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 합작 <사계절> 中 가을

야규 히로시 x 바바 토와


* 합작이 취소되어 이쪽으로 올립니다





 9월 중순이 되어서도 햇볕은 뜨거웠다. 예전이라면 이미 가을이 시작되고도 남았을 시기였겠지만, 요즘은 늦여름과 초가을에 어중간하게 걸치는 경우가 많았다. 선글라스를 챙겨올 걸 하는 생각도 잠시 했지만 그 모든 것을 날려버릴 정도로 바람은 시원했다. 일본에서 가장 빠르게 단풍이 든다는 홋카이도는 풍경만으로는 이미 완전한 가을에 접어든 상태였다.


 “단풍 진짜 예쁘게 들었다. 봐요, 야규상.”

 “도쿄는 아직인데, 홋카이도는 정말 한창이군요.”


 편한 면바지에 반팔 와이셔츠를 입은 야규는 평소보다 훨씬 가벼워 보였다. 항상 딱딱하게 굳은 표정 대신 자리 잡은 엷은 미소는 한결 상쾌한 느낌을 더했다. 그 가지런하던 머리카락이 안경 위로 살짝 흩날렸다. 토와는 찰랑대는 앞머리와 동그란 안경, 그리고 그 밑의 날카로운 눈이 좋았다.


 “좀 더 걸을까요?”


 돌아보는 눈빛에 가슴이 뛰었다. 토와를 초대하듯 자연스럽게 야규는 왼손을 내밀었다. 이런 날 정도는 괜찮겠지.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토와는 야규의 손을 꼭 맞잡았다. 가을 햇빛 아래에서 걷기 딱 좋은 온도가 손끝에서부터 퍼져나갔다.

 두 사람의 가을 단풍 여행은 정말 우연히 이루어졌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단풍이 아름다운 거리를 비추었을 때, ‘도쿄엔 단풍 언제 들까요?’라고 무심코 말했던 게 시작이었다. 워낙 바빴던 탓에 제 때 여름휴가를 쓰지 못한 야규는 그 휴가를 이용해 단풍 여행을 가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토와는 9월에 무슨 단풍이냐며 웃었지만, 홋카이도로 전출 간 선배에게 받았다며 단풍 사진을 들이밀었을 때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덕분에 토와는 이미 써버린 여름휴가 대신 금요일에 월차를 냈다. 짧게라도 다녀오자는 야규의 말에 넘어간 탓이었다.


 “기왕이면 야규상 생일에 맞춰서 단풍여행 갔음 좋았을 걸.”

 “그 때 제가 쉴 수 있을 거란 보장이 없잖습니까.”

 “그래도.”


 볼을 잔뜩 부풀렸더니 야규가 낮게 쿡 웃었다. 뭐가 그렇게 좋을까. 눈이 마주쳤다. 그래도 볼에 바람은 빼지 않았다. 부루퉁한 표정으로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을 마주하자니 왠지 조금 얄미웠다. 훅 바람을 빼낸 토와는 입술을 삐죽였다.


 “왜 웃어요.”

 “바바양이 귀여워서요.”


 누가? 대답하는 대신, 토와는 고개를 홱 틀어 앞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다시 쿡 웃은 야규가 옆에서 따라 걷는 게 느껴졌다. 야규의 생일은 10월 19일. 한창 가을이니 단풍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와 다름없었다. 사실 영화를 보던 그 날, 야규가 ‘시월쯤엔 한창이지 않겠습니까.’라고 대답했을 때부터, 그럼 야규상 생일엔 단풍을 보러 가자고 할 마음을 먹은 토와였다. 그런데 야규한테 선수를 뺏긴 데다, 그녀의 바람보다 날짜는 훨씬 일렀다. 야규와 함께 하는 여행이 싫지는 않았지만, 역시 날짜에 미련은 좀 남았다.

 뜨거운 볼을 식혀주려는 듯 바람이 불었다. 쏴아아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나무는 꼭 색색의 옷을 입고 춤을 추는 듯 했다.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나온 한두 장의 단풍잎은 바람을 타고 나풀거리다 산책로에 도장을 찍듯 내려앉았다. 햇볕은 따뜻했고 하늘은 높았다. 완연한 가을의 정취가 산책로를 물들이며 두 사람도 함께 물들였다.


 “그래도 역시 보니까 좋다.”

 “오길 잘했군요.”

 “응, 진짜로.”


 그 말이 기뻤다. 사소한 한 마디였지만 같은 감정을 공유한다는 느낌에 헤헤 웃음이 났다. 손등으로 볼을 꾹꾹 누르며 바닥을 보고 걷는 사이, 야규가 문득 자리에 멈춰 섰다. 한 발 앞으로 나간 토와는 뒤를 돌아보았다. 야규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와.”


 그대로 시선을 따라 올라가 보니, 구름 한 점 없이 높고 파란 하늘에 단풍잎이 드리워져 있었다. 마치 나무를 통째로 뒤집어 맑은 물속에 빠뜨린 듯한 착각이 일 정도였다. 떨어진 단풍잎은 새처럼 팔랑이며 하늘을 수놓았다. 이 장관에 저절로 입이 열리며 탄식이 나왔다. 정말 예쁘다.

 갑자기 다가오는 체온에 고개를 내렸다. 야규가 가까웠다. 너무 심장이 뛰어서 눈을 마주치는 게 곤란할 정도로, 코끝의 숨 때문에 간지러울 정도로, 그리고 입술을 맞출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토와는 눈을 꼭 감았다. 가을 냄새가 잔뜩 묻어나는 작고도 큰 스킨십은 은은한 듯 짙었다.


 “정말 예쁘군요.”


 귓가에 속삭이는 작은 목소리는 귀를 타고 내려와 가슴을 계속 간질였다. 붉어질 대로 붉어진 얼굴은 아마도 단풍잎과 같을 거라 생각하며, 토와는 야규의 허리를 확 끌어안았다. 역시 이 사람이 너무 좋아.





(2016. 10. 21.)










160807 <당신의 수호천사>

「잊고 있었던」

테즈카 쿠니미츠 드림




 그래, 어딘지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모두가 테즈카의 표정을 가리키며 딱딱하다고 했지만 그녀는 그 뒤에 숨겨진 부드러운 얼굴을 알았다. 미소 지을 때면 웬만한 사람들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살짝 입매가 올라갔고, 아주 살짝 눈이 휘곤 했다. 네모나게 반듯반듯한 말투로 포장한 상냥함을 알았고, 내미는 손끝에서 익숙함을 읽었다. 처음에 느꼈던 기시감은 괜한 게 아니었다.

 제 앞에 서 있는 테즈카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부끄러웠다. 이렇게나 가까이 있었는데 전혀 알아보지 못한 게 미안했다. 동시에 기뻤다. 그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테즈카인 게 기뻤다. 온갖 감정이 뒤섞여 눈물이 왈칵 솟아올랐다.


 “왜 우는 거지.”

 “미, 미안, 테즈카군, 울려던 건 아닌데…….”


 장롱 속에 너무 많은 것들을 쌓아놓는 바람에 문을 열자마자 모든 것이 마구 쏟아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한 번 열린 기억의 문은 잊고 있었던 얼굴을 떠올리게 했다. 어릴 적, 놀이터의 그 소년은 다른 누구도 아닌 테즈카 쿠니미츠였다.


 “미안해, 그동안 못…… 알아봐서…….”

 “괜찮아. 기억해 냈으니까.”


 평소엔 다른 누구보다도 테즈카의 표정을 잘 읽는다고 자부하던 그녀조차도 지금은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테즈카가 화를 내지 않는다는 데에 안도했고, 그 안도감에 눈물이 더욱 솟았다.

 너무 보고 싶었어.

 어릴 적 만남 자체를 잊었던 건 아니었다. 다만 그 얼굴이 조금 흐릿했을 뿐이었다. 지금 테즈카에게서 느끼는 익숙함이 그 추억에서 비롯된 거라는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테즈카의 손이 볼에 닿았다. 눈물을 닦아주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손을 타고 전해지는 심장박동에 호흡이 따라갔다. 얼마나 그런 상태로 있었을까. 조금씩 호흡이 안정되자 눈물도 저절로 그쳤다. 그녀는 여태 그랬듯, 누구보다도 예쁘게 웃고 싶었다. 자신의 소중한 사람에게 누구보다도 환하게 웃어주고 싶었다.


 “많이 보고 싶었어, 테즈카군.”

 “나도 마찬가지다.”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테즈카 역시 웃었다. 다른 사람에겐 어떻게 보일 진 몰라도, 그녀는 확신했다. 테즈카는 지금껏 그 어떤 때보다도 가장 환하게, 가장 밝게 웃고 있었다. 다시 부드럽게 손가락 끝이 그녀의 볼을 스쳤다. 이 작은 스킨십이 ‘모두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이내 볼에서 떨어진 손이 자연스레 그녀의 손을 잡았다. 맞잡은 손으로 느끼는 서로의 심장박동과 체온이 좋았다. 잊고 있었던 그 옛날의 감각을 모두 되살려주는 마법 같았다. 마주보던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앞을 바라보고 걷기 시작했다. 이 작은 마법을 마음껏 만끽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 작은 마법을 더 크게 만들어줄 주문이, 두 사람의 가슴 속에서 크고 있었다.





(2016. 08. 07.)









160705 <DOLCE> 

「우리가 달라진 이유」

토야마 킨타로 드림




 “내는 잘 모르겠데이.”


 토야마 킨타로의 어깨가 쳐지다니 별 일이 다 있구나.

 그녀는 와, 하고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정말 진지하게 풀이 죽은 표정을 마주하는 바람에 잠시 얼어붙고 말았다. 토야마가 언제 이렇게 심각한 표정을 한 적이 있었던가? 가끔 부탁―거의 막무가내로 부리는 떼지만―을 거절할 때나 보이던,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만 봐온 탓에 쉽사리 반응할 수가 없었다.


 “내는 우리 윽수 마이 친하다꼬 생각한데이.”


 단어를 고쳐줘 봐야 의미가 없을 것 같아 대답하는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차라리 평소처럼 입술을 부루퉁하니 내밀고 있으면 마음이 편할 텐데, 꾹 깨문 입술에 괜히 같이 긴장이 됐다.


 “와 이카는지 몰겠데이. 니만 보믄 막 도망가고 싶다 안 카나.”


 그녀는 결국 입을 딱 벌린 채로 멈춰버렸다. 본인 입으로 이렇게 솔직하게 말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지금보다 더 어릴 때부터 봤지만 여전히 토야마 킨타로는 참 튀는 사람이었다. 예상 밖의 행동으로 그녀를 당황하게 만들던 게 벌써 몇 년인데, 고대하던 순간까지도 이렇다니.


 “심장이 막 벌렁, 벌렁 해가 메일도 몬 쓴데이.”

 “킨쨩.”

 “니도 글나?”

 “내는 옛날부터 그캤다.”

 “니는 그캐도 메일 보냈나?”

 “몬 할 것도 없제. 한 시간 쓰믄 된다.”


 어리둥절해진 토야마의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제 몸으로 물음표를 만들어서 보여주기라도 할 것 마냥 삐딱한 자세에 풋 웃음이 났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토야마는 변한 게 참 없었다.

 그래, 이럴 줄은 알았지만 결국 내가 말해야 되겠구나.

 남들처럼 멋진 고백을 받는 장면을 상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토야마 킨타로를 잘 알았다. 제 감정이 어떤지조차 자신에게 상담하러 와야 하는 이 귀엽고 순수한 남자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우리 와 그러는 긴데?”

 “좋아서 그런 기다.”

 “내는 원래 니 좋아했다.”


 얼굴에 열이 올랐다. 자주 들었던 ‘좋아한다’는 말이 새삼 다르게 다가왔다.


 “문디야, 그게 아이고…….”


 몇 번이나 연습했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초롱초롱한 눈이 뒷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고 심호흡을 했다.


 “그냥 좋은 기 아이고 사, 사랑하는 기래이.”


 눈만 깜빡이던 토야마의 얼굴이 금세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반응을 지켜보는 것도 꽤 나쁘지 않단 생각에 조금 긴장이 풀어졌다. 그녀는 덥썩 토야마의 양손을 붙잡았다.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듯, 토야마의 어깨가 한껏 위로 솟았다.


 “니도 내 보믄 심장 벌렁벌렁 하제? 안고 싶고, 뽀뽀도 하고 싶고 그제?”

 “니, 니, 니, 우예 알았노…….”

 “내도 그카니까.”


 더 이상은 무리였다. 새빨간 토야마의 얼굴보다도 제 얼굴이 더 빨갈 것 같았다. 심장이 너무 뛰는 바람에 귀가 먹먹했다. 그녀는 손을 놓고 토야마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예전과 다른 건, 그녀가 품에 쏙 들어갈 만큼 토야마의 키가 커졌다는 것뿐이었다.


 “킨쨩. 니 내 사랑하는 거래이.”


 도대체 본인 입으로 어떻게 이런 소리를 할 용기가 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꼭 끌어안은 토야마에게서도 똑같이 빠른 심장박동이 느껴진다는 점에 확신이 들었다.


 “사랑……. 사랑…….”


 단어 자체를 흡수하려는 듯 몇 번이고 되새기는 토야마의 품 안에서, 그녀는 색색 숨만 쉬었다. 한참을 중얼거린 토야마가 갑자기 그녀를 품에서 떨어뜨려 놓았다. 그리고는 얼떨떨한 표정의 그녀를 향해 더없이 환하게 웃어보였다.


 “맞데이! 내 니 사랑한데이!”


 소꿉친구였던 두 사람이 연인이 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2016. 07. 05.)










​​160627 <당신의 수호천사>

「욕심」

후지 슈스케 드림




 ​“왜 그렇게 입술이 삐죽 나왔을까?”


 작은 어깨가 놀란 듯 파르르 떨렸다. 그녀가 뭘 신경 쓰는지 너무 빤히 보여서 웃음만 났다. 그리고 그걸 모른 척 지나갈 만큼, 후지 슈스케는 성격이 좋지는 않았다. 역시나 그녀는 우물쭈물, 애꿎은 볼만 부풀릴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불만은 말해줘야 알잖아.”

 “슈쨩은 말 안 해도 다 알면서.”


 가벼운 저항에 후지는 또 웃기만 했다. 물론 알지만 직접 묻고 직접 듣는 게 좋았다. 직접 말로 꺼내는 데에는 많은 과정이 필요하다. 우선 자신의 현재 감정을 이해하고 이걸 말했을 경우 자신과 상대방의 반응도 예측해 볼 필요는 있다. 여기서 말해도 된다는 결론이 나오면 말을 정리하고 입을 연다. 그녀의 경우는 보통 반응을 예측하는 단계에서 말하기를 포기하는 편이었다. 본인이 부끄러워서, 그리고 후지가 무슨 말로 답할지 몰라서. 사귄 지 꽤 됐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그녀는 그랬다.


 “글쎄. 내가 뭘 알고 있을까?”


 눈을 마주치고 다시 생긋 웃어주면 그녀는 결국 진다. 후지는 물론 알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했다. 그런 그녀가 귀여우니까, 사랑스러우니까.


 “우……. 그, 그냥 슈쨩, 여전히 인기 많구나 싶어서…….”

 “질투?”


 전등 불이라도 켠 듯, 한 순간 새빨갛게 물드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바닥으로 떨어진 시선이 책상을 흘끔거렸다. 사물함에 들어있던 탓에 거절할 수도, 버릴 수도 없어 그대로 들고 온 발렌타인 초콜릿이 꽤나 많았다. 후지는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휘감았다. 마른 그녀의 몸이 금방 제 품으로 풀썩 쓰러졌다. 그리고 가볍게 이마에, 코끝에,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시선이 돌아가지 않도록.


 “질투하는 여자친구라니, 너무 귀여워서 곤란한 걸.”

 “그, 그치만…….”


 그녀가 뒷말을 삼키지 않도록 부드럽게 손가락으로 볼을 쓸었다. 강압적이지는 않지만, 기다리고 있다는 확실한 표현.


 “슈쨩이 오로지 내 거인 거 마냥 욕심 부린 것 같아서 싫어…….”


 아. 사랑스러워.

 후지는 다시 입을 맞추었다. 품 안에 쏙 들어오는 이 작은 공주님이 괜한 생각으로 불안하지 않을 만큼 충분한 시간을 들였다. 그리고 제 팔을 붙잡은 손가락에 잔뜩 힘이 들어갈 쯤에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깜빡깜빡, 커다란 두 눈에 가득 담긴 모든 것들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욕심 부려도 돼. 난 언제나 너만의 왕자님으로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 새빨간 얼굴이 더없이 환한 미소로 물들어 가는 것이, 누구보다도 사랑스러웠다.


 “응!”





(2016. 06. 27.)











160320 <당신의 수호천사> 

「두 사람의 밤」

키쿠마루 에이지 드림





 “별 엄청 많다.”


 이렇게 별이 많은 하늘을 본 게 얼마만인지 가물가물했다. 도쿄의 밤하늘은 별빛보단 네온사인으로 빛나는 편이었다. 얼마 전에 함께 봤던 로맨스 영화에도 이런 장면이 있었다. 주인공 커플이 들판에 드러누워 밤하늘을 수놓은 별을 감상하던 장면. 물론 두 사람은 들판이 아니라 펜션 앞마당의 벤치 옆에 돗자리를 깔고 눕긴 했지만,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기엔 충분했다.


 “그치? 잘 찾아온 것 같다냥.”

 “이런 델 어떻게 찾았어?”

 “엣헴, 다 방법이 있지.”


 타이밍이 좋았다. 가까운 데라도 놀러가자고 계획을 잡던 중에 마침 그 영화를 보았고, 괜찮아 보이는 펜션 후보 세 군데 중 한 곳이 별이 쏟아질 듯 무수히 빛나는 걸 볼 수 있다며 선전 중이었다. 키쿠마루는 쾌재를 부르며 그 즉시 예약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곧장 츠바사에게 전화를 걸어 기쁜 소식을 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진짜로 별이 쏟아질 것 같아.”

 “손 뻗으면 이렇게 잡힐 것 같다냥.”


 정말 잡기라도 하려는 듯 키쿠마루가 번쩍 손을 들었다. 커다란 손이 별들 사이에 펼쳐졌다. 그리고 그 손은 천천히 밤하늘을 쓸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반짝, 반짝. 제 손이 움직일 때마다 별들이 이쪽으로 밀려났다가 저쪽으로 흩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밤하늘에 손을 담그고 몇 번이나 움직였을까. 부드러운 감촉이 손등을 덮었다. 저보다 작은 손이 위로 겹쳐보였고, 별들은 더욱 반짝였다.


 “따뜻하다.”


 츠바사가 말한 대로였다. 바람은 밤공기를 싣고 다녀 차가웠지만 맞붙은 손은 따뜻했다. 키쿠마루는 고개를 슬쩍 왼쪽으로 돌렸다. 손끝에서 팔꿈치 정도의 공간, 그리고 츠바사의 옆얼굴. 시선이 닿아서일까, 금방 눈이 마주쳤다. 펜션 앞에 설치된 작은 등 때문에 그림자가 생겨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키쿠마루는 여전히 하늘을 향해 뻗고 있는 손을 슬쩍 움직였다. 그리고 츠바사의 손에 깍지를 꼈다. 천천히 그 손을 밤하늘 속에서 꺼내오며, 반대쪽 팔로 바닥을 밀었다. 이제 두 사람 사이에 남아있는 공간은 주먹 하나 정도였다. 그림자 속에 가려진 얼굴이 붉어 보였다.


 “츠바사.”

 “응?”

 “좋아해.”


 츠바사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키쿠마루는 입술을 맞대었다. 별빛과 시원한 바람, 그리고 두 사람만의 밤. 모든 게 완벽했다. 참을 수가 없이, 그녀가 좋았다. 입술이 떨어지고 나서 마주한 얼빠진 표정마저도.


 “히히. 진짜로 좋아해, 츠바사.”

 “나도, 많이 좋아해. 에이지.”


 그래도 역시 환하게 웃어주는 얼굴엔 비할 바 없지만. 깍지 낀 손을 사이에 놓고, 두 사람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름다운 밤하늘이었다.


 “진짜 좋다냥.”

 “응. 엄청. 아~주 많이.”





(2016. 03. 20.)








160206 <당신의 수호천사> 

「빠져들다」

키쿠마루 에이지 드림




 츠바사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이런 모습을 본 적은 처음이었다. 아니, 중학교 때 친구들과 함께 구경을 갔던 적이 있을 테니 완전히 처음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츠바사는 테니스 코트에서 거의 날아다니는 자신의 남자친구, 키쿠마루 에이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실 키쿠마루와 만나기 전까지는 테니스에 딱히 관심이 많지는 않았다. 다른 많은 여자애들이 그렇듯 특별히 잘하거나 관심 있게 보는 스포츠가 없었다. 게다가 워낙 운동을 못하다 보니 사귄 이후에도 함께 테니스를 치는 건 상상도 한 적이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모든 종류의 공이 날아오는 걸 무서워하니까.

현재 츠바사는 길거리 테니스장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간만에 모이는 세이가쿠 테니스부 레귤러들의 모임에 초대받은 덕분이었다. 가끔씩 연락하던 클래스메이트 모모시로에게 ‘저번 모임에 에이지선배가 엄청 자랑하는 바람에 후지선배가 궁금하다면서 데리고 오래’라며 메일이 왔다. 물론, 키쿠마루에겐 비밀로 하라는 말도 덧붙어 있었다.

 츠바사가 테니스장에 도착한 것은 키쿠마루와 오오이시, 이누이와 카이도가 시합을 시작한 이후였다. 모모시로와 짧게 손 인사를 하고 나자 후지가 츠바사를 벤치에 앉혔다. 키쿠마루의 시야에 츠바사가 들어오지 않도록 선정한 애매한 위치였다. 조금 멀었지만 시합을 보기에는 충분했다.

 과거에 이런 시합을 했었다며 늘어놓는 무용담을 들은 적은 많았지만 실제로 보니 느낌이 달랐다. 와. 그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굉장하다, 멋있다, 엄청나다, 등등 알고 있는 모든 종류의 감탄사가 순간순간 떠올랐다. 키쿠마루가 두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할 때는 열심히 눈을 비빈 탓에 눈이 충혈 되기도 했다.


 “예에!”

 “오오이시, 키쿠마루 승.”


 테즈카의 짧은 말로 시합이 끝났다. 츠바사는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손을 번쩍 들고 만세를 부르는 키쿠마루가 오오이시를 끌어안고 즐거운 목소리로 승리를 만끽하는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훗, 미소 지은 후지가 츠바사를 안내했다. 코트에 좀 더 가까워지자 키쿠마루가 돌아보았다.


 “츠바사!”


 남자친구의 얼굴이 더 환한 미소로 물들어가는 것을 보며 츠바사도 밝게 웃었다.


 “완전 최고. 내 남친 엄청 멋있네.”

 “시합 봤냥?”


 고개를 끄덕이자 키쿠마루는 상기된 볼을 살짝 긁었다.


 “완전히 빠져들어서 옆에서 말하는 것도 못 듣던데.”

 “아, 죄송해요. 말 거셨었어요?”


 정말로 후지의 말을 들은 기억이 없었다. 나 그 정도로 집중했었나? 당황한 츠바사의 표정에 후지가 풋 웃었다.


 “여자친구가 우리 후배라길래 어떤 사람인가 싶어서 몰래 불러봤는데, 두 사람한테 다 서프라이즈가 된 모양인데.”

 “이겨서 다행인 걸. 열심히 한 보람이 있네, 에이지.”


 후지는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수건으로 땀을 닦고 있던 오오이시가 웃으며 덧붙였다. 키쿠마루가 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운동도 하지 않았지만 츠바사 역시 볼이 붉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땀범벅인 이누이는 안경을 빛내며 키쿠마루와 츠바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흠, 흥미롭군. 이건 새로운 데이터가 되겠어.”

 “하지 말라냥!”


 이누이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는 키쿠마루를 보며 웃던 츠바사가 수건을 내밀었다. 땀으로 끈적거리는 손이 수건을 받아 들었다. 키쿠마루는 얼른 얼굴을 수건에 파묻었다. 푸. 수건에서 빠져나오며 한 번에 숨을 뱉어냈다. 그리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츠바사는 얼른 고개를 들었다. 키쿠마루의 붉은 볼에 입술이 잠깐 닿았다가 떨어졌다.


 “오~”

 “생각보다 대담하네, 콘마 상.”


 부끄러운 듯 씨익 웃던 키쿠마루가 아쉬운 듯 덧붙였다.


 “난 입술에 받는 게 더 좋은데.”


 츠바사의 얼굴도 붉었다. 주변의 휘파람 소리가 츠바사를 더 부끄럽게 했다. 아냐, 볼에 하려던 게 아니라 입술에 하려던 거였어. 그냥, 조금, 너무 떨려서 방향 조절에 실패한 것뿐이야. 붉은 얼굴을 가리려 고개를 푹 숙이자 키쿠마루가 그 위로 수건을 덮었다.


 “앗, 안 된다냥, 너무 귀여우니까 나만 볼 거야!”


 테니스장이 온갖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2016. 02. 06.)










151005 <샹그릴라>

「내가 널 볼 수 있을까」

후지 슈스케 드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렇게 느꼈지만 그녀는 참 작다. 키도, 덩치도 그다지 크지 않은 내 품에 쏙 들어와 안길 만큼 체격이 작아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내 손을 붙잡는 손도, 구두 속에 예쁘게 자리한 발도, 오물오물 애교 가득한 말을 내미는 입도.


 “슈쨩!”


 멋대로 붙여버린 이 애칭마저도 왠지 내겐 작단 느낌으로 다가온다. 모모라던가, 에이지가 매번 ‘슈쨩…?!’이라며 미묘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건 조금 신경에 거슬리기도 하지만. 뭐, 그녀가 ‘슈쨩’하고 부를 때의 목소리가 귀여우니까 그 ‘조금’은 무시할 수 있다.


 “넘어질라, 조심해.”

 “괜찮아!”


 날씨가 풀린 뒤로는 간만의 피크닉이라면서 자주 신지도 않는 높은 굽의 구두를 신은 게 걱정이 된다. 어릴 적부터 워낙 덜렁거리다보니 나도 모르게 눈으로 연신 그녀를 쫓게 된다. 신이 나서 연신 빙글빙글 도는 것도 참 사랑스럽기는 한데.


 “위험해, 류.”

 “웅, 안 그럴게.”


 정말로 화내기 전에 알아차리고 딱 멈추는 것도 신기하다. 좀 더하면 화내겠다, 그런 생각으로 멈춘 건 아니었을 테고 그냥 감이겠지. 멈춰야할 때를 잘 안다고 해야 하나?


 “그치만 빨리 가고 싶은 걸.”


 대답 대신 웃으면서 발을 좀 더 빨리 했다. 배시시 웃으면서 그녀가 손을 뻗었다. 그 작은 손을 꼭 쥐고 발을 맞춘다. 오늘의 목적지는 그냥 평범한 공원. 간만에 솜씨 좀 발휘했다면서 유미코 누나가 도시락 싸줬는데. 거기까지만 말했지만 그녀는 곧장 그럼 피크닉! 이라 외쳤다. 저 앞으로 공원 입구가 보였다. 마음이 달아서인지 그녀가 또 그 작은 발로 앞서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찰랑이는 머릿결이 아름답다.

 아. 이렇게 계속 시야에 뒀으면 좋겠는 걸. 이만큼 작은 김에 인형처럼 작게 만들어서 내 손 위에 올려놓고 계속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두 번 한 게 아니다. 나만의 천사였으면 좋겠는데. 어디로 튈지 모르게 엉뚱하지만 귀여운 그녀가 누군가의 시선을 끄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 시선을 걷어내고 싶은 게 남자친구의 마음이니까.


 “슈쨩!”

 “응?”


 말없이 웃는 나를 그녀가 빤히 올려다본다. 눈만 몇 번 깜빡이고는 아주 환하게, 천사처럼 웃는다.


 “헤헤, 좋아해.”


 볼이 붉게 물드는 너를 내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결국 애꿎은 바닥으로 시선을 한 번 돌려서 숨을 뱉어낸 다음에 고개를 들었다. 마음 한 가득 퍼져나가던 독점욕이 사그라지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그런 척 표정은 바꿔야하니까.


 “음… 슈쨩은…….”


 대답이 돌아오지 않으니 다시 그녀가 입을 오물거린다. 기대하는 눈빛도 사랑스러워. 이런 그녀를 어떻게 보지 않을 수 있겠어.


 “난 좋아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데.”


 함박웃음이 돌아온다.


 “나도 사랑해!”


 얼굴이 전체적으로 붉은 그녀도 귀엽다. 역시, 나만 보고 있고 싶네. 말할 수 없는 마음을 눌러두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품 안에 가둬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꼭. 




(2015. 10. 05.)








150917 <샹그릴라> 

「이유」

니오 마사하루 드림




 “진심이세요?”


 아, 바로 이 표정 때문에 넘어간 거라고도 할 수 있단 말이지, 아가씨. 눈을 커다랗게 뜨고 깜빡거리며 쳐다보는 어리둥절한 얼굴. 날 상대로 이렇게 순수한 표정을 짓는 사람은 많지 않다니까. 놀리는 재미도 있지만, 그 뒤에 장난이라는 걸 알고 안심하는 그 표정이 압권이지. 하지만 지금은 무슨 표정을 할까. 기대감에 가슴이 뛴다.


 “사기 치는 거라고 생각해?”

 “아뇨, 조금, 어, 놀라서요.”

 “푸릿.”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손등으로 볼을 톡톡 두드리는 걸 보니 열도 나는 모양이군. 그래, 내가 알아차린 것처럼 그녀는 보기보다 둔하다. 이렇게 티가 나게 말을 걸고, 웃고, 스킨십을 하는데 못 알아차리는 아가씨가 정말 둔한 거지.


 “저, 제가 좋아하는 건 아실 거라 생각해요.”

 “아아, 물론.”

 “그게, 저, 반대로는…….”


 대답 대신 웃으면서 뚫어져라 쳐다보면 눈동자가 팽글팽글 도는 게 귀엽다. 시선을 맞췄다가도 금세 피하고, 몇 초 후엔 다시 맞추기를 반복. 그러면서 점점 얼굴 전체가 붉게 물들어가는 걸 지켜보는 게 요즘의 낙이다.


 “왜, 내가 아가씨를 좋아한다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듯하다가 이내 입술을 깨문다.


 “저기, 니오상한테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뭘까나. 제대로 된 대답을 해 주겠다는 보장은 없지만 물어 봐.”

 “저, 저, 저를…… 조…… 좋아하는, 이유가 있으세요?”


 어라, 아가씨 입에서 이런 질문이 나올 줄은 예상 못 했는걸. 고백을 듣자마자 팽글팽글 돌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걸 되물어볼 줄이야. 이 아가씨, 스스로한테 자신감이 없는 거야, 날 못 믿는 거야? 웃어야 할지 의문이 들어 쳐다보고만 있었더니 그녀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바뀐다.


 “아, 그게 그냥 구, 궁금해서요, 저기, 니오상 옆엔 예쁜 여자 분들도 많이 계시고, 그러니까……!”

 “없어.”


 웃음기를 싹 뺀 대답에 빙글빙글 돌던 그녀의 눈동자도 멈췄다. 젠장, 날 못 믿는 거였군. 장난 좀 적당히 칠 걸 그랬나? 


 “어…… 그럼 어, 역시 방금 말씀하신 건…….”

 “아가씨 바보야?”


 순식간에 어두워지는 표정마저도 사랑스럽다. 의도한 상황은 아니지만 저 표정을 바꿔놨을 때 내가 느낄 희열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즐겁다. 아, 울지도 모르지만. 내 말을 엉뚱하게 이해한 건 아가씨 잘못이라고.


 “그런 거 기억도 안 나고, 필요도 없어. 어쨌든 난 아가씨를 좋아하니까. 거기에 집중해, 아가씨.”


 역시, 울렸다. 정말 수도꼭지를 튼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게끔 금방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하지만 웃고 있으니 된 거 아닌가. 울린 건 사과해야 되려나?


 “죄송해요. 그냥, 너무 놀라서, 다시 듣고 싶었어요.”

 “당했는걸.”


 제길, 귀여워. 어쩔 수 없이, 아가씨한테는 내가 져 드려야지.




(2015. 09. 17.)









150913 <당신의 수호천사> 

「팔베개」

시라이시 쿠라노스케 드림




 “시라이시.”


 어쩌다보니 한 집에 살게 되긴 했지만 한 번도 그녀는 시라이시의 방에 들어온 적이 없었다. 당연히 시라이시도 그녀의 방에 들어간 적이 없었다. 게다가 자정도 넘은 한밤중에,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소리가 났으니 시라이시가 놀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덜컥, 문을 여니 헐렁한 티셔츠에 편한 바지를 입은 그녀가 서 있었다.


 “잠이 안 와.”


 그녀가 칭얼대는 건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는 일 년 넘는 시간 동안 처음이었다. 부스스한 머리카락, 졸음이 가득한 눈, 꼼지락거리는 손가락.


 “들어온나.”


 갑작스레 도쿄로 올라온 그녀를 집으로 데려온 건 시라이시였다. 좋아하는 사람이 여기저기 치이며 고생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마침 같이 살던 룸메이트 선배도 나가고 없어 새로운 룸메이트가 필요한 참이었다. 방도 따로 있었고, 워낙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라 부모님들도 별다른 걱정 없이 두 사람의 동거를 허락했다.

 시라이시는 일단 그녀를 침대에 앉혔다. 그리고 자신은 아무렇지 않게 바닥에 자리 잡았다. 금방이라도 잘 것 같은 표정인데 왜 잠이 안 온다고 하는 걸까.


 “잠이 안 와서…….”

 “무서븐 꿈 꾼기가?”


 대답 대신 어깨를 움츠리는 그녀를 보며 시라이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그녀는 어릴 적부터 악몽 한 번에 사나흘 밤잠을 설치는 편이었다. 어쩐지 어제 새벽부터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더라니.

 시라이시는 문득 초등학교 때의 일을 떠올렸다. 부모님끼리 여행을 간 동안 그녀는 시라이시네 집에 맡겨졌었다. 그 전날도 악몽을 꿨는지 그녀는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잠을 못 이긴 시라이시가 꾸벅꾸벅 졸고 있으면 팔에 매달려 흔들어 깨울 정도였다. 그 때 어떻게 재웠더라…….


 “저기…… 그…… 팔베개…… 해주면 안 돼?”


 아, 그렇구나. 그 때 잠결에 그대로 끌어안고 팔베개를 해서 재웠던 거였어.


 “괘안켔나.”

 “시라이시가 옆에 있으면 왠지 진정될 것 같아서…….”


 우물거리면서 말했지만 알아듣기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시라이시는 피식 웃고 말았다. 괘안켔나, 라고 물을 건 네가 아니라 나인데 말이야.


 “알긋다.”


 시라이시는 재빠르게 불을 끄고 침대로 올라갔다. 몸을 눕히자 그녀가 바로 따라 누웠다. 제대로  팔베개를 할 수 있도록 시라이시가 그녀의 고개를 살짝 받쳤다. 체구가 작은 그녀는 시라이시의 품속에 쏙 들어왔다. 다른 한 손으로 시라이시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초등학교 때 그랬던 것과 똑같이.


 “미안해, 시라이시.”

 “응?”

 “그치만, 어, 나도 좋아하니까. 봐 줘.”


 깜빡거리던 눈이 폭 감겼다. 덕분에 시라이시만 까만 방 안에서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이 갑작스러운 고백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자꾸만 입 밖으로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꾹꾹 참으며 시라이시는 계속해서 그녀의 어깨를 도닥였다.




(2015. 09. 13.)









150901 <샹그릴라>

「첫사랑」

니오 마사하루 드림




 “와, 너 엄청 많이 컸구나.”

 “푸릿.”

 “그 알 수 없는 말버릇도 여전하고.”


 쿡쿡, 살짝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당신은 나보다 작다. 어릴 적엔 엄청 크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인가. 그냥 내가 너무 커버린 건가. 카드뭉치를 쥐고 흔들던 작고 흰 손은 여전히 그대로다. 풍성하게 길게 내려온 머리, 립스틱을 발랐는지 핑크빛인 입술, 원피스를 따라 생긴 몸의 굴곡, 길게 뻗은 다리. 하나하나 찬찬히 뜯어보는 내 시선이 불편하지도 않은지 당신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염색한 거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다.


 “어렸을 땐 말도 많더니, 이젠 대답도 않네. 나 안 보고 싶었어, 마사하루?”

 “그렇게 묻는 사람이야말로 날 보고 싶었던 건 아닐까나?”

 “어휴, 언제 커서 이렇게 능글맞아진 거야.”


 코끝을 찡긋하는 버릇도 그대로. 피식 웃어버렸더니 당신도 따라 웃는다. 그 때도 예뻤지만 지금의 당신은 빛이 난다. 이렇게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것도 오랜만이다.


 “물론 보고 싶었지.”

 “나도 보고 싶었어.”


 만족스런 대답을 듣고 나서야 당신에게 대답한다. 다시 꼬마가 된 것 같다. 누나와 당신의 손을 붙들고 길을 걷던 아주 어릴 때. 내 눈 앞에서 펼쳐지던 마술에 반한 건 그걸 행했던 사람이 바로 당신이었기 때문이다.


 “얘, 안 나오고 뭐해.”

 “응, 나갈게.”


 현관문 앞에 선 누나의 부름에 당신이 돌아선다. 부리나케 구두를 신는 발이 작고 귀엽다. 문을 열다말고 당신이 다시 고개를 돌린다. 눈이 마주친다.


 “이제 누구 좋아하는 사람도 생겼겠다. 다음에 또 올게!”


 생긋 웃고 당신이 문 밖으로 나선다. 쿵. 문이 닫힌 현관 앞에서 나는 자꾸만 새어나오는 웃음을 막느라 얼굴을 쓸어내린다. 주머니 속에 있는 카드뭉치를 만지작거린다. 이사 가기 전 당신이 내게 주었던 선물. 

 아, 젠장.

 그런 당신이 첫사랑이라고는 절대로 말 못 해.




(2015. 09.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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