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꿉친구의 연인
- 펠릭스 x 베르나데타 기반...인데 펠베르는 안 나옴
- 엔딩 후의 언젠가
-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들은 디미트리가 베르나데타랑 친해지려고 노력하는 이야기
디미트리 알렉산드르 블레다드는 좀처럼 크게 당황하는 법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티를 내는 법이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거짓말은 하지 않지만 숨기고자 하는 것은 절대로 들키지 않았다. 그러니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것이 오만한 자신감이었음을 깨달았다. 자기도 모르게 딱 벌어진 입을 깨달은 것은 옆에 서 있던 두두 몰리나로가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을 때였다. 겨우 정신을 차린 디미트리는 자신이 국왕으로서 이 자리에 있음을 떠올렸다.
“프랄다리우스 공, 혼인을 진심으로 축하하오. 자세한 이야기는 따로 듣고 싶은데 괜찮겠소? 자리를 옮겼으면 하는데.”
“알겠습니다, 폐하.”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펠릭스 유고 프랄다리우스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퍼거스의 기사이자 프랄다리우스령을 다스리는 공작인 동시에, 디미트리의 소꿉친구이기도 했다. 디미트리의 지시에 따라 펠릭스와 두두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접견실에서 우르르 빠져나갔다. 오래 앉아 있었던 탓인지 몸이 뻐근했다. 장식보다는 좀 더 실용성에 맞춘 의자가 필요하겠다고 생각하며 디미트리도 일어났다.
“깜짝 놀랐어.”
“그래 보이더군.”
“언제부터 만났어?”
펠릭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앞서서 걷기 시작했다. 접견실보다 개인 서재에서 더 많이 얼굴을 마주했던 소꿉친구에게 안내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았다. 디미트리는 펠릭스보다 약간 뒤처져 따라가며 최근의 일을 되짚어 보았다. 답을 찾을 수 없어 더 오래된 기억을 뒤적였다. 제국과의 전쟁 중에도 두 사람이 사귄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몰랐던 건 아마 너뿐일 거다, 멧돼지. 둔하기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지만, 화자가 실뱅이 아니라 펠릭스라는 점이 낯설었다. 원하던 대답은 아니었기에 디미트리는 재차 질문했다.
“그래서 언제부터야?”
“언제부터의 기준이 뭔데?”
“어…… 고백한 거?”
“전쟁 끝나고.”
그제야 디미트리는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해 냈다. 함께 싸워 왔던 왕국 군과 성 기사단은 전쟁이 끝난 뒤, 각각 페르디아와 가르그 마크로 찢어졌다. 연합군의 참모였던 이는 옛 스승이었고, 현재는 대사교가 되어 가르그 마크에서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때문에 메르세데스를 비롯해 몇몇 동창은 선생님을 따라 가르그 마크에 남았다. 디미트리가 여태 손톱만 한 실마리도 떠올리지 못한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베르나데타는 가르그 마크에 있는 거 아니었어?”
디미트리는 베르나데타 폰 발리와 친하지 않았다. 오히려 껄끄러운 사이에 속했다. 5년이라는 긴 시간을 거쳐 선생님과 친구들을 막 재회했을 때, 베르나데타를 제국의 첩자로 오인해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선생님과 펠릭스가 재빠르게 베르나데타의 앞을 가로막고 디미트리의 창을 막아냈다. 가뜩이나 사관학교 시절부터 디미트리를 무서워하던 베르나데타는 그 뒤로 무슨 일이 있어도 말을 걸지 않은 것은 물론이요, 일정 반경 안으로는 결코 다가오지 않았다. 마음을 다잡은 이후, 마음을 다해 그녀에게 사과했다가 눈물바다를 만든 일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디미트리는 자신을 겁내는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성격이 아니었고, 도리어 상대를 배려한다는 명목으로 접촉을 피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전략적인 필요에 의해서만 발생했다. 이번엔 이쪽에서 부대를 이끌어주면 좋겠다, 기습이 필요한데 가능하겠나, 그런 것들이었다. 지금까지도 디미트리는 그나마 선생님이 함께 있었기에 대화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로 쭉 우리 집에 있었어.”
마찬가지로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었다. 아무래도 베르나데타의 피난처가 가르그 마크의 기숙사 방에서 펠릭스로 옮겨간 모양이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기에 디미트리는 묵묵히 펠릭스의 뒤를 따라 서재로 들어섰다. 두두가 시종에게 다과상을 준비하라며 내보내자, 서재에는 과거의 동창 세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하긴, 넌 몰랐을 수도 있겠군. 가르그 마크를 제일 먼저 떠난 게 너니까.”
펠릭스의 말이 맞았다. 왕도를 계속 비워놓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전쟁이 끝나자마자 가르그 마크를 떠났다. 수도원의 문제는 대사교에게 맡기라면서 선생님이 등을 떠밀어준 게 한몫을 했다. 디미트리의 소꿉친구들이 현재의 자리에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한 달 뒤였다.
“아무튼 축하해. 결혼식은 언제야?”
“두 달 뒤에. 아마도.”
“아마도?”
“하객들 앞에 서기 싫다고 버티는 중이라서.”
어떤 상황인지는 쉽게 그려졌다. 친한 사람들과 함께 모인 자리에서도 나서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그녀가 생판 남이나 다름없는 수많은 사람 속에서 결혼을 한다니, 잘 모르는 디미트리가 보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잉그리트 녀석이 설득해 보겠다더군.”
“잉그리트가 베르나데타랑 친하던가?”
“나랑 선생… 이젠 대사교라고 해야겠군. 나랑 대사교를 제외하면 제일 마음이 편한 사람이라고 그러던데.”
그러고 보면 사관학교 시절에도 잉그리트는 베르나데타와 말이 잘 통했다. 수업 참여를 독려하던 것도 반장인 디미트리가 아니라(베르나데타가 너무 무서워한 탓에 기숙사에 찾아갈 수 없었던 것뿐이다) 잉그리트였다. 선생님의 권유에 청사자반으로 옮겨온 베르나데타가 적응하는 데에는 잉그리트의 힘이 많이 작용했을지도 몰랐다. 새삼 잉그리트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솟아났다. 조만간 잉그리트를 위한 만찬을 준비해야겠다고 다짐하는 사이, 펠릭스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실뱅도 뭣하면 자기가 나서겠다고 그러는데, 무슨 꿍꿍이속인지……”
“실뱅이?”
“베르나데타가 나한테 말하지 않은 걸 뭔가 아는 모양이야.”
디미트리는 충격을 받았다. 잉그리트가 베르나데타와 친한 건 충분히 이해 가능했다. 펠릭스가 베르나데타와 결혼하는 것 자체는 놀라웠지만, 돌이켜 보면 가르그 마크에서 펠릭스를 졸졸 쫓아다니는 베르나데타를 꽤 자주 목격했다. 실뱅의 성격을 생각하면 베르나데타에게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말을 걸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베르나데타이기에, 디미트리는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으면 도망쳤지, 실뱅과 무난하게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어떻게 비밀을 알 수 있는 것일까? 억지로 캐내지는 않았을 테지만, 마땅한 경로가 떠오르지 않았다.
“어이, 멧돼지.”
“아, 미안. 오늘은 계속 놀라네. 실뱅도 베르나데타랑 친하구나.”
“친하다고 해야 할지……”
펠릭스가 쯧, 혀를 찼다. 아무래도 실뱅이 베르나데타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마침 다과를 들고 나타난 시종 덕에 디미트리는 미묘한 충격은 잠시 잊게 되었다.
*
“폐하, 신경 쓰이는 일이 있으십니까?”
사실 디미트리는 두두가 이렇게 물을 때까지 자신이 그것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시선이 서류 속 글자가 아닌 허공에 머물러 있었으니, 두두가 아닌 그 누구라도 알아차렸을 법했다. 한숨을 푹 내쉰 디미트리는 미묘하게 굳어 있던 표정을 풀고 두두를 바라보았다.
“아, 별거 아니야. 낮에 있었던 일이 좀 놀라워서.”
“결혼 말씀이십니까?”
“그것도 그런데…… 잉그리트나 펠릭스는 그렇다 쳐도 실뱅까지 베르나데타랑 친한 건 전혀 몰랐어. 친해지는 데 시간이 꽤 걸렸을 텐데 말이야.”
“폐하께는 그럴 여유가 없으셨잖습니까.”
“응, 그러네.”
썩 시원시원하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여유가 없기는 했다. 펠릭스를 쫓아다니던 베르나데타의 모습조차도 낮에 결혼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떠올렸을 정도다. 하지만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베르나데타는 다가가기 어려운 아이라고, 친해지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의 소꿉친구들은 모두 그녀와 친하다. 실뱅 역시 친하다고 말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비밀을 알고 있는 정도라면 친하다고 봐도 무방한 것 같았다.
“베르나데타와의 관계를 걱정하시는 겁니까?”
“음…… 친해지기 어려울 거로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내 노력이 부족했나 보군. 다른 친구들하고는 다 잘 지내는데 나만 무서워한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좋지는 않네.”
머쓱한 웃음이 흘렀다. 이런 사실에 충격을 받다니, 아무래도 여전히 어른이 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디미트리는 벌써 네 번째 같은 문장을 다시 읽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이렇게 잡생각이 많은 채로 공무를 처리할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이만 쉬어야겠어.”
“목욕물을 준비할까요?”
“그래주겠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한 두두가 시종을 찾아 나서자 집무실은 조용해졌다. 어중간하게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생각이 순식간에 머리를 전부 점령했다. 이 상태로는 펠릭스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신부를 기겁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금방 우울해졌다. 세상만사 모두가 첫 단추가 중요한 법이라는데, 디미트리와 베르나데타의 관계는 첫 단추는커녕 옷 자체부터 잘못 입은 것 같았다. 사관학교 시절에 조금이라도 더 노력했다면, 하다못해 재회했던 그 순간에 공격이라도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실행할 수 없는 가정을 떠올리는 건 이미 지긋지긋했다. 머리를 털어 생각을 날려버린 디미트리는 어떻게든 긍정적인 면을 보기로 했다. 무뚝뚝하기로는 저보다 훨씬 심한 펠릭스도 베르나데타와 대화를 나누고 결혼까지도 한다. 덩치가 웬만한 곰 같기는 하지만 부드럽게 다가가면 관계 개선의 여지는 충분히 존재할 것이다.
디미트리는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집무실을 나섰다.
*
문제는 디미트리와 베르나데타가 만날 일이 없다는 점에 있었다. 공사다망한 디미트리는 페르디아를 벗어날 수 없었고, 베르나데타는 당연하게도 프랄다리우스령에서(정확히는 펠릭스네 집에서) 꼼짝도 하지 않을 것이다. 접점을 만들려면 디미트리가 프랄다리우스령에 행차하든가 베르나데타가 집에 콕 박혀 있는 생활을 포기하고 페르디아에 여행을 오는 수밖에 없었다. 둘 다 현실성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디미트리는 반쯤 포기한 상태로, 제발 결혼식에서 베르나데타가 기겁해서 도망가지 않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이런 디미트리의 고민이 여신께 닿은 것인지, 기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일이 벌어졌다. 간만에 휴식을 취하고자 산책을 하던 디미트리가 온실에서 베르나데타와 딱 마주친 것이었다.
“베르나데타?”
“히이이익! 죄송해요, 죄송해요! 외부인이 함부로 돌아다녀서 죄송합니다! 죽이지만 말아주세요! 아무 짓도! 아무 짓도 안 했으니까요오오오!”
“괜찮아, 진정해. 아무도 널 해치지 않을 거야.”
“저, 저, 저, 정말인가요? 하지만 여긴 왕궁인데, 헉! 그런 말로 베르를 안심하게 만들어 놓고 뒤에서 몰래……”
“제발 진정해줘, 베르나데타. 난 친구의 부인이 될 사람을 죽일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까.”
베르나데타의 어깨가 파드득 튀었다. 비명과도 같던 변명이 순식간에 멈추었다. 디미트리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조심스레 발을 떼었다. 성큼성큼 다가갔다가는 베르나데타가 그대로 도망가 버릴 것 같았고, 그런 일이 정말 벌어지면 꽤 상처받을 것 같았다. 꼼짝도 하지 않는 베르나데타의 뒤통수를 향해 디미트리는 차분히 말을 걸었다.
“나야, 디미트리.”
“헉, 디미트리 씨? 헉, 아니지, 폐하? 네? 폐하라고요? 폐하?”
고장 난 도르래에서 나는 소리가 베르나데타의 목에서 나는 것 같았다. 겨우겨우 고개를 돌린 베르나데타의 두 눈이 커다래지는 것을 보고 디미트리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오늘은 망토라도 내려놓고 나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찰나였다.
“히이이익! 죄송합니다, 폐하! 폐, 폐, 폐하의 온실이었군요! 아니, 그렇죠! 왕성이니까! 왕성 자체가 폐하 거였죠! 베르가 주제도 모르고 함부로 들어와 버렸으니 이제 죽음으로 사죄하는 수밖에 없나요? 부디 자비르으으으을!”
“제발, 베르나데타. 아까도 말했지만 난 널 죽일 생각이 전혀 없어. 이 왕성의 그 누구도 널 해치지 않을 거야. 이 나라의 국왕으로서 맹세하지.”
땅속으로 꺼질 듯이 굽어 내려가던 베르나데타의 허리가 멈추었다. 디미트리는 안도의 한숨조차도 그녀를 놀랠까 싶어 최대한 숨을 죽였다. 슬그머니 고개를 든 베르나데타가 갈팡질팡하던 시선을 간신히 디미트리에게 맞추었다.
“정말요? 약속하신 거예요?”
“그래, 약속해.”
“가,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오……”
“자, 잠깐만, 베르나데타!”
“히이익, 약속하셨잖아요오오!”
자기도 모르게 성큼 발을 내디디며 그녀를 불러 세운 디미트리는 다시 우뚝 멈춰 섰다. 베르나데타는 잔뜩 몸을 움츠린 채로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펠릭스가 두르고 다니던 망토와 같은 색의 망토 밑으로 파르르 떨리는 팔이 보였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베르나데타가 긴장감을 견디다 못해 서서 기절하기 전에 무엇이든 편안하게 만들 만한 주제를 꺼내야 했다.
“펠릭스와 결혼한다면서. 축하해.”
“헉, 그, 그렇죠. 펠릭스 씨랑 베르가 결혼을 하죠…… 감사합니다.”
펠릭스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좋은 선택 같았다. 금방 떨림이 잦아든 베르나데타가 몸을 살짝 돌려 디미트리를 향해 꾸벅 고개까지 숙였다. 어쩐지 볼이 붉어 보였다.
“결혼 소식을 듣고 많이 놀랐어.”
“왜, 왜요? 설마 감히 베르 같은 게……”
“우리 중에 펠릭스가 제일 먼저 결혼하는 게 믿기지 않았거든.”
물론 결혼 상대가 베르나데타라는 사실이 놀라움을 세 배쯤 부풀리기는 했다. 어쨌든 요지는 펠릭스의 결혼에 있었다. 어린 시절에 모두 다 그러하듯, 디미트리도 당연히 어른이 된 자신과 친구들의 모습을 상상했다. 기사가 되거나 검을 휘두르는 모습 같은 건 금방 떠올랐지만, 누군가 결혼을 하는 것은 쉽게 떠올릴 수 없었다. 다만 결혼을 한다면 약혼자가 있는 잉그리트가 제일 먼저 하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을 뿐이었다.
“어릴 땐 잉그리트가 제일 먼저 결혼할 줄 알았어. 약혼자가 있었거든. 하지만…… 나중엔 당연히 내가 먼저 결혼하겠구나 싶었어. 왕이 되면 후사 문제가 생기니까.”
“그, 그러네요. 펠릭스 씨도 결혼에는 딱히 생각이 없었던 것 같으니까요.”
차마 말을 꺼내기가 힘들어 얼버무렸지만 베르나데타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어쩌면 이미 잉그리트에게 사정을 들은 것일지도 몰랐다. 펠릭스와 선생님을 제외하면 제일 편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잉그리트라던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시, 실뱅 씨는요? 실뱅 씨라면 여자분들이랑 잘 지내시는데……”
“흉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지만, 실뱅은 한 사람과 지속된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는 재주가 없는 편이라서.”
디미트리는 속으로 고티에령에 닿지 못할 사과를 하고서 베르나데타를 살폈다. 이제 베르나데타의 몸은 완전히 디미트리 쪽을 향해 돌아서 있었다. 대화하려는 시도가 성공했다. 뿌듯해진 디미트리가 미소를 지었다.
“펠릭스를 잘 부탁해. 둘도 없는 소중한 친구거든.”
“폐, 폐하의 둘도 없는 소중한 친구면 엄청나게 중요한 사람인 거잖아요? 베르 따위한테 부탁하셔도 괜찮은 건가요? 아니, 물론 펠릭스 씨를 좋아하니까 잘해줄 거지만, 헉, 베르가 지금 뭐라고 했죠? 꺅, 부끄러워!”
그렇게 길지 않은 대화를 통해 디미트리는 조금이나마 베르나데타를 파악할 수 있었다. 덕분에 베르나데타가 보이는 급격한 태도 변화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 차분하게 정말 묻고 싶었던 것을 질문했다.
“그런데 베르나데타, 페르디아에는 어쩐 일이야? 펠릭스와 함께 온 건가?”
“펠릭스 씨는 폐하를 뵈러…… 어?”
베르나데타가 그대로 정지했다. 디미트리 역시도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일 수 없었다. 베르나데타가 말하는 폐하는 다름 아닌 자신이었고, 그는 접견실이 아닌 온실에서 그녀와 대화 중이었다.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 어떻게 된 건가요오오오오!”
“음, 나도 그걸 묻고 싶은데…… 펠릭스가 온다는 전갈도 받은 적이 없거든.”
“네에? 하지만 실뱅 씨가 귀족들이 다 모이는 자리니까 꼭 가야 한다고 그랬는데요? 잉그리트도 만날 수 있다고 해서 펠릭스 씨를 따라왔는데……”
한겨울 입김과 함께 나오는 말소리처럼 덜덜 떨리던 베르나데타의 목소리가 조용해졌다. 디미트리가 자기도 모르게 탄식하면서 머리를 짚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녀 역시 왜 이런 사태가 벌어졌는지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실뱅이 꾸민 일이군.”
“베르가 속은 건가요? 하지만 펠릭스 씨도 같이 왔는데, 헉, 그럼 펠릭스 씨도 베르를 속인 거군요! 너무해!”
“미안해, 아무래도 나 때문인 것 같아.”
굳이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볼 것도 없었다. 두두가 프랄다리우스령으로 돌아가는 펠릭스에게 이야기했을 것이고, 펠릭스는 돌아가서 실뱅과 만나 또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실뱅은 잘 됐다며 베르나데타를 페르디아로 나서게 할 방법을 제시했을 테고, 펠릭스도 납득했으니 이곳에 온 것일 테다. 소꿉친구들의 배려에 기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펠릭스가 저번에 왔을 때, 네가 잉그리트나 실뱅이랑도 친하다고 그랬거든.”
“네? 잉그리트는 친하지만 실뱅 씨는 딱히…….”
“실뱅이 뭔가 비밀을 알고 있다던데……”
“그, 그건! 베르가 가르쳐 준 게 아니라고요오오오!”
어리둥절하던 표정이 금세 울상이 되었다. 아무래도 친하다고 생각하는 건 실뱅 혼자인 모양이었다. 디미트리는 다시 한번 뜻 모를 사과를 고티에령으로 보냈다.
“오해가 있나 보네. 뭐, 그래서 나만 베르나데타랑 어색한 관계인 게…… 좀 신경 쓰였어. 결혼식 때 날 보고 무서워서 숨어버리면 곤란해지니까…….”
아무리 디미트리라도 이런 말을 직접 입 밖으로 꺼내기는 영 껄끄러웠다. 그 때문인지 자연스레 목소리가 줄어들었는데도 온실 안에는 풀벌레 소리만 울렸다. 어색해서 애써 피하고 있던 고개를 들고 보니 베르나데타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디미트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러지?”
“폐하도 그런 걱정을 하시는군요.”
“국왕이기 이전에 나도 그냥 사람이니까.”
“그, 그쵸, 그러네요.”
어정쩡하게 대답하는 베르나데타를 보니 어쩐지 씁쓸했다. 그녀에게 디미트리는 동창이나 친구보다는 국왕이자 지휘관일 것이다. 디미트리 역시 그녀를 크게 의식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동료로 받아들이고는 있었다. 착잡한 마음에 말을 잃어버린 사이, 베르나데타가 입을 뻐끔거리는 게 보였다. 우물쭈물하던 그녀가 시선은 땅에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디미트리 씨는 배려심이 많은 사람인 걸 알아요. 정직하고 올바르고 또, 실수하면 인정하고 사과할 줄 아는 착한 사람이에요. 베르가 겁내니까 무섭게 하지 않으려고 되도록 피하신 것도 알아요.”
별안간 얼굴이 후끈거렸다. 입에 발린 소리에는 질릴 만큼 익숙해져 있던 디미트리도 떨리는 목소리로 전하는 칭찬에는 절로 부끄러워졌다. 본인이 그런 소리를 들을 만한 사람인지는 의문스러웠지만, 진심이 듬뿍 묻어나는 말에 아니라고 손사래를 칠 수는 없었다.
“베, 베르는 겁이 많지만…… 디미트리 씨랑 지금처럼 대화는 할 수 있어요. 폐하랑은 어려울 것 같지만……”
“응? 무슨 뜻이지?”
베르나데타가 뒷말을 거의 집어삼킨 탓에 잘 들리지 않았다. 눈을 대굴대굴 굴리던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왠지 모를 긴장감에 디미트리는 손을 꽉 쥐었다.
“그, 그, 그, 그러니까…… 펠릭스 씨의 친구, 잉그리트의 친구, 실뱅 씨의 친구인 디미트리 씨요. 어, 어릴 적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같이 검술 연습을 한 거랑 눈이 많이 왔을 때 잉그리트의 키보다 큰 눈사람을 만들었던 거랑…… 그, 그러니까 폐하가 아닌 디미트리 씨에 대해서 알게 되니까 좀 무섭지 않아졌다고 할지…….”
디미트리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폐하’와 ‘디미트리 씨’를 분리할 수 있다는 점이 일단 그랬고, ‘폐하’는 여전히 무섭지만 ‘디미트리 씨’는 덜 무서워졌다는 점도 마찬가지로 그랬다. 자신은 절대 떠올리지 못할 방법이라고 생각하며, 디미트리는 미소 지었다.
“아마 내가 국왕으로서 널 만날 일은 거의 없을 테니 다행이라고 해야겠군.”
디미트리의 미소가 예상 밖이었는지, 베르나데타의 표정이 이상했다.
“근데 좀 불공평한걸.”
“네? 뭐, 뭐, 뭐가요?”
“이미 나에 대해 많이 알게 된 것 같으니, 나도 베르나데타에 대해 알아야 친구가 될 수 있지 않겠어?”
베르나데타의 표정이 한층 더 이상해졌다. 눈이 휘둥그레진 것을 봐서는 놀란 게 확실했지만, 그게 나쁜 쪽인지 좋은 쪽인지 판가름하기가 애매했다. 친구가 되자는 말은 너무 갑작스러웠을까 염려스러웠다. 괜히 목이 탔다.
“베, 베르 같은 게 폐하의 친구가 되어도 괜찮나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만큼 베르나데타의 어깨가 함께 움츠러들었다. 디미트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국왕이 아닌 디미트리의 친구도 괜찮다면.”
표정이 환해졌다. 꽃을 피우듯 만개하는 미소에 디미트리도 함께 웃었다.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걱정거리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
“뭘 어떻게 한 거냐?”
식사 도중 나온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펠릭스의 시선이 따가웠기 때문에 디미트리도 고개를 들었다. 짐작 가는 것이 없어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자 펠릭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제랑은 사람이 달라진 수준이던데. 무슨 얘기를 했지?”
“페, 펠릭스 씨! 고기가 아주 맛있어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베르나데타가 접시를 펠릭스 쪽으로 밀었다. 허둥대는 모습을 굳이 보지 않더라도, 디미트리의 대답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게 분명했다. 열렬히 호소하는 눈빛까지 보고 나니 솔직히 대답할 수가 없었다.
“특별할 건 없었는데. 서로에 대해 조금 더 잘 알게 됐을 뿐이야.”
“하?”
“그럼요! 베르는 이제 폐하의, 아니지, 디미트리 씨의 친구라고요!”
뿌듯한 베르나데타의 미소에 펠릭스의 표정이 더욱 구겨졌다.
“여기 도착했을 때만 해도 무섭다고 인사 안 간다며.”
“그, 그건 그때고요!”
펠릭스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였지만, 디미트리는 더 대답하지 않았다. 풋 웃음이 났다. 베르나데타에 대해 알게 된 만큼, 연인과 함께 있을 때의 펠릭스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되었다. 아마 베르나데타는 그녀가 보지 못한 펠릭스의 어린 시절에 대해 잘 알게 되었을 것이다. 디미트리는 그 사실을 당분간 두 사람만의 비밀에 부쳐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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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베르이긴 한데 펠베르 같지 않은 무언가.....
근데 디미트리만 베르랑 지원회화가 없잖아요
그래서 둘이 친해지려면 뭘 해야 하나 생각했습니다
옛날 얘기가 원래 최고죠
펠릭스 옛날 얘기 해주는 디미트리랑
연애 중인 펠릭스가 어떤지 말해주는 베르나데타
좀 귀엽지 않나요
뭐 그래서 폐하는 무섭지만 디미트리 씨는 무섭지 않아져서
나름대로 적당히(?) 친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
베르나데타였습니다....를 쓰고 싶었습니다
베르야 언제 어디에서든 모두에게 사랑받고 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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