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달과 함께 걷는 길
- 창월의 장 기준 EP.13 재회의 여명 ~ EP.18 왕의 개선
- 실뱅이 선생님과 속얘기 하는 내용밖에 없습니다
- 소꿉친구 중심 이야기
“이게 얼마 만이냐.”
대수도원 건물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저곳이 무너져 내리긴 했지만, 여전히 웅장한 자태였다. 실뱅은 고개를 불쑥 들었다. 파란 하늘에 페가수스 한 마리가 둥둥 떠 있었다. 혼자만 감상에 젖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뒤, 그는 또 다른 동행자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이야, 펠릭스, 그때 생각나? 내가 항상 안 나가겠다는 널 끌고……”
“시시한 옛날얘기나 떠들러 온 게 아닐 텐데.”
“동창회잖아, 동창회. 이런 날은 옛날얘기로 꽃을 피워야 제맛이지. 안 그래, 잉그리트?”
“왠지 전하와 선생님도 계실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진짜 시시한 말을 하고 앉았군.”
쯧, 혀를 찬 펠릭스가 휙 앞서나갔다. 하하 웃긴 했지만 실뱅은 잉그리트의 말이 ‘시시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헛될 뿐이었다. 포기가 빠른 편은 아니었지만, 이 문제에는 그러한 답 외에는 찾을 수 없었다. 어릴 적부터 보아온 소꿉친구도, 신기하게 사람의 마음을 여는 재주가 있던 선생님도 이제는 없었다. 5년 전, 제국이 전쟁을 일으킨 이후로 세상엔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실뱅의 세상 또한 변했다.
천천히 말을 몰면서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빙빙 돌고 있던 잉그리트가 페가수스를 몰고 훅 날아갔다. 동창을 발견한 모양이라고 멋대로 단정한 실뱅은 고삐를 고쳐 쥐었다.
“혼자 막 가버리네. 따라가자, 펠릭스.”
“흥.”
코웃음을 치면서도 펠릭스는 착실하게 속도를 올렸다. 아까보다 훨씬 작게 보이는 페가수스를 눈으로 좇으며 실뱅도 그 뒤를 따라갔다. 대수도원의 정문 방향과 약간 틀어진 탓에 신경이 쓰였다.
그쪽에 뭐가 있더라?
펠릭스가 기억하고 있을까 입을 떼려는 찰나였다. 순식간에 몸집을 키운 페가수스가 어느새 그들의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잉그리트의 얼굴은 경악에 물들어 있었다.
“저기에…… 저기, 저쪽에……”
“뭐야, 귀신이라도 봤어?”
“서, 선생님이랑… 전하가… 누군가랑 싸우고 있어.”
실뱅은 미간을 찌푸렸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것 같았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뭐라고 말을 하고 싶은데 입을 열면 숨이 턱 막힐 것만 같았다.
“어이가 없군. 착각을 해도 어떻게……”
“아니야, 그 머리색을 어떻게 착각해? 선생님이 아닐 리가 없어. 그건 분명 선생님이야. 그리고 그 몸집에 창을 쓰는 솜씨 하며, 분명히 전하라고.”
“진짜 뭘 잘못 먹기라도 했나 보군.”
펠릭스의 말에 겨우 정신이 들었다. 실뱅은 씨익 웃었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장난스럽게, 밝게 웃었다.
“가서 확인해보자고. 진짜면 감사한 일이고, 아니어도 어쩔 수 없지. 그리고 누구랑 싸우고 있다며? 도와줘야 할지도 몰라.”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잊은 듯한 잉그리트가 급하게 다시 날아올랐다. 실뱅도, 펠릭스도 급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날아가는 속도에 맞추느라 한껏 말을 재촉했다.
*
“선생님…… 역시 살아 계셨군요……!”
잉그리트가 굳이 말하지 않았더라도 실뱅은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머리색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 몇 안 되고, 그중 하나는 선생님이었다. 손에 쥔 검 또한 그들이 익숙하게 보아온 ‘천제의 검’이었다. 심지어 옆에 선 사람은 정말로 디미트리 전하였다. 아무렇게나 자라서 엉망이 된 머리도, 눈 한쪽을 가리고 있는 검은 안대도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잉그리트의 말이 맞았다. 그런 덩치에 그렇게 창을 쓰는 사람은, 그것도 성인 남성으로 보이는 상대방을 짐짝처럼 휙 들어다 집어던지는 괴력의 소유자는 세상에 디미트리 알렉산드르 블레다드 한 명뿐이었다.
“어쨌든 지금은 도적을 물리칩시다!”
이어진 한 마디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실뱅은 창을 고쳐 쥐었다.
“너희……”
디미트리와 눈이 마주쳤다. 실뱅은 이를 악물었다.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도적의 검을 피해내고 창을 휘둘렀다.
제발, 지금은 전투에 집중하자고요, 전하. 안 그러면 지금 당장 울어버릴 것 같으니까.
*
별은 반짝였고 바람은 차가웠다. 고티에령에 비하면 시원한 수준이지만 겉옷 하나 걸치지 않고 나올 만한 시간은 아니었다. 몇 군데 피워놓은 횃불은 겨우 방향이나 알려주는 정도였지만, 실뱅은 신경 쓰지 않았다. 터벅터벅 걷다 보니 어느새 5년 전의 교실 앞에 서 있었다. 멍하니 교실 입구를 쳐다보고 있자니 새록새록 그때가 떠올랐다.
실뱅은 교실 입구를 마주 보고 있는 기다란 의자에 털썩 앉았다. 등받이에 툭 등을 기대니 어슴푸레 교실 안이 보이는 듯도 했다. 깊은 한숨이 적막한 대수도원을 울렸다. 동시에 옅은 김도 피어올랐다가 흩어졌다.
영영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사람들이 살아 있었다. 심지어 자신의 눈앞에 있었고, 지금도 벽 너머 어딘가의 방에 있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쉽게 얘기해서 기뻐야 했다. 하지만 실뱅은 혼란스러웠다. 너무 기쁜 나머지 머리가 제구실을 못 한다고 보기에는 무언가 달랐다.
실뱅 조제 고티에는 어릴 적부터 사람을 믿지 않았다. 그런 그가 마음을 열었던 상대는 고작해야 한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마저도 한 사람은 더스커의 비극 때 많은 이와 함께 세상을 떠났다. 디미트리, 펠릭스, 잉그리트. 실뱅에겐 그 셋만이 친구였다. 가볍게 말을 섞는 동료도, 가볍게 입을 맞추는 연인도 많았지만 어디까지나 그 수준에 그쳤다. 사관학교에 와서도 누군가에게 이해를 받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마음을 열 생각도 없었다. 실뱅은 사람을 믿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무표정한 데다 감정 표현도 드물고, 희귀한 문장을 가졌으면서도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는 용병 출신의 선생님은 예외였다. 사관학교에서 보낸 시간이 1년이 거의 다 되어갈 무렵, 실뱅은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 손으로 꼽아야 하는 친구에 이제 선생님도 포함이 되었다.
그러기가 무섭게 선생님이 사라졌다. 전투 중 행방불명이란 건 결국 죽었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실뱅은 고티에령으로 돌아가면서 속으로 여신을 저주했다.
이렇게 금방 데려가실 거면 마음 열 만한 상대는 왜 주신 건데요.
그렇게 여신을 저주한 탓인지, 전황은 왕국에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러더니 왕도에서 섭정 루퍼스를 살해한 죄라며 디미트리가 붙잡혔다. 처형까지는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고 했다. 실뱅은 다시 저주했다.
그 녀석이 뭘 그렇게 잘못해서 데려갑니까. 나한테 얼마 있지도 않은 사람들을 왜 자꾸 데려가시냐고요.
세간에는 디미트리가 살아 있다고 믿는 사람이 많았다. 코넬리아가 시신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실뱅은 그런 가느다란 희망에 매달릴 만큼 튼튼하지 않았다. 그래서 포기했다. 깨끗이 단념했다. 그렇지 않아도 폐쇄적으로 닫아걸고 있던 마음속 빗장을 다시는 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여기서 뭐 해?”
예상치 못한 말소리에 실뱅은 거의 퉁겨져 나오듯이 벌떡 일어나 싸울 자세를 취했다. 이 본능적인 움직임에 상대방이 뒤로 슬쩍 물러났다. 저 멀리서 일렁이는 횃불 덕에 다행히 상대를 알아볼 수는 있었다.
“선생님.”
침을 꿀떡 삼키고 실뱅은 몸에 힘을 풀었다.
“밤도 늦었는데 들어가서 쉬지 그러세요?”
“실뱅이야말로.”
실뱅이 다시 의자에 몸을 기대자, 선생님도 그 옆자리를 차지했다. 나란히 앉아서, 두 사람은 함께 수업을 하던 교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 년 동안, 어떻게 지냈습니까?”
“자고 있었어.”
“하.”
무심코 터져 나온 그 소리가 선생님에게는 어떻게 들렸을지 알 수가 없었다. 어이가 없었고, 황당한 나머지 말문이 막혔다. 옛날부터 비밀이 많은 사람인 건 알았지만 속이 꼬였다. 실뱅은 5년 전 자신의 뒤통수라도 때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진짜 살아 있긴 한 겁니까? 제국의 첩자는 아니고?”
“날 깨운 사람이 오늘이 천년제 날이라고 하더라.”
“농담은 정도껏……”
“진짜야.”
마주친 시선이 옛날과 똑같이 올곧았다. 가끔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투명하고, 맑은 눈이었다. 실뱅은 그래서 얼굴을 마주보기가 힘들었다. 어쩐지 거울 같은 그 눈에, 제 엉킨 속이 비치는 것 같았다.
“난 진짜 선생님을 모르겠습니다.”
대답은 없을 것이라고 멋대로 예상하며 실뱅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두운 가운데도 이상하리만치 빛나는 눈이 저를 쫓는 게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고 싶기도 했고, 그러고 싶지 않기도 했다.
“실뱅은 잘 지냈어?”
그 질문이 실뱅의 발을 붙잡았다.
무슨 대답이 듣고 싶어요, 선생님?
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실뱅은 휙 뒤로 돌았다. 그리고 씨익 웃으며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뭐 그럭저럭 지냈죠. 왕국 얘기는 아까 들었으니 아실 테고, 그래서 저도 영지 지키느라 전투에 계속 끌려다니는 처지입니다.”
“힘들었겠다.”
“하하, 예나 지금이나 한 마디로 속을 후벼 파신다니까.”
그러니까, 왜 갑자기 나타나서 겨우 잠재워놓은 속을 뒤집어놓느냐고요, 선생님.
“먼저 들어갑니다. 밤바람 차니까 들어가세요.”
얼른 뒤돌아 발을 재촉했다. 꽉 깨문 입술에서 비릿한 맛이 났다. 자꾸 그를 술렁이게 만들던 혼란스러움의 이유를 깨달은 탓인지, 속이 더 울렁거렸다. 정말 어린애 같은 어리광이었다.
견딜 수 없어 포기했더니 이제야 제 곁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미웠다.
*
실뱅은 한 가지 정정해야 했다. 제 곁으로 돌아온 사람은 한 명이었다. 선생님은 돌아왔지만, 디미트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눈앞의 디미트리는 제가 알던 디미트리가 아니었다.
옛날부터 펠릭스는 그런 말을 했었다. 디미트리는 잔혹한 본성을 숨기고 있다, 언젠가는 다들 저 멧돼지의 짐승 같은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실뱅은 가볍게 흘려들었다. 디미트리는 본성이 착한 사람이었다. 사람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씨 고운 아이였고,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모두를 똑같이 대하던 훌륭한 아이였다. 그래서 그 말을 그렇게 가볍게 넘겼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디미트리는 펠릭스의 말 그대로였다. 살인귀라도 쓰였는지 입만 열면 목을 따야 한다는 둥, 모조리 찢어 죽여야 한다는 둥, 아무튼 죽이는 이야기밖에 하지 않았다. 죽은 이들을 가엽게 여기다 못해 아예 작정하고 죽은 이들의 편에 서서 산 자들을 도륙하는 느낌이었다.
5년 전의 그 전투 때에도 디미트리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눈이 뒤집혔다는 말은 그럴 때 쓰는 말이란 걸 체감했다. 디미트리는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허공을 보며 중얼거리기 일쑤였다. 제국의 황제가 가르그 마크에 당도했을 때에는 어찌나 빠르게 적군 사이를 뚫고 가는지, 두두를 비롯한 몇몇이 부리나케 그 뒤를 쫓아야 했다.
그 이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처형 이야기를 들었다. 따지자면 그때부터 홀로 5년이나 떠돌아다닌 셈이니 극단적으로 치달을 만하다고 생각은 했다. 그렇다고 받아들이기 쉬워지지는 않았다. 실뱅은 섣불리 디미트리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속속들이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처음 보는 사람처럼 바뀌어버리면 누구나 그럴 것이라 자신을 위안했다. 회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
“저기, 실뱅.”
갑옷을 입고 페가수스 위에 오른 모습까지는 예상 범위였지만 짧게 자른 머리카락도, 투구를 쓴 모습도 실뱅에게는 낯설었다. 이유를 물어볼 것까지는 없었다. 영지 사정상 프랄다리우스령이나 고티에령처럼 대놓고 제국에 반기를 들 수 없는 갈라테아령에서 빠져나와 여기까지 오려면 모습을 감출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 전하가 살아 계시고, 선생님이 살아 계셨으면 지금 우리 상황이 좀 달랐을까 하고.”
“글쎄다. 뭐, 그 녀석이 있으면 구심점이 있으니까 지금보단 나았겠지.”
“영지에서 어영부영하느니 전하를 찾으러 나가는 게 나을 것 같단 생각도 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충분히 잉그리트가 할 법한 말이었지만 실뱅에겐 그 어느 것보다 듣고 싶지 않은 말이기도 했다.
“그건 너무 위험하지.”
말을 뱉으면서도 자기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불안했다. 그냥 평범하게 걱정하는 표정이면 좋을 텐데, 귀가 먹먹하도록 뛰는 심장 때문에 불안감이 상승했다. 무심코 입술을 깨물려던 실뱅은 잉그리트의 시선이 돌아오는 걸 느끼자마자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여기로 왔어.”
“그래서라니…… 여기서 싸우려고?”
“응. 그렇게라도 왕국을 위해 봉사할 수 있다면 그래야지.”
그 역시 실뱅에겐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잉그리트는 말린다고 들을 사람이 아니었다. 기사의 측면에서 따지자면 자신보다 훨씬 더 기사다운 사람이었다.
“너 그러다 들키면 위험한 거 알지?”
“실뱅, 나도 그 정도 생각은 해.”
실뱅은 볼멘소리를 내는 잉그리트에게 다시 미소를 지어 주었다. 하다못해, 같은 전장에 있으면 위험해지기 전에 구하러 갈 수 있을 것이다. 기껏해야 자기 위안밖에 되지 않는 희망으로 불안한 가슴을 가라앉혔다.
“네가 있으면 든든하지, 잉그리트.”
“오래는 못 있겠지만……”
“그래, 알아. 영지로도 돌아가서 모습을 비추지 않으면 가족들이 위험해질 테니까.”
“응. 그래도 얼굴 보니까 좋다.”
그제야 잉그리트가 미소를 지었다. 마음 한구석이 따스하게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실뱅은 진심으로 웃었다. 완벽한 동의가 담긴 웃음이었다.
*
“쯧. 그러고도 네가 고티에의 수장이냐.”
“어라, 고티에의 수장은 내가 아니라 아버지라고, 펠릭스. 프랄다리우스의 수장이 너희 아버지인 것처럼.”
“무슨 소린지 알아들었을 텐데.”
“네~ 네~ 알다마다요. 아무튼 나도 나가서 싸우는 몸인데 이래서 되겠냐 이거지?”
결국 펠릭스가 다시 혀를 차고 돌아섰다. 키득키득 웃으면서 실뱅은 대충 머리를 흔들어 흙먼지를 털어냈다.
프랄다리우스령에서 급한 전갈이 왔다고 했을 때, 실뱅은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기 위해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해야 했다. 편지를 읽는 변경백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보고서는 목이 타들어 갔다. 서둘러 지원을 바란다는 말에는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 나갔다. 실뱅은 사색이 된 얼굴로 죽을힘을 다해 말을 몰아 프랄다리우스령으로 달렸다. 그렇게 도착한 전장에서 처음 마주한 것은 적군에 포위되어 고군분투 중인 제 친구였다. 물론 그의 주위에는 왕국군이 꽤 여럿 있었지만, 실뱅의 눈에는 펠릭스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적을 베어 넘겼다. 고티에 변경백이 부리나케 파견한 기사단이 합류하고 나서야 전황이 뒤집혔다.
그제야 욱신욱신 옆구리가 아팠다. 상대방이 휘두르는 해머를 잘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펠릭스의 표정을 보니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갑옷 덕에 피도 보지 않았고, 멀쩡히 움직일 수 있으니 큰 부상은 아닐 것 같았다.
“고생했다, 펠릭스.”
기껏해야 시커먼 멍이나 들고 말겠지 하며 실뱅은 안도감에 미소 지었다. 동시에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
“실뱅!”
땅이 불쑥 다가오는가 싶더니 펠릭스의 얼굴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펠릭스는 무사했다. 갑자기 무너져 내린 몸을 붙잡은 것도 펠릭스였다. 어쩐지 나른한 손을 뻗어 펠릭스의 어깨를 잡았다. 살아 있었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헛소리 지껄이지 말고 꽉 잡아. 의료반에 데려다주지.”
그러고 보니 그 전갈을 받은 뒤로 쉬지도 않고 달려왔던가.
허기와 피로, 통증, 졸음까지 한꺼번에 쏟아졌다. 하지만 그보다 든든한 온기가 제 몸을 받치고 있었다. 축 늘어지려는 몸을 어떻게든 추스르며, 실뱅은 펠릭스와 발을 맞춰 걸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안정감에 자꾸만 미소가 나왔다.
*
그런 5년이었다. 매일 언제 넘나들게 될지 모르는 사선에서 줄타기를 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두 사람과는 몇 달에 한 번 겨우 얼굴을 볼까 말까 했다. 각자의 영지에서 각자의 목숨을 부지하기에도 바빴다. 가끔 얼굴을 마주했다 헤어질 때면 아무렇지 않게 또 보자며 가볍게 인사했지만, 그때마다 실뱅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가다 못해 썩어 문드러졌다. 또 제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제가 모르는 사이에 잃게 될 것 같아 두려웠다. 정말, 말 그대로 두려웠다. 상대의 복부에 창을 밀어 넣을 때, 날아온 쇼트 액스가 머리카락을 스쳤을 때보다도 프랄다리우스령과 갈라테아령에서 전갈이 왔을 때가 더 두려웠다. 수많은 밤 동안 자신을 다독이고 수많은 낮 동안 미소 지으며 농담을 던졌다. 그런 지옥 같은 5년이었다.
분명히 깨끗이 단념했을 텐데.
“선생님이 있기를 바란 순간이 참 많았죠.”
그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선생님이 여기 있었다면, 당신이 죽지 않고 우리의 옆에 있었다면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돌아올 리 없는 이를 떠올리며 한탄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고 쓸모없는 일인지는 옛날부터 알고 있었다. 오래전 더스커에서 잃은 친구가 함께 있기를 바란 순간도 차마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알면서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실뱅은 자꾸 그런 식으로 바랐다. 문득 바라고, 비탄에 잠기고, 포기하는 일을 수천, 수만 번 반복했다. 그때마다 불로 지진 듯 가슴이 아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지?”
파드득, 어깨가 튀었다. 어느새 눈앞에 선생님이 서 있었다.
“아, 선생님.”
“표정이 안 좋아.”
“하하, 그건 또 언제 보셨대.”
웃으려고 했는데 생각처럼 잘 되질 않았다. 입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어쩐지 선생님은 이런 순간을 기가 막히게도 잘 맞췄다. 실뱅이 바닥을 알 수 없는 어둠 속에 깊이, 깊이 가라앉고 있을 때면 현실로 끌어당기는 것이었다.
“어디 가십니까?”
“디미트리한테.”
어린 시절의 작은 디미트리가 떠올랐다가 안대를 한 지금의 디미트리로 순식간에 모습이 바뀌었다. 기분을 환기하려고 던진 질문이었는데 이젠 돌이킬 수가 없었다.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금방 돌아설 것처럼 대성당 쪽으로 향해 있던 몸을 완전히 틀고, 선생님은 실뱅을 바라보았다.
“차 한잔하자.”
“뜬금없이 무슨 소리예요?”
“실뱅이 할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아서.”
얼빠진 얼굴로 선생님을 쳐다본 것도 잠시, 어느새 실뱅은 선생님과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찻잔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왔다. 베르가모트 향이 코를 간질였다. 5년이 지났는데도 선생님은 잊지 않은 모양이었다.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 좋은 거 아냐고, 그래서 나도 어릴 때 많이 마셨다고 지나가듯 이야기했던 적이 있었다.
“마셔.”
“감사합니다.”
홀짝 차를 들이켜는 선생님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실뱅도 잔을 들었다. 은은하게 퍼지는 향이 좋았다. 한 모금을 마시고 잔을 내려놓으니 시선이 따가웠다. 밝은 청록색 눈동자가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밤의 대화 이후로 줄곧 실뱅이 피해왔던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가 듣고 싶으십니까?”
“실뱅이 하고 싶은 이야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누군가에게 솔직하게 속을 내비치기는 실뱅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선생님 앞에서만큼은 자꾸 모든 걸 내려놓고 솔직해지고 싶어지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 사실이 분하고 화가 난다는 점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럼 다시 묻겠는데요, 왜 지금입니까?”
그 말부터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멋대로 말이 튀어 나갔다. 탁자 밑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무려 오 년입니다. 선생님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고 전하도 처형당했습니다. 아니지, 처형당한 줄 알았죠. 나는 희망을 품고 기다릴 수 있는 인간은 못 돼서요. 애써 묻었습니다. 애도했어요. 내가 마음을 연 사람들이 하나둘 옆에서 사라져서 화가 치밀어 오르고, 괴롭고, 슬프고, 아픈데 그걸 더 가지고 갈 힘이 없었다고요. 그래서 포기했습니다. 그렇게 오 년을 보냈어요. 그런데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눈앞에 둘이 떡하니……”
목이 메었다. 울컥 솟아오르는 무언가를 누르기 위해서 숨을 골랐다. 꽉 쥐었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몇 번 더 심호흡을 하고 실뱅은 찻잔을 들었다. 이럴 걸 알아서 베르가모트 티를 준비해준 것일지도 몰랐다. 선생님은 그런 사람이었다.
“미안.”
“사과할 게 아니잖습니까. 물론 두 사람이 살아 있는 건 기뻐요. 기쁜데, 젠장……”
“그렇다고 실뱅이 힘들었던 게 사라지는 건 아니지.”
선생님의 말이 맞았다. 이제 와 두 사람이 나타났다고 해서 망가졌던 5년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갈가리 찢어지는 듯했던 실뱅의 가슴이 깨끗하게 단번에 낫지도 않을 것이다. 또 잃을지도 모르는 공포와는 앞으로도 싸워야 한다. 실뱅도 알고 있었다.
“도대체 왜 당신은 그렇게…… 모든 걸 다 아는 건데요.”
미소로 포장하고 농담으로 치장까지 해놨던 어두운 감정을 아무렇지 않게 꺼내다가 툭툭 먼지를 털어주고 밖으로 끄집어낸 느낌이었다. 이십 년이 넘는 동안 실뱅이 단 한 번도 제대로 하지 못했을 만큼 어려웠던 일을, 선생님은 차 한 잔을 들이켜듯 가볍게 해냈다.
이 사람이라면 디미트리를 잡아줄 수 있을까.
“아무 말도 안 하는 제자 속도 꿰뚫어 보시는 분이니까 그 녀석이 무슨 생각하는지는 더 훤하시겠네요.”
“디미트리가 걱정되나?”
“그럼 걱정이 안 되겠습니까?”
아까부터 실뱅은 말도 안 되는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다. 이런 말을 하려고 선생님을 마주 보고 있는 게 아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는 그 눈에는 늘 졌으니 이번에도 적당히 속을 털어놓고 아무렇지 않은 척 웃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댐이 무너지기라도 한 듯, 가슴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말들이 멋대로 흘러나왔다.
“나도 그래.”
“선생님.”
“디미트리는 심지가 착한 아이니까 분명 말하면 들어줄 거야. 얼마나 걸릴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왜 묻지 않습니까?
갑작스레 말문이 막혔다. 묻고 싶었지만 묻고 싶지 않았다. 실뱅은 그걸 감추고자 찻잔에 손을 뻗었다. 달그락 소리가 말소리를 대신했다. 여전히 깊이를 알 수 없는 청록색 눈동자가 저를 보고 있었다.
마침내 시선이 떨어졌다. 차를 한 모금 들이킨 선생님이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미안한데 먼저 일어날게. 역시 디미트리한테도 가봐야 해.”
“아, 네.”
아직 차가 남아 있으니 더 마시고 가라는 말을 덧붙이고, 선생님은 성큼성큼 멀어졌다. 실뱅은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디미트리한테도’라니, 처음부터 나랑도 대화할 생각이었구나.
하지만 선생님은 실뱅이 가장 걱정하던 질문은 던지지 않았다. 왜 너는 디미트리에게 가보지 않느냐는 질문 대신 ‘걱정’되느냐고 물었고, 자신도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뒤엔 ‘디미트리한테도 가봐야’ 한다면서 자리를 떴다. ‘말하면 들어줄’ 것이라는 말은 남기면서도, 끝내 그에게 왜 가지 않느냐고 묻지는 않았다.
탁자 위로 눈물이 방울방울 번졌다. 마지막으로 눈물을 흘리며 울었던 것은 디미트리가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날이었다. 헛웃음이 났다. 눈앞에 친구를 두고도 말 한마디 붙이지 못하는 자신을,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한심하고 경멸스럽기만 한 자신을 그 어떤 말로도 몰아붙이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 사실이 못내 고마웠다.
“하하…… 진짜 이상한 사람이라니까.”
실뱅은 선생님이 사라진 방향을 다시 바라보았다. 아마 대성당에 우두커니 서 있는 디미트리의 옆에 있을 것이었다.
“부탁합니다, 선생님……”
*
시간은 언제나와 똑같이 흘러갔다. 기다려줬으면 하는 바람도, 제발 얼른 끝났으면 하는 기도도, 시간은 상관하지 않고 똑같이 흘렀다. 차가운 바람 속에서 재회를 맞이했던 사람들은 이제 파랗게 물든 나무들 가운데 서 있었다.
몇 번의 큰 전투를 치렀다. 미르딘 대교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는 어느새 후방에 두두가 합류해 있어서 기겁하기도 했다. 실뱅에게는 여러 의미로 기쁜 일이었다. 학창 시절의 친구가 살아 돌아왔다는 순수한 기쁨이 하나의 이유였고, 두두를 바라보던 디미트리의 얼굴이 실뱅이 거의 평생에 걸쳐 알고 있던 표정과 거의 똑같았다는 것이 또 다른 이유였다. 여전히 디미트리는 제국의 황제에게 집착했고, 목을 베겠다는 말만 반복했지만, 그 표정 하나로 실뱅은 크게 안도했다. 선생님의 말대로 디미트리는 ‘심지가 착한 아이’ 그대로였다.
직전에는 그론다즈 평원에서 대규모의 병력이 부딪쳤다. 다행히도 전투는 왕국군의 승리로 끝났다. 다만, 다른 사건이 있었다. 한 소녀가 디미트리를 찌르려 했고, 그것을 로드릭이 막았다. 로드릭은 펠릭스의 아버지이기도 했지만, 실뱅에게도 삼촌 같은 존재였다. 어릴 적부터 훈련도 가끔 도와주고, 애정 어린 잔소리를 하던 사람이었다. 친구와는 다른 범주였다. 로드릭은 실뱅에게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었다.
그로 인한 충격을 상쇄한 것은 디미트리였다. 로드릭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디미트리의 무언가를 자극한 듯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선생님이 있었다. 선생님은 디미트리에게 손을 내밀었을 것이다. 5년 전과 똑같이, 실뱅의 닫힌 문을 열었듯이, 그렇게.
*
대성당 밖에 나와 있는 디미트리를 보는 것은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디미트리는 꽤 오래 수도원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사람에게 사과를 했다. 친구들은 물론이고 세이로스 기사단 사람들도 빠뜨리지 않았다. 실뱅도 사과를 받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물론 실뱅은 손사래를 쳤다. 그에게는 사과받을 이유가 단 한 개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웃으며 말했다. 전하가 나아가기로 정했다면, 함께 가겠다고.
그러던 실뱅이 정신을 차린 것은 선생님이 말을 걸었을 때였다.
“정신이 다른 데 있는 것 같아.”
“깜짝이야. 언제부터 거기 계셨어요?”
“디미트리랑 얘기하고 방금 나오는 길인데.”
아, 기사실에서 디미트리랑 얘기하던 사람이 선생님이었구나.
반쯤 넋을 놓고 있었던 실뱅은 하하 웃음을 흘렸다. 온종일 무의식적으로 디미트리를 쫓았던 모양이었다.
“디미트리가 걱정되나?”
언젠가의 겨울날이 떠올랐다. 실뱅은 깔끔하게 고개를 저었다. 언제나 모든 전투 때마다 하는 모두의 생사에 대한 걱정을 제외하면, 당장은 디미트리를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사실, 그 녀석이 한 짓을 싹 다, 말끔히 잊으려는 생각은 없어요. 근데 전하가 자신의 죄니 과거니 뭐니를 마주하며 앞으로 나아가겠다면…… 뭐, 거기에 함께하지 않을 이유는 없지 않을까~ 싶어서요.”
풋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만, 선생님은 그저 실뱅을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아니, 그, 이래 봬도 꼬맹이 때부터 친구였으니까요.”
너무 뜬금없는 소리를 했나 싶어 한 마디를 덧붙였지만 아무래도 선생님은 그런 설명을 기대한 게 아닌 듯했다. 어깨를 으쓱한 선생님이 또다시 다과회를 청해왔다. 거절할까 하는 고민은 아주 짧았다. 고개를 끄덕이니 선생님이 앞장섰다. 실뱅은 그 뒤를 말없이 쫓아 걸었다.
이번에도 차는 베르가모트 티였다. 메르세데스가 나눠준 게 있다며 내놓은 과자도 먹음직스러웠다. 하지만 어쩐지 찻잔에 손이 가지 않았다.
“이번에는 뭡니까?”
“디미트리는 괜찮을 거야.”
“예, 뭐, 그건 다행인데요……”
“실뱅은 괜찮아?”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 움츠린 실뱅은 그때까지 억지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찻잔에서 눈을 뗐다. 보석이라도 박아놓은 듯 광채가 어린 눈으로, 선생님은 곧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목이 탔다.
“안 괜찮다고 하면요?”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거야.”
정말 이상한 사람.
선생님의 말에는 겹겹이 둘러놓은 벽을 단숨에 무너뜨리는 힘이 있었다. 절대로 이야기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마저 무심코 쏟아버리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새삼스럽게, 그래서 이 사람에게 마음을 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내가 증오스럽습니다.”
고개를 푹 숙였다. 찻잔에 자신의 얼굴이 비쳐 보였다. 찡그린 미간, 텅 빈 듯한 눈동자, 꾹 깨문 입술이 늘 보던 그것이었다.
“꼬맹이 때부터 친구였는데……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말을 걸지도 못했고, 하다못해 옆에 있어 주지도 못했습니다. 그래놓고 선생님한테 떠넘기듯이……”
“실뱅이 말하지 않았더라도 난 디미트리에게 갔을 거야.”
“예, 압니다. 당신은 그런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날 용서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 녀석은 내가 더 오래 봤으니 장담할 수 있어요, 원래 그런 애가 아니라는 건요. 그런데 난…… 나는……”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생각하는 것과 말로 뱉어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실뱅은 겨우 찻잔을 손에 쥐었다. 어릴 적과 똑같은 향을 맡고, 똑같은 맛을 느꼈다. 사소하지만 눈물 나도록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무서웠습니다. 내가 아는 전하가 아니라서, 그때의 전하를 마주 보는 게 두려웠습니다. 오 년 만에 돌아왔는데, 내 옆에 디미트리가 돌아왔는데도 그 녀석을 영영 잃어버릴 것만 같아서요.”
무서웠다. 실뱅은 진심으로 그렇게 느꼈다. 영영 잃어버린 사람을 그리워하는 건 아픈 일이었다. 하지만 옆에 있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건 수백, 수천 배로 괴롭고 아픈 일이었다.
“그게 변명이 될 수 없는 것도 압니다. 여러 사람이 디미트리에게 손 내밀어준 것도 알아요. 그런데 나는, 그 녀석의 제일 오래된 친구라는 나는, 그래도 형이었던 나는……”
목이 메었다. 찻잔 위로 어린 시절의 디미트리가 겹쳐 보였다. 해맑게 웃으면서 손을 내밀던 모습, 펠릭스랑 싸웠는데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울먹거리던 모습, 검을 부러뜨리고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달려왔던 모습, 그런 것들이 뒤섞였다.
믿고 의지해줬는데, 네게 정말로 도움이 필요할 때 난 뭘 해줬지?
“여기 있잖아.”
고개를 들었다. 베르가모트 향만큼이나 은은한 미소가 보였다.
“실뱅은 계속 디미트리의 옆에 있어. 아까도 그랬고.”
“하지만……”
“지금까지 못 해줬다고 생각하면 앞으로 해. 디미트리에겐 앞으로도 친구가 필요할 거야. 오래된 친구라면 더 믿고 의지할 수 있겠지.”
눈물이 툭 흘렀다. 코를 찡그리며 손가락으로 대충 볼을 훑었다. 선생님이 말하면 어쩐지 모든 게 다 쉬워 보였다. 지금까지 실뱅을 괴롭히던 모든 올가미가 순식간에 풀어진 듯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마음도 읽을 줄 아십니까?”
“그런 능력까지는 없는데.”
차를 한 모금 들이키고 심호흡을 했다. 한결 가벼운 기분이었다. 단숨에 바뀔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기엔 용기 내지 못하고 살아온 시간이 너무나도 길었다. 하지만 그에겐 함께 있어 줄 사람이 있었다. 디미트리의 옆에 자신이 있듯이, 그의 옆에도.
“나는 변할 수 있을까요?”
“그게 실뱅이 바라는 미래라면.”
문득 실뱅은 이 사람이 자신의 선생님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앞에서 이끌어주고, 필요할 땐 이야기를 들어주고 조언해주었다. 청사자반의 선생님은 지금도 변함없이 선생님이었다. 5년의 공백이 있어도, 지금은 전장에 나서는 기사여도, 편견 없이 함께해주는 선생님이었다.
“고맙습니다.”
실뱅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까지 숙이며 인사를 했다. 몸을 일으켜보니 선생님은 약간 얼이 빠진 듯한 표정이었다.
“우리 대장 돌려줘서요. 뭐, 여러 사람의 힘이라는 건 아는데, 선생님이 꾸준히 손 내밀어줬잖아요. 디미트리한테도… 나한테도.”
“너희는 내 제자니까.”
“예, 당신은 우리 선생님이죠.”
아니, 사실은 당신이 신이 아닐까.
실뱅은 웃었다. 간만에 정말 행복해서 나오는 미소였다.
“차 잘 마셨습니다. 바쁘신 분 붙잡으면 안 되니까요. 그리고 선생님 말대로, 앞으로도 디미트리 옆에 있으려면 훈련 좀 더 열심히 해야 할 것 같거든요.”
“그럼 새 훈련 과정 검토를……”
“잠깐, 사람 잡을 생각이에요?”
선생님의 얼굴에도 미소가 가득했다. 해가 따스하게 내리쬐는 5월이었다.
* * * * * * * * * * * * * * * * * * * *
청사자 루트 타면서 소꿉친구들 사이에
A 지원회화를 보다 보니까
다른 소꿉친구들끼리는 모두가 A까지 있는데
어라? 실뱅은 디미트리랑 A 대화가 없네?
이게 너무 신경 쓰여서
도대체 왜 실뱅은 디미트리랑은
A를 찍지 않는가 생각하다 보니까
이런 글이 나왔습니다
실뱅은 회피형 인간이라고 생각해요
사실은 실뱅도 속이 곪아 있어서
디미트리의 곪은 속을 마주 볼 수 없었던 거라고
그럴 자신이 없었던 거라고
그러니까 디미트리가 그 시간을 극복하고
지원 A는 그 이후에 열리니까
그 시간을 함께 마주해주지 못한 실뱅은
A가 없는 게 아닐까 하고....
그래도 실뱅은 나아질 거라고 생각해요
왜냐면 후일담이 그렇잖아
발전하는 실뱅이잖아
물론 누구랑 보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아무튼 실뱅도 앞으로 나아갈 거 아니에요
선생님 말대로 실뱅은 앞으로
디미트리의 곁에서 늘
믿고 의지해도 되는 친구로, 형으로, 기사로
함께 할 테니까....
아 이제 청사자를 마무리 지었으니
금사슴을 하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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