, 양손이 와서 그를 붙잡았다. 움찔, 시시도는 그대로 멈추었다. 어, 어.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그렇게 달렸는데도 카온의 손이 차가웠다. 어릴 때도 긴장을 하면 곧잘 손발이 차가워지고는 했었다.


 “내가 멋대로, 훌쩍, 오해해서 그런 거니까.”

 “우, 울어?”


 화들짝 놀랐지만 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양팔은 여전히 카온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였고, 심지어 그 팔은 카온이 붙든 상태였다. 몇 년이나 봐 온 건 사실이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카온이 울면 시시도도 따라서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랐다. 게다가 지금은 명실상부 자신이 울린 게 아닌가. 무슨 말을 건네야 할 지, 어떤 말로 달래줘야 할 지 머릿속이 실타래처럼 엉켜있었다. 말 대신 뻐끔뻐끔 입만 움직였다.


 “그, 그러니까 지금 그거, 고, 고백한 거지?”


 카온의 말에 시시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런 식으로 고백할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인 걸 어쩌겠어.


 “응.”

 “나 대답해야 되는 거지?”

 “어, 어.”


 잠시 카온은 또 대답이 없었다. 천천히 카온의 손이 온기를 되찾아갔다. 팔에서 팔로 조금씩 온기가 옮겨가는 것만 같았다. 지금 시간은 어떤 속도로 흐르고 있을까. 언제나 같은 속도로 가는 게 당연하겠지만, 지금은 왠지 시계바늘이 느릿느릿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오면서 달아오른 얼굴을 식혀주었다.

 그리고 카온이 움직였다. 자신의 허리를 감고 있던 시시도의 팔을 조심조심 풀어내었다. 시시도는 팔을 어정쩡하니 둔 채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카온의 손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눈물을 닦아내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카온이 뒤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나, 나도 좋아해.”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렇게 바라던 말이었는데 막상 듣고 나니 여간 쑥스러운 게 아니었다. 얼굴이 과연 얼마나 붉어졌을까. 이 상태로 카온의 얼굴을 계속 마주보고 있어도 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시선을 돌리면 이상하지 않을까. 이제는 몇 년 동안 그렇게나 시시도를 간질이고 괴롭히던 그 감정에 종지부를 찍을 때였다. 


 “그, 그럼 이제 우리, 그러니까.”

 “응.”


 소꿉친구 말고 연인 관계. 연인이라는 단어가 어딘지 굉장히 “꼴불견이야.”하고 외치고 싶게 만들었지만, 마음에는 들었다. 두 사람은 너무 오래 소꿉친구라는 굴레 안에 갇힌 채로 지내왔으니까. 그래봤자 앞으로도 계속 붙어 다닐 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겠지만.


 “사귀는 거다.”


 시시도가 볼을 긁적였다. 대답을 들은 카온의 표정이 훨씬 밝아졌다. 환하게, 정말로 화사하게 웃는 카온을 보고 시시도도 따라 피식 웃었다. 진작 이렇게 고백했으면 될 텐데. 꼴불견이다, 시시도 료. 다른 커플들이 그렇게 하듯 멋들어지고 반짝반짝한 고백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결과는 원하던 대로 이루어졌으니까.


 “가자.”


 시시도가 손을 내밀었다. 여태까지 몇 번이고 잡고, 또 잡았던 손이 새삼스러웠다. 카온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멈칫거리던 손이 슬며시 앞으로 나왔다. 두 사람의 손이 포개졌다. 따뜻했다. 꼭 붙잡은 손이 어딘지 모르게 든든해서, 카온은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방금 전까지 울었던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산들바람이 잔디를 스쳤다. 시원한 여름의 소리가 두 사람을 축복했다.



*



 어느새 바람이 차가운 계절이었다.

 계절이 바뀌는 동안 소소한 변화가 몇 가지 생겼다. 예전에는 하지 않던 스킨십이 늘었고 다른 친구들에게 종종 설명을 해야 했다. 소꿉친구가 아니라 지금은 연인이라고. 그 설명을 하는 데에는 항상 시시도가 필요했다. 평소답지 않게 카온이 얼굴을 붉히며 횡설수설하는 탓이었다. 결국 보다 못 한 시시도가 툭 던지듯 “사귀는데.”라고 말하곤 했다. 친구들은 새삼스럽다는 반응이었다. 여태도 사귀는 것처럼 해 놓고 뭘 이제 와서.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정말 그런 것도 같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데이트였다. 여태까지도 정해놓지 않고 종종 만나고는 했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건 데이트와는 달랐다. 이제는 언제, 어디서 만날 지를 정했고 뭐가 하고 싶은지도 물어보았다. 동네에서 마주쳐서 대화를 한다거나 소소하게 산책을 한다거나 뭐 그런 것들과는 조금 다른 느낌. 둘이서 영화를 보고, 맛있다고 소문난 음식점을 찾아가고, 가끔은 아이쇼핑도 하는 평범한 데이트. 보통 커플들이 할 만한 것들을 두 사람은 하나씩 밟아나갔다.




 “료.”


 오 분 쯤 기다렸던가. 카온은 약속시간에 늦는 법이 없었다. 게다가 보통은 카온이 먼저 와 있는 편. 연인이 된 이후로 시시도는 조금씩 먼저 나오는 데에 습관을 들였다.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외투에 목도리, 벙어리장갑까지 하고 나온 카온이 귀여웠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카온이 팔짱을 꼈다. 피식, 웃음이 났다. 팔짱을 낀 채로 두 사람은 걷기 시작했다.


 “눈 올 것 같은데.”

 “아, 눈사람 만들고 싶다.”

 “애들도 아니고.”

 “뭐, 어때. 옛날엔 료가 제일 열심히 만들었으면서.”

 “지금 공원에서 그러고 있으면 꼴불견이거든?”

 “눈사람 만드는 게 뭐.”


 삐죽, 카온이 입술을 내밀었다. 시시도가 킥킥대고 웃었다. 놀리고 싶단 말이지, 이런 표정을 보면. 이럴 때면 대화는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이따 저녁에 눈 오면 가볼까.”

 “사실은 료도 만들고 싶은 거지?”

 “너 혼자 눈사람을 어떻게 만드냐.”

 “조그맣게 만들면 되지!”

 “큰 게 멋있잖아.”

 “누가 남자애 아니랄까봐.”

 “애는 무슨.”


 금방이라도 눈송이가 떨어져 내릴 것만 같은 하늘이었다.





(2014. 10.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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