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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온리전 Day Dream ~Winter's Tale~
이9a :: 테니스의 왕자의 공주님이 바로 나야
by Lina
신간
青春恋歌
세이가쿠 3학년 드림 트윈지
테즈카 쿠니미츠 / 오오이시 슈이치로 / 후지 슈스케
키쿠마루 에이지 / 이누이 사다하루 / 카와무라 타카시
A5 소설 66p / 6,000원
구간
Dear Prince
7인 드림 앤솔로지
자이젠 히카루 / 니오 마사하루 / 오오토리 쵸타로
에치젠 료마 / 쟈칼 쿠와하라 / 아토베 케이고 / 토야마 킨타로
A5 136p 소설 / 8,000원
My Only Lady
히요시 와카시, 키테 에이시로 드림
A5 32p 소설 / 3,000원
백색 인연
오오토리 쵸타로 장편 드림 (동양판타지패러렐)
A5 148p 소설 / 10,000원
보름달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안개가 자욱했다. 으르렁대는 소리는 짙은 어둠 속에 흩어졌다. 방망이질치는 가슴 때문에 머리도 울렸다. 비 냄새에 피비린내가 뒤섞여 진동했다. 흙탕물이 다리에 튀었다. 온몸이 으슬으슬 떨렸지만 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도와주세요.
머릿속을 지배하는 여린 목소리를 쫓아 달렸다. 짐승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거친 숨을 몰아쉬다가 꿀꺽 침을 삼켰다. 소리만으로는 근처에 도달한 것 같았는데 워낙 칠흑 같은 밤중의 숲이라 시야가 명확하질 않았다. 목소리는 지금이라도 끊어질 듯 가냘팠다. 가느다란 생명줄을 놓칠세라 온 정신을 집중했다.
어디에 있어?
깨갱 소리가 귀를 찔렀다. 발이 절로 빨라졌다. 턱 끝까지 숨이 차올랐다. 빗물에 미끄러졌지만 멈추지 않았다. 조금만 더, 더 빨리.
「안 돼!」
나무 꼭대기만큼 높은 곳에서 노란 눈이 빛났다. 떨림이 멈추질 않았다. 에조늑대 발밑의 강아지 역시 경련을 일으키듯 몸을 주체하지 못했다. 웬만한 나무줄기 못지않게 굵은 에조늑대의 다리가 위협적으로 움직였다. 잽싸게 몸을 피해 강아지를 향해 달려갔다. 어느 한 쪽의 편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당장 죽을 것 같은 강아지를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머리 위에 있는 커다란 발을 보면서도, 제 몸과 비슷해 품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 강아지를 품으로 확 끌어안았다.
「이러다 죽겠어요! 제발요!」
에조늑대의 커다란 이빨이 위협적이었다. 그리고 확 찢어진 입이 벌어졌다. 번개가 으르렁 울었다.
*
식은땀이 흘렀다. 비만 오면 매번 꾸는 꿈이었고, 늘 번개가 치면서 끝났다. 시작도, 끝도 변하지 않았으며 중간 부분은 언제나 모호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건 꿈이라기보다는 기억의 파편이었다. 자신도, 오오토리도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적에 있었던 일,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도통 떠오르지 않는 과거. 꿈속에서라도 완결을 짓길 항상 바랐지만, 이루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오카미 유이는 가장 가까이에 있던 얇은 모포를 집어 들었다. 대충 어깨에 둘러놓고 보니, 간밤도 바람이 셌는지 창문이 열려 있었다. 창문을 닫으려고 손을 뻗다가 억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왼쪽 어깨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기억도 명확하지 않은 어린 시절의 어느 날 입은 상처는 지금은 흔적조차 없는데도 그녀를 괴롭혔다.
이런 날은 누가 됐든 돌아다니기 힘들 테니 오늘은 조용하려나.
바람과도 같은 추측을 삼키며 몸을 일으켰다. 후들후들 떨리는 게 아무래도 몸살 같았다. 다시 이불 속을 파고들어 쓰러지듯 잠든다면 여한이 없겠지만, 빗소리에 뒤섞여 들리는 탄식이 유이를 붙들었다. 하는 수 없이 도롱이와 삿갓을 챙겼다. 앞섶을 단단히 여미고 문을 열자 세찬 빗소리가 귀를 때렸다. 질척거리는 흙길은 가뜩이나 바닥에 늘러 붙은 기분을 더욱 떨어뜨렸다.
“오오카미, 마침 잘 왔다!”
공기를 갑갑하게 만드는 안개도 야마다 촌장의 목소리는 막지 못했다. 매의 발톱 마냥 잔뜩 날을 세운 목소리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늘 당당하고자 마음을 먹는데 촌장의 앞에만 서면 기가 죽었다. 유이는 무거운 발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움직이려 애썼다. 거센 빗줄기 사이로 보이는 촌장은 꼭 밀짚인형 같았다.
“이걸 좀 봐라! 밭을 또 이래놨어!”
밭 여기저기에 남은 발자국은 성인 남성의 일반적인 발 크기는 쉽게 뛰어넘을 정도로 컸다. 밤새 내린 비 때문에 형태가 조금 뭉개지긴 했지만 누구의 것인지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유이는 최근에 멧돼지 영물이 마을에 내려온 적이 있는지를 떠올렸다. 아니, 그런 기억은 없었다. 보름달이 가까워오니 또 이성을 잃는 모양이었다. 간밤에 앓느라 듣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들리지 않았던 것인지 신경 쓰였다. 가슴이 죄여왔다.
“보름달 뜰 때만 되면 이러니 거 참……. 오오카미, 좀 더 명확한 대책은 없는 게냐?”
촌장이 발음하는 ‘오오카미’ 네 글자에는 실린 게 너무나도 많았다. 중간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그녀에 대한 실망감, 오오카미 가문에게 가지는 기대감, 과거를 떨쳐내지 못하는 여자에 대한 동정,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사방에서 짓눌러오는 감각에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비 그치면 숲에 다녀올게요. 잘 달래고 돌아올 테니까 너무 염려 마세요.”
정말로 촌장이 혀를 찬 건지 환청을 듣는 건지도 헷갈렸다. 유이는 세찬 비로 뭉그러지는 흙바닥만 노려보았다.
왜 나는 들을 수 없는 걸까.
노력과는 다른 문제일지도 몰랐다. 봉인한 것인지, 정말로 사라져 버린 것인지 알 수 없는 그 기억에 열쇠가 있을 거라고 멋대로 추측했다. 아주 어릴 때는 영물들의 외침을 부모님보다도 더 잘 들어 곤란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덕분에 영물과의 거리를 조절하는 법을 따로 배워야 했는데 지금은 그녀만 혼자 동떨어져 있는 기분이었다.
그르렁. 낮게 귀를 간질이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들었다. 오오토리였다. 괜한 긴장감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두리번대는 유이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기대하던 하얀 개가 아니라 삿갓도 없이 맨몸으로 비를 맞는, 처량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이젠 옷이 물을 흡수하지도 못하는지 옷깃을 따라 주르륵 물이 떨어져, 마치 그 사람 자체가 비에 동화되어 버린 것 같았다.
“뉘시오?”
“지나가던 객이오만, 쉴 곳 좀 찾을 수 있겠습니까.”
갑작스런 이방인의 출현이 달갑지 않은지 촌장이 목을 뻣뻣하게 세웠다. 그렇다고 이런 날씨에 사람을 내치는 건 도리가 아닐 터였다. 침묵 아닌 침묵이 불편해진 유이가 먼저 입을 열려던 찰나, 촌장이 헛기침을 했다.
“료칸을 안내해 드리겠소.”
*
비가 멎은 것은 달이 뜰 때쯤이었다. 완벽한 원을 추구하는 달은 휘영청 밝아서 등불이 따로 필요 없었다. 유이는 달빛에 의지해 숲 속으로 들어갔다. ‘달밤의 숲’은 아무도 들어오지 않을 법한 곳이었지만 그녀에게만은 달랐다. 모두가 무섭다며 피해도 유이에게만큼은 낮의 숲과 별반 다를 것 없이 편안했다. 오히려 숲속이 땅은 더 단단했고 공기도 좋았다. 비가 내린 뒤라 물기를 머금은 풀냄새가 사방에 가득했다. 밤중에도 조용해지지 않는 풀벌레 소리는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 소리와 장단 맞춰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등과 더불어 조화를 이뤘다.
마침내 짙은 녹음 사이에서 그녀가 찾던 뒷모습이 보였다. 달빛을 받아 빛나는 털은 하얗기 보단 은색처럼 보였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커다란 몸이 움직였다. 유이는 자기 주먹만 한 검은색 눈동자에 제 모습이 온전히 비쳐 보이는 게 항상 좋았다. 웃는 듯, 눈매가 조금 부드러워지더니, 평범한 에조늑대보다도 덩치가 큰 하얀 개가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그 개는 기지개를 켜듯 목을 위로 쭉 뻗은 뒤, 가볍게 몸을 털었다. 유이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잠시 기다렸다. 다시 목을 쭉 뽑아내듯 고개를 하늘 높이 쳐올린 하얀 개는 순식간에 모습을 바꾸었다. 짧은 은빛 머리칼이 인상적인 소년은 유이보다 눈높이가 높았다. 순한 눈은 유이를 향해 웃고 있었고, 하얀 유카타 소매에서 뻗어 나온 손은 가볍게 깍지를 끼고 있었다. 인간화가 가능한 개 영물, 오오토리 쵸타로는 올해로 꼭 열여덟 살이었다.
“오셨어요. 비 많이 와서 길이 불편하죠?”
“오히려 숲이 더 단단해서 걷기는 쉬워. 많이 안 젖었네?”
“비 그칠 때까지 동굴에 있었어요. 털 젖으면 말리기 불편해서 인간 모습으로 있기도 했고.”
유이는 잠깐 집채만 한 하얀 개가 털을 말리기 위해 햇볕 아래 누워있는 모습을 떠올리고 풋 웃어버렸다.
“쵸타로, 혹시 아침에 나 불렀었어?”
“아, 그게……. 혹시 마을에 누가 왔어요?”
“지나가던 사람이라면서 잠깐 쉬겠다고 온 사람이 있었어. 지금 촌장님 댁 옆에 있는 료칸에 있을 걸.”
오오토리의 미간이 좁아지는 걸 유이는 놓치지 않았다. 걱정이 있을 때면 항상 오오토리는 그런 표정을 지었다. 마을을 오가는 방문객은 많지는 않아도 료칸이 운영될 만큼은 존재했다. 유이는 오오토리가 새삼 방문객을 경계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곧 보름달이 뜬다는 단순한 이유는 아닐 테고, 괜히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무슨 걱정 있지?”
“음……. 그냥 감이지만, 되도록 그 분과는 얽히지 마세요.”
실제로 몇 분밖에 보지 않은 남자는 어딘가 꺼림칙했다. 영물의 감은 잘 들어맞는 편이었으니 가볍게 무시하고 넘어가기엔 마음에 걸렸다. 여전히 망설이는 빛이 역력한 오오토리를 향해 유이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가지 이유를 덧붙이자면, 가뜩이나 보름달이 가까워오는 마당에 오오토리의 걱정거리를 늘리고 싶지 않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자기보다 어린 오오토리에게 항상 도움을 받으며 사는 신세이니, 자신의 일 정도는 스스로 감당하고 싶었다.
“이유 물어봐도 돼?”
애써 웃는 게 너무 티가 나서 모른 체 하기도 어려웠다. 유이는 차라리 최대한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는 쪽을 택했다. 약간 찌그러진 쟁반 같은 모양의 달이 나뭇가지 사이에 걸려 있었다.
“동물은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해가 될 것들을 알아차려요.”
제 손을 붙잡는 온기에 놀라 유이가 고개를 돌렸다. 달보다도 더 빛나는 미소에 심장이 마구 뛰었다. 커다란 손은 그녀를 꼭 붙잡았다. 유이는 오오토리를 따라 발을 옮겼다. 목적지 같은 건 어디라도 상관없었다. 오오토리의 손을 잡고 있으면 세상 그 어떤 것도 그녀를 공격할 수 없을 것처럼 편안했다.
“영물이 된 경우는 더해요. 자연재해 같은 걸 미리 아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고, 동물이든 인간이든 자신에게 해가 된다 싶은 걸 감으로 아는 거죠.”
“저기, 혹시 우릴 공격했다던 에조님도…….”
문득 간밤의 꿈이 떠올라 뱉어낸 소리였는데 오오토리가 우뚝 멈춰 섰다. 항상 초승달처럼 둥글게 휘어있던 눈이 순간 날카롭게 빛났다. 등줄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기억나신 거예요?”
“그런 건 아니고, 또 꿈을 꿔서.”
“오늘은 어디까지였어요?”
“늘 똑같아. 너한테 달려가서 끌어안고, 내가 뭐라고 소리 질러서 에조님이 울면 끝이야.”
오오토리의 시선이 자신의 어깨로 향하는 게 보였다. 아직도 오오토리는 그 일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직접적으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건 쵸타로의 잘못이 아니야.’하고 말했지만 오오토리의 죄책감을 덜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괴로움을 가중시키는 느낌이 들어 언제부턴가 자연스럽게 그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오오카미님을 공격하려던 건 아닐 거예요.”
“그럼 널 공격하려던 거란 말이야?”
“네, 아마도.”
“넌 그 때 그냥 어린 강아지였잖아! 그런 애가 에조늑대 영물한테 무슨 해가 된다고…….”
오오토리가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시선을 피한 적은 처음이었다. 대답도 하지 않을 작정인지, 꾹 다문 입은 열리지 않았다. 엉뚱한 바위 어딘가 쯤으로 향한 시선이 돌아올 때까지 눈을 떼지 않기로 작정한 유이는 뚫어져라 오오토리를 쳐다보았다. 오오토리 쵸타로는 솔직하고, 상냥하고, 따뜻했다. 오오카미 유이에게 단 한 명뿐인 ‘내 편’이었다. 오오토리는 한 번도 그녀의 질문에 대답을 피한 적이 없었다. 내심 무서워진 유이는 오기를 부려가며 계속 오오토리를 쳐다보았다.
“쵸타로.”
“죄송해요. 우리 일단 동굴로 가요. 누가 우리 얘길 듣는 건 싫으니까.”
대화는 끊어졌다. 유이는 말없이 오오토리와 함께 걸었다. 하지만 머릿속은 혀만큼 얌전해지질 않았다. 정말로 대화를 엿듣는 누군가가 있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이 대화를 피하기 위한 변명인지 괜한 의심이 피어났다. 유이는 진심으로 전자가 맞길 바랐다. 가정일지라도 오오토리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다는 상황 자체가 너무도 끔찍했다. 마을 사람들에게 사랑보다 동정과 힐난의 눈초리를 더 많이 받는 그녀에게 유일하다시피 따뜻한 눈길을 보내주는 존재인 만큼 언제나 자신의 편이기를 바랐다.
얼마나 걸었을까, 조금씩 주변이 트이기 시작하더니 곧 동굴 입구가 나타났다. 동굴 입구는 오오토리가 개의 모습을 하더라도 충분히 드나들 수 있을 만큼 넓었다. 내부는 입구보다도 천장이 더 높은지 안쪽이 푹 패여 있었다. 안쪽으로도 길게 이어지는 모양이었지만 오오토리는 깊숙이 들어가지는 않았다. 입구에서 오십 보쯤 떨어진 곳에 짚과 나뭇잎으로 만든 보금자리가 있었다. 주변에는 일반적으로 인간들이 사용하는 등불과 그릇 등 몇 가지 물건들도 보였다. 오오토리에게 딱히 필요한 물건은 아니었다.
“동굴까지 온 건 처음이네.”
“제가 지내기엔 불편하지 않지만, 보통 인간들한테는 어떨지 모르겠어서 계속 망설였거든요. 춥진 않으세요?”
그제야 유이는 그것들이 자신을 위해 준비되었다는 걸 눈치 챘다.
“응, 괜찮아.”
아까 전의 이야기를 다시 물어도 될지 고민이 되었다. 만약 오오토리가 다시 대답을 피한다면 그 뒷감당을 못할 것 같았다. 그럴 바엔 처음부터 묻지 않는 게 나았다. 오오토리 역시 다시 그 화제로 돌아갈 생각은 없어보였다. 오오토리는 유이를 그 보금자리에 앉혔다. 동굴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막기 위해 나뭇잎과 짚을 쌓아 만든 보금자리는 생각보다 푹신했다.
“그냥 감이라서 명확하게 설명하긴 어려운데요. 오늘 오셨다던 그 분도 영물한테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저는 이렇게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오오카미님 말고 다른 사람의 존재를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거든요.”
영물한테 영향을 미친다고?
유이는 숨을 훅 들이켰고, 맞은편 벽에 기대어 앉은 오오토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유이와 비슷한 능력을 가진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럼 오히려 자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능력이 불안정해 바람 앞의 등불처럼 들렸다 안 들렸다 반복하는 일은 신물 날 정도로 겪었다. 만약 그 사람이 정말로 오오카미 가문과 비슷한 능력을 가졌다면,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럼 나한테 도움이 될 지도 모르잖아.”
“아녜요. 오오카미님이랑 달라요.”
“어떻게 다른데?”
“오오카미님하고 같은 능력이라면 영물들이 그 존재를 불안해 할 이유가 없어요. 이건 저만 그런 게 아니거든요. 지난밤에 시시오우님이 마을에 내려가시지 않았어요?”
야마다 촌장이 일구는 밭을 엉망으로 만든 건, 발자국으로 미루어보건대 멧돼지 영물이었다. 하지만 그게 마을에 나타난 사람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긴 어려웠다.
“그 사람은 아침에 우리 마을에 왔는걸.”
“그럼 밤중에 숲을 넘었단 얘기잖아요.”
다시 몸에 소름이 돋았다. 오오카미가 살고 있는 마을은 바다와 면한 남쪽을 제외하고는 사방이 숲이었다. 그나마 동쪽이 옆 마을과 통하는 길이 크게 뚫려 있어, 서쪽이나 북쪽보다는 걷기 쉬웠지만 밤중엔 불빛 하나 찾기 어려워 위험하긴 매한가지였다. 아침에 낯선 사람을 발견하고 느낀 거북한 감정은 이런 사실을 무의식중에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이 숲엔 동물들 뿐 아니라 영물이 많아서 밤중엔 아무도 숲을 넘지 않아요. 어디든 이 마을에 오기 전에 다른 마을을 거쳤을 텐데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니, 그건 말이 안 돼요.”
“하, 하지만…….”
나쁜 추측은 되도록 하고 싶지 않았다. 딱히 그 사람을 옹호할 생각은 없었지만 영물들이 불안해 한다는 가정 자체가 유이를 긴장시켰다.
“이유가 어쨌든, 그 사람이 밤중에 숲을 넘는 바람에 잠들었어야 할 영물들이 전부 깨어나서 돌아다녔어요. 아마 시시오우님도 그러다 마을로 내려가신 걸 거예요.”
“그럼 쵸타로도 깨어 있었어?”
“네. 처음엔 이유를 몰라서 동굴 안쪽까지 한참 걸어 다녔는데, 아침에 입구로 돌아오고 나서 오오카미님 말고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손가락 끝으로 애꿎은 짚단을 헤치던 유이는 가까워진 체온에 놀라 번쩍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오오토리가 코앞으로 다가와 걱정스런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면서 덩달아 숨도 빨라졌다. 꾹 깨문 입술을 살짝 풀고 천천히 숨을 쉬었다. 과도한 상상은 늘 불안감을 불러오기 마련이었다. 낯선 방문자에 대한 쓸데없는 망상을 전부 날려버리기 위한 심호흡은 그 이후로도 조금 지속되었다.
“저는요. 다른 영물들이 동요하는 것도, 제가 제 자신을 잃는 것도 무섭지만, 그것보다 오오카미님이 다치는 게 더 무서워요.”
오오토리의 손이 어깨를 감쌌다. 유이는 시선을 피할 길이 없어 주먹만 꼭 쥐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심장이 뛰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마주봐선 안 된다고 되뇌었지만 오오토리의 팔 안에 갇힌 셈이라 소용이 없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시선만 회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갈피를 못 잡는 자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야말로 이성과 감정의 충돌이었다.
“그 사람 곁에 가까이 가지 마세요. 네?”
“알았어. 조심할게.”
유이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몇 초라도 더 이 상태로 있다가는 더한 말도 해버릴 것 같았다. 유이가 토끼눈을 하고 빤히 쳐다보자,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오오토리도 마침내 손을 떼었다. 가볍게 한숨을 뱉고, 오오토리느 약간의 거리를 벌려 마주 앉았다. 과한 듯 아쉬원 듯, 미묘한 거리였다.
“내일이면 완전히 보름달이겠어요.”
툭 뱉어낸 말이 무겁게 동굴 바닥으로 떨어졌다. 자연스럽게 유이의 시선도 동굴 입구로 옮겨갔다. 그녀가 앉은 자리에서는 밤하늘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방금 전 보았던 밝은 달이 눈앞에 생생했다. 오오토리의 말대로 내일이면 완전한 보름달이 될 터였다.
이번엔 무사히 지나갈 수 있을까.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유이는 순조롭게 제 의무를 다했다. 해가 지나갈수록 능력이 안정되는지, 영물들과의 의사소통도 한결 수월했다. 보름달이 뜬 날에는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목소리에 시달렸지만 그래도 좋았다. 마을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에 행복했다. 영물들과도 제대로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기뻤다. 인간도, 영물도, 서로에게 분노를 들이밀지 않아도 돼서 좋았다.
이렇게 유지되던 평화는 반 년 만에 깨지고 말았다. 이정표를 잃어버린 사람 마냥 목소리들 가운데서 헤매었다. 반짝거리며 빛나는 듯 했다가 홱 꺼지는 작은 불씨처럼 유이의 능력도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보름달이 뜨자 영물들 중 몇몇이 여지없이 폭주했다. 땅을 울리는 짐승의 울음소리와 하늘을 가르는 인간의 비명소리가 난무했다. 유이는 막지 못했다. 인간도, 영물도, 상처를 입은 밤이었다.
“괜찮을 거예요.”
매번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말을 건네 오는 오오토리가 고마웠다. 하지만 유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해야 할 말 이상의 것을 입에 담을까 무서웠다. 유이는 쓰게 웃으며 손을 내려다보았다. 지난달에 물린 상처는 아직도 다 아물지 않고 남아있었다. 아무도 죽지 않은 건 다행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었다. 중개자 역할을 타고난 가문의 아이, 오오카미 유이는 인간과 영물 모두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밤이 깊어갈수록 달은 더욱 빛났다. 어둠과 함께 찾아온 한기가 동굴 안에 감돌았다.
행사장에서 만나요 X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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