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

 

- 휴베르트 x 베르나데타 (휴베르)

- 2부의 언젠가

- 휴베르 위크 2번째 날: 밤

 

 


  어쩐지 따뜻하다.
  그런 감각에 익숙하지 않은 휴베르트 폰 베스트라는 묘하게 안정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 따스함이 어디서부터 오는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무래도 손인 것 같았다. 사실 그의 손은 찬 편이다. 장갑을 낀 덕에 약간은 보온에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물론, 그런 이유로 착용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느끼는 따뜻함은 제 것이 아닌 듯했다. 누군가 손을 잡은 모양이었다.
  그걸 깨달은 순간, 휴베르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떴다. 거의 반사 작용과도 같아서, 몸도 튕겨 올라왔다. 덕분에 제 손을 잡고 있었을 상대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휴, 휴베르트 씨!”
  “베르나데타 님, 왜 여기… 그보다 전투는 어떻게 됐습니까?”

  질문의 방향이 잘못됐다는 것을 중간에 깨달은 휴베르트가 말을 고쳤다. 어떻게 생각해도 그는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난 상황이었고, 누워 있던 곳은 치료 막사 안이었다. 소란스럽지도 않고, 힐러와 의사들은 차분했다. 현재 그곳에 차분하지 않은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베르나데타 폰 발리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흙먼지를 뒤집어썼는지 얼굴이 거뭇거뭇해, 또르르 흘러내린 눈물이 볼 위로 그대로 길을 그렸다. 코를 훌쩍이며 다시 다가온 그가 휴베르트의 손을 잡았다.

  “손이 차요, 휴베르트 씨.”
  “베르나데타 님. 전투는 어떻게 됐느냐고 물었을 텐데요.”
  “이겼어요.”

  안도의 한숨이 무심코 새어 나왔다. 아무래도 작전은 성공한 것 같았다. 세세하게 뜯어보면, 휴베르트가 담당하기로 했던 구역의 작전은 실패한 셈이지만, 전투에서 이겼다면 문제 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제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전혀 기쁜 표정이 아니었다. 구슬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휴베르트의 손을 적셨다.

  “귀하께선 왜 우시는 겁니까?”
  “어, 어떻게 안 울어요! 이 상황에!”
  “이 상황이라 하심은……”

  보기 드문 표정이었다. 베르나데타는 보통 휴베르트를 보면 울거나, 무서워하거나, 가끔 웃었다. 하지만 화를 내는 건 처음이었다. 입술을 꾹 깨문 베르나데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덕에 휴베르트는 드물게 당황했다.

  “쓰러졌잖아요! 휴베르트 씨가! 피를 얼마나 흘린 줄 아세요? 베르는 휴베르트 씨가 그 자리에서 주, 죽는 줄만 알았다고요!”
  “죄송합니다.”
  “베르는 그렇게 냉정하지 못하다고요! 그, 그대로 휴베르트 씨가 죽으면 어떡하나 너무, 너무 무서워서, 당장이라도 가서 끌어안고 싶었는데……”

  와앙, 크게 울음이 터졌다. 와중에도 베르나데타가 휴베르트의 손을 놓지 않은 탓에, 손이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어중간한 거리 때문에 어떤 위로의 행동조차 할 수가 없었다. 휴베르트는 조용히 그 울음을 듣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무리한 부탁을 드렸지요.”

  휴베르트도 스스로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베르나데타는 친구들의 안위에 상당히(휴베르트의 측면에서 보자면 과할 정도로) 신경을 썼고, 그게 전투에도 이어지는 편이었다. 주변에서 다치는 사람이 발생하면, 그 상대를 걱정하느라 바로 그 자리에 원군으로 들어가는 식이었다. 하지만 전쟁이란 사소한 틈으로도 승패가 갈리는 법이었다. 따라서, 휴베르트는 이번 작전을 시작하기 전에, 베르나데타에게 자신이 혹시 다치거나 쓰러지더라도 절대 자리를 떠나지 말고 부대를 끝까지 지휘할 것을 요구했더랬다. 그의 부대가 휴베르트의 부대 바로 옆에서 작전을 수행할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베르나데타를 자신의 옆 부대로 배치한 것은 휴베르트의 전략적인 선택이기도 했다. 그는 실패한 경험이 거의 없었다. 주군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든 해치우는 휴베르트에겐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니 베르나데타 역시 돌발 상황으로 기존 작전에서 이탈하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늘 예외는 있는 법이다. 기세가 오른 부대원들이 퇴각하는 적을 쫓아 너무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을 때였다. 저 또한 달려드는 적을 향해 마법을 사용하느라 제지가 약간 늦었을 뿐이었는데, 그 피해는 참혹했다. 땅속에 무언가를 장치해 놨는지 선두에 있던 병사가 어느 지점을 밟는 순간, 그 주변의 모두가 허공으로 붕 날아갔다. 방어 마법을 쓰기엔 너무 빠른 속도로 그 여파가 다가왔다. 마지막에 쓴 마법이 거대한 방어막을 펼치는 마법이었는지, 아니면 음울한 보랏빛 오라를 끌어낸 공격 마법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저는 귀하를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 믿음은 틀리지 않았지요. 베르나데타 님은 훌륭하게 자리를 지켜 작전을 수행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까 이 전투에서 이기셨겠지요.”
  “아니에요.”
  “네?”
  “훌륭하게 자리를 지키지 않았다고요.”

  베르나데타는 훌쩍거릴 뿐, 더 설명하지 않았다. 휴베르트로선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쓰러지기 직전의 전황을 다시 머릿속에 그렸다. 어떻게 생각해도 기존 작전대로 이행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만약 베르나데타의 부대가 쓰러진 휴베르트를 호위하기 위해 자리를 이탈했다면, 그 자리에 구멍이 생겨서 증원 부대에 밀려 전황이 뒤집어졌을 것이다.

  “어떻게 대처하셨습니까?”
  “제발요, 휴베르트 씨. 지금 그건 중요하지 않잖아요. 휴베르트 씨는 쉬셔야 해요.”
  “아뇨, 중요합니다. 베르나데타 님도 제가 대답을 듣기 전까진 물러나지 않을 거란 걸 알고 계실 텐데요.”

  온몸이 욱신거리는 걸 봤을 때 쉬어야 한다는 그의 말에는 동의했지만, 솔직히 호기심이 더 동했다. 자신의 전술을 뛰어넘을 만큼의 무언가를 해냈다면, 앞으로의 전투를 위해서도 알고 싶었다. 더군다나 그 베르나데타였다. 방에 틀어박히기를 누구보다도 원하고 사랑하는 그가 가끔 보여주는 비범함을 좀 더 들여다보고 싶었다.

  “베, 베르가 자리를 안 지켰다고 화가 나신 거군요! 알아요, 휴베르트 씨의 지시에 따르지 않은 거긴 한데, 그치만, 그, 그래도 이겼잖아요! 휴베르트 씨도 여기 무사히 왔고……”
  “화나지 않았습니다.”

  쥐구멍이라도 찾아들려는 듯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다. 휴베르트는 이미 이런 상태의 베르나데타를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휴베르트는 그를 향해 웃거나, 혹은 피하거나 하는 어떤 종류의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베르나데타가 잡은 손을 꽉 맞잡았을 뿐이었다.

  “휴베르트 씨 부대에 퇴각을 명령하고 베, 베르네 부대도 전진하지 못하게 했어요. 땅속에 뭔가 장치가 된 것 같아서 그걸 다 없애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일부러 불화살을 매기고 마법사분들께 바람 마법을 써달라고 했어요. 맞바람이 불면 불이 쉽게 옮겨붙지 않을 테고, 그럼 땅속 장치만 딱 없애기 쉬울 것 같아서……”

  처음부터 화공을 하지 않았던 것은 적군이 있는 쪽에서 아군을 향해 바람이 불었기 때문이었다. 강풍 수준은 아니었지만 불을 지르면 아군이 피해를 볼 확률이 높았다. 상대 쪽의 화공에 대비하느라 마법사 부대에서 대규모 방어진을 친 것이기도 했다.

  “오호라, 괜찮은 방법이군요. 그래서요?”
  “그 뒤엔 너무 정신없이 흘러가서…… 회복 부대를 투입하고, 화살도 미친 듯이 쐈고요, 또 베르도 한 번에 여러 명을 공격해야 했으니까…… 앗, 저, 절대 실수하지 않았어요!”
  “변명하실 것 없습니다.”
  “그, 그치만…… 휴베르트 씨가 걱정돼서 안 갈 수가 없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휴베르트 씨 부대를 합쳐서 인원을 재정비하고 반으로 나눠서 원래 작전대로 각각 진행했어요. 베르는 휴베르트 씨 옆에서 후방 지원을 하고요.”

  베르나데타가 하도 작은 목소리로 설명을 한 탓에, 귀를 기울이느라 몸이 다 앞으로 기울었을 정도였다. 훌륭한 판단이었다. 자리를 이탈하지 말라는 부탁은 결국, 지키지 못한 모양이었지만, 부대가 통째로 원호를 위해 원래의 작전 구역을 이탈하는 일은 없었다는 뜻이었다. 심지어 정신을 잃은 자신을 대신해 지휘를 잡았으니, 동시에 두 개 부대를 지휘한 셈이었다.

  “베르나데타 님, 왜 제가 화가 났을 거라 생각하셨는지 모르겠군요. 아주 훌륭하게 대처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그치만 베르는 자리를 이탈했는걸요! 구하러 오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닙니다만……”

  휘둥그레진 베르나데타의 두 눈에 제가 비쳐 보였다. 이런 경험은 영 낯설었다. 상대방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 둔 적이 없었다. 휴베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빈손을 뻗어 베르나데타의 볼을 쓸었다. 거뭇거뭇한 자국이 손가락에 밀려 사라졌다.

  “부대가 통째로 이탈하면 이미 쓰러진 자뿐만이 아니라 베르나데타 님과 그 부대도 함께 위험해집니다. 굳이 양쪽 부대가 모두 전멸할 필요는 없지요.”

  베르나데타가 그 손을 끌어다 쥐었다. 이젠 양손이 다 붙잡힌 휴베르트는 얌전히 그의 말을 듣는 수밖에 없었다. 베르나데타는 휴베르트의 양손을 보물단지라도 되는 양, 꼭 쥐었다.

  “베, 베르는 휴베르트 씨가 마…… 만약에라도 그 순간 세상을 떠난다고 해도, 차가운 땅바닥에서 홀로 쓸쓸하게 떠나게 놔두고 싶지 않았어요. 다른 누구라도 그렇지만, 휴베르트 씨라면 더더욱이요.”

  그친 줄 알았던 눈물이 또 뚝 떨어졌다. 다시 볼을 닦아줄 손이 없었던 휴베르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소리에 흠칫, 베르나데타의 어깨가 떨리는 것이 보였다.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크게 반응하는 그다웠다.

  “바보 같은 말씀 마시지요. 제가 떠난다고 베르나데타 님까지 죽을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습니다.”
  “베르에겐 그 정도로 가치 있는 일이에요.”
  “가치요?”
  “정말로 그게 마지막이라면…… 베르의 품에서 숨을 거두길 바랐어요. 마지막 온기는 베르가 다 끌어안고 싶었어요. 그 순간만이라도 베르가 안식을 줄 수 있길 바랐어요. 하지만, 하지만 진짜로, 진짜 속마음은…… 휴베르트 씨가 내 온기를 느끼고 돌아오길 바랐어요.”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는 순간은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지금도 그런 순간에 속했다. 가만 보면 그런 상황은 늘 베르나데타와 대화하다가 생겼다. 휴베르트는 참으로 난감한 상대에게 마음을 허락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놔두면 휴베르트 씨가 가버릴 것 같았단 말이에요.”
  “그거야말로 정말 바보 같은 말씀이시군요. 이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맘 편히 눈 감아도 되는 상황이 아니지요.”
  “그치만……”
  “그리고 베르나데타 님 또한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으니까요.”

  자기도 모르게 큭큭 웃음이 나려고 했다. 제 믿음을 보기 좋게 깨뜨려주고, 그보다 더한 신뢰로 갚아주는 그가 있어 세상이 조금은 즐거운 것 같았다. 참지 못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휴베르트는 두 손을 빼내었다. 그리고는 아까와는 반대로, 자신이 베르나데타의 두 손을 꼭 쥐었다.

  “귀하께선 이런 저까지도 챙기시니, 도저히 두고 갈 수가 없어서 말이지요. 당분간은 제가 곁에서 돌봐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귀하 또한 폐하께 아주 귀중한 존재이니까요.”
  “휴, 휴베르트 씨!”

  어디서 저렇게 많은 양의 눈물이 나오는지 모를 일이라고, 늘 생각했다. 베르나데타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수수께끼를 앞으로 얼마나 더 알게 될까 궁금하기도 했다. 아예 휴베르트의 다리에 엎어져 울고 있는 베르나데타를 보며, 휴베르트는 큭큭 웃었다.

  “뭐, 온기를 느끼고 돌아온 건 틀리지 않은 것 같군요.”
  “네?”
  “혼잣말입니다.”

  휴베르트가 코를 훌쩍이는 베르나데타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늘 휴베르트의 가슴 주머니를 장식하고 있던, 베르나데타가 꽃 자수를 놓은 그 손수건이었다. 정신을 차린 뒤로 처음으로, 베르나데타가 활짝 웃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휴베르 위크가 하는 중이라길래

급하게 써봤습니다

소재가 신뢰였는데

신뢰가 나오긴 한 건지 이게 맞는지

잘 모르겠지만.....

 

암튼 휴베르 너무 귀엽지 않나요?

그 휴베르트가 그 베르나데타에게 코 꿰이는 게!

아주 귀엽고 좋습니다

다들 휴베르를 하세요!

 

 

 

 

산타도 선물이 필요해

 

- 펠릭스 x 베르나데타 (펠베르)

- 배경만 현대로 바꾼 현대 AU

- 도로테아의 계략에 빠져서 산타가 되는 베르나데타가

  산타 펠릭스랑 알콩달콩하는 이야기

 

 

 

 

  “끝……났다!”

 

  베르나데타가 벌떡 일어나며 만세를 불렀다. 몇 주째 공을 들이던 작업이 드디어 끝났다. 마네킹에 입혀둔 옷이 두 벌, 손에 들린 옷이 한 벌이었다. 크리스마스까지 앞으로 이틀. 이 정도면 훌륭한 마감이었다. 자신이 대견해져 뿌듯하게 미소 짓기 무섭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 누구세요!”

  “나야, 베르.”

 

  이 마감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베르나데타는 쪼르르 달려가 문을 열었다. 머리를 틀어 올린 도로테아가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완성됐어?”

  “으, 응. 조금 전에 막…….”

  “내가 타이밍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맞추지.”

 

  윙크까지 하면서 도로테아가 자연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말릴 틈도 없었다. 베르나데타가 그녀의 등에 대고 새된 비명을 질렀지만, 도로테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바닥에는 천 자투리는 물론이고, 바늘이며 실이며 가위까지 온갖 잡동사니가 널브러져 있었다. 후다닥 도로테아를 쫓아 들어온 베르나데타는 주섬주섬 한 손으로 바닥을 쓸었다.

 

  “신경 쓰지 마, 마감하느라 바빠서 그런 건데 뭐. 근데 세상에, 어쩜 이렇게 예뻐? 진짜 잘 만들었다.”

  “헤헤, 그, 그래? 다행이다, 걱정했거든.”

 

  도로테아의 눈이 옷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베르나데타는 배시시 흘러나오는 미소를 들키기 싫어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손에 들려 있는 옷을 마네킹에 걸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베르, 그거 설마……”

  “아, 응. 이게 방금 막 완성한 건데, 에델가르트 씨한테 맞을지……”

 

  베르나데타의 등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도로테아가 저렇게 미소 지을 때면 분명히 안 좋은 일(베르나데타의 측면에서 보면 그렇다는 이야기다)이 생겼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생글생글 미소 짓는 낯에 대고 뭐라고 할 성격은 되지 못했기에, 베르나데타는 애꿎은 바닥을 노려보았다.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켰다. 무슨 말이 나올지 불안했지만, 그 말을 기다리는 동안의 긴장감이 더 싫어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저기, 에델가르트 씨가… 입는 거 맞……지?”

  “으응~? 난 에델이 입는단 소리는 안 했는데~?”

  “그, 그치만 베르 사이즈에 맞추라고…… 그럼 우리 반에 입을 수 있는 사람은 에델가르트 씨밖에…….”

  “에이~ 정말 딱 맞게 입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 왜~”

 

  부들부들 떨던 베르나데타가 마침내 도로테아와 눈을 마주쳤다.

 

  “그건 베르가 입을 거야.”

  “왜 그렇게 되는 거야아아아아아아!”

 

*

 

  애초에 크리스마스 파티의 회의 같은 걸 한다고 했을 때부터 재빠르게 도망쳐서 기숙사에 틀어박혔어야 했다. 하지만 베르나데타는 부드럽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제지하는 에델가르트에게 약했고, 어딜 가냐며 팔을 붙잡아 꼭 끌어안는 도로테아에게도 약했으며,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기대감을 드러내는 페트라에게도 마찬가지로 약했다. 결국, 도로테아와 페트라 사이에 앉아 얌전히 에델가르트의 말을 경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휴베르트가 나눠준 종이에는 크리스마스 파티 일정이 적혀 있었다. 12월 25일 저녁 7시부터 밤 10시까지. 장소는 학교 대강당. 다 함께 저녁을 먹고 가볍게 선물을 교환하는 행사. 반을 나누지 않고 모두가 함께 참가. 그런 내용은 아무래도 좋았다. 베르나데타의 시선이 꽂힌 것은 안내문의 가장 아래쪽에 적힌 내용이었다.

 

  “안내문을 보면 알겠지만, 학교의 전통대로 각 반에서 한 명씩 산타 역할을 맡게 될 거야.”

 

  재미있는 전통이라며 미소를 짓는 페트라를 옆에 두고 그런 전통은 필요 없다고 차마 소리지를 수는 없었다. 입술을 꾹 깨물며 그 산타가 자기가 아니기만을 빌었다.

 

  “그리고 문제라면 문제인데…… 기존에 선배들이 사용하던 산타 옷은 너무 해져서 더는 입을 수 없을 것 같아. 올해는 새 옷을 구비해야 할 것 같은데……”

  “저요, 저요~ 의견 내도 돼?”

 

  도로테아의 손이 번쩍 올라갔다. 괜히 소스라치게 놀란 베르나데타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베르가 옷 잘 만들잖아! 베르한테 만들어달라고 하면 어때?”

  “뭐?! 내가?!”

 

  교실이 어수선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베르나데타에게 쏠린 탓에, 당장이라도 쥐구멍을 찾아 들어가고 싶었다. 얼굴이 후끈거려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잘 만든다고 하긴 어려웠지만, 도로테아의 말대로 옷을 만들 줄은 알았다. 어릴 적부터 갖고 놀던 인형의 옷을 직접 만들다 보니 취미가 되었고, 어느새 점점 규모가 커져 사람 옷까지도 만들게 되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취미의 수준이었다.

 

  “다른 반도 옷이 필요한 건 마찬가지라 구매하려고 했는데.”

  “에이~ 우리만의 추억을 만드는 건데, 새 옷 하나씩 장만하면 좋잖아! 물론 재료비 포함해서 제작비도 주는 조건으로! 어차피 예산도 있겠다, 어때?”

  “그건 솔깃한걸. 베르나데타만 좋다면, 나도 찬성하고 싶어. 좋은 추억이 될 거야.”

 

  페르디난트까지 나서서 고개를 끄덕였다. 제작비를 주는 조건이라는 소리에 잠시 귀가 솔깃하기는 했다. 하지만 베르나데타는 고개를 붕붕 저었다. 어디까지나 취미의 영역에서 만드는 옷이었다. 정식으로 복식 디자인을 배워 볼까 고민 중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뚝딱 완벽한 옷을 만들어내진 못하는 법이었다.

 

  “그, 그래도 누가 입고 활동할 만한 옷을 만들지는 못하는걸.”

  “지금 우리한테 필요한 건 산타 복장이잖아? 시즌 지나면 어차피 못 입어.”

  “그, 그치만 인터넷만 조금 뒤져도 잘 만들어진 산타 옷이……”

  “맨날 똑같은 산타 복장에는 아무 매력이 없잖아. 약간 어레인지 해보자! 나도 도와줄게!”

 

  이건 반칙이었다. 뭐가 반칙이냐면, 이미 연극 무대에도 올라간 경험이 있어 연예인이나 다름없는 도로테아가 눈을 반짝이면서 베르나데타의 손을 꼭 붙잡은 채로, 그 아름다운 얼굴로 미소까지 짓는 것이 그랬다. 심지어 그러고 있는 사람이 이 학교에 와서 처음 사귄 친구라면 더욱 반칙이었다. 베르나데타의 머리에서 김이 솟고 있는 것 같았다.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던 몸이 페트라의 어깨에 툭 닿았다.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길이 없었다.

 

  “찬성입니다. 베르나데타, 만드는 옷, 기대합니다.”

  “페트라까지~!”

 

  울상을 지어봐도 이젠 정말 답이 없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베르나데타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도로테아가 만세를 불렀고, 페트라가 손뼉을 쳤다. 이 소란 속에서도 고요히 졸고 있는 린하르트가 부러웠다.

 

  “그럼 옷은 베르나데타에게 맡기는 거로 일단 추진할게. 다른 반에도 얘기해야 하고, 선생님 허락도 받아야 할 테지만.”

  “저, 저, 저저저저, 저기요!”

 

  가뜩이나 달아오른 얼굴이 더 새빨개졌다. 모두의 이목을 끄는 것보다 더 중요한 말을 해야 했다. 베르나데타도 딜을 해야 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산타 역할만큼은 피해야 했다.

 

  “오, 옷을 만드는 대신 산타 역할에선 빼주시면 안 될까요?”

  “뭐~? 그런 게 어디 있어, 베르! 조건은 모두 똑같아야지!”

  “옷을 만드는 점에서 이미 똑같지 않은데!”

 

  도로테아는 쉽게 물러날 것 같지 않았다. 베르나데타는 필사적인 눈빛을 에델가르트에게 쏘아 보냈다. 에델가르트의 표정이 미묘했다. 안쓰러워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한심하게 보는 것일지 모를 얼굴이었다. 베르나데타는 침을 꿀떡 삼켰다.

 

  “그 점도 반영해서 고민하도록 할게.”

 

  이걸 긍정적인 대답이라고 생각해도 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반영’한다고 했으니 나름대로는 성공일지 몰랐다. 베르나데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팔을 꼭 끌어안고 있던 도로테아가 문득 자세를 고쳐 앉았다. 생각에 잠긴 듯 천장을 빤히 바라보던 그녀가 다시 생긋 미소를 지으며 베르나데타를 쳐다보았다. 등줄기를 따라 오스스 소름이 돋았지만, 미소는 지어 보였다.

 

  “그래~ 어차피 지금 당장 정할 것도 아니잖아.”

 

  그렇게 회의는 다른 안건으로 넘어갔다. 어쩐지 불안한 마무리였다.

 

*

 

  “베르는 아니랬으면서! 아니랬으면서!”

  “난 아니라고는 안 했는걸! 너무 부끄러워할 테니까 비밀이라고만 했지.”

 

  도로테아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산타 옷의 주인공들이 정해졌단 소식을 전한 것은 도로테아였다. 물론 정확하게 알려준 것은 펠릭스와 힐다뿐이었다. 막상 자기 반에서는 누가 입을지 제대로 말을 하지 않기에 불안함을 느끼면서도, 도로테아의 말대로 고분고분 자기 사이즈의 옷을 만들었다. 에델가르트가 베르나데타보다 키가 크긴 했지만, 기장만 조금 손보면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옷 기장도 에델가르트 씨에 맞춰놨단 말이야!”

  “처음 기장 재고 나서 다시 안 재봤지?”

 

  생긋 웃는 도로테아에 비해 베르나데타의 얼굴이 파랬다. 후다닥 옷을 펼쳐 제 팔에 가져다 댄 베르나데타가 울상을 지었다. 처음에 의도한 기장보다 짧았지만, 베르나데타에게는 마치 자로 잰 것처럼 딱 맞는 사이즈였다. 하필 이 옷의 초반 원단 작업을 도로테아에게 맡긴 것부터가 실수였다.

 

  “이, 이건 사기야!”

  “그치만 베르, 잘 들어봐.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펠릭스가 산타 옷을 입는다고! 베르가 만든 옷을 말이야!”

  “그, 그건…… 좀 기쁘지만.”

  “베르가 산타를 같이 하면, 그 산타 옷을 입은 펠릭스랑 시간을 같이 보낼 수 있는 거잖아?”

  “그거랑 이건 다르잖아!”

  “에이,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딱 달라붙어 있어. 혹시 누가 알아? 이때다 하고 펠릭스가 고백……”

  “꺄악! 하지 마, 하지 마, 도로테아!”

 

  팔을 마구 휘저어 도로테아를 말렸다. 얼굴이 후끈거렸다. 심장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뛰어댔다.

  엄밀히 말하자면 펠릭스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은 좋았다. 하지만 이 산타 복장을 하고 만나야 한다는 점이 걸렸다. 게다가 그 옆에 같이 서 있을 사람은 다름 아닌 힐다였다. 성격만큼이나 시원시원한 이목구비가 아름다운 힐다 옆에서, 더벅머리를 한 자신이 같이 서 있을 생각을 하니 벌써 부끄러워서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었다.

 

  “펠릭스 씨에 힐다 씨가 산타인데 베르가 그 사이에 있는 건 너무……”

  “베르, 자신감을 가져! 펠릭스가 좋아하는 건 베르잖아!”

  “으으, 그건, 그건 너무 낙관적인 평가고……”

  “펠릭스가 산타를 하기로 한 건 베르가 우리 반 산타라서 그런 건데.”

 

  한숨을 푹 내쉬며 도로테아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든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던 베르나데타의 고개가 불쑥 위로 올라왔다. 붉게 물든 얼굴이 도로테아와 마주쳤다.

 

  “뭐, 뭐, 뭐?”

  “펠릭스도 산타를 안 한다고 막 화를 냈는데, 베르가 산타를 한다는 얘기를 듣고선 마음이 바뀌었다나? 잉그리트가 그랬어, 달갑게 오케이한 건 아니지만 분명히 그 얘기를 들은 다음에 어쩔 수 없으니까 하겠다 그랬다고.”

 

  얼굴이 더 화끈거렸다. 홱 뒤돌아선 베르나데타가 연신 손부채질을 해댔다.

  펠릭스 씨가? 그랬다고? 정말로? 베르랑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걸까? 아냐, 그치만 그냥 다른 이유일 수도 있잖아. 펠릭스 씨는 친구들한테 좀 약한 경향도 있으니까 실뱅 씨나 잉그리트 씨가 계속 부탁하면 거절을 못 했을 수도…… 헉, 역시 그런 거겠지?

 

  “베~르~? 듣고 있어?”

  “어, 어, 응?”

  “펠릭스가 산타 복장을 기대하고 있대. 물론, 베르가 입은 걸.”

 

  도로테아의 미소까지 얹어져 금상첨화였다. 그 말은 베르나데타를 결국 KO 시켰다. 부들부들 떨던 베르나데타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도로테아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짝 손뼉까지 친 그녀가 베르나데타의 손을 꼭 붙잡았다.

 

  “정말 멋진 크리스마스가 될 거야!”

 

*

 

  “무슨 일이야?”

  “베르가 못 나오겠대.”

 

  마침내 크리스마스 당일이었다. 7시까지는 앞으로 5분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이미 다른 친구들은 모두 연회장에 모여 있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정작 산타인 베르나데타는 기숙사 방 안에 있었다. 그녀를 찾으러 온 것인지, 이제 문 앞에는 도로테아와 에델가르트까지 두 명이 서 있었다.

 

  “베르나데타.”

  “힉, 에델가르트 씨?”

  “시간이 얼마 없어. 이러다간 늦을 거야.”

  “그, 그, 그치만, 이런, 이런 꼴로 나갈 수는 없어요오오!”

 

  도로테아의 한숨이 깊었다. 도로테아가 펠릭스의 이름을 꺼내는 바람에 설득된 것은 사실이었지만, 펠릭스 때문에 마찬가지로 나가기가 싫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펠릭스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신이 만든 멋진(어쩌면 귀여운) 옷을 입히고 싶은 마음과 그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런 부끄러운(어쩌면 귀여운) 옷을 입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주 다른 문제였다.

 

  “베르나데타, 이미 정해진 사항이잖아. 따르지 않으면 흑수리반으로서 선생님이나 다른 사람들을 볼 낯이 없어져. 부탁이니까 나와줘.”

 

  에델가르트가 이렇게까지 말하면 할 말이 없었다. 베르나데타는 늘 그렇듯, 친구들에게는 참으로 약했다. 에델가르트 씨가 이러는 건 반칙이라고, 부루퉁하니 중얼거리며 결국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서도 차마 나설 용기가 나지 않아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서 있었다. 모자의 끄트머리에 달린 동그란 술이 이마를 톡 쳤다. 빨간 장갑을 낀 손으로 마지막 보루라도 되는 양, 문손잡이를 꽉 붙들었다. 고개를 도저히 들 수가 없었다. 다시 문을 닫고 싶은 심정이 굴뚝 같아지는 순간, 탁, 문을 붙잡은 에델가르트가 조용히 말했다.

 

  “가자.”

  “으으으, 네에…….”

 

  베르나데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순순히 문을 열었다. 이제 7시까지는 3분도 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도로테아와 에델가르트가 양옆을 지키듯 나란히 섰다. 베르나데타는 차마 놓고 올 수 없었던 고슴도치 인형을 꽉 끌어안았다. 공개 처형을 당하는 게 이런 기분일 거라 우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연회장 가는 길이 새삼 너무도 가까웠다. 평상시엔 너무 멀어서 힘들다고 불평을 하고는 했는데, 오늘따라 몇 걸음 만에 도달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연회장의 커다란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그리고 이미 그 안은 파티 분위기가 한창이었다. 테이블 한가득 올라온 음식과 가장 안쪽에 우뚝 서 있는 트리, 벽을 수놓은 장식까지 크리스마스를 즐길 준비가 완벽했다. 단 하나, 산타를 제외하면 말이다.

 

  “어이, 늦었잖아.”

  “펠릭스, 좀 더 상냥하게 대해줘~”

 

  베르나데타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아무래도 산타 동지들이 그녀를 마중 나온 모양이었다. 로봇처럼 삐거덕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마찬가지로 산타 옷을 입은 펠릭스와 힐다가 서 있었다. 그 순간, 베르나데타는 지금까지의 모든 감정이 다 날아가는 것 같았다. 펠릭스도, 힐다도 너무나 잘 어울렸다. 물론 간단한 치수를 받아서 제작하긴 했지만, 마네킹에 입혀놓은 것과 당사자가 입는 것은 퍽 느낌이 달랐다. 베르나데타의 눈이 반짝였다.

 

  “엄청나게 잘 어울려요! 두 분 모두! 세상에, 이렇게 잘 어울릴 줄은 몰랐어요. 힐다 씨, 너무 귀여워요. 아아, 이걸 보려고 몇 날 며칠을 그렇게 고생을…… 아, 물론 펠릭스 씨도 정말 멋있어요. 역시 장식을 달길 잘했다, 헤헤. 이거야말로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거로군요!”

  “와~ 고마워! 이렇게 예쁜 옷 만들어준 것도 고맙고! 베르나데타도 잘 어울려!”

 

  배시시 웃던 베르나데타의 얼굴이 순식간에 파랗게 질렸다. 본인이 산타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완전히 망각하고 있었던 탓이다.

 

  “베, 베르는 전혀 그렇지가 않은데요, 원래는 에델가르트 씨가 입을 줄 알고 욕심을 좀 부려서 만든 건데, 이걸 왜 베르가 입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는……”

  “잘 어울리기만 하는데 왜.”

 

  펠릭스의 입에서 툭 튀어나온 말이 베르나데타를 더욱 사색으로 만들었다. 어머나 소리가 도로테아에게서 나온 것인지, 힐다에게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정신이 날아갔다. 히이익, 새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나려는데, 펠릭스가 탁 손을 붙잡았다.

 

  “히이익, 페, 페, 페, 펠릭스 씨?!”

  “어딜 도망가. 이런 옷을 입혔으면 끝까지 책임을 지라고.”

  “채, 책임, 책임이라뇨?!”

  “선물 주러 레츠 고~!”

 

  힐다가 신나게 외치면서 베르나데타의 비어 있는 팔에 팔짱을 꼈다. 졸지에 손과 팔이 봉인된 베르나데타가 울먹이는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도로테아는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고, 에델가르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베르나데타는 울고 싶은 건지, 비명을 지르고 싶은 건지, 웃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어졌다. 자신의 손을 꽉 잡은 펠릭스의 손은 기뻤지만, 이런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줬다는 수치심이 상쇄될 만큼은 아니었다. 힐다 역시 만들어준 옷을 기뻐하는 것 같아 다행이었지만, 그렇게 예쁜 모습인 힐다에 비해 자신은 너무 초라해 보였다. 머릿속에서 감정들끼리 어마어마한 전투를 벌여댔지만, 발은 착실하게 두 사람에게 맞추어 앞으로 나아갔다.

 

  “선생님, 산타 왔어요~”

  “기다렸어. 각자 자기 반에 선물을 나눠주도록 해.”

  “반별로 개수를 맞춰 놨으니까 아무거나 가져가.”

 

  크리스마스 때문에 신난 것은 벨레스와 벨레트도 매한가지인 모양이었다. 산타 모자를 쓴 벨레스와 루돌프 코를 끼우고 있는 벨레트 앞에 선물 꾸러미가 세 개 놓여 있었다.

 

  “이거 생각보다 무거울 것 같은데~ 선생님이 좀 도와주시면 안 돼요?”

  “선물을 나눠주는 건 산타의 몫이지, 루돌프의 몫이 아니다.”

  “왜요, 루돌프도 산타랑 같은 편인데. 뭐, 농담이에요. 이 정돈 거뜬하죠.”

 

  농담 따먹기라도 하듯, 벨레트에게 장난을 치던 힐다가 제일 먼저 꾸러미를 들고 룰루랄라 돌아섰다.

 

  “그럼 나 먼저 가볼게~ 펠릭스, 베르나데타 잘 도와줘야 해!”

 

  윙크까지 찡긋하는 걸 보니, 어쩐지 도로테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퍼뜩 정신을 차린 베르나데타가 허둥지둥 힐다에게 인사를 했다. 급격히 작은 방 안이 조용해졌다. 어색한 공기 때문에 선뜻 몸을 움직이지도 못했다.

 

  “산타 옷을 베르나데타가 만들었다고 들었어. 고생이 많았네.”

  “앗, 아녜요, 그, 재료비도 주셨고 수고비도 받았거든요. 게다가 힐다 씨도, 펠릭스 씨도 너무 잘 어울리니까 만든 사람으로선 엄청 뿌듯하다고 해야 할까, 그러니까……”

  “베르나데타도 귀여워.”

 

  갑자기 튀어나온 벨레스의 칭찬에 베르나데타의 어깨가 튀어 올랐다. 얼굴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입만 벙긋거리는데, 벨레스의 시선이 펠릭스에게로 돌아갔다.

 

  “그렇지, 펠릭스?”

 

  펠릭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홱 고개를 돌린 탓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는 벨레스나 베르나데타에겐 시선도 주지 않은 채 꾸러미 두 개를 전부 들어 올렸다.

 

  “가자.”

  “앗, 펠릭스 씨, 같이 가요! 서, 선생님, 다녀올게요!”

  “잘 다녀와.”

 

  베르나데타가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벨레트가 손을 흔들었다. 이어서 벨레스의 손 인사까지 본 베르나데타가 후다닥 뒤를 돌아 달렸다. 펠릭스가 성큼성큼 걸어가는 탓에 벌써 꽤 거리가 있었다.

 

  “펠릭스 씨, 그, 그건 베르 주세요.”

  “인형을 들고 꾸러미를 어떻게 들게.”

  “드, 들 수 있어요! 그 정도는!”

 

  하지만 펠릭스는 결국 연회장에 도착해 흑수리반이 모여 있는 테이블 앞에 도착할 때까지 꾸러미를 넘겨주지 않았다.

 

*

 

  크리스마스 파티는 생각보다 즐거웠다. 선물을 나눠줄 때마다, 진짜 산타클로스에게 선물을 받는 것처럼 눈을 빛내는 친구들의 얼굴을 보는 것도 좋았고, 온갖 맛있는 음식을 함께 나눠 먹는 것도 행복했다. 금사슴반 테이블에서 힐다가 이렇게 예쁜 옷을 입었을 때 사진을 많이 남겨야 한다며 온갖 사람을 옆에 끼고 열심히 핸드폰을 누르는 모습도 기뻤다. 펠릭스의 인기도 그에 못지않았는데, 펠릭스의 반대로 각자 셀카를 남기는 건 실패해 청사자반의 단체 사진만 간신히 찍은 모양이었다.

  물론 생각보다 힘들기도 했다. 도로테아가 귀엽다는 말을 연발하며 연신 찰칵거리는 통에 정신이 없었다. 어느새 벨레트의 루돌프 코를 빌려온 카스파르가 산타와 루돌프는 세트라며 베르나데타를 번쩍 들어 올린 채로 연회장을 한바탕 질주하기도 했다. 덕분에 베르나데타의 비명이 요란했지만, 그 누구도(펠릭스는 눈살을 찌푸리긴 했지만) 그걸 말리지는 않았다. 교직원들도 그저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 지켜보고만 있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파티도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분위기가 잔잔해졌다. 진즉 물러나기를 원했던 이들 몇몇은 기숙사 방으로 돌아갔고, 그 와중에 몇몇은 짝을 지어 운동장 쪽으로 나가는 것도 같았다. 운동장도, 정원도, 온실도 온통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도배되어 있었으니, 어딜 가나 좋은 데이트 장소가 될 것이었다.

 

  “어이, 베르나데타.”

  “힉, 네!”

 

  그렇게 감상에 젖어 있던 베르나데타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펠릭스가 옆에 서 있었다.

 

  “더는 여기서 못 버텨. 나가자.”

  “그, 그, 그래요!”

 

  펠릭스의 말에 백 퍼센트 공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따라 나오리라 생각했는지, 펠릭스가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베르나데타도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회장 자체는 먹는 데 집중한 몇 명을 빼고는 저마다 담소를 나누는 데 집중한지라, 두 사람을 붙잡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페, 펠릭스 씨, 어, 어디 가세요? 기숙사는 저쪽……”

  “끝까지 책임지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그게 무슨 책임인데요오오오?!

  물어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어쩐지 대답을 듣는 것도 부끄러워져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베르나데타는 말없이 펠릭스의 뒤를 따라갔다. 조금 전에 머릿속으로 멋진 데이트 장소가 될 것이라 그렸던 곳들을 하나씩 지나쳤다. 환하게 가로등을 비춰놓은 운동장도, 선생님이 가장 좋아하는 다과회 장소라는 정원도, 베르나데타도 한숨 돌리러 자주 가는 온실도 지나쳤다. 갈 곳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을 텐데, 펠릭스는 멈추지 않았다. 연말의 밤공기는 차가웠지만, 장갑에 넥워머까지 한 탓인지 코끝만 조금 시렸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어쩐지 가슴도 같이 간질거려 재채기가 날 것 같았다.

 

  “펠릭스 씨, 어디까지……”

  “눈이 오는군.”

  “네?”

 

  펠릭스가 멈춰 섰고, 베르나데타도 따라 멈췄다. 펠릭스가 한 손을 허공으로 내밀고 있었다. 마침 그의 손 위로 눈송이가 하나 톡 내려앉았다. 베르나데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헉, 진짜예요! 눈이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예요!”

 

  베르나데타는 번쩍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송이가 하나둘, 조금씩 내려왔다. 펑펑 내리게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배시시 미소가 나왔다. 눈이 오는 것은 좋았다. 딱히 밖에 나가 눈싸움을 하거나 눈사람을 만드는 취미는 없었지만, 눈이 오고 나면 온 세상이 고요함에 잠겨 들어가는 그 분위기가 좋았다.

 

  “베르나데타.”

  “네?”

  “선물이다.”

 

  어안이 벙벙했다. 덕분에 눈을 깜빡이며 펠릭스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달빛 때문에 펠릭스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그는 조금,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산타도 선물은 받아야 할 거 아냐.”

  “저, 저 주시는 거예요?”

  “여기에 너 말고 누가 있는데?”

 

  가슴이 간질거렸다. 어쩐지 함박웃음을 지어버릴 것만 같았다. 물론 자신의 귀를 의심했기 때문에, 베르나데타는 되묻는 것을 잊지 않았다.

 

  “진짜 베르가 받아도 되나요?”

  “너 주려고 골랐다고.”

  “저, 정말요?”

  “쳇, 싫으면……”

  “안 싫어요! 기뻐요!”

 

  도로 물러나려는 펠릭스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그의 손 위에 놓여 있는 작은 선물 상자가 금방 손에 들어왔다. 콩닥콩닥,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귓속을 가득 채웠다.

 

  “지, 지금 풀어봐도 되나요?”

  “맘대로 해.”

 

  상자를 여는 손이 부르르 떨렸다. 달칵, 소리를 내며 상자가 열렸다. 작은 펜던트였다. 절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언젠가의 점심시간에, 도로테아와 들여다보던 잡지에 실린 그 펜던트였다. 색이 마음에 들어 귀엽다고 지나가듯 말했던 게 생각이 났다.

 

  “페, 펠릭스 씨, 이걸 어떻게…… 아니, 어, 이걸, 어, 왜…….”

 

  머릿속이 하얬다. 기쁘다, 그 외에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갖고 싶었던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선물로 주었다. 가슴이 벅차올라서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그 정도면 눈치를 채라고.”

  “뭐, 뭘요?”

 

  여태까지 눈을 맞추지 않았던 펠릭스가 돌연 눈을 마주쳐 왔다. 대번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눈을 피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똑바로 다가오는 시선에 사로잡히기라도 한 듯, 꼼짝할 수가 없었다.

 

  “좋아해, 널.”

 

  세상이 조용했다. 눈발이 조금씩 굵어지면서 세상의 작은 소음들을 집어삼키는 모양이었다. 바람 소리만 고요히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갔다. 결국, 눈물이 터졌다.

 

  “펠릭스 씨!”

  “뭐, 뭐야, 왜 울어?”

  “저도, 베르도 좋아해요!”

 

  당황한 펠릭스의 표정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미 터져버린 눈물이 주룩주룩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예상치 못한 고백에 눈물만이 아니라 심장도 터질 것 같았다. 너무 기쁘면 눈물이 난다더니, 그 말을 몸소 체험하는 중이었다.

 

  “너무 좋아요! 좋아해요!”

  “아, 알았으니까 울지 마. 그만 울라고.”

 

  펠릭스는 어쩔 줄을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뭔가를 찾는 듯, 옷을 뒤적였지만 원하는 것은 없는 모양이었다. 베르나데타는 코를 훌쩍이다가 그대로 펠릭스의 품으로 홱 뛰어들었다. 펠릭스가 양팔을 벌린 채로 얼어붙은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베르나데타는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펠릭스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좋아해요, 펠릭스 씨. 너무 좋아서 눈물이 안 멈춰요.”

 

  훌쩍이는 와중에 배시시 웃음이 났다. 어정쩡하니 공중에 떠 있던 펠릭스의 팔이 베르나데타의 어깨를 토닥이기 시작했다. 그 손길이 어찌나 조심스럽고 부드러운지, 다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팔에 꼭 힘을 주면서 눈물을 삭였다.

 

  “고마워요, 펠릭스 씨. 선물도, 고백해준 것도요.”

 

  갑자기 터진 눈물처럼, 자꾸만 떠오르는 미소도 어쩔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여러 방면에서 잊을 수 없는 크리스마스가 될 것 같았다.

 

 

 

 

* * * * * * * * * * * * * * * * * * * * * * * * * 

 

그렇습니다.

파엠히가 크리스마스 산타 일러를 주었고

이것은 펠베르를 쓰라는 계시라면서 쓰기 시작했는데....

알콩달콩보다 모두가 베르를

귀여워하는(괴롭히는...?) 이야기가 된 것 같네요.

가나 쌤이 베르를 사랑해서 그렇습니다.

모두 베르를 사랑해주세요(뜬금

 

 

사실 펠베르는 사귀기 전부터 되게

주변 친구들한테 쟤네 서로 좋아하지 않냐고 유명할 것 같아요.

베르는 워낙 티가 나고

펠릭스도.... 뭐 그렇죠 워낙 티가 나겠죠

모를 리가 없겠죠

그래서 도로테아는 이 기회에 하고 등을 떠밀어주는 거죠

물론 에델한테 산타 옷을 입히고 싶은 마음도 굴뚝 같았겠지만...

풍설 세계의 가르그 마크는 1년이지만

뭐.... 현대 AU니까 고등학교처럼 3년 정도 합시다.

내년엔 에델이 입는 것으로 하면 되겠죠(?

 

펠베르 사귀어라... 예쁘게 사랑하렴

여러분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

감기 조심하시고 코로나 조심하시고

늘 행복한 일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소꿉친구의 연인

 

- 펠릭스 x 베르나데타 기반...인데 펠베르는 안 나옴

- 엔딩 후의 언젠가

-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들은 디미트리가 베르나데타랑 친해지려고 노력하는 이야기

 

 

 

  디미트리 알렉산드르 블레다드는 좀처럼 크게 당황하는 법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티를 내는 법이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거짓말은 하지 않지만 숨기고자 하는 것은 절대로 들키지 않았다. 그러니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것이 오만한 자신감이었음을 깨달았다. 자기도 모르게 딱 벌어진 입을 깨달은 것은 옆에 서 있던 두두 몰리나로가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을 때였다. 겨우 정신을 차린 디미트리는 자신이 국왕으로서 이 자리에 있음을 떠올렸다.

 

  “프랄다리우스 공, 혼인을 진심으로 축하하오. 자세한 이야기는 따로 듣고 싶은데 괜찮겠소? 자리를 옮겼으면 하는데.”

  “알겠습니다, 폐하.”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펠릭스 유고 프랄다리우스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퍼거스의 기사이자 프랄다리우스령을 다스리는 공작인 동시에, 디미트리의 소꿉친구이기도 했다. 디미트리의 지시에 따라 펠릭스와 두두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접견실에서 우르르 빠져나갔다. 오래 앉아 있었던 탓인지 몸이 뻐근했다. 장식보다는 좀 더 실용성에 맞춘 의자가 필요하겠다고 생각하며 디미트리도 일어났다.

 

  “깜짝 놀랐어.”

  “그래 보이더군.”

  “언제부터 만났어?”

 

  펠릭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앞서서 걷기 시작했다. 접견실보다 개인 서재에서 더 많이 얼굴을 마주했던 소꿉친구에게 안내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았다. 디미트리는 펠릭스보다 약간 뒤처져 따라가며 최근의 일을 되짚어 보았다. 답을 찾을 수 없어 더 오래된 기억을 뒤적였다. 제국과의 전쟁 중에도 두 사람이 사귄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몰랐던 건 아마 너뿐일 거다, 멧돼지. 둔하기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지만, 화자가 실뱅이 아니라 펠릭스라는 점이 낯설었다. 원하던 대답은 아니었기에 디미트리는 재차 질문했다.

 

  “그래서 언제부터야?”

  “언제부터의 기준이 뭔데?”

  “어…… 고백한 거?”

  “전쟁 끝나고.”

 

  그제야 디미트리는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해 냈다. 함께 싸워 왔던 왕국 군과 성 기사단은 전쟁이 끝난 뒤, 각각 페르디아와 가르그 마크로 찢어졌다. 연합군의 참모였던 이는 옛 스승이었고, 현재는 대사교가 되어 가르그 마크에서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때문에 메르세데스를 비롯해 몇몇 동창은 선생님을 따라 가르그 마크에 남았다. 디미트리가 여태 손톱만 한 실마리도 떠올리지 못한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베르나데타는 가르그 마크에 있는 거 아니었어?”

 

  디미트리는 베르나데타 폰 발리와 친하지 않았다. 오히려 껄끄러운 사이에 속했다. 5년이라는 긴 시간을 거쳐 선생님과 친구들을 막 재회했을 때, 베르나데타를 제국의 첩자로 오인해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선생님과 펠릭스가 재빠르게 베르나데타의 앞을 가로막고 디미트리의 창을 막아냈다. 가뜩이나 사관학교 시절부터 디미트리를 무서워하던 베르나데타는 그 뒤로 무슨 일이 있어도 말을 걸지 않은 것은 물론이요, 일정 반경 안으로는 결코 다가오지 않았다. 마음을 다잡은 이후, 마음을 다해 그녀에게 사과했다가 눈물바다를 만든 일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디미트리는 자신을 겁내는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성격이 아니었고, 도리어 상대를 배려한다는 명목으로 접촉을 피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전략적인 필요에 의해서만 발생했다. 이번엔 이쪽에서 부대를 이끌어주면 좋겠다, 기습이 필요한데 가능하겠나, 그런 것들이었다. 지금까지도 디미트리는 그나마 선생님이 함께 있었기에 대화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로 쭉 우리 집에 있었어.”

 

  마찬가지로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었다. 아무래도 베르나데타의 피난처가 가르그 마크의 기숙사 방에서 펠릭스로 옮겨간 모양이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기에 디미트리는 묵묵히 펠릭스의 뒤를 따라 서재로 들어섰다. 두두가 시종에게 다과상을 준비하라며 내보내자, 서재에는 과거의 동창 세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하긴, 넌 몰랐을 수도 있겠군. 가르그 마크를 제일 먼저 떠난 게 너니까.”

 

  펠릭스의 말이 맞았다. 왕도를 계속 비워놓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전쟁이 끝나자마자 가르그 마크를 떠났다. 수도원의 문제는 대사교에게 맡기라면서 선생님이 등을 떠밀어준 게 한몫을 했다. 디미트리의 소꿉친구들이 현재의 자리에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한 달 뒤였다.

 

  “아무튼 축하해. 결혼식은 언제야?”

  “두 달 뒤에. 아마도.”

  “아마도?”

  “하객들 앞에 서기 싫다고 버티는 중이라서.”

 

  어떤 상황인지는 쉽게 그려졌다. 친한 사람들과 함께 모인 자리에서도 나서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그녀가 생판 남이나 다름없는 수많은 사람 속에서 결혼을 한다니, 잘 모르는 디미트리가 보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잉그리트 녀석이 설득해 보겠다더군.”

  “잉그리트가 베르나데타랑 친하던가?”

  “나랑 선생… 이젠 대사교라고 해야겠군. 나랑 대사교를 제외하면 제일 마음이 편한 사람이라고 그러던데.”

 

  그러고 보면 사관학교 시절에도 잉그리트는 베르나데타와 말이 잘 통했다. 수업 참여를 독려하던 것도 반장인 디미트리가 아니라(베르나데타가 너무 무서워한 탓에 기숙사에 찾아갈 수 없었던 것뿐이다) 잉그리트였다. 선생님의 권유에 청사자반으로 옮겨온 베르나데타가 적응하는 데에는 잉그리트의 힘이 많이 작용했을지도 몰랐다. 새삼 잉그리트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솟아났다. 조만간 잉그리트를 위한 만찬을 준비해야겠다고 다짐하는 사이, 펠릭스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실뱅도 뭣하면 자기가 나서겠다고 그러는데, 무슨 꿍꿍이속인지……”

  “실뱅이?”

  “베르나데타가 나한테 말하지 않은 걸 뭔가 아는 모양이야.”

 

  디미트리는 충격을 받았다. 잉그리트가 베르나데타와 친한 건 충분히 이해 가능했다. 펠릭스가 베르나데타와 결혼하는 것 자체는 놀라웠지만, 돌이켜 보면 가르그 마크에서 펠릭스를 졸졸 쫓아다니는 베르나데타를 꽤 자주 목격했다. 실뱅의 성격을 생각하면 베르나데타에게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말을 걸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베르나데타이기에, 디미트리는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으면 도망쳤지, 실뱅과 무난하게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어떻게 비밀을 알 수 있는 것일까? 억지로 캐내지는 않았을 테지만, 마땅한 경로가 떠오르지 않았다.

 

  “어이, 멧돼지.”

  “아, 미안. 오늘은 계속 놀라네. 실뱅도 베르나데타랑 친하구나.”

  “친하다고 해야 할지……”

 

  펠릭스가 쯧, 혀를 찼다. 아무래도 실뱅이 베르나데타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마침 다과를 들고 나타난 시종 덕에 디미트리는 미묘한 충격은 잠시 잊게 되었다.

 

*

 

  “폐하, 신경 쓰이는 일이 있으십니까?”

 

  사실 디미트리는 두두가 이렇게 물을 때까지 자신이 그것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시선이 서류 속 글자가 아닌 허공에 머물러 있었으니, 두두가 아닌 그 누구라도 알아차렸을 법했다. 한숨을 푹 내쉰 디미트리는 미묘하게 굳어 있던 표정을 풀고 두두를 바라보았다.

 

  “아, 별거 아니야. 낮에 있었던 일이 좀 놀라워서.”

  “결혼 말씀이십니까?”

  “그것도 그런데…… 잉그리트나 펠릭스는 그렇다 쳐도 실뱅까지 베르나데타랑 친한 건 전혀 몰랐어. 친해지는 데 시간이 꽤 걸렸을 텐데 말이야.”

  “폐하께는 그럴 여유가 없으셨잖습니까.”

  “응, 그러네.”

 

  썩 시원시원하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여유가 없기는 했다. 펠릭스를 쫓아다니던 베르나데타의 모습조차도 낮에 결혼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떠올렸을 정도다. 하지만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베르나데타는 다가가기 어려운 아이라고, 친해지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의 소꿉친구들은 모두 그녀와 친하다. 실뱅 역시 친하다고 말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비밀을 알고 있는 정도라면 친하다고 봐도 무방한 것 같았다.

 

  “베르나데타와의 관계를 걱정하시는 겁니까?”

  “음…… 친해지기 어려울 거로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내 노력이 부족했나 보군. 다른 친구들하고는 다 잘 지내는데 나만 무서워한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좋지는 않네.”

 

  머쓱한 웃음이 흘렀다. 이런 사실에 충격을 받다니, 아무래도 여전히 어른이 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디미트리는 벌써 네 번째 같은 문장을 다시 읽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이렇게 잡생각이 많은 채로 공무를 처리할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이만 쉬어야겠어.”

  “목욕물을 준비할까요?”

  “그래주겠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한 두두가 시종을 찾아 나서자 집무실은 조용해졌다. 어중간하게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생각이 순식간에 머리를 전부 점령했다. 이 상태로는 펠릭스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신부를 기겁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금방 우울해졌다. 세상만사 모두가 첫 단추가 중요한 법이라는데, 디미트리와 베르나데타의 관계는 첫 단추는커녕 옷 자체부터 잘못 입은 것 같았다. 사관학교 시절에 조금이라도 더 노력했다면, 하다못해 재회했던 그 순간에 공격이라도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실행할 수 없는 가정을 떠올리는 건 이미 지긋지긋했다. 머리를 털어 생각을 날려버린 디미트리는 어떻게든 긍정적인 면을 보기로 했다. 무뚝뚝하기로는 저보다 훨씬 심한 펠릭스도 베르나데타와 대화를 나누고 결혼까지도 한다. 덩치가 웬만한 곰 같기는 하지만 부드럽게 다가가면 관계 개선의 여지는 충분히 존재할 것이다.

  디미트리는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집무실을 나섰다.

 

*

 

  문제는 디미트리와 베르나데타가 만날 일이 없다는 점에 있었다. 공사다망한 디미트리는 페르디아를 벗어날 수 없었고, 베르나데타는 당연하게도 프랄다리우스령에서(정확히는 펠릭스네 집에서) 꼼짝도 하지 않을 것이다. 접점을 만들려면 디미트리가 프랄다리우스령에 행차하든가 베르나데타가 집에 콕 박혀 있는 생활을 포기하고 페르디아에 여행을 오는 수밖에 없었다. 둘 다 현실성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디미트리는 반쯤 포기한 상태로, 제발 결혼식에서 베르나데타가 기겁해서 도망가지 않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이런 디미트리의 고민이 여신께 닿은 것인지, 기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일이 벌어졌다. 간만에 휴식을 취하고자 산책을 하던 디미트리가 온실에서 베르나데타와 딱 마주친 것이었다.

 

  “베르나데타?”

  “히이이익! 죄송해요, 죄송해요! 외부인이 함부로 돌아다녀서 죄송합니다! 죽이지만 말아주세요! 아무 짓도! 아무 짓도 안 했으니까요오오오!”

  “괜찮아, 진정해. 아무도 널 해치지 않을 거야.”

  “저, 저, 저, 정말인가요? 하지만 여긴 왕궁인데, 헉! 그런 말로 베르를 안심하게 만들어 놓고 뒤에서 몰래……”

  “제발 진정해줘, 베르나데타. 난 친구의 부인이 될 사람을 죽일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까.”

 

  베르나데타의 어깨가 파드득 튀었다. 비명과도 같던 변명이 순식간에 멈추었다. 디미트리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조심스레 발을 떼었다. 성큼성큼 다가갔다가는 베르나데타가 그대로 도망가 버릴 것 같았고, 그런 일이 정말 벌어지면 꽤 상처받을 것 같았다. 꼼짝도 하지 않는 베르나데타의 뒤통수를 향해 디미트리는 차분히 말을 걸었다.

 

  “나야, 디미트리.”

  “헉, 디미트리 씨? 헉, 아니지, 폐하? 네? 폐하라고요? 폐하?”

 

  고장 난 도르래에서 나는 소리가 베르나데타의 목에서 나는 것 같았다. 겨우겨우 고개를 돌린 베르나데타의 두 눈이 커다래지는 것을 보고 디미트리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오늘은 망토라도 내려놓고 나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찰나였다.

 

  “히이이익! 죄송합니다, 폐하! 폐, 폐, 폐하의 온실이었군요! 아니, 그렇죠! 왕성이니까! 왕성 자체가 폐하 거였죠! 베르가 주제도 모르고 함부로 들어와 버렸으니 이제 죽음으로 사죄하는 수밖에 없나요? 부디 자비르으으으을!”

  “제발, 베르나데타. 아까도 말했지만 난 널 죽일 생각이 전혀 없어. 이 왕성의 그 누구도 널 해치지 않을 거야. 이 나라의 국왕으로서 맹세하지.”

 

  땅속으로 꺼질 듯이 굽어 내려가던 베르나데타의 허리가 멈추었다. 디미트리는 안도의 한숨조차도 그녀를 놀랠까 싶어 최대한 숨을 죽였다. 슬그머니 고개를 든 베르나데타가 갈팡질팡하던 시선을 간신히 디미트리에게 맞추었다.

 

  “정말요? 약속하신 거예요?”

  “그래, 약속해.”

  “가,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오……”

  “자, 잠깐만, 베르나데타!”

  “히이익, 약속하셨잖아요오오!”

 

  자기도 모르게 성큼 발을 내디디며 그녀를 불러 세운 디미트리는 다시 우뚝 멈춰 섰다. 베르나데타는 잔뜩 몸을 움츠린 채로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펠릭스가 두르고 다니던 망토와 같은 색의 망토 밑으로 파르르 떨리는 팔이 보였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베르나데타가 긴장감을 견디다 못해 서서 기절하기 전에 무엇이든 편안하게 만들 만한 주제를 꺼내야 했다.

 

  “펠릭스와 결혼한다면서. 축하해.”

  “헉, 그, 그렇죠. 펠릭스 씨랑 베르가 결혼을 하죠…… 감사합니다.”

 

  펠릭스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좋은 선택 같았다. 금방 떨림이 잦아든 베르나데타가 몸을 살짝 돌려 디미트리를 향해 꾸벅 고개까지 숙였다. 어쩐지 볼이 붉어 보였다.

 

  “결혼 소식을 듣고 많이 놀랐어.”

  “왜, 왜요? 설마 감히 베르 같은 게……”

  “우리 중에 펠릭스가 제일 먼저 결혼하는 게 믿기지 않았거든.”

 

  물론 결혼 상대가 베르나데타라는 사실이 놀라움을 세 배쯤 부풀리기는 했다. 어쨌든 요지는 펠릭스의 결혼에 있었다. 어린 시절에 모두 다 그러하듯, 디미트리도 당연히 어른이 된 자신과 친구들의 모습을 상상했다. 기사가 되거나 검을 휘두르는 모습 같은 건 금방 떠올랐지만, 누군가 결혼을 하는 것은 쉽게 떠올릴 수 없었다. 다만 결혼을 한다면 약혼자가 있는 잉그리트가 제일 먼저 하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을 뿐이었다.

 

  “어릴 땐 잉그리트가 제일 먼저 결혼할 줄 알았어. 약혼자가 있었거든. 하지만…… 나중엔 당연히 내가 먼저 결혼하겠구나 싶었어. 왕이 되면 후사 문제가 생기니까.”

  “그, 그러네요. 펠릭스 씨도 결혼에는 딱히 생각이 없었던 것 같으니까요.”

 

  차마 말을 꺼내기가 힘들어 얼버무렸지만 베르나데타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어쩌면 이미 잉그리트에게 사정을 들은 것일지도 몰랐다. 펠릭스와 선생님을 제외하면 제일 편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잉그리트라던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시, 실뱅 씨는요? 실뱅 씨라면 여자분들이랑 잘 지내시는데……”
  “흉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지만, 실뱅은 한 사람과 지속된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는 재주가 없는 편이라서.”

 

  디미트리는 속으로 고티에령에 닿지 못할 사과를 하고서 베르나데타를 살폈다. 이제 베르나데타의 몸은 완전히 디미트리 쪽을 향해 돌아서 있었다. 대화하려는 시도가 성공했다. 뿌듯해진 디미트리가 미소를 지었다.

 

  “펠릭스를 잘 부탁해. 둘도 없는 소중한 친구거든.”

  “폐, 폐하의 둘도 없는 소중한 친구면 엄청나게 중요한 사람인 거잖아요? 베르 따위한테 부탁하셔도 괜찮은 건가요? 아니, 물론 펠릭스 씨를 좋아하니까 잘해줄 거지만, 헉, 베르가 지금 뭐라고 했죠? 꺅, 부끄러워!”

 

  그렇게 길지 않은 대화를 통해 디미트리는 조금이나마 베르나데타를 파악할 수 있었다. 덕분에 베르나데타가 보이는 급격한 태도 변화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 차분하게 정말 묻고 싶었던 것을 질문했다.

 

  “그런데 베르나데타, 페르디아에는 어쩐 일이야? 펠릭스와 함께 온 건가?”

  “펠릭스 씨는 폐하를 뵈러…… 어?”

 

  베르나데타가 그대로 정지했다. 디미트리 역시도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일 수 없었다. 베르나데타가 말하는 폐하는 다름 아닌 자신이었고, 그는 접견실이 아닌 온실에서 그녀와 대화 중이었다.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 어떻게 된 건가요오오오오!”

  “음, 나도 그걸 묻고 싶은데…… 펠릭스가 온다는 전갈도 받은 적이 없거든.”

  “네에? 하지만 실뱅 씨가 귀족들이 다 모이는 자리니까 꼭 가야 한다고 그랬는데요? 잉그리트도 만날 수 있다고 해서 펠릭스 씨를 따라왔는데……”

 

  한겨울 입김과 함께 나오는 말소리처럼 덜덜 떨리던 베르나데타의 목소리가 조용해졌다. 디미트리가 자기도 모르게 탄식하면서 머리를 짚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녀 역시 왜 이런 사태가 벌어졌는지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실뱅이 꾸민 일이군.”

  “베르가 속은 건가요? 하지만 펠릭스 씨도 같이 왔는데, 헉, 그럼 펠릭스 씨도 베르를 속인 거군요! 너무해!”

  “미안해, 아무래도 나 때문인 것 같아.”

 

  굳이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볼 것도 없었다. 두두가 프랄다리우스령으로 돌아가는 펠릭스에게 이야기했을 것이고, 펠릭스는 돌아가서 실뱅과 만나 또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실뱅은 잘 됐다며 베르나데타를 페르디아로 나서게 할 방법을 제시했을 테고, 펠릭스도 납득했으니 이곳에 온 것일 테다. 소꿉친구들의 배려에 기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펠릭스가 저번에 왔을 때, 네가 잉그리트나 실뱅이랑도 친하다고 그랬거든.”

  “네? 잉그리트는 친하지만 실뱅 씨는 딱히…….”

  “실뱅이 뭔가 비밀을 알고 있다던데……”

  “그, 그건! 베르가 가르쳐 준 게 아니라고요오오오!”

 

  어리둥절하던 표정이 금세 울상이 되었다. 아무래도 친하다고 생각하는 건 실뱅 혼자인 모양이었다. 디미트리는 다시 한번 뜻 모를 사과를 고티에령으로 보냈다.

 

  “오해가 있나 보네. 뭐, 그래서 나만 베르나데타랑 어색한 관계인 게…… 좀 신경 쓰였어. 결혼식 때 날 보고 무서워서 숨어버리면 곤란해지니까…….”

 

  아무리 디미트리라도 이런 말을 직접 입 밖으로 꺼내기는 영 껄끄러웠다. 그 때문인지 자연스레 목소리가 줄어들었는데도 온실 안에는 풀벌레 소리만 울렸다. 어색해서 애써 피하고 있던 고개를 들고 보니 베르나데타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디미트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러지?”

  “폐하도 그런 걱정을 하시는군요.”

  “국왕이기 이전에 나도 그냥 사람이니까.”

  “그, 그쵸, 그러네요.”

 

  어정쩡하게 대답하는 베르나데타를 보니 어쩐지 씁쓸했다. 그녀에게 디미트리는 동창이나 친구보다는 국왕이자 지휘관일 것이다. 디미트리 역시 그녀를 크게 의식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동료로 받아들이고는 있었다. 착잡한 마음에 말을 잃어버린 사이, 베르나데타가 입을 뻐끔거리는 게 보였다. 우물쭈물하던 그녀가 시선은 땅에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디미트리 씨는 배려심이 많은 사람인 걸 알아요. 정직하고 올바르고 또, 실수하면 인정하고 사과할 줄 아는 착한 사람이에요. 베르가 겁내니까 무섭게 하지 않으려고 되도록 피하신 것도 알아요.”

 

  별안간 얼굴이 후끈거렸다. 입에 발린 소리에는 질릴 만큼 익숙해져 있던 디미트리도 떨리는 목소리로 전하는 칭찬에는 절로 부끄러워졌다. 본인이 그런 소리를 들을 만한 사람인지는 의문스러웠지만, 진심이 듬뿍 묻어나는 말에 아니라고 손사래를 칠 수는 없었다.

 

  “베, 베르는 겁이 많지만…… 디미트리 씨랑 지금처럼 대화는 할 수 있어요. 폐하랑은 어려울 것 같지만……”

  “응? 무슨 뜻이지?”

 

  베르나데타가 뒷말을 거의 집어삼킨 탓에 잘 들리지 않았다. 눈을 대굴대굴 굴리던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왠지 모를 긴장감에 디미트리는 손을 꽉 쥐었다.

 

  “그, 그, 그, 그러니까…… 펠릭스 씨의 친구, 잉그리트의 친구, 실뱅 씨의 친구인 디미트리 씨요. 어, 어릴 적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같이 검술 연습을 한 거랑 눈이 많이 왔을 때 잉그리트의 키보다 큰 눈사람을 만들었던 거랑…… 그, 그러니까 폐하가 아닌 디미트리 씨에 대해서 알게 되니까 좀 무섭지 않아졌다고 할지…….”

 

  디미트리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폐하’와 ‘디미트리 씨’를 분리할 수 있다는 점이 일단 그랬고, ‘폐하’는 여전히 무섭지만 ‘디미트리 씨’는 덜 무서워졌다는 점도 마찬가지로 그랬다. 자신은 절대 떠올리지 못할 방법이라고 생각하며, 디미트리는 미소 지었다.

 

  “아마 내가 국왕으로서 널 만날 일은 거의 없을 테니 다행이라고 해야겠군.”

 

  디미트리의 미소가 예상 밖이었는지, 베르나데타의 표정이 이상했다.

 

  “근데 좀 불공평한걸.”

  “네? 뭐, 뭐, 뭐가요?”

  “이미 나에 대해 많이 알게 된 것 같으니, 나도 베르나데타에 대해 알아야 친구가 될 수 있지 않겠어?”

 

  베르나데타의 표정이 한층 더 이상해졌다. 눈이 휘둥그레진 것을 봐서는 놀란 게 확실했지만, 그게 나쁜 쪽인지 좋은 쪽인지 판가름하기가 애매했다. 친구가 되자는 말은 너무 갑작스러웠을까 염려스러웠다. 괜히 목이 탔다.

 

  “베, 베르 같은 게 폐하의 친구가 되어도 괜찮나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만큼 베르나데타의 어깨가 함께 움츠러들었다. 디미트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국왕이 아닌 디미트리의 친구도 괜찮다면.

 

  표정이 환해졌다. 꽃을 피우듯 만개하는 미소에 디미트리도 함께 웃었다.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걱정거리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

 

  “뭘 어떻게 한 거냐?”

 

  식사 도중 나온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펠릭스의 시선이 따가웠기 때문에 디미트리도 고개를 들었다. 짐작 가는 것이 없어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자 펠릭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제랑은 사람이 달라진 수준이던데. 무슨 얘기를 했지?”

  “페, 펠릭스 씨! 고기가 아주 맛있어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베르나데타가 접시를 펠릭스 쪽으로 밀었다. 허둥대는 모습을 굳이 보지 않더라도, 디미트리의 대답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게 분명했다. 열렬히 호소하는 눈빛까지 보고 나니 솔직히 대답할 수가 없었다.

 

  “특별할 건 없었는데. 서로에 대해 조금 더 잘 알게 됐을 뿐이야.”

  “하?”

  “그럼요! 베르는 이제 폐하의, 아니지, 디미트리 씨의 친구라고요!”

 

  뿌듯한 베르나데타의 미소에 펠릭스의 표정이 더욱 구겨졌다.

 

  “여기 도착했을 때만 해도 무섭다고 인사 안 간다며.”

  “그, 그건 그때고요!”

 

  펠릭스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였지만, 디미트리는 더 대답하지 않았다. 풋 웃음이 났다. 베르나데타에 대해 알게 된 만큼, 연인과 함께 있을 때의 펠릭스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되었다. 아마 베르나데타는 그녀가 보지 못한 펠릭스의 어린 시절에 대해 잘 알게 되었을 것이다. 디미트리는 그 사실을 당분간 두 사람만의 비밀에 부쳐두기로 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펠베르이긴 한데 펠베르 같지 않은 무언가.....

근데 디미트리만 베르랑 지원회화가 없잖아요

그래서 둘이 친해지려면 뭘 해야 하나 생각했습니다

 

옛날 얘기가 원래 최고죠

펠릭스 옛날 얘기 해주는 디미트리랑

연애 중인 펠릭스가 어떤지 말해주는 베르나데타

좀 귀엽지 않나요

 

뭐 그래서 폐하는 무섭지만 디미트리 씨는 무섭지 않아져서

나름대로 적당히(?) 친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

베르나데타였습니다....를 쓰고 싶었습니다

 

베르야 언제 어디에서든 모두에게 사랑받고 살렴

 

 

 

 

 

- 벨레트 x 베르나데타 (레트베르)
- 2부의 언젠가
- 레트베르 위크 3번째 날: 밤

 

 

  “이 시간에 밖에 있다니 별일이군.”

  “, 선생님.”

 

  가르그 마크의 밤은 칠흑과도 같았기에, 띄엄띄엄 서 있는 횃불로는 저 멀리 선 인영을 판별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별로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스스로 빛을 내는 듯한 옥색 머리카락을 모를 수는 없었다. 하물며 그런 사람이 먼저 자신을 발견하고 말을 걸었으니 확실했다. 따라서 베르나데타는 벤치에서 일어나는 대신 벨레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서 오세요. 늦으셨네요.”

  “정찰 중에 의심스러운 걸 봐서.”

  “, , , 설마……

  “처리했으니 문제없다.”

 

  베르나데타가 그를 신뢰하는 만큼, 벨레트 역시 그녀를 잘 알았다. 금방 나쁜 쪽으로(그것도 극단적으로) 생각이 빠져버리는 버릇은 5년이 흐른 뒤에도 변함이 없었다. 벨레트는 꼭 지금처럼, 늘 적당한 순간에 치고 들어와 그녀의 사고를 멈춰 주고는 했다. 베르나데타가 그에게 무의식적으로 의지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여전히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 베르나데타를 빤히 보다가, 벨레트가 물어왔다.

 

  “잠이 안 오나?”

  “, 그런 건 아니고요. 선생님이 정찰을 하러 가셨다니까 괜히 걱정되지 뭐예요.”

 

  가르그 마크 주변에는 늘 첩자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전쟁 중에는 온갖 일들이 일어나는 법이다. 벨레트를 지휘관으로 두고 있는 가장 막강한 세력이 가르그 마크를 차지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만큼 정찰은 이 군대에 필수적인 일이었고, 베르나데타 역시 당번을 맡아 참여하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을 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며칠 전에 나간 정찰대가 길 한복판에서 쓰러진 채 발견된 탓이었다. 아마 특수한 마법 용구를 숨겨놨던 것 같다는 보고는 베르나데타를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불안감 속으로 떠밀었다. 타인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만큼, 그 사람을 잃는 것은 더욱 고통스러운 법이었다.

 

  “베르가 괜한 걱정을 했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선생님인데.”

  “걱정해줘서 고마워.”

 

  놀란 베르나데타가 고개를 들었지만 벨레트는 이미 베르나데타의 옆자리에 앉은 뒤였다. 화들짝 놀라며 옆으로 몸을 비켰다. 하지만 그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하늘을 봐.”

 

  베르나데타도 시선을 돌렸다. 오전 중에 비가 내리고서 맑게 갠 덕분인지, 밤하늘에 무수히 많은 별이 빛나고 있었다.

 

  “, 오늘은 별이 많이 떴네요! 예쁘다.”

  “혼자 보기 아까웠어.”

 

  적막한 가르그 마크에 두근거리는 소리만 울리는 것 같았다. 여러 가지 방향으로 마구 질주하는 생각 때문에 눈이 핑핑 도는 듯했다. 차마 고개를 돌릴 수가 없게 된 베르나데타는 슬쩍 눈길만 옆으로 주었다. 언뜻 보기에 벨레트가 미소 지은 것도 같았다. 밤바람은 차가웠지만 볼은 후끈거렸다.

 

  “, 사실은요, 선생님을 기다렸어요. 선생님이 안 오시면 어떡하지 걱정이 돼서…….”

  “난 언제나 돌아올 거야.”

 

  뻣뻣하게 고정하고 있는 옆얼굴에 시선이 느껴졌다. 얼굴이 붉어진 게 들킬 것 같았지만 마냥 피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 고개를 돌렸다. 어렴풋하기만 한 빛 속에서도 아름다운 옥색 머리카락에 잠시 눈을 빼앗겼다. 그리고 마주한 눈에서, 베르나데타는 어떤 감정을 읽었다.

  확신이 들지 않았고,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수치스러움마저 몰려오는 듯, 얼굴이 점점 뜨거웠다. 막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였다.

 

  “두 번 다시 두고 떠나지 않아.”

 

  벨레트가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베르나데타는 확신했다. 자신에 관한 것은 무엇이든 의심하고 보는 그녀라도 벨레트가 하는 말은 전적으로 믿을 수 있었다. 왈칵 눈물이 터졌다. 동시에 튀어나오려는 진심을 꾹꾹 눌러 삼킨 뒤, 베르나데타는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벨레트의 손을 맞잡았다.

 

  “믿어요, 선생님.”

 

 

 

 

겁쟁이의 결혼식

 

- 휴베르트 x 베르나데타 (휴베르)

- 홍화의 장 엔딩 이후의 시점

- 결혼식 직전에 생각이 많은 두 사람

 

 

 

  “,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무심코 입으로 다가오는 손을 억지로 내려놓았다. 북이라도 치는 듯 쿵쿵 울리는 심장 소리에 맞추어 작은 발이 방 안을 바쁘게 오갔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심장은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고, 새하얗게 변해버린 머릿속에서 온갖 종류의 마법이 터지는 것 같았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당장이라도 자신의 평화로운 공간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 평화로운 공간은 이제 한 사람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곧바로 깨달았다. 비명이 되지 못한 신음이 간신히 입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어쩔 줄을 모르고 공기를 쥐어뜯던 손이 결국 머리카락을 막 붙잡았을 때였다.

 

  “베르쨩, 준비됐어?”

  “도로테아~!”

 

  빼꼼 열린 문 사이로 도로테아의 얼굴이 나타났다. 구석을 향하던 베르나데타의 발걸음이 빠르게 곧장 문으로 향했다. 반사적으로 활짝 문을 연 도로테아의 품으로,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베르나데타가 뛰어들었다. 졸지에 허리를 꽉 붙잡힌 도로테아는 사람을 부르는 대신 베르나데타의 어깨를 부드럽게 다독였다.

 

  “어머, 왜 그래? 왜 울상이야? 뭐 잘못됐어? 누구야? 누가 감히 우리 베르쨩의 결혼식을 망치려고 해?”

  “, 어떡하지? 사실은 이게 전부 다 거짓말인 거 아닐까? 그래, 말도 안 돼, 베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휴…… 휴베르트 씨랑 결혼을 한다니! 하지만 휴베르트 씨가 베르에게 청혼을 했는데…… , 그것도 사실은 다 전략……

  “베르쨩! 진정해! 그럴 리가 없잖아!”

 

  억지로 베르나데타를 떼어낸 도로테아가 얼굴을 마주 보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이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긴 한숨을 뱉은 도로테아는 아예 문을 닫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당장이라도 거품을 물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는 베르나데타를 의자에 앉혀놓고, 그녀 역시 의자를 끌어다 맞은편에 앉았다. 다행히도 주머니에 손수건이 들어 있었다. 손수건 자락으로 베르나데타의 눈물을 조심조심 훔쳐냈다. 코를 훌쩍이는 베르나데타의 표정은 결혼식을 앞둔 신부의 표정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그래, 두 사람이 결혼한다고 해서 나도 놀랐어. 그건 인정해. 하지만 잘 생각해 봐. 다른 사람도 아니고 휴베르트 폰 베스트라가 장난으로 청혼을 할 것 같아?”

  “, 그치만 전략적인 이유라면……

  “베르쨩,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그런 생각은 꿈에서도 하지 마. 만약 정말 그런 이유로 청혼한 거면 내가 당장 가서 목을 졸라버릴 거야.”

  “, , 그건 좀……

  “자신감을 가져. 휴군이 베르쨩 볼 때 어떤 표정인지 몰라? 에델쨩도 혀를 내두를 정도라니까.”

 

  잠시 생각에 잠긴 베르나데타의 표정이 다시 우울했다. 도로테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휴군 표정이 좀 무섭긴 하지. 그럼 이렇게 생각하자. 베르쨩은 휴군을 사랑해?”

  “.”

 

  짧고도 확실한 대답이었다. 베르나데타로서도 이토록 확고하게 대답을 한 사실이 놀라웠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도로테아를 쳐다보자, 그녀 역시 마찬가지의 감상인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이내 초승달처럼 눈이 휘어졌다. 미모만큼이나 빛나는 미소를 지으며, 도로테아가 베르나데타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럼 뭐가 걱정이야! 이젠 못 무른다고 하면서 영원히 남편으로 만들어버리면 되는 거야!”

  “, 그런 거야?”

  “, 그런 거야. 그러니까 이제 나가자. 신랑 목 빠지겠어.”

 

  볼이 발그레 달아오른 베르나데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신부 얼굴이 이게 뭐냐는 잔소리를 속사포로 내뱉으면서, 도로테아는 손수건으로 부드럽게 베르나데타의 얼굴을 문댔다. 이어 화장대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도구들이 도로테아의 손으로 들어왔다. 베르나데타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눈을 감았고, 또 눈을 떴다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연신 얼굴 위로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베르나데타가 거울을 마주했을 때, 눈물 자국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다음에는 머리였다. 삐죽삐죽 솟은 머리가 물 몇 방울과 정성스러운 빗질로 예쁘게 가다듬어졌다. 마지막으로 드레스의 맵시까지 만족스럽게 정리하고서야 도로테아는 문을 열었다. 신부 베르나데타가 등장할 시간이었다.

 

  “가자.”

  “, .”

 

  긴장한 탓에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베르나데타는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었다. 도로테아의 손을 꼭 잡고 복도로 나와 계단을 향해 걸었다. 계단 아래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들이 겨우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다. 침을 몇 번이나 삼키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마침내, 계단을 다 내려가자 열려 있는 문 안쪽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연회장이 보였다. 당장이라도 심장을 뱉어낼 것 같았지만 도로테아의 손을 떨어져라 꽉 붙잡고 버텼다.

 

  “, 신부가 왔어요~”

 

  모두의 시선이 한꺼번에 꽂히는 게 느껴졌다. 그중에서 하나의 시선을 골라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베르나데타는 평소와는 다르게 예복을 갖춰 입은 휴베르트를 바라보았다. 가슴에는 베르나데타가 자수를 놓은 손수건을 꽂고 있었다. 평소와 똑같이, 웃는 듯 아닌 듯 미묘하게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것을 보고 나니 어쩐지 안심이 되기도 했다.

  휴베르트가 도로테아에게 가벼운 묵례를 하고, 베르나데타의 손을 건네받았다. 베르나데타는 휴베르트의 맨손을 잡은 것이 언제인지 문득 되짚었다. 조금은 서늘한 손에서 규칙적인 박동이 느껴졌다. 조금 빠른 그 박자가 자신의 것과 속도가 비슷해 괜히 웃음이 나려고 했다.

 

  “도망이라도 가셨나 했습니다.”

  “?”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혹시라도 되돌리고 싶으면 언제든 말씀하시거나 도망치시라고 했었지요.”

 

  분명 그런 말을 하기는 했었다. 이것은 결코 강요가 아니며, 마음이 가는 대로 답을 하면 된다는 말로 청혼을 한 휴베르트는 베르나데타가 눈물을 쏟아내며 고개를 끄덕인 뒤에 그런 말을 덧붙였다. 아니, 에델가르트에게 결혼하기로 했다고 보고하러 간 뒤에 했던 말 같기도 했다. 혹은 결혼식 날짜를 정하던 날에 들은 말인지도 몰랐다. 언제나 부정적인 쪽으로 격렬하게 돌아가는 베르나데타의 머리가 평소와 같이 극단적인 결론을 내렸다.

 

  “, 베르가 도망치기를 바라셨……

  “결코 아닙니다. 귀하가 와주어서 기쁘다는 뜻입니다.”

 

  휴베르트가 웃었다. 베르나데타의 말을 중간에 잘라먹기까지 하면서 내비친 그 웃음에, 베르나데타는 십 여분 전의 자신을 떠올렸다. 정체를 알 수 없던 불안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또한 베르나데타를 보고 안심한 게 분명했다.

 

  “휴베르트 씨도 베르 못지않게 겁쟁이네요.”

  “큭큭큭, 그렇습니까? 그런 말은 처음 듣는군요.”

  “조금 전까지 휴베르트가 어떤 표정이었는지 보여주고 싶어지네.”

 

  풋 웃은 에델가르트가 한마디를 거들자, 연회장은 금세 왁자지껄해졌다. 저마다 휴베르트가 어쨌네, 조금 전에 무슨 소리를 했네, 표정은 어땠네 떠들어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제국의 궁내경을 놀릴 기회는 그리 많지 않은 법이었다. 말리기를 포기한 휴베르트가 한숨을 뱉어냈다. 베르나데타는 금세 미간에 주름이 잡힌 휴베르트를 올려다보며 쿡쿡 웃었다.

 

  “베르가 안 올까 봐 걱정했군요.”

  “타당한 염려였다고 생각합니다만.”

  “에이, 왜요. 좋아한다고 고백은 베르가 먼저 했잖아요. 휴베르트 씨가 여러 번 도망치라고 했는데도 안 도망가고 옆에 붙어 있었는데요.”

  “사람의 마음은 바뀌기도 합니다.”

  “맞아요. 그러니까 휴베르트 씨를 좋아하죠. 베르는 휴베르트 씨가 무서웠는걸요.”

 

  대답할 말이 없는지 휴베르트는 입을 다물었다. 휴베르트를 놀리는 것인지, 휴베르트와 베르나데타의 결혼을 축하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자기들끼리 떠드는 것인지, 연회장에 모인 친구들은 시끄러웠다. 꼭 사관학교 시절의 흑수리반 같았다.

 

  “행복해요.”

  “저도 그렇습니다.”

 

  여전히, 반쯤은 무섭고 반쯤은 사랑스러운 미소를 보며 베르나데타는 웃었다. 예복 외에 어떠한 격식도 갖추지 않은 결혼식은 이제 막 시작된 참이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한참 패왕 루트를 밟는 중인데

(하려던 원고가 홍화 얘기라.....)

휴베르트랑 베르나데타 커플도 참 귀엽지 않나요

사실 전 베르나데타의 커플링이라면

다 좋아하긴 합니다<<

 

둘이 결혼한다고 하면

흑수리반 모두가 ㅇ_ㅇ)...?! 할 것 같은데

도로테아가 제일 걱정하지 않을까요?

도로테아랑 휴베르트 지회 생각하면

얘기 듣자마자 당장 목을 따버릴 기세로

휴베르트 찾아가서 진심이냐고 물어봤을 듯요

 

무튼 휴베르트랑 베르나데타는

무사히 결혼식을 올리고(?)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고민 해결은 달콤하게

 

- 클로드 x 리시테아

- 취풍의 장 엔딩 이후 시점

- 스킨십이 없어서 고민하는 리시테아와 사랑 앞에 좀 바보 같은 클로드

 

 

 

  “아아, 정말!”

 

  종이가 꾸깃꾸깃 구겨지는 소리와 어울리는 한 마디였지만, 그 대신 오독오독 과자를 깨물어 먹는 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팔미라에서 공수해 온 귀한 열매를 넣어 구웠다면서, 주방장이 뿌듯한 얼굴로 건네준 것이었다. 그 열매가 무엇인지는 묻지 않았지만 귀한 맛이기는 했다. 단맛에 깐깐한 리시테아 폰 코델리아가 만족하며 먹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짜증은 과자가 아니라, 함께 건네받은 편지에서 비롯됐다.

 

  “애정의 입맞춤을 담아? 뭘 담았다는 건지 정말.”

 

  주방장이 본 적도 없는 열매를 과자 반죽에 첨가한 것은 애초에 그의 뜻이 아니었다. 드래곤을 타고 가르그 마크로 날아오면서 등짐에 그 ‘귀한 열매’를 한 자루씩이나 실어 온 인간의 간곡한 부탁(리시테아가 아는 그라면 온갖 회유와 협박도 덧붙였겠지만) 때문이었다. 덕분에 맛있는 간식을 얻게 돼서 기쁘긴 했지만 그렇다고 불만이 사그라들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불이 붙었다.

 

  “이런 편지 한 장에 담을 바엔 나한테 직접 하면 되잖아!”

 

  그러니까 결국 문제는 클로드 폰 리건에게 있었다. 팔미라에서 가르그 마크까지 날아왔으면서 아직도 저를 만나러 오지 않는 클로드, 늘 장난처럼 애정을 고백하는 클로드, 여태까지 입 한 번 맞춰오지 않는 클로드, 클로드, 클로드 폰 리건!
  울컥 치미는 감정을 실어 과자를 으득으득 깨물었다. 와중에 이 사이로 뭉개지는 열매가 달고 달아 더욱 화가 났다. 어째서 구애로 보이는 모든 행동을 하면서 연인‘만’ 할 수 있는 행위에는 이리도 무지한지. 좋아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여전히 어린아이 취급을 하는 게 아닐지 의심하는 것도 당연했다.

 

  “바보 같아, 정말.”

  “그건 내 얘기인가?”

 

  ‘원탁의 귀신’이던 이가 아니랄까 봐, 아무튼 나타나는 시점만큼은 귀신같았다. 문틈으로 쏙 들이민 얼굴이 미워서 리시테아는 흥, 일부러 크게 코웃음을 쳤다.

 

  “쓸데없이 회담이 길어져서 말이야. 로렌츠 녀석이 말꼬리를 좀 많이 잡아야지.”

  “그 전에도 시간 있었을 텐데요.”

  “아…… 그게.”

 

  멋쩍은 듯 볼을 긁적이던 클로드의 시선이 탁자 위의 과자 접시에 닿는 게 보였다. 동시에 반색하는 얼굴도 한눈에 들어왔다.

 

  “과자는 맛있었나 보네. 팔미라의 과일도 나쁘지 않지?”

  “말 돌리지 말아요. 또 그렇게 피하려고요?”

  “이런, 오늘은 넘어가 주시지 않으려는 모양이군.”

 

  하하, 웃어넘긴 클로드가 자연스레 탁자를 사이에 두고 리시테아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때까지도 리시테아의 표정은 나름대로 험악했다. 어디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심정을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는 중이었다. 하지만 쉽게 기가 죽을 클로드가 아니었다. 그는 사관학교 시절부터 유명한 달변가였다.

 

  “넌 단것을 좋아하고 과자도 좋아하지. 오늘 들고 온 과일은 팔미라에서 제일 달기로 유명해. 과자로 만들면 딱이다 싶었는데 주방장님이 워낙 고집이 세셔야지. 요리할 게 산더미다, 요리법도 모른다, 이러쿵저러쿵…… 애걸복걸하다 보니 시간이 다 됐지 뭐야. 기사 한 명이 찾으러 내려오기까지 했다고.”

  “그게 절 보러 오는 것보다 더 급했다고요?”

  “아니, 아니야, 내가 잘못했으니까 마법은 쓰지 말고. 응? 깜짝 선물로 주고 싶어서 그런 게 당연하잖아. 회담이 끝나면 짠! 하고 등장해서 주고 싶었다고. 바보 같았던 것도 인정해. 다음부턴 꼭 가장 먼저 보러 올게.”

 

  당황한 표정이었다가 금세 눈을 찡긋해 보이는 클로드를 보고 리시테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말투가 가뜩이나 심란한 리시테아의 마음을 휘저어 놓았다. 도대체 이런 사람을 왜 좋아하기 시작한 것인지, 하다못해 고백은 왜 받아줬는지, 과거의 자신을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클로드, 아직도 제가 어린아이 같나요?”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그렇게 달래듯이 말하지 마세요. 제가 마냥 동생 같아서 좋다고 하는 거예요?”

 

  리시테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가뜩이나 이런 상황에 울음을 터뜨리기는 싫었다. 속상한 티를 내기는 더욱더 싫었다. 논리정연하게 다듬어진 말로 따져 묻고 진실만 담은 담백한 답을 듣고 싶었다. 소중한 감정이기에, 순간의 감정에 휘둘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지 않다는 건 리시테아, 네가 더 잘 알지 않아?”

 

  장난기가 싹 사라진 클로드의 얼굴을 보고도 가슴이 마구 요동쳤다. 평소보다 낮은 어조와 담담한 말투도 충분한 위로가 되지 않았다. 리시테아는 두 손을 꼭 그러쥐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좋아한다면서, 고백까지 해놓고서 왜 아무것도 안 하는 거죠? 손도 잡지 않고, 안으려고 하지도 않고! 나한테 할 입맞춤을 왜 편지에 담느냐고요!”

 

  숨도 제대로 쉬지 않고 뱉어낸 탓에 리시테아는 자기도 모르게 씩씩거렸다. 어깨가 크게 들썩이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귓속에서 북을 치듯 박동 소리가 요란했다. 그 시끄러운 숨이 차분히 가라앉는 동안에도 클로드는 답이 없었다.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클로드가 느리게 시선을 옮겼다. 리시테아를 똑바로 마주치던 눈이 탁자 위로 향했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렇게 몇 분이나 멈춰 있었을까, 그가 한 손으로 얼굴을 세게 쓸어내렸다. 어쩐지 볼이 좀 붉어 보였다.

 

  “잠깐만, 리시테아. 우리 사이에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뭐가 오해라는 거죠? 역시 당신과 제가 말하는 ‘좋아한다’는 다른……”

  “아냐, 그 부분에서는 난 진심이야. 네가 말하는 그 의미로 널 좋아한다고. 처음 고백했을 때도 그랬잖아, 너를 평생의 반려로 맞이하고 싶다고.”

 

  클로드는 리시테아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연거푸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해댔는데, 그럴수록 얼굴이 차츰 붉어지고 있었다. 마음이 좀 누그러진 리시테아는 하얗게 질린 주먹을 슬그머니 폈다. 덩달아 열이 오르기 시작한 볼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홧홧한 게 조금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왜 연인의 단계를 밟지 않는 거예요? 역시 날 여전히 어리다고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니고요?”

  “전혀 아니야. 솔직히 말하자면 하고 싶지. 손도 잡고 싶고, 안고 싶고, 입도 맞추고 싶다고. 젠장, 왜 이런 소릴 하고 있는 거람. 누구보다도 너를 한 사람으로 보고 있으니까 더 소중히 하고 싶었던 것뿐이야.”

 

  이제 클로드의 얼굴은 누가 봐도 붉었다. 크게 심호흡을 한 그가 겨우 고개를 들었다. 이젠 손등으로 볼을 문대는 리시테아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큼, 괜히 한 번 목을 가다듬는 클로드를 보며 리시테아도 괜한 긴장감에 침을 삼켰다.

 

  “그리고 아까 오해라고 했던 거 말인데, 아직 제대로 대답을 못 들었잖아. 연인이 되기도 전에 그렇게 다가갈 수는 없는 노릇이고.”

  “네에?”

 

  긴장감이 깨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리시테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까지 했다. 당황하기는 클로드도 마찬가지였는지, 어깨가 한껏 올라가 있었다. 리시테아는 급하게 자신의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지난겨울에 찾아왔을 때 클로드가 사귀자는 소리를 했다. 그래서 사귀어도 괜찮다고 대답을 했다. 그 이후로 벌써 달이 여러 번 지나갔다.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전 저번에 분명히 괜찮다고 대답했잖아요.”

  “하지만 그건 완벽한 동의라기엔……”

 

  보기 드물게 우물쭈물 말을 흐리는 클로드의 모습에 리시테아가 울컥했다.

 

  “애초에 클로드가 먼저 슬슬 사귀어도 되지 않겠냐고 장난처럼 말했으면서!”

 

  그랬다.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가 클로드가 장난처럼 ‘슬슬 사귀어도 되는 거 아니야?’하고 운을 뗐다. 그래서 리시테아도 아닌 척 ‘뭐, 당신이 바란다면 그것도 괜찮겠네요.’라며 대답을 했다.

 

  “아, 이런. 미안. 진짜로 미안.”

 

  클로드가 다시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거칠게 마른세수를 하며 몇 번이고 심호흡을 했다. 리시테아는 어색하게 자리에 다시 앉아서 얌전히 그가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울컥해서 화를 내기는 했지만, 리시테아 역시 장난처럼 대답한 것이 사실이었다.

 

  “처음 고백했을 때 네가 단명할 거라면서 거절했잖아. 그래서 한네만 선생님이랑 린하르트를 철야시키면서까지 노력한 거고. 이젠 문장도 사라졌고, 단명할 이유도 없어. 그런데 여기서 거절당하면 진짜 끝이니까…… 더 노력해서 날 좋아하게 만든 다음에 다시 정식으로 고백할 생각이었어.”

 

  씩 웃으면서 말꼬리를 잡아 진짜냐고 되묻지 않았을 때부터 눈치를 챘어야 했다. 자신이 알던 클로드의 반응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그냥 지나가 버린 몇 달 전의 제가 바보 같았다.

 

  “아아, 정말!”

 

  리시테아는 다시 일어났다. 멀고도 가까운 몇 걸음을 걸어, 클로드의 옆에 섰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뜬 클로드에게 성큼 얼굴을 들이밀었다.

  당황한 클로드는 눈도 감지 못했고, 리시테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찰나의 강렬한 입맞춤이었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리시테아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제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화끈거리는 볼은 숨길 도리가 없었다. 여전히 넋이 나가 있는 클로드를 보며 리시테아는 헛기침을 했다.

 

  “이러면 진심으로 대답이 됐나요?”

 

  클로드의 표정이 복잡했다. 기뻐 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혼란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팽팽 돌아가던 머리도 이 순간에는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리시테아는 남은 과자 중 하나를 클로드에게 내밀었다. 홀린 듯 클로드의 손이 그 과자를 건네받았다.

 

  “어…… 어. 응. 네. 아주 명확하게.”

 

  리시테아는 뿌듯했다. 그래서 제게 주는 상으로 남은 과자를 입에 물었다. 오도독, 경쾌한 소리와 함께 입안에서 부스러지는 과자가 더없이 달았다. 더는 쓸데없는 고민으로 화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리고 생각 이상으로, 클로드는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도 확인했기에 행복했다. 순식간에 과자 하나를 다 먹은 리시테아가 손수건으로 입가를 정돈했다.

 

  “좋아요. 그럼 지금부터 나가요.”

  “어, 어?”

 

  과자를 손에 쥔 채로, 클로드가 리시테아를 올려다보았다. 이미 자리에서 일어난 리시테아에게 클로드의 대답 따위는 들을 생각이 없었다. 리시테아는 비어 있는 클로드의 손을 붙잡아 일으켰다.

 

  “회담 뒤로 아무 일정 없는 것도 다 알고 있어요. 그동안 괜한 고민 하게 만들었으니까 당신이 책임지고 나랑 시간 보내면서 달래줘야 해요. 알았죠?”

 

  이제야 겨우 머리가 움직이는지, 클로드가 평소와 똑같이 씩 미소를 지었다.

 

  “누구 명인데 그러고말고.”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금사슴 최애는 리시테아인데

차애는 아마...? 클로드인 것 같습니다

 

지옥에서 올라온 올캐러 올커플링 사랑맨이라서

애들 지원회화 보다 보면 앗 이 커플도 좋아...!!!

하게 되는 편인데

금사슴에선 이그마리랑 클로리시가 그랬어요 ㅋㅋㅋ

물론 리시테아는 쌤이랑 결혼해야 돼서

클로드는 페트라랑 후일담 봤지만(?

 

클로리시 후일담이 단명 때문에 한번 거절당했다가

클로드가 방법 찾아내서 살린(?) 뒤에 결혼하는 거여서

반영을 해보았습니다

 

후일담은 너무 둘 사이의 이야기만 묶여서 나와서 좀 단편적인데

이안쌤(이번엔 벨레트로 했습니다)의 금사슴반은

린하르트도 있고 한네만도 있기 때문에

클로드가 물심양면 지원해준 덕택에

두 사람의 연구가 초스피드로 진행돼서

리시테아도 초스피드로 문장을 없애고 해피엔딩!

 

얘들아 모두 행복하게 잘 살자

 

 

 

 

푸른 달과 함께 걷는 길

 

- 창월의 장 기준 EP.13 재회의 여명 ~ EP.18 왕의 개선

- 실뱅이 선생님과 속얘기 하는 내용밖에 없습니다

- 소꿉친구 중심 이야기

 

 

  “이게 얼마 만이냐.”

 

  대수도원 건물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저곳이 무너져 내리긴 했지만, 여전히 웅장한 자태였다. 실뱅은 고개를 불쑥 들었다. 파란 하늘에 페가수스 한 마리가 둥둥 떠 있었다. 혼자만 감상에 젖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뒤, 그는 또 다른 동행자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이야, 펠릭스, 그때 생각나? 내가 항상 안 나가겠다는 널 끌고……

  “시시한 옛날얘기나 떠들러 온 게 아닐 텐데.”

  “동창회잖아, 동창회. 이런 날은 옛날얘기로 꽃을 피워야 제맛이지. 안 그래, 잉그리트?”

  “왠지 전하와 선생님도 계실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진짜 시시한 말을 하고 앉았군.”

 

  쯧, 혀를 찬 펠릭스가 휙 앞서나갔다. 하하 웃긴 했지만 실뱅은 잉그리트의 말이 시시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헛될 뿐이었다. 포기가 빠른 편은 아니었지만, 이 문제에는 그러한 답 외에는 찾을 수 없었다. 어릴 적부터 보아온 소꿉친구도, 신기하게 사람의 마음을 여는 재주가 있던 선생님도 이제는 없었다. 5년 전, 제국이 전쟁을 일으킨 이후로 세상엔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실뱅의 세상 또한 변했다.

  천천히 말을 몰면서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빙빙 돌고 있던 잉그리트가 페가수스를 몰고 훅 날아갔다. 동창을 발견한 모양이라고 멋대로 단정한 실뱅은 고삐를 고쳐 쥐었다.

 

  “혼자 막 가버리네. 따라가자, 펠릭스.”

  “.”

 

  코웃음을 치면서도 펠릭스는 착실하게 속도를 올렸다. 아까보다 훨씬 작게 보이는 페가수스를 눈으로 좇으며 실뱅도 그 뒤를 따라갔다. 대수도원의 정문 방향과 약간 틀어진 탓에 신경이 쓰였다.

  그쪽에 뭐가 있더라?

  펠릭스가 기억하고 있을까 입을 떼려는 찰나였다. 순식간에 몸집을 키운 페가수스가 어느새 그들의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잉그리트의 얼굴은 경악에 물들어 있었다.

 

  “저기에…… 저기, 저쪽에……

  “뭐야, 귀신이라도 봤어?”

  “, 선생님이랑전하가누군가랑 싸우고 있어.”

 

  실뱅은 미간을 찌푸렸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것 같았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뭐라고 말을 하고 싶은데 입을 열면 숨이 턱 막힐 것만 같았다.

 

  “어이가 없군. 착각을 해도 어떻게……

  “아니야, 그 머리색을 어떻게 착각해? 선생님이 아닐 리가 없어. 그건 분명 선생님이야. 그리고 그 몸집에 창을 쓰는 솜씨 하며, 분명히 전하라고.”

  “진짜 뭘 잘못 먹기라도 했나 보군.”

 

  펠릭스의 말에 겨우 정신이 들었다. 실뱅은 씨익 웃었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장난스럽게, 밝게 웃었다.

 

  “가서 확인해보자고. 진짜면 감사한 일이고, 아니어도 어쩔 수 없지. 그리고 누구랑 싸우고 있다며? 도와줘야 할지도 몰라.”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잊은 듯한 잉그리트가 급하게 다시 날아올랐다. 실뱅도, 펠릭스도 급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날아가는 속도에 맞추느라 한껏 말을 재촉했다.

 

*

 

  “선생님…… 역시 살아 계셨군요……!”

 

  잉그리트가 굳이 말하지 않았더라도 실뱅은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머리색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 몇 안 되고, 그중 하나는 선생님이었다. 손에 쥔 검 또한 그들이 익숙하게 보아온 천제의 검이었다. 심지어 옆에 선 사람은 정말로 디미트리 전하였다. 아무렇게나 자라서 엉망이 된 머리도, 눈 한쪽을 가리고 있는 검은 안대도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잉그리트의 말이 맞았다. 그런 덩치에 그렇게 창을 쓰는 사람은, 그것도 성인 남성으로 보이는 상대방을 짐짝처럼 휙 들어다 집어던지는 괴력의 소유자는 세상에 디미트리 알렉산드르 블레다드 한 명뿐이었다.

 

  “어쨌든 지금은 도적을 물리칩시다!”

 

  이어진 한 마디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실뱅은 창을 고쳐 쥐었다.

 

  “너희……

 

  디미트리와 눈이 마주쳤다. 실뱅은 이를 악물었다.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도적의 검을 피해내고 창을 휘둘렀다.

제발, 지금은 전투에 집중하자고요, 전하. 안 그러면 지금 당장 울어버릴 것 같으니까.

 

*

 

  별은 반짝였고 바람은 차가웠다. 고티에령에 비하면 시원한 수준이지만 겉옷 하나 걸치지 않고 나올 만한 시간은 아니었다. 몇 군데 피워놓은 횃불은 겨우 방향이나 알려주는 정도였지만, 실뱅은 신경 쓰지 않았다. 터벅터벅 걷다 보니 어느새 5년 전의 교실 앞에 서 있었다. 멍하니 교실 입구를 쳐다보고 있자니 새록새록 그때가 떠올랐다.

  실뱅은 교실 입구를 마주 보고 있는 기다란 의자에 털썩 앉았다. 등받이에 툭 등을 기대니 어슴푸레 교실 안이 보이는 듯도 했다. 깊은 한숨이 적막한 대수도원을 울렸다. 동시에 옅은 김도 피어올랐다가 흩어졌다.

  영영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사람들이 살아 있었다. 심지어 자신의 눈앞에 있었고, 지금도 벽 너머 어딘가의 방에 있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쉽게 얘기해서 기뻐야 했다. 하지만 실뱅은 혼란스러웠다. 너무 기쁜 나머지 머리가 제구실을 못 한다고 보기에는 무언가 달랐다.

  실뱅 조제 고티에는 어릴 적부터 사람을 믿지 않았다. 그런 그가 마음을 열었던 상대는 고작해야 한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마저도 한 사람은 더스커의 비극 때 많은 이와 함께 세상을 떠났다. 디미트리, 펠릭스, 잉그리트. 실뱅에겐 그 셋만이 친구였다. 가볍게 말을 섞는 동료도, 가볍게 입을 맞추는 연인도 많았지만 어디까지나 그 수준에 그쳤다. 사관학교에 와서도 누군가에게 이해를 받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마음을 열 생각도 없었다. 실뱅은 사람을 믿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무표정한 데다 감정 표현도 드물고, 희귀한 문장을 가졌으면서도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는 용병 출신의 선생님은 예외였다. 사관학교에서 보낸 시간이 1년이 거의 다 되어갈 무렵, 실뱅은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 손으로 꼽아야 하는 친구에 이제 선생님도 포함이 되었다.

  그러기가 무섭게 선생님이 사라졌다. 전투 중 행방불명이란 건 결국 죽었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실뱅은 고티에령으로 돌아가면서 속으로 여신을 저주했다.

  이렇게 금방 데려가실 거면 마음 열 만한 상대는 왜 주신 건데요.

  그렇게 여신을 저주한 탓인지, 전황은 왕국에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러더니 왕도에서 섭정 루퍼스를 살해한 죄라며 디미트리가 붙잡혔다. 처형까지는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고 했다. 실뱅은 다시 저주했다.

  그 녀석이 뭘 그렇게 잘못해서 데려갑니까. 나한테 얼마 있지도 않은 사람들을 왜 자꾸 데려가시냐고요.

  세간에는 디미트리가 살아 있다고 믿는 사람이 많았다. 코넬리아가 시신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실뱅은 그런 가느다란 희망에 매달릴 만큼 튼튼하지 않았다. 그래서 포기했다. 깨끗이 단념했다. 그렇지 않아도 폐쇄적으로 닫아걸고 있던 마음속 빗장을 다시는 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여기서 뭐 해?”

 

  예상치 못한 말소리에 실뱅은 거의 퉁겨져 나오듯이 벌떡 일어나 싸울 자세를 취했다. 이 본능적인 움직임에 상대방이 뒤로 슬쩍 물러났다. 저 멀리서 일렁이는 횃불 덕에 다행히 상대를 알아볼 수는 있었다.

 

  “선생님.”

 

  침을 꿀떡 삼키고 실뱅은 몸에 힘을 풀었다.

 

  “밤도 늦었는데 들어가서 쉬지 그러세요?”

  “실뱅이야말로.”

 

  실뱅이 다시 의자에 몸을 기대자, 선생님도 그 옆자리를 차지했다. 나란히 앉아서, 두 사람은 함께 수업을 하던 교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 년 동안, 어떻게 지냈습니까?”

  “자고 있었어.”

  “.”

 

  무심코 터져 나온 그 소리가 선생님에게는 어떻게 들렸을지 알 수가 없었다. 어이가 없었고, 황당한 나머지 말문이 막혔다. 옛날부터 비밀이 많은 사람인 건 알았지만 속이 꼬였다. 실뱅은 5년 전 자신의 뒤통수라도 때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진짜 살아 있긴 한 겁니까? 제국의 첩자는 아니고?”

  “날 깨운 사람이 오늘이 천년제 날이라고 하더라.”

  “농담은 정도껏……

  “진짜야.”

 

  마주친 시선이 옛날과 똑같이 올곧았다. 가끔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투명하고, 맑은 눈이었다. 실뱅은 그래서 얼굴을 마주보기가 힘들었다. 어쩐지 거울 같은 그 눈에, 제 엉킨 속이 비치는 것 같았다.

 

  “난 진짜 선생님을 모르겠습니다.”

 

  대답은 없을 것이라고 멋대로 예상하며 실뱅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두운 가운데도 이상하리만치 빛나는 눈이 저를 쫓는 게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고 싶기도 했고, 그러고 싶지 않기도 했다.

 

  “실뱅은 잘 지냈어?”

 

  그 질문이 실뱅의 발을 붙잡았다.

  무슨 대답이 듣고 싶어요, 선생님?

  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실뱅은 휙 뒤로 돌았다. 그리고 씨익 웃으며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뭐 그럭저럭 지냈죠. 왕국 얘기는 아까 들었으니 아실 테고, 그래서 저도 영지 지키느라 전투에 계속 끌려다니는 처지입니다.”

  “힘들었겠다.”

  “하하, 예나 지금이나 한 마디로 속을 후벼 파신다니까.”

 

  그러니까, 왜 갑자기 나타나서 겨우 잠재워놓은 속을 뒤집어놓느냐고요, 선생님.

 

  “먼저 들어갑니다. 밤바람 차니까 들어가세요.”

 

  얼른 뒤돌아 발을 재촉했다. 꽉 깨문 입술에서 비릿한 맛이 났다. 자꾸 그를 술렁이게 만들던 혼란스러움의 이유를 깨달은 탓인지, 속이 더 울렁거렸다. 정말 어린애 같은 어리광이었다.

  견딜 수 없어 포기했더니 이제야 제 곁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미웠다.

 

*

 

  실뱅은 한 가지 정정해야 했다. 제 곁으로 돌아온 사람은 한 명이었다. 선생님은 돌아왔지만, 디미트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눈앞의 디미트리는 제가 알던 디미트리가 아니었다.

  옛날부터 펠릭스는 그런 말을 했었다. 디미트리는 잔혹한 본성을 숨기고 있다, 언젠가는 다들 저 멧돼지의 짐승 같은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실뱅은 가볍게 흘려들었다. 디미트리는 본성이 착한 사람이었다. 사람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씨 고운 아이였고,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모두를 똑같이 대하던 훌륭한 아이였다. 그래서 그 말을 그렇게 가볍게 넘겼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디미트리는 펠릭스의 말 그대로였다. 살인귀라도 쓰였는지 입만 열면 목을 따야 한다는 둥, 모조리 찢어 죽여야 한다는 둥, 아무튼 죽이는 이야기밖에 하지 않았다. 죽은 이들을 가엽게 여기다 못해 아예 작정하고 죽은 이들의 편에 서서 산 자들을 도륙하는 느낌이었다.

  5년 전의 그 전투 때에도 디미트리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눈이 뒤집혔다는 말은 그럴 때 쓰는 말이란 걸 체감했다. 디미트리는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허공을 보며 중얼거리기 일쑤였다. 제국의 황제가 가르그 마크에 당도했을 때에는 어찌나 빠르게 적군 사이를 뚫고 가는지, 두두를 비롯한 몇몇이 부리나케 그 뒤를 쫓아야 했다.

  그 이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처형 이야기를 들었다. 따지자면 그때부터 홀로 5년이나 떠돌아다닌 셈이니 극단적으로 치달을 만하다고 생각은 했다. 그렇다고 받아들이기 쉬워지지는 않았다. 실뱅은 섣불리 디미트리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속속들이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처음 보는 사람처럼 바뀌어버리면 누구나 그럴 것이라 자신을 위안했다. 회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

 

  “저기, 실뱅.”

 

  갑옷을 입고 페가수스 위에 오른 모습까지는 예상 범위였지만 짧게 자른 머리카락도, 투구를 쓴 모습도 실뱅에게는 낯설었다. 이유를 물어볼 것까지는 없었다. 영지 사정상 프랄다리우스령이나 고티에령처럼 대놓고 제국에 반기를 들 수 없는 갈라테아령에서 빠져나와 여기까지 오려면 모습을 감출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 전하가 살아 계시고, 선생님이 살아 계셨으면 지금 우리 상황이 좀 달랐을까 하고.”

  “글쎄다. , 그 녀석이 있으면 구심점이 있으니까 지금보단 나았겠지.”

  “영지에서 어영부영하느니 전하를 찾으러 나가는 게 나을 것 같단 생각도 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충분히 잉그리트가 할 법한 말이었지만 실뱅에겐 그 어느 것보다 듣고 싶지 않은 말이기도 했다.

 

  “그건 너무 위험하지.”

 

  말을 뱉으면서도 자기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불안했다. 그냥 평범하게 걱정하는 표정이면 좋을 텐데, 귀가 먹먹하도록 뛰는 심장 때문에 불안감이 상승했다. 무심코 입술을 깨물려던 실뱅은 잉그리트의 시선이 돌아오는 걸 느끼자마자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여기로 왔어.”

  “그래서라니…… 여기서 싸우려고?”

  “. 그렇게라도 왕국을 위해 봉사할 수 있다면 그래야지.”

 

  그 역시 실뱅에겐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잉그리트는 말린다고 들을 사람이 아니었다. 기사의 측면에서 따지자면 자신보다 훨씬 더 기사다운 사람이었다.

 

  “너 그러다 들키면 위험한 거 알지?”

  “실뱅, 나도 그 정도 생각은 해.”

 

  실뱅은 볼멘소리를 내는 잉그리트에게 다시 미소를 지어 주었다. 하다못해, 같은 전장에 있으면 위험해지기 전에 구하러 갈 수 있을 것이다. 기껏해야 자기 위안밖에 되지 않는 희망으로 불안한 가슴을 가라앉혔다.

 

  “네가 있으면 든든하지, 잉그리트.”

  “오래는 못 있겠지만……

  “그래, 알아. 영지로도 돌아가서 모습을 비추지 않으면 가족들이 위험해질 테니까.”

  “. 그래도 얼굴 보니까 좋다.”

 

  그제야 잉그리트가 미소를 지었다. 마음 한구석이 따스하게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실뱅은 진심으로 웃었다. 완벽한 동의가 담긴 웃음이었다.

 

*

 

  “. 그러고도 네가 고티에의 수장이냐.”

  “어라, 고티에의 수장은 내가 아니라 아버지라고, 펠릭스. 프랄다리우스의 수장이 너희 아버지인 것처럼.”

  “무슨 소린지 알아들었을 텐데.”

  “~ ~ 알다마다요. 아무튼 나도 나가서 싸우는 몸인데 이래서 되겠냐 이거지?”

 

  결국 펠릭스가 다시 혀를 차고 돌아섰다. 키득키득 웃으면서 실뱅은 대충 머리를 흔들어 흙먼지를 털어냈다.

  프랄다리우스령에서 급한 전갈이 왔다고 했을 때, 실뱅은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기 위해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해야 했다. 편지를 읽는 변경백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보고서는 목이 타들어 갔다. 서둘러 지원을 바란다는 말에는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 나갔다. 실뱅은 사색이 된 얼굴로 죽을힘을 다해 말을 몰아 프랄다리우스령으로 달렸다. 그렇게 도착한 전장에서 처음 마주한 것은 적군에 포위되어 고군분투 중인 제 친구였다. 물론 그의 주위에는 왕국군이 꽤 여럿 있었지만, 실뱅의 눈에는 펠릭스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적을 베어 넘겼다. 고티에 변경백이 부리나케 파견한 기사단이 합류하고 나서야 전황이 뒤집혔다.

  그제야 욱신욱신 옆구리가 아팠다. 상대방이 휘두르는 해머를 잘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펠릭스의 표정을 보니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갑옷 덕에 피도 보지 않았고, 멀쩡히 움직일 수 있으니 큰 부상은 아닐 것 같았다.

 

  “고생했다, 펠릭스.”

 

  기껏해야 시커먼 멍이나 들고 말겠지 하며 실뱅은 안도감에 미소 지었다. 동시에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

 

  “실뱅!”

 

  땅이 불쑥 다가오는가 싶더니 펠릭스의 얼굴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펠릭스는 무사했다. 갑자기 무너져 내린 몸을 붙잡은 것도 펠릭스였다. 어쩐지 나른한 손을 뻗어 펠릭스의 어깨를 잡았다. 살아 있었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헛소리 지껄이지 말고 꽉 잡아. 의료반에 데려다주지.”

 

  그러고 보니 그 전갈을 받은 뒤로 쉬지도 않고 달려왔던가.

  허기와 피로, 통증, 졸음까지 한꺼번에 쏟아졌다. 하지만 그보다 든든한 온기가 제 몸을 받치고 있었다. 축 늘어지려는 몸을 어떻게든 추스르며, 실뱅은 펠릭스와 발을 맞춰 걸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안정감에 자꾸만 미소가 나왔다.

 

*

 

  그런 5년이었다. 매일 언제 넘나들게 될지 모르는 사선에서 줄타기를 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두 사람과는 몇 달에 한 번 겨우 얼굴을 볼까 말까 했다. 각자의 영지에서 각자의 목숨을 부지하기에도 바빴다. 가끔 얼굴을 마주했다 헤어질 때면 아무렇지 않게 또 보자며 가볍게 인사했지만, 그때마다 실뱅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가다 못해 썩어 문드러졌다. 또 제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제가 모르는 사이에 잃게 될 것 같아 두려웠다. 정말, 말 그대로 두려웠다. 상대의 복부에 창을 밀어 넣을 때, 날아온 쇼트 액스가 머리카락을 스쳤을 때보다도 프랄다리우스령과 갈라테아령에서 전갈이 왔을 때가 더 두려웠다. 수많은 밤 동안 자신을 다독이고 수많은 낮 동안 미소 지으며 농담을 던졌다. 그런 지옥 같은 5년이었다.

  분명히 깨끗이 단념했을 텐데.

 

  “선생님이 있기를 바란 순간이 참 많았죠.”

 

  그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선생님이 여기 있었다면, 당신이 죽지 않고 우리의 옆에 있었다면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돌아올 리 없는 이를 떠올리며 한탄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고 쓸모없는 일인지는 옛날부터 알고 있었다. 오래전 더스커에서 잃은 친구가 함께 있기를 바란 순간도 차마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알면서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실뱅은 자꾸 그런 식으로 바랐다. 문득 바라고, 비탄에 잠기고, 포기하는 일을 수천, 수만 번 반복했다. 그때마다 불로 지진 듯 가슴이 아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지?”

 

  파드득, 어깨가 튀었다. 어느새 눈앞에 선생님이 서 있었다.

 

  “, 선생님.”

  “표정이 안 좋아.”

  “하하, 그건 또 언제 보셨대.”

 

  웃으려고 했는데 생각처럼 잘 되질 않았다. 입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어쩐지 선생님은 이런 순간을 기가 막히게도 잘 맞췄다. 실뱅이 바닥을 알 수 없는 어둠 속에 깊이, 깊이 가라앉고 있을 때면 현실로 끌어당기는 것이었다.

 

  “어디 가십니까?”

  “디미트리한테.”

 

  어린 시절의 작은 디미트리가 떠올랐다가 안대를 한 지금의 디미트리로 순식간에 모습이 바뀌었다. 기분을 환기하려고 던진 질문이었는데 이젠 돌이킬 수가 없었다.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금방 돌아설 것처럼 대성당 쪽으로 향해 있던 몸을 완전히 틀고, 선생님은 실뱅을 바라보았다.

 

  “차 한잔하자.”

  “뜬금없이 무슨 소리예요?”

  “실뱅이 할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아서.”

 

  얼빠진 얼굴로 선생님을 쳐다본 것도 잠시, 어느새 실뱅은 선생님과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찻잔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왔다. 베르가모트 향이 코를 간질였다. 5년이 지났는데도 선생님은 잊지 않은 모양이었다.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 좋은 거 아냐고, 그래서 나도 어릴 때 많이 마셨다고 지나가듯 이야기했던 적이 있었다.

 

  “마셔.”

  “감사합니다.”

 

  홀짝 차를 들이켜는 선생님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실뱅도 잔을 들었다. 은은하게 퍼지는 향이 좋았다. 한 모금을 마시고 잔을 내려놓으니 시선이 따가웠다. 밝은 청록색 눈동자가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밤의 대화 이후로 줄곧 실뱅이 피해왔던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가 듣고 싶으십니까?”

  “실뱅이 하고 싶은 이야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누군가에게 솔직하게 속을 내비치기는 실뱅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선생님 앞에서만큼은 자꾸 모든 걸 내려놓고 솔직해지고 싶어지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 사실이 분하고 화가 난다는 점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럼 다시 묻겠는데요, 왜 지금입니까?”

 

  그 말부터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멋대로 말이 튀어 나갔다. 탁자 밑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무려 오 년입니다. 선생님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고 전하도 처형당했습니다. 아니지, 처형당한 줄 알았죠. 나는 희망을 품고 기다릴 수 있는 인간은 못 돼서요. 애써 묻었습니다. 애도했어요. 내가 마음을 연 사람들이 하나둘 옆에서 사라져서 화가 치밀어 오르고, 괴롭고, 슬프고, 아픈데 그걸 더 가지고 갈 힘이 없었다고요. 그래서 포기했습니다. 그렇게 오 년을 보냈어요. 그런데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눈앞에 둘이 떡하니……

 

  목이 메었다. 울컥 솟아오르는 무언가를 누르기 위해서 숨을 골랐다. 꽉 쥐었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몇 번 더 심호흡을 하고 실뱅은 찻잔을 들었다. 이럴 걸 알아서 베르가모트 티를 준비해준 것일지도 몰랐다. 선생님은 그런 사람이었다.

 

  “미안.”

  “사과할 게 아니잖습니까. 물론 두 사람이 살아 있는 건 기뻐요. 기쁜데, 젠장……

  “그렇다고 실뱅이 힘들었던 게 사라지는 건 아니지.”

 

  선생님의 말이 맞았다. 이제 와 두 사람이 나타났다고 해서 망가졌던 5년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갈가리 찢어지는 듯했던 실뱅의 가슴이 깨끗하게 단번에 낫지도 않을 것이다. 또 잃을지도 모르는 공포와는 앞으로도 싸워야 한다. 실뱅도 알고 있었다.

 

  “도대체 왜 당신은 그렇게…… 모든 걸 다 아는 건데요.”

 

  미소로 포장하고 농담으로 치장까지 해놨던 어두운 감정을 아무렇지 않게 꺼내다가 툭툭 먼지를 털어주고 밖으로 끄집어낸 느낌이었다. 이십 년이 넘는 동안 실뱅이 단 한 번도 제대로 하지 못했을 만큼 어려웠던 일을, 선생님은 차 한 잔을 들이켜듯 가볍게 해냈다.

  이 사람이라면 디미트리를 잡아줄 수 있을까.

 

  “아무 말도 안 하는 제자 속도 꿰뚫어 보시는 분이니까 그 녀석이 무슨 생각하는지는 더 훤하시겠네요.”

  “디미트리가 걱정되나?”

  “그럼 걱정이 안 되겠습니까?”

 

  아까부터 실뱅은 말도 안 되는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다. 이런 말을 하려고 선생님을 마주 보고 있는 게 아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는 그 눈에는 늘 졌으니 이번에도 적당히 속을 털어놓고 아무렇지 않은 척 웃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댐이 무너지기라도 한 듯, 가슴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말들이 멋대로 흘러나왔다.

 

  “나도 그래.”

  “선생님.”

  “디미트리는 심지가 착한 아이니까 분명 말하면 들어줄 거야. 얼마나 걸릴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왜 묻지 않습니까?

  갑작스레 말문이 막혔다. 묻고 싶었지만 묻고 싶지 않았다. 실뱅은 그걸 감추고자 찻잔에 손을 뻗었다. 달그락 소리가 말소리를 대신했다. 여전히 깊이를 알 수 없는 청록색 눈동자가 저를 보고 있었다.

마침내 시선이 떨어졌다. 차를 한 모금 들이킨 선생님이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미안한데 먼저 일어날게. 역시 디미트리한테도 가봐야 해.”

  “, .”

 

  아직 차가 남아 있으니 더 마시고 가라는 말을 덧붙이고, 선생님은 성큼성큼 멀어졌다. 실뱅은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디미트리한테도라니, 처음부터 나랑도 대화할 생각이었구나.

  하지만 선생님은 실뱅이 가장 걱정하던 질문은 던지지 않았다. 왜 너는 디미트리에게 가보지 않느냐는 질문 대신 걱정되느냐고 물었고, 자신도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뒤엔 디미트리한테도 가봐야한다면서 자리를 떴다. ‘말하면 들어줄것이라는 말은 남기면서도, 끝내 그에게 왜 가지 않느냐고 묻지는 않았다.

  탁자 위로 눈물이 방울방울 번졌다. 마지막으로 눈물을 흘리며 울었던 것은 디미트리가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날이었다. 헛웃음이 났다. 눈앞에 친구를 두고도 말 한마디 붙이지 못하는 자신을,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한심하고 경멸스럽기만 한 자신을 그 어떤 말로도 몰아붙이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 사실이 못내 고마웠다.

 

  “하하…… 진짜 이상한 사람이라니까.”

 

  실뱅은 선생님이 사라진 방향을 다시 바라보았다. 아마 대성당에 우두커니 서 있는 디미트리의 옆에 있을 것이었다.

 

  “부탁합니다, 선생님……

 

*

 

  시간은 언제나와 똑같이 흘러갔다. 기다려줬으면 하는 바람도, 제발 얼른 끝났으면 하는 기도도, 시간은 상관하지 않고 똑같이 흘렀다. 차가운 바람 속에서 재회를 맞이했던 사람들은 이제 파랗게 물든 나무들 가운데 서 있었다.

  몇 번의 큰 전투를 치렀다. 미르딘 대교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는 어느새 후방에 두두가 합류해 있어서 기겁하기도 했다. 실뱅에게는 여러 의미로 기쁜 일이었다. 학창 시절의 친구가 살아 돌아왔다는 순수한 기쁨이 하나의 이유였고, 두두를 바라보던 디미트리의 얼굴이 실뱅이 거의 평생에 걸쳐 알고 있던 표정과 거의 똑같았다는 것이 또 다른 이유였다. 여전히 디미트리는 제국의 황제에게 집착했고, 목을 베겠다는 말만 반복했지만, 그 표정 하나로 실뱅은 크게 안도했다. 선생님의 말대로 디미트리는 심지가 착한 아이그대로였다.

  직전에는 그론다즈 평원에서 대규모의 병력이 부딪쳤다. 다행히도 전투는 왕국군의 승리로 끝났다. 다만, 다른 사건이 있었다. 한 소녀가 디미트리를 찌르려 했고, 그것을 로드릭이 막았다. 로드릭은 펠릭스의 아버지이기도 했지만, 실뱅에게도 삼촌 같은 존재였다. 어릴 적부터 훈련도 가끔 도와주고, 애정 어린 잔소리를 하던 사람이었다. 친구와는 다른 범주였다. 로드릭은 실뱅에게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었다.

  그로 인한 충격을 상쇄한 것은 디미트리였다. 로드릭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디미트리의 무언가를 자극한 듯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선생님이 있었다. 선생님은 디미트리에게 손을 내밀었을 것이다. 5년 전과 똑같이, 실뱅의 닫힌 문을 열었듯이, 그렇게.

 

*

 

  대성당 밖에 나와 있는 디미트리를 보는 것은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디미트리는 꽤 오래 수도원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사람에게 사과를 했다. 친구들은 물론이고 세이로스 기사단 사람들도 빠뜨리지 않았다. 실뱅도 사과를 받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물론 실뱅은 손사래를 쳤다. 그에게는 사과받을 이유가 단 한 개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웃으며 말했다. 전하가 나아가기로 정했다면, 함께 가겠다고.

  그러던 실뱅이 정신을 차린 것은 선생님이 말을 걸었을 때였다.

 

  “정신이 다른 데 있는 것 같아.”

  “깜짝이야. 언제부터 거기 계셨어요?”

  “디미트리랑 얘기하고 방금 나오는 길인데.”

 

  아, 기사실에서 디미트리랑 얘기하던 사람이 선생님이었구나.

  반쯤 넋을 놓고 있었던 실뱅은 하하 웃음을 흘렸다. 온종일 무의식적으로 디미트리를 쫓았던 모양이었다.

 

  “디미트리가 걱정되나?”

 

  언젠가의 겨울날이 떠올랐다. 실뱅은 깔끔하게 고개를 저었다. 언제나 모든 전투 때마다 하는 모두의 생사에 대한 걱정을 제외하면, 당장은 디미트리를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사실, 그 녀석이 한 짓을 싹 다, 말끔히 잊으려는 생각은 없어요. 근데 전하가 자신의 죄니 과거니 뭐니를 마주하며 앞으로 나아가겠다면…… , 거기에 함께하지 않을 이유는 없지 않을까~ 싶어서요.”

 

  풋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만, 선생님은 그저 실뱅을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아니, , 이래 봬도 꼬맹이 때부터 친구였으니까요.”

 

  너무 뜬금없는 소리를 했나 싶어 한 마디를 덧붙였지만 아무래도 선생님은 그런 설명을 기대한 게 아닌 듯했다. 어깨를 으쓱한 선생님이 또다시 다과회를 청해왔다. 거절할까 하는 고민은 아주 짧았다. 고개를 끄덕이니 선생님이 앞장섰다. 실뱅은 그 뒤를 말없이 쫓아 걸었다.

  이번에도 차는 베르가모트 티였다. 메르세데스가 나눠준 게 있다며 내놓은 과자도 먹음직스러웠다. 하지만 어쩐지 찻잔에 손이 가지 않았다.

 

  “이번에는 뭡니까?”

  “디미트리는 괜찮을 거야.”

  “, , 그건 다행인데요……

  “실뱅은 괜찮아?”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 움츠린 실뱅은 그때까지 억지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찻잔에서 눈을 뗐다. 보석이라도 박아놓은 듯 광채가 어린 눈으로, 선생님은 곧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목이 탔다.

 

  “안 괜찮다고 하면요?”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거야.”

 

  정말 이상한 사람.

  선생님의 말에는 겹겹이 둘러놓은 벽을 단숨에 무너뜨리는 힘이 있었다. 절대로 이야기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마저 무심코 쏟아버리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새삼스럽게, 그래서 이 사람에게 마음을 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내가 증오스럽습니다.”

 

  고개를 푹 숙였다. 찻잔에 자신의 얼굴이 비쳐 보였다. 찡그린 미간, 텅 빈 듯한 눈동자, 꾹 깨문 입술이 늘 보던 그것이었다.

 

  “꼬맹이 때부터 친구였는데……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말을 걸지도 못했고, 하다못해 옆에 있어 주지도 못했습니다. 그래놓고 선생님한테 떠넘기듯이……

  “실뱅이 말하지 않았더라도 난 디미트리에게 갔을 거야.”

  “, 압니다. 당신은 그런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날 용서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 녀석은 내가 더 오래 봤으니 장담할 수 있어요, 원래 그런 애가 아니라는 건요. 그런데 난…… 나는……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생각하는 것과 말로 뱉어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실뱅은 겨우 찻잔을 손에 쥐었다. 어릴 적과 똑같은 향을 맡고, 똑같은 맛을 느꼈다. 사소하지만 눈물 나도록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무서웠습니다. 내가 아는 전하가 아니라서, 그때의 전하를 마주 보는 게 두려웠습니다. 오 년 만에 돌아왔는데, 내 옆에 디미트리가 돌아왔는데도 그 녀석을 영영 잃어버릴 것만 같아서요.”

 

  무서웠다. 실뱅은 진심으로 그렇게 느꼈다. 영영 잃어버린 사람을 그리워하는 건 아픈 일이었다. 하지만 옆에 있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건 수백, 수천 배로 괴롭고 아픈 일이었다.

 

  “그게 변명이 될 수 없는 것도 압니다. 여러 사람이 디미트리에게 손 내밀어준 것도 알아요. 그런데 나는, 그 녀석의 제일 오래된 친구라는 나는, 그래도 형이었던 나는……

 

  목이 메었다. 찻잔 위로 어린 시절의 디미트리가 겹쳐 보였다. 해맑게 웃으면서 손을 내밀던 모습, 펠릭스랑 싸웠는데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울먹거리던 모습, 검을 부러뜨리고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달려왔던 모습, 그런 것들이 뒤섞였다.

  믿고 의지해줬는데, 네게 정말로 도움이 필요할 때 난 뭘 해줬지?

 

  “여기 있잖아.”

 

  고개를 들었다. 베르가모트 향만큼이나 은은한 미소가 보였다.

 

  “실뱅은 계속 디미트리의 옆에 있어. 아까도 그랬고.”

  “하지만……

  “지금까지 못 해줬다고 생각하면 앞으로 해. 디미트리에겐 앞으로도 친구가 필요할 거야. 오래된 친구라면 더 믿고 의지할 수 있겠지.”

 

  눈물이 툭 흘렀다. 코를 찡그리며 손가락으로 대충 볼을 훑었다. 선생님이 말하면 어쩐지 모든 게 다 쉬워 보였다. 지금까지 실뱅을 괴롭히던 모든 올가미가 순식간에 풀어진 듯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마음도 읽을 줄 아십니까?”

  “그런 능력까지는 없는데.”

 

  차를 한 모금 들이키고 심호흡을 했다. 한결 가벼운 기분이었다. 단숨에 바뀔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기엔 용기 내지 못하고 살아온 시간이 너무나도 길었다. 하지만 그에겐 함께 있어 줄 사람이 있었다. 디미트리의 옆에 자신이 있듯이, 그의 옆에도.

 

  “나는 변할 수 있을까요?”

  “그게 실뱅이 바라는 미래라면.”

 

  문득 실뱅은 이 사람이 자신의 선생님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앞에서 이끌어주고, 필요할 땐 이야기를 들어주고 조언해주었다. 청사자반의 선생님은 지금도 변함없이 선생님이었다. 5년의 공백이 있어도, 지금은 전장에 나서는 기사여도, 편견 없이 함께해주는 선생님이었다.

 

  “고맙습니다.”

 

  실뱅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까지 숙이며 인사를 했다. 몸을 일으켜보니 선생님은 약간 얼이 빠진 듯한 표정이었다.

 

  “우리 대장 돌려줘서요. , 여러 사람의 힘이라는 건 아는데, 선생님이 꾸준히 손 내밀어줬잖아요. 디미트리한테도나한테도.”

  “너희는 내 제자니까.”

  “, 당신은 우리 선생님이죠.”

 

  아니, 사실은 당신이 신이 아닐까.

  실뱅은 웃었다. 간만에 정말 행복해서 나오는 미소였다.

 

  “차 잘 마셨습니다. 바쁘신 분 붙잡으면 안 되니까요. 그리고 선생님 말대로, 앞으로도 디미트리 옆에 있으려면 훈련 좀 더 열심히 해야 할 것 같거든요.”

  “그럼 새 훈련 과정 검토를……

  “잠깐, 사람 잡을 생각이에요?”

 

  선생님의 얼굴에도 미소가 가득했다. 해가 따스하게 내리쬐는 5월이었다.

 

 

 

* * * * * * * * * * * * * * * * * * * *

청사자 루트 타면서 소꿉친구들 사이에

A 지원회화를 보다 보니까

다른 소꿉친구들끼리는 모두가 A까지 있는데

 

어라? 실뱅은 디미트리랑 A 대화가 없네?

 

이게 너무 신경 쓰여서

도대체 왜 실뱅은 디미트리랑은

A를 찍지 않는가 생각하다 보니까

이런 글이 나왔습니다

 

실뱅은 회피형 인간이라고 생각해요

사실은 실뱅도 속이 곪아 있어서

디미트리의 곪은 속을 마주 볼 수 없었던 거라고

그럴 자신이 없었던 거라고

 

그러니까 디미트리가 그 시간을 극복하고

지원 A는 그 이후에 열리니까

그 시간을 함께 마주해주지 못한 실뱅은

A가 없는 게 아닐까 하고....

 

그래도 실뱅은 나아질 거라고 생각해요

왜냐면 후일담이 그렇잖아

발전하는 실뱅이잖아

물론 누구랑 보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아무튼 실뱅도 앞으로 나아갈 거 아니에요

 

선생님 말대로 실뱅은 앞으로

디미트리의 곁에서 늘

믿고 의지해도 되는 친구로, 형으로, 기사로

함께 할 테니까....

 

아 이제 청사자를 마무리 지었으니

금사슴을 하러 가야지.....

 

 

위로가 필요한 새벽

 

- 창월의 장 EP.16 장밋빛 대하 시점

- 흑수리반 학생들 중 베르나데타만 청사자반에 왔습니다

- 전장에서 적군으로 페르디난트를 마주한 다음날 새벽의 이야기입니다

- 사망 소재 주의

 

 

 

  똑, , . 세 번의 노크 뒤로 거의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가 누구냐고 외쳤다. 늘 그렇듯 선생님은 짧게 대답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말이 없었다. 그 대신 우당탕 소리가 요란했다. 당황한 나머지 뭔가 쓰러뜨린 모양이었다.

 

  “선생님…….”

 

  한참 만에야 문이 열렸다. 선생님은 그저 끈기 있게 기다렸을 뿐이었다. 조그맣게 열린 문틈 사이로 베르나데타의 정수리가 보였다.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 탓이었다.

 

  “오실 줄 알았어요. 알아요, 잘못했다는 걸요. 하지만, 하지만 베르는……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그렇지만 그래도……

  “베르나데타. 혼내러 온 게 아니야.”

  “네에?”

 

  번쩍 들어 올린 얼굴이 엉망진창이었다. 이미 한참 전부터 오래도록 울고 있었는지 코가 새빨갰다.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눈물이 턱을 타고 계속 뚝뚝 떨어졌다. 벌겋게 튼 볼을 보니 소매 끝이 짙게 물들어 있으리란 것은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 하지만 베르는 잘못했잖아요. , , 전장에 나가서 석상처럼 굳어버리다니 말도 안 되는데 어쩔 수가 없었어요, 선생님. 그게요, 제가 디미트리 씨 말대로 얼굴을 안 보면 된다고 계속 생각을 했거든요? 근데요, 그게 제 맘대로 안 되는 거예요. 왜냐면…… 왜냐면…….”

 

  결국 끝까지 말을 뱉어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무너져 내리는 베르나데타를 붙잡았다. 선생님은 베르나데타의 등을 도닥이며 침대에 걸터앉게 도와주었다. 엉엉 소리 내서 우느라 사라져버린 뒷말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페르디난트 폰 에기르는 기개 높은 귀족이다. 아니, 귀족이었다. 자신이 귀족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에 걸맞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학생이었다. 그리고 아마, 분명 그만큼 훌륭한 귀족이 되었을 터였다. 학생 시절부터 훈련 시간에 제 이름을 크게 외치며 공적을 세우기를 희망하던 이였다.

  그래서 선생님은 그 자신감에 찬 목소리를 듣자마자 지시를 내렸다. 전진 중이던 애쉬의 부대를 세우고 뒤따르던 베르나데타의 부대와 합류하도록 했다. 지시는 빠르고 정확했지만,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는 훨씬 더 빠르게 베르나데타에게 닿았다. 얼어붙어 꼼짝도 못 하고 있는 베르나데타를 대신해 부대를 지휘한 것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애쉬였다.

 

  “제가 죄송해요. 감히 제가 여기에 와서, 제가…… 제국 출신인 베르가 분수도 모르고 선생님을 따라오는 바람에 전장을 엉망으로 만들 뻔……

  “네가 제국에서 태어났다는 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아. 마찬가지로 제국인 친구를 가진 것도 아무 잘못이 아니야.”

  “하지만…… 하지만 우리는…….”

 

  하지만 우리는 적이 되어 서로를 죽이고 있잖아요.

  선생님은 다시 말이 없었다. 굳이 이것이 전쟁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었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에는 큰 간극이 있는 법이었다. 몇 번을 되새기고 스스로 납득시켜도 현실로 다가오는 순간, 그런 노력은 모두 수포로 되기 일쑤다. 제랄트에게 익히 들어온 말이었다.

  무심코 올라오는 손에 손수건을 쥐여주며, 선생님은 계속 베르나데타의 등을 토닥였다.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낸 베르나데타가 깊은 한숨을 뱉어냈다. 겨우 울음이 잦아들었는지, 연신 들썩이던 어깨가 조용했다.

 

  “선생님. 저요, 집을 나오면서 이미 각오했거든요. 에델가르트 씨와 싸우게 될 거라는 거 말이에요. 어차피 아버지도 칩거 생활 중이시고, 전 청사자반으로 옮기면서 에델가르트 씨와 자연스럽게 멀어졌으니까…… 집을 안 나왔어도 그랬을지 모르고요. 그래서 괜찮을 줄 알았어요.”

 

  덤덤하게 꺼내놓는 속마음에 선생님은 고개만 끄덕였다. 손수건을 꼭 쥔 채 무릎 위에 놓여 있는 베르나데타의 손처럼, 선생님의 손도 깍지를 낀 채 가지런히 무릎 위에 놓여 있었다. 꼭 무언가를 바라듯, 기도하는 손 같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데요, 저는…… 저는 진짜 각오가 된 게 아니었나 봐요. 막상 거기서 페르디난트 씨를 보니까…… 신기한 게요, 생각보다 되게 멀리 있었는데도,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도 페르디난트 씨인 걸 알겠더라고요. 그 상황에서 저도 모르게 반가움을 느꼈어요. 그때 얼어붙었어요. 페르디난트 씨가 적이라는 것도 거의 동시에 깨달았거든요. 혼란스러웠어요.”

  “당연한 일이야.”

  “하지만 그러면 안 되잖아요.”

 

  방에 찾아온 뒤로 두 번째로 눈을 마주치는 순간이었다. 베르나데타는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선생님은 잠시 말을 고르듯 심호흡을 했다.

 

  “꼭 한 가지로 정의할 필요는 없지. 페르디난트는 적이기도 했지만, 베르나데타의 친구였잖아. 그러니까 반갑게 느껴지는 게 당연해.”

 

  뻐끔뻐끔, 몇 번을 열렸다 닫혔다 하던 작은 입에서 새된 신음이 흘러나왔다. 표정이 다시 일그러지면서 겨우 잦아든 눈물이 다시 또르르 흘러내렸다. 도피처를 찾듯 마구 배회하던 시선이 결국 선생님에게로 돌아왔다. 언제나 보아오던 선생님의 눈동자가 새삼 낯설었다. 어쩐지 슬퍼 보이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친구였지만 다른 가치관을 가지면서 반대편에 섰을 뿐이야. 만약 우리가 설득할 수 있다면, 우리 편이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페르디난트 씨는…….”

  “, 페르디난트는 이미 떠났지만, 앞으로 우리는 친구였던 적을 더 많이 만나게 될지도 몰라. 그러니까 각오를 다져야지. 적이 되기 싫으면 설득을 하고, 그래도 상대방이 그 가치관을 고수한다면……

 

  이번에는 선생님도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새벽 달빛만이 비추고 있는 방은 더없이 조용했다.

 

  “살기 위해 상대방과 싸워야지.”

 

  고요함은 예고 없이 깨졌다. 마치 화살이라도 맞은 듯, 희미한 신음과 함께 베르나데타가 숨을 삼켰다. 마디마디가 하얘질 만큼 꽉 쥐고 있던 손이 어느 순간 탁 풀렸다. 손수건으로 얼굴을 꾹꾹 눌러 닦은 베르나데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알고 있었어요.”

  “, 알아.”

  “다 알지만…… 그냥, 속상해서, 아파서요, 그러니까……

  “위로가 필요했던 거지.”

 

  오늘 처음으로 보인 미소였다. 바람이 빠지듯 푸흐, 소리가 났다. 베르나데타의 눈은 여전히 젖어 있었지만 그래도 한결 나아 보였다.

 

  “선생님은 참 이상해요. 베르한테 뭐가 필요한지 어떻게 매번 아시는 거예요?”

  “, 사실 이번엔 나한테도 필요했어. 위로 말이야.”

 

  베르나데타를 마주 보며 선생님도 미소 지었다. 그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던 베르나데타는 기습적으로 선생님을 끌어안았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센 힘으로, 정말 꽉 끌어안았다. 선생님은 미소 지으며 베르나데타의 등을 다시 도닥였다.

 

  “베르 같은 게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필요하면 언제든지 불러주시기예요!”

  “, 고마워. 날 믿고 여기까지 와 줘서.”

 

  유독 길고 긴 새벽이었다.

 

 

 

* * * * * * * * * * * * * * * * * * * *

 

모든 친구들의 모든 지원회화를 열기는 힘드니까

한 루트 진행에 한 명씩 골라서 모든 지원회화를 열자! 가 목표였고

이번엔 디미트리가 목표여서 지원회화에 필요한

동맹 친구들을 포섭하느라 애를 먹었고

그래서 최애인 베르나데타만 간신히 데려왔더니....

 

1회차를 제국 루트로 갔기 때문에

미르딘 대교 전투에 로렌츠가 나오는 건 알았지만

그땐 페르가 우리 반이어서

그 전투에 페르도 나오는 줄은 몰랐어

 

로렌츠까지는 예상 범위였지만

페르가 나오는 순간 진짜로 헉 소리를 냈고

그때까지 앞으로 전진시키고 있던 베르나데타를 세워두고

애쉬를 전진시켰다....

왜 이 전투의 조건은 모든 적장을 잡는 걸까 ㅠ_ㅠ

 

다른 학생들이 나오는 것도 괴롭지만

내가 플레이했던 애가 적으로 나오는 건 더 괴로워

이렇게 괴로울 줄 몰랐어 ㅠㅠㅠㅠ

선생님이 미안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2회차 현재의 우리 반에는

흑수리반 출신이 베르나데타밖에 없기 때문에

베르나데타와 고통을... 나누고자.... 쓰긴 했는데.....

그렇다고 안 아픈 건 아니다... ㅇ<-<

 

3회차에는 어떻게든 애들 다 포섭해오든가 해야지 엉엉엉엉

그땐 흑수리도 청사자도 있는 힘껏 다 데리고 와야하는데

과연 할 수 있을까....

 

일단 2회차부터 끝내고 생각하자 으흐흑

선생님에겐 너희가 모두 행복한 시간선이 필요해... ㅇ<-<

 

 

*베르나데타와 도로테아가 사관학교에서 처음 만나는 이야기

 

 

 

  꿈 한 번 꾸지 않고 이토록 깊게 잠든 것은 오랜만이었다. 늘 크고 작은 불안과 피해망상에 시달렸으니 악몽도 언제나 따라왔다. 한밤중에 비명을 지르며 일어나기 일쑤라 저택 내에 있던 가족이며 시종이며 가릴 것 없이 함께 고통을 받았다. 물론 아버지는 최대한 멀리 떨어진 방으로 침소를 옮겨버렸다. 그 사실을 안 것은 거의 한 달이나 뒤였다.

  아무튼 베르나데타 폰 발리는 기분이 좋았다.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다. 정말 더없이 평화로운 밤이었다. 말로만 듣던 잠이 잘 오는 약을 먹기라도 한 듯…….

  불안이 엄습했다. 어제 뭘 하다 잠들었는지 떠올려보려 했으나 뿌옇기만 했다. 보통은 자수를 놓다가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하면 침대로 향했다. 하지만 자수를 놨던 것 같지는 않고, 책을 읽은 것 같지도 않았다. 저녁 식사를 하긴 했다. 시종이 가져다준 스튜를 대충 다 비웠던 기억이 났다. 그 뒤로 어머니가 차를 가져다주셔서…….

 

  차?

 

  그러고 보니 이 차가 불면증에 좋다느니,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효과가 있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하셨던 것 같았다. 유독 초조해 보이는 어머니를 보며 제가 간밤에 또 비명을 어지간히 질러댄 모양이라고 추측했다.

 

  어라? 나 그 뒤에 일어나지 않았나?

 

  어렴풋하지만 일어나서 뭔가를 먹은 기억이 있었다. 너무도 흐릿한 탓에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 뭘 한 건지, 누구와 있었는지, 어디였는지, 그런 구체적인 부분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답답하기보단 두려웠다.

  여전히 베르나데타는 눈을 뜨지 못했다. 처음엔 평화로웠던 밤을 좀 더 연장하고자 그랬고, 지금은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하기가 무서워서 그랬다. 어쩐지 술렁거리는 가슴이 좋지 않은 예감을 부채질했다. 베르나데타는 대충 손을 휘저어 덮고 있던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몸을 동그랗게 말아서 얼굴을 침대에 묻어버리고 숨을 크게 뱉었다.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베르. 눈 뜨면 매일 보던 그 방에 있을 거야. 당연하지.”

 

  주문이라도 외는 듯이 같은 말을 몇 번이나 중얼거린 뒤에야 베르나데타는 일어날 용기를 쥐어짰다. 제가 놓는 자수의 땀만큼이나 작고 작은 용기였기에, 엎어진 자세에서 팔로 침대를 밀어내며 상체를 일으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눈은 여전히 꾹 감은 채였다.

 

  “셋 하면 눈 뜨자. 하나, 두우우울…… !”

 

  분명히 셋보다는 몇 초가 더 지났겠지만 베르나데타는 눈을 뜨는 데는 성공했다. 너무 놀라서 다시 눈을 감기는 했지만, 어쨌든 떴다가 감은 것이니 성공은 한 셈이었다.

  귓속이 쿵쾅거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아예 머릿속 자체가 울리는 것 같았다. 토할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 머리를 기대고 있던 베개가 말끔했다. 분명 자수를 놓은 탓에 여기저기 꽃도, 나비도, 나무도 있어야 할 텐데 베개에는 아무런 무늬도 없었다. 베르나데타는 양손으로 입을 꾹 틀어막았다.

 

  베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지? 납치? 납치인가요오오오? 아니지, 아니야, 납치라니?! 날 잡아서 뭐에 쓰려고? 문장? 역시 문장 때문에에에? 죽는 거야? 죽는 거구나! 아아, 적어도 내 방에서 죽길 바랐는데!

 

  마구 생각이 튀었다. 그리고 그렇게 튀던 생각은 한참 만에야, 그래도 혹시 어쩌면 아직 자기 방에 있는 걸 수도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찾아냈다. 오히려 거칠 것이 없어진 베르나데타는 덮고 있던 이불을 홱 걷어버리고 눈을 떴다.

  밝았다. 등 뒤에서 햇빛이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끼야아아아아아악!”

 

  그리고 그 사실에 기함했다. 이곳은 베르나데타의 평화로운 안식처가 아니었다.

 

*

 

  도로테아 아르놀트는 뿌듯하게 방을 둘러보았다. 앞으로 제게 소중한 안식처가 되어줄 곳이었다. 사관학교에 입학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되짚을 필요까지도 없었다. 기지개를 한 번 쭉 편 도로테아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젠 한결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제국의 가극단 출신이니 당연히 흑수리반으로 배정됐지만, 가볍게 넘길 만큼 충분히 기분이 좋았다. 같이 수업을 들을 사람들이 귀족이라 해도 무서울 게 없었다. 여태까지 도로테아는 그런 삶을 살아왔다.

 

  “끼야아아아아아악!”

 

  얼마 되지 않는 짐을 정리하던 도로테아가 화들짝 놀라 들고 있던 옷가지를 떨어뜨렸다. 살면서 들어본 것 중에 가장 사실적인 비명이었다. 금방 뒷목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문을 닫아걸고 있어야 할까 고민이 드는데 다시금 비명이 들렸다.

 

  “무슨 일이람?”

 

  도로테아는 그런 소리를 무시할 만큼 냉혈한이 아니었다. 게다가 꽤 가까운 데서 들렸으니 어쩌면 옆방을 쓰는 학생이 낸 소리일 수도 있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도로테아가 씩씩하게 문을 열고 나왔다.

  아무래도 예상한 대로 비명의 주인공은 옆방 학생이 맞는 모양이었다. 이미 여러 사람이 근처로 모여들어 수군거리고 있었다. 여기서 난 소리 맞냐는 둥, 안에서 무슨 일 있는 거냐는 둥 추측하는 말만 가득했다.

 

  “아아아아아아!”

 

  도로테아는 더 참을 수 없었다. 처음 들은 비명이 놀란 소리였다면 지금 것은 아니었다. 좀 더 공포에 사로잡힌 듯, 절규하는 듯한 소리였다. 도로테아는 옆방의 문 앞에 방호벽을 세우듯 둘러선 사람들을 밀어냈다. 그리고 척척 걸어 나가 문을 홱 밀고 들어갔다.

  여자아이 혼자 벽에 박은 머리를 양손으로 감싼 채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 괜찮니?”

 

  도로테아가 말을 걸자 비명이 뚝 그쳤다. 하지만 그게 좋은 신호라고는 할 수 없었다. 부들부들 가늘게 떨던 여자가 정말 눈에 보일 정도로 덜덜 떨기 시작한 탓이었다. 도로테아는 갑자기 말을 걸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먼저 상대방이 먼저 입을 열었다.

 

  “, , , 누구, 누구세요?”

  “난 도로테아 아르놀트라고 해.”

  “, , , 제발 죽이지만 말아주세요오오오오오오!”

  “잠깐, 어째서 얘기가 그렇게 돼?”

 

  하지만 도로테아가 불만을 토로할 시간은 별로 없었다. 그대로 주저앉은 소녀가 연신 도로테아가 있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살려주세요, 저는 별 도움도 안 될 거예요, 저 따위는 쓸 데도 없어요, 저 같은 건 없는 게 나은데, 히익, 죽는군요, 죽는 거군요.

 

  그런 소리를 중얼거리느라 주변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못하는 모양이었다. 도로테아는 섣불리 발을 디뎌서는 안 될 영역에 들어섰다는 걸 감으로 알았다. 무언가가 이 애를 착란 상태에 밀어 넣은 것이었다. 도로테아는 상대와 똑같이 마찬가지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최대한 시선을 맞추려는 시도였지만 여전히 제게 사과를 하는 머리는 바닥에 닿을 듯 한참 낮았다.

 

  “, 너 이름이 뭐야?”

  “제발,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게요오오오!”

  “아니, 이름을…….”

  “베르나데타 폰 발리.”

 

  그 차분한 대답은 문밖에서 나왔다. 시선을 돌린 도로테아와 눈이 마주친 것은 하얗고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여자였다. 구경이라도 난 것처럼 서 있던 사람들은 언제 사라졌는지, 여자의 곁에는 키 큰 남자 한 명만이 서 있었다.

 

  “발리 가문에서 딸을 여기로 보냈단 소식을 들었어. 어머니께서 보내셨다고 했으니 아마 발리 교무경은 몰랐던 거겠지. 지금 상황을 보니 당사자도 몰랐던 모양이네.”

  “세상에.”

 

  정말 입이 떡 벌어지는 설명이었다. 도로테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몰라도, 당사자도 모르게 낯선 곳에 데려다 놓으면 누구라도 정신적으로 착란을 일으킬 법했다.

 

  “베르나데타.”

  “, , ,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저는 아무 도움도…….”

  “괜찮아. 몰라도 돼. 도움을 안 줘도 돼.”

 

  이제 겨우 도로테아의 목소리가 닿는 모양이었다. 바닥을 향해 있던 베르나데타의 고개가 슬그머니 위로 올라왔다. 얼굴이 눈물범벅이었다. 도로테아는 섣불리 손을 뻗는 대신 눈을 맞추었다. 다행히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베르나데타. 여긴 학교야.”

  “, , , 학교? 학교라고요? 베르가 왜요?”

  “그건 나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여기서 베르나데타를 해칠 사람은 아무도 없어.”

  “, 정말인가요?”

 

  방울진 눈물이 투둑투둑 떨어져 바닥에 번졌다. 아까보다는 숨소리가 훨씬 차분했다. 도로테아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여전히 베르나데타의 양손이 머리를 꽉 감싸고 있었다. 가볍게 손목을 잡는 시늉만 하듯 가져다 댔다. 그러자 마법이라도 쓴 것처럼 두 손이 스르륵 내려왔다. 도로테아는 꼭 아이를 칭찬하듯이 그 손을 짧게 도닥였다.

 

  “. 아무도.”

  “, 여긴 베르의 방이, 아닌데요. 제 방이 아니면, , 아니면 싫어요…….”

  “지금부터 여기를 베르나데타의 방으로 만들면 되지.”

  “, , 여기를요? 하지만 아, 아버지가…… …….”

  “당신을 여태까지 괴롭히던 그 누구도 여기선 못 괴롭힐걸. 여신님이 지켜보고 계시는 대수도원이잖아.”

 

  딱히 믿지도 않는 여신을 들먹거린 건 순간적인 기지였다. ‘아버지를 이야기하면서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본 탓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 그럼……

  “. 괜찮아. 무서워할 필요 없어. 무서우면 언제든지 나 불러, 옆방에 있거든.”

  “…… 으아아아아아앙!”

 

  눈물이 터진 베르나데타가 덥석 도로테아를 끌어안았다. 그래도 도로테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겁에 질린 비명보다는 공포에서 벗어나 해방감에 젖은 통곡 소리를 듣는 게 나았다. 도로테아는 작은 등을 토닥였다.

  가르그 마크 사관학교의 다사다난한 첫날이었다.

 

 

 

 

 

 

* * * * * * * * * * * * * * * * * * * *


첫날 자기 방이 아니어서 정줄 놓은 베르를 달래는 건

역시나 도로테아일 것 같고

학교에서 베르를 처음 방 밖으로 데리고 나온 사람도

도로테아일 것 같아  :Q

 

처음엔 에델일까 생각하긴 했는데...

왜냐면 에델도 고통 받던 시기가 있었잖아

근데 역시 도로테아일 것 같아

 

물론 그렇다고 에델은

베르가 구경거리가 되게 놔두진 않았을 것 같아서

구경꾼을 물리친 건 에델이었을 것 같음

 

흑흑 베르나데타 좋아해 ㅠ_ㅠ

사실 선생님은 모든 애들이 다 좋아

 

 

 

 

*내스급 163화 기준의 내용

*170화 언저리까지밖에 아직 안 읽어서... 이후의 내용과 충돌할 수도 있습니다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몸을 일으켰다. 답지 않게 식은땀도 흘린 모양이었다. 더위도 추위도 잘 타지 않는 체질이 되어도 식은땀은 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손바닥으로 대충 얼굴을 쓸어내리며 시계를 보았다. 320. 아직 어둠 속에 은은한 달빛만이 빛날 시간이었다. 밖으로 나가볼까 하다가 그만뒀다. 조금만 신경을 곤두세워도 형이 아무 문제 없이 저 방에서 자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가 있으니까. 다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제야 제대로 숨을 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조금 무서웠는지도 모르겠다. 꿈이었는데. 그저 꿈. 꿈을 꾸는 것 자체가 오랜만이었다. 악몽이라면 더욱. 형이 나온 건 더더욱. 갑자기 마지막 장면이 선명하게 떠올라 섬뜩해졌다. 다시 방 밖으로 신경을 세웠다.

 

  어쩐지 다시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

 

  타고나길 이렇게 태어난 탓에 절망감을 느낀 적은 거의 없었다. 부모님이 나를 밀어냈을 때도 형은 날 사랑했다. 너무 어려서 그랬는지, 아니면 나랑 달리 F급으로 태어난 탓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형은 내게서 어떠한 이상함도 느끼지 못한 모양이었다. 다른 가족과 다르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걸 생각하면 형도 너무 어렸던 게 아닐까 싶지만.

 

  물론 나도 형을 사랑했다. 그래서 멀리했다. 나 때문에 형이 위험해지는 게 싫었다. 하지만 그게 절망할 일은 아니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지. 형을 만나지 못하는 게, 멀리 두어야 하는 게 가슴이 찢어지도록 고통스러웠지만 절망스럽지는 않았다. 어차피 내 손바닥 안이었다. 형이 뭘 하든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내 손으로 놓은 게 아니었다. 애초부터 그럴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

 

  이건 달랐다. 나는 빼앗겼다. 내 손에 있던 형을 빼앗겼다. 놓친 셈이었다. 그 순간엔 절망감밖에 들지 않았다. 타고나길 이렇게 태어났으면서도 형을 지키지 못하고 무력하게 쳐다보고만 있어야 하는 심정. 어쩐지 꼭 겪어본 것만 같아서 더 구역질이 났다. 내가, 내가 지키겠답시고 오만방자하게 손에서 놓은 척을 하는 바람에 놓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답지 않게 눈물이 터졌다. , 사랑하는 내 형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던전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번에는 나를 바쳐서도 형을 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빼앗긴 탓에 그 순간에는 기억하지 못했던 어느 날의 꿈처럼.

 

  많은 걸 바란 게 아니었다. 난 형이 살기를 바랐다. 나 때문에 위험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밀어냈는데, 억지로 만나지 않았는데, 날 미워하도록 내버려뒀는데. 꿋꿋이 버텨왔던 3년이 산산이 조각나 온몸에 박히고 동시에 타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럴 순 없어. 내가 있는 세상에서 형이 사라지다니 절대로 안 돼. 내 옆에 없어도, 날 미워해도 상관없으니까 절대로, 절대로 사라지는 것만은 안 돼.

 

*

 

  어떻게 던전까지 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무엇을 바쳐서라도 형을 구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형을 덮치고 있는 게 무엇인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불태웠다. 번쩍 고개를 들고 날 보는 표정이, 그 미소가 더없이 안심됐다.

 

  결국은 형 앞에선 울지 않겠다는 어린 날의 다짐조차도 깨뜨리고 말았다. 나는 형을 안고 울었다. 형이 살아 있어서, 나를 안아줘서, 여전히 그때와 같은 온기로 내 등을 두드려줘서. 나를 이 세상에 두고 가지 않아서.

 

*

 

  침대에 걸터앉아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았다. 그 꿈을 꾼 게 얼마 전이더라? 형을 세성에 맡겨놓기 전이었을 텐데, 왠지 몇 달도 전의 일만 같았다.

 

  어릴 적에 악몽을 꾸면 형이 꿈은 반대라고 곧잘 말하곤 했다. , 정말 반대였으면 내가 갈가리 찢겨 나갔어야 했겠지만. 다행이다. 꿈이 사실이 되지 않아서. 진심으로.

 

  “유현아, 기다렸어? 먼저 자도 되는데.”

  “팔베개하고 자장가 불러준다며.”

 

  진짜 해줘? 하고 형이 푸시시 웃었다. 어릴 때와 똑같이 형의 팔을 베고 누웠다. 형도 피곤한지 자장가 소리가 웅얼웅얼 뭉개졌다. 그래도 좋았다. , , 규칙적으로 들리는 심장 소리까지 더해져서 한없이 편안했다. 어쩐지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여기서부턴 잡소리.

170화 대충 그 언저리...까지 다 읽으셨다는 전제 하에 안 가리고 얘기하니

혹시라도 안 보신 분이 계시다면 넘어가주세요.

 

 

 

성현제가 예민한 탓에 회귀 전의 자신과 합쳐지지 못했다던데.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유현이도 어쩌면,

어떠한 형태로 회귀 전의 기억이 남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유현이가 유진이를 구하러 온, 회귀 전의 사건이,

그러니까 이 소설의 시작 부분에 있던 사건이

어떠한 형태로 유현이에게 남았을 것 같아서.

 

물론 회귀 전 세계의 유현이는 죽었고

그래서 합쳐지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하얀 새가 시체를 가져간 이상

어떠한 형태로 남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어.

 

그래서 그게 기억은 아니고 꿈으로 남았다면,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리고 유현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 mm)

유진이도 유진이지만

스무살짜리가, 아니지 3년 전이면 열일곱살짜리가

뭘 그렇게 대단하게 잘 안다고

형 위험해질까 봐 떨어뜨려 놓았을까 싶은 거야.

 

애기 때부터 부모가 저를 멀리하는 걸 알고 있었다면

유현이에게 세상은 곧 한유진이었을 텐데

(아기들의 세상이 부모로 한정되는 걸 생각하면...)

얼마나 피눈물 흘리면서 멀리했겠어.

 

회귀 전 유현이가 그렇게 부리나케 던전으로 달려와서

유진이를 살려놓은 건 역시

형이 내 곁에 없는 것도, 날 미워하는 것도 다 괜찮지만

형이 내 세상에서 사라지는 건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 아닐까...

 

유현이에겐 형이 있다는 자체가 세상이 존재하는 것과 같았을 테니까.

자신이 사랑받는 존재라는 걸 알려준 사람이잖아.

다른 모든 이유를 떠나서 그냥 존재 자체로 자신을 사랑해준 사람이니까.

 

그래서 성현제 말대로 유현이는 영원히 유진이에게 동생일 수밖에 없겠지만

뭐, 어쩌겠어.

아이템과 스킬이라는 효율을 추구하는 관계보다는

맹목적이긴 해도 한유진도 한유현도 절대 끊을 수 없는

혈연관계가 더 낫지 않겠니, 유현아?

 

 

아무튼 예림이까지 셋이서 알콩달콩 예쁘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

유진이도 유현이도 예림이도 각자 결혼해서 가족이 더 늘어도 좋고

그냥 셋이서 피스랑 블루랑 삐약이랑 (이하생략) 데리고 계속 평생 살아도 좋고.

아무튼 행복하기만 해....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