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 벨레트 x 베르나데타

- 2부의 언젠가

- 레트베르 강화 월간 넷째 주: 약속

 

 

 후두둑 물이 떨어지는 소리에 가쁜 숨소리가 섞였다. 등에 닿은 커다란 바위의 냉기가 그대로 몸으로 파고드는 것 같았다. 마구 쏟아지는 비 때문에 체온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베르나데타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머리를 흔들었다. 앞머리를 타고 내리던 빗방울을 털어내고,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어 상황을 살폈다. 비로 생긴 안개 때문에 시야도 명확히 확보되지 않았다.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진작 전투가 마무리되었어야 할 시간이지만 베르나데타의 부대는 여전히 고전 중이었다. 처음에는 작전대로 상황이 흘러갔고, 베르나데타의 부대가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한두 방울 비가 떨어지더니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자 궁수들은 위기에 빠졌다. 베르나데타는 급히 병사들을 퇴각시켰다. 빗소리에 상대의 소리도 묻혀서 섣불리 접근할 수 없었다. 주변 지형지물을 이용해 병사들을 소규모로 조금씩 숨겨뒀다. 이제 병사들은 손에 활이 아니라 예비로 챙겼던 단검을 들고 있었다.

 

 베르나데타는 숨을 가다듬었다. 최대한 숨을 죽이고 있다가 상대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팔을 잡아당겨 목에 칼을 꽂는다. 몇 번이고 연습했던 것을 머릿속에 그렸다. 베르나데타는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살아남아야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기로 약속한 사람이 있었다. 그가 죽지 않기로 약속했으니, 자신 또한 살아남아야 했다.
 바위 옆에서 훅 튀어나온 팔이 같은 군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베르나데타는 기민하게 몸을 움직였다. 연습했던 대로, 머릿속에 그렸던 대로 홱 상대를 잡아당겨 목에 칼을 꽂았다. 상대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지는 것이 보였다. 입술을 질끈 깨물며 베르나데타는 칼을 쑥 뽑았다. 피가 마구 쏟아져 나왔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얼굴에 튄 피는 금세 비에 씻겨 내려갔다. 

 

 이겨서 웃기로 했으니까. 이 손이 피에 젖더라도 울지 않을 거야.

 

 이때부터는 어떻게 전투를 치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빗속에서는 상대의 군복을 구분하는 것이 고작이었던지라 다른 아군 병사들이 어떻게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가고 있는지까지 파악하기 쉽지 않다. 눈앞의 적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자꾸 아군을 찾고자 시선을 돌리게 됐다.

 

 한순간이라도 방심하면 목숨을 잃게 된다. 알고 있던 사실이었으나, 몸소 체험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아군 병사가 공격을 제대로 피하지 못할 것 같아 홱 뒤로 잡아당기며 대신 뛰어든 것까지는 좋았다. 흐려진 시야 탓에 아군 병사 오른편으로 또 다른 적병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자신의 목을 노리고 훅 들어온 검이 궂은 날씨 속에서도 서슬 퍼렇게 빛났다. 대처할 시간이 부족했다.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올렸다. 팔과 목, 어느 쪽이든 뚫릴 것이 분명했기에 고통을 참고자 눈을 질끈 감았다.
 시끄러운 빗소리를 뚫고도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렸다. 통증은 없었다. 베르나데타는 번쩍 눈을 떴다. 회색빛 망토가 눈앞에 나부끼고 있었다. 제 눈을 흐리게 하는 것이 빗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선생님!”

 “시야가 확보되지 않으니 접근전을 할 때는 눈앞의 적에 집중하도록. 아군을 도우려다가 함께 죽을 수도 있어.”

 

 벨레트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검을 휘둘렀다. 천제의 검이 덜그럭 소리를 내며 쭉 늘어나 주변의 적을 베어 넘겼다.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 빗물을 닦아낸 베르나데타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아군 병사가 배로 늘어난 상태였다.
 이때부터 다시 아군이 우위를 차지했다. 벨레트의 등장에 겁을 먹은 적병이 지휘 통제에서 벗어나 마구 도망치기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벨레트의 부대가 합류하면서 병력이 두 배가 되어 압도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궂은 날씨는 나아질 기미가 없었기에, 적병이 후퇴하는 것을 확인한 그들은 전투를 여기서 멈추기로 했다. 쫓아가서 모두 해치우기엔 아군의 체력도 많이 떨어진 상황이었다.

 

 “모두 거점으로 복귀한다.”

 

 벨레트의 그 말이 반가운 듯, 빗소리에 잠시 병사들의 대화 소리가 뒤섞였다. 다친 병사들도 꽤 있었지만, 이런 폭우에 부상자가 이만하길 다행이었다. 베르나데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선생님, 와 주셔서 감사해요.”
 “혼자 보내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베르나데타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언젠가 대화를 나누다 그런 소리를 했던 기억은 있었다. 벨레트가 농담처럼 모르는 마을에 혼자 가보란 이야기를 해서 빽 소리를 치다가 그러지 말라는 약속을 받아낸 적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전쟁이란 늘 마음대로 되는 법이 아니기에, 이번처럼 베르나데타의 부대가 따로 전투를 수행해야 할 때도 있었다. 벨레트의 부대도 이번에 다른 작전을 수행해야 했다. 그런데도 전투가 끝나자마자 원군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날씨가 나빠지지 않았으면 아마 내가 오지 않았어도 잘 끝냈겠지만.”

 “베, 베르를 믿으시는 거예요?”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볼이 홧홧한 게 부끄러워서인지, 비에 젖은 몸에서 열이 오르고 있어서인지 알 수 없었다. 베르나데타의 망설이는 듯한 질문에 벨레트는 살짝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살아남기로 약속했잖아. 어떻게든 살아남을 거라 생각했어.”
 “선생님!”

 

 결국 참았던 눈물이 왈칵 터졌다. 가뜩이나 시야가 흐린데 눈물 때문에 더더욱 앞이 보이지 않았다.

 

 “아, 앞으로도 그 약속, 지켜 주셔야 해요! 주, 죽지 않기로 한 것도요!”
 “물론이다.”

 

 벨레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뜻, 벨레트가 미소를 지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비에 젖어 얼굴에 착 달라붙은 옥빛 머리카락은 여전히 빛나는 것 같았다. 베르나데타는 코를 훌쩍이며 생각했다. 이 전쟁이 끝나면 당신을 사랑한다 고백하겠노라고.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지원 A에 나오는 약속을 인용해 보았습니다

혼자 보내지 않기로 한 약속 외에도

살아남자는 약속도 이미 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왜냐면 이 세계관은 레트베르가 이어지는 세계관이니까(?)

어느 루트든 레트베르가 이어진다면 고백하기 전에

둘 다 살아남자는 약속부터 했을 것 같아요

이런 고비를 넘기면서 두 사람에겐 전우애 겸 사랑이 싹트는 거겠죠....

결혼해라 얼른

 

 

+ Recent posts