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요시 와카시에게 하극상이란

     히요시 와카시 드림 (For. 수면님)


 “왜 아직도 이러고 계시는 겁니까, 하야시상.”


 취재를 하고 온 건 분명히 나일 텐데. 무언가에 엄청 열중하고 있는 모습이 귀여워 보여서 그냥 뒤에 서 있은 지 오 분쯤 지난 후였다. 내가 뒤에 서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던지 하야시상의 어깨가 번쩍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휙 돌아오는 얼굴에는 놀란 표정이 선했다.


 “언제 왔어, 히요시군?”

 “찬바람 부는데 문을 열어놓으니까 사람이 들어오는 것도 모르는 겁니다.”

 “안 추운데!”


 들고 있던 카메라를 책상 위에 내려놓자,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하야시상이 카메라를 손에 쥐었다. 다른 선배들이었다면 인상을 찌푸리게 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야시상이라면 그다지 상관없었다. 그녀는 나를 못미더워 하거나 선배 특유의 오지랖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니까. 그녀는 정말 순수하게, 항상 누군가의 일을 도와주고 있다. 가끔 보면 바보 같을 정도이기도 한데, 그렇다고 무작정으로 상대방을 돕는 것은 또 아니다. 자신 나름의 기준이 있는 것 같으니까.


 “와! 사진 잘 나왔다. 히요시군 역시 사진 잘 찍는구나.”

 “감사합니다. 그러는 하야시상은 기사를 더 잘 쓰시잖아요.”

 “엥, 아닌데. 나보다는 코우노쨩이 더 잘 쓰지 않나?”

 “하야시상도 잘 씁니다.”

 “음~”


 노트북에 케이블을 꽂다 말고 또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가만히 쳐다보다가 그녀가 시선을 느낄 것 같아져서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아직까지는 그녀에게 들키고 싶지 않다. 귀엽고 발랄한 그녀는 내가 생각하는 청초한 사람과는 조금 달랐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하야시상을 마주하고 있으면 가슴 속이 마구 요동치는 게 꼭 테니스 시합 전만 같았다. 그런 설렘을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아하는 이유가 된다.


 “히요시군도 기사 잘 쓰잖아? 히요시군이 얼마 전에 쓴 기사도……”

 “그건 하야시상이 취재해 놓은 걸 정리했을 뿐인데요.”

 “으음~”


 이럴 때면 나도 모르게 입버릇이 나가고 만다.


 “하극상…….”


 하야시상이 멋쩍게 머리를 긁적인다. 말없이 그녀가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다. 아마 카메라에서 사진을 옮기는 중이겠지. 날이 좋아서 인터뷰를 하던 중간중간 사진을 몇 번 찍었는데 모두 잘 나왔다. 덕분에 기분이 좋았다. 아무도 없는 보도위원실에 하야시상이 혼자 날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더욱 기분 좋지만. 본격적으로 기사를 쓰기 위해 또 다른 노트북 앞에 앉았다. 인터뷰했던 내용을 떠올리면서 공책을 펼쳤다.




 여름 방학을 앞두고 있는 어느 방과 후에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보도위원실에 있었다. 하야시상도 함께였다. 단 둘이 보도위원실에 있게 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보통 어색함의 극치를 달려야 할 그 순간에 나는 그녀에게 신경을 끈 채로 내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카메라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다. 주변을 살피지 않은 내 실수지만.


 「우와, 히요시군 사진 진짜 잘 찍었어! 굉장해!」


 갑작스러운 외침에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사실상 하야시상을 제대로 본 게 처음이어서 그랬는지 상당히 긴장이 되었다. 하야시상의 눈은 매우 반짝거렸다. 반짝거리다 못해 별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평정심을 되찾기 위해 창문 너머를 노려보고 있어야 할 정도였다.


 「그, 그정도는 기본입니다.」

 「굉장하다! 나 사진은 잘 못 찍거든.」


 굉장하다.

 귀에서 몇 번이고 그 말이 울렸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계속 그녀의 목소리가 울렸다. 굉장하다고 했던가? 처음 듣는 말도 아니었지만 설렜다. 가슴이 쿵쿵거렸다. 심장이 쿵쿵거리지 않는다면 물론 문제가 되겠지만, 귓가를 가득 채울 정도로 쿵쿵거렸다.


 「히요시군은 테니스도 잘 한다고 하지 않았어? 다재다능하구나~」

 「하극상을 보여줘야 할 사람이 있으니까요.」

 「하극상?」


 그래. 언젠가는 아토베상을 꺾고 내가 단식 1번 자리를 차지해야 하니까. 뒷말은 삼키고 인사 대신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돌아서는 뒤로 그녀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뭔진 잘 모르지만 응원할게! 히요시군이라면 잘 할 거야!」


 뭔지도 모르고 응원을 하는 게 어딨습니까, 하야시상. 그렇게 말하려고 했는데 그냥 웃고 말았다. 이유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하야시상의 뒤로 내리쬐는 햇볕이 따뜻해보여서일 수도 있고, 그 햇볕을 받고 서 있는 하야시상이 여신처럼 빛나보여서일 수도 있고.





 “하극상이 아닌걸.”

 “네?”


 뜬금없는 하야시상의 한 마디가 잔잔히 떠오르던 추억에서 날 꺼내왔다. 그 날처럼, 나는 또 화들짝 놀란 것이다. 시선을 돌리자 바로 하야시상의 얼굴과 마주했다.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하는데 이렇게 똑바로 쳐다보고 있으려니 진정이 되질 않는다. 안 그래도 설레는데 그녀의 말은 내 마음에 너무 큰 파장을 일으킨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죠, 하야시상?”

 “하극상이 아니라는 거야.”

 “제가 하극상을 할 수 없다는 뜻입니까?”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항상 밝게 웃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진지해진다. 원래도 표정을 많이 드러내지 않긴 하지만, 덩달아 나도 표정이 굳었다. 내심 불안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다. 상대방의 동작을 읽고 다음 동작을 유추해 낼 수 있는 고무술과는 너무 다르다. 사람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야시상이 어떤 말을 할지 몰라서 전전긍긍하는 이 순간이 너무 간질거려서 참기가 어렵다.


 “왜냐면 히요시군은 내 아래에 있는 게 아니니까.”


 그녀가 눈을 깜빡거린다. 나는 벙어리 같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그녀보다 어린 내가, 여전히 후배 취급을 당할 뿐인 내가, 언제나 그녀에게서 귀엽다는 듯한 시선을 받는 내가 뭐라고? 나도 눈만 깜빡거린다. 대답을 않은 채로 그녀를 쳐다보고만 있었더니 그녀가 평소처럼 다시 웃었다.


 “히요시군은 굉장한 사람이야. 난 항상 나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데!”


 다시 할 말을 잃었다. 내가 하야시상보다 낫다는 말입니까? 이 놀라운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물론 나도, 그녀도 이제 겨우 중학생일 뿐이지만 어쨌든 그녀가 나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들었다. 당연히 배운 것도 많겠지. 그런데도 나를 더 낫다고 생각한다니. 어떻게 해야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걸까? 그녀를 바로 이해할 수가 없어서 잠시 생각을 멈췄다.


 역시 굉장한 건 하야시상이야. 하극상을 일으키고 싶다고 여길 만한 사람이다.


 당신은 왜 그렇게 생각하지? 나는 왜 이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지? 나는 왜 아직도 이렇게 어린애일 뿐이지?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하야시상이 부럽다. 겨우 이런 내가 못나보여서, 그녀가 나를 내칠까봐 스멀스멀 두려움이 밀려온다. 이런 내 자신이 화가 난다.


 “당신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서 화가 납니다. 저는 왜 이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나 싶어서요. 그래서 하극상이 하고 싶어지는 거예요, 하야시상. 다른 어떤 걸 다 떠나서도 제가 하야시상보다 어리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잖아요. 평생 저는 이렇게―”

 “왜 평생이야?”


 굉장히 아무렇지 않게 한마디를 한 당신이 웃었다.


 “나이가 중요한 건 아니잖아. 평생 가도 히요시군이 나보다 한 살 어리긴 하겠지만 그게 꼭 히요시군의 모든 것이 나보다 아래라는 뜻은 아닌걸.”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한 말이지만 괜히 가슴이 쑤신다. 그 점도 마음에 안 듭니다, 하야시상. 제가 아무리 어른이 되고 싶어도 하야시상보다 어리다는 거.


 “아까도 말했지만 난 나보다 히요시군이 낫다고 생각해 누군가를 뛰어넘고 싶다는 것도 어찌 보면 그 사람의 굉장함을 히요시군은 인정하고 있다는 거잖아? 그것만으로도 이미 히요시군은 굉장하잖아!”


 여름의 보도위원실이 다시 생각난다. 굉장하다고 말하던 그녀와 당황했던 나. 그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든다. 피식 웃었더니 하야시상이 눈을 빛낸다. 그리고 덥썩 내 손을 잡았다. 놀라서 어깨가 위로 솟을 뻔 했지만 간신히 눌러 참았다.


 “그러니까 하극상이 아니라, 서로에게서 더 좋은 부분을 배워나가는 거야.”


 동의를 구하는 듯한 그녀의 눈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히요시 와카시, 이게 무슨 짓이야. 어딘지 부끄러워져서 볼이 붉어질 것만 같다. 시선을 슬쩍 피했더니 하야시상은 베시시 웃어보인 뒤 손을 놔주었다. 만족하고 돌아서는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도 역시 당신은 나보다 위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인 점이 바로 내 하극상의 이유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당신을 나는 좋아한다.


 “얼른 하고 가자. 금방 해 질 것 같아.”

 “네, 그러죠.”


 천연덕스럽게 웃는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 정말이지 그건 예쁘다는 말, 아니 아름답다는 말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고무술의 동작이 깔끔한 곡선을 그었을 때보다 , 손끝이 날렵하게 허공을 갈랐을 때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래서 당신이 좋다. 손을 대면 잔잔한 물결파동이 일 것 같은 수면과도 같은 당신이 좋다. 하지만 고백은 조금만 더 후에. 그건 하극상이 아니라고 말하는 당신의 앞에서 조금 더 당당해질 수 있을 때에.





(2013. 10. 29.)









민트향

     시시도 료 드림




 민트향이었다.

 비가 온 뒤라서 그런지 키가 작은 풀숲에서는 민트향이 났다. 그냥 평범하게 물에 젖은 풀 냄새일 뿐이었지만 왠지 민트향처럼 느껴졌다. 민트를 좋아해서 그런 걸까? 아니, 딱히 그런 게 이유는 아니더라도 지금 맡은 풀냄새는 정말 민트에 가까웠다. 무언가 향긋하면서도 코를 맑게 하는 그런 냄새였다.

 공원을 뛰는 동안 풀숲이 가까워졌다 멀어졌다를 반복했고, 그만큼 민트향도 가까워졌다 멀어졌다를 따라했다. 누군가가 생각나려고 했다. 짧은 머리긴 했지만 홱 고개를 돌릴 때 살짝 흩날리면서 보이는 볼에 왠지 시선이 늘 닿았다. 씨익, 즐겁게 웃는 그녀는 왠지 모르게 민트향을 닮아 있었다.


 "야호, 료."

 "정말 왔어?"

 "그럼 가짜로 오냐?"


 세트로 된 가벼운 민트색 트레이닝복 차림이 꽤나 잘 어울려서 시시도는 잠시 감탄했다. 가뜩이나 마른 몸매가 트레이닝복 때문에 더 말라보이는 것 같았다. 조금 더 잘 먹어도 될텐데, 라고 생각하자마자 그녀가 이미 충분히 잘 먹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시시도는 말 없이 발을 떼었다. 그리고 그녀도 함께 발을 떼었다.


 "따라올 수 있겠냐?"

 "물론이지. 그 정도도 못 할 것 같아?"


 씩씩하게 웃어보이는 모습에 시시도는 피식 웃었다. 타박타박 소리만 공원을 울렸다. 강한 민트향이 코를 찔렀다. 아, 역시. 시시도는 곁눈질로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다시 미소지었다.

 뭐, 민트는 좋아하니까 말이야.




(2012. 11. 09.)









가지 마

     후지 슈스케 드림


 무겁게 들어올려진 손이 간신히 그의 옷깃을 붙들었다. 작고 작은 손의 묵직함이 그에게도 전해졌다. 간신히 자켓을 붙잡기까지 그 복잡하게 꼬인 뇌에서, 쿵쾅대는 심장에서, 제멋대로인 신경계통에서 얼마나 많은 혼란이 만들어졌을까. 그리고 그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그는 그 묵직하지만 아주 힘없는 부름에 응해주었다. 그저 그 자리에 멈춰선 것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녀에게는 충분했다.


 “가지마…….”


 입 안에서 다시 씹어삼킬 생각인지 말들은 제대로 그녀의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냥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의 의중을 어느정도 알아차릴 수 있는 사고의 소유자인 후지 슈스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우물쭈물하느라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있는 그녀는 감정이 얼굴뿐 아니라 온 몸에 드러나는 성격이었다.


 “응? 뭐라고 했어? 잘 안 들렸거든.”


 웃는 낯인 그가 돌아보았다. 반면에 그녀는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세상 모두가 알아듣지 못했다 해도 그만큼은 알아들었을 거라는 걸 그녀는 확신했다. 하지만 굳이 다시 묻는 그의 성격도 알고 있기에 그녀는 다시금 입에서 말들을 짜 맞추기 시작했다. 용기가 없어서는 딱히 아니었다. 똑같은 말이라도 그냥 칭얼거리듯 뱉어낸 적은 훨씬 많고 그녀는 보통 칭얼거리는 편이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오래 함께 있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이 아니던가.


 “우……”


 아무 말 없이 그는 웃고 있었고, 그녀는 울먹거렸다. 부끄러워서 말이 도통 나오지를 않았다. 집에 혼자 있으니 자고 가라는 소리가 뭐가 이렇게 어렵단 말인가. 전에도 곧잘 혼자 있으면 무섭다면서 그를 부르지 않았던가. 그 때와 별로 다를 것 없이 똑같이 그를 부르는 것이다. 상황도 똑같았다. 변한 게 있다면 그와 그녀의 사이랄까.


 “집에 혼자 있으니까 자고 가…….”


 조금 더듬거리긴 했지만 그녀는 문장을 완성할 수 있었다. 중간에 흘리듯 목소리가 작아진 것도 같지만 일단은 다 말했다는 것에 의미를 두기로 했다. 제멋대로인 그녀를 컨트롤할 수 있는 그는 역시 굉장하다고 그녀 스스로도 생각했다.

 아까 전보다 조금 더 환하게 그가 웃었다. 응, 하고 짧게 대답하면서 그는 툭 그녀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손길이 싫지 않아 그녀는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


 “역시 직접 듣는 게 좋잖아. 그렇지?”

 “우, 그치만 부끄러운 걸…….”

 “음, 뭘 생각했길래 부끄러운 걸까나?”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장난스럽게 그는 쿡, 하고 웃었다. 물론 뒤에 농담이라고 덧붙여주는 것도 그는 잊지 않았다. 그리고 후지는 가볍게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밤바람은 차니까. 들어가자.”

 “응. 헤헤.”




(2012. 11. 22.)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