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데타가 ‘이것’이라 말한 것은 벨레트가 눈앞에 들이민 작은 천 꾸러미였다. 잠깐만, 그리고 살짝만 문을 열어주면 된다는 벨레트의 말에 정말 눈 하나만 빼꼼 보일 만한 공간을 만들었더니 불쑥 그 꾸러미가 문 안으로 들어왔다.
“답례다.” “답례요?” “얼마 전에 디저트를 줬잖아.” “아.”
약간 멍청하게도 들릴 법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베르나데타는 그제야 그 꾸러미를 손에 받아들었다. 손에 미지근하게 온기가 퍼졌다. 아무래도 디저트에 디저트로 답례를 받은 모양이었다. 갑작스러운 선물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했다.
“그럼 이만.” “어? 서, 선생님!”
자기도 모르게 홱 문을 열어젖히고 벨레트의 망토를 붙잡았다. 이미 몸이 저만치 돌아가 있던 벨레트가 고개를 돌렸다. 화끈거리는 볼은 벨레트의 시선 때문인지 아니면 제 부끄러움 때문인지 모를 일이었다.
“차…… 차 드실래요?”
더듬더듬 겨우 꺼낸 말이 고작 그것이었다. 베르나데타는 속으로 이 바보, 멍청이 따위의 소리를 내뱉으며 자신을 매도했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망토 자락이 스르륵 바닥으로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좋아.”
푸른 눈동자가 똑바로 마주쳐오자 가슴이 세게 뛰었다. 베르나데타는 망토를 훅 놓고 얼른 문을 열었다. 이 문을 이렇게까지 활짝 연 게 얼마 만일까. 아직 산을 다 넘어가지 못해 걸려 있던 햇빛이 문 쪽에서 자신의 방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게 낯설었다. 이 시간에는 초를 켜놓지 않아도 원래 방이 밝구나. 붉게 물든 방을 망연히 바라보던 베르나데타는 벨레트의 시선을 받은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후다닥 벨레트를 자리로 안내하고 다기를 꺼냈다. 어쩌다 이런 일(자신의 손으로 직접 벨레트를 방으로 들이는 일)이 벌어졌는지 참 모를 일이었다.
발단은 이랬다. 서고에 틀어박혀 한창 책을 읽다 보니 바다 너머의 아주 머나먼 이국땅에는 특정한 날이 되면 좋아하는 사람에게 ‘초콜릿’을 주는 문화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초콜릿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또 다른 책을 펼쳐 보았다. 제대로 설명이 된 책이 없어 책장 한 단을 다 비운 뒤에야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카카오’라는 열매로 만든 달콤한 디저트. 굳혀서 먹기도 하고 물에 녹여서 따뜻한 차처럼 마시기도 한다. 빵이나 쿠키 등에 넣어 풍미를 더할 수도 있다. 그렇게 달콤한 디저트니 애정을 담는 것이리라. 베르나데타는 이국의 요리책에서 묘사하는 맛 설명을 읽으며 입맛을 다셨다. 책을 탁 덮고 나니 허기가 몰려왔다. 식사한 지도 좀 됐으니 간식이 먹고 싶어질 시간이었다. 베르나데타는 책을 싹 정리해놓고 식당으로 발을 옮겼다. 이 시간에는 식사하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 주방장에게 부탁하면 주방을 빌릴 수 있을 것이었다. 예상대로 주방은 한산했고, 쉽게 주방을 빌렸다. 밀가루를 손에 쥐고 나니 책의 내용이 다시 떠올랐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달콤한 초콜릿을 선물한다.’ 초콜릿이 아니어도 달콤한 디저트는 많았다. 자연스럽게 벨레트의 얼굴이 머리를 스쳤다. 자기 간식용으로 만들던 디저트가 두 배가 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드세요.”
달콤한 향이 방 안에 퍼졌다. 향을 맡고 있자면 혼란스럽던 머리도 차분히 정리되는 것 같았다. 벨레트는 짤막하게 감사 인사를 하고 차를 홀짝 들이켰다. 테이블에는 벨레트가 준 꾸러미에서 꺼낸 쿠키도 예쁘게 놓여 있었다.
“달군.” “아, 베리 티거든요. 헉, 이럴 수가, 디저트가 있는데 또 단맛의 차를 드리다니! 베르가 바보 같은 실수를 했어요, 어떡하지? 다, 다, 다, 다른 걸 새로 내려드릴까요?” “괜찮아. 그 쿠키는 달지 않아.” “그, 그래요?”
달지 않다는 말이 왠지 가슴에 콕 박혔다. 흔히들 애정에는 ‘달콤하다’ 같은 수식어를 붙이니까 달콤한 디저트에 애정을 담아 선물하는 거로 생각한 탓이었다. 베르나데타는 굳어지려는 표정을 숨기고자 얼른 차를 들이켰다. 베리 티는 향긋하고, 따뜻하고, 달콤했다.
“저번에 준 쿠키…… 아니, 그건 빵이라고 해야 맞나? 잘 먹었어.” “앗, 괜찮으셨어요? 혹시 입에 안 맞으실까 봐 걱정했어요. 베르 입맛에 맞춰서 만든 거라 꽤 달게 만들었거든요.” “달았어.” “헉, 단건 역시 싫으세요? 베르가 그것도 모르고 선생님께 고역을 치르게……” “아니, 맛있었어.”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벨레트가 다시 베리 티를 홀짝였다.
“답례로 뭘 해야 할지 몰라서 고민했는데 디저트를 받았으니 디저트를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주방장에게 도움을 받았다.” “네? 선생님이 직접 만드셨어요?”
고개를 끄덕인 벨레트가 손을 뻗어 쿠키를 쥐었다. 그러더니 그걸 그대로 베르나데타에게 내밀었다. 명백하게 먹어보라는 뜻이었다. 얼떨떨한 기분이었지만 거절할 수는 없어 쿠키를 받아들었다. 벨레트도 가끔 요리를 했고, 그보다 더 가끔 베르나데타도 옆에서 거들고는 했었다. 하지만 한 번도 쿠키나 빵, 케이크를 굽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커다란 손으로 반죽을 치대고 하나하나 동글게 모양을 잡는 모습을 상상했더니 괜스레 미소가 나왔다. 쿠키는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벨레트가 예고한 대로 달지는 않았지만 견과류를 넣었는지 고소했다. 한 입을 더 먹은 베르나데타는 베리 티를 내리기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모자란 단맛은 베리 티가 채워주어 적절한 조화를 이루었다.
베르나데타의 말에 벨레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생각에 잠긴 듯, 벨레트의 시선이 테이블의 빈 곳을 향했다. 베르나데타도 벨레트를 따라 무심코 테이블을 쳐다보았다. 오독오독, 쿠키를 먹는 소리만 조용히 방을 채웠다. 그러다 갑자기 벨레트가 입을 열었다.
“베리 티와 벌꿀 과일차를 좋아하지. 달콤한 타르트나 사가르트도 좋아하고, 고기보다는 채소와 생선 요리를 더 좋아해. 벌레잡이풀을 좋아하고 인형을 좋아해. 자수를 놓는 것도, 요리하는 것도 좋아하고, 서고에서 혼자 책을 읽는 것도 좋아하지.”
베르나데타는 쿠키 부스러기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벨레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렇게까지 속속들이 다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말이 나오지 않아 입만 뻐끔거리고 있자니 벨레트가 마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방에 혼자 있는 걸 좋아하지만 마음이 편한 상대에게는 문도 열어주고.”
벨레트가 희미하게 웃는 것도 같았다. 금세 찻잔에 얼굴이 가려 확신은 들지 않았다. 귀가 터져나갈 정도로 가슴이 쿵쾅거렸다. 어쩔 줄을 몰라 찻잔에 코를 박은 사이, 벨레트가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베르나데타가 앉은 자리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쿠키 접시를 쓱 밀어놓았다.
“차 잘 마셨어. 디저트는 베르나데타가 마저 먹도록 해. 선물한 거니까.” “어, 네, 네. 가,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에 또 차 마시자.”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벨레트는 성큼성큼 문밖으로 나갔다. 반동으로 잠깐 끽 소리를 내던 문이 조용해졌다. 방 안에 혼자 남은 베르나데타는 벨레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이해하기 위해 차근차근 단어를 곱씹었다.
전화 너머로 투덜대는 목소리가 귀여워서 후지 슈스케는 미소를 지었다. 겨우 한 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 이 남동생은 늘 제게 투덜거렸다. 사춘기 중학생에겐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는지라 슈스케는 마음을 넓게 가졌다. 볼멘소리하긴 해도 꼬박꼬박 전화는 받아주고, 막상 얼굴을 맞대면 또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고, 가끔 귀여운 소리도 하는 게 제 동생, 후지 유타였다.
“하지만 걱정되는걸. 요즘은 괜찮지?”
「그래, 괜찮다고. 누나는? 뭐 해?」
“뭐 하긴, 데이트 있다고 나갔지.”
「전에 말한 그 사람이야?」
대답하는 목소리가 어쩐지 떨떠름했다. 이 귀여운 동생은 저뿐만 아니라 누나도 참 좋아했다. 막냇동생이 누나의 남자친구에게 드러내는 불편한 감정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새어 나왔다.
“응. 이번엔 누나도 엄청나게 좋아하는 것 같더라.”
「누나가 아까운데…」
유타에게 백 퍼센트 공감하는 바였지만 그걸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슈스케와 유타는 누나인 후지 유미코가 세상 누구나 인정하는 멋진 남자를 데려와도 누나가 아깝다고 할 사람들이었다.
“그래도 뭐, 좋은 사람이잖아. 누나한테도 잘해주고 착하고.”
「형은 너무 착한 사람 싫다며?」
“너무 남들한테 무른 사람이 싫다는 거지. 성품이 착한 게 싫다는 건 아니야.”
「하긴, 형이 진짜 싫어하는 건 미즈키 상 정도니까.」
“응? 안 그런데?”
「거짓말 마. 그걸 어떻게 모르냐? 그래도 적당히 해. 어쨌든 미즈키 상도 내 생각해서 그런 거라고. 내가 진짜로 다친 것도 아니고 사과도 받았잖아.」
유타는 아무튼 너무 착해서 탈이었다. 화를 낼 법도 했는데 유타는 통 크게 미즈키를 용서했다. 아니, 애초에 큰 문제로 여기지 않는 것 같아 걱정이었다. 그래서 슈스케는 통화할 때마다 유타에게 몸은 괜찮냐고 물었다. 유타가 스스로 신경을 안 쓰는 것 같으니 이렇게라도 꾸준히 상기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유타의 선배인 미즈키 하지메가 유타에게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는 사실은 슈스케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게 미즈키를 쉽사리 용서할 수 있는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소중한 동생이 스스로 선택해서 간 학교에서 친해진 선배였고, 믿고 따랐다. 그런데 그렇게 몸에 부담이 가는 기술을 가르쳐놓고 위험하단 사실조차 가르쳐 주지 않다니, 이건 용납하려야 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유타가 미즈키를 유독 더 잘 따르기에 발생한 질투도 한몫했다는 사실은 슈스케 본인만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내 동생을 힘들게 한 것에 대한 원한은 좀 깊거든.”
「나 참. 됐고, 나 이제 가봐야 해. 누나한테 안부 전해줘.」
“응, 또 전화할게.”
「적당히 해. 아, 미즈키 상도 누나한테 안부 전해달래. 진짜 끊는다.」
뭐라고 대답도 하기 전에 전화가 뚝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슈스케는 통화 종료 화면이 대기 화면으로 돌아올 때까지 멍하니 핸드폰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지막에 유타가 뭐랬지? 미즈키 상도 누나한테 안부를 전해달랬다고?
슈스케의 미간에 작은 주름이 생겼다. 즐겁게 시작했던 통화가 이런 말로 끝날 줄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도대체 미즈키의 입에서 자기 누나의 이름이 나올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슈스케는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확실히 유미코도 성루돌프에 간 적이 있을 것이다. 가끔 저를 학교까지 태워다 주곤 했으니, 아마 유타가 주말에 집에 왔다가 학교로 돌아갈 적에 태우고 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 미즈키가 누나를 만났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부를 전할 만큼의 사이냐고 물어보면…
“성루돌프에 한번 갔다 와야겠는걸.”
가끔 눈치가 빠른 게 싫어질 때가 있는데, 바로 지금이 그랬다. 이런 건 굳이 깨닫지 않아도 됐을 텐데, 혼자 중얼거리며 슈스케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
“웬일로 같이 가재?”
“응, 그냥. 같이 가면 유타가 더 좋아할 거 아냐?”
“정말 그 이유야? 네가 그렇게 웃으면 뭔가 다른 속셈이 있을 때가 많은데.”
누가 후지 가의 장녀가 아니랄까 봐, 유미코도 눈치가 참 빨랐다. 굳이 숨길 것도 없었지만, 슈스케는 웃으며 대답을 넘겼다. 확정되지 않은 사실을(물론 본인은 90%쯤 확신했지만) 입에 담기는 어쩐지 꺼려졌다. 슈스케의 예상대로, 유미코는 그저 쿡 웃고는 차 키를 들었다. 한 달 만에 유타가 집에 오는 토요일, 두 사람은 성루돌프에 유타를 데리러 나서는 참이었다.
“누나, 저번에도 누나가 유타 데리러 갔었어?”
“그랬지. 그때도 거의 두 달 만이었잖아. 조금이라도 일찍 보고 싶어서 갔지.”
“가끔 보면 누나는 남친보다 유타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
“이 누나는 유타만큼 슈스케 너도 좋아하니까 서운해하지 마.”
“음, 나야 서운할 일이 없지만 남친은 서운하지 않을까?”
“얘도 참~ 별걸 다 걱정해.”
유미코의 사랑 전선에 이상은 없어 보였다. 자주 못 보는 막냇동생에 대한 과한 애정이 오히려 이상이라면 이상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 애정이 자신에게도 못지않게 쏟아진다는 사실을 알기에, 슈스케는 유미코의 남자친구에게 잠깐(이누이의 워터폴보다 더 짧은 시간 동안) 미안함을 느꼈다.
“근데 얘, 요즘 애들은 성장 속도가 우리 때랑 다른가 봐. 너희 학교 애들도 그러더니 유타네 애들도 보기보다 키가 크더라?”
“그런가? 잘 모르겠는데.”
“내가 중학생 땐 남자애들도 다 나랑 키가 비슷했단 말이야.”
“음, 그건 누나가 그때부터 키가 컸으니까 그런 거 아닐까?”
슈스케는 이누이와 카와무라를 떠올렸다. 두 사람은 사실 처음 테니스부에서 만났을 때부터 키가 컸다. 테즈카는 2학년이 되면서 키가 갑자기 훅 컸다. 1학년 때는 키가 비슷했던 키쿠마루는 2학년 겨울 방학 때 갑자기 몇 센티미터가 자라면서 저를 앞질렀다. 그러고 보니 유타가 자기보다 키가 커진 것도 그때였다. 오랜만에 본 동생이 약간이지만 자기보다 키가 커진 걸 알게 된 순간, 참으로 복잡한 기분이었다.
누나도 그런 생각을 하는 걸까?
유미코는 유미코 또래의 여자 친구들보단 키가 큰 편이었고, 지금 슈스케보다 조금 작은 정도였다. 중학생이 된 뒤로 키가 비슷해진 자신을 보며 유미코가 눈물을 글썽였던 것이 문득 떠올랐다. ‘언제 이렇게 컸어’하는 소리가 엄마의 말이었는지, 유미코의 말이었는지 좀 헷갈리기도 했다.
“너랑 유타도 고등학생 되면 더 크겠지? 난 키 큰 사람이 좋더라.”
“어쩐지 압박처럼 들리는걸.”
“후후, 그러니까 밥 잘 먹고 다녀.”
“난 잘 먹고 있는걸. 기숙사에 있는 유타가 걱정이지.”
“그 유타가 너보다 크거든?”
“앗, 아픈 데를 찌르네.”
성루돌프까지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낯설면서도 한편으로는 익숙한 교문이 보였다. 차는 교문을 지나는 대신 그대로 학교 담장을 따라 돌았다. 성루돌프의 기숙사는 학교 후문과 더 가까운 곳에 있었다. 부드럽게 후문을 미끄러져 통과한 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기숙사 건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유타가 서 있었다.
“유타! 잘 지냈어?”
유미코가 창문을 열고 소리쳤다. 주차도 제대로 하기 전이라 슈스케는 얌전히 앞좌석에 앉아 있었다. 유타가 잽싸게 달려오는 게 보였다.
“누나, 목소리 좀 낮춰.”
“나도 왔어.”
“형은 또 왜 왔어?”
퉁명스러운 대답이 나왔지만, 피식 배어 나오는 미소는 지울 수 없는 모양이었다. 차를 제대로 주차하자마자 번개처럼 튀어 나간 유미코가 유타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복에 겨운 신음을 들으며 슈스케도 차에서 내렸다. 언제 봐도 누나의 인사는 격렬했다.
“보고 싶었어~ 집에 좀 자주 오면 안 되는 거야?”
“나도 연습이 있단 말이야.”
“어휴, 어쩌다 동생을 둘 다 테니스에 뺏겨 버려서는.”
볼멘소리로 투정을 부리지만, 유미코가 진심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았다. 시합 때마다 부모님보다 더 열성으로 응원하고, 몰래 결과도 점쳐 보는 사람이 바로 유미코였다.
소란스러운 인사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이거 반갑습니다.”
슈스케의 예상대로, 마치 짜인 각본처럼 미즈키가 나타났다. 타이밍을 정확히 재서 등장한 것 같았다. 다만, 그 복장은 슈스케도 예상 밖이었다. 주말이라 유타가 사복을 입고 있는 것처럼, 미즈키도 사복을 입고 있었다. 운동복 아니면 교복 차림밖에 보지 못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슈스케는 자신의 상상력이 부족한 탓이라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았다. 아무리 작가처럼 뛰어난 상상력이 있단 한들 그런 옷을 입으리란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후지 상.”
“어머, 안녕. 미즈키라고 했던가?”
“기억해주시니 영광입니다.”
정중하게 한 손을 가슴에 얹어 허리를 꾸벅 숙이는 것이 여간 공들인 자세가 아니었다. 지금 당장 한마디를 하려다가 슈스케는 꾹 눌러 참았다. 슈스케는 예의를 지킬 줄 아는 남자가 되어야 한다는 유미코의 가르침 하에 자란 사람이었다.
“미즈키 상, 여기 후지만 세 명인데요.”
“이거 실례했군요. 오랜만입니다, 후지 군.”
“후후, 응, 오랜만이야. 그나저나 그 셔츠는… 정말 화려하네.”
다만, 대화의 초점이 자기에게 맞춰진 이상은 참을 이유가 없었다. 꽃무늬가 그려진 연한 보랏빛 셔츠에서 눈을 떼려야 뗄 수가 없었다. 유미코가 오는 것을 알고 차려입은 옷이 저것이라면,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저와 잘 어울리는 색상과 무늬죠.”
“응, 뭐…… 그렇게 생각한다면 굳이 정정하진 않을게.”
“형, 괜히 시비 걸지 마.”
“내가 뭘. 미즈키가 그렇대서 그렇구나 해준 것뿐인걸.”
가늘어진 미즈키의 눈이 제게로 향했지만, 슈스케는 가볍게 무시했다. 유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미즈키 역시 더 말을 보태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시선을 돌려 유미코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후지 상, 모처럼 오셨는데 홍차라도 한잔 대접하고 싶은데요.”
“후후, 고마워. 근데 금방 가봐야 하거든. 다음에 시간 여유로울 때 부탁할게.”
“저야말로 후지 상의 사정은 미처 배려 못 하고 실례를 범했군요.”
“미즈키 상, 왜 그래요? 닭살 돋게.”
같은 남자인 테니스부 부원들을 대하는 태도와 달라서일까, 아니면 자기 누나를 극진히 대접하는 모습이 낯설어서일까, 유타가 어색해하는 게 느껴졌다. 정작 그런 제안을 받은 당사자는 후후 웃으며 귀엽다는 듯 유타와 미즈키가 대화하는 걸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다.
소란 때문인지, 아니면 차를 몰고 나타난 멋진 여성이 유타의 누나라는 데서 생긴 호기심 때문인지, 하나둘씩 사람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지난 시합 때 본 얼굴도 있었지만 낯선 얼굴도 있는 걸 봐서는 유타의 같은 반 학생들도 끼어 있는 듯했다. 아이들이 늘어난 탓에 자연스럽게 미즈키와 유미코의 대화도 더 이어지지 못했다. 한창 이성에 관심이 많을 중학생들은 유타의 곁에 몰려들어 미즈키를 밀어냈다. 슈스케는 한숨을 푹 내쉬며 유타의 손목을 잡았다.
“가자.”
“아, 응. 다들 미안, 나 이만 가야 해서. 엄마가 기다리셔.”
“그래, 엄마가 너 온다고 카레도 잔뜩 해놨어. 미안, 얘들아~”
유미코가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는 유타의 빈손을 잡아끌었다. 유타는 누나와 형에게 팔 하나씩을 붙잡혀 사실상 연행되다시피 차에 올라탔다. 부러움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가 차 뒤로 따라붙었다.
“다들 유타랑 친한가 봐.”
“별로 안 친한 애들도 있어. 그냥 누나가 차 끌고 오니까 신기해서 나온 거지.”
“아이참~ 역시 내가 시선을 너무 끄니?”
“누나는 자신감이 하늘을 찌른다니까.”
“슈스케~? 너 그렇게 누나한테 박한 평가 주기야?”
말은 그렇게 해도 슈스케는 유미코가 다른 사람들보다 빼어난 매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했다. 재색을 겸비한 미녀란 보통 자기 누나에게 붙는 수식어였으며, 똑똑하며 눈치도 빨랐다. 언변이 좋아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도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장점 때문에 슈스케는 지금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워낙 뛰어난 장점인 탓에, 아무나 다 누나한테 멋모르고 달려드는 게 싫었다. 그러니까, 굳이 콕 집어 말하자면 미즈키 하지메가 유미코를 좋아하는 티를 아주 뚝뚝 흘리는 게 싫었다는 얘기였다.
“맞다, 누나. 누나 가게 애들한테 알려줘도 돼?”
“상관없지. 왜?”
“우리 반 여자애들이 누나 얘기 듣고선 가게 가르쳐달라고 난리야.”
“후후, 애정운을 확인하려나? 아니면 학업운?”
그래도 그 안 좋은 기분은 오래 가지 않았다. 유타도 슈스케나 유미코만큼이나 들떴는지 입이 쉴 줄을 몰랐다. 오랜만에 만난 남동생의 기분을 망칠 수는 없기에, 슈스케는 불편한 감정을 툭 털어버렸다.
“유타랑 같은 반이면 애정운이 아닐까? 사실 유타를 좋아하는 애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 형은.”
“어머,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 기회에 내가 확 다리를 놔줄까?”
“왜 둘 다 그렇게 앞서 나가는 거야?”
“앞서 나간다니? 그럼 마음에 두는 애가 있긴 있구나?”
“형으로서 그 얘기는 꼭 좀 들어보고 싶은걸.”
“이 누나도 꼭 좀 들어보고 싶다.”
“아, 좀!”
*
사실은 예정된 순서였을 것이다. 무심코 흘려들었던 자기 잘못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유타가 친구들에게 유미코의 가게를 알려준다는 것은, 곧 미즈키도 그 사실을 알게 된다는 사실을 뜻했다. 그가 직접 유타에게 묻지 않더라도 그걸 알게 될 방법은 많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지략가에 속하는 타입이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누나의 점술 가게에 미즈키가 나타났다는 사실이 썩 놀라운 것만은 아니라는 얘기였다. 다만, 그 횟수가 예상보다 더 많았다는 점에는 솔직히 놀랐다. 아무래도 미즈키는 슈스케의 생각과는 달리 유미코에게 단단히 반한 것 같았다. 그게 아니고서야 혼자서 점술 가게에 일주일에 세 번씩이나 얼굴을 들이밀 리가 없었다.
“미즈키가 그렇게 점술에 관심이 많은지 몰랐네.”
“관심 많던데? 애가 기특하게 내 책도 사서 읽었다고 그러더라.”
점술이 아니라 누나에게 관심이 많은 거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어쩐지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미묘하게 표정이 무너지는 동생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미코는 싱글벙글이었다. 이미 남자친구도 있는 유미코가 미즈키에게 그런 종류의(차마 입에도 올릴 수 없는) 감정을 가질 리는 없지만, 유타의 선배라서 호감을 갖고 대하는 게 분명했다. 유미코는 동생들에게 약한 만큼, 동생들의 친구에게도 약했다.
“우리 가겐 여자애들이 많이 와서 혼자 오기 좀 그랬을 텐데, 대단하지?”
“어, 응. 그러네.”
그 외에 뭐라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슈스케의 생각으로도 너무 티 나게 딱딱한 대답을 한 것 같았지만, 유미코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해맑기만 한 누나의 얼굴이 저를 놀리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즐거운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유미코라면 둘 다 가능하다며 혼자 납득하고, 슈스케는 가방을 들었다.
“학교 갔다올게.”
“잘 다녀와~”
응, 짧게 대답해놓고 슈스케는 현관을 나섰다. 머릿속이 온통 유미코와 미즈키로 가득했다. 그 두 사람을 나란히 놓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지만, 그 생각을 쉽게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싶어 황당하기도 했다. 그렇게 쳐다보기도 싫던 미즈키 하지메를 계속해서 떠올리는 순간이 올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아무튼, 후지 슈스케는 기분 좋아야 할 아침 등굣길에 역대 최고로 심란한 상태였다. 교문 앞에서 마주친 키쿠마루 에이지의 인사를 의도치 않게 무시할 정도로 말이다.
“후지!”
“어, 어? 아, 에이지.”
“뭐냥! 사람이 부르는데 대답도 안 하고!”
“미안, 생각을 좀 하느라… 전혀 안 들렸어. 진짜 미안해.”
“그럼 이따 음료수 쏘기!”
“그래, 그래.”
감정에 솔직한 클래스메이트는 토라지는 것도, 풀리는 것도 빠른 편이었다. 지갑에 동전이 몇 개나 있던가 헤아리던 슈스케는 불쑥 제 앞을 가로막는 키쿠마루 때문에 그 자리에 멈춰섰다. 키쿠마루가 미간을 찌푸린 채 슈스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왜?”
“무슨 안 좋은 일 있어?”
귀신같이 눈치가 빠른 친구였다. 하지만 굳이 미즈키의 이름을 언급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슈스케는 약간 다른 방향으로 선회했다.
“에이지, 점술에 관심 있어?”
“점술? 그냥 별자리 운세 보는 정도?”
“음, 남자 중학생은 보통 다 그 정도일까?”
다행히 부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마 오오이시는 이미 코트에 있을 테고, 테즈카는 교무실에 먼저 들렀을 테니 뒤따라서 누가 들어오지 않는 한 이야기를 중단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로커를 벌컥 연 키쿠마루가 교복 단추에 집중하며 말을 이었다.
“뭐~ 사람마다 다르지 않을까? 점술은 갑자기 왜?”
“우리 누나가 점술가잖아. 누나 가게에 남자 중학생이 왔대.”
“여친이랑 간 거 아냐?”
“혼자 왔다던데.”
“대박.”
저지를 갈아입느라 잠시 대화가 끊어졌다. 입고 있던 교복은 잘 정리해 로커에 넣어두었다. 테니스 라켓을 손에 쥐니 묘한 감정이 다 날아가는 것 같았다. 슈스케는 자신이 의외로 테니스를 많이 좋아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근데 일주일에 세 번이나 왔대.”
“뭐? 그건 절대 딴마음이 있는 거다냥.”
“역시?”
“뭐~ 근데 후지네 누나는 이십 대잖아. 중학생은 애처럼 보일걸?”
“그야 그렇지.”
코트 안에서 오오이시가 손을 흔들었다. 야호, 크게 소리치며 키쿠마루가 제 파트너에게 인사했다. 후지도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이 정도면 딱 이야기를 끊기에 적당한 타이밍 같았다.
“근데 후지, 너 의외로 시스콤이다!”
키득키득 웃으면서 그런 폭탄선언을 한 키쿠마루가 폴짝 뛰어 오오이시에게 향했다. 자리에 우뚝 멈춘 슈스케는 그 뒷모습을 보면서, 방금 들은 말을 곱씹었다.
시스콤?
굳이 따지자면 유미코가 브라콤이지, 저는 그냥 평범한 편인 줄 알았다. 아니, 유타를 생각하는 마음을 떠올리면 딱히 평범하지는 않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그걸 시스콤이나 브라콤이라고 부를 정도인지를 따지자면, 평범한 축에 속할 것이었다. 슈스케로서는 드물게 확신이 없었다. 키쿠마루의 말대로 시스콤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
하루를 ‘시스터 콤플렉스’의 정의란 무엇인가 고민하는 데 쏟아부은 후지 슈스케는 테니스부의 오후 훈련을 마치고 터덜터덜 걸어가는 중이었다. 그 생각에서 벗어났던 순간은 솔직히 테니스를 하고 있었던 시간뿐이었다. 덕분에 그는 자신이 집이 아니라 유미코의 가게를 향해 걷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평소와는 다르게 지나는 사람도, 차량도 많아지고 심지어는 번쩍거리는 조명과 간판도 많아졌는데도 슈스케는 생각에 잠겨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리고 키쿠마루와 종종 들르던 오락실을 눈앞에 두고서야 슈스케는 정신이 들었다. 유미코의 가게까지 불과 몇 블록을 앞둔 지점이었다.
이대로 누나 가게에 가면 분명 누나의 오늘 데이트 약속은 무산되겠지.
여태까지의 경험으로, 슈스케는 쉽게 미래를 그릴 수 있었다. 아무리 그가 시스콤이라고 해도(온종일 고민한 결과, 그는 깔끔하게 자신이 시스콤이라 인정하기로 했다) 남자친구와의 데이트를 또다시 방해할 생각은 없었다. 이미 의도치 않게 그런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슈스케보다 훨씬 중증의 브라콤인 유미코는 슈스케나 유타가 나타나면 언제든 맛있는 걸 먹이려 들었고, 남자친구보다 두 사람이 우선시된 적이 많았다.
한숨을 푹 내쉬고 돌아서려던 순간이었다.
“미즈키?”
당황한 나머지, 소리가 먼저 튀어 나갔다. 이걸 보려고 여기까지 멋대로 발이 움직인 모양이었다. 미즈키가 한 블록 앞에 서 있었다. 아니, 걷고 있었다. 방향은 어떻게 보나 유미코네 가게가 있는 쪽이었다. 슈스케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리고 미즈키가 건물에 들어가기 직전, 간발의 차로 슈스케가 그를 지나쳤다.
“후지 군?”
“응? 미즈키구나. 웬일이야?”
당연히 미즈키가 먼저 말을 걸 거라 생각했다. 웬만한 철면피가 아니고서야 여기서 자길 보고서도 가게에 들어갈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미즈키의 표정이 아주 미묘했다. 당황스러움을 숨기려고 애써 미소를 짓긴 했지만,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왜……”
“나야 우리 누나를 보러 왔지. 누나가 이 건물에서 점술 가게를 하거든.”
“아, 그, 그러셨군요.”
아닌 척하네.
미즈키의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아마도 건물의 층별 안내도를 찾는 것이겠지만, 두 사람이 선 복도에는 별 다른 안내 표지가 없었다. 미즈키의 시선이 슈스케의 등 뒤에 있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미즈키 넌 무슨 일로 왔어?”
“저, 저도 다른 볼일이 있어서 지나가는 길이었는데요.”
“그래? 난 또 우리 누나 가게에 온 줄 알았지. 유타가 저번에 친구들한테 가르쳐줬다 그랬거든.”
별안간 미즈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슈스케의 말이 아무래도 정곡을 찌른 모양이었다. 무어라 말을 못 하고 입만 몇 번 뻐끔거리던 미즈키가 고개를 숙였다. 꽉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아무래도 건물을 잘못 들어온 것 같군요. 그럼 이만.”
슈스케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허공에다 인사를 한 미즈키가 홱 돌아섰다. 슈스케는 성큼성큼 건물 입구를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언뜻 보기엔 목덜미까지 붉은 것 같았다. 제게 들켰다는 수치심 때문에 저렇게까지 당황한 걸까 싶다가도, 겨우 그런 마음가짐으로 누나를 보러 왔나 싶기도 했다.
엘리베이터의 알림음이 들리고 나서야 슈스케는 발을 떼었다. 이대로 계속 서 있다가는 유미코를 데리러 온 남자친구와 마주칠 수도 있었다. 건물의 뒷문으로 나간 슈스케는 망설임 없이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온종일 답도 없는 고민을 한 탓인지 피곤했다. 오늘은 들어가자마자 씻고 바로 잠드리라 다짐하는 슈스케였다.
*
그날부터 후지 슈스케의 일정에는 ‘누나 가게에 들르기’가 추가되었다. 딱히 유미코를 보러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 근처의 다른 가게를 들르기 위해 가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하게, 슈스케는 미즈키가 누나를 보러 오는 것이 싫었다. 유미코가 (당연한 얘기지만) 아무 감정이 없다고 해도, 그냥 미즈키가 유미코에게 그런 감정을 갖는 게 싫었다. 물론, 남자친구가 아니고서야 다른 누가 유미코를 쫓아다니면서 좋아한다면 다 싫을 것 같긴 했지만, 아무튼 그랬다.
그래서 슈스케는 오후 연습을 마치면 집으로 가는 게 아니라 번화가로 향했다. 학교에서는 조금 멀긴 했지만 걸을 만했다. 그냥 시간을 죽이기도 왠지 아쉬운 느낌이 들어 이런저런 골목을 찾아 러닝을 하기도 했다. 점술 가게 근처에 있는 테니스용품 가게도 몇 번 들렀다. 다육식물을 파는 꽃집을 가끔 구경했고, 서점에 선인장과 관련된 새 책이 들어온 것을 확인해 눈도장을 찍어두기도 했다. 하지만 늘 목적지는 같았다. 유미코의 점술 가게가 있는 건물이었다.
사실 그 이후로 3일 뒤에 미즈키를 다시 만났다. 똑같은 복도에서 똑같이 마주쳤다. 미즈키는 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서는 제대로 말조차 하지 않고 가버렸다. 그로부터 2주가 지났지만 만난 적은 없었다. 어쩌면 슈스케가 온 시간보다 빨리 미즈키가 도착했을 수도 있고, 슈스케가 떠난 뒤에 왔을 수도 있었다. 변수가 너무나도 많았기에, 이러는 게 하등 소용이 없다는 사실은 슈스케도 잘 알았다. 그래도 중학교 3학년에게는, 그런 쓸모없는 짓을 어떻게 하지 못하는 ‘감정’이란 이유가 있었다.
“요즘 맨날 어딜 그렇게 가냥?”
2주 가까이 이 여정을 반복했으니, 테니스부 부원들이 눈치 못 채는 게 더 이상했다. 가끔 하굣길에 같이 오락실에 가거나 군것질을 하러 가던 키쿠마루라면 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는 슈스케의 표정만 보고도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알아차릴 만큼 기민한 사람이기도 했다.
“어, 그게 누나네 가게에.”
“왜, 누나한테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아~ 알았다. 저번에 말한 그거?”
역시 슈스케의 예상 그대로였다.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건만 키쿠마루는 요점을 빨리 파악했다. 누나의 가게에 꼬박꼬박 들르고 있는 그 사람이 과거 대전 상대인 성루돌프의 미즈키 하지메라는 사실을 알려줘야 할지 고민이 되는 순간이었다.
“간다고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는 건 아는데, 나도 모르게 가게 되네.”
“내가 그랬지, 후지는 시스콤이라고~ 근데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네.”
“에이지도 그래?”
“음~ 후지만큼은 아니지만! 누가 계속 누나 쫓아다닌다고 하면 걱정은 될 테니까~ 근데 그 사람 중학생이라고 안 그랬냥? 우리 큰누나도 중학생들은 다 애 같아 보인다고 그러던데, 후지네 누나도 비슷하지 않을까? 너무 과하다 싶으면 누나가 먼저 잘 정리하겠지!”
논리적으로는 키쿠마루가 하는 말이 맞다는 걸 알았다. 한두 살 차이 나는 누나, 아니 여동생도 아니고 이미 20대에 들어선 누나가 중학생보다는 훨씬 더 세상을 잘 알 것이다. 중학생의 어설픈 구애 또한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그래도 슈스케는 이 상황이 싫었다. 슈스케는 다시 한번 자신에게 말했다.
그래, 나는 미즈키에게 화가 났었다고 여태 심술을 부리고 있는 거야.
“응, 아는데 역시 잘 안 되네. 진짜 이젠 좀 그만해야겠어.”
“좋아, 그럼 오늘은 나랑 타코야끼를……”
“미안, 오늘은 진짜로 누나랑 약속이 있어서 가야 해.”
“뭐야아~ 후지, 내일은 꼭 나랑 놀기다!”
거짓말은 아니었으니 양심의 가책을 느끼진 않았다. 유미코한테 갑자기 ‘저녁에 맛있는 거 먹을까? 가게로 올래?’하고 문자가 왔더랬다. 슈스케는 유미코가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예상이 갔다. 자신이 그렇게 꼬박꼬박 가게 근처에 왔다 간 것을 알고 있는 것이었다.
키쿠마루와 헤어지고 나서는 느긋한 걸음걸이로 유미코의 가게를 향해 갔다. 저녁을 먹을 시간까지는 그래도 좀 여유가 있었으니, 중간에 서점에 들를 생각이었다. 눈도장을 찍어둔 책을 사고, 다 떨어져 가는 라켓용 그립 테이프를 사서 가면 맞을 것 같았다. 막상 돌이켜 생각해 보면 왜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을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벌써 2주나 만나지 못했으니 아마 오늘도 미즈키를 만날 일은 없을 터였다.
다만, 늘 사건은 예상치 않았을 때 생기는 법이었다.
“안녕, 미즈키.”
“후지 군.”
그 이상의 말은 없었다. 두 사람 다 어색하게 길 위에 서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바쁘게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자동차 소리와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섞여서 소란스러웠지만, 두 사람 사이는 적막과도 같았다.
“저를 방해하러 온 겁니까?”
“음… 오늘은 진짜 약속이 있는 거지만, 부정하진 않을게.”
“후지 군, 당신은 도대체……”
“미안.”
그 뜬금없는 사과에 미즈키는 얼이 빠진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딱히 생각하고 했던 사과는 아닌지라, 슈스케도 좀 당황스럽기는 했다. 그저, 심술을 부렸던 것은 사실이었고, 어른스럽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막상 사과를 하니 오히려 속이 시원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유타 일 때문에 네가 싫었어. 네가 우리 누나를 좋아하는 것도, 만나러 가는 것도 그냥 싫었어. 그래서 그랬어.”
“뭐죠, 갑자기?”
평소와 똑같이, 후지는 부드럽게 웃었다. 미즈키를 앞에 두고 이렇게 웃을 수 있다니, 아마 유타가 보면 턱이 빠질 것이었다. 미즈키도 비슷한 생각인지, 안 그래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 금세 일그러졌다.
“이러는 게 바보 같아져서.
“네?”
“내가 이런다고 네가 우리 누나를 안 좋아하게 될 것도 아니고, 애초에 우리 누나도 별로 관심 없을 테잖아. 남친도 있으니까.”
“뭐라고요?”
“어? 몰랐어?”
이젠 미즈키의 얼굴이 홍당무 같았다. 아니, 토마토 같았다. 비틀거리던 그가 가로수에 탁 손을 짚었다. 당연히 미즈키가 알 거라는 전제하에 말을 꺼낸 슈스케는 자신이 폭탄을 투하했음을 깨달았다. 벌써 2주나 흘렀으니, 미즈키가 뻔질나게 드나들었다면 유미코의 남자친구와 한 번쯤은 얼굴을 마주했을 법도 했는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물론 미즈키로선 아무리 유타가 그런 방면에 둔하더라도 유타한테 직접 유미코에게 연인이 있는지를 물어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미안, 아는 줄 알았어. 남친이 누나 끝날 때 맞춰서 데리러 가는 경우가 많다고 그래서 이미 만났을 줄 알았는데.”
“아뇨, 한 번도…….”
이제는 낯빛이 거의 창백해진 미즈키를 보며 슈스케는 동시에 다양한 감정을 느꼈다. 알 수 없는 통쾌함과 영문모를 미안함이 뒤섞여서 영 마음이 복잡했다. 경계선을 항상 명확하게 긋는 편이던 슈스케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내키지는 않지만 그를 부축하는 게 나을까 잠시 고민했는데, 그런 고민은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더 시급한 문제가 슈스케의 시야에 들어왔다.
“누나.”
“안 오고 거기서 뭐 해? 어머, 미즈키?”
아마 미즈키가 저보다 훨씬, 아마 수십 배쯤은 놀란 게 분명했다. 가뜩이나 창백했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리더니, 누가 불이라도 붙인 것처럼 순식간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목덜미까지 새빨개진 미즈키가 가로수에서 손을 떼고 똑바로 자리에 섰다. 표정을 가다듬으려 애쓰는 게 보였지만 쉽지 않아 보였다.
“어, 가다가 미즈키를 여기서 마주쳤거든. 그래서 잠깐 대화 좀 했어.”
“잘됐다. 얘, 미즈키도 같이 가서 밥 먹자. 둘 다 괜찮지? 내가 이 동네 맛집은 다 꿰고 있거든~”
눈에 보일 정도로 크게 침을 삼키며(그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고개를 들썩인 미즈키가 간신히 유미코를 향해 돌아섰다. 슈스케에게는 뒷모습만 보였지만 그의 목덜미가 여전히 붉은 걸 봐서는 표정이 어떨지 눈에 선했다.
“물론이죠, 유미코 상.”
“그럼 가자! 거기 조금만 늦어도 줄 서거든.”
유미코는 자연스럽게 슈스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반대쪽 손으로 미즈키의 손도 덥석 붙잡았다.
앙숙이라고 불릴 수도 있는 두 사람은, 그렇게 유미코의 재잘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묵묵히 길을 걸었다. 유타가 봤더라면 식은땀을 한 바가지는 흘릴 수 있는 장면일 것이었다. 세 사람은 그렇게 유미코의 가게를 지나쳐 안쪽 골목으로 들어갔다. 몇 번 더 빙글빙글 코너를 돌아 도착한 가게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오늘은 내가 사는 거야. 미즈키도 그동안 우리 가게 자주 와줬으니까 서비스라고 생각해. 우리 유타 잘 봐달라는 뇌물로 생각해도 되고?”
“당치도 않으신 말씀입니다.”
손을 홱홱 내젓는 미즈키만큼이나 슈스케도 이 상황이 난처했다. 유미코라면 아마 자기와 미즈키 사이에 흐르는 미묘하고 불편한 분위기까지 다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런 자리를 만들었다는 것은 인제 그만 털어버리라는 메시지일지도 몰랐다. 이 메시지를 받아들일지는 전적으로 슈스케와 미즈키에게 달려 있었다. 유미코의 미소를 보니, 화해하지 않는 한 가게에서 나갈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적당히 내가 시켜도 돼? 못 먹는 거 있니?”
“아뇨, 다 잘 먹습니다.”
“난 누나 추천 메뉴면 다 좋아.”
그런 말을 뱉어놓고 슈스케는 다시 키쿠마루의 말을 떠올렸다. 시스터 콤플렉스랬던가. 아니, 이건 그런 종류는 아닐 것 같았다. 그냥 유미코의 입맛이 저와 잘 맞을 뿐이었다. 유미코가 가게의 추천 메뉴며, 자신이 좋아하는 메뉴에 대해 뭐라고 계속 말을 늘어놓았지만, 자꾸 딴생각이 들었다. 보통 유미코랑 있을 땐 생각할 틈도 없이 온갖 얘기를 하곤 했는데 미즈키가 함께 있단 사실 하나만으로 어색하고 정신이 산만했다. 정확히 짚자면, 불편했다. 미즈키 없이 유미코와 앉아서 평소처럼 저녁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물론, 제 맞은편에 앉은 미즈키 또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는 점에는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너희 나 오기 전부터 대화하고 있었던 거 아냐? 왜 이렇게 어색해?”
“애초에 대화를 길게 할 만큼 친하지 않은걸.”
“네, 유타 군의 형으로만 만났으니까요.”
“그래도 둘 다 테니스 하잖아. 공통점도 있지 않아?”
그것 외에 공통점이 없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앗, 아니다. 우리 셋한테도 공통점이 있잖아. 우린 모두 유타를 아낀다는 거.”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건 특기나 다름없었는데, 어쩐지 유미코 앞에서는 그것도 쉽지 않았다. 슈스케는 괜히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러고 보니 누나한테는 유타의 팔에 관해서 제대로 얘기하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사실 너희 사이가 안 좋은 거 알아. 그게 유타에 관한 문제라는 것도 알지.”
“어떻게 알았어?”
“유타가 말하던데? 슈스케, 넌 가끔 우리 유타가 이 누나의 막냇동생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더라?”
유미코의 지적은 타당했다. 유타가 고민이 생기면 저보다 누나에게 더 잘 털어놓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슈스케로서는 서운한 일이었지만, 유미코만큼 좋은 상담 상대도 없었다. 저 역시 고민은 보통 유미코에게 이야기하곤 했다.
“유미코 상, 죄송합니다.”
“나한테 사과 안 해도 돼. 유타한테 사과했다며? 두 사람의 문제잖아.”
“하지만 유타 군을……”
“그래, 걱정하지. 슈스케도 그래서 저렇게 화가 난 거고. 하지만 이 정도는, 그래, 중학생이라서 용납할 수 있는 수준이랄까? 아마 슈스케랑 유타가 어릴 적엔 훨씬 더 위험하게 놀았을걸? 계단에서 뛰어내린 것부터 시작해서 일일이 손에 꼽을 수도 없다니까.”
하긴, 초등학교에도 들어가기 전인 꼬꼬마 시절에는 유타와 곧잘 놀이터에서 뛰어놀고는 했다. 그리고 유미코의 말대로 결코 안전하게만 놀지는 않았다. 유타는 문턱, 계단, 낮은 담장 등 올라설 수만 있으면 어디든지 올라가서 뛰어내리고 싶어 했다. 슈스케가 그렇게 놀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유타가 슈스케보다 더 활동적이고 기운이 넘치는 꼬마라서 그렇기도 했다. 그리고 슈스케는 그걸 말릴 만큼 점잖은 형은 아니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해. 어리면 어릴수록 더 그렇겠지. 원래 그때는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 말고는 눈에 들어오는 게 없잖아. 현실적으로 균형을 맞추는 걸 배워나가는 과정이지. 하마터면 유타가 크게 다칠 뻔했지만, 안 다치고 일찍 깨닫고 조심하기로 했으니 다행이지 뭐. 너희에겐 실수를 만회할 기회가 아직 많아. 그러니까 이 관계도 툴툴 털어버려. 당사자인 유타가 괜찮다는데 둘이 질질 끌 필요 없잖아?”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슈스케를 마주보았다. 저절로 한숨이 푹 나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맞는 말만 하는 누나에게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그동안 미안했어.”
“저야말로 죄송했습니다.”
“유타에게 사과했다는 얘기는 예전에 들었는데 내가 영 뒤끝이 심한 사람이라.”
“알고 있으니 됐습니다. 저야말로 뒤끝 있는 성격이라 더 편하게 대하질 못했군요.”
“너희 화해하는 거 맞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셋 다 웃고만 있는데 찬 바람이 여간 쌩쌩 부는 게 아니었다. 때마침 등장한 직원 덕에 스산한 공기는 금세 가셨다.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따뜻한 음식은 누구에게나 특효약처럼 작용하는 법이었다.
“많이 먹어, 얘들아.”
그렇게 시작된 식사는 대강 한 시간 정도 만에 끝났다. 시계를 정확히 보지는 않았지만, 감각으로는 그랬다. 유미코가 추천한 가게인 만큼 맛은 아주 훌륭했다. 한창때의 남학생 둘이 붙어 있으니 음식 줄어드는 속도가 어마어마했지만, 유미코는 잘 먹어서 좋다면서 호쾌하게 메뉴를 더 주문했다.
식사 자리는 평화로웠다. 한번 사과를 하고 나니 마음을 푸는 건 쉬웠다. 유미코가 옆에 있다는 사실이 크게 작용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실제로 마음 어딘가에서 응어리졌던 것이 풀어진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앞으로 미즈키를 만날 때마다 살갑게 구는 일은 없을 테지만, 조금은 자제하자는 생각을 하게 된 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었다.
“너무 늦었지? 미즈키, 학교까지 태워다 줄까?”
“아뇨, 괜찮습니다. 식사도 대접해 주셨는데 그렇게까지 폐를 끼칠 수는 없죠.”
“얘도 참, 원래 이런 건 어른이 사는 거야.”
그래도 미즈키는 극구 유미코의 제안을 거절했다. 유미코가 의도치 않게 내뱉었을 ‘어른’이라는 단어가 그의 가슴을 찔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유미코는 직통버스가 있다는 말에야 겨우 물러났다.
“알았어,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 우리 유타 잘 부탁해~”
“물론입니다. 유미코 상도, 후지 군도 잘 들어가세요.”
“응, 잘 가, 미즈키.”
버스 정류장에 서서 미즈키는 몇 번이나 유미코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유미코는 걸어가면서도 연신 그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어쩐지 한숨이 나왔다. 지난 2주 동안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을 했던가. 가만히 놔두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을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든 것 같았다. 그래도 이걸 계기로 미즈키와도 해묵은 감정을 풀었으니 좋은 일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슈스케, 무슨 생각해?”
“그냥 좀 바보 같아서.”
“뭐가? 미즈키가 우리 가게 오는 게 싫어서 매일같이 근처를 서성인 거?”
예상한 대로였지만 직접 말로 들으니 더 바보같이 느껴졌다. 슈스케는 풋 웃고 말았다. 아무래도 제가 어른이 되더라도 누나에겐 못 당할 것 같았다.
“누나한텐 숨기려야 숨길 수가 없네.”
“그럼, 당연하지~ 그래도 우리 슈스케가 누나를 엄~청 좋아한다는 걸 알게 돼서 기쁜데?”
“누나는 브라콤이 심하다니까.”
“어머, 네가 시스콤이 심한 거 아니고?”
유미코가 차를 빼러 간 사이,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니 이미 어둑어둑했다. 참으로 긴 하루였다. 내일부터는 평소처럼 하굣길에 키쿠마루와 오락실에도 들르고, 유타에게 전화도 하면서 소소한 오후를 보내기로 다짐하는 슈스케였다.
어쩐지 따뜻하다. 그런 감각에 익숙하지 않은 휴베르트 폰 베스트라는 묘하게 안정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 따스함이 어디서부터 오는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무래도 손인 것 같았다. 사실 그의 손은 찬 편이다. 장갑을 낀 덕에 약간은 보온에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물론, 그런 이유로 착용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느끼는 따뜻함은 제 것이 아닌 듯했다. 누군가 손을 잡은 모양이었다. 그걸 깨달은 순간, 휴베르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떴다. 거의 반사 작용과도 같아서, 몸도 튕겨 올라왔다. 덕분에 제 손을 잡고 있었을 상대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휴, 휴베르트 씨!” “베르나데타 님, 왜 여기… 그보다 전투는 어떻게 됐습니까?”
질문의 방향이 잘못됐다는 것을 중간에 깨달은 휴베르트가 말을 고쳤다. 어떻게 생각해도 그는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난 상황이었고, 누워 있던 곳은 치료 막사 안이었다. 소란스럽지도 않고, 힐러와 의사들은 차분했다. 현재 그곳에 차분하지 않은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베르나데타 폰 발리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흙먼지를 뒤집어썼는지 얼굴이 거뭇거뭇해, 또르르 흘러내린 눈물이 볼 위로 그대로 길을 그렸다. 코를 훌쩍이며 다시 다가온 그가 휴베르트의 손을 잡았다.
“손이 차요, 휴베르트 씨.” “베르나데타 님. 전투는 어떻게 됐느냐고 물었을 텐데요.” “이겼어요.”
안도의 한숨이 무심코 새어 나왔다. 아무래도 작전은 성공한 것 같았다. 세세하게 뜯어보면, 휴베르트가 담당하기로 했던 구역의 작전은 실패한 셈이지만, 전투에서 이겼다면 문제 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제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전혀 기쁜 표정이 아니었다. 구슬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휴베르트의 손을 적셨다.
“귀하께선 왜 우시는 겁니까?” “어, 어떻게 안 울어요! 이 상황에!” “이 상황이라 하심은……”
보기 드문 표정이었다. 베르나데타는 보통 휴베르트를 보면 울거나, 무서워하거나, 가끔 웃었다. 하지만 화를 내는 건 처음이었다. 입술을 꾹 깨문 베르나데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덕에 휴베르트는 드물게 당황했다.
“쓰러졌잖아요! 휴베르트 씨가! 피를 얼마나 흘린 줄 아세요? 베르는 휴베르트 씨가 그 자리에서 주, 죽는 줄만 알았다고요!” “죄송합니다.” “베르는 그렇게 냉정하지 못하다고요! 그, 그대로 휴베르트 씨가 죽으면 어떡하나 너무, 너무 무서워서, 당장이라도 가서 끌어안고 싶었는데……”
와앙, 크게 울음이 터졌다. 와중에도 베르나데타가 휴베르트의 손을 놓지 않은 탓에, 손이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어중간한 거리 때문에 어떤 위로의 행동조차 할 수가 없었다. 휴베르트는 조용히 그 울음을 듣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무리한 부탁을 드렸지요.”
휴베르트도 스스로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베르나데타는 친구들의 안위에 상당히(휴베르트의 측면에서 보자면 과할 정도로) 신경을 썼고, 그게 전투에도 이어지는 편이었다. 주변에서 다치는 사람이 발생하면, 그 상대를 걱정하느라 바로 그 자리에 원군으로 들어가는 식이었다. 하지만 전쟁이란 사소한 틈으로도 승패가 갈리는 법이었다. 따라서, 휴베르트는 이번 작전을 시작하기 전에, 베르나데타에게 자신이 혹시 다치거나 쓰러지더라도 절대 자리를 떠나지 말고 부대를 끝까지 지휘할 것을 요구했더랬다. 그의 부대가 휴베르트의 부대 바로 옆에서 작전을 수행할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베르나데타를 자신의 옆 부대로 배치한 것은 휴베르트의 전략적인 선택이기도 했다. 그는 실패한 경험이 거의 없었다. 주군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든 해치우는 휴베르트에겐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니 베르나데타 역시 돌발 상황으로 기존 작전에서 이탈하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늘 예외는 있는 법이다. 기세가 오른 부대원들이 퇴각하는 적을 쫓아 너무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을 때였다. 저 또한 달려드는 적을 향해 마법을 사용하느라 제지가 약간 늦었을 뿐이었는데, 그 피해는 참혹했다. 땅속에 무언가를 장치해 놨는지 선두에 있던 병사가 어느 지점을 밟는 순간, 그 주변의 모두가 허공으로 붕 날아갔다. 방어 마법을 쓰기엔 너무 빠른 속도로 그 여파가 다가왔다. 마지막에 쓴 마법이 거대한 방어막을 펼치는 마법이었는지, 아니면 음울한 보랏빛 오라를 끌어낸 공격 마법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저는 귀하를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 믿음은 틀리지 않았지요. 베르나데타 님은 훌륭하게 자리를 지켜 작전을 수행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까 이 전투에서 이기셨겠지요.” “아니에요.” “네?” “훌륭하게 자리를 지키지 않았다고요.”
베르나데타는 훌쩍거릴 뿐, 더 설명하지 않았다. 휴베르트로선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쓰러지기 직전의 전황을 다시 머릿속에 그렸다. 어떻게 생각해도 기존 작전대로 이행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만약 베르나데타의 부대가 쓰러진 휴베르트를 호위하기 위해 자리를 이탈했다면, 그 자리에 구멍이 생겨서 증원 부대에 밀려 전황이 뒤집어졌을 것이다.
“어떻게 대처하셨습니까?” “제발요, 휴베르트 씨. 지금 그건 중요하지 않잖아요. 휴베르트 씨는 쉬셔야 해요.” “아뇨, 중요합니다. 베르나데타 님도 제가 대답을 듣기 전까진 물러나지 않을 거란 걸 알고 계실 텐데요.”
온몸이 욱신거리는 걸 봤을 때 쉬어야 한다는 그의 말에는 동의했지만, 솔직히 호기심이 더 동했다. 자신의 전술을 뛰어넘을 만큼의 무언가를 해냈다면, 앞으로의 전투를 위해서도 알고 싶었다. 더군다나 그 베르나데타였다. 방에 틀어박히기를 누구보다도 원하고 사랑하는 그가 가끔 보여주는 비범함을 좀 더 들여다보고 싶었다.
“베, 베르가 자리를 안 지켰다고 화가 나신 거군요! 알아요, 휴베르트 씨의 지시에 따르지 않은 거긴 한데, 그치만, 그, 그래도 이겼잖아요! 휴베르트 씨도 여기 무사히 왔고……” “화나지 않았습니다.”
쥐구멍이라도 찾아들려는 듯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다. 휴베르트는 이미 이런 상태의 베르나데타를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휴베르트는 그를 향해 웃거나, 혹은 피하거나 하는 어떤 종류의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베르나데타가 잡은 손을 꽉 맞잡았을 뿐이었다.
“휴베르트 씨 부대에 퇴각을 명령하고 베, 베르네 부대도 전진하지 못하게 했어요. 땅속에 뭔가 장치가 된 것 같아서 그걸 다 없애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일부러 불화살을 매기고 마법사분들께 바람 마법을 써달라고 했어요. 맞바람이 불면 불이 쉽게 옮겨붙지 않을 테고, 그럼 땅속 장치만 딱 없애기 쉬울 것 같아서……”
처음부터 화공을 하지 않았던 것은 적군이 있는 쪽에서 아군을 향해 바람이 불었기 때문이었다. 강풍 수준은 아니었지만 불을 지르면 아군이 피해를 볼 확률이 높았다. 상대 쪽의 화공에 대비하느라 마법사 부대에서 대규모 방어진을 친 것이기도 했다.
“오호라, 괜찮은 방법이군요. 그래서요?” “그 뒤엔 너무 정신없이 흘러가서…… 회복 부대를 투입하고, 화살도 미친 듯이 쐈고요, 또 베르도 한 번에 여러 명을 공격해야 했으니까…… 앗, 저, 절대 실수하지 않았어요!” “변명하실 것 없습니다.” “그, 그치만…… 휴베르트 씨가 걱정돼서 안 갈 수가 없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휴베르트 씨 부대를 합쳐서 인원을 재정비하고 반으로 나눠서 원래 작전대로 각각 진행했어요. 베르는 휴베르트 씨 옆에서 후방 지원을 하고요.”
베르나데타가 하도 작은 목소리로 설명을 한 탓에, 귀를 기울이느라 몸이 다 앞으로 기울었을 정도였다. 훌륭한 판단이었다. 자리를 이탈하지 말라는 부탁은 결국, 지키지 못한 모양이었지만, 부대가 통째로 원호를 위해 원래의 작전 구역을 이탈하는 일은 없었다는 뜻이었다. 심지어 정신을 잃은 자신을 대신해 지휘를 잡았으니, 동시에 두 개 부대를 지휘한 셈이었다.
“베르나데타 님, 왜 제가 화가 났을 거라 생각하셨는지 모르겠군요. 아주 훌륭하게 대처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그치만 베르는 자리를 이탈했는걸요! 구하러 오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닙니다만……”
휘둥그레진 베르나데타의 두 눈에 제가 비쳐 보였다. 이런 경험은 영 낯설었다. 상대방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 둔 적이 없었다. 휴베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빈손을 뻗어 베르나데타의 볼을 쓸었다. 거뭇거뭇한 자국이 손가락에 밀려 사라졌다.
“부대가 통째로 이탈하면 이미 쓰러진 자뿐만이 아니라 베르나데타 님과 그 부대도 함께 위험해집니다. 굳이 양쪽 부대가 모두 전멸할 필요는 없지요.”
베르나데타가 그 손을 끌어다 쥐었다. 이젠 양손이 다 붙잡힌 휴베르트는 얌전히 그의 말을 듣는 수밖에 없었다. 베르나데타는 휴베르트의 양손을 보물단지라도 되는 양, 꼭 쥐었다.
“베, 베르는 휴베르트 씨가 마…… 만약에라도 그 순간 세상을 떠난다고 해도, 차가운 땅바닥에서 홀로 쓸쓸하게 떠나게 놔두고 싶지 않았어요. 다른 누구라도 그렇지만, 휴베르트 씨라면 더더욱이요.”
그친 줄 알았던 눈물이 또 뚝 떨어졌다. 다시 볼을 닦아줄 손이 없었던 휴베르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소리에 흠칫, 베르나데타의 어깨가 떨리는 것이 보였다.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크게 반응하는 그다웠다.
“바보 같은 말씀 마시지요. 제가 떠난다고 베르나데타 님까지 죽을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습니다.” “베르에겐 그 정도로 가치 있는 일이에요.” “가치요?” “정말로 그게 마지막이라면…… 베르의 품에서 숨을 거두길 바랐어요. 마지막 온기는 베르가 다 끌어안고 싶었어요. 그 순간만이라도 베르가 안식을 줄 수 있길 바랐어요. 하지만, 하지만 진짜로, 진짜 속마음은…… 휴베르트 씨가 내 온기를 느끼고 돌아오길 바랐어요.”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는 순간은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지금도 그런 순간에 속했다. 가만 보면 그런 상황은 늘 베르나데타와 대화하다가 생겼다. 휴베르트는 참으로 난감한 상대에게 마음을 허락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놔두면 휴베르트 씨가 가버릴 것 같았단 말이에요.” “그거야말로 정말 바보 같은 말씀이시군요. 이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맘 편히 눈 감아도 되는 상황이 아니지요.” “그치만……” “그리고 베르나데타 님 또한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으니까요.”
자기도 모르게 큭큭 웃음이 나려고 했다. 제 믿음을 보기 좋게 깨뜨려주고, 그보다 더한 신뢰로 갚아주는 그가 있어 세상이 조금은 즐거운 것 같았다. 참지 못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휴베르트는 두 손을 빼내었다. 그리고는 아까와는 반대로, 자신이 베르나데타의 두 손을 꼭 쥐었다.
“귀하께선 이런 저까지도 챙기시니, 도저히 두고 갈 수가 없어서 말이지요. 당분간은 제가 곁에서 돌봐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귀하 또한 폐하께 아주 귀중한 존재이니까요.” “휴, 휴베르트 씨!”
어디서 저렇게 많은 양의 눈물이 나오는지 모를 일이라고, 늘 생각했다. 베르나데타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수수께끼를 앞으로 얼마나 더 알게 될까 궁금하기도 했다. 아예 휴베르트의 다리에 엎어져 울고 있는 베르나데타를 보며, 휴베르트는 큭큭 웃었다.
“뭐, 온기를 느끼고 돌아온 건 틀리지 않은 것 같군요.” “네?” “혼잣말입니다.”
휴베르트가 코를 훌쩍이는 베르나데타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늘 휴베르트의 가슴 주머니를 장식하고 있던, 베르나데타가 꽃 자수를 놓은 그 손수건이었다. 정신을 차린 뒤로 처음으로, 베르나데타가 활짝 웃었다.
베르나데타가 벌떡 일어나며 만세를 불렀다. 몇 주째 공을 들이던 작업이 드디어 끝났다. 마네킹에 입혀둔 옷이 두 벌, 손에 들린 옷이 한 벌이었다. 크리스마스까지 앞으로 이틀. 이 정도면 훌륭한 마감이었다. 자신이 대견해져 뿌듯하게 미소 짓기 무섭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 누구세요!”
“나야, 베르.”
이 마감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베르나데타는 쪼르르 달려가 문을 열었다. 머리를 틀어 올린 도로테아가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완성됐어?”
“으, 응. 조금 전에 막…….”
“내가 타이밍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맞추지.”
윙크까지 하면서 도로테아가 자연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말릴 틈도 없었다. 베르나데타가 그녀의 등에 대고 새된 비명을 질렀지만, 도로테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바닥에는 천 자투리는 물론이고, 바늘이며 실이며 가위까지 온갖 잡동사니가 널브러져 있었다. 후다닥 도로테아를 쫓아 들어온 베르나데타는 주섬주섬 한 손으로 바닥을 쓸었다.
“신경 쓰지 마, 마감하느라 바빠서 그런 건데 뭐. 근데 세상에, 어쩜 이렇게 예뻐? 진짜 잘 만들었다.”
“헤헤, 그, 그래? 다행이다, 걱정했거든.”
도로테아의 눈이 옷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베르나데타는 배시시 흘러나오는 미소를 들키기 싫어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손에 들려 있는 옷을 마네킹에 걸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베르, 그거 설마……”
“아, 응. 이게 방금 막 완성한 건데, 에델가르트 씨한테 맞을지……”
베르나데타의 등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도로테아가 저렇게 미소 지을 때면 분명히 안 좋은 일(베르나데타의 측면에서 보면 그렇다는 이야기다)이 생겼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생글생글 미소 짓는 낯에 대고 뭐라고 할 성격은 되지 못했기에, 베르나데타는 애꿎은 바닥을 노려보았다.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켰다. 무슨 말이 나올지 불안했지만, 그 말을 기다리는 동안의 긴장감이 더 싫어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저기, 에델가르트 씨가… 입는 거 맞……지?”
“으응~? 난 에델이 입는단 소리는 안 했는데~?”
“그, 그치만 베르 사이즈에 맞추라고…… 그럼 우리 반에 입을 수 있는 사람은 에델가르트 씨밖에…….”
“에이~ 정말 딱 맞게 입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 왜~”
부들부들 떨던 베르나데타가 마침내 도로테아와 눈을 마주쳤다.
“그건 베르가 입을 거야.”
“왜 그렇게 되는 거야아아아아아아!”
*
애초에 크리스마스 파티의 회의 같은 걸 한다고 했을 때부터 재빠르게 도망쳐서 기숙사에 틀어박혔어야 했다. 하지만 베르나데타는 부드럽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제지하는 에델가르트에게 약했고, 어딜 가냐며 팔을 붙잡아 꼭 끌어안는 도로테아에게도 약했으며,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기대감을 드러내는 페트라에게도 마찬가지로 약했다. 결국, 도로테아와 페트라 사이에 앉아 얌전히 에델가르트의 말을 경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휴베르트가 나눠준 종이에는 크리스마스 파티 일정이 적혀 있었다. 12월 25일 저녁 7시부터 밤 10시까지. 장소는 학교 대강당. 다 함께 저녁을 먹고 가볍게 선물을 교환하는 행사. 반을 나누지 않고 모두가 함께 참가. 그런 내용은 아무래도 좋았다. 베르나데타의 시선이 꽂힌 것은 안내문의 가장 아래쪽에 적힌 내용이었다.
“안내문을 보면 알겠지만, 학교의 전통대로 각 반에서 한 명씩 산타 역할을 맡게 될 거야.”
재미있는 전통이라며 미소를 짓는 페트라를 옆에 두고 그런 전통은 필요 없다고 차마 소리지를 수는 없었다. 입술을 꾹 깨물며 그 산타가 자기가 아니기만을 빌었다.
“그리고 문제라면 문제인데…… 기존에 선배들이 사용하던 산타 옷은 너무 해져서 더는 입을 수 없을 것 같아. 올해는 새 옷을 구비해야 할 것 같은데……”
“저요, 저요~ 의견 내도 돼?”
도로테아의 손이 번쩍 올라갔다. 괜히 소스라치게 놀란 베르나데타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베르가 옷 잘 만들잖아! 베르한테 만들어달라고 하면 어때?”
“뭐?! 내가?!”
교실이 어수선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베르나데타에게 쏠린 탓에, 당장이라도 쥐구멍을 찾아 들어가고 싶었다. 얼굴이 후끈거려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잘 만든다고 하긴 어려웠지만, 도로테아의 말대로 옷을 만들 줄은 알았다. 어릴 적부터 갖고 놀던 인형의 옷을 직접 만들다 보니 취미가 되었고, 어느새 점점 규모가 커져 사람 옷까지도 만들게 되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취미의 수준이었다.
“다른 반도 옷이 필요한 건 마찬가지라 구매하려고 했는데.”
“에이~ 우리만의 추억을 만드는 건데, 새 옷 하나씩 장만하면 좋잖아! 물론 재료비 포함해서 제작비도 주는 조건으로! 어차피 예산도 있겠다, 어때?”
“그건 솔깃한걸. 베르나데타만 좋다면, 나도 찬성하고 싶어. 좋은 추억이 될 거야.”
페르디난트까지 나서서 고개를 끄덕였다. 제작비를 주는 조건이라는 소리에 잠시 귀가 솔깃하기는 했다. 하지만 베르나데타는 고개를 붕붕 저었다. 어디까지나 취미의 영역에서 만드는 옷이었다. 정식으로 복식 디자인을 배워 볼까 고민 중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뚝딱 완벽한 옷을 만들어내진 못하는 법이었다.
“그, 그래도 누가 입고 활동할 만한 옷을 만들지는 못하는걸.”
“지금 우리한테 필요한 건 산타 복장이잖아? 시즌 지나면 어차피 못 입어.”
“그, 그치만 인터넷만 조금 뒤져도 잘 만들어진 산타 옷이……”
“맨날 똑같은 산타 복장에는 아무 매력이 없잖아. 약간 어레인지 해보자! 나도 도와줄게!”
이건 반칙이었다. 뭐가 반칙이냐면, 이미 연극 무대에도 올라간 경험이 있어 연예인이나 다름없는 도로테아가 눈을 반짝이면서 베르나데타의 손을 꼭 붙잡은 채로, 그 아름다운 얼굴로 미소까지 짓는 것이 그랬다. 심지어 그러고 있는 사람이 이 학교에 와서 처음 사귄 친구라면 더욱 반칙이었다. 베르나데타의 머리에서 김이 솟고 있는 것 같았다.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던 몸이 페트라의 어깨에 툭 닿았다.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길이 없었다.
“찬성입니다. 베르나데타, 만드는 옷, 기대합니다.”
“페트라까지~!”
울상을 지어봐도 이젠 정말 답이 없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베르나데타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도로테아가 만세를 불렀고, 페트라가 손뼉을 쳤다. 이 소란 속에서도 고요히 졸고 있는 린하르트가 부러웠다.
“그럼 옷은 베르나데타에게 맡기는 거로 일단 추진할게. 다른 반에도 얘기해야 하고, 선생님 허락도 받아야 할 테지만.”
“저, 저, 저저저저, 저기요!”
가뜩이나 달아오른 얼굴이 더 새빨개졌다. 모두의 이목을 끄는 것보다 더 중요한 말을 해야 했다. 베르나데타도 딜을 해야 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산타 역할만큼은 피해야 했다.
“오, 옷을 만드는 대신 산타 역할에선 빼주시면 안 될까요?”
“뭐~? 그런 게 어디 있어, 베르! 조건은 모두 똑같아야지!”
“옷을 만드는 점에서 이미 똑같지 않은데!”
도로테아는 쉽게 물러날 것 같지 않았다. 베르나데타는 필사적인 눈빛을 에델가르트에게 쏘아 보냈다. 에델가르트의 표정이 미묘했다. 안쓰러워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한심하게 보는 것일지 모를 얼굴이었다. 베르나데타는 침을 꿀떡 삼켰다.
“그 점도 반영해서 고민하도록 할게.”
이걸 긍정적인 대답이라고 생각해도 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반영’한다고 했으니 나름대로는 성공일지 몰랐다. 베르나데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팔을 꼭 끌어안고 있던 도로테아가 문득 자세를 고쳐 앉았다. 생각에 잠긴 듯 천장을 빤히 바라보던 그녀가 다시 생긋 미소를 지으며 베르나데타를 쳐다보았다. 등줄기를 따라 오스스 소름이 돋았지만, 미소는 지어 보였다.
“그래~ 어차피 지금 당장 정할 것도 아니잖아.”
그렇게 회의는 다른 안건으로 넘어갔다. 어쩐지 불안한 마무리였다.
*
“베르는 아니랬으면서! 아니랬으면서!”
“난 아니라고는 안 했는걸! 너무 부끄러워할 테니까 비밀이라고만 했지.”
도로테아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산타 옷의 주인공들이 정해졌단 소식을 전한 것은 도로테아였다. 물론 정확하게 알려준 것은 펠릭스와 힐다뿐이었다. 막상 자기 반에서는 누가 입을지 제대로 말을 하지 않기에 불안함을 느끼면서도, 도로테아의 말대로 고분고분 자기 사이즈의 옷을 만들었다. 에델가르트가 베르나데타보다 키가 크긴 했지만, 기장만 조금 손보면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옷 기장도 에델가르트 씨에 맞춰놨단 말이야!”
“처음 기장 재고 나서 다시 안 재봤지?”
생긋 웃는 도로테아에 비해 베르나데타의 얼굴이 파랬다. 후다닥 옷을 펼쳐 제 팔에 가져다 댄 베르나데타가 울상을 지었다. 처음에 의도한 기장보다 짧았지만, 베르나데타에게는 마치 자로 잰 것처럼 딱 맞는 사이즈였다. 하필 이 옷의 초반 원단 작업을 도로테아에게 맡긴 것부터가 실수였다.
“이, 이건 사기야!”
“그치만 베르, 잘 들어봐.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펠릭스가 산타 옷을 입는다고! 베르가 만든 옷을 말이야!”
“그, 그건…… 좀 기쁘지만.”
“베르가 산타를 같이 하면, 그 산타 옷을 입은 펠릭스랑 시간을 같이 보낼 수 있는 거잖아?”
“그거랑 이건 다르잖아!”
“에이,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딱 달라붙어 있어. 혹시 누가 알아? 이때다 하고 펠릭스가 고백……”
“꺄악! 하지 마, 하지 마, 도로테아!”
팔을 마구 휘저어 도로테아를 말렸다. 얼굴이 후끈거렸다. 심장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뛰어댔다.
엄밀히 말하자면 펠릭스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은 좋았다. 하지만 이 산타 복장을 하고 만나야 한다는 점이 걸렸다. 게다가 그 옆에 같이 서 있을 사람은 다름 아닌 힐다였다. 성격만큼이나 시원시원한 이목구비가 아름다운 힐다 옆에서, 더벅머리를 한 자신이 같이 서 있을 생각을 하니 벌써 부끄러워서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었다.
“펠릭스 씨에 힐다 씨가 산타인데 베르가 그 사이에 있는 건 너무……”
“베르, 자신감을 가져! 펠릭스가 좋아하는 건 베르잖아!”
“으으, 그건, 그건 너무 낙관적인 평가고……”
“펠릭스가 산타를 하기로 한 건 베르가 우리 반 산타라서 그런 건데.”
한숨을 푹 내쉬며 도로테아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든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던 베르나데타의 고개가 불쑥 위로 올라왔다. 붉게 물든 얼굴이 도로테아와 마주쳤다.
“뭐, 뭐, 뭐?”
“펠릭스도 산타를 안 한다고 막 화를 냈는데, 베르가 산타를 한다는 얘기를 듣고선 마음이 바뀌었다나? 잉그리트가 그랬어, 달갑게 오케이한 건 아니지만 분명히 그 얘기를 들은 다음에 어쩔 수 없으니까 하겠다 그랬다고.”
얼굴이 더 화끈거렸다. 홱 뒤돌아선 베르나데타가 연신 손부채질을 해댔다.
펠릭스 씨가? 그랬다고? 정말로? 베르랑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걸까? 아냐, 그치만 그냥 다른 이유일 수도 있잖아. 펠릭스 씨는 친구들한테 좀 약한 경향도 있으니까 실뱅 씨나 잉그리트 씨가 계속 부탁하면 거절을 못 했을 수도…… 헉, 역시 그런 거겠지?
“베~르~? 듣고 있어?”
“어, 어, 응?”
“펠릭스가 산타 복장을 기대하고 있대. 물론, 베르가 입은 걸.”
도로테아의 미소까지 얹어져 금상첨화였다. 그 말은 베르나데타를 결국 KO 시켰다. 부들부들 떨던 베르나데타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도로테아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짝 손뼉까지 친 그녀가 베르나데타의 손을 꼭 붙잡았다.
“정말 멋진 크리스마스가 될 거야!”
*
“무슨 일이야?”
“베르가 못 나오겠대.”
마침내 크리스마스 당일이었다. 7시까지는 앞으로 5분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이미 다른 친구들은 모두 연회장에 모여 있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정작 산타인 베르나데타는 기숙사 방 안에 있었다. 그녀를 찾으러 온 것인지, 이제 문 앞에는 도로테아와 에델가르트까지 두 명이 서 있었다.
“베르나데타.”
“힉, 에델가르트 씨?”
“시간이 얼마 없어. 이러다간 늦을 거야.”
“그, 그, 그치만, 이런, 이런 꼴로 나갈 수는 없어요오오!”
도로테아의 한숨이 깊었다. 도로테아가 펠릭스의 이름을 꺼내는 바람에 설득된 것은 사실이었지만, 펠릭스 때문에 마찬가지로 나가기가 싫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펠릭스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신이 만든 멋진(어쩌면 귀여운) 옷을 입히고 싶은 마음과 그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런 부끄러운(어쩌면 귀여운) 옷을 입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주 다른 문제였다.
“베르나데타, 이미 정해진 사항이잖아. 따르지 않으면 흑수리반으로서 선생님이나 다른 사람들을 볼 낯이 없어져. 부탁이니까 나와줘.”
에델가르트가 이렇게까지 말하면 할 말이 없었다. 베르나데타는 늘 그렇듯, 친구들에게는 참으로 약했다. 에델가르트 씨가 이러는 건 반칙이라고, 부루퉁하니 중얼거리며 결국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서도 차마 나설 용기가 나지 않아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서 있었다. 모자의 끄트머리에 달린 동그란 술이 이마를 톡 쳤다. 빨간 장갑을 낀 손으로 마지막 보루라도 되는 양, 문손잡이를 꽉 붙들었다. 고개를 도저히 들 수가 없었다. 다시 문을 닫고 싶은 심정이 굴뚝 같아지는 순간, 탁, 문을 붙잡은 에델가르트가 조용히 말했다.
“가자.”
“으으으, 네에…….”
베르나데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순순히 문을 열었다. 이제 7시까지는 3분도 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도로테아와 에델가르트가 양옆을 지키듯 나란히 섰다. 베르나데타는 차마 놓고 올 수 없었던 고슴도치 인형을 꽉 끌어안았다. 공개 처형을 당하는 게 이런 기분일 거라 우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연회장 가는 길이 새삼 너무도 가까웠다. 평상시엔 너무 멀어서 힘들다고 불평을 하고는 했는데, 오늘따라 몇 걸음 만에 도달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연회장의 커다란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그리고 이미 그 안은 파티 분위기가 한창이었다. 테이블 한가득 올라온 음식과 가장 안쪽에 우뚝 서 있는 트리, 벽을 수놓은 장식까지 크리스마스를 즐길 준비가 완벽했다. 단 하나, 산타를 제외하면 말이다.
“어이, 늦었잖아.”
“펠릭스, 좀 더 상냥하게 대해줘~”
베르나데타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아무래도 산타 동지들이 그녀를 마중 나온 모양이었다. 로봇처럼 삐거덕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마찬가지로 산타 옷을 입은 펠릭스와 힐다가 서 있었다. 그 순간, 베르나데타는 지금까지의 모든 감정이 다 날아가는 것 같았다. 펠릭스도, 힐다도 너무나 잘 어울렸다. 물론 간단한 치수를 받아서 제작하긴 했지만, 마네킹에 입혀놓은 것과 당사자가 입는 것은 퍽 느낌이 달랐다. 베르나데타의 눈이 반짝였다.
“엄청나게 잘 어울려요! 두 분 모두! 세상에, 이렇게 잘 어울릴 줄은 몰랐어요. 힐다 씨, 너무 귀여워요. 아아, 이걸 보려고 몇 날 며칠을 그렇게 고생을…… 아, 물론 펠릭스 씨도 정말 멋있어요. 역시 장식을 달길 잘했다, 헤헤. 이거야말로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거로군요!”
“와~ 고마워! 이렇게 예쁜 옷 만들어준 것도 고맙고! 베르나데타도 잘 어울려!”
배시시 웃던 베르나데타의 얼굴이 순식간에 파랗게 질렸다. 본인이 산타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완전히 망각하고 있었던 탓이다.
“베, 베르는 전혀 그렇지가 않은데요, 원래는 에델가르트 씨가 입을 줄 알고 욕심을 좀 부려서 만든 건데, 이걸 왜 베르가 입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는……”
“잘 어울리기만 하는데 왜.”
펠릭스의 입에서 툭 튀어나온 말이 베르나데타를 더욱 사색으로 만들었다. 어머나 소리가 도로테아에게서 나온 것인지, 힐다에게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정신이 날아갔다. 히이익, 새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나려는데, 펠릭스가 탁 손을 붙잡았다.
“히이익, 페, 페, 페, 펠릭스 씨?!”
“어딜 도망가. 이런 옷을 입혔으면 끝까지 책임을 지라고.”
“채, 책임, 책임이라뇨?!”
“선물 주러 레츠 고~!”
힐다가 신나게 외치면서 베르나데타의 비어 있는 팔에 팔짱을 꼈다. 졸지에 손과 팔이 봉인된 베르나데타가 울먹이는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도로테아는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고, 에델가르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베르나데타는 울고 싶은 건지, 비명을 지르고 싶은 건지, 웃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어졌다. 자신의 손을 꽉 잡은 펠릭스의 손은 기뻤지만, 이런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줬다는 수치심이 상쇄될 만큼은 아니었다. 힐다 역시 만들어준 옷을 기뻐하는 것 같아 다행이었지만, 그렇게 예쁜 모습인 힐다에 비해 자신은 너무 초라해 보였다. 머릿속에서 감정들끼리 어마어마한 전투를 벌여댔지만, 발은 착실하게 두 사람에게 맞추어 앞으로 나아갔다.
“선생님, 산타 왔어요~”
“기다렸어. 각자 자기 반에 선물을 나눠주도록 해.”
“반별로 개수를 맞춰 놨으니까 아무거나 가져가.”
크리스마스 때문에 신난 것은 벨레스와 벨레트도 매한가지인 모양이었다. 산타 모자를 쓴 벨레스와 루돌프 코를 끼우고 있는 벨레트 앞에 선물 꾸러미가 세 개 놓여 있었다.
“이거 생각보다 무거울 것 같은데~ 선생님이 좀 도와주시면 안 돼요?”
“선물을 나눠주는 건 산타의 몫이지, 루돌프의 몫이 아니다.”
“왜요, 루돌프도 산타랑 같은 편인데. 뭐, 농담이에요. 이 정돈 거뜬하죠.”
농담 따먹기라도 하듯, 벨레트에게 장난을 치던 힐다가 제일 먼저 꾸러미를 들고 룰루랄라 돌아섰다.
“그럼 나 먼저 가볼게~ 펠릭스, 베르나데타 잘 도와줘야 해!”
윙크까지 찡긋하는 걸 보니, 어쩐지 도로테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퍼뜩 정신을 차린 베르나데타가 허둥지둥 힐다에게 인사를 했다. 급격히 작은 방 안이 조용해졌다. 어색한 공기 때문에 선뜻 몸을 움직이지도 못했다.
“산타 옷을 베르나데타가 만들었다고 들었어. 고생이 많았네.”
“앗, 아녜요, 그, 재료비도 주셨고 수고비도 받았거든요. 게다가 힐다 씨도, 펠릭스 씨도 너무 잘 어울리니까 만든 사람으로선 엄청 뿌듯하다고 해야 할까, 그러니까……”
“베르나데타도 귀여워.”
갑자기 튀어나온 벨레스의 칭찬에 베르나데타의 어깨가 튀어 올랐다. 얼굴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입만 벙긋거리는데, 벨레스의 시선이 펠릭스에게로 돌아갔다.
“그렇지, 펠릭스?”
펠릭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홱 고개를 돌린 탓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는 벨레스나 베르나데타에겐 시선도 주지 않은 채 꾸러미 두 개를 전부 들어 올렸다.
“가자.”
“앗, 펠릭스 씨, 같이 가요! 서, 선생님, 다녀올게요!”
“잘 다녀와.”
베르나데타가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벨레트가 손을 흔들었다. 이어서 벨레스의 손 인사까지 본 베르나데타가 후다닥 뒤를 돌아 달렸다. 펠릭스가 성큼성큼 걸어가는 탓에 벌써 꽤 거리가 있었다.
“펠릭스 씨, 그, 그건 베르 주세요.”
“인형을 들고 꾸러미를 어떻게 들게.”
“드, 들 수 있어요! 그 정도는!”
하지만 펠릭스는 결국 연회장에 도착해 흑수리반이 모여 있는 테이블 앞에 도착할 때까지 꾸러미를 넘겨주지 않았다.
*
크리스마스 파티는 생각보다 즐거웠다. 선물을 나눠줄 때마다, 진짜 산타클로스에게 선물을 받는 것처럼 눈을 빛내는 친구들의 얼굴을 보는 것도 좋았고, 온갖 맛있는 음식을 함께 나눠 먹는 것도 행복했다. 금사슴반 테이블에서 힐다가 이렇게 예쁜 옷을 입었을 때 사진을 많이 남겨야 한다며 온갖 사람을 옆에 끼고 열심히 핸드폰을 누르는 모습도 기뻤다. 펠릭스의 인기도 그에 못지않았는데, 펠릭스의 반대로 각자 셀카를 남기는 건 실패해 청사자반의 단체 사진만 간신히 찍은 모양이었다.
물론 생각보다 힘들기도 했다. 도로테아가 귀엽다는 말을 연발하며 연신 찰칵거리는 통에 정신이 없었다. 어느새 벨레트의 루돌프 코를 빌려온 카스파르가 산타와 루돌프는 세트라며 베르나데타를 번쩍 들어 올린 채로 연회장을 한바탕 질주하기도 했다. 덕분에 베르나데타의 비명이 요란했지만, 그 누구도(펠릭스는 눈살을 찌푸리긴 했지만) 그걸 말리지는 않았다. 교직원들도 그저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 지켜보고만 있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파티도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분위기가 잔잔해졌다. 진즉 물러나기를 원했던 이들 몇몇은 기숙사 방으로 돌아갔고, 그 와중에 몇몇은 짝을 지어 운동장 쪽으로 나가는 것도 같았다. 운동장도, 정원도, 온실도 온통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도배되어 있었으니, 어딜 가나 좋은 데이트 장소가 될 것이었다.
“어이, 베르나데타.”
“힉, 네!”
그렇게 감상에 젖어 있던 베르나데타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펠릭스가 옆에 서 있었다.
“더는 여기서 못 버텨. 나가자.”
“그, 그, 그래요!”
펠릭스의 말에 백 퍼센트 공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따라 나오리라 생각했는지, 펠릭스가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베르나데타도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회장 자체는 먹는 데 집중한 몇 명을 빼고는 저마다 담소를 나누는 데 집중한지라, 두 사람을 붙잡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페, 펠릭스 씨, 어, 어디 가세요? 기숙사는 저쪽……”
“끝까지 책임지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그게 무슨 책임인데요오오오?!
물어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어쩐지 대답을 듣는 것도 부끄러워져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베르나데타는 말없이 펠릭스의 뒤를 따라갔다. 조금 전에 머릿속으로 멋진 데이트 장소가 될 것이라 그렸던 곳들을 하나씩 지나쳤다. 환하게 가로등을 비춰놓은 운동장도, 선생님이 가장 좋아하는 다과회 장소라는 정원도, 베르나데타도 한숨 돌리러 자주 가는 온실도 지나쳤다. 갈 곳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을 텐데, 펠릭스는 멈추지 않았다. 연말의 밤공기는 차가웠지만, 장갑에 넥워머까지 한 탓인지 코끝만 조금 시렸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어쩐지 가슴도 같이 간질거려 재채기가 날 것 같았다.
“펠릭스 씨, 어디까지……”
“눈이 오는군.”
“네?”
펠릭스가 멈춰 섰고, 베르나데타도 따라 멈췄다. 펠릭스가 한 손을 허공으로 내밀고 있었다. 마침 그의 손 위로 눈송이가 하나 톡 내려앉았다. 베르나데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헉, 진짜예요! 눈이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예요!”
베르나데타는 번쩍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송이가 하나둘, 조금씩 내려왔다. 펑펑 내리게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배시시 미소가 나왔다. 눈이 오는 것은 좋았다. 딱히 밖에 나가 눈싸움을 하거나 눈사람을 만드는 취미는 없었지만, 눈이 오고 나면 온 세상이 고요함에 잠겨 들어가는 그 분위기가 좋았다.
“베르나데타.”
“네?”
“선물이다.”
어안이 벙벙했다. 덕분에 눈을 깜빡이며 펠릭스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달빛 때문에 펠릭스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그는 조금,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산타도 선물은 받아야 할 거 아냐.”
“저, 저 주시는 거예요?”
“여기에 너 말고 누가 있는데?”
가슴이 간질거렸다. 어쩐지 함박웃음을 지어버릴 것만 같았다. 물론 자신의 귀를 의심했기 때문에, 베르나데타는 되묻는 것을 잊지 않았다.
“진짜 베르가 받아도 되나요?”
“너 주려고 골랐다고.”
“저, 정말요?”
“쳇, 싫으면……”
“안 싫어요! 기뻐요!”
도로 물러나려는 펠릭스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그의 손 위에 놓여 있는 작은 선물 상자가 금방 손에 들어왔다. 콩닥콩닥,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귓속을 가득 채웠다.
“지, 지금 풀어봐도 되나요?”
“맘대로 해.”
상자를 여는 손이 부르르 떨렸다. 달칵, 소리를 내며 상자가 열렸다. 작은 펜던트였다. 절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언젠가의 점심시간에, 도로테아와 들여다보던 잡지에 실린 그 펜던트였다. 색이 마음에 들어 귀엽다고 지나가듯 말했던 게 생각이 났다.
“페, 펠릭스 씨, 이걸 어떻게…… 아니, 어, 이걸, 어, 왜…….”
머릿속이 하얬다. 기쁘다, 그 외에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갖고 싶었던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선물로 주었다. 가슴이 벅차올라서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그 정도면 눈치를 채라고.”
“뭐, 뭘요?”
여태까지 눈을 맞추지 않았던 펠릭스가 돌연 눈을 마주쳐 왔다. 대번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눈을 피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똑바로 다가오는 시선에 사로잡히기라도 한 듯, 꼼짝할 수가 없었다.
“좋아해, 널.”
세상이 조용했다. 눈발이 조금씩 굵어지면서 세상의 작은 소음들을 집어삼키는 모양이었다. 바람 소리만 고요히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갔다. 결국, 눈물이 터졌다.
“펠릭스 씨!”
“뭐, 뭐야, 왜 울어?”
“저도, 베르도 좋아해요!”
당황한 펠릭스의 표정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미 터져버린 눈물이 주룩주룩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예상치 못한 고백에 눈물만이 아니라 심장도 터질 것 같았다. 너무 기쁘면 눈물이 난다더니, 그 말을 몸소 체험하는 중이었다.
“너무 좋아요! 좋아해요!”
“아, 알았으니까 울지 마. 그만 울라고.”
펠릭스는 어쩔 줄을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뭔가를 찾는 듯, 옷을 뒤적였지만 원하는 것은 없는 모양이었다. 베르나데타는 코를 훌쩍이다가 그대로 펠릭스의 품으로 홱 뛰어들었다. 펠릭스가 양팔을 벌린 채로 얼어붙은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베르나데타는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펠릭스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좋아해요, 펠릭스 씨. 너무 좋아서 눈물이 안 멈춰요.”
훌쩍이는 와중에 배시시 웃음이 났다. 어정쩡하니 공중에 떠 있던 펠릭스의 팔이 베르나데타의 어깨를 토닥이기 시작했다. 그 손길이 어찌나 조심스럽고 부드러운지, 다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팔에 꼭 힘을 주면서 눈물을 삭였다.
“고마워요, 펠릭스 씨. 선물도, 고백해준 것도요.”
갑자기 터진 눈물처럼, 자꾸만 떠오르는 미소도 어쩔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여러 방면에서 잊을 수 없는 크리스마스가 될 것 같았다.
디미트리 알렉산드르 블레다드는 좀처럼 크게 당황하는 법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티를 내는 법이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거짓말은 하지 않지만 숨기고자 하는 것은 절대로 들키지 않았다. 그러니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것이 오만한 자신감이었음을 깨달았다. 자기도 모르게 딱 벌어진 입을 깨달은 것은 옆에 서 있던 두두 몰리나로가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을 때였다. 겨우 정신을 차린 디미트리는 자신이 국왕으로서 이 자리에 있음을 떠올렸다.
“프랄다리우스 공, 혼인을 진심으로 축하하오. 자세한 이야기는 따로 듣고 싶은데 괜찮겠소? 자리를 옮겼으면 하는데.”
“알겠습니다, 폐하.”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펠릭스 유고 프랄다리우스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퍼거스의 기사이자 프랄다리우스령을 다스리는 공작인 동시에, 디미트리의 소꿉친구이기도 했다. 디미트리의 지시에 따라 펠릭스와 두두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접견실에서 우르르 빠져나갔다. 오래 앉아 있었던 탓인지 몸이 뻐근했다. 장식보다는 좀 더 실용성에 맞춘 의자가 필요하겠다고 생각하며 디미트리도 일어났다.
“깜짝 놀랐어.”
“그래 보이더군.”
“언제부터 만났어?”
펠릭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앞서서 걷기 시작했다. 접견실보다 개인 서재에서 더 많이 얼굴을 마주했던 소꿉친구에게 안내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았다. 디미트리는 펠릭스보다 약간 뒤처져 따라가며 최근의 일을 되짚어 보았다. 답을 찾을 수 없어 더 오래된 기억을 뒤적였다. 제국과의 전쟁 중에도 두 사람이 사귄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몰랐던 건 아마 너뿐일 거다, 멧돼지. 둔하기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지만, 화자가 실뱅이 아니라 펠릭스라는 점이 낯설었다. 원하던 대답은 아니었기에 디미트리는 재차 질문했다.
“그래서 언제부터야?”
“언제부터의 기준이 뭔데?”
“어…… 고백한 거?”
“전쟁 끝나고.”
그제야 디미트리는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해 냈다. 함께 싸워 왔던 왕국 군과 성 기사단은 전쟁이 끝난 뒤, 각각 페르디아와 가르그 마크로 찢어졌다. 연합군의 참모였던 이는 옛 스승이었고, 현재는 대사교가 되어 가르그 마크에서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때문에 메르세데스를 비롯해 몇몇 동창은 선생님을 따라 가르그 마크에 남았다. 디미트리가 여태 손톱만 한 실마리도 떠올리지 못한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베르나데타는 가르그 마크에 있는 거 아니었어?”
디미트리는 베르나데타 폰 발리와 친하지 않았다. 오히려 껄끄러운 사이에 속했다. 5년이라는 긴 시간을 거쳐 선생님과 친구들을 막 재회했을 때, 베르나데타를 제국의 첩자로 오인해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선생님과 펠릭스가 재빠르게 베르나데타의 앞을 가로막고 디미트리의 창을 막아냈다. 가뜩이나 사관학교 시절부터 디미트리를 무서워하던 베르나데타는 그 뒤로 무슨 일이 있어도 말을 걸지 않은 것은 물론이요, 일정 반경 안으로는 결코 다가오지 않았다. 마음을 다잡은 이후, 마음을 다해 그녀에게 사과했다가 눈물바다를 만든 일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디미트리는 자신을 겁내는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성격이 아니었고, 도리어 상대를 배려한다는 명목으로 접촉을 피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전략적인 필요에 의해서만 발생했다. 이번엔 이쪽에서 부대를 이끌어주면 좋겠다, 기습이 필요한데 가능하겠나, 그런 것들이었다. 지금까지도 디미트리는 그나마 선생님이 함께 있었기에 대화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로 쭉 우리 집에 있었어.”
마찬가지로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었다. 아무래도 베르나데타의 피난처가 가르그 마크의 기숙사 방에서 펠릭스로 옮겨간 모양이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기에 디미트리는 묵묵히 펠릭스의 뒤를 따라 서재로 들어섰다. 두두가 시종에게 다과상을 준비하라며 내보내자, 서재에는 과거의 동창 세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하긴, 넌 몰랐을 수도 있겠군. 가르그 마크를 제일 먼저 떠난 게 너니까.”
펠릭스의 말이 맞았다. 왕도를 계속 비워놓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전쟁이 끝나자마자 가르그 마크를 떠났다. 수도원의 문제는 대사교에게 맡기라면서 선생님이 등을 떠밀어준 게 한몫을 했다. 디미트리의 소꿉친구들이 현재의 자리에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한 달 뒤였다.
“아무튼 축하해. 결혼식은 언제야?”
“두 달 뒤에. 아마도.”
“아마도?”
“하객들 앞에 서기 싫다고 버티는 중이라서.”
어떤 상황인지는 쉽게 그려졌다. 친한 사람들과 함께 모인 자리에서도 나서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그녀가 생판 남이나 다름없는 수많은 사람 속에서 결혼을 한다니, 잘 모르는 디미트리가 보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잉그리트 녀석이 설득해 보겠다더군.”
“잉그리트가 베르나데타랑 친하던가?”
“나랑 선생… 이젠 대사교라고 해야겠군. 나랑 대사교를 제외하면 제일 마음이 편한 사람이라고 그러던데.”
그러고 보면 사관학교 시절에도 잉그리트는 베르나데타와 말이 잘 통했다. 수업 참여를 독려하던 것도 반장인 디미트리가 아니라(베르나데타가 너무 무서워한 탓에 기숙사에 찾아갈 수 없었던 것뿐이다) 잉그리트였다. 선생님의 권유에 청사자반으로 옮겨온 베르나데타가 적응하는 데에는 잉그리트의 힘이 많이 작용했을지도 몰랐다. 새삼 잉그리트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솟아났다. 조만간 잉그리트를 위한 만찬을 준비해야겠다고 다짐하는 사이, 펠릭스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실뱅도 뭣하면 자기가 나서겠다고 그러는데, 무슨 꿍꿍이속인지……”
“실뱅이?”
“베르나데타가 나한테 말하지 않은 걸 뭔가 아는 모양이야.”
디미트리는 충격을 받았다. 잉그리트가 베르나데타와 친한 건 충분히 이해 가능했다. 펠릭스가 베르나데타와 결혼하는 것 자체는 놀라웠지만, 돌이켜 보면 가르그 마크에서 펠릭스를 졸졸 쫓아다니는 베르나데타를 꽤 자주 목격했다. 실뱅의 성격을 생각하면 베르나데타에게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말을 걸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베르나데타이기에, 디미트리는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으면 도망쳤지, 실뱅과 무난하게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어떻게 비밀을 알 수 있는 것일까? 억지로 캐내지는 않았을 테지만, 마땅한 경로가 떠오르지 않았다.
“어이, 멧돼지.”
“아, 미안. 오늘은 계속 놀라네. 실뱅도 베르나데타랑 친하구나.”
“친하다고 해야 할지……”
펠릭스가 쯧, 혀를 찼다. 아무래도 실뱅이 베르나데타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마침 다과를 들고 나타난 시종 덕에 디미트리는 미묘한 충격은 잠시 잊게 되었다.
*
“폐하, 신경 쓰이는 일이 있으십니까?”
사실 디미트리는 두두가 이렇게 물을 때까지 자신이 그것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시선이 서류 속 글자가 아닌 허공에 머물러 있었으니, 두두가 아닌 그 누구라도 알아차렸을 법했다. 한숨을 푹 내쉰 디미트리는 미묘하게 굳어 있던 표정을 풀고 두두를 바라보았다.
“아, 별거 아니야. 낮에 있었던 일이 좀 놀라워서.”
“결혼 말씀이십니까?”
“그것도 그런데…… 잉그리트나 펠릭스는 그렇다 쳐도 실뱅까지 베르나데타랑 친한 건 전혀 몰랐어. 친해지는 데 시간이 꽤 걸렸을 텐데 말이야.”
“폐하께는 그럴 여유가 없으셨잖습니까.”
“응, 그러네.”
썩 시원시원하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여유가 없기는 했다. 펠릭스를 쫓아다니던 베르나데타의 모습조차도 낮에 결혼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떠올렸을 정도다. 하지만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베르나데타는 다가가기 어려운 아이라고, 친해지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의 소꿉친구들은 모두 그녀와 친하다. 실뱅 역시 친하다고 말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비밀을 알고 있는 정도라면 친하다고 봐도 무방한 것 같았다.
“베르나데타와의 관계를 걱정하시는 겁니까?”
“음…… 친해지기 어려울 거로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내 노력이 부족했나 보군. 다른 친구들하고는 다 잘 지내는데 나만 무서워한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좋지는 않네.”
머쓱한 웃음이 흘렀다. 이런 사실에 충격을 받다니, 아무래도 여전히 어른이 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디미트리는 벌써 네 번째 같은 문장을 다시 읽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이렇게 잡생각이 많은 채로 공무를 처리할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이만 쉬어야겠어.”
“목욕물을 준비할까요?”
“그래주겠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한 두두가 시종을 찾아 나서자 집무실은 조용해졌다. 어중간하게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생각이 순식간에 머리를 전부 점령했다. 이 상태로는 펠릭스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신부를 기겁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금방 우울해졌다. 세상만사 모두가 첫 단추가 중요한 법이라는데, 디미트리와 베르나데타의 관계는 첫 단추는커녕 옷 자체부터 잘못 입은 것 같았다. 사관학교 시절에 조금이라도 더 노력했다면, 하다못해 재회했던 그 순간에 공격이라도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실행할 수 없는 가정을 떠올리는 건 이미 지긋지긋했다. 머리를 털어 생각을 날려버린 디미트리는 어떻게든 긍정적인 면을 보기로 했다. 무뚝뚝하기로는 저보다 훨씬 심한 펠릭스도 베르나데타와 대화를 나누고 결혼까지도 한다. 덩치가 웬만한 곰 같기는 하지만 부드럽게 다가가면 관계 개선의 여지는 충분히 존재할 것이다.
디미트리는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집무실을 나섰다.
*
문제는 디미트리와 베르나데타가 만날 일이 없다는 점에 있었다. 공사다망한 디미트리는 페르디아를 벗어날 수 없었고, 베르나데타는 당연하게도 프랄다리우스령에서(정확히는 펠릭스네 집에서) 꼼짝도 하지 않을 것이다. 접점을 만들려면 디미트리가 프랄다리우스령에 행차하든가 베르나데타가 집에 콕 박혀 있는 생활을 포기하고 페르디아에 여행을 오는 수밖에 없었다. 둘 다 현실성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디미트리는 반쯤 포기한 상태로, 제발 결혼식에서 베르나데타가 기겁해서 도망가지 않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이런 디미트리의 고민이 여신께 닿은 것인지, 기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일이 벌어졌다. 간만에 휴식을 취하고자 산책을 하던 디미트리가 온실에서 베르나데타와 딱 마주친 것이었다.
“베르나데타?”
“히이이익! 죄송해요, 죄송해요! 외부인이 함부로 돌아다녀서 죄송합니다! 죽이지만 말아주세요! 아무 짓도! 아무 짓도 안 했으니까요오오오!”
“괜찮아, 진정해. 아무도 널 해치지 않을 거야.”
“저, 저, 저, 정말인가요? 하지만 여긴 왕궁인데, 헉! 그런 말로 베르를 안심하게 만들어 놓고 뒤에서 몰래……”
“제발 진정해줘, 베르나데타. 난 친구의 부인이 될 사람을 죽일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까.”
베르나데타의 어깨가 파드득 튀었다. 비명과도 같던 변명이 순식간에 멈추었다. 디미트리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조심스레 발을 떼었다. 성큼성큼 다가갔다가는 베르나데타가 그대로 도망가 버릴 것 같았고, 그런 일이 정말 벌어지면 꽤 상처받을 것 같았다. 꼼짝도 하지 않는 베르나데타의 뒤통수를 향해 디미트리는 차분히 말을 걸었다.
“나야, 디미트리.”
“헉, 디미트리 씨? 헉, 아니지, 폐하? 네? 폐하라고요? 폐하?”
고장 난 도르래에서 나는 소리가 베르나데타의 목에서 나는 것 같았다. 겨우겨우 고개를 돌린 베르나데타의 두 눈이 커다래지는 것을 보고 디미트리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오늘은 망토라도 내려놓고 나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찰나였다.
“히이이익! 죄송합니다, 폐하! 폐, 폐, 폐하의 온실이었군요! 아니, 그렇죠! 왕성이니까! 왕성 자체가 폐하 거였죠! 베르가 주제도 모르고 함부로 들어와 버렸으니 이제 죽음으로 사죄하는 수밖에 없나요? 부디 자비르으으으을!”
“제발, 베르나데타. 아까도 말했지만 난 널 죽일 생각이 전혀 없어. 이 왕성의 그 누구도 널 해치지 않을 거야. 이 나라의 국왕으로서 맹세하지.”
땅속으로 꺼질 듯이 굽어 내려가던 베르나데타의 허리가 멈추었다. 디미트리는 안도의 한숨조차도 그녀를 놀랠까 싶어 최대한 숨을 죽였다. 슬그머니 고개를 든 베르나데타가 갈팡질팡하던 시선을 간신히 디미트리에게 맞추었다.
“정말요? 약속하신 거예요?”
“그래, 약속해.”
“가,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오……”
“자, 잠깐만, 베르나데타!”
“히이익, 약속하셨잖아요오오!”
자기도 모르게 성큼 발을 내디디며 그녀를 불러 세운 디미트리는 다시 우뚝 멈춰 섰다. 베르나데타는 잔뜩 몸을 움츠린 채로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펠릭스가 두르고 다니던 망토와 같은 색의 망토 밑으로 파르르 떨리는 팔이 보였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베르나데타가 긴장감을 견디다 못해 서서 기절하기 전에 무엇이든 편안하게 만들 만한 주제를 꺼내야 했다.
“펠릭스와 결혼한다면서. 축하해.”
“헉, 그, 그렇죠. 펠릭스 씨랑 베르가 결혼을 하죠…… 감사합니다.”
펠릭스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좋은 선택 같았다. 금방 떨림이 잦아든 베르나데타가 몸을 살짝 돌려 디미트리를 향해 꾸벅 고개까지 숙였다. 어쩐지 볼이 붉어 보였다.
“결혼 소식을 듣고 많이 놀랐어.”
“왜, 왜요? 설마 감히 베르 같은 게……”
“우리 중에 펠릭스가 제일 먼저 결혼하는 게 믿기지 않았거든.”
물론 결혼 상대가 베르나데타라는 사실이 놀라움을 세 배쯤 부풀리기는 했다. 어쨌든 요지는 펠릭스의 결혼에 있었다. 어린 시절에 모두 다 그러하듯, 디미트리도 당연히 어른이 된 자신과 친구들의 모습을 상상했다. 기사가 되거나 검을 휘두르는 모습 같은 건 금방 떠올랐지만, 누군가 결혼을 하는 것은 쉽게 떠올릴 수 없었다. 다만 결혼을 한다면 약혼자가 있는 잉그리트가 제일 먼저 하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을 뿐이었다.
“어릴 땐 잉그리트가 제일 먼저 결혼할 줄 알았어. 약혼자가 있었거든. 하지만…… 나중엔 당연히 내가 먼저 결혼하겠구나 싶었어. 왕이 되면 후사 문제가 생기니까.”
“그, 그러네요. 펠릭스 씨도 결혼에는 딱히 생각이 없었던 것 같으니까요.”
차마 말을 꺼내기가 힘들어 얼버무렸지만 베르나데타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어쩌면 이미 잉그리트에게 사정을 들은 것일지도 몰랐다. 펠릭스와 선생님을 제외하면 제일 편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잉그리트라던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시, 실뱅 씨는요? 실뱅 씨라면 여자분들이랑 잘 지내시는데……” “흉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지만, 실뱅은 한 사람과 지속된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는 재주가 없는 편이라서.”
디미트리는 속으로 고티에령에 닿지 못할 사과를 하고서 베르나데타를 살폈다. 이제 베르나데타의 몸은 완전히 디미트리 쪽을 향해 돌아서 있었다. 대화하려는 시도가 성공했다. 뿌듯해진 디미트리가 미소를 지었다.
“펠릭스를 잘 부탁해. 둘도 없는 소중한 친구거든.”
“폐, 폐하의 둘도 없는 소중한 친구면 엄청나게 중요한 사람인 거잖아요? 베르 따위한테 부탁하셔도 괜찮은 건가요? 아니, 물론 펠릭스 씨를 좋아하니까 잘해줄 거지만, 헉, 베르가 지금 뭐라고 했죠? 꺅, 부끄러워!”
그렇게 길지 않은 대화를 통해 디미트리는 조금이나마 베르나데타를 파악할 수 있었다. 덕분에 베르나데타가 보이는 급격한 태도 변화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 차분하게 정말 묻고 싶었던 것을 질문했다.
“그런데 베르나데타, 페르디아에는 어쩐 일이야? 펠릭스와 함께 온 건가?”
“펠릭스 씨는 폐하를 뵈러…… 어?”
베르나데타가 그대로 정지했다. 디미트리 역시도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일 수 없었다. 베르나데타가 말하는 폐하는 다름 아닌 자신이었고, 그는 접견실이 아닌 온실에서 그녀와 대화 중이었다.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 어떻게 된 건가요오오오오!”
“음, 나도 그걸 묻고 싶은데…… 펠릭스가 온다는 전갈도 받은 적이 없거든.”
“네에? 하지만 실뱅 씨가 귀족들이 다 모이는 자리니까 꼭 가야 한다고 그랬는데요? 잉그리트도 만날 수 있다고 해서 펠릭스 씨를 따라왔는데……”
한겨울 입김과 함께 나오는 말소리처럼 덜덜 떨리던 베르나데타의 목소리가 조용해졌다. 디미트리가 자기도 모르게 탄식하면서 머리를 짚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녀 역시 왜 이런 사태가 벌어졌는지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실뱅이 꾸민 일이군.”
“베르가 속은 건가요? 하지만 펠릭스 씨도 같이 왔는데, 헉, 그럼 펠릭스 씨도 베르를 속인 거군요! 너무해!”
“미안해, 아무래도 나 때문인 것 같아.”
굳이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볼 것도 없었다. 두두가 프랄다리우스령으로 돌아가는 펠릭스에게 이야기했을 것이고, 펠릭스는 돌아가서 실뱅과 만나 또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실뱅은 잘 됐다며 베르나데타를 페르디아로 나서게 할 방법을 제시했을 테고, 펠릭스도 납득했으니 이곳에 온 것일 테다. 소꿉친구들의 배려에 기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펠릭스가 저번에 왔을 때, 네가 잉그리트나 실뱅이랑도 친하다고 그랬거든.”
“네? 잉그리트는 친하지만 실뱅 씨는 딱히…….”
“실뱅이 뭔가 비밀을 알고 있다던데……”
“그, 그건! 베르가 가르쳐 준 게 아니라고요오오오!”
어리둥절하던 표정이 금세 울상이 되었다. 아무래도 친하다고 생각하는 건 실뱅 혼자인 모양이었다. 디미트리는 다시 한번 뜻 모를 사과를 고티에령으로 보냈다.
“오해가 있나 보네. 뭐, 그래서 나만 베르나데타랑 어색한 관계인 게…… 좀 신경 쓰였어. 결혼식 때 날 보고 무서워서 숨어버리면 곤란해지니까…….”
아무리 디미트리라도 이런 말을 직접 입 밖으로 꺼내기는 영 껄끄러웠다. 그 때문인지 자연스레 목소리가 줄어들었는데도 온실 안에는 풀벌레 소리만 울렸다. 어색해서 애써 피하고 있던 고개를 들고 보니 베르나데타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디미트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러지?”
“폐하도 그런 걱정을 하시는군요.”
“국왕이기 이전에 나도 그냥 사람이니까.”
“그, 그쵸, 그러네요.”
어정쩡하게 대답하는 베르나데타를 보니 어쩐지 씁쓸했다. 그녀에게 디미트리는 동창이나 친구보다는 국왕이자 지휘관일 것이다. 디미트리 역시 그녀를 크게 의식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동료로 받아들이고는 있었다. 착잡한 마음에 말을 잃어버린 사이, 베르나데타가 입을 뻐끔거리는 게 보였다. 우물쭈물하던 그녀가 시선은 땅에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디미트리 씨는 배려심이 많은 사람인 걸 알아요. 정직하고 올바르고 또, 실수하면 인정하고 사과할 줄 아는 착한 사람이에요. 베르가 겁내니까 무섭게 하지 않으려고 되도록 피하신 것도 알아요.”
별안간 얼굴이 후끈거렸다. 입에 발린 소리에는 질릴 만큼 익숙해져 있던 디미트리도 떨리는 목소리로 전하는 칭찬에는 절로 부끄러워졌다. 본인이 그런 소리를 들을 만한 사람인지는 의문스러웠지만, 진심이 듬뿍 묻어나는 말에 아니라고 손사래를 칠 수는 없었다.
“베, 베르는 겁이 많지만…… 디미트리 씨랑 지금처럼 대화는 할 수 있어요. 폐하랑은 어려울 것 같지만……”
“응? 무슨 뜻이지?”
베르나데타가 뒷말을 거의 집어삼킨 탓에 잘 들리지 않았다. 눈을 대굴대굴 굴리던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왠지 모를 긴장감에 디미트리는 손을 꽉 쥐었다.
“그, 그, 그, 그러니까…… 펠릭스 씨의 친구, 잉그리트의 친구, 실뱅 씨의 친구인 디미트리 씨요. 어, 어릴 적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같이 검술 연습을 한 거랑 눈이 많이 왔을 때 잉그리트의 키보다 큰 눈사람을 만들었던 거랑…… 그, 그러니까 폐하가 아닌 디미트리 씨에 대해서 알게 되니까 좀 무섭지 않아졌다고 할지…….”
디미트리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폐하’와 ‘디미트리 씨’를 분리할 수 있다는 점이 일단 그랬고, ‘폐하’는 여전히 무섭지만 ‘디미트리 씨’는 덜 무서워졌다는 점도 마찬가지로 그랬다. 자신은 절대 떠올리지 못할 방법이라고 생각하며, 디미트리는 미소 지었다.
“아마 내가 국왕으로서 널 만날 일은 거의 없을 테니 다행이라고 해야겠군.”
디미트리의 미소가 예상 밖이었는지, 베르나데타의 표정이 이상했다.
“근데 좀 불공평한걸.”
“네? 뭐, 뭐, 뭐가요?”
“이미 나에 대해 많이 알게 된 것 같으니, 나도 베르나데타에 대해 알아야 친구가 될 수 있지 않겠어?”
베르나데타의 표정이 한층 더 이상해졌다. 눈이 휘둥그레진 것을 봐서는 놀란 게 확실했지만, 그게 나쁜 쪽인지 좋은 쪽인지 판가름하기가 애매했다. 친구가 되자는 말은 너무 갑작스러웠을까 염려스러웠다. 괜히 목이 탔다.
“베, 베르 같은 게 폐하의 친구가 되어도 괜찮나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만큼 베르나데타의 어깨가 함께 움츠러들었다. 디미트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국왕이 아닌 디미트리의 친구도 괜찮다면.”
표정이 환해졌다. 꽃을 피우듯 만개하는 미소에 디미트리도 함께 웃었다.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걱정거리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
“뭘 어떻게 한 거냐?”
식사 도중 나온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펠릭스의 시선이 따가웠기 때문에 디미트리도 고개를 들었다. 짐작 가는 것이 없어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자 펠릭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제랑은 사람이 달라진 수준이던데. 무슨 얘기를 했지?”
“페, 펠릭스 씨! 고기가 아주 맛있어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베르나데타가 접시를 펠릭스 쪽으로 밀었다. 허둥대는 모습을 굳이 보지 않더라도, 디미트리의 대답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게 분명했다. 열렬히 호소하는 눈빛까지 보고 나니 솔직히 대답할 수가 없었다.
“특별할 건 없었는데. 서로에 대해 조금 더 잘 알게 됐을 뿐이야.”
“하?”
“그럼요! 베르는 이제 폐하의, 아니지, 디미트리 씨의 친구라고요!”
뿌듯한 베르나데타의 미소에 펠릭스의 표정이 더욱 구겨졌다.
“여기 도착했을 때만 해도 무섭다고 인사 안 간다며.”
“그, 그건 그때고요!”
펠릭스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였지만, 디미트리는 더 대답하지 않았다. 풋 웃음이 났다. 베르나데타에 대해 알게 된 만큼, 연인과 함께 있을 때의 펠릭스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되었다. 아마 베르나데타는 그녀가 보지 못한 펠릭스의 어린 시절에 대해 잘 알게 되었을 것이다. 디미트리는 그 사실을 당분간 두 사람만의 비밀에 부쳐두기로 했다.
가르그 마크의 밤은 칠흑과도 같았기에, 띄엄띄엄 서 있는 횃불로는 저 멀리 선 인영을 판별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별로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스스로 빛을 내는 듯한 옥색 머리카락을 모를 수는 없었다. 하물며 그런 사람이 먼저 자신을 발견하고 말을 걸었으니 확실했다. 따라서 베르나데타는 벤치에서 일어나는 대신 벨레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서 오세요. 늦으셨네요.”
“정찰 중에 의심스러운 걸 봐서.”
“헉, 서, 서, 설마……”
“처리했으니 문제없다.”
베르나데타가 그를 신뢰하는 만큼, 벨레트 역시 그녀를 잘 알았다. 금방 나쁜 쪽으로(그것도 극단적으로) 생각이 빠져버리는 버릇은 5년이 흐른 뒤에도 변함이 없었다. 벨레트는 꼭 지금처럼, 늘 적당한 순간에 치고 들어와 그녀의 사고를 멈춰 주고는 했다. 베르나데타가 그에게 무의식적으로 의지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여전히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 베르나데타를 빤히 보다가, 벨레트가 물어왔다.
“잠이 안 오나?”
“그, 그런 건 아니고요. 선생님이 정찰을 하러 가셨다니까 괜히 걱정되지 뭐예요.”
가르그 마크 주변에는 늘 첩자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전쟁 중에는 온갖 일들이 일어나는 법이다. 벨레트를 지휘관으로 두고 있는 가장 막강한 세력이 가르그 마크를 차지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만큼 정찰은 이 군대에 필수적인 일이었고, 베르나데타 역시 당번을 맡아 참여하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을 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며칠 전에 나간 정찰대가 길 한복판에서 쓰러진 채 발견된 탓이었다. 아마 특수한 마법 용구를 숨겨놨던 것 같다는 보고는 베르나데타를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불안감 속으로 떠밀었다. 타인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만큼, 그 사람을 잃는 것은 더욱 고통스러운 법이었다.
“베르가 괜한 걱정을 했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선생님인데.”
“걱정해줘서 고마워.”
놀란 베르나데타가 고개를 들었지만 벨레트는 이미 베르나데타의 옆자리에 앉은 뒤였다. 화들짝 놀라며 옆으로 몸을 비켰다. 하지만 그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하늘을 봐.”
베르나데타도 시선을 돌렸다. 오전 중에 비가 내리고서 맑게 갠 덕분인지, 밤하늘에 무수히 많은 별이 빛나고 있었다.
“와, 오늘은 별이 많이 떴네요! 예쁘다.”
“혼자 보기 아까웠어.”
적막한 가르그 마크에 두근거리는 소리만 울리는 것 같았다. 여러 가지 방향으로 마구 질주하는 생각 때문에 눈이 핑핑 도는 듯했다. 차마 고개를 돌릴 수가 없게 된 베르나데타는 슬쩍 눈길만 옆으로 주었다. 언뜻 보기에 벨레트가 미소 지은 것도 같았다. 밤바람은 차가웠지만 볼은 후끈거렸다.
“사, 사실은요, 선생님을 기다렸어요. 선생님이 안 오시면 어떡하지 걱정이 돼서…….”
“난 언제나 돌아올 거야.”
뻣뻣하게 고정하고 있는 옆얼굴에 시선이 느껴졌다. 얼굴이 붉어진 게 들킬 것 같았지만 마냥 피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 고개를 돌렸다. 어렴풋하기만 한 빛 속에서도 아름다운 옥색 머리카락에 잠시 눈을 빼앗겼다. 그리고 마주한 눈에서, 베르나데타는 어떤 감정을 읽었다.
확신이 들지 않았고,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수치스러움마저 몰려오는 듯, 얼굴이 점점 뜨거웠다. 막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였다.
“두 번 다시 두고 떠나지 않아.”
벨레트가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베르나데타는 확신했다. 자신에 관한 것은 무엇이든 의심하고 보는 그녀라도 벨레트가 하는 말은 전적으로 믿을 수 있었다. 왈칵 눈물이 터졌다. 동시에 튀어나오려는 진심을 꾹꾹 눌러 삼킨 뒤, 베르나데타는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벨레트의 손을 맞잡았다.
그때는 그게 별로 중요한 것 같지 않았다. 머리를 좀 자르러 미용실에 가는 일은 일상의 범주에 속하는 일이며, 그 김에 염색을 하든 파마를 하든 그때의 기분에 따르는 법이었다. 하지만 지금 코우노 나츠키에게는 인생의 중대사가 결정되는 것만큼의 중요도를 가지는 일이었다. 어떻게 해야 잔뜩 상해 지저분해진 긴 머리에서는 벗어나면서 일명 거지 존이라 불리는 어중간한 짧은 머리는 피할 수 있는지가 문제라면 문제였다. 어중간한 길이를 고수하느니 파마를 하는 게 나을 수도 있겠으나 며칠도 못 가 풀려버릴 걸 생각하면 그도 답이 아니었다. 꼭 체한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고장이 났는지 온도가 제멋대로 계절을 넘나들던 헤어 아이론이 결국은 사달을 내서 머리 중간을 태워 먹은 일만이 꼭 이유는 아니었다. 밤새 시끄러운 옆집 사람들 때문에 잠을 설쳤기 때문만도 아니었고, 방 청소를 하던 중에 손톱 끄트머리가 갈라진 것을 발견했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한창 이력서를 넣느라 정신이 없을 때였지만 꼭 그래서만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나츠키를 짓눌렀다. 한 가지만 있어도 신경을 거스를 법한 사안들이 동시에 벌어지면서 짜증은 배로 치솟았다.
이 짜증이 터져 나오지 않은 것은 온전히 데이트 약속 덕이었다. 남자친구의 스케줄에 맞추어 늦은 저녁으로 약속을 잡았기에, 몇 달 치 스트레스를 한껏 몰아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시간상으로는 여유로웠다. 추스르지 못한 감정 대신 머리부터 수습하고자 미용실에 올 정도의 심적 여유도 존재하기는 했다. 하지만 예약 없이 찾아온 손님에게 주어진 기나긴 대기시간은 새끼손톱만 하던 여유조차도 앗아갔다. 머리에는 아직 손도 대지 않았건만 약속 시각이 성큼 코앞으로 다가온 탓이었다.
차라리 오늘은 만나지 말고 내일 보자고 할까?
이쯤 되니 절로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남자친구가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여기서 데이트 약속을 취소했다가는 남은 시간마저 우울함의 바다에서 헤엄칠 게 뻔했다. 그러다 또 이런 꼴로 만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불쑥 자리를 차지했다. 머리가 이런 꼴이든 말든 남자친구는 보고 싶었지만, 바로 그 사람이 남자친구이기 때문에 ‘이런 꼴’을 보여주고 싶지 않기도 했다.
결국 답을 내리지 못한 채 십여 분의 시간이 더 흘렀다. 괜히 껐다 켰다를 반복하던 메시지 앱에서 새 메시지가 떠올랐다. 예정대로 퇴근한다는 메시지가 반가운 것인지 우울한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동시에 미용사가 나츠키를 불렀다. 나츠키는 빠르게 답장을 보냈다.
「미용실이라 좀 늦을 것 같아. 미안.」
오전 중에, 그리고 이른 오후에 있었던 일을 이미 전해 들었으니 미용실에 남자친구가 올 것은 이미 예상한 바였다. 하지만 그 외의 어떤 것도 예상과 달랐다. 결국 의도했던 머리 길이보다 더 많이 머리를 잘라야 했던 점도 그랬고, 그 모습이 생각보다 더 많이 낯설어서 서러워진 점도 그랬다. 이런 머리 모양과 이런 기분으로 남자친구를 봐야 한다는 점은 더더욱 그랬다. 머리카락과 함께 마음도 좀 가다듬고 새로운 기분으로 데이트를 하고 싶었는데 현실은 정반대였다.
“유시.”
결국은 눈물이 터졌다. 미용실 앞 벤치에서 기다리고 있던 오시타리 유시는 미용실의 입구를 나서자마자 울음을 터뜨리는 자신을 보고도 딱히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던 그가 자연스레 품으로 나츠키를 끌어당겼다.
“오늘 힘들었제?”
“짜증 나, 다 서러워.”
“괘안타.”
어쨌든 미용실에서는 정성스레 드라이까지 해주었고, 이를 알아차린 것인지 오시타리는 평소 하던 대로 머리를 토닥이는 대신 어깨를 토닥였다. 나츠키는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훌쩍였다. 평소와 같은 온기가 안심이 되었고, 어쩐지 눈물이 더 쏟아졌다. 아무 말 없이 큰 손으로 도닥이는 속도가 심장 박동이랑 비슷한 것 같았다. 반복적이고 단조로운 리듬은 안정감을 되찾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안 괜찮아, 머리가 이게 뭐야.”
“와, 맘에 안 드나?”
“몰라. 그것도 모르겠어.”
오시타리의 손에는 언제꺼냈을지 모르는 손수건이 들려 있었다. 눈물을 닦아내는 손길이 하나하나 섬세해, 새삼스레 이런 사람이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날도 있는 기제. 남친 뒀다 뭐 하노. 이럴 때 안아 달라 카고, 하소연 들어 달라 카고, 맛난 거 먹자 카고 그러는 기래이.”
나츠키가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오시타리는 한 번 더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마주 끌어안자, 가슴에 걸려 있던 답답한 것이 함께 사라지는 것 같았다. 단숨에 녹아내릴 짜증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하소연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길은 뚫린 셈이었다.
“온종일 하소연 들어줄 거야?”
“마, 말만 하래이.”
피식 웃는 오시타리를 보고 같이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이미 한 번 터진 감정이라 눈물이 계속 뚝뚝 떨어졌지만 상관없었다. 오시타리의 말대로, 맛있는 걸 먹고 하소연을 하고 난 뒤에는 꼭 안아 달라고 할 것이다. 그게 이 순간의 가장 올바른 해결책이었다.
“일단, 이 머리가 예쁘다고 해줘.”
“물어 뭐 하노. 내 눈에는 맨날 예쁘다 안 카나.”
“그치만 취향이 아니면 어떡해.”
“내는 늘 낫쨩이 취향이었데이.”
만족할 만한 대답이었다. 오시타리의 손수건으로 눈물을 마저 훔쳐낸 나츠키의 얼굴이 미소로 밝았다.
‘치사하다’는 단어의 선택이 참 그다워서 야규는 풋 웃고 말았다. 동시에 그 말이 어느 정도는 맞는 것 같아 또 웃음이 났다. 제 여자 친구인 토와는 취하면 평소의 배로 귀여웠고, 마음을 표현하는 데도 솔직해지니 야규로서는 나쁠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토와의 표현을 빌려 ‘술을 궤짝으로 들이켜도’ 취하지 않는 야규는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이른바 ‘풀어진 모습’을 원하는 토와에게 보답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술을 잘 마셨대요? 위장에 술 대신 마시는 괴물 같은 거 있는 거 아냐?”
“그럴 리가요. 그리고 지금은 전보다는 주량이 좀 줄었는데요.”
“거짓말! 야규상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쳐다보던 토와가 금세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디서 거짓말을’이란 말이 담긴 눈빛에 야규는 다시 웃으며 한 모금을 머금었다. 실제로 주량은 약간이지만 줄었다. 아마 한동안 업무가 바빠진 탓에 술을 입에도 대지 않은 기간이 길어진 게 원인일 것이다. 남들에게는 티도 나지 않을 만큼이지만 당사자는 알았다. 술고래들만 모여 있는(키리하라를 제외해야겠지만) 릿카이 테니스부의 회식에 가면 자연스레 알 수 있었다.
“요컨대 취한 게 아니라 취해서 풀어진 모습이 보고 싶으신 것 아닙니까?”
“같은 말 아니에요?”
“취하지 않더라도 풀어진 모습은 보여드릴 수 있는데요.”
연신 웃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잔뜩 찡그린 토와의 미간이 돌아올 줄을 몰랐다. 야규는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검지로 가볍게 토와의 미간을 눌렀다.
“인상 펴시지요.”
“야규상이 자꾸 이상한 소리 하잖아.”
“별로 이상한 소리는 아닙니다만. 전 지금도 충분히 풀어져 있습니다.”
중학생 시절의 야규라든가, 혹은 갓 대학생이 된 야규라든가, 아무튼 이전의 제가 보면 놀라서 말을 잃어버릴 만한 변화라고 생각했다. 편안한 옷을 입고 연인의 옆에 앉아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으면서 홀짝홀짝 술을 들이켜는 시간. 아무것도 고민하지 않고, 어떤 목적도 없이 그저 순간에 충실한 시간을 보내며 웃는 자신을 향해 과거의 자신은 뭐라고 할지 궁금했다. 과연 그 과거의 자신도 다람쥐같이 작고 귀여운 이 사람을 보고 같은 생각을 할지 궁금했다. 그리고 문득,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은 온전히 제 것이군요.”
뜬금없는 소리에 의문을 던지는 눈빛도, 술기운에 발그레 달아오른 볼도, 막 술을 마신 탓에 촉촉하게 빛나는 입술도, 잔을 놓지 않아 더 차가워졌을 손도 전부 나의 것.
“뭐래요?”
“과거의 저에게도 토와를 양보하고 싶지 않다는 걸 깨달아서요.”
“야규상, 취했어?”
“글쎄요.”
“왜 갑자기 그런 소릴 해요?”
토와의 입가로 다가오는 잔을 손바닥으로 막고, 야규는 그 잔을 빼앗아 들었다. 마지막 남은 한 모금을 머금자 불만을 토로하는 소리가 올라왔다. 하지만 그 이상의 반응은 없었다. 토와의 취기가 딱 적당히 오른 것을 알기에, 야규는 망설임 없이 입을 맞추었다.
입을 떼며 토와의 턱을 타고 흐르는 술을 손가락으로 닦아냈다. 그때까지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야규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고 있던 토와의 얼굴이 급격하게 달아올랐다. 술독이 오른 것과는 분명 다른 붉은 색이었다.
“뭐, 뭐, 뭐, 뭐예요?”
“토와,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아니, 그건, 어, 그건…… 나, 나도, 뭐, 사랑해요.”
쿡쿡 낮게 웃던 야규가 그대로 토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웃느라 어깨가 들썩이는 통에 어정쩡하게 그를 끌어안은 토와의 얼굴도 덩달아 흔들렸다.
“왜 웃어요?”
“귀여워서요.”
“지금은 야규상이 더 귀여운데.”
“그렇습니까? 그럼 어쩌면 오늘은 치사하지 않은 걸 수도 있겠군요.”
웃음이 잦아들자 토와가 야규의 어깨를 밀어냈다. 순순히 몸을 일으키면서 바라본 토와는 황당하면서도 웃긴다는 표정이라 피식 또 웃음이 났다. 시계가 이제 막 열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야규는 토와의 왼손에 깍지를 꼈다. 손끝이 차가웠고, 손바닥이 물기 때문에 약간 축축했다. 손가락 위로 가볍게 입을 맞추자 토와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야, 지금 나한테 귀여움 어필하는 거예요?”
“당신의 생일을 맞이하는 소소한 선물이라고 해 두지요. 유혹이라고 해도 좋고요.”
“미쳤나 봐.”
그런 소리를 하면서 토와도 키득키득 웃었다. 자잘하게 몇 번 더 토와의 이마에, 콧잔등에, 입술에 입을 맞추며 자연스레 야규는 테이블을 밀어냈다. 축하해야 할 생일이 이제 막 시작된 참이었다.
무심코 입으로 다가오는 손을 억지로 내려놓았다. 북이라도 치는 듯 쿵쿵 울리는 심장 소리에 맞추어 작은 발이 방 안을 바쁘게 오갔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심장은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고, 새하얗게 변해버린 머릿속에서 온갖 종류의 마법이 터지는 것 같았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당장이라도 자신의 평화로운 공간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 평화로운 공간은 이제 한 사람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곧바로 깨달았다. 비명이 되지 못한 신음이 간신히 입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어쩔 줄을 모르고 공기를 쥐어뜯던 손이 결국 머리카락을 막 붙잡았을 때였다.
“베르쨩, 준비됐어?”
“도로테아~!”
빼꼼 열린 문 사이로 도로테아의 얼굴이 나타났다. 구석을 향하던 베르나데타의 발걸음이 빠르게 곧장 문으로 향했다. 반사적으로 활짝 문을 연 도로테아의 품으로,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베르나데타가 뛰어들었다. 졸지에 허리를 꽉 붙잡힌 도로테아는 사람을 부르는 대신 베르나데타의 어깨를 부드럽게 다독였다.
“어머, 왜 그래? 왜 울상이야? 뭐 잘못됐어? 누구야? 누가 감히 우리 베르쨩의 결혼식을 망치려고 해?”
“어, 어떡하지? 사실은 이게 전부 다 거짓말인 거 아닐까? 그래, 말도 안 돼, 베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휴…… 휴베르트 씨랑 결혼을 한다니! 하지만 휴베르트 씨가 베르에게 청혼을 했는데…… 헉, 그것도 사실은 다 전략……”
“베르쨩! 진정해! 그럴 리가 없잖아!”
억지로 베르나데타를 떼어낸 도로테아가 얼굴을 마주 보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이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긴 한숨을 뱉은 도로테아는 아예 문을 닫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당장이라도 거품을 물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는 베르나데타를 의자에 앉혀놓고, 그녀 역시 의자를 끌어다 맞은편에 앉았다. 다행히도 주머니에 손수건이 들어 있었다. 손수건 자락으로 베르나데타의 눈물을 조심조심 훔쳐냈다. 코를 훌쩍이는 베르나데타의 표정은 결혼식을 앞둔 신부의 표정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그래, 두 사람이 결혼한다고 해서 나도 놀랐어. 그건 인정해. 하지만 잘 생각해 봐. 다른 사람도 아니고 휴베르트 폰 베스트라가 장난으로 청혼을 할 것 같아?”
“그, 그치만 전략적인 이유라면……”
“베르쨩,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그런 생각은 꿈에서도 하지 마. 만약 정말 그런 이유로 청혼한 거면 내가 당장 가서 목을 졸라버릴 거야.”
“헉, 그, 그건 좀……”
“자신감을 가져. 휴군이 베르쨩 볼 때 어떤 표정인지 몰라? 에델쨩도 혀를 내두를 정도라니까.”
잠시 생각에 잠긴 베르나데타의 표정이 다시 우울했다. 도로테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휴군 표정이 좀 무섭긴 하지. 그럼 이렇게 생각하자. 베르쨩은 휴군을 사랑해?”
“응.”
짧고도 확실한 대답이었다. 베르나데타로서도 이토록 확고하게 대답을 한 사실이 놀라웠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도로테아를 쳐다보자, 그녀 역시 마찬가지의 감상인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이내 초승달처럼 눈이 휘어졌다. 미모만큼이나 빛나는 미소를 지으며, 도로테아가 베르나데타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럼 뭐가 걱정이야! 이젠 못 무른다고 하면서 영원히 남편으로 만들어버리면 되는 거야!”
“그, 그런 거야?”
“응, 그런 거야. 그러니까 이제 나가자. 신랑 목 빠지겠어.”
볼이 발그레 달아오른 베르나데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신부 얼굴이 이게 뭐냐는 잔소리를 속사포로 내뱉으면서, 도로테아는 손수건으로 부드럽게 베르나데타의 얼굴을 문댔다. 이어 화장대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도구들이 도로테아의 손으로 들어왔다. 베르나데타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눈을 감았고, 또 눈을 떴다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연신 얼굴 위로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베르나데타가 거울을 마주했을 때, 눈물 자국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다음에는 머리였다. 삐죽삐죽 솟은 머리가 물 몇 방울과 정성스러운 빗질로 예쁘게 가다듬어졌다. 마지막으로 드레스의 맵시까지 만족스럽게 정리하고서야 도로테아는 문을 열었다. 신부 베르나데타가 등장할 시간이었다.
“가자.”
“으, 응.”
긴장한 탓에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베르나데타는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었다. 도로테아의 손을 꼭 잡고 복도로 나와 계단을 향해 걸었다. 계단 아래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들이 겨우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다. 침을 몇 번이나 삼키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마침내, 계단을 다 내려가자 열려 있는 문 안쪽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연회장이 보였다. 당장이라도 심장을 뱉어낼 것 같았지만 도로테아의 손을 떨어져라 꽉 붙잡고 버텼다.
“자, 신부가 왔어요~”
모두의 시선이 한꺼번에 꽂히는 게 느껴졌다. 그중에서 하나의 시선을 골라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베르나데타는 평소와는 다르게 예복을 갖춰 입은 휴베르트를 바라보았다. 가슴에는 베르나데타가 자수를 놓은 손수건을 꽂고 있었다. 평소와 똑같이, 웃는 듯 아닌 듯 미묘하게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것을 보고 나니 어쩐지 안심이 되기도 했다.
휴베르트가 도로테아에게 가벼운 묵례를 하고, 베르나데타의 손을 건네받았다. 베르나데타는 휴베르트의 맨손을 잡은 것이 언제인지 문득 되짚었다. 조금은 서늘한 손에서 규칙적인 박동이 느껴졌다. 조금 빠른 그 박자가 자신의 것과 속도가 비슷해 괜히 웃음이 나려고 했다.
분명 그런 말을 하기는 했었다. 이것은 결코 강요가 아니며, 마음이 가는 대로 답을 하면 된다는 말로 청혼을 한 휴베르트는 베르나데타가 눈물을 쏟아내며 고개를 끄덕인 뒤에 그런 말을 덧붙였다. 아니, 에델가르트에게 결혼하기로 했다고 보고하러 간 뒤에 했던 말 같기도 했다. 혹은 결혼식 날짜를 정하던 날에 들은 말인지도 몰랐다. 언제나 부정적인 쪽으로 격렬하게 돌아가는 베르나데타의 머리가 평소와 같이 극단적인 결론을 내렸다.
“헉, 베르가 도망치기를 바라셨……”
“결코 아닙니다. 귀하가 와주어서 기쁘다는 뜻입니다.”
휴베르트가 웃었다. 베르나데타의 말을 중간에 잘라먹기까지 하면서 내비친 그 웃음에, 베르나데타는 십 여분 전의 자신을 떠올렸다. 정체를 알 수 없던 불안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또한 베르나데타를 보고 안심한 게 분명했다.
“휴베르트 씨도 베르 못지않게 겁쟁이네요.”
“큭큭큭, 그렇습니까? 그런 말은 처음 듣는군요.”
“조금 전까지 휴베르트가 어떤 표정이었는지 보여주고 싶어지네.”
풋 웃은 에델가르트가 한마디를 거들자, 연회장은 금세 왁자지껄해졌다. 저마다 휴베르트가 어쨌네, 조금 전에 무슨 소리를 했네, 표정은 어땠네 떠들어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제국의 궁내경을 놀릴 기회는 그리 많지 않은 법이었다. 말리기를 포기한 휴베르트가 한숨을 뱉어냈다. 베르나데타는 금세 미간에 주름이 잡힌 휴베르트를 올려다보며 쿡쿡 웃었다.
“베르가 안 올까 봐 걱정했군요.”
“타당한 염려였다고 생각합니다만.”
“에이, 왜요. 좋아한다고 고백은 베르가 먼저 했잖아요. 휴베르트 씨가 여러 번 도망치라고 했는데도 안 도망가고 옆에 붙어 있었는데요.”
“사람의 마음은 바뀌기도 합니다.”
“맞아요. 그러니까 휴베르트 씨를 좋아하죠. 베르는 휴베르트 씨가 무서웠는걸요.”
대답할 말이 없는지 휴베르트는 입을 다물었다. 휴베르트를 놀리는 것인지, 휴베르트와 베르나데타의 결혼을 축하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자기들끼리 떠드는 것인지, 연회장에 모인 친구들은 시끄러웠다. 꼭 사관학교 시절의 흑수리반 같았다.
“행복해요.”
“저도 그렇습니다.”
여전히, 반쯤은 무섭고 반쯤은 사랑스러운 미소를 보며 베르나데타는 웃었다. 예복 외에 어떠한 격식도 갖추지 않은 결혼식은 이제 막 시작된 참이었다.
종이가 꾸깃꾸깃 구겨지는 소리와 어울리는 한 마디였지만, 그 대신 오독오독 과자를 깨물어 먹는 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팔미라에서 공수해 온 귀한 열매를 넣어 구웠다면서, 주방장이 뿌듯한 얼굴로 건네준 것이었다. 그 열매가 무엇인지는 묻지 않았지만 귀한 맛이기는 했다. 단맛에 깐깐한 리시테아 폰 코델리아가 만족하며 먹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짜증은 과자가 아니라, 함께 건네받은 편지에서 비롯됐다.
“애정의 입맞춤을 담아? 뭘 담았다는 건지 정말.”
주방장이 본 적도 없는 열매를 과자 반죽에 첨가한 것은 애초에 그의 뜻이 아니었다. 드래곤을 타고 가르그 마크로 날아오면서 등짐에 그 ‘귀한 열매’를 한 자루씩이나 실어 온 인간의 간곡한 부탁(리시테아가 아는 그라면 온갖 회유와 협박도 덧붙였겠지만) 때문이었다. 덕분에 맛있는 간식을 얻게 돼서 기쁘긴 했지만 그렇다고 불만이 사그라들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불이 붙었다.
“이런 편지 한 장에 담을 바엔 나한테 직접 하면 되잖아!”
그러니까 결국 문제는 클로드 폰 리건에게 있었다. 팔미라에서 가르그 마크까지 날아왔으면서 아직도 저를 만나러 오지 않는 클로드, 늘 장난처럼 애정을 고백하는 클로드, 여태까지 입 한 번 맞춰오지 않는 클로드, 클로드, 클로드 폰 리건! 울컥 치미는 감정을 실어 과자를 으득으득 깨물었다. 와중에 이 사이로 뭉개지는 열매가 달고 달아 더욱 화가 났다. 어째서 구애로 보이는 모든 행동을 하면서 연인‘만’ 할 수 있는 행위에는 이리도 무지한지. 좋아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여전히 어린아이 취급을 하는 게 아닐지 의심하는 것도 당연했다.
“바보 같아, 정말.”
“그건 내 얘기인가?”
‘원탁의 귀신’이던 이가 아니랄까 봐, 아무튼 나타나는 시점만큼은 귀신같았다. 문틈으로 쏙 들이민 얼굴이 미워서 리시테아는 흥, 일부러 크게 코웃음을 쳤다.
“쓸데없이 회담이 길어져서 말이야. 로렌츠 녀석이 말꼬리를 좀 많이 잡아야지.”
“그 전에도 시간 있었을 텐데요.”
“아…… 그게.”
멋쩍은 듯 볼을 긁적이던 클로드의 시선이 탁자 위의 과자 접시에 닿는 게 보였다. 동시에 반색하는 얼굴도 한눈에 들어왔다.
“과자는 맛있었나 보네. 팔미라의 과일도 나쁘지 않지?”
“말 돌리지 말아요. 또 그렇게 피하려고요?”
“이런, 오늘은 넘어가 주시지 않으려는 모양이군.”
하하, 웃어넘긴 클로드가 자연스레 탁자를 사이에 두고 리시테아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때까지도 리시테아의 표정은 나름대로 험악했다. 어디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심정을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는 중이었다. 하지만 쉽게 기가 죽을 클로드가 아니었다. 그는 사관학교 시절부터 유명한 달변가였다.
“넌 단것을 좋아하고 과자도 좋아하지. 오늘 들고 온 과일은 팔미라에서 제일 달기로 유명해. 과자로 만들면 딱이다 싶었는데 주방장님이 워낙 고집이 세셔야지. 요리할 게 산더미다, 요리법도 모른다, 이러쿵저러쿵…… 애걸복걸하다 보니 시간이 다 됐지 뭐야. 기사 한 명이 찾으러 내려오기까지 했다고.”
“그게 절 보러 오는 것보다 더 급했다고요?”
“아니, 아니야, 내가 잘못했으니까 마법은 쓰지 말고. 응? 깜짝 선물로 주고 싶어서 그런 게 당연하잖아. 회담이 끝나면 짠! 하고 등장해서 주고 싶었다고. 바보 같았던 것도 인정해. 다음부턴 꼭 가장 먼저 보러 올게.”
당황한 표정이었다가 금세 눈을 찡긋해 보이는 클로드를 보고 리시테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말투가 가뜩이나 심란한 리시테아의 마음을 휘저어 놓았다. 도대체 이런 사람을 왜 좋아하기 시작한 것인지, 하다못해 고백은 왜 받아줬는지, 과거의 자신을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클로드, 아직도 제가 어린아이 같나요?”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그렇게 달래듯이 말하지 마세요. 제가 마냥 동생 같아서 좋다고 하는 거예요?”
리시테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가뜩이나 이런 상황에 울음을 터뜨리기는 싫었다. 속상한 티를 내기는 더욱더 싫었다. 논리정연하게 다듬어진 말로 따져 묻고 진실만 담은 담백한 답을 듣고 싶었다. 소중한 감정이기에, 순간의 감정에 휘둘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지 않다는 건 리시테아, 네가 더 잘 알지 않아?”
장난기가 싹 사라진 클로드의 얼굴을 보고도 가슴이 마구 요동쳤다. 평소보다 낮은 어조와 담담한 말투도 충분한 위로가 되지 않았다. 리시테아는 두 손을 꼭 그러쥐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좋아한다면서, 고백까지 해놓고서 왜 아무것도 안 하는 거죠? 손도 잡지 않고, 안으려고 하지도 않고! 나한테 할 입맞춤을 왜 편지에 담느냐고요!”
숨도 제대로 쉬지 않고 뱉어낸 탓에 리시테아는 자기도 모르게 씩씩거렸다. 어깨가 크게 들썩이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귓속에서 북을 치듯 박동 소리가 요란했다. 그 시끄러운 숨이 차분히 가라앉는 동안에도 클로드는 답이 없었다.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클로드가 느리게 시선을 옮겼다. 리시테아를 똑바로 마주치던 눈이 탁자 위로 향했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렇게 몇 분이나 멈춰 있었을까, 그가 한 손으로 얼굴을 세게 쓸어내렸다. 어쩐지 볼이 좀 붉어 보였다.
“잠깐만, 리시테아. 우리 사이에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뭐가 오해라는 거죠? 역시 당신과 제가 말하는 ‘좋아한다’는 다른……”
“아냐, 그 부분에서는 난 진심이야. 네가 말하는 그 의미로 널 좋아한다고. 처음 고백했을 때도 그랬잖아, 너를 평생의 반려로 맞이하고 싶다고.”
클로드는 리시테아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연거푸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해댔는데, 그럴수록 얼굴이 차츰 붉어지고 있었다. 마음이 좀 누그러진 리시테아는 하얗게 질린 주먹을 슬그머니 폈다. 덩달아 열이 오르기 시작한 볼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홧홧한 게 조금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왜 연인의 단계를 밟지 않는 거예요? 역시 날 여전히 어리다고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니고요?”
“전혀 아니야. 솔직히 말하자면 하고 싶지. 손도 잡고 싶고, 안고 싶고, 입도 맞추고 싶다고. 젠장, 왜 이런 소릴 하고 있는 거람. 누구보다도 너를 한 사람으로 보고 있으니까 더 소중히 하고 싶었던 것뿐이야.”
이제 클로드의 얼굴은 누가 봐도 붉었다. 크게 심호흡을 한 그가 겨우 고개를 들었다. 이젠 손등으로 볼을 문대는 리시테아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큼, 괜히 한 번 목을 가다듬는 클로드를 보며 리시테아도 괜한 긴장감에 침을 삼켰다.
“그리고 아까 오해라고 했던 거 말인데, 아직 제대로 대답을 못 들었잖아. 연인이 되기도 전에 그렇게 다가갈 수는 없는 노릇이고.”
“네에?”
긴장감이 깨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리시테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까지 했다. 당황하기는 클로드도 마찬가지였는지, 어깨가 한껏 올라가 있었다. 리시테아는 급하게 자신의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지난겨울에 찾아왔을 때 클로드가 사귀자는 소리를 했다. 그래서 사귀어도 괜찮다고 대답을 했다. 그 이후로 벌써 달이 여러 번 지나갔다.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전 저번에 분명히 괜찮다고 대답했잖아요.”
“하지만 그건 완벽한 동의라기엔……”
보기 드물게 우물쭈물 말을 흐리는 클로드의 모습에 리시테아가 울컥했다.
“애초에 클로드가 먼저 슬슬 사귀어도 되지 않겠냐고 장난처럼 말했으면서!”
그랬다.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가 클로드가 장난처럼 ‘슬슬 사귀어도 되는 거 아니야?’하고 운을 뗐다. 그래서 리시테아도 아닌 척 ‘뭐, 당신이 바란다면 그것도 괜찮겠네요.’라며 대답을 했다.
“아, 이런. 미안. 진짜로 미안.”
클로드가 다시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거칠게 마른세수를 하며 몇 번이고 심호흡을 했다. 리시테아는 어색하게 자리에 다시 앉아서 얌전히 그가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울컥해서 화를 내기는 했지만, 리시테아 역시 장난처럼 대답한 것이 사실이었다.
“처음 고백했을 때 네가 단명할 거라면서 거절했잖아. 그래서 한네만 선생님이랑 린하르트를 철야시키면서까지 노력한 거고. 이젠 문장도 사라졌고, 단명할 이유도 없어. 그런데 여기서 거절당하면 진짜 끝이니까…… 더 노력해서 날 좋아하게 만든 다음에 다시 정식으로 고백할 생각이었어.”
씩 웃으면서 말꼬리를 잡아 진짜냐고 되묻지 않았을 때부터 눈치를 챘어야 했다. 자신이 알던 클로드의 반응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그냥 지나가 버린 몇 달 전의 제가 바보 같았다.
“아아, 정말!”
리시테아는 다시 일어났다. 멀고도 가까운 몇 걸음을 걸어, 클로드의 옆에 섰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뜬 클로드에게 성큼 얼굴을 들이밀었다.
당황한 클로드는 눈도 감지 못했고, 리시테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찰나의 강렬한 입맞춤이었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리시테아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제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화끈거리는 볼은 숨길 도리가 없었다. 여전히 넋이 나가 있는 클로드를 보며 리시테아는 헛기침을 했다.
“이러면 진심으로 대답이 됐나요?”
클로드의 표정이 복잡했다. 기뻐 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혼란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팽팽 돌아가던 머리도 이 순간에는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리시테아는 남은 과자 중 하나를 클로드에게 내밀었다. 홀린 듯 클로드의 손이 그 과자를 건네받았다.
“어…… 어. 응. 네. 아주 명확하게.”
리시테아는 뿌듯했다. 그래서 제게 주는 상으로 남은 과자를 입에 물었다. 오도독, 경쾌한 소리와 함께 입안에서 부스러지는 과자가 더없이 달았다. 더는 쓸데없는 고민으로 화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리고 생각 이상으로, 클로드는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도 확인했기에 행복했다. 순식간에 과자 하나를 다 먹은 리시테아가 손수건으로 입가를 정돈했다.
“좋아요. 그럼 지금부터 나가요.”
“어, 어?”
과자를 손에 쥔 채로, 클로드가 리시테아를 올려다보았다. 이미 자리에서 일어난 리시테아에게 클로드의 대답 따위는 들을 생각이 없었다. 리시테아는 비어 있는 클로드의 손을 붙잡아 일으켰다.
“회담 뒤로 아무 일정 없는 것도 다 알고 있어요. 그동안 괜한 고민 하게 만들었으니까 당신이 책임지고 나랑 시간 보내면서 달래줘야 해요. 알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