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
귀를 간질이는 부드러운 목소리. 선룸의 입구로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굴곡진 올리브색 머리카락이 하나로 단정하게 묶여 어깨 한 쪽으로 내려와 있다. 슌소 상의 눈은 머리카락과 같은 올리브색이다. 얼마 전, 나를 모델로 그림을 그렸을 때에 처음 알게 된 사실.
“왜 그러고 있어?”
“네?”
“시계. 귀신이라도 나온 것처럼 쳐다보고 있었잖아.”
들어오면서 날 부른 게 아니었던 걸까. 넋을 놓은 모습을 들킨 것 같아 괜히 부끄러워진다. 입을 오물거리다 결국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고개를 돌렸다.
시계.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물건처럼 낯선 시선으로 시계의 문자판을 본다. 분명 청소를 하려고 이 앞에 섰던 것 같은데. 천천히, 그리고 동시에 빠르게 움직이는 시계바늘에서 무언가가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내 등을 따뜻하게 만드는 햇살 말고는 명확한 게 아무 것도 없다.
“진짜 괜찮은 거 맞아?”
가까워. 작게 부르르 떨리는 걸 알아차렸을까. 긴장으로 몸이 뻣뻣해져 돌아보기가 쉽지 않다. 반사적으로 거리를 두려는 내 시도는 금방 의미를 잃는다. 내가 비틀거리는 걸로 오해했는지 슌소 상이 양 손으로 내 어깨를 단단히 붙들었다. 팔이, 뜨겁다.
“괘, 괜찮아요. 그냥 잠시 생각을…….”
“무슨 생각?”
“그게…….”
대답할 수 없다. 마구 튀는 내 시선을 일일이 쫓아와 맞추는 슌소 상의 눈이 두렵다. 올리브색 눈동자가 내게서 평정심을 빼앗아 간다. 이대로는 모든 걸 놓아버리고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서 애꿎은 슌소 상의 교복단추만 노려본다.
“혹시 뭔가 기억났어?”
몸이 절로 움츠러드는 걸 막지 못한다. 결국 눈을 마주친다. 내 의지를 거스른 눈물이 터져 나온다.
“모, 모르겠어요. 기억난 것 같은데 금방 사라져서…….”
내 시야가 흐릿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정말로 표정이 미묘한 걸까. 슌소 상이 왜 그런 표정인지 알 수 없다. 평소에도 슌소 상의 마음을 제대로 파악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지금은 더 혼란스럽다. 눈물이 더 솟는다. 내 안의 빗장을 열까봐 두렵게 했던 방금 전의 눈빛보다, 지금의 읽기 어려운 표정이 수천 배 두렵다.
“시계를 보고 생각난 거야?”
“그것도 모르겠어요. 그냥, 그게…….”
너무 슬퍼요.
슌소 상이 내 양 손을 붙들고 조금씩 발을 옮겼다. 아기에게 걸음마를 가르치듯, 조심스러운 동작에 맞춰 부들거리는 다리를 움직인다. 슌소 상의 한 걸음. 그리고 내 한 걸음. 우리 두 사람의 사이는 더 좁아지지도, 더 넓어지지도 않는다. 소파에 앉기까지 영겁의 시간이 흐른다. 눈물은 멈추지 않고 슌소 상의 손도 내 손을 떠나지 않는다.
“뭔데. 숨기지 마.”
시간이 없어요.
뭘 떠올렸는지는 모호하지만 그 전에 했던 ‘어떤’ 생각 때문에 감정이 요동친다. 시간이 조금만 천천히 흘러갔으면. 돌아가야 하는데, 분명히 내가 살던 시대로 돌아가야만 하는데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 마음이 조급하다. 달은 점점 차오르고, 나는 혼란스런 마음만 가득 안은 채 어떤 것과도 맞부딪치지 않는다. 나는 용기가 없다. 작은 한숨 소리에 다시 어깨가 움츠러든다. 눈을 마주칠 수 없다. 이런 내 불안함이 슌소 상에게 닿지 않길 바란다.
어쩌다 나는 당신에게 이렇게 빠지고 만 걸까요. 왜 나는 돌아가야만 할까요.
슌소 상의 커다란 손이 머리를 쓰다듬는다. 계속 유지되던 거리가 좁혀진다. 그리고 조용히, 그 손이 내 등을 토닥인다. 부드럽게, 상냥하게. 선룸을 비추는 햇살만큼이나 따뜻하게.
나는 울고 슌소 상은 말이 없다. 눈물방울이 내 유카타와 슌소 상의 교복 바지에 번져간다.
“너 말이야.”
겨우 호흡이 진정되는 가운데 슌소 상의 목소리가 귀를 울린다. 목소리를 내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한다. 하지만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다. 목소리를 높여 네, 하고 대답하는 대신 조금 몸을 일으켜 눈을 마주친다. 올리브색 눈동자는 여전히 나를 향해 있다. 아까만큼 두렵지는 않다.
“또 기억도 안 돌아왔으면서 떠나야한다느니 생각한 거 아냐? 금방 불안해져서 울 거면 왜 그런 생각을 해? 애도 아니고.”
어느새 꺼내든 손수건이 부드럽게 내 볼을 쓸어내린다.
“여기 있어.”
“네?”
올리브색 눈동자는 참으로 흔들림 없이, 곱다.
“그냥 여기 있어. 불안해하지 말고, 울지 말고 이대로 있어. 그냥 내…….”
작은 입이 잠시 오므라들었다 천천히 열린다.
“어쨌든. 쓸데없는 생각 말고.”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아아. 끄덕이면 안 되는 거였는데. 이젠 정말로 시간이 없는데. 함께 할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만 있는데, 어째서 이렇게 무책임하게 고개를 끄덕여버리고 만 걸까.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슌소 상의 교복바지와 내 유카타가 금세, 경계를 잃어버린다.
“너. 이 말에 솔직하게 답한 거 지금이 처음인 거 알지?”
고개를 끄덕인 게 답이 될 수 있다면 그렇지 않을까. 내 입술은, 혀는, 이는, 여전히 어떤 대답도 하지 않기 위해 노력 중이지만 제어가 잘 되지 않는다. 하지만 ‘솔직하게 답한’ 것을 부정할 수도 없다. 여기를, 메이지 시대를 떠나고 싶지 않다. 그냥 슌소 상과…….
“하아. 하여간 손 많이 가는 녀석.”
내 손을 잡아당기는 온기에 고개를 든다. 슌소 상은 어느새 일어서 있다.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빛은 눈부시게 빛나서, 슌소 상이 태양처럼 보인다.
“일어나. 산책이라도 하면서 숨 좀 돌리는 게 낫지 않겠어?”
힘을 주어 손을 맞잡고 일어선다. 다리는 이제 후들거리지 않는다.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참아왔던 소리로 네, 하고 대답한다. 슌소 상이 웃는다. 나도 웃는다.
얼마 남지 않은 이 시간 안에 내가 슌소 상을 좋아한다고 정말로 솔직하게 말할 용기가 생기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면서.
(2016. 0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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